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아침편지]험담


 



한 신부님이 젊은 여인 집에 자주 드나들자,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좋지 않는 소문을 퍼뜨리며 신부를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마을 사람들은 신부가 암에 걸린 젊은 여인을

기도로 위로하고 돌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가장 혹독하게 비난했던 두 여자가

어느 날 신부를 찾아와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그들에게 닭털을 한 봉지씩 나눠주며

들판에 가서 그것을 바람에 날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닭털을 날리고 돌아온 여인들에게

신부는 다시 그 닭털을 주워 오라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바람에 날려가 버린 닭털을

무슨 수로 줍겠느냐며 울상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여인들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니 용서 해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담지 못합니다.

험담을 하는 것은

살인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만 상하게 하지만

험담은 한꺼번에 세사람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첫째는 험담을 하는 자신이요,

둘째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들이며

셋째는 그 험담의 화제가 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남의 험담을 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부족함만 드러내고 마는

결과를 가져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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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6-09-01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미심장하고 마음속에 와 닿는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절대로 님을 험담하지 않을랍니다. ㅋㅋㅋ
그리고 다른사람들도요.
님의 이런 글이 있어 마음의 수양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추천 꾸우우욱 하고 퍼갈랍니다.

프레이야 2006-09-01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아무 생각없이 남 이야기 할 때가 있는데 뜨끔해지는 글이에요. 진심어린 칭찬을 아끼지 않는 습관으로 바꿔야겠지요. 전호인님 제 험담 하지 말라고 이 페이퍼 옮겨놓은 줄 우째 아시고요 ㅎㅎㅎ

건우와 연우 2006-09-0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뜨끔한 글이네요....

2006-09-01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노아 2006-09-01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안녕하세요, 배혜경님 서재 처음 와 보았는데, 좀 더 구경할게요. ^^

겨울 2006-09-01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개의 험담은 여러명과의 수다 중에 나와요.
대화에 휩쓸려 돌아서 후회할 말을 쏟아놓고는 며칠을 전전긍긍.^^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도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경계를 해야겠죠?

푸하 2006-09-01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도 듣지 않는 나 혼자 내뱉는 험담도, 나를 향한 험담도 줄여야 겠네요.

내이름은김삼순 2006-09-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정말 많이 찔리는 글이예요,
여중,여고를 나와서 그런걸까요? 여자들은 수다 속에서 거의 절반이 남 이야기예요,
같은 반 친구 누구누구가 맘에 안 들면 흉보고,,선생님들 욕하고,,
저도 뉘우치고 갑니다, 사람들이 칭찬엔 인색하면서 남 험담을 보는 것은 너무 서스름 없이 즐기는 듯 해요,,자기 헛점은 보지 못하고선,,자기가 내뱉은 말이나 행동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되돌아 올텐데요,,

해리포터7 2006-09-01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시 가슴에 새겨야 할말이어요.배혜경님..이글 잘 퍼갈께요^^감사해요!

Mephistopheles 2006-09-0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콕콕 찔려라~~ ^^

실비 2006-09-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말도 생각하고 해야하고 말조심 해야되요..
남 험담은 자기에게 온다는것을..

비자림 2006-09-0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 예전에 저도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바람에 날려간 닭털같은 말들. 주워 담을 수 없고 사방에 흩어지는 무서운 험담..
참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했었어요. ^^


진/우맘 2006-09-02 0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침부터 배부른 글, 감사....오늘 하루만은, 아무도 흉보지 말고 살기로 결심.^^

달콤한책 2006-09-0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닭털 비유...정확하네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전출처 : 해콩 >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몽둥이를 놓자 폭력이 보였다

국기에 대한 경례 거부로 징계를 앞둔 상동고 이용석 교사의 심경 고백…폭력을 휘두르는 교사가 된 자신을 돌아보며 전체주의에 반대하기로 결심

▣ 이용석 부천 상동고 교사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아침이다. 교문지도를 해야 하니까 서둘러야겠다. 아 참! 오늘은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있는 날이잖아.

아침 7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오늘의 수업 자료가 들어 있는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교문으로 나간다. 난 학생생활지도 담당 교사이다. 내 손에는 이미 나에게 잘 길들여진 단단한 몽둥이가 들려져 있다. 교문에서 학교 건물로 이어지는 진입로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봐야 한다.


△ 지난 7월 징계위에 불참한 이용석 교사는 고민 끝에 출석하기로 결심했다. 8월4일 출석에 앞서 경기도 교육청 앞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 교사의 모습.

등교하는 아이들의 머리 모양, 교복 상태, 운동화 종류, 왼쪽 가슴에 부착돼 있어야 하는 이름표, 남학생의 넥타이와 여학생의 리본 착용 여부 등 이 모든 걸 한눈에 보고 지나가는 아이들 개개인을 모두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왼쪽으로 일렬을 지으며 들어온다. “너, 머리!” “너, 운동화!” “너, 야! 너 말이야! 왜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 엉?” 색출된 아이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손 들고 서 있게 한다.

