合
1
찌다 찌다 입 안에도 살이 찌는가, 왼쪽 어금니가 볼살 안쪽에 해당하는 부위를 자꾸 씹어서 동그란 피멍울이 맺혔다. 평소에 이렇게까진 안 했잖아, 너. 피멍울도 피멍울이지만 한번 씹히면 살 전체가 살짝 부어오르는데, 그러면 이차사고가 나기 쉬운 환경이 조성된다. 이차사고가 삼차 사고에 기여하는 방식 역시 동일하다. 미친 입 씹기의 메커니즘.
2
주식 공부를 해보겠노라고 선언한 三에게 밀리의 서재를 소개해줬다. 존재는 알고 있었으나 한 달에 한 권 읽지도 않는 처지에 매달 책값으로 만 원씩 꼬박꼬박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고 망설이는 놈에게 syo 체감 15분, 三 체감 150분 수준의 잔소리 융단폭격이 있었고, 결국 내 눈앞에서 결제가 이루어지고 나서도 5분 가량의 추가적 잔소리가 진행되었다. 생산적 과정이었다고 평하겠다.
생산적 과정이 이루어지고, 눈치를 보며 슬쩍 방으로 들어가 이불 속에 드러누운 三은 핸드폰으로 밀리의 서재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읽을 만한 책들을 찾는 듯했다. 오, 이 책 괜찮네, 오 저 책 괜찮네 그러면서 나 들으라고 외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애 키우는 재미가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해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더니,
三 : 오, 매거진도 많네?
syo : 경제잡지도 꽤 충실히 나오더라고.
三 : 오, 맥심이다.
syo : 야, 군대 때 들은 명언 생각나네. 커피는 맥심이고 잡지는 맥심이지.
三 : 야, 여기 책 클릭하면 완독 예상 시간 알려 주거든?
syo : 읽은 사람들 읽는데 걸린 시간 가지고 예상하나 보지?
三 : 맥심 완독 예상 시간 12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o : 풉ㅋㅋㅋㅋㅋㅋㅋ12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오송으로 내려간 三은 오늘 주식 책을 읽을까? 모쪼록 그의 독서 시간이 12분을 초과하길 소망한다.
3
합의는 없다. 노랑과 파랑이 논쟁하여 합의하면 초록이 된다. 노랑 안의 어떤 노랑은 만족하고 초록이 될 수 있지만 또 어떤 노랑은 포기할 것이다. 파랑 안의 어떤 파랑은 흡족하여 초록이 될 수 있겠지만 또 어떤 파랑은 복수를 다짐할 것이다. 노랑과 파랑은 사라지고, 초록과 포기와 복수가 태어난다. 그리고 초록은 다시 전장으로 나아가 빨강이나 보라를 만날 것이다. 논쟁할 것이고 운이 좋다면 또 합의라는 이름의 혼합물을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만족-포기-복수의 비율이 그때그때 달라지는 미묘한 혼합물이다.
논쟁의 목적이 합의라는 생각은 싸움을 개싸움으로까지 끌고 가지 않기 위해 설치하는 연약한 방벽이다. 곧 고성과 쌍욕이 난무하겠지만 일단 우리는 하나고 큰 범주에서 우리는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고 기만하기 위해 거행하는 일종의 국민의례다.
논쟁의 목적은 논쟁이다. 논쟁은 과정으로서의 목적이고 목적으로서의 과정 같은 거라, 논쟁의 과정에서 태어나는 그 이상한 혼합물이야말로 논쟁의 종착지다. 그 일견 끔찍해 보이는 혼종은 논쟁이 다음 논쟁을 낳는 끝없는 연쇄의 상징으로서 논쟁의 불완전성을 증거하는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야말로 2,500년 묵은 이데아적 발상이다. 다음 논쟁을 끌어오지 않는 논쟁은 없었다. 우리는 논쟁 끝에 태어난 합의에 올라타 앞으로 나간 것이 아니라, 논쟁에서 태어난 부산물들을 주워 먹고 여기까지 왔다.
합의가 있다면 그건 뜻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는 일이다. 노랑과 파랑은 절대 자기 자리에서 합의할 수는 없다. 합의에 만족한 노랑과 파랑은 더이상 노랑과 파랑이 아니라 초록이다. 변하지 않는 자는 포기하여 스스로를 초록이라 속이는 노랑이거나, 복수의 기회를 엿보려 초록의 가면을 쓴 파랑이다. 이 변화들 또한 논쟁의 부산물이다.
