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대상을 미학적으로 판단하는 데서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기준 이외에 숭고함 the sublime 이라는 범주를 끌어들임으로써 미학의 역사에 획기적인 새 장을 열었다. 이것이 저 유명한 그의 세번째 저서 <판단력 비판>을 이끌어가는 핵심 내용 중 하나다.-31쪽
숭고는 반드시 절망감, 불쾌감, 고통,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들을 통과해서 도달하게 되는 안도감, 쾌적함, 쾌감, 기쁨의 정서를 뜻한다.-32쪽
독일의 유태인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권위의 가장 강력한 적은 경멸이며 권위를 훼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웃음'이라고 말했다.-33쪽
진정으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주체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는 타인에 대한 '판단중지' 상태를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관대해져야 한다.-60쪽
타자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은 상대의 힘, 가령 유령성 같은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타자성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 해야 한다. 요컨대 동일자들의 폭력도 우선은 타자성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인 셈이다. ... 타자성 앞에서 최초로 작동하는 코드는 '권력'이다 ... 개방, 포용, 연대, 제휴 등은 이 폭력이 조율되고 조직되고 배치되는 세련된 형식들에 지나지 않는다.-88-89쪽
공자도 <논어>에서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는 길은 망집을 끊는 일에서 시작된다고 지적한다. 공자가 지적하는 네 가지 망집은 意 (어리석은 뜻), 必 (꽉 붙잡혀 떨어지지 못하는 자세), 固 (꽉 막힌 태도), 我 (자기 자신에만 몰입해 있는 자세)등이다.-127쪽
'신은 죽었다' 여기서 신은 기독교나 이슬람의 신이 아니다. 물론 부처나 다른 종교의 초월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뿌리 혹은 상기의 원천이 되는 저 이데아계의 모든 것을 말한다.-148쪽
우리의 삶은 때로 진저리치며 잊고 싶은 기억들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까지 껴안을 수 있을 만큼 넉넉한 마음으로 현재의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 사상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149쪽
졸린 머리로는 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이 혼돈스럽듯이 잠이 모자란 탓에 우리가 원칙과 변칙, 준법과 탈법을 이토록 난마처럼 마구 뒤섞어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188쪽
개인이든 국가든 불가피하게 법의 바깥에 나서 있으면서 통쾌하면서도 정의로운 보복을 바랄 경우 그 당사자는 먼저 양심이 던지는 이런 질문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어야 한다. '받은 만큼만 되갚고 있는가?' 이 물음에 제대로 답하려면 당사자의 기억은 온전해야 하고 역사는 바로 서 있어야 한다.-202쪽
'있는 것'은 '있음'과 다르며, 달라도 본질적으로 다르고 엄청나게 다르다. ...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면서, 그래서 마치 없는 것같이 보이면서도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간섭하고 이끌어가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가 반드시 오고야 말 테니까.... 간절한 마음, 겸허한 사랑이 '있음'에 다다르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지 않겠는가.-244쪽
서로의 차이에 대해 새롭게 눈뜨게 되는 결혼이란 결코 부부가 완전히 일심동체로 되는 과정이 아니다. 반대로 그 차이를 조화롭게 지켜나가는 기나긴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247쪽
역지사지에는 이해력과 상상력과 판단력이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는 순서가 있다. 우선은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헝클어진다면 아무리 상대를 그 처지에서 이해하려 노력해도 상대의 처지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그의 입장을 공감하는 차원까지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252쪽
당연히 내가 모두와 모든 것과 완전하게 같아져버린 동이同而 의 상태에서 조화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조화를 위해서는 차이, 어긋남, 비켜섬, 불일치, 요컨대 다름이 필요한 것이다. 조화만일까. 사랑도 결국은 이 차이에서 시작되는 감정이다.-255쪽
우리가 아름다운 것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들이 우리에 의존해 있다. ....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모장과 여희를 보면 새는 달아나고 물고기는 물 밑으로 숨는가?" 새나 물고기가 갖고 있는 주관의 경험 형식으로는 당대 중국으 최고 미인인 이들을 아름답게 만들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264쪽
철학자 파이어아벤트는 <시간 죽이기>라는 자서전에서 "예술은 모두 왼손에서 탄생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상징적인 말이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모두 왼손잡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왼손이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정통, 원리, 규칙, 주류, 본질, 근거 등에 저항하는 아웃사이더를 의미한다. 예술은 이미 만들어지고 틀 지워진 것에 양떼처럼 순종하는 정신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저항 정신에서 태어난다고.-264쪽
삶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영화에서 마리오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본능적이고 단순하고 직접적인 의식이 섬세해지고 복잡한 성숙된 의식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에 깃들어 있을 뿐이다. 물론 그 과정이 어디서인가 허무하게 멈춰설 수 있다. 우리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276쪽
과정 인간은 삶이 A와 B 사이에 놓이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과정 바깥에 있는 어떤 것들도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도중에 멈춰 서서 머뭇거리고 서성거리고 심지어 방황하는 것조차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삶이기 때문이다.-284쪽
표현만이 메시지인 게 아니라 '매체도 메시지다'(마셜 맥루한)
소통이란 쌍방 간에 말과 뜻, 마음과 의지가 오고가는 것이다. 거부의 뜻이 오고가는 것도 일종의 소통이며, 이것은 단순한 '거부'와는 아주 다른 것이다.-296쪽
'글은 손으로 써야한다' 손은 단순히 글쓰기를 수행하는 신체의 일부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머리를 굴리느라 휘어져 버리기 전에 솟구쳐오르는 언어들을 다침 없이 드러내주는 글쓰기의 진정한 주체다. 손이 머리에 복종하고 만다면 글에는 반드시 어떤 억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그러나 머리가 손에 복종하면 가슴에서 솟구치는 언어를 지킬 수 있다.-298쪽
'아들'을 지킨 뒤에 '아버지'들은 떠난다. 떠나는 '아버지'가 향하는 목적지는 '근원'이다. 그 '근원'은 단순한 조국도 고향도 아니다. '아들'을 위해 마지막 무기를 사용해 버린 '아버지'의 자리, 그것은 곧 죽음이다. '아버지'는 결국 '아들'을 위해 죽는다.-302쪽
언어는 실재의 논리적 그림이어서 뜻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언어 게임 안에서 특정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의미를 갖게 된다. 요컨대 언어 게임에서의 쓰임새가 곧 그 언어의 의미다. 그러므로 의미는 그 게임이 이뤄지는 방식에 따라 다채롭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어너게임이 제멋대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으며 그 규칙은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삶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307쪽
비유컨대 세상은 휘어진 유리 대롱 같다. 대나무 젓가락처럼 곧은 것들은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호박 엿가락처럼 적당히 휘어지고 구부러지고 유들유들해야 들어설 틈이 보이는 것이다. 근원적인 폭력은 세상 안에 살아가는 특정한 인간들의 사악함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세상 자체의 구조에서 생겨난다. 말하자면 곧게 뻗은 것들에게는 휘어진 유리 대롱 그 형태 자체가 곧 폭력이라는 것이다.-320쪽
사랑은 휴대전화를 눌러대거나 기도하거나 마술을 부리는 게 아니다. 상대를 위해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다.-329쪽
인식은 나를 알고 상대를 알고 나와 상대가 함께 얽힌 종횡의 맥락들을 아는 것이다. 반성은 특히 그것을 흘러간 시간의 지평 위에 되돌려 놓고 보는 것이다. 인식과 반성이 결여될 때 우리의 사랑은 도구적 사랑, 쾌락적 사랑으로 굴러떨어질 위기에 시나브로 내몰린다.-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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