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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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시켜준다 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할까, 해 볼까, 해도 되겠는데, 곧잘 하겠는데, 아 이런 안 하면 안 되겠는데, 하며 소리 없이 설레발 치다가 포기도 조용히 저 혼자 하는 인간이 있다. 저예요.
그가 거쳐온 화려한 포기의 역사의 몇 장면을 돌아보자.
꽤 어릴 적부터 그는 수전증을 앓고 있는데 이유는 알 수가 없었으나 어쨌든 대부분의 정교한 작업을 빈틈없이 망했다. 아, 인류는 훌륭한 의사 한 명을 잃었군. 정말 아쉽다. 국립대 의대 병원장을 포기하며 국민의 생명과 건강에 끼쳐야만 했던 그 거대한 손실에 미안해하던 syo(16)의 수학 성적은 4등급이었다고 한다.
정말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기다릴 만큼 기다려 주었으나 끝까지 자라지 않는 키를, 이제는 인정할 밖에 다른 방법이 없자 syo(19)는 결국 NBA 진출을 호쾌하게 포기하였는데, 그 당시 겨우 한 손으로 드리블하며 서너 발짝 정도 뗄 수 있는 실력에 막 도달한 참이었다는데.
시 쓰겠노라 깝치고 다녔던 대학 초년의 syo(21~22), 웬만한 인터넷 동호회만 가 봐도 제 것보다 잘 쓴 시가 돌하르방 모공보다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깝지만 노벨 문학상을 후학들에게 양보하기로 한다. 동네 노래방에서 선곡하는 중에 옆방에서 넘어오는 노랫소리를 듣다가 집에 돌아와 슈퍼스타K 참가 지원서를 찢었다. 왕십리역이 어느 방향인지 영어로 물어오는 외국인에게 대답을 해줬는데,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땡큐를 연발하던 그가 뚝섬역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삼성전자 해외 지사 임원 발령을 거절하기도 했다.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삼성전자는 syo란 놈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조차 모르지만......
언제나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면 쉽다. 포기도 그렇다. 포기로 태어나 포기하며 살아온 syo.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는 포기하는 것밖에 없는 syo씨. 본관이 어디세요? 본관이요? 어디 손 씨시냐구요. 아, 네, 저는 기브업 손 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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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이 이제 이틀 남은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선언합니다. 100북100복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100이라는 숫자는 한 달에 감당하기는 너무 거대한 숫자였다. 아깝다. 거의 다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120북80복 프로젝트를 할 걸. 한 달에 100개를 먹기에, 올해 복숭아 너무 실했어......
포기는 포기고, 김민철의 『하루의 취향』, 문상환의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이준석과 손아람의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김혼비의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이현우의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이진오의 『물리 오디세이』, 인권연대 기획의 『인간은 왜 폭력을 행사하는가?』, 백수린 등의『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오늘도 어제처럼, 저 중에 몇몇 아이는 끝마쳤고, 몇몇 아이는 아직 읽는 중이다.
이 네 권은 syo로 하여금, 또 아무도 시켜줄 생각도 않은 무엇인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김민철과 김혼비는 매서운 기세로 syo가 어떤 형태로든 에세이스트가 되는 것을 포기하게 했고, 이현우의 책은 어쩌면 syo도 서평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소한 희망의 목을 쳤다. 그리고 마지막 책은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더니, 앞으로 어디 가서 아는 척 깨친 척 깝죽대지 말고 네 한 몸이나 잘 건사하며 조용히 살라고 귓속말을 하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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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는 적게 읽고 영어 공부라는 놈을 해볼까 보다. 삼성전자는 여전히 syo를 모르고(흥, 오라 해도 안 간다, 요놈의 자본가들아아아아아아.....아......) 이제는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나도 당당하게 한국말로 가르쳐 줄 생각인데, 영어가 왜 갑자기 땡길까? 아아, 그것은 아마도,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신난다. 포기킹 syo는 9월엔 또 뭘 포기하게 될까?
검색창에 '포기'라고 때렸다가 눈에 띈 애들.
읽어 보진 않았으나, 읽어보지 않아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과 포기할 수 밖에 없는 것을 표지만으로도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