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문제집

 

 

1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선명하게 쓰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글을 갖고 싶다. 하지만 그건 능력보다는 태도에 가까워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처럼 쉽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너무 쉬워서 말을 않는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모르는 것의 경계를 슬쩍 타 넘는 습관이 생긴 거라면 많이 읽어서 고치면 되겠지만,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몰라서 이러는 거라면 길고 고된 길이 기다리고 있겠다.

 

 

 

2

 

먹고 사는 일과 관련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공부를 드디어 시작했다. 며칠 되지 않았다. 혼자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느끼게 되고, 여럿이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깨닫게 된다. 읽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3

 

검은 책을 들고 있으면 어쩐지 지성이 깊어 보이고 검은 옷을 입으면 사람이 날씬해 보여서 좋지만 검은 컵을 사용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콜라도 한 잔 했나, 그러고 한 삼십 분쯤 뒀다가 보면 꼭 컵 주둥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들이 도포되어 있다. 빙 둘러가며 꼼꼼히도 발라놔서 다음 한 잔은 어디에 입을 대고 마셔야 할지 도무지 각이 안 선다. 나라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불결한 인간이었나 싶다. 이제 키스 같은 거 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게 생겼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4

 

갑자기 겨울이다. 당국은 방역체계의 수위를 높일 예정이다. 바탕화면은 5분 단위로 바뀌면서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보여준다.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곳으로 쉽게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오늘은 구청에서 점심을 먹는다. 전 직장에 방문하는 기분은 오묘하다. 너희는 그 안에서 오늘도 힘든 일상을 보내겠지만, 그것조차 나한테는 좋았던 추억일 뿐이야- 하는 마음이랄까. 제대 후 부대에 놀러간 것도 세 번쯤 된다. 애기들이 작대기 하나씩 늘어서 어른인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귀여웠다. 관두기 전에 서고에 잔뜩 쌓아놓았던 마스크들, 이제는 다 뿌려졌는지 보고 오겠구나.

 

 

 

--- 읽은 ---

 


217. 원자핵에서 핵무기까지

다다 쇼 지음 / 이지호 옮김 / 정완상 감수 / 한즈미디어 / 2019

 

핵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복잡할 것 같지만 원리 자체는 간단한 모양이다. 그저 그 원리를 확인하거나 최적의 이용 상태를 찾아내기 위한 실험이 위험하고 비싸서 그렇지. 그러니까 이 귀여운 책을 통해 그 원리를 차곡차곡 쉽게 이해했다고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개인이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겠다. , 이참에 소소하게 누클리어봠 하나 만들어보려고 그랬는데. 까비.

 

 

 


218.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유은정 지음 / 성안당 / 2020

 

읽은 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읽을 책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장르가 있다. 내 마음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일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고집쟁이들은 심리학책 보는 게 아니다. 많이는 아니어도 잊을 만하면 읽어주는 장르인데도, 덕 봤다 싶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멘탈이 그만큼 건강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건 참 뜻밖인데?

 

 


 

219.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존 리 지음 / 지식노마드 / 2020

 

부동산이니 뭐니 깝치지 말고 연금저축펀드 들고 주식이나 하라는 이야기다.

 

 

 

--- 읽는 ---

진실에 복무하다 / 권태선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 정승규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물학지식 50 / J. V. 샤마리

쇼펜하우어 평전 / 헬런 짐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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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20-11-23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아직 시작한 게 아니었군요 ..... 홧팅..! 그나저나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어쩔 ...ㅋㅋ

syo 2020-11-24 23:28   좋아요 1 | URL
시작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동안은 양적으로 ˝시작했습니다!˝ 라고 할 만한 정도가 아니었어서,
이제는 그 정도가 되었습니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라는 것은 하겠다는 뜻입니다!
하겠어요. 후후.

반유행열반인 2020-11-23 0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재테크책 에비 지지 버려ㅋㅋㅋ

syo 2020-11-24 23:29   좋아요 1 | URL
하도 붐이길래 한 번 읽어봤는데 내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이 책 한 권으로 성인 연간 평균 독서량을 달성했으니 올해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겠다- 하는 사람들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추풍오장원 2020-11-2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시작하셨군요^^ 합격같은 가시적 결과를 내는것이 필요한 공부가 사실 별 도움은 안되지만, 재미있을 때도 있었습니다...

syo 2020-11-24 23:30   좋아요 1 | URL
네... 사실 시작한지는 좀 되었사온데, 했다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어서 그냥 입다물고 마냥 노는 척 하고 있었습니다.....

2020-11-23 2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4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자인 오브 까치

 

 

 

1

 

비나 바다에 관해 쓰는 것은 채산이 잘 맞는 일이었다. 비와 바다에 관해서라면 누구에게나 남길 만한 추억 하나쯤 있는 법이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나에겐 더욱 그래서, 비라는 것은, 그리고 바다라는 것은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액자 같았다. 물기가 부족한 날에 걸어두면 좋은 그림이 마음 안에 언제나 잔뜩이고, 비라고, 바다라고 적는 것만으로 내 좁은 영역은 촉촉과 축축 사이의 어느 지점을 단숨에 돌파해버린다. 그래서 아무래도 저 어휘들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비 오는 날에도 비를 찾고, 바다 앞에서도 바다를 그리워하다가 조용히 조용해질 운명이다.

 



  이러다가는 내일도

  바다가 나를 채갈 겁니다

  자꾸 울면

  내 눈에만 보이던 게

  내 눈에만 안 보일 겁니다

이원하, <나는 바다가 채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부분 


 

 

2

 

아침이 웃음소리로 요란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는 골목 너머 앞집에 사람이 잔뜩 들었다. 생신 각이다.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재롱둥이손주들 잔뜩 모여 아침부터 분주하다. 반면, 도움닫기만 제대로 하면 두 집 창문을 연속으로 통과해 우리 안방까지 다이렉트로 날아들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이 집에서는, 기모 자리 위의 기모 이불 속에서 기모 자켓을 입은 기모 인간 이 뒹굴며 핸드폰을 만지는 기묘하고 기모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제 그는 최근 주식으로 벌어먹었던 돈을 최근 주식으로 말아먹었다며 겁나 씁쓸한 표정을 하더니만, 잠시 후에는 또 단타로 치고 빠져서 금방 6만 원을 벌었다며 거실로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애가 방에서 나올 때부터 입가에 미소가 그득하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는데, 곧바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어쩐지 속물 같아 보일까 봐 걱정이라도 한 건지, 아무 이유없이 싱크대를 30초 가량 내려다보며 시간을 끌다가 더는 못참겠다는 듯이 폭발적인 스피드로 6만 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 중에 입꼬리는 저기 입인가 귀인가 싶을 만큼 치솟아 있었고.

 

저렇게 일희일비하는 거 보면, 쟨 역시 커서 인물 되긴 글렀다. 저거 까딱 잘못하면 주식으로 탈모 오겠구나…….