가장 싫어하는 인간과 닮아버린…

아침 7시50분. 등교 시간이 끝났다. 이제부터는 모두 지각생이다. 지각생들은 진입로 오른쪽에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시킨다. “인문계 고등학생들이 제정신이냐?” “넌 또 지각이야?” 지각생들은 엉덩이를 맞는다. 잘 부러지지 않게 다듬어놓은 몽둥이로 초범과 재범 등을 가려내어 엉덩이를 때린다. 어쩔 수 없다. 이건 벌이니까. 지각했으니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바로잡는 것이 결국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아직 아이들은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이건 교사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아침 9시. 학교 전체 운동장 조회가 시작된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저 뒤에서 시시덕거리는 아이들이 눈에 보인다. 아이들 사이를 가로질러 가서 정강이를 냅다 걷어찬다. “지금 국기에 대한 경례 하는 거 몰라?” 교장 선생님의 훈화 말씀 중이다. 아이들의 줄이 흐트러지고 여기저기서 잡담이다. 아이들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정강이 차기, 뒤통수 치기, 꿀밤 주기 등 온갖 잡기를 동원해서 ‘질서’를 잡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반장, 시작하자” “차렷!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

교사 1년차 때 나의 모습이다. 덕분에 나는 1년 내내 1교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컵라면으로 아침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다. 국기 경례에 대한 다른 의견도 다양성으로 포용하지 못한다.

군대 시절에 많이 맞았다. 군기를 잡기 위해, 부대가 원활히 움직이게 하기 위해, 상명하복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많이 맞았다. 그때 난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느꼈다. 인간으로서 존중이 아니라 오로지 계급에 의해 명령과 복종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을 보고 치를 떨었다. 난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미 나에게는 그 폭력이 내면화돼 있었다. 당연히, 혹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각인시키면서 아이들에게 똑같은 폭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교사가 된 뒤 1년을 보내며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을 내가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그로부터 1년 뒤, 상당한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손에서 몽둥이를 놓은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에게 하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몽둥이를 들지 않은 손과 입과 마음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들이 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나에게 말이다.

‘하지 않는 것’으로 출발하다

여학생들에게 여자다움을, 남학생들에게 남자다움을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남녀의 성역할을 고정시킴으로써 성적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은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있는 교무실에서, 꾸중을 듣고 있는 아이의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잘못을 해서 교무실에 불려와 교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야기를 듣는 아이의 수치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프다는 아이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돌아가는 모습에서 신뢰가 무너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머리 모양과 똑같은 복장에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 전체주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라고 힘있게 말하는 마이크 소리에서 군대식 복종 문화가 자리잡은 학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만들지도 않은 학생 두발 규정에 의해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는 아이들의 인권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기에 대한 경례라는 구호에 모두가 국기만을 바라보는 모습에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국가주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학교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 남성, 성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중심의 획일화된 가치관과 그것이 반영된 제도가 ‘상식이고 정상’이라고 말하는, 단지 차이일 뿐인 것을 차별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소외된 약자(없는 자, 여성, 청소년, 성적 소수자, 장애인)의 권리는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될 수 있다는,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미덕’이고 ‘우선’이라고 말하는 이 사회를 그대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기에 말로는 다양성을 말하지만 사실은 ‘획일화된 상식’이 교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몽둥이만 들지 않았을 뿐, 획일화된 상식의 폭력이 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아마 눈에 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학교장의 말 한마디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금의 학교 구조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몇 명의 학생이 남았는지가 교사의 학생지도 능력으로 이해되는 입시지옥 학교 현실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에게 인권은 사치가 되어버린 학교의 몰인권적 문화 속에서 일개 교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 대한 좌절과 무기력함이 부끄러운 시간들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으로 아이들과 함께할 것인가? 학교가 단순히 지식을 주입시키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삶으로 아이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의 삶에서 차이를 차별하지 않고, 나의 삶이 획일적 상식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를 인정하고, 나의 말과 행동이 어떤 대상에게도 폭력적이지 않도록 하는 것에서 말이다.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한다

그래서 나는 하나만을 강요하는 모든 경향성을 반대한다. 그 경향성은 ‘전체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전체주의는 결국 모두에게 개인의 삶을 부정하는 억압과 폭력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 경향성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획일화된 문화와 규범에 반대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개인과 존재의 다양성을 말살하기 때문이다. 학교장의 지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학교 구조에 반대한다. 그것은 일방적 복종만을 통해 이 사회를 그대로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또한 국기에 대한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 그것은 힘들 것 없는 동작과 몇 마디밖에 안 되는 문장이 무조건적 충성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 이 교사의 행동은 수구보수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에 이용되고 있다. 8월4일 집회에 나온 민주노총 조합원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권리와 정당성은 과연 누구에게서 부여받은 것인가? 지금 이 획일화된 사회에서 내가 ‘인간’으로 존중받기 위해 나는 내 삶에서 작은 것이라도 ‘획일화된 상식’을 거부하고 싶다. 국기 경례(맹세)를 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일부 학부모들은 나에 대해 경기도교육청에 민원을 접수시켰고,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 모임’은 나를 교단에서 영구 퇴출할 것을 경기도교육청에 요구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나를 ‘편향된 가치관 교육’의 문제 교사로 낙인찍었다. 그리하여 나는 경기도교육청으로부터 중징계 의결 예정을 통보받았다. ‘획일화된 상식’의 벽이 아직 매우 높다는 것에 마음이 우울하다. 앞으로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이 나 자신에 대한 시험장이 될 것 같다.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

