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괭 님이 LGBT(Lesbian/Gay/Bisexual/Transgender) 관련 책을 열심히 보고 계신 것 같다. 그래서 몇 가지 책을 추천해보고자 이 페이퍼를 쓰기로 했다. 단, 나는 그 대상을 문학 작품으로만 한정했다. 한국 현대문학도 퀴어 문학이 봇물을 이루고 있지만 나는 많이 읽지 않은 편이고(박상영/김봉곤 등), 대부분의 작품들이 주로 단편인 것 같아 한국 문학은 제외했다. 내가 읽은 것들 중 좋았던 것이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알아두면 좋을 법한 퀴어 문학 위주로 정리해봤다.

선정 기준
1. 세계 고전 문학 중에서 골라봄
2. LGBT 인물이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고르지는 않았고, 동성애가 주요한 모티프로 작용한 작품 위주로 골랐다.
3. <핑거스미스>의 세라 워터스처럼 레즈비언 작가로 유명한 이의 작품도 제외했다.
4. 현대 문학인데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나중에 추가했다.
5. BL/GL 문학도 제외(내가 읽은 게 없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알렉시/은총의 일격>

이 아름다운 작품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다. ‘알렉시 혹은 공허한 투쟁에 관하여’는 어느 동성애자의 고백이다. 동성애자인 알렉시는 아내에게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그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삶을 조용하지만 담담히 편지로 고백해간다. 한 가지 매우 특이한 점은 이 소설에는 단 한번도 ‘동성애’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는 동성을 사랑했다는 단어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는 그의 고백을 읽어나가면서 알렉시의 내밀한 삶을 고스란히 짐작할 수 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여성이면서도 주로 남자가 주인공인 글을 썼으며, 남성 동성애자를 다룬 이야기도 여럿 남겼다. 왜일까? 아마도 그녀가 사랑했던 두 남자는 모두 동성애자였고 인생의 절반을 함께한 반려자는 여성이었다. 이런 작가의 삶도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앙리 드 몽테를랑, <소년들>

표지 이미지와 <소년들>이라는 제목에서 그 내용이 조금 짐작가능하다. 가톨릭 학교 파르크 콜레주, 우리나라로 치면 중고등학교를 합친 콜레주를 배경으로 하는 소년들의 이야기- ‘나이 열다섯 살 반쯤 되면 사랑에 빠지는 덴 이골이 붙는다.’ 이런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소년들>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사랑’이다. 파르크 콜레주의 원장 신부가 학교에 세운 규칙은 ‘많이 사랑하기, 많이 포옹하기, 많이 기도하기’일 정도이다. 원장 신부의 이런 가르침(?)을 떠받들기라도 하듯이 이 학교 학생들은 하나같이 선후배 커플을 이뤄 서로 열렬히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이 작품 주인공인 ‘알방’과 ‘세르주’는 좀 더 특별하다.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이다. 가톨릭 학교에서 학생 사이의 사랑을 장려한다고? 걱정하지 마시라. 학교에서 권장한 것은 서로의 ‘영적인 성장을 돕는 사랑’이다. 그러나 육체가 만개하고 성적으로 성숙해 가는 소년들은 이 사랑을 정신적인 것에만 한정하지 않고, 그들의 사랑은 뜻밖의 전개로 나아가는데…….



존 치버, <팔코너>

이 작품은 ‘페러것’이라는 한 남자가 ‘팔코너’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형을 살인한 죄로 구속됐다. 감옥에 들어오기 전 직업은 ‘교수’였고 심한 마약중독자이다. F동 독방에 수감되는 페러것. 교도관의 말에 따르면 F동의 ‘F는 성교(fuck), 마약중독자(freak), 멍청이(fools), 동성애자(fruits), 초범(first-timers), 뚱뚱한 놈(fat asses), 망상(phantom), 뻔뻔함(funnies), 미친놈(fanatics), 저능아(feebies), 장물아비(fences), 등신(farts)의 머리글자’라고 한다. 이 분류대로라면 페러것은 마약중독자이자, 초범에 속할지 모르겠다.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동성애자. 이 소설이 좀 더 흥미로웠던 이유는 페러것에게서 존 치버의 모습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심한 알코올 중독자였으며, 결혼 생활을 유지했지만 평생 동성애 스캔들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실제로 동성 연인이 있었던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페러것에게서 드러난다. 존 치버는 페러것을 통해 사변적인 소설로 그쳤을 수도 있을 이야기를 붕괴되어 가는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

