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고등학교 졸업반을 함께한 친구 두명과 꽃구경을 했다.
대학도 같이 다녔는데 결혼하고 아이낳고 이러저러 나이를 먹어가며
새록새록 또다른 면이 보인다.
아침에 갑자기 벚꽃이 한창 너무 이쁘던데 가자는 연락이 오고 우리는 무조건 뭉쳤다.
시내의 약간 변두리 동네인데 벚꽃터널이 새파란 하늘 아래 눈부셨다.
우리는 그길을 걸었다. 그늘에 앉아 잠시 커피를 마셨다.
꽃이 예쁘다는 걸 예전엔 몰랐단 말에 난 애잔한 거지, 질 것을 알고 있으니,라고 웅얼거렸다.
여린 쑥이 지천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쑥국 한 번 끓여먹으라며 둘이서 내 몫을 뜯어줬다.
난 그냥 앉아서 작은아이랑 갈등한 이야기를 했고
'넌 아직 젊었나보다, 쑥도 안 뜯고'란 그럴싸한 말을 들었다.
그놈의 열정은 언제 죽을건지,라는 말을 들은 건 얼마전 전화통화에서다.

봄햇살을 맞으며 그냥 걸었고 그냥 좋았다.
징글징글하게도 가슴속 그리움 한뼘은 아무렇게나 자란 여린 쑥처럼 자라고 있었지만.

박범신 갈망 3부작의 마지막 '은교'를 녹음하고 지금 1차 편집 한가운데쯤에 있다.
사실 박범신의 소설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는데 편견이었던지, 이 작품은 뭉클하고 뜨겁다.
특이한 구성으로 들려주는 고백의 언사들을 엿보며
말 되어지지 않은 것들 속에서 진실은 얼마나 고독할까 싶었다.
옮겨놓고 싶은 문장도 아주 많다.
이 소설의 단어는 '관능' 혹은 '죽음의 욕망'이라 말하고 싶다.
아니 '사랑하는 자, 즉 비애를 끌어안고 살아야하는, 존재의 슬픔'이라 말해야될지. 
시인은 죽어서도 살아남는 자, 이어야 했던 주인공 이적요의 예술가적 욕망이 노인의 그것과 병치되어 더 뜨겁다. 

작가는 시에 대한 사랑이 깊었던지 소설을 잇는 맥을 시로 구성하고 있다.
그 시들은 주인공 이적요 시인의 내밀한 감정과 내적갈등을 적재적소에서 비춰준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가 될 듯, 아름답고 처절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언제 밟을지도 모르는 낮은 땅 위로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여린 쑥처럼, 
이적요 시인의 집뜰 소나무 짙은 등걸처럼,
"육체는 다만, 풀과 같은가." (은교, 139쪽)
존재의 욕망과 생명의 갈망은 그렇게 무섭도록 서글프고 애틋하다. 
순간순간 죽음을 앞당기고 그것을 꿈꾸고 있듯이.

<은교>에 나오는 시들을 몇 적어본다.
 

그리하여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그리고
쉴새없이 입속에서 달콤한 럼주를 씹는다
나의 추억은 눈썹과 함께 우거져갔다
그리고 허무 - 털이 숭숭한 악마의 손톱이 
 
나의 목덜미를 잡아 젖혀
등을 휘어잡는 것을 느낀다.

- K. 크롤로 [럼주병을 가진 자화상] 전문  


나의 머리는 반백이 되고
나의 배는 복통처럼 불러지고
나의 기침은 그칠 새 없다
이제는 이제는 이제는
젊었을 때는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참말로
해를 쪼이고 있는 도마뱀처럼
나의 발가락이 물가에서
갈색이 되어가는 것을 쳐다보며
나의 발이
그 머리를 갸우뚱거리는 걸 바라보았었다
세월 가는 줄도 모르고서

- J. 프레베르 [늙는다]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에서 참는 것이 더 고상한가
아니면 고난의 바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어 반대함으로써
이를 근절시키는 것이 고상한가 

- Shakespeare, [햄릿]에서 

 

쭈글거리는 노파는
귀여운 아기를 보자 마음이 참 기뻤다
모두가, 좋아하고 뜻을 받아주는 그 귀여운 아기는
노파처럼 이가 없고 머리털도 없었다 

- C.P. 보들레르 [노파의 절망]에서
  

밤에 사랑의 추가
항시와 전무 사이를 흔들 때에
너의 언어는 가슴의 달에 부딪히고
소낙비 올 듯한 너의 푸른 눈은
지상의 천국을 주었다

- P. 첼란 [밤에] 에서

 