이 교사 사건은 수구 세력의 ‘전교조 죽이기’와 연결돼

▣ 수원=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이용석 교사의 징계위원회가 열린 8월4일 오후, 수원은 섭씨 35도까지 올랐다. 경기도교육청 앞에서는 40여 명의 동료 교사와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땡볕 속에서 장시간 집회를 벌였다. 이 교사는 고민 끝에 징계위 출석을 결심하고 나왔다. 그는 “위원회에 들어가 징계의 부당성을 말하겠다”며 집회 군중을 뒤로하고 건물로 들어갔다. 징계위는 오후 2시께 시작됐다.

국기 경례를 하지 않고 ‘편향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위 회부까지 이어진 이용석 교사 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수구보수 세력의 일련의 ‘전교조 죽이기’ 속에서 돌출된 사건이라는 점이다. 도교육청의 ‘장학지도’로 해결되던 사안이 <조선일보>에 의해 대서특필돼 사회 문제화되고, 급기야 ‘학교를 사랑하는 모임’ 등 보수단체가 개입하기 시작한 점이 이를 보여준다. <조선일보> 등 수구보수 세력들은 전교조 부산지부의 통일교재 사건 등과 함께 이 교사를 지목하며 사상 공세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교사 사건은 근본적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우리는 국기 경례를 하지 않는 개인에게 과연 불이익을 줄 수 있느냐는 논쟁적 장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경기도교육청은 이 교사의 행위가 공무원의 품위 유지와 성실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화인권연대 등 39개 단체가 모인 인권단체연석회의는 8월3일 성명을 내어 경기도교육청의 징계 시도를 “우리 사회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검열하고 교사가 소신 있게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는 위험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징계위는 5시께 끝났다. 온도는 2도밖에 내려가지 않았다. 이 교사는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징계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 사실관계에 대해서만 답변을 했다”며 “이 때문에 징계하려면 차라리 헌법을 징계하라”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최종 징계 수위를 결정해 이 교사에게 통보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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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8-31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당^^

소나무집 2006-08-3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안셀름 그륀   
 

       

 


 
모든 것에 자기 시간이 있다


“너희에게는 시계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이것은 인도의 한 노인이 굉장히 바쁜 백인 사업가에게 한 대답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삶의 요구와 가능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또 이 대답에는 시간에 대한 기계적인 이해와 정신적인 이해가 얼마나 크게 대립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를 구분한다. ‘크로노스’는 계량할 수 있는 ‘시간’, 즉 세월이다. 시계와 같은 크로노미터(측시기)가 이 단어에서 나왔다. 서구인들은 계량할 수 있는 시간에 구속되어 있다. 우리는 분 단위로 약속을 잡고 끊임없이 시계를 보며, 상대가 약속시간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이 약속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모든 것이 정해진 시간 내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계량할 수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인생을 좁은 코르셋 안에 꼭꼭 쑤셔 넣으라고 강요한다. 크로노스의 신은 폭군이다.


인도인들은 카이로스의 신을 더 숭상한다. 카이로스는 좋은 순간, 환영받는 시간이다. 크로노스가 양적인 시간을 의미한다면, 카이로스는 시간의 특별한 품질을 일컫는다. 카이로스는 내가 나에게 몰입하는 순간, 내가 완전히 나로 존재하는 순간이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결정적인 순간’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스스로에게 시간(여유)을 준다. 그들은 시간을 즐긴다. 그들은 시간을 경험한다. 크로노스의 명령을 따르는 사람은 시간을 기쁘게 맞이하고 싶은 것, 즐거운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것으로 경험한다. 인도인들은 시간을 인지한다. 내가 완전히 ‘순간’에 존재한다면, 나는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면 시간은 종종 멈춘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바로 멈추어야 할 가장 적절한 때라는 것, 일을 해야 할 때라는 것, 생명을 번성시켜야 할 때라는 것,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경험한다.


구약성서의 현자는 그리스 지혜와 이스라엘 지혜를 결합한 <전도서>에서 이러한 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나 다 정한 때가 있다.
하늘 아래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나 다 때가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전도서 3,1-4)


시간을 느껴라

 

