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샘

 

- 이호우

 

가을 산빛이
고이도 잠긴 산샘

나뭇잎 잔을 지어
한 모금 마시고는

무언가 범한 듯하여
다시 하지 못하다.

---------

 
이호우[李鎬雨]

1912. 3. 1 경북 청도~1970. 1. 6.

시조시인.

한때 시조시인들의 자성(自省)을 촉구하는 평론을 발표해 한국시조시단에 경종을 울렸다. 호는 이호우(爾豪愚). 누이동생이 시조시인 영도(永道)이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명학당을 거쳐 밀양보통학교를 마쳤으며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가 신경쇠약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1929년 일본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學]에 입학했으나 신경쇠약에다 위장병까지 겹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8·15해방 후에는 잠시 대구일보사를 경영했으며, 〈대구매일신문〉 문화부장 및 논설위원을 지냈다. 1946년 〈죽순〉 동인으로 참여했고, 1968년 〈영남문학회〉를 조직했다. 1940년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시조 〈달밤〉이 〈문장〉에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발표한 〈개화〉·〈휴화산〉·〈바위〉 등은 감상적 서정세계를 넘어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노래하고 영탄하던 종래의 시조와는 달리 평범한 제재를 평이하게 노래했으며 후기에는 인간의 욕정을 승화시켜 편안함을 추구하는 시조를 썼다. 작품집으로 1955년에 펴낸 〈이호우시조집〉 외에 누이동생 영도와 함께 1968년에 펴낸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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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꿀라 2007-02-2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또 한편의 시와 시인의 소개까지 오늘 처음 들어서 좋은 시를 연거푸 만나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24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이호우 시인의 호를 한자로 보고 무릎을 치게 되었네요.
자신에게 한 말이겠지요. 우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구요.
편안하고 즐거운 휴일 보내시기 바래요^^
 

 

                                                       달무리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랭이.

 

 

             

 

                                             황혼에 서서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 

 

 

 

 

                                                 단풍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 

 

                                                        -------------------

 

                 이영도(李永道 :  1916~1976 )  호(號)는 정운(丁芸),  1946년 <죽순>에 시조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하여 잊혀져 가는 고유한 가락을 시조에서

                          재구현하고자 노력했다.  시조집으로 <청저집(靑苧集)>(1954),  <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는 <청근집(靑芹集)>(1958)과,  <비둘기 내리는 뜨락>(1969) 및

                         <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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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7-02-2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도 시인이라면 유치환 시인의 정인? ^^;;
그들의 그런 사랑이란...
이영도 시인의 오빠 이호우(李鎬雨)도 시인이지요...^^
그러고보니... 유유상종 입니다그려...^^;;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좋아요...^^;;

프레이야 2007-02-24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송이님, 그 유명한 플라토닉 러브의 여인이에요. 68년에 오누이가 같이 낸 시집도 있지요. 오늘 청도에 있는 그분 생가에 문우들과 갔어요. 오누이의 비가 소박하니 나란히 있더군요. 이호우의 '이'자를 '爾'로 써놓았길래 집에 와 찾아보니 이호우 시인의 호가 이호우(爾豪愚)더군요.흥미로웠어요.
복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 교과서에도 나왔던 이 시는 시비에 있더군요. 그 아래로 유천이 평화로이 흐르고 있었어요. 다른 곳도 들리고 좋은 시간이었답니다.

짱꿀라 2007-02-2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도 시인님의 시를 혜경님 서재에서 만나네요. 어머님과 아버님이 즐겨 읽으시던 시들이었는데요. 아마 제 서재실에도 찾아 보면 책이 있을 것 같은데요. 너무 아름다운 시를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말 잘보내시고요.

프레이야 2007-02-24 2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제 어머니도 이영도시인의 시를 읊곤 하셨는데 요즘은 그런 걸 못 듣네요.
제가 귀를 기울여 들어주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정운의 '달무리'가 감동입니다.
청마와의 로맨스는 두고두고 애절한 낭만의 이야기소재가 되는 것 같아요.

