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늘바람 > [퍼온글] 명사들이 말하는 글쓰기

명사들이 말하는 글쓰기

명사들이 말하는 글쓰기

[동아일보 2006-04-01 03:00]   

《감각적인 문체와 미학으로 명성을 떨친 작가 김승옥은 오랜 절필을 끝내고 ‘서울의 달빛 0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글은 손이 쓰는 것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일단 글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펜을 쥐고 글을 써 나가다 보면 쓰는 행위 자체가 쓰는 이의 두뇌와 감성을 자극해 새로운 사고와 상상력의 세계를 열어 준다는 것이다.

일본 작가 사이토 다카시는 말하는 것을 걷기에, 글쓰기를 달리기에 비유한 적이 있다. 거리를 조금씩 늘려 가며 훈련하면 누구나 1km는 거뜬히 달릴 수 있듯 글쓰기도 마찬가지라는 것.

글쓰기에도 비기(秘技)가 있을까. 국내 논픽션 분야 베스트 셀러 저자들에게 물어봤다. 체험기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한비야 씨, 교양과학 분야 최고 판매 도서 기록을 세운 정재승 씨, 역사 분야의 대중 저술가인 이덕일 씨가 자신만의 글쓰기 방식을 들려줬다.》


○ 쉽고 편안한 말글-‘한비야 체’ 글쓰기

1996년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이후 지난해 말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이르기까지 한비야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이 펴낸 책 7권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 책들은 한결같이 술술 읽히는 쉬운 말글로 쓰였다. 오죽하면 한 고교 국어교사가 신문 사설을 학생들에게 나눠 주고 ‘이 글을 한비야 체로 고치라’는 수업까지 했을까.

그러나 글이 쉽다고 해서 글을 쓰는 과정도 쉽게 이뤄지리라 생각하면 착각이다. 그의 책 세 권을 낸 푸른숲 출판사 김혜경 사장은 한 씨에 대해 “느낌표 하나까지 굉장히 엄격한 완벽주의자”라고 평했다.

한 씨는 글을 쓸 땐 늘 밤을 새운다. 밤새 원고지 100장을 넘게 쓴 뒤 아침에 마음에 들지 않아 5장만 남기고 모두 버린 적도 있다. “머리를 벽에 100번 찧어 좋은 글 한 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글쓰기를 대하는 그의 기본 태도다.

그는 매일 쓰는 일기와 메모로 글쓰기의 기본을 닦았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긴급구호 현장에서도 빼먹지 않은 일기를 토대로 썼다. 디지털카메라를 갖고 다니는 사람이 첫 번째 목련을 보면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듯 그는 저절로 메모장에 손이 간다고 한다.

글을 멋지게 쓰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글을 잘 쓰려면 미사여구, 유식한 단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내 책엔 초등학생이 모르는 단어가 한 개도 없다. 그렇게 쉬운 단어로도 얼마든지 책을 쓸 수 있다.”

다 쓴 글은 꼭 소리 내어 읽어 본다. “글은 노래이자 이야기이자 호흡이다. 나와 독자가 호흡이 맞으려면 소리 내서 읽을 때 껄끄러운 표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조다.

그에게 ‘일필휘지’란 없다.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뒤 교정지가 나올 때마다 빨간 펜으로 하도 많이 고쳐 ‘딸기밭’이라고 부를 정도다. 원고가 인쇄소로 넘어가기 직전에도 밤중에 달려가 고치고 책이 나온 뒤 2쇄, 3쇄를 찍을 때도 계속 고친다.

한 씨는 해마다 ‘1년에 100권 읽기’를 하는데 긴급구호로 오랫동안 외국에 나가 있지 않으면 대부분 초과 달성하는 편이라고 한다. 그는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들이 ‘진부하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조언 하나를 들려줬다.

“진심을 갖고 써라. 제발 단 한번만이라도 나에게 가슴 뛰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라.”


○ 전방위적 호기심과 독서-정재승 식 글쓰기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시스템학과 교수가 쓴 ‘정재승의 과학콘서트’는 2001년에 출간된 뒤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교양과학 도서다. 이 책을 펴낸 동아시아출판사 한성봉 사장은 정 씨에 대해 “전방위적 호사가”라고 평했다. 다방면에 걸친 지식과 호기심이 그의 글이 지닌 가장 큰 강점이라는 평가다.

한 달에 40∼50권을 훑어보고 10권가량은 꼼꼼히 읽는 정 씨는 “좋은 글을 쓰려면 독서가 필수”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쓰려면 적절한 예제, 딱 맞는 비유, 핵심을 꿰뚫는 인용 등 세 요소가 중요하다. 좋은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이 세 요소 없이 생각을 추상적으로 전개하거나 중언부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 요소는 다른 사람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으면 도저히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칠 때 문단 단위로 연습하기를 권한다. 문단은 생각의 단위이고 한 문단에 하나의 생각을 담아야 하는데 한 문단에서 여러 이야기를 하거나 한 이야기도 끝마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한 문단을 잘 구성하기만 하면 연결고리를 통해 다른 문단과 이어가고 글쓰기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글쓰기 전 밑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중요하다.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곧바로 글을 쓰다가 처음 의도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시작은 어떻게 하고, 각 문단은 어떤 내용을 담을지 밑그림을 먼저 잡고 글을 쓰면 더 잘 써진다.”

한번 글을 쓰면 반드시 20번쯤 읽는다. “산문에도 운율이 있으므로 독자가 한번에 이해하도록 쓰려면 필자가 아주 작은 운율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글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남의 글을 충분히 읽지 않고 글 쓰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 시각과 문제의식의 단련-이덕일의 글쓰기

1997년 첫 책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펴낸 뒤 지금까지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쓴 책은 30권가량 된다. 9년간 30권이니 1년에 3.3권을 쓴 셈이며 권당 원고지가 1000∼1300장이니 하루에 9∼12장씩이다. 단행본 말고 잡지나 신문에 기고한 원고를 포함하면 더 늘어난다.