미시마 유키오의 장편 데뷔작으로 동성에게 사랑을 느꼈던 그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특유의 유려한 필체로 담아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던 주인공은 할머니의 과보호 아래 주로 소녀들과 어울리며 자란다. 다섯 살 때부터 육체적으로 활력 넘치는 소년이나 왕자를 동경하며, 그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을 공상하기를 즐긴다. 이 소년이 처음 사정을 경험하는 것도 그 대상이 여성이 아니다. 귀도 레니의 <성세바스티아누스>를 보며, 자신의 욕망의 본질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중학교에 진급한 그는 실제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데……. 스스로 성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이성애자의 가면을 쓰기도 하는 등 미시마 유키오의 연약하고 섬세한 시절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주나 반스, <나이트우드>

에즈라 파운드, 그레이엄 그린, 딜런 토머스 등 동시대 작가들로부터 찬사와 지지를 받은 ‘퀴어문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 ‘소년의 몸을 지닌 소녀’ 같은 로빈 보트와 남편, 그녀를 갈망한 두 여자, 여장을 즐기는 한 남자의 사연이 펼쳐진다. 퀴어 담론으로 해석하기에 아주 풍부한 텍스트인데, 읽기 수월한 작품은 아니다. 일단 문장이 굉장히 길고 화려해서 쉽게 읽히지 않는다. ‘1880년 초, 하느님에게 선택받았으나 뭇사람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저 민족의 영속이 과연 권장할 일인지에 대한 근거 있는 의구심에도 아랑곳 않고, 강장한 기백과 군사적인 아름다움을 겸비한 빈 태생의 여성 헤트비히 폴크바인이, 캐노피가 달리고 휘장에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갈래 진 나래가 박혔으며 공단 겉감에 폴크바인가家의 문장을 올 굵고 색 바랜 금사로 우뚝 뜬 깃털 침대보가 덮인 휘황한 선홍빛 침대에 몸을 누인 채 마흔다섯 나이에 초산으로 독자를 낳았으니, 이는 의생이 임부의 죽음을 내다본지 꼭 이레째 되는 날의 일이었다.’ 첫 시작부터 숨 가쁘다. 나도 실은 이 작품 아직 완독 못했다. -_-; 올해는 꼭 마쳐야지.


래드클리프 홀, <고독의 우물>

독서괭 님에게 읽어보시라고 추천한 책. 알라딘에서도 퀴어도서전을 하고 있던데, 이 작품이 그 리스트에서는 빠져서 약간 의아했다. 이 작품은 현대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로 꼽힌다. 실제 남장을 하고 성소수자로 살았던 래드클리프 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출간 즉시 동성애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되었다. <수영장 도서관> 같은 적나라한 작품도 버젓이 읽히는 오늘날 보기엔 왜 금서 처분 받았는지 의아할 정도이지만, 여하튼 평생 남성으로 살기를 소망했던 한 여인과 어린 소녀 사이의 강렬하고 진지한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단, 나는 이 작품 주인공이 자신의 정체성을 레즈비언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FTM 트랜스젠더가 아닐까 싶다. 사랑받지 못해 고독한 이의 슬픔을 참 절절히 표현한 작품.