“모든 사람이 시간 죽이기쪰를 시도한다. 하지만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역설적인 내용을 담은 프랑스 격언이다. 우리는 시간을 죽인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을 죽이면서, 죽음 자체에서는 벗어나길 원하는 모순을 드러낸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시간을 죽이고, 다른 이는 자신의 시간을 헛된 일로 꽉 채우면서 시간을 죽인다. 어떤 이는 잡담을 하면서 시간을 피한다. 사람들은 사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시간이 흘러가길 바란다. 그들은 시간과 있으면 시간의 한계를 인지하기 때문에 시간을 느끼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한계를 지닌 죽음은 우리의 시간을 들여다본다. 죽음은 우리에게 부여된 시간에 대한 본질적인 경계선이다. 우리는 죽음을 대면하느니 차라리 시간을 죽인다. 하지만 죽음을 대면하는 자만이 시간을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체험하게 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다. 우리의 성공도, 우리의 재산도,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도. 우리는 단지 우리의 텅 빈 손을 뻗어 사랑하는 이의 품에 안길 수 있을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산다면, 우리는 사물들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차분히 살 수 있다. 우리의 일, 우리의 재산, 우리 주변의 사람들, 이 모든 것에는 각기 적당한 한계가 있다. 죽음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현재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하고, 인생이란 결국 선물이라는 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우리의 업적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생명의 시간은 죽음을 인지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죽음이 억압당하면 시간은 죽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의역된 의미는 ‘아무것도 안 하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이지만, 본 글에서 그륀 신부는 ‘시간을 죽인다’는 단어 그 자체의 의미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시간’과 ‘죽음’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다.

 

번역 / 이온화(이화여대 독문과 강사)   http://blog.daum.net/desertgo 에서 담아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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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5 0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8-25 0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리포터7 2006-08-25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혜경님 정말이지 인도인들은 우리와는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같아요..늘 우리에게 생각이 번쩍뜨이게 하는 말을 하죠...

비자림 2006-08-25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사한 글이네요. 얻어 가옵나이당^^

해적오리 2006-08-2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셀름그륀의 책들은 대부분 다 괜찮은것 같아요.. . 수도생활의 깊이가 사람에 대한 이해로 나타나는 게 참 좋아요. ^^ 퍼갈께요.

프레이야 2006-08-2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들, 오늘도 온몸으로 부르는 매미노래소리에 가슴이 싸아해집니다.. 어제 심야로 김기덕의 '시간'을 보고 들어와 시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 보았드랬어요. 오래된, 어려운, 상대적인 주제 앞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게 또 사람인가봐요^^ 영화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랑 거의 맞닿아 있는 글이라 생각되었어요..

잉크냄새 2006-08-2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도인에게는 다음 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와 순간을 감지하고 즐길수 있다고 하더군요. 시간과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볼수 있는 글이네요. 저도 추천하고 퍼갈께요.^^

프레이야 2006-08-25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네.. 저도 그런 생각으로 저를 다시한번 돌아보는 시간이었어요. 다음,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온전히 지금에 몰입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전출처 : 나귀님 > 영화의 사실성과 일관성의 문제 : <괴물>의 경우...

결국 마누라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괴물>이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문득 기게스의 반지와 투명인간에 관한 보르헤스의 언급을 떠올리게 되었다. 존 바스는 에세이 "보르헤스와 나"에서 1967년에 하버드 대학의 찰스 노턴 강의에 강연자로 참석한 보르헤스를 "록펠러 기금으로 낚아채" 자신이 근무하던 뉴욕 주립대 버펄로 캠퍼스에서 강연을 하게 했던 사건을 회고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 곧 이어 진행된 질의응답 시간에 그는 아주 훌륭했다.(사실 그 후 미국여행 시에 그는 "준비된" 강연보다는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들과 담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예컨대 공상과학 소설에 자기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로 H. G. 웰스의 <투명인간>과플라톤의 <기게스의 반지>를 멋지게 대조시켰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몸을 보이지 않게 하는 반지를 끼는 것은 단 한 가지 불가능한 것만 요구하면 나머지는 모두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몸을 안 보이게 하는 화학약품을 마신다는 것은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끊임없이 버티어 나갈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학약품보다는 반지가 더 삼키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멋진 15분이 흘러갔다. (존 바스, "보르헤스와 나," <소설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 김성곤 편역, 글, 1992, 59쪽)

