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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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드리 로드의 <블랙 유니콘>을 읽으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백인 남성의 시에,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졌는가를 깨닫는다. 로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그는 흑인이자 레즈비언이며 페미니스트이다. 1950년대부터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퀴어 운동과 담론을 형성한 이론가로 흑인 여성 디아스포라 페미니스트 조직화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1960년대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백인과 남성들로만 이루어진 문단 주류를 깨뜨린 최초의 흑인 여성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블랙 유니콘>에 앞서 읽었던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로드는 ‘시는 사치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로드는 ‘삶을 성찰할 때 우리가 어떤 빛을 비추느냐에 따라 우리가 빚어낼 삶의 형태와 그 삶을 통해 이룰 수 있는 변화가 결정된다. 우리가 마법 같은 일들을 생각해 내고, 그것을 실현할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이런 빛 속에서다. 시는 바로 그런 빛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시를 통해 이름도 형식도 없이 미처 태어나지 못한 채 느낌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디어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으며 ‘꿈이 개념을, 감정이 아이디어를, 앎이 이해를 낳듯이, 경험을 정제해 나온 진실어린 시는 우리의 사유를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시스터 아웃사이더>, 39쪽). 로드가 보기에 시는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일깨워 주는 경험의 정수’이며 그렇기에 시는 사치가 아니다. ‘시는 우리가 존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우리의 생명줄’이자, ‘이름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시스터 아웃사이더>, 41쪽)

한마디로 로드에게 시는 ‘생존과 변화에 대한 꿈과 희망을 확인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언어로, 아이디어로, 좀 더 구체적인 행동’(<시스터 아웃사이더>, 41쪽)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에 그는 여성이자 흑인, 레즈비언으로서, ‘흑인 여성 시인전사(戰士)’로서 시를 썼으며 그것이 바로 자신이 무엇보다 해야 할 일이었다.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꾸는 일, 그 자체가 로드의 시(時)인 셈이다. <블랙 유니콘>은 바로 그 흑인 여성 시인전사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은 ‘블랙 유니콘’, ‘살아남기 위한 기도’, ‘재창조’, ‘시스터 아웃사이더’ 4장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장을 여는 시는 ‘블랙 유니콘’은 제목에서부터 많은 것을 상징한다.


블랙 유니콘

블랙 유니콘은 탐욕스럽다
블랙 유니콘은 성마르다.
블랙 유니콘은 오인되었다.
그림자로
또는 상징으로
차디찬 땅을 헤치며
끌려 다녔다.
내 분노를 향한 조롱이
안개처럼 흩뿌려진 곳을,
유니콘의 뿔이 놓이는 건 그녀의 무릎 위가 아니라
커져 가는
달 구덩이 깊숙한 곳이다.

블랙 유니콘은 가만있지 못한다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블랙 유니콘은 자유롭지
않다. (<블랙 유니콘>, 23쪽)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희귀한 존재인 유니콘. 그런데 그 유니콘은 우리가 익숙하게 상상하듯 하얀 모습이 아니다. 검다. 게다가 순수한 존재가 아니라 탐욕스럽고 성마르다. 그림자나 상징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끌려 다녔고, 무엇보다 자유롭지 않다. 이 블랙 유니콘이 로드를 비롯한 아프리카 출신 흑인 여성들을 뜻함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롭지 못하고, 타자화되어 그림자처럼 오인된 존재. 그러나 그 블랙 유니콘은 ‘수그릴 줄’ 모른다. 그렇기에 로드는 그 다음 시 ‘여성이 말한다’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낸다. ‘나는 여성이었다/아주 오래전부터/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나는 /여성이고/ 백인이 아니다.’ (‘여성이 말한다’, 25쪽). 나는 여성이며, 흑인이다가 아니라 ‘백인이 아니다’ 엄숙하게까지 느껴지는 이 선언에는 짜릿한 전율이 인다. 나 또한 ‘유색colored’ 여성이지 않은가. 첫째 장에서 흑인 여성임을 선언한 로드는 ‘예만자의 집에서’, ‘다호메이’, ‘코냐기 여자들’과 같은 시를 통해 흑인의 신화와 흑인 여신을 호명하고 노래한다. 폭력과 식민의 역사에 맞서 온 흑인 여성들의 저항을 기록하며 아프리카 여성 신화를 1970년대 미국의 흑인과 흑인 여성들의 삶과 연결 짓는다.

