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고등학교 졸업반을 함께한 친구 두명과 꽃구경을 했다.
대학도 같이 다녔는데 결혼하고 아이낳고 이러저러 나이를 먹어가며
새록새록 또다른 면이 보인다.
아침에 갑자기 벚꽃이 한창 너무 이쁘던데 가자는 연락이 오고 우리는 무조건 뭉쳤다.
시내의 약간 변두리 동네인데 벚꽃터널이 새파란 하늘 아래 눈부셨다.
우리는 그길을 걸었다. 그늘에 앉아 잠시 커피를 마셨다.
꽃이 예쁘다는 걸 예전엔 몰랐단 말에 난 애잔한 거지, 질 것을 알고 있으니,라고 웅얼거렸다.
여린 쑥이 지천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쑥국 한 번 끓여먹으라며 둘이서 내 몫을 뜯어줬다.
난 그냥 앉아서 작은아이랑 갈등한 이야기를 했고
'넌 아직 젊었나보다, 쑥도 안 뜯고'란 그럴싸한 말을 들었다.
그놈의 열정은 언제 죽을건지,라는 말을 들은 건 얼마전 전화통화에서다.

봄햇살을 맞으며 그냥 걸었고 그냥 좋았다.
징글징글하게도 가슴속 그리움 한뼘은 아무렇게나 자란 여린 쑥처럼 자라고 있었지만.

박범신 갈망 3부작의 마지막 '은교'를 녹음하고 지금 1차 편집 한가운데쯤에 있다.
사실 박범신의 소설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는데 편견이었던지, 이 작품은 뭉클하고 뜨겁다.
특이한 구성으로 들려주는 고백의 언사들을 엿보며
말 되어지지 않은 것들 속에서 진실은 얼마나 고독할까 싶었다.
옮겨놓고 싶은 문장도 아주 많다.
이 소설의 단어는 '관능' 혹은 '죽음의 욕망'이라 말하고 싶다.
아니 '사랑하는 자, 즉 비애를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존재의 슬픔'이라 말해야될지. 
시인은 죽어서도 살아남는 자, 이어야 했던 주인공 이적요의 예술가적 욕망이 노인의 그것과 병치되어 더 뜨겁다. 

작가는 시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소설을 잇는 맥을 시로 구성하고 있다.
그 시들은 주인공 이적요 시인의 내밀한 감정과 내적갈등을 적재적소에서 비춰준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될 듯, 아름답고 처절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언제 밟을지도 모르는 낮은 땅 위로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여린 쑥처럼, 
이적요 시인의 집뜰 소나무 짙은 등걸처럼,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은교, 139쪽)
존재의 욕망과 생명의 갈망은 그렇게 무섭도록 서글프고 애틋하다. 
순간순간 죽음을 앞당기고 그것을 꿈꾸고 있듯이.

<은교>에 나오는 시들을 몇 적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쉴새없이 입속에서 달콤한 럼주를 씹는다
나의 추억은 눈썹과 함께 우거져갔다
그리고 허무 - 털이 숭숭한 악마의 손톱이 
 
나의 목덜미를 잡아 젖혀
등을 휘어잡는 것을 느낀다.

- K. 크롤로 [럼주병을 가진 자화상] 전문  


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 J. 프레베르 [늙는다]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에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고상한가 

- Shakespeare, [햄릿]에서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 C.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밤에 사랑의 추가
항시와 전무 사이를 흔들 때에
너의 언어는 가슴의 달에 부딪히고
소낙비 올 듯한 너의 푸른 눈은
지상의 천국을 주었다

- P. 첼란 [밤에] 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며 이 두 손에 생각이 미치면
발을 알고 허리를 알고
그리고 모양 없는 성기를 똑똑히 안다면
이것이 육체인 것이다 잠을 욕심내고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될 육체
그것은 지칠 대로 지쳐서 어제에서 내일로
끌려다니며 '언제'와 '어디' 사이에 끼여있는 베개를 쥐어 뜯으며
떨면서 그는 묻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형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 H.E. 홀투젠 [시간과 죽음에 관한 여덟개의 바리아시옹]에서 

 

사람과 사람을 서로 물어뜯게 하는 곡예사가
무대 위에 올려놓으려고 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살해는 언제나 무대 위에서 행해진다
나락을 지나서 묘지에 매장된다
그러나 나를 죽인 사나이는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있다

- 요시모토 류메이, [사랑노래] 에서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 문덕수, [침묵]에서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램프의 아름다운 불빛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

- R.M.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는
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분노가 있다. 