어마어마한 생산량인데도 이 씨는 “쓰는 행위 자체가 큰일은 아니다. 글쓰기에서 글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의식을 다듬어 주제를 구상하고 자료를 분석하며 생각을 숙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책 3권을 펴낸 출판사 김영사의 백지선 팀장은 ‘도발적 문제의식’을 그의 글이 지닌 강점 중 하나로 꼽았다. 역사가가 보는 자료라는 게 새로울 것이 없는데도 다양한 자료의 비교분석을 통해 새로운 진실을 발견해 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글 쓸 주제를 고를 때 이 씨는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독자도 알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른다”고 했다. 그는 글을 잘 쓰려면 개방적 세계관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변화를 수용해야 새로운 문제의식이 생기며 문제의식을 갖고 보면 같은 자료에서도 계속 새로운 게 보인다.”


치열한 문제의식을 글로 옮기려면 문장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 씨는 “문장력을 기르는 방법은 많이 보고 많이 써 보는 것 말고 왕도가 없다”고 했다.

“요즘 논술 준비 광고를 보면 논술 공부가 문장 공부인 것처럼 광고하는데 문장은 자기 생각을 펼치는 도구에 불과하다. 더 중요한 것은 글에 담긴 생각, 논리다.”

책을 그렇게 많이 썼지만 여전히 1000장짜리 책을 쓸 때 원고지 200∼300장을 버리는 일이 다반사라고 한다. 아무리 많이 해도 더 수월해지지 않는 일이 글쓰기인 까닭이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박가분아저씨 > 쌍봉황문병경(雙鳳凰文炳鏡) 외


쌍봉황문병경(雙鳳凰文炳鏡) 외
쌍봉황문병경(雙鳳凰文炳鏡) 고려시대 8.8*15.2cm '박가분자료관‘소장

-동물 문양이 있는 동경-

고려동경 문양을 표현한 방법은 다음 몇 가지 종류로 분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가상적인 존재에 실제적인 형태를 부여하여 상상한 것을 표현했으며 둘째, 비나 구름과 눈이나 바람 등 천상(天象)과 물이나 파도나 바다와 암석 같은 지상(地象)에 관련된 것이다. 셋째, 동물에 관련된 것이라도 수류(獸類)나 조류(鳥類)나 충류(蟲類)와 어류(魚類) 등으로 구분했다. 넷째, 식물문양 표현도 꽃과 잎과 풀 모양을 나타내거나 기타 식물을 응용하여 만들어 내었다. 다섯째, 전설이나 설화를 응용한 풍경을 볼 수 있고 여섯째, 각종 기물에 보주문(寶珠文)을 그리거나 건물 자체를 하나의 문양으로 취급하는가 하면 일곱째, 명문이나 자문(字文)을 새겼으며 여덟째, 기하학적인 곡선과 직선을 결합하여 문양을 만든 것이다.
쌍봉문 손잡이 거울(柄鏡)은 첫 번 째 분류에 해당하는 출토품으로서 매장 환경이 나빠 상태는 좋지 않지만 미려하고 아름다웠을 처음 모습을 짐작케 한다. 상상의 새인 봉황은 수컷을 봉(鳳)이라 하고 암컷은 황(凰)이라 부른다. 옛부터 모든 새 가운데 제일로 쳤으며 경사와 평화를 상징하는가 하면 ‘봉이 나매 황이 난다.’는 말처럼 부부의 애정을 표상하기도 하고 ‘닭이 천이면 봉이 한 마리 있다.’에서 보듯 뛰어나게 훌륭한 인물을 상징했다.
경우에 따라 원형으로 된 것이 있고, 사각의 장방형안에 다시 원형을 두고 그 안에 쌍봉문을 배치하는 등 변형되고 구성을 달리하거나 세분화된 것이 보인다.



쌍호문우입방형경(雙虎文隅入方形鏡) 고려시대 11.9cm '박가분자료관‘소장

쌍호문은 셋째 수류(獸類)에 해당되는 것으로, 으르렁거리고 쫓고 쫓기는 다분히 생동감있고 사실적인 모습이다. 호랑이가 상징하는 뜻은 산신이나 산신의 수호자,병귀(病鬼)나 사귀를 물리치는 힘,권세나 관직,효와 보은,열정과 보은,풍요의 기원,방위 수호신,보은(報恩)....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둥그런 원안에 두 마리 호랑이를 새긴 것도 있고, 호랑이와 인물을 원안에 새긴 채 손잡이 달린 형태의 인물맹호병경(人物猛虎炳鏡)도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물만두 > 간서치가 등장하는 작품들

 이 책은 조선시대 지식인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열정과 광기를 탐색한 글이다. 허균, 권필,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정약용, 김득신, 노긍, 김영 등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 시대의 메이저리거들이 아니라 주변 또는 경계를 아슬하게 비껴 갔던 안티 혹은 마이너들이었다.
남이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출세에 보탬이 되든 말든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정신, 이리 재고 저리 재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성실과 노력으로 일관한 삶의 태도, 신분과 나이와 성별을 잊고 이름 밖에서 그 사람과 만나고자 했던 진실한 사귐, 사물의 본질을 투시하고 평범한 곳에서 비범한 일깨움을 이끌어내는 통찰력. 그러나 이들은 세상의 인정을 받기보다는 죄인으로, 역적으로, 서얼로, 혹은 천대받고 멸시받는 기생과 화가로 한세상을 고달프게 건너갔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진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심지어 굶어죽기까지 했다.
저자는 다만 “이 책에서 기록의 행간에 숨어 잘 보이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를 먼지 털어 전달하는 사람의 소임만을 다하고자 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살린 이들의 삶은, 본받을 만한 사표(師表)도, 뚜렷한 지향도 없어 모호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옛글 속에서 길어올린 지식인의 내면 풍경

이 책의 저자 정민은 스스로 먼지 쌓인 한적 속에서 ‘오래된 미래’를 찾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전도 코드만 바꾸면 얼마든지 힘 있는 말씀이 될 수 있다 한다. 그렇다. 같은 글도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른 울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서 저자가 붙잡은 화두는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이다. 이를 조선 지식인의 내면을 읽는 화두로 삼은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 지식인을 읽는 새로운 코드, 벽(癖)

“사람이 벽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온 것이니, 병 중에서도 편벽된 것이다. 하지만 독창적인 정신을 갖추고 전문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 - 박제가, 《백화보서》
꽃에 미친 김덕형, 장황에 고질이 든 방효량, 돌만 보면 벼루를 깎았던 석치(石癡) 정철조, 담배를 너무 좋아해 아예 담배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책을 엮은 이옥, <백이전>을 1억1만3천 번을 읽은 독서광 김득신, 스스로를 간서치(책에 미친 바보)라 했던 이덕무……,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글에서는 무언가에 온전히 미친 마니아들의 존재가 부쩍 눈에 띈다. 지켜보는 이에게 광기로 비칠 만큼 미친 듯이 한 가지 일에 몰두한 이들의 존재는 이 시기 변모한 지적 토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광기 넘치는 마니아의 시대

