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품절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아, 수행하라는가 보다'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게 좋다. 그것을 장일순은 '바닥을 기어서 천 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만의 언어를 써서 표현했다. 납작 엎드려서 겨울을 나는 보리나 밀처럼 한 세월 자신의 허물을 닦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봄날이 온다는 것이다. 겨울에 모가지를 들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63쪽

여汝보세요
평생을 피곤하게 가시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마음에 있는데 표시가 잘 안 되네요.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어 들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지. 이 목기가 겉에 수없이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었듯이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한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요.-82쪽

"세상의 농심이란 농심은 모두 다 라면 속으로 사려져 버렸습니다."
한원식이 말하는 세태 비판이었다. '참, 말이 싱싱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장일순은 한원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중략)
"그렇게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116 쪽

한편 최병하는 이렇게 말했다.
"모월이란 '가부장은 가라'는 뜻이라고 봐도 돼. 가부장적 사고를 버리고 어머니 품 같은 자세로 살자는 거야. 어머니는 참 대단하지 않아?... 그 안에 세상이 다 안긴단 말이야. 그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母였어요.
월, 곧 달은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 안내를 하는 존재지. 술에 취한 놈이든 도둑놈이든 가림이 없지. 남녀노소 가림이 없어요.
이 두 가지가 합쳐서 모월이야. 이 모월에 들어오면 나갈 수가 없어. 편안하니까, 신나니까. 그런 원주를 만들자는 뜻이셨지."-119쪽

장일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156쪽

기자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장일순은 내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서로 때를 닦되 버리는 일은 없어야 돼."-157쪽

"선생님, 꼭 책을 쓰십시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엄청난 일을 해놓고도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신 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183쪽

장일순이 있는 곳에는 산소가 있었다. 그 산소를 마시고 사람들은 잃어버리고 살던 청년의 가슴을 회복하고는 했다.
태백에서 건설업을 하는 박해성은 20대 후반에 장일순을 만났다.
"어렵지 않고 편안해서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웠죠. 그래서 편안하면서도 바짝 깨어 있어야 했어요. 그 덕분인지 댁을 나올 때면 그때마다 새롭게 바뀌어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했어요."
박해성도 '장일순표 산소'를 마셨던 모양이다.-188쪽

그 아이에게 배우라는 것은 곧 그 아이의 때묻지 않은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천진한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글씨를 써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심중무물心中無物이라 했다.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든 것이 있으면 편안하지 않다. 그것이 부끄러움일 때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면 뭐하고, 부자면 뭐하랴. 가슴에 뭘 두고는 행복하지 않은 걸.-208쪽

'어디서나 제 안의 주인공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 사나 참되리라.'
는 임제 선사의 <임제록>에 나오는 유명한 글이다. 조주 선사는 '사람들은 24시간에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그 24시간을 부린다'는 글을 남겼는데, 어디서나 주인 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뜻도 되리라. 24시간을 부린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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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구판절판


중국이 스포츠 강국이 된 것은 국가적인 스포츠 육성책과 두터운 선수층, 포상제도와 국민의 관심 덕분이다. 무림고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 '가들이 우얘든동' 우리에게는 '그렇다 카더라'가 있어 삶의 그늘이 시원해지고 우물은 깊어지며 숲이 우거진다.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낼'만하게 즐거워진다.-85쪽

주목은 생장이 몹시 느린 나무다. 칠팔십 년을 자라도 키가 10미터가 안 되고 줄기의 지름은 20센티미터 정도다. 그렇지만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기본이 천 년인 '쳔년대계'가 있다. 백 년 정도만 참고 있으면 빨리 자라서 설쳐대던 나무들이 늙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장이 빨라져서 마침내 주목은 산정의 제왕이 된다.-135쪽

추사는 귀양살이에서 서울로 돌아온 1852년부터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과천 청계산 자락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추사의 만년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봉은사의 현판인 '판전'으로 죽기 사흘 전에 쓴 글씨다. 같은 해에 쓴 글씨 '대팽두부大烹豆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자 원문 생략)
최고의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최고의 모임은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손자로다.
......(중략)
이렇듯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나 살며 호의호식에 젖어 살던 추사가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라 '최고의 음식은 두부...'라니 활연대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대팽두부'는 노대가의 간명하고 고졸한 깨달음의 꾸밈없이 표현된 불후의 명품이다.-158-159쪽

엔도르핀과 같은 화학물질들은 뇌조직의 뉴런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을 완화시키다가 고통의 원인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더라도 신속하게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일시적으로 아편제가 과다한 상태가 되어 쾌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중략)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미량의 화학물질에 우리이 희로애락이 좌우된다는 것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뇌의 반복적인 '엔도르핀 과잉'으로 인해 운동중독이 된다는 것이다.-192쪽