윌리엄 S. 버로스, <퀴어>

내가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지만(사실 나는 <퀴어>, <정키>, <네이키드 런치> 등 버로스 작품은 다 싫어한다), 퀴어 문학에서 알아두면 좋은 작품이라 골라봤다. 동성애에 대한 갈망이 노골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이유로, 집필된 지 30년 만에야 세상에 드러난 윌리엄 버로스의 대표작으로 그 자신의 절절한 경험이 1940년대 음산한 멕시코시티를 무대로 그려진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와 함께 비트세대를 대표하는 문학으로 꼽히기에 두 작품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길 위에서>도 동성애 코드가 있기는 하다.  앨런 긴즈버그, 잭 케루악, 윌리엄 버로스 등 비트제너레이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영화 <킬 유어 달링>도 추천. 꽃미남 시절 ‘데인 드한’을 만날 수 있다.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소설뿐 아니라 영화, 뮤지컬, 연극 등 거의 모든 장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유명한 작품. 나는 동명의 영화만 봤는데 영화도 추천한다.. 동성애자인 몰리나는 반도덕 범죄자로 기소되어 복역 중인데, 그곳에서 감방 동료로 발렌틴을 만난다. 발렌틴은 혁명을 꿈꾸는 진보적 정치범이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발렌틴이 처음 몰리나를 만나 그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상당히 반(反)진보적이다.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혐오하고, 그의 여성스러운 취향을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서로 이해하게 되고, 결국 이성애자였던 발렌틴이 게이인 몰리나를 사랑하게 된다. 독자는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해주던 비극적인 영화 이야기처럼 이 둘의 관계 또한 어쩐지 그렇게 되리라 예상할 수 있는데, 책을 덮고 나서 한동안 먹먹한 기분이 든다.







장 주네, <도둑 일기>

도둑 출신 작가 장 주네의 자전적 소설로, 이 작품은 장 주네가 절도죄로 수감된 교도소를 탈옥한 후 떠돌이 생활 동안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실 장 주네는 그저 도둑질만 한 게 아니라, 부랑자로 떠돌며 남창을 하기도 하는 등 밑바닥 삶을 전전했다. 주네는 자신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의 치부를 폭로하는 동시에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덕목으로 승화하고 있다. 읽은 지 꽤 오래 되어서 세부 내용은 기억이 거의 안 난다....;









앙드레 지드, <위폐범들>/<반도덕주의자> 또는 <배덕자>

<위폐범들>은 자신이 사생아임을 알고 집을 나온 청년 베르나르, 문학소년 올리비에, 지식인 에두아르, 이 세 인물을 둘러싼 수많은 인물들의 일화가 얽히고설킨 작품으로 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앙드레 지드는 인습에 대한 반항, 동성애, 선과 악 문제 등의 주제를 다룬다. <반도덕주의자> 또는 <배덕자>는 알제리를 여행하며 동성애에 눈을 뜬 앙드레 지드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지드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주인공 ‘미셸’은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받은 유산으로 알제리, 이탈리아 등을 여행한다. 여행 도중 폐병에 걸려 피를 토한 미셸은 휴양지에 머물며 아내의 극진한 간호를 받는다. 서서히 건강을 회복한 그는 그곳에서 아내와는 다른, 어린 소년들에게 매혹되는데……. 출간 당시에도 비도적적인 내용이라는 이유로 대중의 외면을 받았지만 오늘날도 그 도덕적 논란은 분분할 것 같다.


글로리아 네일러,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등장인물 가운데 레즈비언 커플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퀴어 문학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작품을 이 리스트에 추가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워낙 좋은 작품이라 여러 사람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올려본다. 1960년대 미국 북부 도시의 빈민가 ‘브루스터플레이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다양한 이유로 이 낡은 아파트에 살게 된 일곱 명의 흑인 여성들 삶을 다루고 있다. 작품에 나오는 여성들은 20대에서 60대,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 어머니와 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등으로 다양하며, 그들을 중심으로 성차별, 인종차별 문제를 날카롭게 보여준다. 그중 차별 받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소외되는 레즈비언 커플 이야기는 말도 못할 정도로 절망적이다. 차별 속의 차별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작품이랄까.