18세기 지식인들은 이처럼 벽에 들린 사람들, 즉 마니아적 성향에 자못 열광했다. 너도나도 무언가에 미쳐보려는 것이 시대의 한 추세였다. 이전 시기에는 결코 만나볼 수 없던 현상이다. 이전까지 지식인들은 수기치인 곧 자기를 닦는 공부에 몰두했다. 사물에 몰두하면 뜻을 잃게 된다고 하여 오히려 금기시했다. 격물치지 공부를 강조하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사물이 아니라 앎이, 바깥이 아니라 내면이 최종 목적지였다. 이런 흐름이 18세기에 오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진다. 세상은 바뀌고 지식의 패러다임에도 본질적인 변화가 왔다.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이때 쏟아져 나온 그 방대한 저작들, 정약전의 《현산어보》 김려의 《우해이어보》, 정약용의 그 엄청난 저작들은 모두 벽의 추구가 낳은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의 산물이었다.
나태와 안일을 꾸짖는 서늘한 죽비소리

그러나 저자는 이들이 이룬 성취에만 주목하지는 않는다. 한낱 기생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보잘것 없는 화공의 죽음에 크게 낙담했던 허균, 나이와 신분을 잊고 음악을 통해 진심을 나누었던 홍대용과 그의 벗들, 자신의 둔함을 탓하는 제자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스승 권필과 그런 스승을 정성으로 모시는 제자 송희갑 등, 이들이 보여주는 삶의 태도는 그 자체로서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서늘한 죽비소리이다.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주체를 세우지 못한 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이들에게, 그렇게 해서야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묻고 있는 것이다.
작은 영웅들의 삶을 복원 -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한 가지에 몰두하는 힘으로 우뚝한 보람을 남긴 이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들은 하나같이 고달프고 신산한 삶을 이어갔다. 천대와 멸시 속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데 대한 좌절과 분노 속에, 그렇게 잊혀져갔다. 굶어죽고 만 천재 천문학자 김영, 과거시험 대필업자라는 조롱 속에 세상을 냉소하였던 노긍, 불온한 문체를 쓴다는 이유로 견책을 입고 군역을 갔던 이옥, 저자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잊혀져 간 이들의 삶을 정성스레 복원해내고 있다. 이들이 자신에게 자꾸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고 한다. 김영의 죽음에 홍길주는 “세상은 재주 있는 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라며 안타까워했고, 이가환 역시 “노긍을 알아줄 환담(한나라때 양웅의 대단한 학문을 알아보았던 사람)은 없다”며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겠노라 했다. 이들의 기록이 있었기에 그나마 이들의 삶이 이렇게 전해지게 되었다. - 이덕무가 젊은 시절의 자기 자신에 대해 적은 <간서치전>이다

 시인, 소설가, 비평가로, 최근에는 도서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는 장석주의 북리뷰집. 그가 “직관과 내적 필요에 의해” 읽고 써낸 글들은 총 70편이다. 책에 대한 품평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사회와 시대정신을 역설하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사회의 트렌드인 ‘웰빙’ ‘몸 만들기 열풍’ ‘느리게 사는 삶’ ‘명품족’ 등과 조선시대의 선비로부터 김병익, 김지하를 아우르는 인물들을 만난다. 또한 시와 소설, 이미지에 대한 저자의 예리한 비판과 통찰을 맞닥뜨리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화 사회적 징후, 일상과 책을 연결시키는 저자의 탁월한 글솜씨와, 마음으로 세상을 꿰뚫는 시선의 깊이를 느끼고, 아울러 자신의 인식을 고양시키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주제에 대해 정교하게 다듬고 벼려낸 저자의 문장들은, 우리에게 글쓰기의 또 다른 전범을 제시하고 있다. -
그이는 아무도 자기 전기를 써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자기에 대한 글을 짓는데, ‘간서치전’이 바로 그것이다.

 16살이 가기 전에 꿈과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라!
모든 성공은 10대에 결정되기 때문이다!
흔히 꿈 많은 젊은이를 일컫을 때 우리는 ‘이팔청춘’이라는 말을 하곤 한다. 물론 시대가 변해서 예전의 16살과 지금 중3인 16살은 사회적·정신적으로 그 간극이 꽤 차이가 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인생을 길게 놓고 볼 때, 16살은 분명 중대한 기로에 놓여 있는 나이임에 틀림 없다. 이처럼 시대를 막론하고 16살은 10대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인생의 얼개를 짜야 하는 중요한 때다.왜냐하면 이때 자신의 꿈과 비전을 확실히 세우지 못한 사람은 20대에 혼돈과 방황의 나날을 보내고 어느덧 사회의 중핵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30대에 접어들어서도 자신의 삶과 일에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뒤늦게 후회해 봐야 소용 없는 일이 아닌가.
이 글은 미국 경영협회와 포춘지가 선정한 역사 속의 위대했던 75가지 선택 중에서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내용으로 45가지를 가려 뽑았다. 한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뛰어넘어 기업과 국가의 흥망까지도 뒤흔들었던 중요한 결정들을 여러 가지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비단 꿈과 비전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려는 10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심기일전하려는 2,30대를 비롯해 교사와 학부모들이 먼저 읽어 볼만한 인생 지침서라 할 만하다.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손정의, 박찬호…
만일 10대에 자신의 꿈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어떻게 됐을까?