- P. 엘뤼아르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야 했을 것이었다
내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울든가 어쨌어야 했을 것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 박남수 [손]에서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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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lmo 2011-04-1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은교를 읽으면서 나이 드는 게 참 서러웠었어요.
그리고 이 찬란하고 눈물겨운 봄이 아닌 겨울에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시를 추리니 한권의 시집 같아요.
박남수의 '손' 한구절 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밤입니다~^^

프레이야 2011-04-19 08:21   좋아요 0 | URL
겨울에 읽으셨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더 서글펐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네요.
전 이 책을 어쩌자고 2월 말에 시작해서 봄이 한창인 지금 다시 읽고 있을까요.^^
저 위의 시 외에도 참 좋더군요. 뜨거운 문장들이 많았어요.

하늘바람 2011-04-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늙었나봐요 쑥과 냉이 뜯어서 된장찌개 끓여먹었어요.
은교 읽고 싶단 생각 별로 안했는데 시들을 보니 넘 읽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16   좋아요 0 | URL
ㅎㅎ 전 바지락조개 넣고 쑥국 끓여먹었어요.
은교, 생각보다 아주 좋았어요.

blanca 2011-04-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놀이 가셨군요. 저는 요새 아파트 초입에 벚꽃나무들이 우거져 아치를 만든 걸 보며 매일 '빨간 머리 앤'의 그 앤이 처음 초록지붕에 마차타고 오던 풍경을 상상해요^^;; 쑥국 저도 한 대접 끓여 혼자 다 먹었어요. 아이가 아직 어려 그런지 한 번 먹고는 안 먹겠다 하더라구요. 은교. 시들을 다시 읽으니 참 좋네요. 프레이야님 목소리로 녹음된 <은교>의 색깔은 어떨까요?

프레이야 2011-04-20 09:18   좋아요 0 | URL
아, 하늘하늘 산뜻한 기분이 들어요. 상상만으로도요.
어릴 땐 향이 강한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먹어지는 것들.
여긴 이제 벚꽃은 다 졌어요. 아파트화단에 철쭉이 아기자기 한창이에요.^^

꿈꾸는섬 2011-04-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어요.^

프레이야님 잘 지내고 계시죠? 친구분들과 꽃놀이도 다녀오시고 정말 좋으셨겠어요.
전 쑥, 냉이 잘 캐는데 가까운 곳은 중금속 오염됐을 것 같아 못 캐겠어요.ㅎㅎ
된장국 끓여도 맛있고, 냉이는 무쳐서 나물로 먹어도 좋잖아요.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1-04-20 09:19   좋아요 0 | URL
잘 캐시는구낭ㅎㅎ
중금속오염에 방사선 비에 그런 거 걱정해야되죠.ㅠ
소금물에 30분 정도 담가뒀다 씻었어요. 친구가 가르쳐줬어요.ㅎ
냉이무침 상큼하게 해먹고 싶어요 문득.

순오기 2011-04-2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o님이 보내준 책인데 아직 못 읽었네요.
4월 11일부터 독서마라톤이 시작되어서 좀 더 열심히 읽게 되네요.
이 책도 곧 만날건데 봄에 읽으면 안 될까요?^^
박남수 시가 마음에 담기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21   좋아요 0 | URL
독서마라톤 시작했군요.
봄에 읽으면 더더 아플 수도 있어요.ㅎㅎ
전 어머니 독서동아리 시작해서 첫 책으로 '연을 쫒는 아이'를 사서샘이 골랐어요.
전 다른 걸 찜했지만 그건 차츰 다음에 읽기로 선정해뒀어요.
근데 기대했던 것보다 활동이 원활하게 잘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ㅠ

2011-04-2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4-21 01:06   좋아요 0 | URL
우와~ 그랬군요.^^ 왕성한 활동 늘 에너지 넘치는 언니^^
연을 쫒는 아이,는 전 영화만 봤어요.
책이 더 감동적이란 말은 들었는데 아마 이 책이 도서관에 여럿 구비되어 있어
부담없을 거 같아 사서샘이 이걸 추천한 거 같아요.
쑥으로 만든 떡케잌 맛나겠어용

마녀고양이 2011-04-2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쑥이 언니네 텃밭에서 날아왔어요. 같이 노지 냉이도, 망초대도 날아왔어요.
그전에는 도라지가 날아와서 껍질 벗기느라 혼났어요.
봄나물들은 어쩜 그리 향이 좋을까요? 씹을수록 더욱 향긋한게, 삶도 향기로와지라고 그러는걸까요?