 

 

 

3

 

성의 역사는 힘이 빠졌다. 푸코도 모를 소리를 하고, 그 모를 소리를 알아들을 만한 소리로 바꿔보겠다고 아등바등한 syo조차도 결국 모를 소리나 보태고 마는 거라면, 모를 소리를 위한 모를 소리만 늘리는 것보다 이미 있는, 거장의 모를 소리 하나만 유지하는 게 오히려 세상을 위해 이롭지 않나 싶기도 해서. 두어 페이지 틱 넘겨보다 턱 덮어놓고 다른 책으로 손을 뻗치게 된다.

 

올해 들어 스스로 자주 묻고 끝내 답을 낸 질문 가운데 하나는 나는 쓰기 위해 읽는가, 읽기 위해 쓰는가였다. 읽기와 쓰기가 한몸이며, 나선형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쌀로 밥 짓고 배추로 김치 만드는 소리다. 아름답고 있어 보이는 두루뭉술한 말들은 산 중턱쯤 오른 사람들이 거기까지 오른 자신의 멋진 모습을 사랑하는 데 쓰기 좋게끔 만들어져 있어서 등산객의 발목을 잡아챈다. , 여기까지 올라와 보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느껴진다- 하는 감각은 잠깐 즐기고 말아야지, 아직 거기까지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말을 해주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 오래 머물다가는 이번생은 그냥 거기 그 중턱에서 대충 묏자리 봐야 하는 꼴이 생긴다.

 

오래, 세심히 들여다보면 분명히 보인다. 모든 사람은 쓰기 위해 읽거나, 읽기 위해 쓰는 둘 중 하나다. 세상에 50cm짜리 물건이 있다는 것은 증명하기 어렵다. 50.00000001이나 49.99999999나 우리 눈엔 대충 50으로 보인다. 그건 어쩔 수 없지만, 60이나 4050으로 보는 무딘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나는 확실히 읽기 위해 쓰는 사람이고, 내 쓰기의 최대 수혜자이자 유일한 수혜자는 나인 것 같다. 그저 내가 다음 책을 읽기 위해 내가 써야 한다.


 

 

생각건대 내 안에는 글쓰기가 다른 일보다 훌륭한 일이라는 믿음이 늘 잠복해 있었던 것 같다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결국에는 글쓰기가 더 훌륭하다는 게 입증되리라는 믿음이미망이라 해도 상관없지만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맞이한 새벽들지냈던 도시들살았던 삶을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제임스 설터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천변에 물은 흐르지 않았다나는 움직이는 물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언제 이렇게 다 얼었는지언 물을 보고 있자니 얼마나 단단할지 궁금했다행여 발이 빠진다 해도 다시 나올 수 있을 테니이상한 모험심이 들었다나는 잠깐 올라서보기로 했다.

  밟고 올라서자마자 발바닥에 우지끈함이 느껴졌다깨지지는 않았다.

  이왕 물에 올라서봤으니그 위를 아주 걷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물이 충분히 얼지 않은 것 같았지만나는 해결하고 싶었다순간의 충동설명되지 않는 고집하잘것없는 마음을충분히 지루해질 때까지 물 위를 걷고 싶었다나는 좀 지루할 필요가 있었다더 느리게더 늘어지고 싶었다.

김엄지폭죽무덤


 

 

4

 

까치라는 출판사는 더없이 좋은 책들에 더없이 구린 표지를 입혀서 세상에 내놓는 곳으로 유명했다. 아직도 클리셰처럼 떠도는 사람은 외모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라는 충고 말씀과 엮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사람은 책이다, 책은 사람이다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올곧은 출판사라 하겠다. 다 소싯적 이야기다. 지금 어떤 평을 듣는지는 모르겠다. 2020년 새로 출판된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표지는 뭐라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일단 내 눈에 구판보다는 나아 보인다. 고작 2년 전인 20181월에 개역되어 나온 같은 작가의 나를 부르는 숲이 조금도 나를 부르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서, 2년 사이에 출판사에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할 뿐이다.



그런 까치에서 까치 책 표지 100개를 그대로 축소한 엽서 100장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시작했다고 한다


와정말갖고싶어요

 

이렇게 써 놓으면 비웃는 것 같겠지만, 막상 이벤트 창을 열어보면 (놀랍게도) 귀여워 보이는 애들이 꽤 있다! 그간 내가 알고 있던 나와 오늘의 내가 생각보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자꾸 배우게 되는 요즘이다. 이참에 근대세계체제랄지, 지중해랄지 이런 애들 갖춰볼까? 어쨌든 정말 좋은 책들을 꾸준히 번역해 내놓는 든든한 출판사임은 틀림없으니까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굴뚝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나를 부르는 숲만큼은 피하고 싶다. 숲에 미친 빼빼 마른 안경잽이 식물학자가 밀짚 모자에다가 똥색 반팔셔츠와 반바지를 갖춰 입고(곤충채집망도 들었을 것이다) 숲으로 들어가 3년쯤 무단거주하다가 숲의 지배자 갈색곰한테 들통나 마지못해 쫓겨나오면서 기록한 회고록 같이 생겼다. 아아, 아임 쏘리 엉클 빌…….

 

 

 

--- 읽은 ---

 


214. 고양이 사용 설명서

미스캣 지음 / 임지영 옮김 / 재미주의 / 2017

 

표지가 귀여워서 한 번 읽어봤다. 아이 귀여워 아이 귀여워 아이 귀여워 이러다가 끝났다. 귀엽고 허망한 시간이었다.

 


 

215. 방구석 미술관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

 

재독이다. 처음 읽었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될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10만 부를 넘겨 스페셜한 에디션으로 표지를 갈아입고 나타났다. 1회독 감상을 뭐라고 적어놨는지 가보겠다. 2년 전이었고, 미술 공부의 문을 작품보다 화가로 열어나가는 게 더 좋을 수 있다는 떨떠름하면서 우호적인 평을 남겨 놓았군.

 

이번이라고 딱히 다른 말을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화가들의 인생사 에피소드에 관한 기억이 그나마 오래 살아남았다가 또 얼마 못 가 사라지겠지.

 


 

 

216. 말장난

유병재 지음 / arte / 2020

 

말 잘하는 사람 중 글도 잘 쓰는 사람과, 글 잘 쓰는 사람 중 말도 잘하는 사람의 비율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클까? 뭔가를 끄적거리는 라이프를 오래 유지하다 보면, 아무래도 후자 쪽을 더 후하게 쳐주는 쪽으로 마음의 편향이 생겨나는 듯. 그러니까 전자의 유형에게는 말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글도 잘 쓰네?’ 하는 어쩐지 얕잡는 식의 칭찬을 하고, 후자에다가는 저 말하는 것 좀 봐봐, 글솜씨 어디 가겠어?’ 하는 당연하다는 식의 칭찬을 한달지.

 

말을 다루는 뛰어난 능력 때문에 오히려 글솜씨가 묻히는 느낌. 이 사람은 조만간 에세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딱 떠오르는 그런 유형의 에세이를 들고 돌아올 것 같다. 그치만, 이 함량으로 16,000원은 조금…….