우리 주위에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16살 이전에 자기 인생의 꿈과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뚜렷이 그렸다. 만약에 아인슈타인, 빌 게이츠, 손정의, 박찬호 등 뛰어난 인물들이 10대에 자신의 꿈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자녀에게 무엇이 되라고 강요하기보다 책 속의 인물들의 결정과 그에 따른 선택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살펴 실질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실행해 나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게 했다. 또한 장기적인 전망이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채 자기 자신의 일에만 매몰되면 아무리 뛰어난 생각과 능력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고 있다.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해 있고 보다 발전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리려는 일련의 노력과 과정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게 된다. 자라나는 꿈나무들과 삶의 방향을 못 잡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이 책은 “미래는 지금 자신의 선택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
스스로 간서치(책에 미친 바보)라 했던 이덕무는 특별히 뛰어난 재주는 없었지만

 한국청소년개발원 원장으로서 또 한국교원대학교 교수로서 한평생 청소년교육에 투신해온 권이종 교수의 청년기 고백록 『교수가 된 광부』가 출간되었다. 권 교수는 이 글을 통해, 자신이 1964년 독일에 광부로 떠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지난 40년간 자신의 숨겨진 기억을 겸손하게 회상하고 토로한다. 신문, 방송, 동료들의 수기 등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면서 자료 속에 숨겨진 많은 내용을 찾아내고 저자 본인도 많은 사실을 깨닫게 되었음을 솔직히 밝혔다.
권 교수는 『교수가 된 광부』를 통하여 “1963년 광부 제1진을 시작으로 40년 전 독일로 떠났던 약 9천여 명 동료들의 피와 땀이 헛되지 않았음을 세상에 알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영전에, 세계 도처에 살고 있을 광부 동료들에게 작은 위로를 드리려 한다”고 술회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1960년대의 한국 국가발전의 역군이며, 자수성가로 일가를 이루어온 광부들의 자부심과 긍지 넘치는 삶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독일 광부 파견의 역사적 배경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일 공식방문과 뤼프케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독경제협력이 강화되었고 한국은 1970년대의 경제개발 시기에 독일에서 많은 차관을 도입하였다. 1959년부터 1976년까지 5억 1200달러를, 1977년부터 1980년까지는 2억 6100만 달러의 차관을 독일에서 도입하였다. 전후 폐허에서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 ‘독일을 배우자!’라는 구호 아래서 독일모델은 우리나라의 제2공화국뿐만 아니라 제3공화국에서 집중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십수 년에 걸친 독일로의 광부, 간호사 파견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카지노 하나 외에 우리 광산마을에 아무것도 해준 것이 권 교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광산마을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적 환경 그리고 자연적인 조건이나 사회복지정책이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가 있어서 같은 수준에서 비교할 수는 없었지만, 많은 부분에서 문제점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즉, 우리나라의 1960년대 초 국민소득이 90불이 안 되었을 때의 광산촌의 생활상과, 2004년 국민소득 1만불이 넘는 지금의 생활상이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석탄 에너지가 석유와 가스 에너지로 바뀌면서 석탄 소비량과 채탄량이 점점 줄어든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었다. 영국의 대처 수상도 광산 폐쇄와 그에 따른 광부들의 파업으로 상당 기간 많은 곤란을 겪었다.(우리는 영화 [브레스트 오프] [빌리 엘리엇] [풀 몬티] 등에서 경제적 기반을 상실한 광부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선진국들은 중?장기적 고용정책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여, 광부들의 자존감을 고취하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주는 복지정책을 마련하였다.
광산촌을 인간 친화적으로 재건설하고, 광부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며, 광산촌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치하지 않고 오히려 외부인까지 광산촌으로 유입할 수 있는 유인정책을 펴왔다. 물론, 독일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의 광산촌 시설은 매우 원시적이어서 독일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시설을 건설하기에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부족한 것은 광산촌에 인간 중심적인 중장기 복지정책이 펼쳐지지 못함으로써 공존하는 사회를 이룩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강원도 태백시에 일부 광업소가 연명하고 있다. 광산촌에서 일하다 실직자가 된 수천 명의 광부들은 광산촌을 대부분 떠나야 했고, 광산촌을 떠나서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의 광부들의 삶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경제부흥을 일궈냈고 산업전사로서 훌륭하게 일해 왔는가를 인정하기는커녕 푸대접하는 실정이다. 산업화의 역군으로 독일에 갔던 광부 산업전사들, 국가 발전을 위하여 피와 땀을 흘린 우리들, 지하 전쟁터에서 목숨을 담보로 일해 왔던 우리 동료들에 대하여 아무런 보답이 없음에 매우 아쉬울 뿐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
스스로를 책에 미친 '간서치(看書痴)'라 불렀던 선인들의 지혜를 얻고 싶었던 욕구가 평생 동안 나를 뒤따라 다녔다.

 이 책은 시리즈 1번으로,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읽고 재구성한 것이다. 저자 고미숙은 박지원에 대한 열렬한 애정과 자신만의 발랄하고 경쾌한 문체로 <고미숙표『열하일기』>를 선보인다. 그녀의 문체는 그 자체로 유쾌하기 짝이 없지만, 『열하일기』와 만나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한 시대의 사유체계에 대한 도전은 문체로 드러난다고 믿는 저자가, 고문(古文)에 반대하고 살아있는 생생한 문장을 추구하여 문체 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박지원을 만났으니 얼마나 신이 나겠는가.
한편 이 책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마디즘에 기대어 『열하일기』를 읽는다. 저자는 연암이야말로 머묾과 떠남에 자유로왔던 유목민이었으며, 사물의 '사이'에서 사유할 줄 알았던 경계인이었다고 본다. 『열하일기』는 중심이 없고 시작도 끝도 없는 '리좀'이며, 모든 장이 저마다 독립적인 세계를 가진 천의 고원이라고 선언한다. 또 '탈주'와 '재코드화', '재배치'의 대가인 연암은 사물의 어느 한국면에 머물지 않는 강한 호기심과, 풍부한 유머, 그리고 통렬한 패러독스로 『열하일기』를 채우고 있다.

