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문제집
1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선명하게 쓰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글을 갖고 싶다. 하지만 그건 능력보다는 태도에 가까워서,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처럼 쉽지 않고, 그렇게 사는 사람은 너무 쉬워서 말을 않는다. 아는 것이 부족해서 모르는 것의 경계를 슬쩍 타 넘는 습관이 생긴 거라면 많이 읽어서 고치면 되겠지만,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를 몰라서 이러는 거라면 길고 고된 길이 기다리고 있겠다.
2
먹고 사는 일과 관련해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의 공부를 드디어 시작했다. 며칠 되지 않았다. 혼자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느끼게 되고, 여럿이 공부를 하다 보면 24시간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깨닫게 된다. 읽기를 줄이는 수밖에 없다.
3
검은 책을 들고 있으면 어쩐지 지성이 깊어 보이고 검은 옷을 입으면 사람이 날씬해 보여서 좋지만 검은 컵을 사용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콜라도 한 잔 했나, 그러고 한 삼십 분쯤 뒀다가 보면 꼭 컵 주둥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들이 도포되어 있다. 빙 둘러가며 꼼꼼히도 발라놔서 다음 한 잔은 어디에 입을 대고 마셔야 할지 도무지 각이 안 선다. 나라는 녀석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불결한 인간이었나 싶다. 이제 키스 같은 거 할 때마다 죄책감이 들게 생겼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다.
4
갑자기 겨울이다. 당국은 방역체계의 수위를 높일 예정이다. 바탕화면은 5분 단위로 바뀌면서 세계 곳곳의 아름다운 도시들을 보여준다. 마스크를 쓰지 않던 시절의 풍경이다. 그곳으로 쉽게 돌아갈 순 없을 것이다.
오늘은 구청에서 점심을 먹는다. 전 직장에 방문하는 기분은 오묘하다. 너희는 그 안에서 오늘도 힘든 일상을 보내겠지만, 그것조차 나한테는 좋았던 추억일 뿐이야- 하는 마음이랄까. 제대 후 부대에 놀러간 것도 세 번쯤 된다. 애기들이 작대기 하나씩 늘어서 어른인 척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귀여웠다. 관두기 전에 서고에 잔뜩 쌓아놓았던 마스크들, 이제는 다 뿌려졌는지 보고 오겠구나.
--- 읽은 ---
217. 원자핵에서 핵무기까지
다다 쇼 지음 / 이지호 옮김 / 정완상 감수 / 한즈미디어 / 2019
핵이라는 게 어마어마하게 복잡할 것 같지만 원리 자체는 간단한 모양이다. 그저 그 원리를 확인하거나 최적의 이용 상태를 찾아내기 위한 실험이 위험하고 비싸서 그렇지. 그러니까 이 귀여운 책을 통해 그 원리를 차곡차곡 쉽게 이해했다고 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개인이 핵무기를 만들 수는 없겠다. 아, 이참에 소소하게 누클리어봠 하나 만들어보려고 그랬는데. 까비.
218. 내가 예민한 게 아니라 네가 너무한 거야
유은정 지음 / 성안당 / 2020
읽은 책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읽을 책에 대한 기대가 사라지는 장르가 있다. 내 마음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일이라도 있지 않고서는, 고집쟁이들은 심리학책 보는 게 아니다. 많이는 아니어도 잊을 만하면 읽어주는 장르인데도, 덕 봤다 싶은 적이 한 번도 없다. 내 멘탈이 그만큼 건강하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건 참 뜻밖인데?
219. 존리의 부자되기 습관
존 리 지음 / 지식노마드 / 2020
부동산이니 뭐니 깝치지 말고 연금저축펀드 들고 주식이나 하라는 이야기다.
--- 읽는 ---
진실에 복무하다 / 권태선
보통의 언어들 / 김이나
인류를 구한 12가지 약 이야기 / 정승규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물학지식 50 / J. V. 샤마리
쇼펜하우어 평전 / 헬런 짐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