 

 

 

--- 읽는 ---


성의 역사 1 / 미셸 푸코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 유은정

원자핵에서 핵무기까지 / 다다 쇼

존 리의 부자되기 습관 / 존 리

니체 / 정동호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 페터 회

아주 친밀한 폭력 / 정희진

불교는 왜 그래? / 장웅연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 제임스 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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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21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오늘의 재잘재잘은 왠일인지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푸코를 몇 장 읽으시다 던져버리셔서? ㅋㅋㅋ저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옛날 표지판 가지고 있는데 아, 생은 다른 곳에 까치판 표지 생각보다 괜찮은데! ㅋㅋㅋ

syo 2020-11-23 02:26   좋아요 1 | URL
까치라는 출판사의 갈짓자 행보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군요.....
옛날 거 중에서 제가 봐도 괜찮아뵈는 것도 좀 있긴 합니다.

잘잘라 2020-11-21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치 출판사 표지 얘기 읽다가 뿜, 뿜, 뿜이 멈추질 않아서 고생했습니다. 아이고.. 아직도 크헐럴.. 큰 웃음 주신 syo님께 큰 감사 드립니다.

syo 2020-11-23 02:27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다행입니다.
까치에서 이 글을 볼 리는 없겠지만, 본다고 해도 잘잘라님처럼 웃고 넘기셨으면 좋겠네요.....

stella.K 2020-11-2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유, 정말 그러네요. 220쪽 밖에 안 되는데 10% 디씨해도 쫌....
조만간 중고샵에서 후려칠거라서 미리부터 높게 책정한 거겠죠?
1,6천원대라면 예전 같으면 350쪽대는 됐는데...
아무리 중고샵 가격이라도 후달거려 못 사는 책도 더러는 있더군요.
딱 반가격이면 사겠는데 싶은. 30% 이하로는 절대 안 팔겠다는 서점.
허거 참...

syo 2020-11-23 02:28   좋아요 0 | URL
쪽수의 문제라기보다, 뭐랄까, 한 페이지에 삼행시 하나 들어가 있는 분량이라서요.....
후룩후룩 후두둑- 했더니 다 읽고 말았어요.

2020-11-22 2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1-23 0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0-11-22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츄천해주신 사라밀스의 푸코책 160페이지 무렵에가면 드디어 몸권력이 나와요. 으하하, 전 푸코가 너무 즐거워요. 어려운 남 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것과 맞닿아 와닿는 이야기인데, 이게 생각을 하는 방식 자체를 따져물으니까 말이 어렵네. 모를 소리라고 치부하지 말아요. 저 도움됐다구용! 푸코 너무 중요해. 왜 우리는 자발적으로 다이어트를 하는건지 알려준다구.

syo 2020-11-23 02:31   좋아요 1 | URL
저도 푸코를 처음 읽을 때, 그렇게 느꼈습니다. 철학 계보도 잘 모르고 이런 저런 책들 뒤적거리던 꼬꼬마 시절이었는데, 철학책 중에 대놓고 사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될 말씀을 때려넣어준다는 느낌을 받은 경우는 스피노자 이후로 푸코가 처음이었어요.

AgalmA 2020-11-28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치 빌 브라이슨 새 커버는 까치출판사 맞나 싶게 깔끔하게 뽑은 거 같아요. 저도 까치출판사 엽서 갖고 싶어서 뭘 사나 하고 있어요ㅋㅋㅜ

syo 2020-11-29 23:24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깠지만, 이상하게 그 엽서는 또 갖고 싶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 희한하다 ㅋㅋㅋ
 

 

 

20쪽만 읽고 쓰는 허무맹랑 푸코 이야기

 

 

 

0

 

이것은 푸코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푸코와, 푸코를 설명하는 이런저런 개론서와, 푸코와 관련없는 이런저런 다른 책들과, 혹은 30년 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살아온 syo의 허튼 생각들이 버무려진 이야기라고 보는 게 옳겠습니다.

 

 

 

1

 


11장은 채 스무 페이지가 안 되는데도, 서문 역할을 하는 글이 다 그렇듯이 이 부분을 잘만 조지면 뒤는 안 읽어도 읽은 척을 할 수 있게끔 농밀한 내용을 품고 있습니다. 20쪽을 정리하면서 드는 걱정은, 남은 수백 쪽에 관한 페이퍼를 쓸 때도 이만한 분량이 나올 것인가, 그리고 이만한 열정이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점인데…….

 

 

 

2

 

푸코 또한 그랬던 것 같아요. 듣자니, 1976년 발간된 성의 역사 시리즈 제1권 뒤표지에는, 뒤이어 출간될 나머지 5권의 제목이 쭈욱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두 권(혹은 세 권)이 더 나오고 말았을 뿐입니다. 심지어 그 두 권 역시 애초의 기획과는 방향이 많이 달라져서, 성의 역사 1권과 2권 사이에 푸코 사상의 주제적 도약이 있었다고 보는 연구자들이 많지요. 푸코가 쓴 책을 주욱 늘어놓고 보면, 성의 역사1 : 지식의 의지는 어쩐지 감시와 처벌 2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책은 소위 말하는 권력의 계보학시기를 완결하는 작품으로써 사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의미의 역사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계보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철학책은 곧 역사책일 수밖에 없고(역사책이어야 하고), 동시에 모든 역사책은 철학책이어야 하는(철학책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이 책을 또 역사책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그렇습니다…….

 

 

 

3

 

그렇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책은 성에 대한 책이지만 성에 대한 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 무슨 이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니…….

주제는 권력입니다. 영원한 주제는 권력-지식이죠. 그리고 이 책에서는 특히 권력-담론-쾌락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성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푸코의 눈에 띄었다면(이전에 광기가 그랬고 감옥이 그랬듯이), 푸코는 그걸로도 해냈을 겁니다. 성이 아니어도 좋았어요. 그러나 성이어서 좋았죠…….

 

 

 

4

 

이런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제기하려고 하는 물음은 왜 우리가 억압받는가가 아니라, ‘왜 우리가 우리의 가까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그토록 커다란 열정과 강렬한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이다. (16)


그러니까 푸코가 겨냥하는 건 이런 것들이고, 또 이건 아니네요.

 

이전까지 자유롭게 행해지고 말해지던 성이 근대에 이르러 억압되었다는 담론의,

- 매력(O)

- 유독성(O)

- 진실 여부(X)

 

 

 

5

 

권력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 사전은 권력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권력 : 명사. 남을 복종시키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권리와 힘.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권력이라는 말을 쓸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로 남을 억눌러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힘정도의 의미로 유통되는 것 같아요. 이런 정의는 최소한 두 가지 맥락에서 권력의 특성을 일부분만 설명하는 한계를 지닙니다. 첫째, 어쨌든 주체의 의사와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만이 권력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둘째, 권력을 명사적 객체, 그러니까 소유했다가 잃었다가 되찾았다가 할 수 있는 어떤 덩어리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권력의 실체가 저 두 가지 시각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문맥에서만 드러나는 권력의 부분적 특성을 마치 전체상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는 거죠. 이런 오해가 낳는 문제점은 실제로 권력인 것을 권력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를 감추어 주는 방식으로 자기도 모르게 권력에 복무하는 결과를 만들 위험도 있구요.

 

푸코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권력의 저 좁은 정의가 공식적으로 숨기(려 하), 권력의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을 오래도록 해왔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복잡하고, 모호하며, 추상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투명하다고 할 수 있을 권력관을 주장합니다.

 


푸코는 권력을 소유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지 않으며사회 속에서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으로 파악한다.