이 책은 <리라이팅 클래식>이라는 기획의 진가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고전을 '다시 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오늘을 사는 사람이, 오늘날의 코드로 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며,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다. 고미숙은 연암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훌륭한 프리즘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모든 삶의 질이 돈으로 환산되는 세태는 사람들이 '돈 되는' 분야에 몰리도록 만들어 사회를 기형적인 모습으로 만들고 말았다.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이 단순히 모든 학문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말은 이제 대중들에게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인문학이 삶의 질에 관련된 문제임을 제기하고자 하며,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으로 극복해 보려 한다.
불행하게도 고전은 과거에만 속할 수 없는 책들이 어느 시대에건 읽히길 바라며 붙여진 이름이지만, 어느새 그 이름은 내용을 떠나 너무 낡은 냄새를 피우게 되었다. 우리는 고전이라는 말에 묻어 있는 옛냄새를 지우고 그것에 현재를 담고 싶었다. 지금-여기의 삶을 위한 사상을 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고전 자체가 완전히 해체, 재구성되어야 했다. 그간 출판계에서도 독자들이 고전에 좀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고전에 현대적 주석을 다는 데 그쳤을 뿐, '다시 쓰는' 시도는 아직 없었다. 기존의 요리에 양념 몇 가지를 첨가하거나 세팅을 바꾸는 것으로는 오늘의 우리가 먹을 음식이 되기엔 뭔가 부족했다. 우리는 재료는 빌려오되, 젊은 필자들이 과감하게 다시 만든 요리를 내놓고 싶었다.
그 요리를 위해 지금-여기에 있는 저자는 시공간을 넘어서 원저자와 때론 웃으며 때론 논박하며 대화를 나눴다. 시대를 뛰어넘는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순히 고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 새로운 책 리라이팅 클래식을 낳았다. 그리고 그 소통은 독자에게로 확장된다. 책을 읽는 독자가 원저자와 만나 소통하고 그 가운데 지금-여기의 저자가 끼여드는 고전, 요컨대 원저자, 저자, 독자가 함께 참여하는 토론과 사유의 장을 지향한다.
한편 리라이팅 클래식은 원저자와 대화하며 지금-여기를 말하지만 시대와 불일치하는 시간을 담은 책이다. 니체를 빌려온다면 시대와 불일치하고 때에 맞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은 바로 미래가 될 것이다. 리라이팅 클래식은 그런 의미에서 시간과 더불어 오는 책이며 미래의 책이다. 시간과 더불어 호흡하는 리라이팅 클래식은 늘 변화와 생성을 꿈꾼다. 그래서 저자들이 원저자와의 대화가 다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는 그 때가 언제든 개정판을 낼 생각이다. 10년 뒤, 어떤 책은 10번쯤 모습이 바뀌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
서얼 출신인 데다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부를 정도로 책벌레였던...

 한 해를 정리하며 '책과 만나다'
한 해를 정리하는 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은 뭘까? 출판사는 왜 책을 만들며, 독자는 왜 책을 읽는 걸까? 도서출판 그린비는 연구 공동체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와 함께 책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끌어낸 책의 존재 의미는 이런 것이었다. 책은 그 속에서 다른 세계를 만나는 것에 그치는 것(책­세계)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그 자신을 끌어내 다른 세상을 만드는 데 쓰여야 하고(책­기계), 그래서 삶의 무기가 되고 삶을 축제로 만들 수 있을 때 진정한 존재 의미를 갖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나름의 문제의식 속에서 출판사와 연구실은 책을 책­세계가 아니라 책­기계로 읽어낸 결과물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무려 93권이나 되는 책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책에 대한 책은 아니다. 책(book)에 대한 자세한 소개보다는, 책과 만나고 그 책을 다시 세상으로 끌어낸(book+ing) 사유의 흔적들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이 책을 단순한 book이 아닌 book+ing으로 이용해 주었으면 한다.
'book+ing'이 만난 책들
1. 일상의 축제-되기, 코뮨적 삶을 위하여
일상은 늘 남루한 듯하다. 반면 그것이 어떤 이름을 가졌든 축제는 기쁨과 활력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런 축제의 기쁨은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 1부에서는 코뮨적 삶을 살며, 일상을 축제로 만드는 책들과 만났다.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은 밥상 혁명을 통해 삶을 바꾸라고 선동하며, [파라다이스]는 견고한 뿌리를 자랑하는 나무가 아니라 범람하는 잡초가 되라고 권하고, [가비오따스]는 꿈을 현실로 만드는 공동체의 삶을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바흐친의 진정한 웃음([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문화])과 마르코스의 목소리([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를 만난다.
2. 철학의 외부, 근대에 내재하는 외부를 위하여
다른 종류의 삶을 창안하고자 하는 사유는 반드시 외부를 통해 사유하는 철학이며, 철학의 외부를 긍정하는 철학일 것이다. 자기 안에 갇힌 사유는 외부와는 단절되어 있어 다른 삶을 꿈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2부에서는 외부를 사유하는 철학들과 만났다. [천 개의 고원]은 다양한 욕망의 배치에 대한 창발적인 분석으로 우리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안내하며, [제국]은 새롭게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명령의 양식과 그것을 깨뜨려 나갈 대중들의 잠재력을 말하고, [알이 닭을 낳는다]는 다른 종들과 소통을 고민할 때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부르디외([파스칼적 명상])의 "나는 내 안에 있는 지식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고백과, 질병과 치유의 반복을 통해 삶에 대한 긍정과 새로운 건강을 얻는 니체의 모습([유고:1882년 7월~1883/4년 겨울])도 만날 수 있다.
3. 우리 신체에 새겨진 근대성, 그리고 혁명
우리는 자신의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약자의 풍요를 착취하는 인간의 추악함, 도덕의 철책으로 민중을 규격화하는 국가장치,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의식하게 되는 타인의 눈 등을 통해 우리의 몸에 새겨진 근대성을 도처에서 확인한다. 3부에서 만난 책들은 이러한 근대성을 상기시키며 낡은 습속에 길들여진 눈을 던지고 도덕의 감금장치를 유쾌하게 뛰어넘으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이란 이름의 경계를 넘어서라고. 그래서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는 한국에서 근대적 주체가 생성되는 과정을 찾아 나서며 길들여진 신체와 싸우기를 권하고, [종횡무진 한국사]는 'national history'로서의 '한국사'가 아니라 'history'로서의 '한반도의 역사'를 말한다. 또 [한국 문학사의 논리와 체계]는 한문학과 국문학,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를 자유롭게 종횡하며, [사생활의 역사]는 어떻게 국가가 사회성의 영역에 침입하여 그것을 공적인 영역으로 만들고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영역을 사적인 영역으로 만들었는지 말한다.
4. 한 시대의 철책을 뛰어넘은 광인과의 만남
도덕은 자유로운 영혼을 길들여 덜 위험하게, 즉 나약하게 만드는 '동물원'이다. 지배적 사유는 도덕의 철책을 뛰어넘는 것들을 '광기'라 부름으로써 '우리'와 다른 모든 것들을 '타자'로 밀어낸다. 그러나 모든 시대의 광인들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미래의 시간(항상 와 있지만 항상 오해되고 있는 시간이고, 아무리 늦게 나타나도 항상 너무 이르게 나타나는 시간)을 향해 절규한다. 근대 권력의 폭력성과 온몸으로 맞서 싸웠던 푸코([미셸 푸코]), 도덕성과 법의 원리를 '절대부정'했던 사드([미덕의 불운]), 나이 오십에 그때까지의 자신은 남들이 짖어대며 이유도 모르고 따라 짖는 한 마리 개와 같았다고 말했던 이탁오([분서]), "노예가 없어지면 흑인도 없어진다"며 흑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내파하려 했던 파농([검은 얼굴, 하얀 가면]), 대학 교수가 아니라 러시아의 노동자로 살고 싶어했던 비트겐슈타인([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저주받은 영혼 도스토예프스키([도스토예프스키]), 금기와 복제를 거부했던 고야([고야, 영혼의 거울]), 서구적 근대와 다른 독자적 역사를 만들려 했던 소세키와 루쉰([동양적 근대의 창출]) 등이 4부에서 만나는 광인들이다.
5. 고전과의 유쾌한 연애, 리딩클래식
누구나 들어봤고, 누구나 좋은 책들이라 말하지만 손에 들기가 쉽지는 않았던 책들. 누군가는 그런 책들을 고전하며 읽기 때문에 고전이라 부르는 거라고도 했다. 그러나 500년 전의 친구와 수다를 떨고, 1000년 전의 연인과 사랑을 나눈다면? 5부에서는 '저 오래된 책들'과 연애함으로써 일상의 출구를 발견한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감히 알려고 하라, 네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는 칸트와 만나고, [장자]에서는 무한경계로 나의 사소함을 보여주는 장자와 만나며, [열하일기]에서는 낯선 공간과의 마주침을 때로는 개그맨의 목소리로, 때로는 화려한 수사학자의 목소리로, 또 다른 곳에서는 도도한 거장의 목소리로 전하는 박지원을 만난다. 뿐만 아니라 캉유웨이와의 연애에서는 국가와 민족, 종교, 인종, 그리고 성별까지 뛰어넘는 세상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고([대동서]), 다윈과의 우정 속에서는 '인간이란 종은 고정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종의 기원]). -
어쨌든 자신을 간서치看書痴, 곧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불렀던 이덕무의 『청언소품집』 제목으로는 참 어울리는 구절임에 틀림없다.