하긴 그렇다. "투명인간"이 자칭 과학적 근거에 의지한 거짓말(허구)이라 한다면, "기게스의 반지"는 환상에 근거한 거짓말이다. 이 경우에 어느 쪽이 더 손쉬운지는 명백하다. 반지야 "원래 그런 것이 있다"고 한 마디 던지면 그만이다. 그 유래가 무엇인지, 그 한계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도 없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반면 플라톤에 비해 지극히 현대인이었던 웰스는 "투명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과학적인 "그럴듯함"을 끌어들였고, 그러다보니 이후의 진행상황에 대해서도 수시로 "그럴듯한" 묘사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다. 똑같은 "뻥"이지만 기게스의 반지가 "큰 뻥 하나"로 만족할 수 있었다면, 투명인간은 "작은 뻥들"을 쉴새없이 갖다 붙여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둘 중 어떤 게 경제적인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어차피 치는 뻥이라면 아예 확실하게 꽝 쳐 버리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모순도 줄어들고 굳이 머리를 짜낼 필요도 없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나서 "아까 그건 좀 말이 안 되지 않아? 가령 주인공이..." 라고 말을 꺼내면,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대답은 십중팔구 "에이, 그러니까 영화고 그러니까 드라마지. 그럼 뭐 얼마나 사실적인 걸 기대했어?" 하지만 이때 상대방의 대답은 "사실성"과 "설득력"을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는 정의 자체부터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허구는 비록 사실성은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설득력마저 결여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영화나 드라마가 사실이 아닌 "허구"라는 걸 누가 모르느냐는 거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그럴 듯한 허구"가 되기 위해서는 설득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한 가지 미심쩍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비판할 적에 "어차피 허구인데 뭘 그러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들의 반박은 일종의 핑계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 이전부터 "이것은 허구다"라고 자인한다면, 그들은 결코 영화나 드라마에 몰입하지 말아야 하고, 몰입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허구를 비판적인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대해 진저리를 치며 "허구일 뿐"이라고 반박하는 사람들일수록 사실은 그 허구에 깊이 "몰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 자체의 설득력 부족이나 비논리를 지적하면 마치 덴 상처를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는 듯 "발끈"하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은 허구를 허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구를 자신이 본 작품의 "약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 허구성을 드러내는 지적에 발끈한다. 그만큼 자신이 본 허구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아무리 "사실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설득력"마저 없어지고 나면 결코 잘 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령 <반지의 제왕>이나 <킹콩>, 혹은 <해리 포터>나 같은 영화를 보자. 이건 그야말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실적 소재"와는 완전 담을 쌓은 영화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영화가 전혀 "설득력"조차 지니지 않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가령 나 <킹콩> 같은 경우에는 외계인이나 괴물 같은 허구의 존재가 나타나긴 하지만, 그 외의 인간들은 그런 상황에서 있을 법한 상당히 "그럴 듯한" 반응을 보이며 설득력 있게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 나오는 요정이나 마법사는 허구의 존재이지만, 이들 역시 인과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마법 역시 어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만약 그런 최소한의 설득력도 없는 영화나 드라마나 다른 작품이 있다면, 관객은 결코 그것을 "그럴듯 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결코 그것에 "몰입"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야 결코 24시간 내내 이상적이거나 합리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논리보다 비논리적으로 행동할 때가 더 많다. 그러나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은 현실을 능가하는 "논리"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현실과는 달리, 이것들은 필름이나 종이 위에 "고정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달리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이런 "허구"는 오히려 현실보다 더욱 "사실"에 가까워야 한다는 역설을 요구사항으로 내세운다. 어쩌면 히치콕이 "제아무리 사실적인 영화라도 현실과는 전혀 다른 과장을 펼쳐야 관객들이 그럴듯 하다고 수긍한다"고 말한 것이나, "현실이 소설보다도 더욱 소설같다"는 역설이야말로 바로 이런 뜻을 암시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내 경우에는 <괴물>의 줄거리를 모두 다 알고 보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된 면도 없진 않을 것이다.(솔직히 요즘 인터넷 쓰는 사람 중에서 <괴물>의 줄거리를 "전혀" 모른 채 영화를 볼 수 있었던 행운아가 과연 있기는 할까? 아마 한강의 괴물인지 아기공룡 둘리인지만큼이나 희귀한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줄거리 못지않게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킨 요소는, 보르헤스의 말을 빌리자면 "투명인간의 존재를 합리화하기 위해 끼워넣은 계속되는 변명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괴물>이 보다 "그럴 듯한"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차라리 주인공(?)인 괴물이 "어디서 그런 게 갑자기 나타났다"고 불쑥 내뱉고 시치미를 뚝 떼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거다. 감독의 듀나의 비아냥처럼 "한국의 좌파 남성이 생각할 법한" 내용을 모조리 이 영화에 쏟아부은 모양이지만, 나름대로의 "설득력"을 제공하기 위해 덧붙여진 이런저런 부가 설명은 오히려 "설득력"을 잃는 역설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듯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찍이 미군부대에서 독극물인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방류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니까 제아무리 "영화적 상상력"이 발동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해 "낚시꾼의 컵 안에 들어갈 만큼 작았던" 돌연변이 생물체가 그야말로 "버스 크기만큼 자라났다"는 것이야말로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단지 그 한 마리 이외에 나머지 한강 생태계에는 얼핏 보기에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물론 "한강의 돌연변이"라고 하는 설정도 나름대로는 "그럴듯"하다. 하지만 만약 그것을 "깊은 바다에 살다가 우연히 한강으로 올라온 돌연변이"라고 했다면 보르헤스 식으로 "더욱 그럴듯"했을 것이라는 거다.