오생근미셸 푸코와 현대성

 

푸코는 권력을 소유물이 아닌 하나의 전략즉 특정한 사회적 맥락에서 한 개인(혹은 집단)이 수행하는 행위로 보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권력이란 획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행해지는 것이다따라서 권력은 국가나 정부와 같은 특수한 제도에 의해 점유되어 있다기보다는 사회 전체에 퍼져 있는 관계의 그물망이다.

사라 밀스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


 

 

6

 

그렇다면 갑자기 장(, Field)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쇳가루를 올려놓은 책받침 아래에서 자석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 쇳가루들이 특정한 방향으로 배열되는 꼴을 볼 수 있습니다. 자석 주변에 분포하는 자기의 장이 하는 일입니다. 나침반은 지구가 하나의 커다란 자석이라는 점을 이용한 물건입니다. 북극 가까운 곳에 자북磁北이 있습니다. 정확히 북극과 일치하진 않구요. 자북은 지구라는 막대자석의 S극입니다. 따라서 나침반 바늘의 N극은 서로 다른 극이 당기는 원리에 따라 자북을 가리킵니다. 지구자기장이 하는 일입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겨서 사과가 땅에 떨어집니다. 중력입니다. 중력은 질량을 가진 물체가 질량을 가진 다른 물체를 끌어당기는 힘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있다고 하면, 그 공간에는 힘이랄 게 없습니다. 그러다 어떤 이유에선지 뿅 하고 공간 한복판에 지구가 나타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공간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중력장이 함께 뿅 하고 생깁니다. 지구로 인한 중력장은, 그 공간의 특정 위치에 질량을 가진 물체가 들어섰을 때 그 물체가 어느 방향으로 어떤 크기의 힘을 받을지를 써서 그 위치에다 붙여놓은 포스트잇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모눈종이 한복판에 있는 지구에서 북쪽으로 한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였을 때, 걔가 받는 힘이 남쪽 방향(지구가 당기니까 지구가 있는 쪽)으로 “4”의 크기라고 한다면, 지구에서 서쪽으로 두 칸 떨어진 곳에 질량 “1“의 물체가 놓이면 걔는 동쪽 방향(역시 지구가 있는 쪽)에서 ”1“ 크기만큼의 힘으로 자기를 당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 식을 모눈종이의 모든 칸에(심지어 칸과 칸 사이에) 그 위치에서 물체가 받을 힘의 방향과 크기가 써진 포스트잇을 붙이는 거죠. 대충 이런 걸 (고전역학에서의) 중력장이라고 부릅니다.

 

 

 

7

 

권력장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 개념으로서의 권력은 설명력이 커서 좋습니다.

 

권력은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일방적인 힘의 소유관계가 아니라, 주체 간의 상호작용이 본질이라는 점이 쉽게 보입니다. 지구가 가운데 놓인 모눈종이 위의 한 점에 사과 한 알이 나타나면, 그 공간에는 사과로 인한 중력장 역시 형성됩니다. 그 두 중력장이 합쳐져서 그 공간의 새로운 중력지형을 만듭니다.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것처럼 사과도 지구를 당긴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아도 되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힘이 다양한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쉽습니다. 중력은 당기기만 하지만 전자기력은 극성에 따라 밀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듯, 장에서의 권력은 장 위에 놓인 주체를 밀 수도 있고 당길 수도 있고 어떨 땐 회전시킬 수도 있겠구나- 하는 추측도 해볼 수 있습니다. 검열, 금지, 부인, 침묵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 이외의 여러 현상 속에 숨은 권력의 작용을 엿볼 수 있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억압의 가설은 비록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외치지만, 그 주장 자체가 억압-해방이라는 하나의 담론을 이루면서, 억압 이외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기존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성을 긍정하는가 부정하는가, 금기를 내세우는가 허용을 명확히 표명하는가, 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가 성의 효력을 부인하는가, 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는 말을 억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라기보다는, 성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 성에 관해 말하는 사람, 성에 관해 말하는 장소와 관점, 성에 관해 말하기를 부추기고 말한 내용을 수집하고 유포시키는 여러 제도, 요컨대 성에 관한 전반적 "담론현상""담론화"를 고찰하는 것이 (적어도 최초의 논의에서는) 요점이다. 또한 어떤 형태로,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떤 담론을 따라 권력이 가장 미묘하고 가장 개인적인 행동에까지 이르는가, 어떤 노정을 통해 권력이 희귀하거나 거의 감지할 수 없는 욕망의 형태에 도달하는가, 어떻게 권력이 일상의 쾌락에 침투하여 일상의 쾌락을 통제하는가 거부, 봉쇄, 자격 박탈뿐만 아니라 선동과 강화일 수도 있는 결과와 함께 이 모든 것을, 요컨대 "권력의 다형적 기술"을 아는 것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다. (18-19)


거부, 봉쇄, 박탈이 아니라 선동과 강화의 방식으로 권력이 일상에 침투하는 예를 뒤따르는 장들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성이 억압된 적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권력에 억압적인 특성이 없다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권력 = 억압이라는 마음속 등식은 생각보다 큰 힘이 있습니다. 다양한 담론 영역에서 내 표적으로 쏟아지는 권력의 다양한 촉수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하는 행위 역시 권력적 행동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몇 개 이상의 미시권력장 안에 발을 들여놓은 채 살아야 하고, 그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건 그렇지 않건 권력행동을 하게 되며, 때로 인간이 이기적인 유전자의 숙주에 불과해 보이는 것처럼, 주체는 권력-지식의 목적을 위해 동작하는 기계가 되기도 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일을 위해, 권력은 단지 부정적 양태의 기술만을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8

 

그런데 내가 "억압의 가설"이라고 부르게 될 것과 관련하여 세 가지 주목할 만한 의혹이 생겨날 수 있다. 첫 번째 의혹. 성의 억압은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이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와 관계가 있는 문제이다. 두 번째 의혹. 권력의 메커니즘, 특히 우리 사회와 같은 곳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메커니즘은 요컨대 억압의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금지, 검열, 부인은 아마 모든 사회에서, 그리고 확실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이 일반적으로 행사되는 양상일까? 이것은 역사-이론적 문제이다. 끝으로 세 번째 의혹. 억압을 겨냥하는 비판적 담론은 그때까지 이의없이 가능한 권력 메커니즘의 통로를 차단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억압"이라고 부르면서 비난하는 (그리고 아마 왜곡할) 것과 동일한 역사적 망()의 일부분을 이루는 것일까? 억압의 시대와 억압의 비판적 분석 사이에 정말로 역사적 단절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것은 역사-정치적 문제이다. (17-18)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장들에서, 푸코는 스스로 제기한 이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려 합니다.


1) 성의 억압이 자명한가?

2) 금지, 검열, 부인과 같은 억압적 방식이 권력의 일반적 메커니즘이라 할 수 있는가?

3) 억압을 비판하는 담론에 권력을 위해 복무하는 지점이 있지는 않은가?

 

차차 알아보겠습니다. 이 장에서는 저기 위에서 최초로 언급한 질문, ”왜 우리가 스스로 억압받고 있다고 말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아래와 같습니다.