달팽이 2007-02-25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영에 청마문학관에서 얼핏 보았던 사진이 떠오르는군요.
통영인가 어딘가서 교사시절 유치환 선생과 같이 찍었던 사진에..
이미 유부녀였던 단아한 그녀의 모습..
그리고 오늘 혜경님의 시..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는군요..

프레이야 2007-02-2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팽이님/ 그집, 정운과 이호우의 생가는 근대문화유산이란 명패가 달려있더군요. 집은 그저 소박했고, 뒤란으로 돌아들어가보니 켜켜이 먼지 앉은 툇마루가 보이고 초라한 석류나무줄기들만이 돌담에 기대어 있더군요. 지나간 것들의 애상이 청마선생과의 사랑과 함께 떠올랐어요. 그집 맞은 편에 오래 되어 보이는 정미소가 있더군요. 처음 봤거든요. 천장을 올려다보고 놀랐어요. 날씨도 포근하니 조용한 마을이었어요. 편안한 휴일 보내셨겠지요?^^
 

엄마... 저 희령이에요.

저 설날 용돈... 너무 빨리 다 써버렸어요...

죄송해요.자꾸만 돈을 낭비해서...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그래도 지금은 아직 필요할때 없으니까 다음에 아주 중요하게 필요할때 말씀드릴게요.

항상 엄마께 착하고 성실하고 알뜰한 딸이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제 생일때는 제 마음을 담아서 직접 선물을 만들어 드릴 예정이에요.

선물이 엄마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꼭 고맙게 받아주세요.

이제 3학년인데 왜 자꾸만 철이 안 드는지 모르겟어요.

엄마,저도 이제 3학년이니까 아주 착하고, 성실하고, 알뜰한 딸이 되어드리고 싶어요.

저는 항상 엄마께 고마워하고 있어요!!♥

 

 

2007년 2월 24일 희령 올림...

 

P.S.참고로 답장은 말로 하지 말고 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


- 이번 설날 아침, 할머니집 아파트입구에서... 이날 햇볕이 참 따스했지? 눈이 부셨어. 언니가 잘 찍어줬네.^^ 언니가 입던 두루마기도 다홍 치마랑 잘 어울려.

요 통통한 여우같으니라고 ㅎㅎ

3월에 자기 생일 때 낳느라고 고생하신 엄마한테 선물 사줄 거라더니

용돈 다 써버려서 무얼 손수 만들어주겠답니다.

무얼 만들어줄지 ㅋㅋ

야단 맞을까봐 방패막 치며 선수치는 여우~

추신이 더 웃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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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2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하하. ^^ 초등학교 3학년이요, 중학교 3학년이요? ㅋㅋㅋ 아 귀여워요.

미설 2007-02-24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자꾸만 철이 안드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3학년 아니라 삼십이 중반을 넘겨도 그렇던데요^^;;; 희령이 너무 귀엽네요.

2007-02-24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2-24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초등3학년이에요. 완전 착한 여우에요^^
미설님/ 그러게요. 저도 아직 철 안 드는데요 ㅎㅎ

뽀송이 2007-02-24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아니 초등학교 3학년이 이런 편지를...@@;;
저~~~ 기절했어요...^^;;;
희령이 멋져요!!! 추~~천~~ 쾅쾅!!!

행복희망꿈 2007-02-25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편지를 받으셨네요. 물론 애교로 봐 주셨죠?
설날을 한복 이쁘게 차려입고 잘 보낸것 같네요.
희령이가 3학년이라고 하기에는 생각이 깊네요. 이뻐요. ^*^

프레이야 2007-02-25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뽀송이님/ 희령인 종종 이렇게 메일을 보내주어요. 여우짓하느라고^^
행복희망꿈님/ 네, 애교로 봐 줘야죠.^^ 어떨 땐 귀여운 능구렁이 같아요 ㅎㅎ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BRINY 2007-02-25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이, 이렇게 여우같은 면도 좀 있어야지요~

마노아 2007-02-25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랑스러워요. 멋져요^^

2007-02-25 2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7-02-25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전통차와 떡, 그리고 희령이, 라니까 일전에 서울에서 **님을 만나 세명이서 앉았던 그 시간이 떠올라요. 대추차와 떡을 두고 앉았었죠. 님과 꿈에서도 그런 시간을 나누었다니, 너무 좋아요. 전 실제로 만나면 그닥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가지 못하는 말주변이지만 님이랑 함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희령이도...
일요일은 즐겁게 보내셨지요?