로드는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 <여성/생태학>의 저자인 ‘메리 데일리’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다. 왜 아프리카의 여신 아프레케테는 예로 들지 않았느냐고, 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여신들의 이미지는 백인이며, 서구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것이냐고. 비(非)백인 세계의 여신들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역사와 신화적 배경이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음을 고백한다. ‘우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모든 여성이 똑같은 억압을 겪는다고 하는 것은 가부장제의 수많은 다양한 도구들을 고려하지 못한 것’ (<시스터 아웃사이더>, 95쪽)이라고 지적한다. ‘백인 여성의 역사와 신화만이 권력과 배경을 요구하는 모든 여성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성을 갖춘 유일한 여성사라고 보는 가정, 그리고 백인이 아닌 여성들과 그들의 역사는 그저 들러리나 피해 사례로만 가치가 있다는 가정이 어떤 식으로든 여성들 사이의 인종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지 깨달아야’ 한다고 말한다. <블랙 유니콘>의 첫째 장은 바로 그 편지 내용을 로드가 시로 표현한 것과 마찬가지 이다.

두 번째 장 ‘살아남기 위한 기도’에는 흑인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이 시로 그려진다. 누군가는 그들을 ‘미쳤다고/못됐다고 우쭐거린다고 약하다고 흑인이라고’ 부른다. 그런 상황 아래 그들은 ‘서로의 입 속 가득한 고통을/말하려 애쓰며 말하려 애쓰며’ 말하려 애쓴다. 그러다가 ‘채찍 끝에서/혀에서/서로의 배신이란 가장자리에서/존중’의 의미를 배우기도 한다. ‘길에서 마주친 서로의 얼굴로부터/그 아름다운 검은 입으로부터/낯익은 신중한 눈으로부터/눈을 돌리고/홀로 스쳐 가는 것’임을(‘헤리엇’, 47~48쪽). 그들 아이들은 ‘해골 아이들’이다. ‘아이들 얼굴 아래에는 햇살이 없다/어둠도 없다/남아 있는 심장도 없다/새벽이면 아이들의 몸을/여성으로 돌려놓을/그 어떤 전설조차 없다.’(‘사슬’, 49쪽) ‘선택이라는 잠깐의 꿈조차도 마음껏 누릴 수 없’으며 그들의 일상은 ‘해가 뜨면 두려워한다/해가 계속되지 않을까 봐/해가 지면 두려워한다/아침에 다시 뜨지 않을까 봐’. 그렇기에 ‘아이들의 꿈이 우리의 죽음이 닮아가지 않도록’ ‘미래를 길러 낼 단 하나의 지금을 찾아야만’한다(‘살아남기 위한 기도’, 62~63쪽). 이토록 혹독한 삶인데도 로드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기원한다. ‘자라나 거라/검게 그리고 아름답게’(‘앨빈 프로스트를 위한 추도사’, 79쪽), 로드의 시에서 검정은 아름다움이다.