  

근대에 이르러 성이 억압되었다는 담론은 분명히 계속되고 있다이는 아마 주장하기가 쉽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담론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엄숙하게 보증되고누구나 수백 년에 걸친 대담하고 자유로운 표현의 시기에 뒤이어 17세기에 억압의 시대가 출현했다고 하면서 이 담론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시기를 같이한다고 생각한다이 담론은 부르주아 질서와 일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성과 성에 관한 타박의 짧은 역사가 곧장 생산양식의 엄숙한 역사로 변하고성에 대한 경시 현상이 사라져 버린다성을 설명하려는 논리가 이 사실 자체로부터 점점 구체화되어 간다성을 그토록 엄격하게 억압하는 이유는 성이 전반적이고 집약적인 노동력의 동원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노동력이 조직적으로 착취되는 시대에 노동력의 재생산을 허용하는 최소한으로 한정된 쾌락 이외에 다른 쾌락 때문에 노동력이 허비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었을까성과 성의 영향은 아마 읽어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 반면에이것들에 대한 억압은 이처럼 표현될 수 있는 만큼 쉽게 분석된다그리고 성에 관한 명분가령 성의 자유뿐만 아니라 성에 관한 인식과 성에 관해 말할 권리라는 명분은 아주 당연히 정치적 명분의 존중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 또한 미래의 전망 속으로 이끌려 들어간다아마 성에 관한 이야기를 그토록 막강한 대부와도 같은 것으로 만들려는 그토록 많은 대비책에는 성을 부끄러워하는 아주 오랜 태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자문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마치 그러한 담론이 말해지거나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서로의 가치를 높이기라도 해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성과 권력의 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에게 그토록 만족감을 주게 되는 데에는 아마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인데그것은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이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성이 억압된다면다시 말해서 금지와 부재와 침묵에 귀착할 수밖에 없다면성에 관해 말하고 성의 억압에 관해 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위반의 몸짓이 될 수 있다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권력에 대항하여 권력 밖에서 법을 위반하고 미래의 자유를 어느 정도 예견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오늘날 성에 관해 말할 때의 엄숙함은 이로부터 연유된다최초의 인구통계학자들과 19세기의 정신의학자들은 성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때몹시 저급하고 쓸데없는 주제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두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했다이와는 정반대로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언제나 약간 당당한 태도즉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식스스로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표시하는 어조현재를 넘어서서 미래를 앞당기려는 조급한 열정을 내보인다. 반항약속된 자유가까이 다가온 또 다른 법의 시대와 같은 말이 성의 억압에 관한 담론으로 쉽게 넘어간다. (12-13)


요약하자면, ‘억압의 가설을 채택하고, 성이 억압되었으니 해방하자고 주장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세 가지입니다.

 

1. 억압 메커니즘은 선명해서 주장하기도 쉽고 타격 목표를 정하기도 쉽다.

2. 억압된 의 해방은 억압된 자유와 권리의 해방이라는 좀 더 거대하고 정치적인 작업과 관련되어 있다. -> 폼 난다.

3. 억압된 성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깨어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투사라는 느낌, 내가 좀 전복적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다. -> 개 폼 난다.

 

결론은 그러니까, 쉽고, 있어 보여서 그런다는 것이네요. 예나 지금이나 있어빌리티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경향이 있죠. 사랑받고 추앙받고 싶은 욕심에 남들보다 빨리 소수자들의 선봉에 섰다가 다수자들의 막강한 돌팔매질에 못 이겨 은근슬쩍 그쪽으로 기어들어가면서, 자기 변절의 이유를 소수자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많다…….

 

 

 

9

 

읽기에 다정하진 않은 번역입니다. 예를 들면, ”따라서 억눌린 성의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15) 라는 문장은 문맥상 따라서 성이 억눌려 있다는 관념은 이론의 문제일 뿐만이 아니다.“로 옮기면 오해의 소지가 덜합니다. 영어판에서 ‘The notion of repressed sex is ~”로 쓰인 문장이라 의미구조가 선명한데, 번역문은 성이 억눌렸다는 관념을 말하는지 성에 대한 억눌린 관념을 말하는지 모호합니다.

 

하나만 더 볼까요. 위에서 인용한 억압 가설에 관한 푸코의 첫 번째 의문, 그러니까 성의 억압이 정말로 자명한 역사적 사실일까? 하는 질문에 뒤따르는 문장을 보겠습니다.

 

맨 먼저 시선에 드러나고 따라서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17)


일단 전체적으로 뭔가 어색하고 우리말 같지 않은 모양은 차치하구요. 후반부의 성에 대한 억압체제의 강조일까, ‘아니면’ 17세기부터 이루어진 그러한 체제의 확립일까?‘ 하는 대목은, ’하나의 가설을 출발점으로 제시할 수 있게 하는 것1)강조 2)그러한 체제의 확립 중 어느 쪽일지를 묻는 것처럼 보여요다. 그런데 실제로 억압 가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푸코의 관점으로 보면, 1)2)는 택일의 문제가 아니고 강약의 문제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강조하다 못해 확립까지 했던 그것- 이런 뉘앙스랄까요. 영문판은 “Is what first comes into view-and consequently permits one to advance an initial hypothesis-really the accentuation or even the establishment of a regime of sexual repression beginning in the seventeenth century?” 로 번역해놓았네요. 제 눈에는 or를 중심으로 the accentuationthe establishment가 서로 싸우는 것 같아보이진 않는데. even이 한 몫 거들기도 하구요.

 

사실 영어 겁나 못해서 조심스럽네요.

 

 

 

10

 

아무튼지간에 계속 읽어나가겠습니다.

 

 

 

 

--- 읽은 ---

 


213. 폭죽무덤

김엄지 지음 / 현대문학 / 2020

 

소설과 시의 국경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나는 더 모르게 되었어…….

 

한순간에도 몇 번씩 인간의 머릿속에 켜졌다 꺼졌다 하는 생각들과 문학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또 어디에 있을까? 난 진짜 아무것도 모르게 되었어…….

 

 

 

--- 읽는 ---

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미셸 푸코

방구석 미술관 / 조원재

클래식 가이드 / 세실리아

말장난 / 유병재

다시 미분 적분 / 나가노 히로유키

습관의 말들 / 김은경

내가 예민한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 유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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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푸코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거짓말
    from 게으른 독서생활자의 수기 2021-01-10 12:35 
    12월 부터 붙잡고 씨름하던 ‘성의 역사’ 1권을 끝내면서 푸코가 좋아져버렸다. 지금은 그가 싫어한다는 전기를 읽고 있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꼬꼬마 폴-미셸이 서글프고 귀엽다. 세상에 그렇게까지 입시공부를 빡시게 했는 데, 네가 안 돌고 배기겠니. 덕분에 미래의 니가 쓴 책 읽다가 누님도 머리가 살짝 돌 뻔 했단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를 쓴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가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내 모든 텍스트는 자서전의 조각’이라고 했단다
 
 
다락방 2020-11-18 1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출력해서 이천번 읽어봐야 될 것 같아요.. ㅜㅜ

syo 2020-11-18 13:28   좋아요 1 | URL
.... 그러지말고, 개론서를 읽는 게 좋겠어요. 역시 개론서도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수이 2020-11-18 1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내가 무지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 똑똑한 거야....

syo 2020-11-18 13:29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아니야.... 그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다 아니야

비연 2020-11-18 1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 우째

syo 2020-11-18 13:30   좋아요 0 | URL
두산의 패배 떄문에 감정컨디션이 최상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은데? ㅠㅠㅠㅠ

단발머리 2020-11-18 1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출력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쇼님 인용하신 문단 중 하나가 저도 줄친 부분이라 그것 하나 자랑스럽네요 ㅎㅎ
수고많으셨어요, 쇼님!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syo 2020-11-18 13:30   좋아요 1 | URL
다락방님도 단발님도 좋은 개론서 하나 놔드려야겠어요....