마노아님/ 행복하게 해 주는 여우에요^^
브리니님/ 그러게요. 곰인 것보단 낫겠지요.^^

라주미힌 2007-02-2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달콤해요.. :-)

2007-02-25 2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영엄마 2007-02-2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 같은 3학년인데 우리 혜영이는 아직도 얼라~래요.. ㅡㅜ(엄마, 업어주세요. 뽀뽀해주세요.. -.-) 한복이랑 머리 위에 배씨댕기(맞나?)가 잘 어울리네요. 작아지면-물려줄 아이없으면- 혜영이 물려주세요~~ ^^

프레이야 2007-02-26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주미힌님/ 달콤하단 말이 더 달콤해요.^^
아영엄마님/ 그게 배씨댕기에요? 몰랐어요.^^ 배씨는 난데 ㅎㅎ
그러지 않아도 희령이 아래로는 여형제가 (사촌들 다 해도) 없어서 물려줄 사람이
없는데.. 혜영이가 있었네요. 나이는 같아도 혜영이는 호리호리한 체격일거라 생각되어서리~~

2007-02-26 1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딧불,, 2007-02-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간 그댁 따님들 야무진 것은 알아줘야해요.
아주아주 이쁩니다.

무스탕 2007-02-26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게 딸 키우는 재미가 아닐까 싶어요... 심하게 부럽습니다.

프레이야 2007-02-26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 ㅎ님/ 캄사합니다.^^
반딧불님/ 야무져서 들면 돌덩이에요.ㅎㅎ
무스탕님/ 두 딸이 성격이 좀 다르지요. 큰애는 좀 뻣뻣하답니다.^^

치유 2007-02-27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 키우는 재미를 쏠쏠하게 느끼시는군요..ㅋㅋ너무 귀여워요..방패막부터 치고..역시 엄마닮아서 똑소리 납니다..사진 슬쩍 해갑니다.

바람돌이 2007-02-27 0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 키우는 재미가 정말 쏠쏠.... 보기만 해도 즐겁습니다그려... ^^

프레이야 2007-02-27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꽃님/ 그집 딸 아들도 만만치 않지요.^^ 사실 작은 애만 그러네요.
바람돌이님/ 요즘 좀 쉬고 계신지요? 멋진 새학교에서 보낼 날 기다리면서요.^^
그집의 예쁜이 두딸이 보고싶어요^^
 

 

로빈슨 크루소의 초상


  그는 약간 긴 듯한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고 어깨를

흔들며 휘파람이나 슥슥 불고 다녔다. 남들 다 일으키

는 그 흔한 연애사건 하나 없는 그는 아무도 눈여겨보

지 않는 가난뱅이 중의 하나였다. 어느 날인가 그는 강

의도 잊어버리고 나무 그늘에 누워 하염없이 하늘을

붙잡고 있었다. 그의 눈이 얼마나 맑은지 햇빛이 빠져

들고 있었다.

  얼마 뒤 그는 잠적했다. 알래스카에서 남지나해까지

회유하는 고래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땅속에서 석탄을

캔다고도 했다. 어깨를 벗어붙이고 목수나 그밖의 날

품을 팔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느 쪽이든 그는

실패했다고 했다.

 어느 날 그는 돌아왔다. 검게 그은 팔뚝과 양미간의

깊은 주름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었다. 막다른 곳에

서 삶에 매몰된 적 있는 사람이 어둠의 밑바닥을 조금

알게 되는 것처럼, 그는 스스로의 그늘이 아픈 듯 서

있었다. 나는 그를 로빈슨 크루소라 불렀다.



