지금은 사랑이란 게
물가에서 기다리는 마음같이 대답 후에 태어난 질문같이 끓다 보니 넘쳐흐른 찻물같이 한계에서 마지막 한 번 더 올리는 턱걸이같이 화가를 꿈꾸는 핵물리학자같이 러시아어로 쓰인 터키어 사전같이 얼음 위의 불같이 불 속의 얼음같이 무엇과도 같지 않지만 모든 것과 같아 보이는 무한개의 같이 속에서, 같이,
그녀는 열다섯이었고 그는 매일 아침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_ 제임스 설터, 「스타의 눈」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불어 하염없어
뒷산 솔밭을 묻고 넘쳐 오는 안개
모란꽃 뚝뚝 떨어지는 우리 집 뜨락까지 내려.
설령 당신이 이제
우산을 접으며 방긋 웃고 사립을 들어서기로
내 그리 마음 설레이지 않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기다림에 이렇듯 버릇 되어 살므로.
그리하여 예사로운 이웃처럼 둘이 앉아
시절 이야기 같은 것
예사로이 웃으며 주고받을 수 있으리.
이미 허구한 세월을
내 안에 당신과 곁하여 살므로.
모란은 둑뚝 정녕 두견처럼 울며 떨어지고
생각은 종일을 봄비와 더불어 하염없어
이제 하마 사립을 들어오는 옷자락이 보인다.
_ 유치환, <모란꽃 이우는 날> 전문
--- 읽은 ---
164. 체공녀 강주룡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
2018년 발간된 소설집 『서로의 나라에서』에 작품을 실은 8명의 ‘젊은 작가’들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색을 뽐내려 했을 거라 추측한다. 다른 작가랑 한 책에 실린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syo는 사실 정영수의 이름을 보고 그 책을 읽었지만, 실제로 눈에 띈 건 우다영과 박서련이었다. 특히 우다영은 압도적이었지……. 그리고 박서련을 평하며 이렇게 기록해놨다. “박서련의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가 비록 이 소설집 전체에서 가장 좋은 작품은 아니었지만, 만일 이 여덟 사람 각자의 단편집이 새로 출간되고 그 중 딱 한 권만 읽을 수 있다면, syo는 고민 없이 박서련의 책을 고를 것이다.” 그게 2018년 7월이었고, 그 이후 바로 『체공녀 강주룡』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의 왕관을 쓰고 세상에 등장했다. 알라딘이 그 작품으로 쾅쾅 터지진 않았으나 꽤나 들썩들썩 했던 기억.
노력과 재능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도 억지로 함유율을 따져보자면 작가 박서련은 재능 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평범하게 읽히지 않도록 이야기를 주조하는 일은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다면 재능만 가지고도 가능하고, 대체로는 재능과 그 뒤를 받치는 노력으로 이루어내지만, 재능 없는 이가 순전한 노력만 가지고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작가가 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가르는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오래도록 죽지 않고 살아남은 분단선이다. 박서련이 이야기를 하며 살기를 선택해준 것은 syo에게 너무나도 좋은 일이다. syo에게만 그렇겠는가.
165.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레몬심리 지음 / 박영란 옮김 / 갤리온 / 2020
그러니까 이건 강대국의 군비경쟁 같은 일이다. 핵무기가 완전히 사라진 세상이 지금보다 무조건 더 좋은 세상이라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동의한다고 해서 저놈들보다 먼저 내 핵무기를 없애는 나라는 없다. 저놈들을 어떻게 믿어. 저 높은 곳에 어떤 절대자가 있어, 보석 다섯 개 띵띵 박힌 스뎅 장갑을 끼고 나타나 손가락을 탁 튕겨서 일시에 모든 핵무기를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 이상, 핵무기가 사라지길 바라마지않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구에서 핵무기가 사라질 일은 절대로 없다. 마찬가지다. 기를 쓰고 겨우 내 기분이 내 태도가 되지 않게 만들어놨는데 지 기분을 지 태도로 드러내는 놈들이 주변에 득시글거리면 내 기분이 나빠서 마침내 내 태도가 나빠지는 것이다……. 결국 장갑이 필요하다. 아, 노스형. 타노스형…….
166. 프로이트 콤플렉스
파멜라 투르슈웰 지음 / 강희원 옮김 / 앨피 / 2010
프로이트 개론서는 다른 철학자들 것과는 다른 아주 독창적인 재미 포인트가 있다. 대체로 어떤 철학자의 입문서를 쓰는 저자는 그 철학자에 대해 옹호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고, 경우에 따라서 죽은 철학자 대신 자기가 모든 비판에 대해 전방위적 쉴드를 친다. 제일 심한 건, 이 철학이 겁나 훌륭하긴 하지만 그래도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음을 인정하는 척하면서도 이어지는 서술을 보면 실상 그렇지 않은 경우 되시겠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경우는 개론서 저자들도 프로이트를 잘 깐다! 그런데 그 깜 포인트가 조금씩 달라서 재밌다. 거칠게 예를 들면, 1번 저자는 A를 까고 B~Z를 옹호하는데, 2번 저자는 B를 까고 A, C~Z를 옹호한다. 그런 식으로 26명 저자의 책을 읽으면, A~Z까지 모든 포인트는 한두 번쯤 까였지만 동시에 몇 번쯤 옹호되는 희한한 현상을 맞이한다. 그런 말이 있다. 어떤 철학자를 까기 위해서는 일단 그 철학자를 읽어야 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정말 맛집이 아닐 수 없다. 요는, 프로이트 개론서는 이것저것 읽어도 남는다는 것. 그리고 후에 프로이트를 직접 읽고 우리도 저 아사리판에 동참합시다.
--- 읽는 ---
소설가의 공부 / 루이스 라무르
사람, 장소, 환대 / 김현경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쓰
칸트 철학에의 초대 / 한자경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 페르난두 페소아
피의 꽃잎들 / 응구기 와 시옹오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 마이 티 응우옌 킴
여자 – 공부하는 여자 / 민혜영
노멀 피플 / 샐리 루니
나는 왜 불온한가 / 김규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