논쟁의 목적은 논쟁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얻어맞고, 변하고, 포기하고, 다음 기회를 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것도 낳지 않는 논쟁은 없다. 그래서 논쟁은 목적인 동시에 과정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건 푸코를 읽기 전이나 후나 여전한데, 논쟁의 근거가 되는 지식은 권력의 산물이고 그 자체 권력 관계를 반영하는 거라면, 논쟁이란 특정한 룰을 따르는 이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라기보다는 룰도 뭣도 없이 상대의 절멸을 목적으로 펼쳐지는 전쟁에 가까울 수 있겠다. 룰까지 자신의 안에 품고 있는 룰-창조적 지식과 겨룰 때도, 그 논쟁에서 떨어지는 부산물이 영양가 있는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이거야말로 논쟁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데아적 사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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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싸우고 싶어 몸살을 앓더니.
내래 언시에 싸우구 싶다 했습네까. 세상에 싸우기 좋아하는 이가 있답데까? 싸우구 싶다는 거이 순 거짓입네다. 싸움이 좋은 거이 아이라 이기구 싶은 거입네다.
_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
그리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유난히 더 멀리 간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알맞은 자아, 혹은 적어도 의문을 제기받지 않는 자아를 생득권처럼 타고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생존을 위해서든 만족을 위해서든 자신을 새로 만들어내려고 하고 그래서 멀리 여행한다. 어떤 사람은 가치와 관습을 상속받은 집처럼 물려받지만, 어떤 사람은 그 집을 불태워야 하고, 자기만의 땅을 찾아야 하고, 맨땅에서부터 새로 지어야 한다. 심리적 변신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문화적 변신일 경우, 이 변화는 훨씬 더 극적이다.
_ 리베카 솔닛, 『길 잃기 안내서』
변화는 꼭 필요하고 변화를 말하는 목소리가 다른 모든 목소리에 대한 부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우리는 너무 약해서 종종 오해하고 잘못 말하고 상처를 받는다. 목소리 안에 있을 땐 동참해주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외로웠고 바깥에 있을 땐 말할 수 없는 게 많아서 외로웠다.
_ 윤이형, 『붕대 감기』
4
11월에는 푸코 개론서를 열심히 파고, 12월부터 성의 역사 1-4권을 하루 1, 2챕터씩 꼼꼼하게 읽자는 것이 당초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그렇게는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산채비빔밥에 고추장 비비듯 슥슥 읽어나가질 거라고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의미로 뜻밖에 고전 중인 읽기 친구들. 이럴 때 바로 미친 개론서 덕후가 치고 나가줘야겠구나 싶다. 미개덕의 쓸모를 세상이 보여줄 때가 왔는가.
보름 줄여서, 15일까지만 개론서 읽고, 16일부터는 성의 역사 읽어나가야지. 모두 힘냅시다.
대구 집에서 푸코 책이 잔뜩 올라온다.
--- 읽은 ---
208. 책 Chaeg 2020. 11
(주)책(월간지)편집부 지음 / (주)책(잡지) / 2020
새로 나온 책들을 소개하는 짧은 글로 이루어진 긴 꼭지가 있는데, 그건 풀어놓고 쓰면 한 책당 두세 문장에 불과한 분량이다. 이거 다 읽어보고 쓰는 건 아니겠구나 싶기도 하다. 쏟아지는 새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말 업으로 해야되는 일인 것 같다.
209. 인생학교 섹스
알랭 드 보통 지음 / 정미나 옮김 / 썜앤파커스 / 2013
섹스학교가 있어서 섹스를 가르친다면, 대체 섹스의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섹스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잘 하는 법을 배우고 싶지만, 이 책은 잘 대하는 법을 가르친다. syo에겐 아직 어렴풋하지만, 때가 오면, 잘 대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날이 오는 것 같다. 그건 섹스 바깥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환대의 감정, 자신과 상대방 모두를 환대하는 마음가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가져간다고 믿는다. 물론 잘 하고 싶다. 그렇지만 먼저 잘 대하고 싶다. 섹스가 어려운 것은 그래서다. 사람이 늘 제일 힘들지- 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다.
210. 문
나쓰메 소세키 지음 /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
이럭저럭 전기 3부작이 끝났다. 소선생님 작품 경로 중 syo가 제일 좋아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대학 다닐 때는 『산시로』 속 산시로가 그렇게 나 같더라니, 길게 백수 생활을 경험하고 나니 『그 후』의 다이스케에게 마음이 간다. 그렇다면 앞으로, 『문』의 소스케에 이입하는 날이 올까. 세상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문턱 같은 곳에서 사랑하는 이와 둘만의 조용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여름이면 마루 끝에 함께 앉아 빗소리를 듣고,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글자를 물어보듯 함께 읽은 책의 구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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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와 현대성 / 오생근
판타스틱 과학클럽 / 최지범
왜 대법원은 특허법을 해석하지 않을까? / 오창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