 선인들의 독서의 목적은 지혜를 얻는 데 있었지, 지식의 획득에 있지 않았다. 세상을 읽는 안목과 통찰력이 독서에서 다 나왔다. 책 속의 구절 하나하나가 그대로 읽는 이의 삶 속에 체화(體化)되어 간섭하고 통어하고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네들이 읽은 책이라야 권수로 헤아린다면 몇 권 되지 않았다. 그 몇 권 되지 않는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읽다 못해 아예 통째로 다 외웠다. 그리고 그 몇 권의 독서가 그들의 삶을 결정했다.
『책 읽는 소리』는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는 젊은 한문학자 정민 교수의 고전독서 에세이로, 옛 글에서 떠오르는 옛 사람들의 내면 풍경을 오롯이 되살리고 있다. 시서화(詩書畵)를 아우르고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사색의 글을 남긴 추사 김정희나 근원 김용준을 기리는 정민 교수의 에세이는 옛 선인들의 학문과 사상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 책은 모두 3부 47편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옛 글을 읽는 까닭'은 독서와 관련된 글들이다. 책읽기와 글쓰기에서 미끄러져 나온 생각들, 옛 사람의 음미할 만한 일화들이 등장한다. 제2부 '마음 속 옛 글'은 옛 글의 행간에서 옛 사람의 내면 풍경을 들여다본 것이다. 제3부 '옛 글과 오늘'은 고전을 오늘의 삶과 이어보려는 생각들이 담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으로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라 부르며 쓴 자기 이야기에서, 그는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연 알지 못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이매지 > 모네의 정원에서

모네의 정원에서

크리스티나 비외르크 글 / 레나 안데르손 그림 / 김석희 옮김 / 미래사

 

 

 



 
 
 
나는 꽃을 무척 사랑한답니다.
그건 우리 아파트 위층에 사시는 블룸 할아버지도 마찬가지예요.
할아버지는 옛날에는 정원사이셨지만 지금은 은퇴하셨어요.
나는 할아버지 댁에 가서 프랑스 화가인 클로드 모네에 관한 책을 보는 게 즐거워요.
모네 역시 꽃을 사랑해서 많은 꽃그림을 그렸어요.
책에는 아름다운 모네의 정원 사진도 실려 있어요.
 
"모네의 정원에는 어떻게 갈 수 있죠?"
"우선 파리에 가야 돼."
"파리는 너무 멀잖아요."
"그래, 하지만 갈 수 없는 건 아니야."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갈 준비를 모두 끝내고 8월에 떠났어요.
수련이 8월에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에스메랄다 호텔'에 묵었어요.
호텔은 작고 낡았지만 파리 시내를 흐르는 센 강 근처에 있었어요.
에스메랄다는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에 나오는
집시 여인의 이름을 딴 거예요. 

 



 

 

파리에 온 첫날,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마르모탕 미술관'에 갔어요.
이 미술관에는 모네의 그림이 많아요.
책에 실린 그림을 보는 것과 '진짜'를 보는 것은 전혀 달랐어요.
우리는 하얀 수련 두 송이가 그려진 그림 앞에 서 있었어요.
나는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 보았어요.
그랬더니 수련은 물감 얼룩에 지나지 않았어요.
내가 다시 뒤로 물러서자, 수련은 연못에 있는 진짜 수련으로 바뀌었어요.
참으로 신기한 마술이었답니다!
우리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잠시 작은 배가 그려진 그림 앞에 앉아 있었어요.

 "저 배가 아직도 거기에 있을까요?"

"내일 보러 가자꾸나."

  




 

이튿날 아침 일찍, 우리는 생라자르 역에서 열차를 타고 센 강을 따라 달렸어요.
강변을 지나고, 크고 작은 배들과 선착장, 집들,
강둑에 축 늘어진 수양버들과 높이 솟은 포플러 나무들을 지나갔어요.
우리는 베르농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내렸습니다.
역에는 자전거를 빌려 주는 곳이 있어서
'클로드 모네 기념관'이 있는 지베르니 마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갈 수 있었어요.