로또에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1/8,145,060이라고 한다. 내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내 아버지의 정자이자 나의 한 부분이 언젠가 한 번은 일등을 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다는 못난 생각은 하지 말자. 내 옆 사람이 그렇고 그 옆의 옆 사람, 옆의 옆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을 거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들은 우주의 별보다 많은 숫자의 분모를 거느린 확률을 뚫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들이다.-195쪽

5월이었지만 계곡에는 지난 계절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밥을 비벼서 첫술을 입에 넣었다. 그 맛은 좀 무뚝뚝하다고나 할지 간소하다고나 할지, 세속의 식당 음식처럼 혀에 착 안겨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평범한 밥 한 그릇에서도 문을 닫아걸고 치열하게 법과 자아로 가는 유위有爲만을 궁행하고 있는 절 식구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자꾸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며 소나무 가지가 들어 올려졌다. 멀리 하얗게 빛나는 희양산의 큰 바위가 바라다 보였다. 천년만년을 용맹정진으로 버텨온 큰 뜻 품은 사내 같은 그 견결한 이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메어왔다. 밥 때문이겠지. 나는 숟가락으로 희양산 깊은 속살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을 떠서 천천히 마셨다. 일평생 기억될 만큼 차고 달았다.-230-231쪽

처음 애저찜을 앞에 두게 된 채만식은 '애색'해서-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워서-애저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영계백숙은 안 애색한가. 구워서 짝짝 찢어 먹는 명태 새끼인 노가리는? 새끼 이전 상태로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하는 우유며 어란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러운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꼴꼴거리며 돌아다니던 도야지 새끼가 눈에 밟히고, 또 간밤에 술자리에 불려온 애기 기생이 노래를 한답시고 애를 써 쌓는다 시달림을 받는다 하는 게 생각이 나 젓가락을 놓아버렸다고 적고 있다.-248쪽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놈'의 '왜'를 '키 작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왜소矮小'하다고 할 때의 '왜'와 倭(왜)는 분명히 다르다. 키가 작고 재빠르다는 왜인들의 인상이 우리나라 사람들 눈에는 작게 느껴졌을 수 있다. 속 좁고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정신적 왜소증이 혼동을 초래하는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 땅에 슬쩍 발을 걸치고 동정을 엿보다 그 발을 근거로 자기 것이라 우기는 데 이골이 난 조상의 피가 아직 흐르고 있는 것일까. 왜인들의 도발은 그칠 줄 모른다. 댜오위타이섬을 두고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런 추악한 일본인을 '르번꾸이즈'라고 부른다. '일본악귀' 정도의 뜻이다.-351쪽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
흔히 보듯 '내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너에게 돌아간다'도 아니었다. '네가 잘못하면 내가 손해 본다'는 이 청천백일하의 간단명료한 가치관! 나는 죽 끓이는 해녀들이 깜짝 놀라도록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360쪽

사냥을 할 때면 개는 주인보다 최소한 네 배 이상의 거리를 뛰어다닌다. 주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기동력을 가지고 느려터지고 둔한 주인의 능력에 맞춰서 최선을 다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냥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의 주인공은 개가 아니라 주인이다. 주인이라는 인간은 개가 그토록 힘들게 추적해서 쏘기 좋도록 공중에 날려 보내준 사냥감을 놓쳐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개를 탓한다. 저렇게 똑똑한 꿩을 찾아내면 어쩌라는 거냐고.

한 해의 모든 순간이, 매분 매시 하루 한 주 한 달이 개처럼 충직하고 영민한 시간일진대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그 순간을, 기회를 허공에 헛총질하는 식으로 허비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 지금 '58년 개띠'들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개발에 땀나게 뛰고 있을 것이다. 진희 씨, 영준 형, 성겸 형, 형근 형, 봉희 형..... 그들이 보고 싶다.-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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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007-10-1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수다스러운 책이죠.
어찌 그리 지식과 정보를 두루두루 얘기하는지.
얼마전 읽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프레이야 2007-10-17 10:22   좋아요 0 | URL
입담이 어찌 좋은지 재미나게 읽었어요.^^

씩씩하니 2007-10-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에 대한 부분에서,,,가슴이 찡해요..참 슬픈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늘..

프레이야 2007-10-17 13:39   좋아요 0 | URL
어머, 하니님, 저도 주목이 가장 찡했는데요^^
우린 너무 조급해 하고 갈급해 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백년동안 때를 기다린 주목의 지혜가 저를 부끄럽게 했어요.
 