잠자냥 2020-11-18 1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째222222

잠자냥 2020-11-18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가 없어요.
왜 요즘 알라딘 자꾸 푸코해요. ㅋㅋㅋㅋㅋㅋ

syo 2020-11-18 13:31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한테 수학 배웠던 애들한테 갑자기 미안해지네요. 얘들아 니들 잘못이 아니었어....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 없다는 잠자냥님의 말씀을 이해했으므로 저는 이 댓글에 좋아요를 꾹 누릅니다.

추풍오장원 2020-11-18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푸코가 논리실증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ㅋㅋ 그 관점에서 비판받을 소지도 있지않나 하고 생각하구요. 당위를 말하기 싫어하는 지금 세상에서 오독하기 참 좋은 푸코인것 같기도 하고..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syo 2020-11-18 18:48   좋아요 1 | URL
비가 오는데 날이 춥지 않네요. 이것은 가을비인가요 겨울비인가요.. 알 수 없는 계절을 우리는 살고 있나 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로 2020-11-18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해를 못해서 좋아요를 누를 수가 없어요. 2

저도 딱 저 댓글을 달아야지 했는데 오늘도 한 발 늦었어요. 매번 뒷북,,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11-18 18:48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 이해말고 애정으로 눌러줘요!

나무처럼 2020-11-18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해 못하면 좋아요 못 누르나요?

다락방 2020-11-18 18:3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나무처럼님? 저는 이해 못했지만 좋아요 눌렀답니다? :)

syo 2020-11-18 18:47   좋아요 0 | URL
이건 비밀인데, 좋아요는 좋을 때 누르는 거래요....

공쟝쟝 2020-11-18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의역사 읽기전에 개론서 겁나 읽고 있는 보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글이로다 ㅋ

syo 2020-11-21 11:14   좋아요 0 | URL
개론서! 개론서가 갑이다!
 

 

아닌데요

 

 

 

1

 

가끔은 조금 유치해져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닫아놓은 창문을 닫힌 창문이라고 적으며 숨겨진 주어 뒤에 숨기보다는. 울어달라고 애를 쓰는 장면들 앞에서 선선히 울어주고, 웃어달라고 부탁하는 말들을 만나면 가짜라도 좋으니 한 번 크게 웃어보는 거, 그리 나쁜 일도 아니지 않을까. 먼저 울다가 내 안에 묵혀놓은 슬픔과 오랜만에 마주 앉아 크게 한 번 울게 되기도 하고, 먼저 웃으며 마중 나간 길에서 소리 없이 커다란 진짜 웃음과 맞닥뜨리기도 하는 그런, 믿을 수 없는 인과의 방향을 가끔은 믿어보는 것도 그리 손해나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섯 살 조카 애가 손가락으로 빵야빵야 쏜 총에 맞아 열심히 죽어가는 삼촌의 마음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표정 속에 감춘다고 감췄지만 참을 수 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의 마음으로.

 

사랑을 공부하는 일에 인색한 마음을 들고서, 하찮고 사사로워 관두겠다는 표정으로 애써 가려놓은 부끄러움을 가지고서, 사람이 가면 또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까,

 

 

 

2

 

라는 생각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든 것이다. 정말이지 잠을 반쯤 깬 상태에서 유치해져 보자…… 이게 뭐지 꿈인가 싶은 중에 울어주고 웃어주자…… , 뭐야 벌써 아침인가 하며 기지개를 펴면서 빵야빵야…….

 

그래서 커피머신을 눌러놓고 컴퓨터 앞에 앉아 눈을 비비며 1을 쓴 것이다. 저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며 누구나 한 번쯤 해보는 평범한 생각일 뿐이지만, 정말이지 먹고 자는 것 말고 딱히 하는 게 없는 요즘에는 저런 진부한 말이라도 떠올라주는 것 자체가 감지덕지다. 저런 거라도 없음 알라딘 접게 생겼어…….

 

 


3

 

1을 써놓고 도서관에 다녀왔다. 일단 단톡방에 이러다 걷는 법을 까먹겠다고 푸념해놓고 길을 나섰다. 길은 은행잎과 은행잎 사이로 짓이겨진 은행알들로 흥건해서 마치 은행나무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으로 걸었다. 요즘은 양털이 대세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고등학교 시절 함께 농구 몇 번 했던 동창과 꼭 닮은 사람이 SUV 조수석 문을 열고 뭔가를 꺼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젊은 부부의 손 잡고 걷는 뒷모습이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어쩐지 아련해져서, 손에 쥔 책을 덮고 멈춰 서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옥상 위의 하늘과는 또 조금 달랐다. 좋기도 했다.

 

 

 

4 

 

알고 보니 이 도서관에는 얼리 버드라는 제도가 있었다. 9시에서 13시 사이에 오면 10권까지 대출이 가능해지는 것. 신나서 주섬주섬 담고 보니까, 외국 작가가 쓴 작은 판형의 에세이 하나, 그에 못지 않게 조그만 한국 작가의 소설 하나, 나머지 여덟 권은 전부 과학책 수학책 뭐 이런 것들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하나같이 제목에 나의 첫 ㅇㅇㅇ이랄지, ‘어서와, ㅇㅇㅇ은 처음이지같은 구절을 달고 있는 귀요미 책들 뿐이다.

 

하지만 미안합니다, , 실은 처음이 아니에요…….

 

 

 

5

 

성의 역사 원 페이퍼 원 챕터가 커밍 쑨입니다. 여러분, 우리 진짜 힘내자…….

 

 

 

--- 읽은 ---

 


211.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

신예희 지음 / 드렁큰에디터 / 2020

 

고렴이라는 단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소비가 워낙 빠르게 휙휙 지나가는 녀석이라 그런가, 소비하는 사람들의 언어는 누구보다 발빠른 것 같다. 글쓴이는 위트가 있고 이야기는 재미가 있지만, 소비를 둘러싼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웃플 수는 있어도 전적으로 만족에 들어찬 웃음을 만들기는 어려운 것이 또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 제목조차 기쁨과 슬픔이 아닌가. 돈 없는 사람이 읽기엔 좀 슬퍼서.

 

 

 

212. 고양이를 버리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가오 옌 그림 /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

 

실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다. 손바닥 두 개 올리면 완전히 가려지는 작은 크기에 100쪽이 되지 않는 부피. 집까지 오는 길에 과반을 읽었다. 라면 하나 끓여 먹었고, 차 한잔 마시며 마저 읽었다. 그 다음에 양치질을 했다.