크리스타 빈슬로, <제복의 소녀>
<제복의 소녀>를 한두 페이지 넘기면 지은이 크리스타 빈슬로의 사진이 실려 있다. 까만 머리에 조용한 눈, 잔잔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이는 미소. 표정보다 눈길이 가는 것은 복장이다. 그녀는 셔츠와 넥타이에 트위드 재킷을 입고 있다. 1888년에 태어나 1944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이기에 그 당시 이런 차림새는 틀림없이 파격이었을 것이다. 크리스타 빈슬로는 20세기 초, 연극과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며, 레즈비언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 준 선구적 작가로 꼽힌다. <제복의 소녀>에는 그런 작가의 삶과 정체성이 투영되어 있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 <회색 노트>

10대 시절 내가 몸살을 앓을 만큼 좋아했던 작품, <회색노트>- 사실 이 작품은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대하 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 첫 권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따로 출간되어 널리 읽히는 이유는 그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회색 노트>는 <티보가의 사람들>, 이 웅대한 대하소설의 시발점이자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에서 태어나 억압적인 가톨릭 교리 속에 성장한 ‘자크’와 자유분방한 프로테스탄트 집안의 ‘다니엘’이 교류하면서 빚어내는 우정과 영혼의 교감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런데 두 사람이 어찌나 절절하게 사랑하는지, 이 관계를 어찌 동성애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물론 성장하는 두 소년의 한때의 이야기이기에 그 후 대하소설 <티보 가의 사람들>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회색노트>만큼은 내가 보기에 퀴어문학이 틀림없다.






E.M. 포스터, <모리스>

너무 많이 언급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그냥 지나치면 섭섭하니까 또 올려본다. 이 소설은 포스터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동성애자였던 그의 삶이 담겨 있다. 신사의 나라 영국. 엄연한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캠브리지의 평범한 대학생 모리스가 그곳에서 한 남자를 만나, 매혹당하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로, 모리스 및 그의 연인 ‘더럼’의 심리 묘사가 무척 섬세하게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이유는 동성애자로서 포스터의 고뇌와 절망 등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는 점에 있다. 그의 생애를 훑어보면, 포스터가 사랑했던 남자, 혹은 한때 연인이었던 남자들이 모두 결국 결혼이라는 제도권 안으로 귀착하는 데 반해, 포스터는 혼자 독신으로 늙어갔다. 그런 그의 생애가 소설과 겹쳐지면서 슬픔을 동반한 역설적인 감동을 준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오랫동안 파트너로 지낸 연인을 잃은 한 중년 남자의 하루, 그 단 하루를 따라가면서 만남과 이별, 삶과 죽음, 고독과 상실, 남겨진 이의 쓸쓸함 등 삶의 온갖 단면을 그려냈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스스로 가장 아끼는 작품으로 꼽았다는 <싱글 맨>- 이 작품의 슬픔이, 때로는 세상을 향한 분노가 진실로 가슴에 와 닿는 까닭은 ‘싱글 맨’ 조지가 이 작품을 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분신, 아니 그 자신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셔우드는 조지가 자신의 모습은 아니라고, 조지 같은 인물을 정말 존경하지만 그처럼 기댈 곳이 없다면 자신은 자살했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이렇게 ‘조지’와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이셔우드 그 자신의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르조 바사니, <금테안경>

작품의 주인공은 페라라에 정착한 성공한 의사 ‘파디가티’다. 그는 직업에 어울리는 교양도 갖추었고 예술을 사랑한다. 페라라 시민들은 그런 그를 존경한다. 그 자신 또한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또 다른 주인공인 ‘나’는 파디가티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그리고 ‘나’의 삶이 조금씩 어그러져 감을 느낀다. ‘그’는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으며,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득세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히틀러와 손을 맞잡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동성애자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서로 마주하게 된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들은 비슷한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친구가 되는데, ‘다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그 사회에서 그 둘이 나누는 우정은 쓸쓸하고도 서글프기 짝이 없다. 존경받던 의사에서 한 순간 가십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중년 남자, 이웃과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미래가 찬란했던 한 젊은이. 그 두 사람은 이탈리아 사회에서 영원히 국외자가 되고 만다. 이 이방인들의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우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풍경과 대비되는 한없이 고독하고 서글픈 분위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