사진, 영화를 캐스팅하다
진동선 지음 / 효형출판 / 2007년 5월
품절


전후 유럽 최고의지성인이자 세계적인 극작가인 브레히트도 '사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레히트 옆에는 늘 가위와 풀이 있었다. 나치를 피해 도망다니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거짓 사진을 오려 사행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 장갑차"
"그럼 겹겹이 쌓여있는 이 철판으론?"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 - 먹고 살려고."
-<장갑차와 강철탈환 사진 앞에서>

나의 마지막 바람은 그가 뒈지는 것.
너희도 들었겠지. 그가 철천지원수라는 걸. 그건 사실이야.
난 그런 말을 해도 돼.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아는 건 오직 르와르 강 한마리 귀뚜라미뿐이거든.
- <무명용사의 묘비 사진 앞에서>

이렇게 브레히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과 잡지의 거짓 사진을 오려 그 옆에 진실한 사행시를 썼다. 그 사진시가 유명한 <포토 에피그람 Fotoepigram>, 사진의 또 다른 진실을 밝힌 브레히트의 사진시다. 영화 <스토커>에도 역시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진은 과연 행복의 증거인가? -53-55쪽

메이킹 포토의 구성,해체,재구성은 실재가 아닌 가상을 전제로 한다. 연출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렇다고 삶의 리얼리티까지 배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전략적으로 드러낸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지 않고 구성,해체,재조립하려 한 것은 사라진 실재, 사라진 리얼리티 때문이다.-72쪽

삶과 죽음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보는 까닭은, 우연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느끼는지, 그럼에도 그때그때 존재의 자국이 어떻게 남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웃음과 미소는 그 자국 중의 하나다. 영화 속에서 웃음은 존재와 부재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한다. 웃음의 존재는 죽음 이후를 겨냥한다. 망자의 생전에 웃는 모습은 산 자에게 그리움의 표상이다.-141쪽

그렇다면 왜 초상일까? 사진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초상의 새로운 형태form가 바로 카메라를 마주보는 正面性이다. 초상의 정면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전면을 통해 나타나는 초상의 정체성이다. 이를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중심을 의미한다. 자주 하는 말로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 때 그 전면성이 바로 파사드다.-145쪽

파사드는 전면을 통해 드러나는 대상의 특징이자 성격이다.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을 쓴다면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초상사진일 경우일 것읻. 그렇다면 사진의 정면성과 전면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면성이 물리적인 방향이라면 전면성은 심리적인 형상이며, 정면성이 모델과 카메라의 관계라면, 전면성은 모델과 관객과의 관계다.

사진 발명 직후에는 긴 노출과 초점 때문에 카메라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고, 단체촬영의 경우 한정된 프레임 때문에 서로 몸을 밀착해 사진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면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초상사진의 정체성은 정면성보다는 오히려 전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가족사진에 두드러진다.-146쪽

뒷모습은 무심한 저쪽, '한 판의 공간, 한 자락의 옷, 하나의 전체로서' 숨죽인 모습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뒷모습은 확실히 모든 것이 드러나는 앞모습과 달리, 늘 존재론적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뒷모습은 우리 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말해질 수 있음과 말해질 수 없음의 어떤 간극, 또 그 간극만큼의 거리를 알게 한다.-209쪽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은 재현의 위기와 마주쳤다. 더 이상 사람들은 사진을 현실을 재현하는 가장 유효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시대를 맞아 이제 진실의 대명사에서 탈각되고, 시대의 증언자,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권능도 상실했다. 시뮬라크르 세계에서 '현실의 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가짜라고 해서 회의하지도 않는다.

사진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진이 참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현실이 참이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 세계는 모조물로 채워진 가짜다. 우리 삶이, 현실이 점점 모조의 세계를 연출하는 이상 사진의 정체성을 잃고 만다.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사진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220쪽

이렇듯 사진은 기억을 넘어서 현재화된다. 사진은 그 점에서 롤랑바르크가 말했듯 어떤 '푼크툼(punctum, 찌름)'이다. 푼크툼은 말 그대로 타이어가 미세한 바늘 촉에 찔려 터지는 것처럼, 사진의 작은 세부, 아주 작은 이미지가 보는 이에게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남기는 상처다. 그러므로 사진은 존재의 자국, 흔적, 상처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다.-222쪽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카메라도 총이나 자동차처럼 중독되고, 유희적이며, 황홀감을 유발시키는 기계fantasy-machine"라고 말하며, '사진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적 폭력은 사진을 찍는 행위가 단순한 수동적인 관찰을 뛰어넘어, 관음증 환자처럼 은밀하고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각적 잔인성에서 온다.
......
이미지 사냥꾼인 카메라 그리고 세계의 수집가인 사진 앞에서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윤리성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그녀는 "세계에 대하여 사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우리의 인식을 자극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진은 주체적으로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지식을 공급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238 쪽