 

미셸 푸코를 푸코라고 부르고 도널드 트럼프를 트럼프라고 부르듯, 무라카미 하루키는 무라카미라고 부르는 게 맞다. 그런데도 하루키라고 부른다면 그건 무례 아니면 애정이다. 각별한 애정이 없다면 차마 금희 누나, 상영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일이라서, 젊은 syo에게 하루키였던 사람은 언제부턴가 색채가 없는 무라카미가 되었다.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글이 책으로 나오는 건 무라카미여서, 라고 생각한다. 무라카미가 쓰는 에세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무라카미가 워낙 에세이 맛집이긴 하지만.

 

그림이 더 좋아서 오래 머물렀다. 요동치는 얕은 물에 발 담그고 책에 빠져 있는 소년이랄지, 순한 눈과 몸통을 하고 책더미 위에서 뒹굴고 있는 고양이랄지, 너무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그 생명체들이 계속 책 속에서 책과 함께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되었다.

 

 

 

--- 읽는 ---

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신형철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이규리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 민이언

양자역학은 처음이지? / 곽영직

폭죽무덤 / 김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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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11-15 15: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의 무라카미는 고등학생 때부터 류였어...그러니 하루키는 하루키입니다 이상 하루키 두 권 밖에 안 읽고 그나마도 잊어버린 무지렁이(류는 다섯 권은 넘었겠다...나란 새끼) 올림.

syo 2020-11-18 10:09   좋아요 1 | URL
도서관에 가면 무라카미 옆에 무라카미가 꽂혀 있잖아요. 작은 도서관이라 그런가, 무라카미들이 막 섞여서 꽂혀 있는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반납한 날, 당연히 같은 작가인 줄 알고 아무 생각없이 옆에 꽂힌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를 빌려서 읽다가 코피 터질 뻔.....

비연 2020-11-15 2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빵야빵야...

syo 2020-11-18 10:09   좋아요 0 | URL
세상에 빵야빵야 한 번 안 맞아보고 자란 삼촌 없다.....
 

 

 

 

 

1

 

찌다 찌다 입 안에도 살이 찌는가, 왼쪽 어금니가 볼살 안쪽에 해당하는 부위를 자꾸 씹어서 동그란 피멍울이 맺혔다. 평소에 이렇게까진 안 했잖아, . 피멍울도 피멍울이지만 한번 씹히면 살 전체가 살짝 부어오르는데, 그러면 이차사고가 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다. 이차사고가 삼차 사고에 기여하는 방식 역시 동일하다. 미친 입 씹기의 메커니즘.

 

 

 

2

 

주식 공부를 해보겠노라고 선언한 에게 밀리의 서재를 소개해줬다.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한 달에 한 권 읽지도 않는 처지에 매달 책값으로 만 원씩 꼬박꼬박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망설이는 놈에게 syo 체감 15, 체감 150분 수준의 잔소리 융단폭격이 있었고, 결국 내 눈앞에서 결제가 이루어지고 나서도 5분 가량의 추가적 잔소리가 진행되었다. 생산적 과정이었다고 평하겠다.

 

생산적 과정이 이루어지고, 눈치를 보며 슬쩍 방으로 들어가 이불 속에 드러누운 은 핸드폰으로 밀리의 서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읽을 만한 책들을 찾는 듯했다. , 이 책 괜찮네, 오 저 책 괜찮네 그러면서 나 들으라고 외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애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더니,

 

: , 매거진도 많네?

syo : 경제잡지도 꽤 충실히 나오더라고.

: , 맥심이다.

syo : , 군대 때 들은 명언 생각나네. 커피는 맥심이고 잡지는 맥심이지.

: , 여기 책 클릭하면 완독 예상 시간 알려 주거든?

syo : 읽은 사람들 읽는데 걸린 시간 가지고 예상하나 보지?

: 맥심 완독 예상 시간 12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 풉ㅋㅋㅋㅋㅋㅋㅋ12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오송으로 내려간 은 오늘 주식 책을 읽을까? 모쪼록 그의 독서 시간이 12분을 초과하길 소망한다.

 

 

 

3

 

합의는 없다. 노랑과 파랑이 논쟁하여 합의하면 초록이 된다. 노랑 안의 어떤 노랑은 만족하고 초록이 될 수 있지만 또 어떤 노랑은 포기할 것이다. 파랑 안의 어떤 파랑은 흡족하여 초록이 될 수 있겠지만 또 어떤 파랑은 복수를 다짐할 것이다. 노랑과 파랑은 사라지고, 초록과 포기와 복수가 태어난다. 그리고 초록은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빨강이나 보라를 만날 것이다. 논쟁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또 합의라는 이름의 혼합물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만족-포기-복수의 비율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미묘한 혼합물이다.

 

논쟁의 목적이 합의라는 생각은 싸움을 개싸움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기 위해 설치하는 연약한 방벽이다. 곧 고성과 쌍욕이 난무하겠지만 일단 우리는 하나고 큰 범주에서 우리는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고 기만하기 위해 거행하는 일종의 국민의례다.

 

논쟁의 목적은 논쟁이다. 논쟁은 과정으로서의 목적이고 목적으로서의 과정 같은 거라, 논쟁의 과정에서 태어나는 그 이상한 혼합물이야말로 논쟁의 종착지다. 그 일견 끔찍해 보이는 혼종은 논쟁이 다음 논쟁을 낳는 끝없는 연쇄의 상징으로서 논쟁의 불완전성을 증거하는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2,500년 묵은 이데아적 발상이다. 다음 논쟁을 끌어오지 않는 논쟁은 없었다. 우리는 논쟁 끝에 태어난 합의에 올라타 앞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논쟁에서 태어난 부산물들을 주워 먹고 여기까지 왔다.

 

합의가 있다면 그건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일이다. 노랑과 파랑은 절대 자기 자리에서 합의할 수는 없다. 합의에 만족한 노랑과 파랑은 더이상 노랑과 파랑이 아니라 초록이다. 변하지 않는 자는 포기하여 스스로를 초록이라 속이는 노랑이거나, 복수의 기회를 엿보려 초록의 가면을 쓴 파랑이다. 이 변화들 또한 논쟁의 부산물이다.

 

논쟁의 목적은 논쟁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얻어맞고, 변하고,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낳지 않는 논쟁은 없다. 그래서 논쟁은 목적인 동시에 과정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건 푸코를 읽기 전이나 후나 여전한데, 논쟁의 근거가 되는 지식은 권력의 산물이고 그 자체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거라면, 논쟁이란 특정한 룰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라기보다는 룰도 뭣도 없이 상대의 절멸을 목적으로 펼쳐지는 전쟁에 가까울 수 있겠다. 룰까지 자신의 안에 품고 있는 룰-창조적 지식과 겨룰 때도, 그 논쟁에서 떨어지는 부산물이 영양가 있는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이거야말로 논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데아적 사고는 아닐까?

 


 

  어떻습니까싸우고 싶어 몸살을 앓더니.

  내래 언시에 싸우구 싶다 했습네까세상에 싸우기 좋아하는 이가 있답데까싸우구 싶다는 거이 순 거짓입네다싸움이 좋은 거이 아이라 이기구 싶은 거입네다.