그 외에도 온갖 트집거리를 늘어놓자면 한도 끝도 없다. 처음 대낮의 습격 장면에는 그야말로 버스 만한 크기로 묘사된 괴물이 어떤 장면에서는 불과 승용차 크기로 묘사되기도 하고, 가족들은 밤섬이 뻔히 바라다보이는 서강대교 남단에서 여자아이를 잃고 하루 종일 엉뚱한 하수관만 찾아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야 "그 옆의 옆"에 있는 원효대교 북단을 찾아가며, 총을 몇 방이나 맞아도 꼼짝 않던 맷집을 자랑하던 괴물이 미국의 최신 "살충제"에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솔직히 그 정도로 독한 살충제라면 간신히 구출한 아이들을 비롯해서 가족들이나 그 주위 사람들 모두 진작에 기절하거나 돌아가셨어야 옳지 않았을까. 솔직히 그 장면에서 괴물이 또 다른 "독극물 방출"에 괴로워하는 장면만 보면 갑자기 괴물이 안쓰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공적 앞에서는 말 그대로 "괴물"인 괴물조차도 "자연"이나 "환경"의 아이콘이 되는 셈일까?) 딸을 잃은 아버지의 쇠꼬챙이에 찔려 세상을 하직하며, 분노한 할아버지는 "총알이 단 한 방" 들어 있는 사냥총을 들고 이거면 된다는 식으로 괴물과 1대 1로 맞서고, 괴물은 그냥 얌전하게 헤엄쳐 건너가도 될 강물을 굳이 "힘들게" 한강다리 밑에서 재주넘기를 하는 식으로 건너가고, 처음에는 딸이 죽었다고 해도 어리버리 정신 못 차리면서 골뱅이 통조림 따먹기에 열중하던 "덜 떨어진" 아버지를 비롯한 온 가족이 나중에는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호흡을 척척 맞춰 괴물을 처단하고, 괴물은 마치 이런 처벌의 이유라도 제공하려는 듯 친절히 기절한 척 입을 벌려 자기가 "먹던" 두 아이를 뱉어놓고 나서야 다시 일어나서 펄펄 뛰어다닌다. 그리고 한강에 살던 괴물이 어느 날 갑자기 "대낮"부터 교각에 매달려 있다가 육지로 올라와서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아무리 스펙터클이 필요했다손 치더라도 지나친 오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커다란 괴물이 몇 년째 한강에 산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고 치면, 괴물은 아마 될 수 있는 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생존 전력을 취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분명히 뭔가 먹고 살아야 하긴 했을 테니, 간혹 고수부지에 어정대는 얼빠진 인간들을 납치하긴 하되, 공급 중단 사태가 없도록 최대한 은밀하고도 알뜰하게 챙겨먹었을 것이다. 솔직히 자신이 붙잡아 놓은 "먹이"가 도망가려는 시도를 시치미 뚝 떼고 지켜보다가 중요한 순간에 "장난"을 칠 정도로 "쎈쓰쟁이"인 괴물이라면 지능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인데, 그런 놈이 아무리 빡돌았다거나 배고팠다 치더라도 고수부지 위에 올라와서 한 달 먹을 식량을 제멋대로 헤집어 놓고, 정작 먹이를 "먹는" 것보다 "뒤쫓는" 것에 몰두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설득력이 없다.

물론 이런 트집이 정말이지 트집으로만 느껴질 정도로 이 영화엔 "장점"도 많다. 아니, 어쩌면 장점이 많기 때문에 그런 "단점"이 더더욱 두드러져서 안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가령 괴물이 처음 등장하는 추적 장면은 상당히 박진감이 넘치고, CG도 효과적으로 잘 사용되었다고 본다.(맨 끝에 불 붙는 장면은 제외하고. 그건 솔직히 CG의 한계랄까, 좀 노골적으로 티가 났다.) 일부 언론에서는 괴물이 사람을 뒤쫓다가 제풀에 자빠지기도 하는 장면을 "봉준호식 유머 감각"으로 과대해석하는데, 내가 보기엔 오히려 괴물이 그렇게 자빠지는 것이 더욱 "설득력"있게 보인다. 하긴 버스 크기의 커다란 괴물이 그런 속도로 달린다고 칠 적에, 뭐 연습이라도 한 듯이 한 번도 비탈길에서 미끄러지지도, 헛발질을 하지도 않고 매끈하게 움직이겠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빌딩 만한 괴물이 쿵쿵대고 질주해도 바닥에 발자국 하나 패이지 않은 <고질라>가 더욱 이상한 영화 아닌가. 물론 <괴물>에서도 CG로 묘사한 괴물의 움직임은 대단했지만, 한편으로는 듀나가 해리하우젠의 수작업 특수효과를 평가할 때 한 지적처럼 그 묵직한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가령 "버스만한" 크기의 괴물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 때 물결이나 물보라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튀었던 것을 보라.(특히 처음에 여자아이를 납치해서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는 "백조 보트"가 둥실둥실 떠 있는 사이로 뛰어드는데, "버스만한" 괴물이 첨벙 뛰어들었는데도 주위의 보트들은 한 대도 뒤집어지지 않고 미동조차 없다.)

