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3
이태준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품절


사람의 울음소리... 새들의 그것보다 얼마나 불유쾌한 소리인가!

죽음을 저다지 치사스럽게 울며불며 덤비는 것도 아마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 죽음의 주위는 좀더 경건하였으면 싶었다.-18쪽

산, 그는 산에만 있지 않았다. 평지에도 도시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나를 가끔 외롭게 하고 슬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모든 것은 일종의 산이었다.-22쪽

자연은 신이다. 이름 없는 한 포기 작은 잡초에 이르기까지 신의 창조가 아닌 것이 없다. 신의 작품으로서 우리 인간이 손을 대지 않으면 안 될 만한 그러한 졸작, 그러한 미완품이 있을까?-25쪽

파초는 언제 보아도 좋은 화초다. 폭염 아래서도 그의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은, 눈을 씻어줌이 물보다 더 서늘한 것이며 비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은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28쪽

차라리 눈보다 입보다 더 몇 배 고마운 것이 발이다. 어떤 때는 돌뿌리를 차고, 어떤 때는 가시나 그루에 찔리고, 찬물에, 풀숲에, 늘 먼저 들어서며 뱀에게도 먼저 물리는 것이 저 발이 아닌가!-32쪽

생각하면 돌은 동양인의 놀라운 발견이다. 돌을 그리고 돌을 바라보고 이름까지 즐겨 돌로 부른 동양 예술가들의 심경은, 찰나적인 육체에 붙들린 서양인의 그것에 비겨 얼마나 차이 있는 존경함인가!-35쪽

그러나 그도 잠시 꺼지는 석양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고요히 바라보면 지나가는 건 그저 바람이요 구름뿐이다. 있긴 있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것, 그런 것은 생각하면 이런 옛 성만도 아닐 것이다.-42쪽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른다. 찬 달빛과 늙은 벌레 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 그들의 슬픔이요 또한 명예이다.-45쪽

인생의 외로움은 아내가 없는 데, 아기가 없는 데 그치는 것일까. 아내와 아기가 옆에 있되 멀리 친구를 생각하는 것도 인생의 외로움이요, 오래 그리던 친구를 만났으되 그 친구가 도리어 귀찮음도 인생의 외로움일 것이다.-49쪽

책은 세수를 할 줄 모르는 미인이다.

책에만은 나는 봉건적인 여성관이다. ...... 덮어놓으면 떠들리거나 구김살이 잡히지 않고 이내 고요히 제 태로 돌아가는 인종忍從이 있기를 바란다고 할까.-62쪽

먼저 자신을 알면 모든 일에 있어 현명한 일이다. 작품은 개인의 뿌리에서 피는 꽃이다. 평론가는 여론에 무서움을 탈 경우가 많으리라. 그러나 작가에겐 여론이 어쩌지 못할 것이다. 자기를 한번 정확하게 진단한 이상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투로 써서 천하에 떳떳이 내어놓은 것이다.-65쪽

내가 불안을 갖는 평자는 작품을 가능성이 무한한 감성으로 느끼려 하지 않고 다만 고정된 개념만으로 정리하는 평자다.

작가의 욕심으로는, 평론가는,
첫째 창작에 다소 경험자일 것,
둘째 인생관에 남의 것도 존중하는 신사일 것,
셋째 개념보다는 감성에 천재이기를 바라는 것이다.-70쪽

감식은 모든 비평의 기초일 것이다. 문학도 감식에 어두워선 작자와 작품의 정체를 포착치 못할 것이다. 비평가가 읽기만 하고 얻기 쉬운 것은 애매한 인상일 것이다. 한번 그 작품을 모사, 베껴본다면 그 작품은 그 평가評家에게 털끝만한 무엇도 가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모방에 이처럼 미덕의 일면이 있음은 놀라운 일이다.-94쪽

잃어버리면 울지 않고는, 몸부림을 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작품을 써야 옳을 것이다.-105쪽

'내 문장'을 쓰기보다는 될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의 문장'을 써보고 싶다. 우선은 '그 장면의 문장' 부터 써보려한다.

아마 조선문단 전체로도 이대로 3년이면 3년을 나가는 것보다는 지금의 작품만 가지고라도 3년 동안 퇴고를 해놓는다면 그냥 나간 3년보다 훨씬 수준 높은 문단이 될 것이라 믿는다.-109-110쪽

그러다가도 그 소낙비 같은 변조와 정열! 더구나 그 열이 또한 급행열차와 같이 지나가버린 뒤의 밤중의 적막, 연정처럼 비등沸騰하고 연정처럼 냉각하고 연정처럼 고독한 것이 '미스 말라리아'다! 그의 스피드, 그 스피드로 냉각지대와 염열지대의 비행. 그리고 나중의 빈 그라운드와도 같은 적막, 이것은 병을 앓았으되 한 연정과 한 스포츠를 게임하고 난 것과도 흡사하다.-119쪽

매화란 고운 꽃이기보다 맑은 꽃이요 달기보다 매운 꽃이라 그러므로 색 있는 것이 그의 자랑이 못 되는 것이요 복엽이 그에게는 무거운 옷이라 단엽백매를 찾으러 꽃이 피기 전부터 다닌 것이 도리어 탈이었던지,......

절개란 무릇 견디기 어려움에서 나고 차고 가난한 데가 그의 산지라 인정이니 생활이니 복이니 함도 진짜일진댄 또한 고절의 방역을 벗어나 찾기는 어려울 줄 알러라.-138쪽

자동차를 몰아 '호텔'로 가듯 그것이 아니라 죽장망해竹杖芒鞋로 산사를 찾아가는 심경이 아니고는 고전은 언제든지 써늘한 형해일 뿐, 그의 따스한 심장이 뛰어주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느끼기 전에 해석부터 가지려 함은 고전에의 틈입자임을 면하지 못하리니 고전의 고전다운 맛은 알 바이 아니요 먼저 느낄 바로라 생각한다.-142쪽

시대가 오래다 해서만 귀하고 기교와 정력이 들었다해서만 완상할 것은 못 된다. 옛물건의 옛물건다운 것은 그 옛사람들과 함께 생활한 자취를 지녔음에 그 덕윤이 있는 것이다.

고완 취미를 돈 많은 사람이나 은자의 도일거리로만 보는 것은 속단이다. 금력으로 수집욕을 채우는 것은 오락에 불과한 것이요, 또 제 눈이 불급하는 것을 너무 탐내는 것도 허영이다. 직업적이어선 취미도 아니려니와 본대 상심낙사(완상하는 마음과 즐거운 일)란 무위와 허욕과 더불어서는 경지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157쪽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란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죽음'이요 '무덤'일 것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들여 자기의 서재를 묘지화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청년층 지식인들이 도자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정말 고완의 생활화가 있는 줄 안다. -163쪽

가장 즐거운 것은 천진하게 마음 속에서부터 이쪽을 신뢰하며 쏠리도록 내어미는 어린이의 손이다. 이것은 마치 동물의 앞발과 같아 전적으로 친애의 표시기 때문이다.-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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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6-06-28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hanks 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