박서련체공녀 강주룡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어떤 사람은 가치와 관습을 상속받은 집처럼 물려받지만어떤 사람은 그 집을 불태워야 하고자기만의 땅을 찾아야 하고맨땅에서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심리적 변신도 마찬가지다그리고 문화적 변신일 경우이 변화는 훨씬 더 극적이다.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변화는 꼭 필요하고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가 다른 모든 목소리에 대한 부정이 아님을 알면서도우리는 너무 약해서 종종 오해하고 잘못 말하고 상처를 받는다목소리 안에 있을 땐 동참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웠고 바깥에 있을 땐 말할 수 없는 게 많아서 외로웠다.

윤이형붕대 감기

 

 

4

 

11월에는 푸코 개론서를 열심히 파고, 12월부터 성의 역사 1-4권을 하루 1, 2챕터씩 꼼꼼하게 읽자는 것이 당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는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산채비빔밥에 고추장 비비듯 슥슥 읽어나가질 거라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의미로 뜻밖에 고전 중인 읽기 친구들. 이럴 때 바로 미친 개론서 덕후가 치고 나가줘야겠구나 싶다. 미개덕의 쓸모를 세상이 보여줄 때가 왔는가.

 

보름 줄여서, 15일까지만 개론서 읽고, 16일부터는 성의 역사 읽어나가야지. 모두 힘냅시다.

 

대구 집에서 푸코 책이 잔뜩 올라온다.

 

 

 

--- 읽은 ---


 

208. Chaeg 2020. 11

()(월간지)편집부 지음 / ()(잡지) / 2020

 

새로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짧은 글로 이루어진 긴 꼭지가 있는데, 그건 풀어놓고 쓰면 한 책당 두세 문장에 불과한 분량이다. 이거 다 읽어보고 쓰는 건 아니겠구나 싶기도 하다. 쏟아지는 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 업으로 해야되는 일인 것 같다.

 

 



209. 인생학교 섹스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미나 옮김 / 썜앤파커스 / 2013

 

섹스학교가 있어서 섹스를 가르친다면, 대체 섹스의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섹스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잘 하는 법을 배우고 싶지만, 이 책은 잘 대하는 법을 가르친다. syo에겐 아직 어렴풋하지만, 때가 오면, 잘 대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날이 오는 것 같다. 그건 섹스 바깥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환대의 감정,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환대하는 마음가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가져간다고 믿는다. 물론 잘 하고 싶다. 그렇지만 먼저 잘 대하고 싶다. 섹스가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사람이 늘 제일 힘들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다.

 

 


2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

 

이럭저럭 전기 3부작이 끝났다. 소선생님 작품 경로 중 syo가 제일 좋아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대학 다닐 때는 산시로속 산시로가 그렇게 나 같더라니, 길게 백수 생활을 경험하고 나니 그 후의 다이스케에게 마음이 간다. 그렇다면 앞으로, 의 소스케에 이입하는 날이 올까. 세상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문턱 같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와 둘만의 조용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여름이면 마루 끝에 함께 앉아 빗소리를 듣고,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글자를 물어보듯 함께 읽은 책의 구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 읽는 ---

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판타스틱 과학클럽 / 최지범

왜 대법원은 특허법을 해석하지 않을까? / 오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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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1-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 집에서 푸코 책이 잔뜩 올라온다.‘

멋져! ♡.♡

syo 2020-11-12 12:37   좋아요 1 | URL
잔뜩 올라와 진짜로..... 읽지도 않을 거면서 왜이렇게 사모아놨는지 모르겠어요 ㅋㅋㅋㅋ
이제 읽을 거긴 하지만 ㅎㅎ

페크pek0501 2020-11-1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력이 풍부하신 syo 님.
3번의 첫 문단을 비롯해서...

syo 2020-11-12 12: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 문단만 칭찬해주셔도 과분한데 비롯까지 하시다니!

라로 2020-11-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첫 문장부터 이게 뭡니까!! 나도 ˝찌다 찌다 입 안에도 살이 찌는가, 왼쪽 어금니가 볼살 안쪽에 해당하는 부위를 자꾸 씹어서 동그란 피멍울이 맺혔다.˝에요. 것도 왼쪽만!! 이틀 전에 생긴 일인데 지금 붓고 아파요. ㅠㅠ
잘 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음,,이건 맨 입으로 가르쳐 줄 순 없지롱~. ㅋ

syo 2020-11-13 00:15   좋아요 0 | URL
동병상련 슬프다...
맨 입으로 가르쳐 줄 수 없는 비밀은 알고 보면
1. 실은 맨입으로도 가르쳐 줄 수 있는 비밀
2. 실은 무얼 줘도 절대 가르쳐 줄 수 없는 비밀
요 두 개 중에 하나라던데요ㅎㅎㅎ

라로 2020-11-14 02:34   좋아요 0 | URL
3.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사실 가르쳐줄 것이 없던가?? 라고 누가 그러던데. ㅎㅎㅎㅎㅎㅎㅎ (하지만, 전 정말 있다고요오!!ㅋ)

syo 2020-11-15 14:1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맨입으로 어떻게 좀 안 돼요?

블랙겟타 2020-11-12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갑자기 한달 전에 한국사 공부할때 강주룡선생이 나오던게 생각이 나네요.

syo 2020-11-13 00:1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 강주룡이라는 글자를 봤으니까 생각이 강주룡 생각이 난 거 아닐까요? ㅋㅋㅋㅋ

수이 2020-11-12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근두근 푸코 책들이 상경한다

syo 2020-11-13 00:16   좋아요 0 | URL
상경했다.
그러나 책꽂이만 무거워지고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고 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1-1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개덕 등장...그 개가 개론서 아니고 개놈이면 좋겠다...어디있니 개놈아...

syo 2020-11-13 00:17   좋아요 0 | URL
매번 개놈이를 목놓아 찾으시고,
반님은 이제 제 글이 그렇게 재미가 없으신가봐요.....

2020-11-13 06: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부만두 2020-11-14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그후‘로 나쓰메 소세키 읽기를 시작했 (다기엔 .... 몇 권도 안 읽었더랬지만 )어요. 아줌마 마음에도 다이스케가 미운데 짠하고 자꾸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그런데 ‘산시로‘의 그 소심 삼식이에 쇼님께서 동질감을 느끼셨다니, S 초성의 끌림일까, 조금 궁금해집니다. 전 삼식이, 아니 산시로가 말 못하고 대학 교정 연못가를 빙빙 도는 중간 즈음에서 읽다 덮었거든요. 애가 너무 소심해서요. 아 다시 s.
날이 선선합니다. 외출하셔서 선샤인도 좀 쬐시는 새터데이 되시기를요.

syo 2020-11-15 14:14   좋아요 0 | URL
어제는 그간 발췌해두려고 사진만 찍어놓고 미뤄둔 나쓰메 소세키의 전기 3부작 발췌문을 옮겨놨는데요, 다시 쓰면서 생각해보니까 <문>이 제일 아련하고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참, 이러나저러나 나쓰메 소세키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네요.

말씀 덕분인지, 오늘은 오랜만에 도서관 나들이를 하면서 볕을 쪼였습니다. 유부만두님도 주말 잘 마무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