  




 

마침내 우리는 도착했어요!
정원에는 크고 많은 꽃들이 즐비했어요.
할아버지와 나는 경치를 구경해야 할지, 아니면 사진을 찍어야 할지
결정하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를 졸졸 따라왔어요.
나는 모네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뒷계단에 나와 앉았어요.
나는 집에 보낼 그림 엽서에다 이렇게 썼어요.

 

"우리는 이곳에 앉아서 모네 가족을 흉내내고 있답니다.
정원은 너무너무 멋있어요.
이제 우리는 수련 연못을 보러 갈 거예요."

  



 

 

"할아버지, 저것 좀 보세요! 저기 일본식 다리가 있어요!"
마침내 다리 위에 섰을 때, 나는 너무나 감격해서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였답니다.

 "연못 저편으로 돌아갈 때까지 이 다리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째서지?"

"이 다리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상'을 얻기 위해서예요. 모네처럼요."

 하지만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쯤, 내 인상은 모두 사라졌어요.
하지만 모네는 인상을 붙잡는 '훈련'을 쌓았어요.
모네는 날마다 다리를 주의깊게 관찰해서 그렸는데
똑같은 그림은 한 장도 없었어요.

 




 

나는 여러 각도에서 연못 사진을 찍었어요.
내가 수련을 카메라에 담고 있을 때면,
블룸 할아버지는 내가 연못에 빠질까 봐 가슴을 졸였지요.

 




 우리는 모네의 정원으로 흘러드는 뤼 강 어귀에서 도시락을 풀었어요.
오는 길에 사온 염소치즈와 고기파이, 사이다도 좋았고
특히 바게트 빵과 함께 먹으니 더욱 맛이 있었어요.
점심을 먹은 다음, 나는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어요.

파리를 떠나는 날, 블룸 할아버지가 여섯 시에 나를 깨웠어요.

 "지금 당장 일어나면, 멋진 걸 한 가지 더 볼 수 있을 게다."

"정말요? 그게 뭔데요?"

"센 강의 해돋이 장면."

"저는 졸리니까 할아버지 혼자 가세요."

 

하지만 나는 결국 할아버지와 함께 밖으로 나갔어요.
우리는 첫 햇살을 보며 모네가 그린 해돋이 그림을 떠올렸어요.

 




 

우리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여행이 끝났어도 즐거움이 남아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나는 게시판에 파리 여행에서 가져온 그림 엽서, 입장권과 차표,
비둘기 깃털 한 개와 모네의 정원에서 만난 모네의 의붓 증손 사진을 핀으로 꽂아 놓았어요.
이제는 내가 파리와 모네의 정원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하지만 친구들이 "에펠탑은 어땠니?"하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에펠탑은 볼 시간이 없었어.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을 봐야 했거든."

  

 

 

모네의 그림 좋아하세요?
저에게 모네는 그림을 보는 눈과 마음을 열어 준 화가랍니다.
모네의 그림을 통해 다른 그림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제게는 그림 선생님이나 다름없죠.
이 책은 모네의 정원과 관련된 책들을 찾다가 알게 되었어요.
주인공 리네아가 일본식 다리 위에서 기뻐하는 모습의 표지에 단번에 마음이 사로잡혔어요.
언젠가 저 자리에 있을 제 모습을 상상하며 꿈을 꾸는 것도 좋았어요.
그 언젠가가 온다면 저도 리네아처럼 유명한 에펠탑보다는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의 정원에, 아를에 있는 고흐의 방에,
슈와젤에 있는 미셸 투르니에의 집을 보러 갈 거예요.

 이 책의 주인공 리네아는 스웨덴으로 입양된 한국 소녀를 모델로 했어요.
검은색 머리의 동양적인 얼굴만 봐서는 한국에서 파리로 떠나는 건가 했는데...
아무래도 블룸 할아버지가 이름도 얼굴도 한국 사람같지 않아서 헷갈리셨을 거예요.
리네아는 이 책의 그림을 그린 레나 안데르손의 실제 딸이라는데
입양한 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린 걸 보면 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 같아요.

이 책은 단순히 모네의 정원을 다녀오는 여행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모네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려 주고 있어요.
페이퍼에 소개하는 글은 정말 극히 일부분의 글들이에요.
그러니 글을 읽을 줄 아는 나이대의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읽으면 참 좋을 것 같아요.
또 모네와 관련된 사진들도 많이 실려 있기 때문에 '작은 모네 안내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랍니다.

출처 : http://paper.cyworld.com/book-lover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보슬비 > '오만'한 남자와 '편견'에 빠진 여자의 결혼기


[오마이뉴스 임흥재 기자]
 
ⓒ2006 민음사
제인 오스틴의 원작을 영화화한 <오만과 편견>이 상영 중입니다. 이 작품은 제인 오스틴이 1813년에, 자신의 소설 '첫인상'을 개작해 출간했습니다. 비단 영화뿐만 아니라 영국 BBC 등을 통해 네 차례나 미니시리즈로 제작됐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입니다.

오늘의 고전독법

 
사형수에서 성공회대 교수로 신분이 바뀐 신영복님('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등의 저자)은 자신의 고전강독을 정리하여 출간한 <강의>(돌베개)의 머리말에서 고전을 읽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고전을 읽는 이유가 역사를 읽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의 디딤돌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짐이기 때문에 지혜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을 지혜로 만드는 방법이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고전독법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대화를 선취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그 시대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암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굳이 E.H. Carr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정의를 빌지 않아도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들여다보고 미래의 전망을 모색하는 것이 역사를 대하는 태도여야 한다는 점에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고전을 읽는 우리의 자세가 그와 같습니다. 고전에서 배우는 값진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고전은 새로운 현대의 정신과 풍속을 이어받고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는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몫이고, 독자들에겐 열린 정신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음사가 야심 차게 준비해 내놓은 세계문학선은 새로운 고전 독법의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세대마다 문학의 고전은 새로 번역되어야 한다.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어엿한 우리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출판사의 추천사 중에서)

<오만과 편견>은 88번째 결실입니다. 지난 3월 영미문학회의 '번역작품 샘플평가'에서 당당히 대상을 수상하며 번역문학의 최고봉을 차지했습니다. 윤지관, 전승희 두 영문학자의 10년에 걸친 수고가 고스란히 작품 속에 녹아 있고 당대 인물들이 오늘의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 성큼 우리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제인 오스틴 문학의 묘미라 할 수 있는 '묘출화법'(직접화법과 간접화법 사이의 중간화법으로 인물의 심리 상태 등이 잘 드러난다)의 적절한 구사와 풍자, 현대 풍속에 맞는 어휘의 선택 등은 독자들을 단박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다양한 인물들과 소위 '신데렐라 플롯'이라 할 수 있는 줄거리 그리고 사랑과 결혼에 이르는 연인들의 탁월한 심리묘사는 두터운 책의 무게를 거의 느낄 수 없도록 합니다.