카슨 매컬러스, <슬픈 카페의 노래>

130장 남짓의 분량으로 짧다. 그러나 어떤 이야기보다 강렬하다. 아프고 슬프면서도 서정적이고 섬세하고 우아하다. 작품 속 사람들은 외롭고 고독하고 그로테스크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는 그 어떤 삶의 모습보다 가슴 깊이 남는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에서 두 벙어리 싱어와 안토나풀로스를 통해 소외받은 이들, 이른바 비정상인들의 꿈과 사랑과 아픔을 이야기했던 카슨 매컬러스는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도 여전히 조금은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어밀리어, 마빈 메이시, 라이먼. 그들 셋은 모두 결함 많은 존재다. 외모는 물론(마빈 메이시는 예외적으로 잘생기기는 했지만) 성격적으로도 결함투성이다. 매력적이지도 않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구석이 크게 있지도 않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떤 누군가의 마음에 커다란 폭풍을 불러오고, 그 폭풍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송두리째 변한다. 그 폭풍은 바로 ‘사랑’이다. 마빈 메이시가 왜 미스 어밀리어를 사랑하게 되었는지, 어밀리어는 꼽추 라이먼을 왜 사랑하는지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는 끝끝내 아무런 설명도 나오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하는 질문이 종종 들기도 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해본 사람이라면 <슬픈 카페의 노래>에서 그려진 그들의 사랑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것이다.




트루먼 카포티, <다른 목소리, 다른 방>

<다른 목소리, 다른 방>은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았던 카포티의 자전적 고백으로도 읽힌다.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와 살던 조엘.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와 사별하게 된 조엘은 이모 손에서 지내다 열세 번째 생일날 아버지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12년 만에 연락해 조엘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보내 살게 해달라는 편지에 소년은 이모를 떠나 아버지가 있는 남부 시골마을로 가게 된다. 그러나 그곳엔 아버지의 새 부인 에이미, 에이미의 사촌 랜돌프, 흑인 하인들만 있을 뿐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의 것들에 의심을 품어가던 조엘은 어느 날 랜돌프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독특하고 매력적인 남부 고딕 성장소설로 이 작품의 매력은 랜돌프와 조엘의 관계를 지켜보는 데 있다.






아멜리 노통브, <사랑의 파괴>

주인공은 일곱 살 난 꼬마다. 베이징의 외인지구에서 살기 시작한 꼬마는 그곳의 각국에서 날아온 아이들과 공동의 적을 만들고 전쟁놀이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데 어느 날 이탈리아에서 날아온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녀를 만나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진다. 아멜리 노통브의 자전적 이야기로, 노통브가 저자 후기에서도 밝혔듯이 자신이 베이징에서 겪은 일을 한 치의 거짓 없이 쓴 것이라고 한다. 이 일곱 살, 여섯 살 소녀들의 사랑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면 어떻게 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또 그와 반대로 잃을 수 있는지 등등 사랑에 관해 알고 싶고 정의내리고 싶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자매품 <앙테크리스타>와 함께 읽어도 좋다. <앙테크리스타>에서는 10대 소녀가 주인공이다.






에밀리 M. 댄포스, <사라지지 않는 여름>

별 기대 없이 집어 들었는데 완전 홀딱 반했던 책이다. 10대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담으로, 어느 날,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정체성을 깨달으며 고민하고 방황하고, 상처받고 그러면서 서서히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찬란하게 그려진다. 물론 그 과정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어른들에게 동성애 성향을 들킨 주인공 ‘캐머런’은 가족의 손에 이끌려 기독교 캠프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는 캐머런 말고도 그런 아이들이 이미 잔뜩 모여 있다. 이 기독교 캠프의 교사인 리디아는 세상에 동성애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성애는 일명 동성애자 권리 운동가들이 주입한 신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심지어 캐머런의 증상은 ‘동성매력 장애’라면서 이 장애를 캠프에서는 모두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게 정말 가능할까?