영어의 이미지image는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온 '유령'이라는 뜻의 단어다. 또 형상이란 뜻의 영어 피규어figure도 귀신이란 라틴어 피구라figura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처럼 거울이미지는 유령, 귀신, 마법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254쪽

사진 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은 거울 속의 세계를 알았다는 뜻이다. 이는 또 세상을 거울처럼 좌우대칭으로 본다는 뜻이다. ...... 거울이 진실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거울이 완벽한 반영이라는 것도 허구일 뿐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는 한 순간 거울 밖의 존재를 배반할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것, 거울 속에 또 하나의 독자적 세계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속지 마시길, 거울은 닮은꼴일 뿐이니까.-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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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0-1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상과 앵글의 선택은 사진 작가의 의지입니다.
화가의 화필처럼.

 
카불의 책장수
오스네 사이에르스타드 지음, 권민정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5년 11월
절판


수많은 신발들이 먼지 속을 걸어간다. 사방에 갈색 샌들, 더러운 신발, 까만 신발, 낡은 신발들이다. 한 번은 꽤 말쑥한 신발 한 켤레와 리본 달린 분홍색 플라스틱 신발이 보인다. 심지어 흰색 신발도 있다. 탈레반은 그들의 깃발이 흰색이라는 이유로 흰색 사용을 금지시켰다. 또 딱딱한 굽이 달린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들이 걸을 때 소리를 내면 남자들 정신이 산만해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116쪽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다. 와킬의 누이 한 명이 샤킬라에게 대못과 망치를 건넨다. 샤킬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 있다. 그녀는 조용히 침실 문으로 다가가서 문에다 못을 박는다. 못이 제대로 박히자 모두들 박수를 친다. 비비굴이 훌쩍거린다. 이것은 샤킬라가 자신의 운명을 이 집에 못박았다는 뜻이다.-136쪽

멀찍이 떨어진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미크로라욘은 구소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느 시가지와 흡사하다. 사실 이곳 건물들은 러시아인들의 선물이었다. 소련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기술자들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하여 이른바 '흐루시초프 블록'을 건설했다. 결국 소비에트 연방을 가득 메우게 된 이 블록은, 카불이든 칼리닌그라드든 키예프든 어디나 방 두서너 개가 딸린 5층짜리 아파트 건물들로 이루어진 획일적인 형태의 구획이었다.-144쪽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이곳이 이토록 초라해 보이는 까닭이 흔히 생각하기 쉬운 소련의 쇠락 때문이 아니라 총알과 전쟁 때문임을 알 수 있다. 현관 옆 콘크리트 의자마저도 박살 나 난파선 잔해처럼 나뒹굴고, 한때 아스팔트였던 도로는 곰보처럼 움푹움푹 패여 있다.......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는 소비에트식의 평등 원칙에 따라 설계되었지만, 분명 아파크 내부에서는 어떤 평등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아파트를 건설한 배경에는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 없는 주거지를 만든다는 생각이 있었겠지만, 실제로는 미크로라욘의 아파트들은 중산층을 위한 주거공간으로 여겨졌다.......-145쪽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잃고 모든 것이 과거로 역행하는 이 나라에서 중산층이라는 단어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한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수돗물도 지난 10년 동안 우스갯소리가 되어버렸다. 아파트 1층에서는 매일 아침 몇 시간 정도 냉수가 나온다. 그게 다다.-146쪽

전통적으로 무슬림은 새해에 마자르-이-샤리프에 있는 알리Ali의 영묘로 순례 여행을 떠나지만, 탈레반은 이도 금지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순례자들은 알리의 영묘로 몰려가,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고, 병을 치료하고, 새해를 맞았다. 아프가니스탄 달력으로는, 새해가 3월 21일이에 시작한다. 이 날은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이기도 하다.-166쪽

순례자들은 금색으로 칠한 벽 옆에 서서 소원을 빌 수 있다. 앞서 들었던 애국적인 연설에 이어서, 만수르는 벽에 이마를 대고 기도한다.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인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해주십사고. 언젠가는 나 자신과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주십사고. 그리고 언젠가는 아프가니스탄이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국가가 되게 해주십사고. 하미드 카르자이도 이보다 더 감동적으로 말하지는 못했으리라.