로드의 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황량하고 거친 사막과 같은 흑인 여성의 삶이 진솔하게 그려지면서도 그저 그 고통을 울부짖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당당히 마주하고, 과거에는 더 그러했고 지금도 여전히 힘겹지만 앞으로는 그 삶이 평화롭고 윤택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끊임없이 소망한다는 점에 있다. 삶을 향한 그 열정적이고 희망에 찬 자세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3~4장인 ‘재창조’와 ‘시스터 아웃사이더’에서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는, 자매들 간의 연대를 통한 삶의 재창조를 노래한다. 로드 그 자신은 ‘얼마나 수없이 내 뼈저린 혼란을 검은색’(‘바깥’, 103쪽)이라 불렀는지 모른다며 회한어린 고백을 하지만 이제 그는 ‘나만의 이름을 찾으려 애쓴다’ 그는 이제 ‘나의 형상을 찾는다’(‘바깥’ 104쪽).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는 해방’(‘하지만 내 딸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155쪽)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 해방은 ‘시스터 아웃사이더’ 즉,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자매들의 연대에 있음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우리는 가난한 시절에 태어나
결코 서로의 굶주림을
어루만지지 못하고
결코
빵 부스러기를 나누지 못했다
두려워서
빵은 적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키우며
자신을 존중하고
또 서로를 존중하라 가르친다.

이제 네게 외로움이란
성스럽고 쓸모 있는 것
이제
더는 필요 없는 것
네 빛은 환하게 반짝인다
하지만 난
알려 주고 싶어
너의 어둠 역시
그윽하고
두려움을 넘어선다고. (‘시스터 아웃사이더’, 170쪽)



로드는 ‘아웃사이더인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지지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온전히 알아야 합니다.’ (<시스터 아웃사이더>, 98~99쪽) 말한 바 있다. ‘강인한 여성들은 자신의 증오가 어떤 맛인지’ 알고 있으며 ‘비밀스럽고 참을성 있는 아름다운 여성’ (‘초상’, 90쪽)들은 그 내면의 부드러움을 사랑이라는 부드러운 열망, 마음속의 뜨거운 불로 승화해(‘여성에게서 불을 빼앗지 말라’, 177쪽) 자신들이 처한 억압적인 상황을,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음을 긍정한다. 폭력과 억압 아래 수없이 상처받고 한때는 자기 자신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그런 자신을 껴안고 보듬고 나아가 다른 이들까지 끌어안을 수 있음을 시로써 증명한 기록이 바로 <블랙 유니콘>이다. 이런 로드의 시는 ‘눈물을 떨어뜨릴 땅’(‘200주년을 기리는 시’, 142쪽)조차 없던 여성들에게 한줄기 아름다운 위로이자 연대를 위한 뜨거운 외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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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12-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기심에 찾아 보았는데,
신간이더라구요. 당근 중고서점에도
없고, 도서관에도 비치가 되어 있지
않네요 에잉~

제목은 멋지네요.

잠자냥 2020-12-16 18:03   좋아요 0 | URL
네 따끈따끈한 신간입니다~ 중고로 만나시려면 좀 기다리셔야 할 듯하네요. ㅎㅎ

유수 2023-01-29 22: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유수 2023-01-30 08:35   좋아요 0 | URL
엇.. 이거 반은 오타고 반은 진심으로 눌린 거예요. 애 옆에서 누워서 보다가 뭐지 이 무릎꿇을 리뷰는..생각하다가 아이가 제 폰 만져서 화면을 껐던 거 같은데 이렇게 되었네요. 뭐지 이거(얘) 생각하실까봐 ㅋㅋ 구구절절 달아요

잠자냥 2023-01-30 08:43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아무리 확대해서 보려고 해도 정확히 안 보여서 그냥 엄지척으로 생각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올해 초만 하더라도 겨울이면 코로나에서 벗어나 극장도, 여행도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꿈이었다. 코로나는 갈수록 기승이다. 다행스럽게도 백신이 속속 나오고 있다.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앗아간 이 끔찍한 바이러스도 서서히 사라지겠지. 그러나 바이러스가 남긴 상처를 지우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완전한 치유가 어려울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가 남긴 가장 큰 상처는 차별과 혐오가 아닐까. 맨 처음 이 바이러스는 인종차별을 불러왔다. 중국에서 시작했기에, 동양인들이 차별과 혐오, 폭력에 시달렸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 땅에서는 이 바이러스가 처음 폭발적으로 터진 곳이 종교집단이었고, 두 번째로는 성소수자들이 자주 가는 클럽에서 대규모로 유행했기에 특정 종교인과 성소수자들이 혐오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뿐인가. 아무리 조심해도 ‘확진자’가 되는 순간 주위의 비난과 냉대, 혐오의 시선은 피할 길이 없는 것 같다. 백신을 개발했듯 이 깊은 상처를 낫게 하는 치유제도 인간은 지혜롭게 찾아낼 수 있을까?