필립 베송, <그만해 거짓말>/<이런 사랑>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성 정체성이 중요하지는 않다. 딱히 궁금하지도 않다. 그런데 때로는 그런 정보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필립 베송의 <그만해 거짓말>을 읽으면 왜 그의 작품들이 왜 그토록 경계에 선 사람들, 아니 경계 너머에 있는 이들의 삶을 쓸쓸히 그리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게이인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삼각관계를 그린 <이런 사랑>을 읽을 때만 하더라도 필립 베송 그 자신이 게이일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겠지. 그런데 필립 베송은 열일곱 소년들의 사랑을 그린 <그만해 거짓말>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그토록 진솔하게. <그만해 거짓말>의 화자인 ‘나’는 명백히 필립 베송 그 자신이다. 그리고 그가 사랑한 ‘토마’는 ‘나’ 그러니까 필립 베송의 첫 사랑이다. 이 책을 펼치면 맨 앞에 ‘토마 앙드리외를 기억하며’라는 구절이 보인다. 작품이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토마’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만해 거짓말>은 필립 베송이 자신의 눈부신, 그러나 너무나도 아팠을 첫사랑인 ‘토마’에게 바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앨런 홀링허스트, <아름다움의 선>/<수영장 도서관>

<아름다움의 선>은 2004년 맨부커상 수상작으로, 옥스퍼드를 졸업한 게이 ‘닉’의 눈을 통해 영국 상류사회의 위선과 허위, 가식을  섬세하면서도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1983년과 1986년, 1, 2부로 나뉜 이야기들이 너무 섬세하고 길게 이어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려진다. 무분별한 성적 난교와 상류층의 지리멸렬하기 짝이 없는 속물적 삶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묘사하는 일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걸까? 가끔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1987년, 3부를 위해 마련된 장치였음을 곧 알게 된다. 1,2부의 이야기들이 촘촘히 모아져서 3부에서 드디어 폭발하는데, 가히 탄성을 자아낼 정도. <수영장 도서관>은 빅토리아 시대 말기에 태어난 ‘찰스’라는 인물과 1950년대 후반 태생인 ‘윌리엄’이라는 인물의 삶을 겹쳐 보여주면서 1900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의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영국 사회의 소수자 문제를 다뤄나간다. 지나치게 노골적인 섹스 묘사가 불편하기도 하지만 앨런 홀링허스트의 특징이자 장점이 그 세밀한 묘사에 있음을 이 두 작품을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나는 문학이 그 어떤 사회/인문과학 책보다 사람의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고 생각한다. 위에 열거한 작품들의 공통점을 꼽아 보라면 대부분은 그 작가들의 경험과 삶이 담겨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중에는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고독하게 불행한 삶을 살다간 이도 있다. 현재는 얼마나 다를까? 앨런 홀링허스트의 <수영장 도서관>에서 그려지듯 어떤 면에서 보면 성소수자의 삶은 과거에 비해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귀족 계급의 백인 남성조차 게이라는 이유로 린치를 당한다.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차별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이 많은 문학 작품들은 그렇지 않음을 조용히 일깨워줄 것이다.



+추가 _ 다락방 님이 원하신 증거(?) 사진


사진을 찍으려고 정리하다 보니, 없는 책도 많다. 없는 책들의 속사정은 아래와 같다.

본가에 있는 책: <가면의 고백>,<거미여인의 키스>, <슬픈 카페의 노래>
갖고 있고 싶지 않아서 판 책: <퀴어> 
다 읽고 친구에게 줌 : <위폐범들>
빨리 읽고 좋은 가격에 알라딘에 판매 : <고독의 우물>, <제복의 소녀>, <사라지지 않는 여름>, <그만해 거짓말>, <아름다움의 선>


<회색 노트>는 내가 읽은 건 민음사 쏜살문고가 아니라, 아주 예전에 나온 문고판이었다... 그 책도 본가에 있는 듯. 아쉬운 대로 <티보 가의 사람들> 1권을 올렸는데, 여러분, <티보 가의 사람들>은 퀴어문학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그나저나, <아름다움의 선>은 팔았으면서 <수영장 도서관> 갖고 있는 거 너무 웃기죠? ㅋㅋㅋㅋㅋ 이거 주말에 판매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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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7-09 00:28   좋아요 1 | URL
ㅎㅎㅎ 기대해보겠습니다. 감사!

건수하 2022-03-04 0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읽고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이름만 들었던 작가들의 책이 보여서 반갑네요. <회색 노트>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잠자냥 2022-03-04 08:30   좋아요 1 | URL
네 <회색 노트> 꼭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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