오만과 편견을 넘어선 우여곡절 결혼 이야기

 
▲ 영화 <오만과 편견>의 포스터, 신성 키이라 나이틀리(엘리자베스 베넷 역)의 청순한 외모가 어디선 본 듯 하다.
ⓒ2006 UIP 코리아
하트퍼드셔작은 마을에 사는 베넷가에는 다섯 자매가 있습니다. 위 두 딸이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습니다. 근처 네더필드에 귀족출신 빙리가 세를 얻어 이사 옵니다. 딸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안달하는 어머니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입니다. 큰 딸 제인은 온순하고 사려 깊으며 내성적인 예쁜 아가씨인 반면에 동생 엘리자베스는 쾌활하고 인습에 구애받지 않는 재기 발랄한 처녀입니다.

빙리와 제인은 서로 호감을 갖지만 내성적인 제인은 쉽사리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빙리의 친구인 다아시는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청년 귀족입니다만 남을 관찰하고 냉정하게 평가하기를 즐기는 엘리자베스의 눈에는 자부심만 강하고 남에 대한 배려에는 인색한 오만한 청년으로 비칠 뿐입니다.

사랑에는 운명의 장난이 깃드는 법이어서 제인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 빙리는 제인을 떠나고, 오만하고 신분의 우월을 고집하는 다아시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하게 됩니다. 베넷가의 어머니와 아래 세 동생의 천박성을 이유로 내세우며 우유부단한 빙리를 제인에게서 떼어놓은 오만한 청년 다아시가 말입니다. 그것은 다아시에게 견디기 힘든 갈등을 불러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그는 결코 즐겁거나 행복해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신분이 열등하다는 것, 그런 결혼은 집안에 수치라는 것, 그녀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성은 언제나 감정에 제동을 걸었다는 것 등을 하나하나 열심히 설명했는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것은 지금 자신이 스스로 손상시키고 있는 그 신분 때문인 듯했지만, 그의 청혼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268쪽)

"애를 써보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 봤자 안 될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당신을 열렬히 사모하고 사랑하는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267쪽)


영화를 아직 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이 장면에서 다아시의 표정이 너무나 궁금해집니다. 신분과 교양의 차이에서 오는 회피하고 싶은 대상에게 사랑의 감정을 고백해야 하는 다아시의 곤혹스러움은 활자만으로도 충분히 그려집니다. 엘리자베스의 당돌한 거절은 또 얼마나 당당한가요?

그런 연인들이 오만과 편견을 넘어서 우여곡절 끝에 결혼합니다.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제인과 빙리의 사랑을 이어지게 하는 가교이기도 하답니다. 결코 첫인상이 그 사람의 진면목이 아니라고 깨닫는 과정에서 갈등과 오해를 풀어가는 연인들의 심리가 무척이나 세심하고 재미있게 그려져 있습니다. 경박하고 젠체하는 사촌 콜킨스에서부터 위컴과 사랑의 줄행랑을 치는 막내 리디아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인물 배치는 소설의 재미를 잘 살립니다.

▲ 영화 <오만과 편견>의 한 장면
ⓒ2006 UIP 코리아
전근대와 근대 사이

<오만과 편견>을 젊은 남녀의 연애와 사랑이야기로만 읽는다면 앞서 말한 참다운 고전독법은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살던 시대는 근대 여명이 동트기 시작한 무렵으로 보입니다. 중세의 신분질서인 귀족 출신 두 청년, 콜킨스가 성직 임명될 때부터 후견인 역할을 하는 캐서린 영부인, 베넷가의 이웃인 월리엄 경 등은 전근대 사람들입니다.

베넷가는 귀족은 아니지만 생활하는데 크게 부족하지 않은 중간계급의 지주 정도로 보입니다. 그의 삼촌들은 런던에서 제법 알려진 상인이거나 변호사입니다. 군인으로 등장하는 피츠 윌리엄 대령이나 위컴 등은 아마도 몰락한 귀족가문 자제들 같습니다. 그러나 여자의 상속재산이나 노리는 걸 보면, 위컴을 전근대의 인물이라 불러야 할지 의문이 듭니다.

이처럼 귀족계급이 존재하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몰락한 귀족이 등장하고 한편에선 한참 번성하기 시작한 상업과 기술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상인(시민)계급과 변호사를 비롯한 독립자영업자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서서히 여물고 있는 근대의 봉우리들이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구시대의 신분질서가 강하게 남아 있고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미성숙하다는 점에서 그들의 시대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가는 중간쯤으로 여겨집니다.

베넷 자매를 결혼시키려는 어머니의 안달은 특별한 생계수단이 없었던 그 시절 여성들의 위치를 단적으로 설명합니다. 돈 많은 사람과의 혼인이 내일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베넷가처럼 아버지의 재산이 한정 상속(저도 이 제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릅니다)으로 사촌 콜킨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도의 피해자들에게는 더욱 절박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베넷 자매, 특히 둘째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하고, 미모와 집안이 아니라 활달한 재치와 지성 같은 근대 미덕으로 결혼을 성취한다는 면에서 이 시기는 근대의 밀물에 발을 담근 때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재산이나 신분, 교양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이끌려 결혼을 하는 두 귀족자제의 선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재산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연애를 성취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그대로 전근대와 근대로 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그밖에도 소설 속에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을 짐작하게 하는 많은 징후들이 나옵니다. 외적 조건을 중시하는 전통적인 규범과 개인의 성품과 선택을 중시하는 새로운 개인주의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모습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제인 오스틴의 업적은 바로 전근대와 근대, 구질서와 새로운 정신의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시각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자의 표현처럼 영국적 중용일 수도 있을 것이며 합리성에 근거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람이 봄을 시샘하는 어수선한 계절에 영화관 옆 문학카페에 들러 제인 오스틴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보고 읽으며, 때로는 무심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마시는 커피 한잔, 어떠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