사람들은 종종 책의 힘, 문학의 힘을 간과한다. 문학은 이 현실에서 쓸모없는, 어쩌면 몽상가들을 위한 지적 놀이 또는 허영으로까지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상에서도 한 권의 책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위안과 위로, 지혜를 줄 수 있다고 믿는다. 차별과 혐오가 첨예해진 지금, 사람 사이의 연대를 강조하는 문학 작품이야말로 가장 좋은 마음의 백신은 아닐까.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에는 고달픈 현실에 지친 이들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이상 세계가 등장한다.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동시에 갖고 태어난 히즈라 ‘안줌’이 이곳저곳 떠돌다 무덤가 사이에 만든 ‘잔나트 게스트하우스’와 지혜로운 ‘마오즈 할머니’가 이끌어가는 ‘서우훠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두 공동체에는 차별도, 혐오도 존재하지 않는다. 파라다이스라는 의미의 ‘잔나트’와 ‘수활(受活)’, 즉 ‘고통속의 즐거움’이라는 뜻을 지닌 ‘서우훠’ 마을은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그곳에는 저마다 세상에서 배척당한 이들이 모여 산다.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만든 안줌 자신이 앞서 말했듯 제3의 성 ‘히즈라’이며, 잔나트에는 그녀처럼 소외되고 버림받은 존재들이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매춘부라는 이유로 장례식장에서조차 거부당한 여자의 시신을 씻기고 장례를 치러주면서 이곳은 장례식장도 겸하게 된다. 죽은 이들까지 품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진정한 파라다이스이다.