로빈슨 크루소의 귀향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마음속에는 언제나 바다

일렁대는 파도와 갈매기를 풀어놓은 바다가 있었지

갈증으로 번들거리는 저 눈

이따금 술기운을 빌려 울기도 하지


추억할 만한 것 없이 늙어가는 것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외로움을 핑계로 떠돌았지

마음속에는 언제나 바다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섬을 집으로 삼는 건 외로운 일이 아니지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크루소 아저씨 편지하세요

커다란 하늘색 봉투에다 그리운 섬에게라고 적어

물결에 띄우세요

지난 겨울 당신이 다녀간 걸 알죠

잘려나간 현사시나무 그루터기에서

당신의 발자국을 보았죠

그 어두운 무늬를 알아보았지만

곧 모른 체했죠

당신은 더 이상 바다 쪽을 바라보지 않죠

나는 난바다 한가운데의 섬일 뿐이구요

다가올 폭풍우와 파도만 보죠

당신이 내 옆을 지나더라도

늙어버린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모든 섬은 한결같이 짙푸른 초록이지만

흐르는 물처럼 섬도 흐르지요

흘러가버린 당신의 청춘, 당신의 섬이



로빈슨 크루소의 섬


섬은 더 멀리 있는지도 모른다


툭툭 끊어지는 수평선

바다를 건너는 새들에게는 쉴 곳이 없는가

긴 여행 끝에

제 무게를 허공에 던지는 순간

추락하는 빛 속에서 섬을 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로빈슨 크루소는 다시 섬으로 갔다

한때 그를 가두었던 무인도

새들보다 더 먼곳으로 가기 위해

다시 한번 가슴속의 새들을 풀어놓기 위해


수평선 너머의 수많은 섬들 중

그리워할수록 얼룩지는 것들

(늙은 로빈슨 크루소는 섬을 찾을 수 있을까)



로빈슨 크루소를 꿈꾸며


로빈슨 크루소가 구석에 쭈그려 앉아

가끔 울기도 하던, 이제는 그 술집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럼주 통과 푸른 사과가 가득 차 있던

도시 한가운데 지하의 난파선 셸링


아무도 그가 누구인지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들 중의 하나가 그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두들 자신들도 한번쯤

이곳을 버리고 은밀히 로빈슨을 꿈꾼다


정처없는 뜬구름과 푸른 산호의 섬

우리들이 보물섬에 대해 말하듯

그의 섬에 관하여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때에도

그런 섬은 없다고, 누구도 단정짓지는 않는다

설령 우리들 중의 하나가 로빈슨을 꿈꾼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를 비웃지는 않는다

갑자기 심각해진 사람들은 말을 잃을 뿐이다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취해도 쉽게 제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는

오랜만이라며 서로 눈빛을 던지지만

어느새 슬그머니 비어버린 자리들을 세며

서로들 식어가는 것이 보인다


가슴 밑바닥에서 부서지는 파도

저마다 물결 속으로 떠내려가는 것을 느낀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 사이의 한 섬,

그 속에 갇힌 한 사람을 생각한다


외로움보다 더 가파른 절벽은 없지

살다 보면 엉망으로 취해 아무 어깨나 기대

소리 내서 울고 싶은 그런 저녁이 있다


어디든 흘러가고 싶은 마음이 발치에서

물거품으로 부서져가는 것을 본다

점점 어두워오는 바다로 가는 물결

무슨 그리움이 저 허공 뒤에 숨어 있을까



- 출처 <로빈슨 크루소를 생각하며, 술을> / 창작과비평사 1996

- 시인 김수영

  1967년 경남 마산 출생

  199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남행시초> 당선

        ‘시힘’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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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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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22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뽀송이 2007-02-22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여고 때... 처음 '접시꽃 당신'으로 만난 도종환 시인...
아내가 죽은 후... 끝가지 혼자 살 것 같았는데...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겠죠?
그래도 그의 시는 아직도 내 가슴 한 켠을 흔듭니다.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__)

프레이야 2007-02-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님/ 그러셨군요. ㅎㅎ
뽀송이님/ 한결같이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인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