예전에는 분홍 나비같은 시들만 좋아했는데,
이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마음에 들어오는걸 보면, 나이 먹었나봐요. 아하하.

프레이야 2011-04-23 21:30   좋아요 0 | URL
어릴 땐 쓴 맛 쓴 향의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그런 게 먹히고 그런 게 당기는 건 왜일까요? ^^
언니네 텃밭 소식이 향기롭고 푸짐하네요.
도라지 껍질 벗기는 건 싫지만..ㅎㅎ
난 며칠 목 붓고 열나고 머리 어지러워요.ㅠ

세실 2011-04-24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은교에 나온 시만 이렇게 옮겨놓으니 색다르네요. 맞아요 시적이었던 소설....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저도 어제 꽃놀이 다녀왔습니다. 다양한 색의 목련이 참 예쁘더라구요.

프레이야 2011-04-24 11:4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여기 아파트 공원엔 빨강 보라 철쭉이 만개해서 알록달록 눈이 환해요.
꽃놀이 잘 다녀오셨어요? ^^ 백목련은 여기 거의 졌고 자목련이^^
은교,는 노인의 스러져가는 생명 안의 생명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작가에 대한 적절한 글귀들도 마음에 남았어요.
따로 밑줄긋기 할게요.
 
고백 - Confess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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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 다카코의 무감한 목소리와 냉엄한 눈빛, 압도적인 이야기와 아름다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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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의 눈 - Julia's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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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화된 자아, 비가시적 세계와의 좁힐 수 없는 거리, 공포의 실체에 대한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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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펀 : 천사의 비밀 - Orp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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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매력적인 베라 파미가. 나의 불운이 타인의 시선으로는 감사해야할 일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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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느 때처럼  토요일 5시 기숙사에서 일주일을 보낸 큰딸아이를 데리러 간다.
오늘은 바람이 매섭다. 꽃샘추위도 물러간 것 같은데 바람이 마지막 시샘을 부리나.
산 아래 바람이 더 싸늘한 학교 운동장에 차를 대고 라디오를 들으며 아이를 기다린다.
오늘은 좀 준비할 게 있는지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문자가 온다.
하얀 얼굴에 캐리어를 끌고 커다란 가방은 어깨에 매고 또 다른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내려오는 게 미러로 보인다.
차에 타자, 3월 학력평가에서 전교2등 했다고 말한다. 아주 잘 했다. 유지를 잘 해야겠지,는 아이가 먼저 한 말.^^
얼마전 텝스도 930 받았다.(팔불출 엄마 또 나온다)
7개월 정도 남았는데 끝까지 체력관리 잘 하고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EBS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고 마음에 드는 문구들을 사자고 해서 아이가 잘 가는 시내 팬시점에 간다.
횡재다. 손택수 시인의 낮고 진지하고 온기있는 목소리가 나온다. 시집 '목련전차'만 읽었고 목소리는 처음이다. 
어느 날부터 집앞 나뭇잎을 3개월 간 하루도 빠짐없이 봤단다.
그러면 어느날 나뭇잎이 말을 걸고 그 말을 글로 쓰면 시가 된다는... 
꾸준히 관찰하면 사랑이 생기고 사랑하는 마음이 시가 된다는...  

위에 옮긴 '방심'을 손택수 시인이 음악과 함께 직접 낭송한다. 아, 참 좋구나.
마음도 놓아버리면 숨구멍이 트이는 것을. 

'방어진 해녀'도 낭송하는데 꾸밈없는 시어들이 팔딱인다.

뒤이어 황인숙 시인이 나온다. 놀랍다. 내가 생각했던 목소리가 아니다. 너무 예쁘다.
그런데 편안한 음색이 아니라 어딘지 불편하다. 한참 생각하다 말을 꼭꼭 씹어서 조금씩 내뱉는 듯.
목소리만으로 다 알 수 없는데 편견이겠지싶다.
고양이를 3마리나 키우고 길고양이를 먹이기 위해 먹을거리를 가방에 늘 넣어다닌다는 특이한 시인이다.
배고파 보이는 비쩍 마른 고양이를 만났는데 줄 게 없으면 가슴이 아프다고... 
조근조근 그녀의 시낭송을 듣는 건 좋은데, 사회자가 너무 촐싹대는 바람에 딸애가 다른 데로 돌리자고 은근히 조른다.
배캠으로 돌리고 집을 향했다.