서우훠 마을은 애초부터 장애를 지닌 사람들만 모여살고 있다. 중국의 세 현이 교차하는 바러우산맥에 자리해, 가장 가까운 마을과도 최소 십 여리가 떨어진 이 마을은 명나라 때 조성되어, 맹인과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장애인이 아닌 장성한 사람들은 짝을 찾아 외지로 떠났다. 그러다 보니 바깥세상의 장애인들은 마을로 들어오고 마을의 ‘온전한 사람들’은 모조리 밖으로 나가, 현재는 장애인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이런 사정이라 어느 군, 어느 현에서도 이 마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서우훠는 세상에서 잊힌, 세상 밖 마을이다. 그런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폭압적인 사회주의 체제에 속하지 않는 행운을 누리게 되고,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몸이 불편해도 서로 돕고 보듬어주면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대기근에 시달릴 때도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지복의 성자>의 인도, <레닌의 키스>의 중국. 서로 멀리 떨어졌고 체제도, 정치 상황도 다르지만 소외된 이들이 서로 기대고 보듬어주면서 그들만의 천국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습은 꽤 닮았다. 그런 공간이 가능하도록 애써온 존재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른바 ‘정상’을 벗어난 이들을 산 자, 죽은 자 가리지 않고 온 마음으로 껴안은 안줌과 서우훠의 마오즈 할머니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그처럼 성자와 같았느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들도 젊은 시절에는 자기만을 위해 살았다. 그토록 바라던 여성으로 다시 태어난 안줌은 화려하게 꾸미고 여왕으로 군림하며 자기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갔다. 마오즈도 한때는 혁명을 통해 현장이나 여주석 등 높은 인물이 되리라는 야망을 품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상처 주게 되었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갉아먹었다. 그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보듬고 이끌어가는, 공동체를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 이 두 ‘할머니’들의 품에서 소외된 이들은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지복의 성자>와 <레닌의 키스>를 읽다 보면 인간은 서로 가장 상처 주는 존재이지만 결국 사람에게는 사람만이 답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고 삶을 변화시키는 이야기는 <컬러 퍼플>에서도 엿볼 수 있다. 상처받은 영혼 ‘셀리’에게 ‘슈그’가 그런 존재이다. 흑인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일찍부터 성폭행당하고, 팔려가다시피 결혼해 가부장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가느라 삶이 고통 그 자체였던 ‘셀리’는 남편이 사랑하는 여자 ‘슈그’가 병들어 자신의 집에 오는 바람에 함께 살게 된다. 이 기묘한 상황 자체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데, 놀랍게도 셀리는 슈그에게 마음을 열면서 그녀로부터 위로받고 마침내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법을 배운다. 두 여자가 서로 의지하고 기대면서 그들의 삶이 아름다운 보랏빛으로 물드는 순간을 지켜보는 일은 무척 감동적이다.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신(神). 신은 셀리가 아무리 간절히 편지를 써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슈그를 만나기 이전 셀리는 끔찍한 삶을 저주하면서 신을 모독했다. 그러나 이제 슈그가 다정히 속삭인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고, ‘그것’일 뿐이라고 이 세상 모든 만물이라고. ‘좋은 걸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이라고(<컬러 퍼플>, 260쪽). 누군가와 마음으로 소통하고 연대하는 인간은 상처도 씻을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기어이 살아남는다. 삶을 바꿀 수 있음을 셀리가 증명한다. 셀리는 슈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환대를 다른 이들에게 나눠줄 것이다. 누군가를 마음으로 환대하고 사랑하면 그것은 다시 고리가 되어 다른 이에게 이어진다.

안줌과 마오즈, 셀리와 슈그, 네 여성은 저마다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 편안하게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곳에서 폭력적인 시절을 거쳐 왔다. 자기 온몸으로 차별과 혐오를 겪었으며, 때로 억압의 대상이도 했다. <지복의 성자>에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카스트제도, 빈부격차 등등 인도의 복잡한 현실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남성의 몸 안에 갇힌 여성 안줌의 처지는 어떻게 보면 그 몸 자체로 인도의 복잡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다. 힌두교 안의 이슬람, 인도 안의 이슬람교도, 또는 카슈미르인. 그 모든 것들이 그 한 몸에서 날마다 전쟁을 벌인다. 마오즈 할머니는 중국의 수많은 혁명의 역사를 제 몸으로 겪었으며 <컬러 퍼플>의 셀리는 가부장의 폭력과 인종차별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상처에 쓰러져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기어이 그 삶에 꺾이지 않은 것은 그 곁에 결국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줌의 잔나트 게스트하우스를 지켜보노라면 과연 정말로 그곳이 무덤인지, 폭력이 난무하고 계급과 성, 인종, 종교,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 보통의 세상이 무덤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 세상에 비하면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공간인 잔나트와 서우훠마을이 사람들이 나아갈 가장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까. <지복의 성자>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서로를 배신하고 죽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258쪽)고.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마음, 공감하고 연민하는 마음에서 변화는 일어난다. “나아지고 싶다면 우리 모두 어디선가부터 시작을 해야 하고, 우리가 고쳐나가야 할 건 결국 우리 자신이에요.”(<컬러 퍼플>, 349쪽)라는 말은 그래서 더 의미 깊게 다가온다. 차별과 혐오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진 코로나 시대에 이 책들은 분명 마음의 백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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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4 1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안 읽으려고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인간 옌례커를... 기어코 읽게 하시네. 내가 잠자냥님 덕택에 한 번 더 미칩니다, 밋쳐요!
내년에 독후감 쓰겠습니다. 에휴.... 인생이 다 그렇지 뭘. ㅋㅋㅋㅋㅋㅋ

잠자냥 2020-12-14 22:27   좋아요 0 | URL
하하하 이렇게 낚나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4 2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문동 리뷰 대회 응모작인가요?