비중이 괴물 쪽으로만 쏠려 있기 때문일까, 송강호가 맡은 딸 잃은 아빠의 인물 설정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없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푼수처럼 실수만 반복하는 주인공은 자기 아버지의 시신과 경찰의 추적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고 징징거리다가 결국 체포될 정도로 덜 떨어진 인물이지만, 얼떨결에 뇌 생검을 당한 후에는 의사를 주사기로 위협해 극적인 탈출에 성공하고, 심지어 수퍼맨처럼 괴력을 발휘해 콘크리트 매달린 경고판을 박살내 무기로 사용한다. 물론 딸의 죽음으로 인해 흥분해서 괴력을 발휘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맨 처음에 딸이 괴물에게 "끌려가서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그런 생각조차 없이 제 한 몸 건사하는("아버지, 나 죽는 거야?"라고 물어보고, 먹지 말라는 통조림까지 따 먹으면서) 데에만 열중하다가, 맨 끝에는 기절한(?) 괴물의 입을 맨손으로 벌려 아이들을 꺼내고, 한참 동안 괴물을 등지고 딸을 품에 안은 채 얼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전형적인 "결말용 클로즈업"을 보여주다가, 역시 맨손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괴물을 찔러 죽이는("드라마-드라마주의"의 신봉자인 집사람조차도 이 대목에서 "차라리 괴물이 쇠파이프에 박히는 순간, 쇠파이프를 지지하던 송강호의 오른손이 찢어지거나 다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 하고 아쉬움을 나타냈을 정도였다.) 괴력을 발휘한 직후에는, 자기 딸과 함께 괴물 뱃속에서 나온 소년에게 다가가 "아는 척"을 한다. 솔직히 나는 <괴물>이란 영화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갖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전반부는 매우 "훌륭"하지만, 후반부는 매우 "엉성"하다고 생각한다. 어째서 처음 10분 동안 보여준 박진감 넘치는 연출이나 줄거리가 후반부에는 해당되지 않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또 한 가지 지적은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별로 설득력은 없어 보였던 "반미"라는 주제였다. 물론 이 영화에서 "괴물"의 발생 이유를 제공한 미군부대의 독극물 고의 유출 사건은 명명백백한 범죄이지만, 이후에 한강에서 괴물이 발생한 것과 관련해 미군부대나 미국정부의 개입이나 "살충제" 도입 등의 주장은 영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솔직히 미국이 그 정도로 "한강 괴물"의 처리 문제에 개입하려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단순히 주한미군 하사관 한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 주한미군만 습격한다거나 아예 대추리 미군부대 이전 예정부지가 "괴물의 둥지"였기 때문에 괴물이 보복으로 미군을 습격하고, 이에 대해 미군이 "이는 미국에 대한 도발 행위"이기 때문에 한국에 병력을 증강하거나 신무기를 배치한다는 식으로 나와야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았을까? 물론 듀나의 지적처럼 "버스 만한 크기의 괴물이 대낮부터 수도 서울 한가운데의 한강에 나와 수십 명의 시민을 죽인" 판에 기껏해야 바이러스를 운운하며 방역업체 직원들보고 고물 트럭이나 몰고 다니며 소독약을 뿌리라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그야말로 "데프콘" 급의 비상사태가 되어 특수부대를 비롯한 군 병력이 본격적으로 한강에 투입되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움직이는 놈은 뭐든지 쏴버리라"는 명령이 하달되어야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물론 "반미"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하고픈 것은 아니고, 분명히 영화에 나와도 될 소재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욕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반미건 친미건, 아니면 친공산주의나 심지어 "친노" 발언을 하고 싶더라도 뭔가 좀 더 "그럴 듯한" 맥락에서 해야 한다는 거다. 그런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솔직히 강우석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노골적인 쇼비니스트적 "교훈"과 봉준호의 노골적인 좌파적 "교훈"이 뭐 다를 바 있겠는가? <괴물>에서 봉준호는 "한국의 좌파 남성"으로서 뭔가 한 마디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의도한 "한 마디"는 <괴물>이라는 영화의 다른 요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뜬금 없는 한 마디"로 남아있었던 것만 같아 아쉽다.

뭐, 이미 나온 영화의 각본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찧고 까불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처럼 시간낭비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영화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세계적인 특수효과 팀을 불러서 탁월한 "블록버스터"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가장 기본이면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각본"에 있어서는 아직도 엉성하기 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순수 국산 CG 특수효과를 운운하면서 나온 심형래의 <용가리>를 봤던 사람이라면 봉준호의 <괴물>에 대해서는 AAA+++ 를 주고도 남았겠지만(왜냐하면 <용가리>는 CG도 각본도 연기도,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전무한 졸작이었으므로.) 그런 식의 자뻑스러운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를 취해 보면 아무래도 <괴물> 역시 "볼만한" 작품일망정 "걸작" 소리를 듣진 못할 것 같다.(듀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별 네 개 만점에 별 세 개 반을 줬는데, 솔직히 나로선 별 세 개, 아니 별 세 개 하고 2/3을 주겠다. 그만큼 선뜻 추켜세우긴 힘들 정도로 아쉬움이 많다는 거다.)