자기를 내려다보며 이 두 손에 생각이 미치면
발을 알고 허리를 알고
그리고 모양 없는 성기를 똑똑히 안다면
이것이 육체인 것이다 잠을 욕심내고
언젠가는 죽지 않으면 안 될 육체
그것은 지칠 대로 지쳐서 어제에서 내일로
끌려다니며 '언제'와 '어디' 사이에 끼여있는 베개를 쥐어 뜯으며
떨면서 그는 묻고 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어머니는 어떻게 되는 걸까?
형제는 어떻게 되는 걸까?

- H.E. 홀투젠 [시간과 죽음에 관한 여덟개의 바리아시옹]에서 

 

사람과 사람을 서로 물어뜯게 하는 곡예사가
무대 위에 올려놓으려고 해도 나는 믿지 않는다
살해는 언제나 무대 위에서 행해진다
나락을 지나서 묘지에 매장된다
그러나 나를 죽인 사나이는 무대 위에서 우쭐대고 있다

- 요시모토 류메이, [사랑노래] 에서
  

 

저 소리 없는
청산이며 바위의 아우성은
네가 다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겹겹 메아리로 울려 돌아가는 정적 속
어쩌면 제 안으로만 스며 흐르는
음향의 강물!

- 문덕수, [침묵]에서 

 

사랑받는 것은 타버리는 것
사랑하는 것은 어둔 밤에만 켠 램프의 아름다운 불빛
사랑받는 것은 꺼지는 것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긴 긴 지속

- R.M. 릴케 [말테의 수기]에서
  

 

모든 나의 괴로움 사이 죽음과 나 사이
내 절망과 살아가는 이유 사이에는
不正과 용서할 수 없는 인류의 불행이 있고
내 분노가 있다. 

- P. 엘뤼아르 [사랑의 힘에 대하여]에서

 

그냥 헤어질 수는 없어야 했을 것이었다
내손으로 그의 손을 잡고
울든가 어쨌어야 했을 것이었다
나도 그랬고 그도 그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그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 박남수 [손]에서
 

 

땅거미 짙어가는 어둠을 골라 짚고
끝없는 벌판길을 걸어가며
누이여, 나는 수수 모가지에 매달린 
작은 씨앗의 촛불 같은 것을 생각하였다
가고 가는 우리들 생의 벌판길에는
문드러진 살점이 하나,
피가 하나,
이제 벌판을 흔들고 지나가는
무풍의 바람이 되려고 한다
마지막 네 뒷모습을 지키는
작은 촛불의 그림자가 되려고 한다
저무는 12월의 저녁달
자지러진 꿈,
꿈 밖의 누이여 

- 박정만, [누이여 12월이 저문다]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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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19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은교를 읽으면서 나이 드는 게 참 서러웠었어요.
그리고 이 찬란하고 눈물겨운 봄이 아닌 겨울에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어요.

시를 추리니 한권의 시집 같아요.
박남수의 '손' 한구절 님의 목소리로 듣고 싶은 밤입니다~^^

프레이야 2011-04-19 08:21   좋아요 0 | URL
겨울에 읽으셨다니 다행이기도 하고 오히려 더 서글펐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네요.
전 이 책을 어쩌자고 2월 말에 시작해서 봄이 한창인 지금 다시 읽고 있을까요.^^
저 위의 시 외에도 참 좋더군요. 뜨거운 문장들이 많았어요.

하늘바람 2011-04-1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늙었나봐요 쑥과 냉이 뜯어서 된장찌개 끓여먹었어요.
은교 읽고 싶단 생각 별로 안했는데 시들을 보니 넘 읽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16   좋아요 0 | URL
ㅎㅎ 전 바지락조개 넣고 쑥국 끓여먹었어요.
은교, 생각보다 아주 좋았어요.

blanca 2011-04-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꽃놀이 가셨군요. 저는 요새 아파트 초입에 벚꽃나무들이 우거져 아치를 만든 걸 보며 매일 '빨간 머리 앤'의 그 앤이 처음 초록지붕에 마차타고 오던 풍경을 상상해요^^;; 쑥국 저도 한 대접 끓여 혼자 다 먹었어요. 아이가 아직 어려 그런지 한 번 먹고는 안 먹겠다 하더라구요. 은교. 시들을 다시 읽으니 참 좋네요. 프레이야님 목소리로 녹음된 <은교>의 색깔은 어떨까요?