잠자냥 2020-12-14 22:24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문동 책 3권 이상으로 된 이런 리뷰가 많이 올라올 듯 하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0-12-15 09:09   좋아요 0 | URL
오늘이 마감이네요...
그리하야 저도 도전해 볼까 어쩔까나
생각 중이랍니다 :> 시즌이니깐요 ㅋㅋ

<레닌의 키스>가 저랑 겹치시네요 ~

잠자냥 2020-12-15 09:36   좋아요 0 | URL
자 어서 도전하세요~ ㅎㅎ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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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파커에 비틀즈에 클래식에 야구에 맥주에, 동그란 젖가슴의 소녀에 그런 여자들이 별 매력 없는 남주를 좋아하거나 뜬금없이 하룻밤 자주는 거나... 하루키는 참 변함없이 하루키구나. 내가 이걸 왜 읽었지. 에휴 하루키 그만 읽자. 하루키옹 여전히 젊은이다워 좋겠수. 난 늙어서 그만 빠이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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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2-14 0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도대체 동그란 젖가슴을 왜이렇게 놓지 못하고 집착하나‘ 싶었어요. 네모난 젖가슴이 갖고싶어집니다.. 히융-

잠자냥 2020-12-14 08:29   좋아요 1 | URL
ㄴㅋㅋㅋㅋㅋㅋ 아 동그란 거 나올 때 또 시작이네 또 시작 했다니까요.

Falstaff 2020-12-14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 엄청 얻어맞을 제 생각을 굳이 이야기하자면.... 여태 하루키 읽는 사람도 있나요? ㅋㅋㅋㅋ

잠자냥 2020-12-14 09:56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가끔 읽어 보고 싶어지기는 하더라고요. 근데 이젠 정말 못 읽겠습니다. ㅎㅎㅎㅎ

자목련 2020-12-14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이제 그만 읽으려고요. <고양이를 버리다>는 좋았는데 ㅎ

잠자냥 2020-12-14 17:13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최근 나온 장편은 읽지 않았어요. ㅎㅎ <고양이를 버리다>는 저도 좋았는데. ㅎㅎㅎ
 
러시아 인형 대산세계문학총서 15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안영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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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사랑, 삶과 꿈이 뒤섞인 이야기들. 인형 속에 또 인형이 나오는 러시아 인형처럼 여러 층위로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문학 단편선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읽기 전에 맛보기(?)로 읽었는데 이 정도 환상 문학이라면 다음 책도 읽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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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2-14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소설을 저는 ‘아몰랑 주의‘라고 일컫습니다만. ^^;;
이상하게도, 분명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카사레스 이 냥반의 책이 눈에 띄면 읽는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돈 주고 사서 말입니다. 병입지요, 병. ㅋㅋㅋ

잠자냥 2020-12-14 09:57   좋아요 0 | URL
네, 폴스타프 님께서 전에 ‘아몰랑 주의‘라고 명명하신 것 보고 참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도 참 아몰랑-하죠? ㅎㅎㅎㅎ
현대문학 단편선까지는 읽어 볼 생각입니다. ㅎㅎ
 
블랙 유니콘
오드리 로드 지음, 송섬별 옮김 / 움직씨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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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자 흑인, 레즈비언로서 침묵과 횡포에 맞선 전쟁에서 스스로 시인전사로 자신이 해야할 일을 시로 기록한 오드리 로드. 아프리카의 신과 신화 등 낯선 언어들 때문에 읽고 이해하는 데 조금 버거웠지만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그간 백인, (그것도) 남성 위주의 시에 익숙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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