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ㅣ 사계절 1318 문고 36
라헐 판 코에이 지음, 박종대 옮김 / 사계절 / 2005년 11월
평점 :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이 접목되어 흥미진진한 이야기구조를 이루어낸다. 이런 류의 동화나 청소년 소설은 적지 않게 있지만 이 책은 특히 전율적이었다. 우리 안에 숨어있는 편견과 선입견, 가장 치욕스러운 감정까지 들춰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가장 고귀한 품성을 결국은 끄집어내어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미술계 인사들이 역사상 최고의 명화로 꼽는 그림은 궁정화가로 이름을 날린 에스파냐의 화가, 디아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라고 한다. 어느 명화 관련 책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 그림이다. 놀랍게도 이 한 폭의 그림으로 작가는 짧지 않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본능적인 감정에 요동치는 부분도 있고 따스한 가족애로 가슴에 물이 흐르기도 한다. 평소 장애인의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작가였다.
화가들이 충성심과 용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림에 그려넣는 대상은 '개'라고 한다. 이 말은 좌절감에 몸서리치고 있는 바르톨로메에게 들리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다. 17세기 스페인 마드리스, 펠리페4세가 모든 것의 위에 앉아 군림하던 시기가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다. 화가 벨라스케스 역시 책의 뒷부분에 가면 등장한다. 그의 열린 마음과 곧은 정신이 바르톨로메의 인생에 빛을 준다. 벨라스케스는 실제로 시녀들이나 난쟁이를 왕족이나 귀족들과 동등한 배치로 하여 그림의 구도 안에 넣음으로써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작가는 자신이 벨라스케스가 되어 그림 속으로 들어갔고, 기가 막힌 상상력으로 이야기 하나를 자아냈다. 물론 작가의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지만 화가의 의도와 250년이 지난 시대에 사는 어느 작가의 상상이 꼭 맞아떨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보는 눈은 주관적인 인상과 자신만의 무한한 상상의 힘으로 깊어진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심한 기형의 몸을 하고 있어 네발로 기는 편이 더 편한 베르톨로메는 검고 빛나는 눈, 섬섬옥수 같은 손 그리고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유난히 인상적인 열살의 남자아이다. 신은 불구의 몸으로 태어난 이 아이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지만 사람들은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편견이 가로막고있기 때문이다. 학구열이 높고 지력도 대단한 바르톨로메는 빠른 시일에 수사의 도움으로 글자를 익히고 <돈키호테>같은 까지 읽는다. 색채 감각 또한 뛰어나 벨라스케스 화실에서 일하는 도제의 눈에 들어 제자가 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베르톨로메가 겪는 고난은 예수의 그것과 비교된다. 나중 된 자 먼저 되고, 먼저 된 자 나중 되리라, 는 말이 절망의 순간에 힘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당하는 모멸감과 상처는 읽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아버지 후안의 싸늘한 태도에 함께 분노하게 되지만 역시 아버지의 정을 막을 수는 없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아버지의 말못할 고민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읽는이의 마음에 다소 위안이 된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은 시점에 있어서 남다른 그림이다. 화가가 그림 속에 등장인물로 들어가 붓을 들고 서 있고 그림의 대상인 왕과 왕후는 정면의 거울을 통해 보인다. 즉 이 그림을 우리가 보는 게 아니라 그림속의 화가가 우리를 보는 것 같은 구도다. 가운데에 다섯살 짜리 공주가 깜찍한 모습으로 서 있고 주위엔 시녀들과 시동들이 서있다. 작가는 가장 앞줄 구석에 있는 믿음직스러운 개에 눈이 멈추었다. 개의 등을 밟고 서 있는 난쟁이 시동은 다른 시녀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바르톨로메를 학대하는 인물로 야비한 근성을 잘 드러낸다. 전제군주의 군림 못지 않은 기생적인 군림이 핍박 받는 약자에겐 더욱 괴롭다.
하지만 개는 그런 발길조차도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개는 짖지 않는다. 다만 화가 나면 물 뿐이다." 개는 지금 내면의 힘을 느끼며 그 힘을 모으고 있는 순간이다. 작가는 바르톨로메의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여 소수자를 바라보게 한다. 인종, 계급 그리고 신체적 장애 따위로 인간이 누려야할 기본권마저 누리지 못하는 약자들의 있음직한 고통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풀어낸다. 가장 놀라운 상상은 그 개가 원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바르톨로메를 제자로 받아들인 노예출신 도제 파레하는 이렇게 말한다.
"무언가를 바꿀 힘이 네손에 없거든,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할 것이라 믿어라! 저는 운명도 언젠가는 바르톨로메의 편에 서리라 믿습니다."
파레하의 입을 통해 작가는 선을 향한 강한 믿음과 그것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또한 진실을 향한 양심적인 발걸음을 확신한다. 진실은 흔히 보이지 않는 법이 아닌가.
자, 이야기는 결말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공주의 인간개가 되어 '자신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바르톨로메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이 볼만하다. 드디어 힘없어 보이기만 했던 가족 모두의 유쾌한 힘이 발휘된다. 마술, 그것은 마술이다. 희망적인 결말이 흐뭇하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는 화가의 손처럼, 보이지 않는 것에 희망을 걸고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볼 줄 아는 눈. 우리에게도 이런 눈이 없다면 정말 불구의 몸이지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