아파트에 들어서니 이미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벚나무 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한다.
양지의 벚나무는 이미 만개했구나.

 
  --------------        

                       

                                    방심(放心)  - 손택수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펌: 문태준 시인의 글) 


'마음을 놓다'라는 말, 참 오랜만이다. 마음을 풀어 놓아 버린 일 얼마나 오래되었나. 마음 졸이며 염려하고 살아왔을 뿐. 시인은 대청마루에 큰 대(大)자로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최대한 마음과 몸을 느슨하게 하고서. 바다처럼 편편하고 넓게 퍼져서. 그런데, 스윽, 칼날이 지나가듯 제비가 공중을 한 층 횡으로 서늘하게 자르면서 지나간 모양이다. 손가락을 퉁기는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에 벌어진 기습처럼.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보다 더 민첩한 한 줄기 바람으로.

집과 나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갔으니 급소(명자리)를 맞은 듯 어이없고 어리둥절해서 말을 잃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험은 얼마나 시원한 것인가. 체증(滯症)이 가신 듯했을 것이다. 마음을 꼭 붙들어 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마음을 사방으로 허술하게 경계 없이 풀어놓는 것으로서 우리는 마음의 열림을 얻기도 한다. 그것이 무방비의 미덕이다. 좀 게으르게 혹은 별 준비 없이 멍청하게 있다가 한번쯤 당해보기도 해보라. 그런 당함에는 오히려 소득이 있다. 마음의 앞뒤 문을 다 열어놓고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을 볼 수 있었겠는가. 마음을 조급하게 각박하게 쓰느니 차라리 이처럼 마음에 장애를 아예 만들지 않음이 오히려 '심심(深心)'이요, '정(定)'에 가깝다.

손택수(38) 시인은 긍정심이 아주 많은 시인이다. 다른 존재들의 '빛나는 통증'을 그의 시는 받아 안는다. 그의 시는 그가 어렸을 때 그곳서 자랐다는 전남 담양 강쟁리 마을을 배경으로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곳 마을 사람들의 천문(天文)적인 상상력은 그의 시에 들어와 크게 빛을 발하면서 그만의 새로운 서정을 만들어낸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 눈이 올랑갑다"('가새각시 이야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와 매달 스무 여드렛날은 "달과 토성이 서로 정반대의 위치에 서서/ 흙들이 마구 부풀어오르는 날"('달과 토성의 파종법')이자 "땅심이 제일 좋은 날"이라며 밭에 씨를 뿌리러 가던 할머니의 상통천문(上通天文)이 자주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콧구멍에는 흰 쥐와 검은 쥐 두 마리가 혼쥐로 살고 있다는 믿음, 임신한 몸으로 시큼하고 골코롬한 홍어를 먹으면 태어날 아이의 살갗이 홍어처럼 붉어진다는 믿음 등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한 마을에서 자연 발효된 이런 금기사항은 우리 시에서 어느덧 희귀해진 것이어서 각별하고 값지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안마시술소에서 구두닦이를 할 때 안마시술소 맹인들에게 시를 읽어주면서 시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이시영 시인은 그를 "송곳니로 삶을 꽉 물고 놓지 않는, '고향의 기억'을 잊지 않는 오랜만의 생동하는 민중서사적 시인"이라고 평가했다. 나는 그의 시를 읽을 때마다 '역린(逆鱗)'을 생각한다. "물고기 비늘 중엔 거꾸로 박힌 비늘이 하나씩은 꼭 있다고"('거꾸로 박힌 비늘 하나') 하는데, "유영의 반대쪽을 향하여 날을 세우는 비늘"인 역린을 생각한다. 그의 시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친 생(生)을 펄떡이게 하는, '뽈끈 들어올려주는' 힘이 있다. 시에 있어서 가장 든든한 원군(援軍)은 역시 '삶 그 자체'라는 것을 다시 깨닫게 해준다. (문태준, 시인)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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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진 해녀

                                손 택 수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정신나간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나오는 해녀,
내 놀란 눈엔 글쎄 물 속에서 방금 나온 그 해녀
실팍한 엉덩이며 볼록한 가슴이 갓 따 올린
멍게로 보이더니
아니 멍기로만 보이더니
한 잔 술에 미친 척 나도 문득 즉석에서
멍기 있나, 멍기- 수평선 너머를 향해
가슴에 멍이 든 이름 하나 소리쳐 불러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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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4-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오늘 제게 필요한 페이퍼. ㅠㅠ
지금 온라인 수업 들으며 몸을 뒤틀다 읽습니다.