프레이야 2011-04-20 09:18   좋아요 0 | URL
아, 하늘하늘 산뜻한 기분이 들어요. 상상만으로도요.
어릴 땐 향이 강한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먹어지는 것들.
여긴 이제 벚꽃은 다 졌어요. 아파트화단에 철쭉이 아기자기 한창이에요.^^

꿈꾸는섬 2011-04-20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교에 대한 관심이 더 커졌어요.^

프레이야님 잘 지내고 계시죠? 친구분들과 꽃놀이도 다녀오시고 정말 좋으셨겠어요.
전 쑥, 냉이 잘 캐는데 가까운 곳은 중금속 오염됐을 것 같아 못 캐겠어요.ㅎㅎ
된장국 끓여도 맛있고, 냉이는 무쳐서 나물로 먹어도 좋잖아요.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아요.

프레이야 2011-04-20 09:19   좋아요 0 | URL
잘 캐시는구낭ㅎㅎ
중금속오염에 방사선 비에 그런 거 걱정해야되죠.ㅠ
소금물에 30분 정도 담가뒀다 씻었어요. 친구가 가르쳐줬어요.ㅎ
냉이무침 상큼하게 해먹고 싶어요 문득.

순오기 2011-04-20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o님이 보내준 책인데 아직 못 읽었네요.
4월 11일부터 독서마라톤이 시작되어서 좀 더 열심히 읽게 되네요.
이 책도 곧 만날건데 봄에 읽으면 안 될까요?^^
박남수 시가 마음에 담기네요.

프레이야 2011-04-20 09:21   좋아요 0 | URL
독서마라톤 시작했군요.
봄에 읽으면 더더 아플 수도 있어요.ㅎㅎ
전 어머니 독서동아리 시작해서 첫 책으로 '연을 쫒는 아이'를 사서샘이 골랐어요.
전 다른 걸 찜했지만 그건 차츰 다음에 읽기로 선정해뒀어요.
근데 기대했던 것보다 활동이 원활하게 잘 될지 아직 모르겠어요.ㅠ

2011-04-21 0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1-04-21 01:06   좋아요 0 | URL
우와~ 그랬군요.^^ 왕성한 활동 늘 에너지 넘치는 언니^^
연을 쫒는 아이,는 전 영화만 봤어요.
책이 더 감동적이란 말은 들었는데 아마 이 책이 도서관에 여럿 구비되어 있어
부담없을 거 같아 사서샘이 이걸 추천한 거 같아요.
쑥으로 만든 떡케잌 맛나겠어용

마녀고양이 2011-04-23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쑥이 언니네 텃밭에서 날아왔어요. 같이 노지 냉이도, 망초대도 날아왔어요.
그전에는 도라지가 날아와서 껍질 벗기느라 혼났어요.
봄나물들은 어쩜 그리 향이 좋을까요? 씹을수록 더욱 향긋한게, 삶도 향기로와지라고 그러는걸까요?

예전에는 분홍 나비같은 시들만 좋아했는데,
이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들이 마음에 들어오는걸 보면, 나이 먹었나봐요. 아하하.

프레이야 2011-04-23 21:30   좋아요 0 | URL
어릴 땐 쓴 맛 쓴 향의 풀을 못 먹었죠.
나이들어가면서 그런 게 먹히고 그런 게 당기는 건 왜일까요? ^^
언니네 텃밭 소식이 향기롭고 푸짐하네요.
도라지 껍질 벗기는 건 싫지만..ㅎㅎ
난 며칠 목 붓고 열나고 머리 어지러워요.ㅠ

세실 2011-04-24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은교에 나온 시만 이렇게 옮겨놓으니 색다르네요. 맞아요 시적이었던 소설....가물가물하긴 하지만요.
저도 어제 꽃놀이 다녀왔습니다. 다양한 색의 목련이 참 예쁘더라구요.

프레이야 2011-04-24 11:43   좋아요 0 | URL
세실님 여기 아파트 공원엔 빨강 보라 철쭉이 만개해서 알록달록 눈이 환해요.
꽃놀이 잘 다녀오셨어요? ^^ 백목련은 여기 거의 졌고 자목련이^^
은교,는 노인의 스러져가는 생명 안의 생명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작가에 대한 적절한 글귀들도 마음에 남았어요.
따로 밑줄긋기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