이런 말을 하고 나면 "스크린쿼터 문제도 있어서 가뜩이나 힘든데... 한국영화를 사랑하자"는 도덕교과서적인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나야 한국영화 외국영화를 가르기보다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 혹은 "잘 만든 영화"와 "못 만든 영화"로 구분할 뿐이다. 제아무리 한국영화라도 "못 만든 영화"는 "나쁜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는 "좋은 영화"라는 내 신념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엉성한 영화를 단지 "국산"이란 이유만으로 치켜세우는 것 역시 국수주의의 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옛날에 비해서는 나아졌다"고 주장에 대해서도 나는 의구심을 품는 것이, 지금이야 과거와 달리 온갖 소재와 금기에 대한 묘사가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각본" 자체부터 삐걱거리기는 여전하니 말이다. 단적인 예를 들어 1950년대 중반에 나온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만 보더라도, 요즘 나오는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 각본을 뺨치게 잘 썼다. 그렇다면 솔직히 영화의 특수효과 같은 기술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각본이나 연기나 연출력 같은 가장 기본적인 측면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전하지는 않는 것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과거에 비하자면 요즘 한국영화는..." 하고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거다. 내가 보기에 요즘 한국 영화는 훨씬 넓어진 소재의 가능성과 발전한 기술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승자박 식으로 저질 코미디와 로맨스, 그리고 짝퉁 블록버스터만 만들어내는 쳇바퀴를 여전히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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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의 술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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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 시인은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경기도 의정부에 살던 말년에 그는 해질 녘이면 단골 술집에 들러 혼자서 막걸리 한두 잔 걸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당시 단골 술집의 주모는 할머니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천 시인은 단골 술집을 바꿨다. 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에 올려 놓고 뻔히 들여다보던 부인이 슬쩍 물었다. “새로 가는 술집 주인은 젊은 여인인가 보죠?”

 

시인은 아이처럼 화들짝 놀랐다가 늘 아내에게 했듯이 “문디 가시나…”라고 입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새로 가는 술집은 잔이 더 크다 아이가.”

작고한 시인의 부인이 언젠가 사석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남몰래 술잔 크기를 재 보면서 속으로 득의양양했을 시인의 천진무구한 표정이 눈앞에 선하다. 그의 술 욕심은 무욕(無慾)에 가깝다.

 

그런데 천상병이 단골 술집을 바꾼 사연은 한 시인의 일화에 그치지 않는다. 천상병의 술잔은 문학의 존재 양식을 떠올리게 한다. 천상병은 홀로 마시는 술잔의 크기에서 자족(自足)의 환희에 도달했다. 혼자 끙끙 앓다가 원했던 문장을 쓰게 된 작가의 희열뿐만 아니라, 홀로 조용히 문학 작품에 감동한 독자의 눈물과 다를 바 없다. 모든 예술이 밀실의 산물이지만, 미술은 전람회장에서, 공연 예술은 무대에서, 영화는 영화관이란 공동 체험을 거쳐 수용된다. 하지만 문학은 낭독회를 제외하고는 원천적으로 독자가 나 홀로 감상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천상병의 독작(獨酌)은 문학의 생태 원리를 반영한다.

 

프랑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사랑의 야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옛날 페르시아의 한 왕이 중국과 그리스 화가를 한 명씩 불렀다. 왕은 집무실의 서로 마주보는 양쪽 벽에 각각 그림을 그리라고 지시한 뒤 둘 사이에 긴 장막을 쳤다. 약속한 기일이 되자 왕은 신하들을 이끌고 두 화가를 찾았다. 중국인 화가가 그린 벽화는 말로만 듣던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환상의 세계를 눈앞에 갖다 놓은 듯한 벽화 앞에서 왕과 신하들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다. 왕이 반대편 벽을 맡은 그리스인 화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장막을 걷으라고 명했다. 왕과 신하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리스인 화가는 거대한 거울을 벽에 붙여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거울 속으로 중국인 화가의 벽화가 고스란히 반영됐다. 벽화보다 더 생생한 느낌을 주었다. 왕과 신하들은 그리스인 화가가 더 뛰어나다고 손을 들어 주었다. 그들이 더 좋아한 것은 거울 속에 투영된 벽화의 무릉도원 속에서 자신들이 노닐고 있는 모습에 홀딱 반했기 때문이다.

 

투르니에가 이슬람권에 전해오는 우화를 각색해서 만든 이 이야기는 복제예술인 영화가 판치고, 인터넷 동영상이 성행하는 현대사회에 대한 풍자로 읽힌다. 페르시아의 왕과 신하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초상에 환호작약한 것이나, 오늘날 네티즌들이 사이버 공간 속에서 이미지 짜깁기의 유희에 열광하는 것은 뭐가 다른가. 인터넷은 혼자 놀지만, 동시에 타인과 함께 노는 가상 공간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어느덧 혼자 있는 것에 서투르다.

 

"소설 읽기가 영화 보기보다 힘든 것은 자아 성찰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문학 평론가 김치수는 이미 말했다. 블록버스터 영화가 관객 동원에 열성이고, 인터넷에 누구나 볼거리가 넘치는 올여름, ‘나 홀로’ 문화의 대표 격인 순수문학은 독자를 갈망한다. 홀로 막걸리 한잔에 입맛을 다셨던 천상병을 그리워하듯이.

 

박해현 기자

 - 조선닷컴 와플레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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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巖 2006-07-26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기사 읽으면서 혼자 웃었군요. 퍼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