언니, 가끔 세상이든 알라딘 서재든 경쟁으로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 때는 그냥 다 놓고, 홀랑 도망가버리고 싶어요. 또는 그냥 다 놓고, 큰대자로 뻗어버리고 싶습니다.
다른 분 서재의 낮술 타령으로 인해, 저도 맥주 한 잔 하렵니다. 그런 일요일 오후네요~

프레이야 2011-04-03 13:58   좋아요 0 | URL
일욜 공부하고 있군요. 울마녀님 힘내요!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구요.
경쟁으로 느낀 적 전 별로 없지만 때론 내 마음과 달리 돌아간 걸 나중에야 깨닫게 되면
허탈해요. 근데 사실 마음은 제각각 다 다른 게 정상 아닌가.. 그냥 인정하면 마음 편하겠죠.
전 낮술 대신 커피 한잔 진하게 해요 지금. 왠지 가슴이 답답한 게 숨구멍이 막혀요.
방심, 참 좋지요.^^

순오기 2011-04-03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처럼 멋진 글을 쓸 순 없지만, 손택수 시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지요, 그의 시는 더욱 좋고요!!
손택수 시인 70년생이니까 현재는 38살보다 더 많아요~ ^^

프레이야 2011-04-03 19:14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목련전차 고마워요.^^
네, 맞아요. 38살, 저 글은 문태준시인의 글이에요. 옮겨왔지요.
손시인은 실천문학사 신임대표가 되었더군요. 목소리가 부담없고 편안했어요.

순오기 2011-04-04 21:18   좋아요 0 | URL
실천문학사에서 2010년 6월에 <나무의 수사학>이 나왔는데, 주간으로 인쇄돼 있네요.
그 이후 대표가 되었군요~ 축하할 일이네요.
대표가 되면 아내에게 단풍나무 빤스를 입히지 않아도 되겠죠.ㅋㅋ

아~ 여기에 큰딸 이야기가 나왔는데, 축하 멘트가 빠졌네요.
대견한 딸, 고슴도치 엄마해도 괜찮아요~ 그럼요, 이런 건 자랑해도 되지요.^^

2011-04-04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4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실 2011-04-05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님 기특하네요. 전교 2등에 텝스 930점이라니... 축하드려요, 그리고 참으로 부럽습니다^*^

'방심' 제목의 절묘함이라니...순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미소가 지어질거 같아요.
숨구멍이란 숨구멍 모두 확 열어졎히고...아 시원해라!!

프레이야 2011-04-05 10:30   좋아요 0 | URL
시 참 좋지요?
뻥~ 시원해요. 세실님 힘 주셔서 고마워요^^

blanca 2011-04-05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레이야님 글 중 차를 '대고' 이 문구에 또 집중하고 읽었어요^^;; 저 어제 처음으로 아이를 태우고 병원에 갔다 주차장에 또 원하는 곳에 못대고 엉뚱한 곳에 넣어버리고 도망나왔거든요--;; 전화오면 어쩌나 계속 노심초사하면서요 ㅋㅋ 따님! 우아! 완전 부러워요. 제 딸의 미래가 되기를 고대해 보며 아름다운 시들도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11-04-05 10:32   좋아요 0 | URL
저도 주차 아무 데나 하다가 끌려간 적도 여러번 있고 위반딱지도 여러번 날아오고 그랬어요.
노심초사하다 전화도 받은 적 여럿이구요.ㅋ
이런이런 제가 좀 그래요. 범칙금 비싼 데 정말 조심해야돼요.ㅎㅎ
귀여운 고집이 있는 분홍공주의 미래, 환하고 멋질 거에요.

느티나무 2011-04-14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현력?? 이것 저것 따지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마음은 끌리는데로 움지여지는것 같아요
말 안해두 아는 오랜 벗처럼... 그사람 눈빛 언행 마음만 보면 다 알수 있는것처럼...
프레이야님 서재는 그냥 편해요 머리 속에 쏙 쏙 들어오고 꼭 내 얘기같고 표현할수 없던말들도 정감있게 들려요
올만에 들어와서 좋은시 읽고 가네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홧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