온갖 광경과 소리에 취한 나머지, 만수르는 정화와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잊어버린다. 마자르까지 온 진짜 이유를. 거지소녀와, 소녀의 작고 마른 몸과, 커다랗고 옅은 갈색 눈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까맣게 잊고 있다.-191쪽

먼지 대부분은 공중으로 날려 이리저리 떠다니다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집에서는 먼지 냄새가 가시질 않는다. 아무리 애를 써도 먼지를 없애기는 불가능하다. 먼지는 레일라의 움직임과 몸과 생각을 뒤덮는다..... 지금 레일라가 몸에서 벗겨내려고 애쓰는 것이 이런 먼지때다. 도톰하게 말린 때가 목욕탕 바닥에 떨어진다. 그녀의 삶에 달라붙은 먼지들.-206쪽

그녀는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사회라는 진흙과 전통이라는 먼지가 만든 교착 상태에. 수백 년 된 전통에 뿌리 내린 체계 속에서, 그리고 인구의 절반을 불구로 만드는 체계 속에서 그녀는 옴짝달싹 못한다. 교육부는 버스로 30분 거리에 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30분. 레일라는 무언가를 위해 투쟁하는 일에 익숙치 않다. 오히려 포기하는 일에 익숙하다. 하지만 틀림없이 어딘가에 탈출구가 있다. 그녀는 그것을 찾아야만 한다.-237쪽

아이말은 차마 자기가 거리으 ㅣ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말은 부유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아이말의 아버지는 부유한 책장수였다. 문학과 역사에 그토록 열성적인 아버지, 책의 제국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꿈과 계획을 품은 아버지. 하지만 의심이 많아 가게도 아들들에게만 맡기고, 춘부에 새해맞이 축제 이후로 다시 문을 연 카불의 학교에 아들들을 보낼 생각도 하지 않는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이말은 애원하고 매달려보았지만 술탄은 단호했다.

-256쪽

"나중에.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모두 힘을 합쳐야 해. 지금은 책의 제국을 건설할 기초를 닦을 때야."
-257쪽

"난 구식 아내는 필요 없어, 당신은 진보주의자의 아내지, 근본주의자의 아내가 아니라고."
술탄은 여러 면에서 진보주의자였다. 그는 이란에 갔을 때 소냐에게 서양식 옷도 사주고, 부르카를 억압적인 감옥에 비유하곤 했으며, 새 정부에 여성 장관이 포함된 사실에 흡족해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이 현대 국가로 거듭나기를 마음으로부터 소망했고, 여성 해방에 대해서도 우호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집안에서는 여전히 권위주의적인 가부장이었다.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술탄이 본보기로 삼은 이는 단 한 사람, 자기 아버지뿐이었다.-334쪽

레일라는 삶이, 젊음이, 희망이 어떻게 그녀를 버리고 떠나는지, 그녀를 살리지 못하고 떠나는지 느낀다.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외롭다. 영원히 짓밟히도록 저주받은 돌덩이처럼. 레일라는 몸을 돌리고, 문까지 세 발짝 걸어, 조용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그녀는 짓밟힌 마음도 두고 나온다. 곧 창문을 통해 날아든 먼지가, 카펫 위에 살고 있는 먼지가 그녀의 짓밟힌 마음과 뒤섞인다. 그날 저녁, 레일라는 이것을 쓸어 뒷마당에 갖다버릴 것이다.-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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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7-09-21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미디어책이 좋은 것같아요

프레이야 2007-09-21 12:39   좋아요 0 | URL
아름드리미디어 전 이번에 처음인데요.. 그런가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구판절판


그랬다. 패배를 받아들이는 나자신의 감정이 이 정도로 성숙하고 의젓해졌다는 사실에 그저 스스로 대견해하며 그날의 충격을 견뎌냈다. 어린이날이었다.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란다. 좀 쉬었다 하지? 격려의 편지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투지와 열정의 팀 나의 삼미는 도대체 쉬거나 멈추는 법이 없었다. 노히트 노런을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그해 16연패의 찬란한 위업을 달성하더니, 나아가 그 다음 해에는 인류 공영에 길이 이바지할 18연패의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올려 버렸다. 불멸의 기록이었다.-106쪽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다러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 - 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었다. 세상은 이미 프로였고, 프로의 꼴찌는 확실히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126쪽

6월 항쟁의 '우리'와 대통령 선거일의 '우리'는 같은 '우리'인가?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을-나는 낡았지만 최근에 청소를 한 내 방의 창틀 너머로 계속해서 던져 보았다. 어둠은 대답이 없었고, '우리'는 모두 잘 자고 있었다...... 혁명의 주체가 되리라 생각했던 서민층과 중산층이, 실은 그 지층이 더욱 다져지길 원했다는 사실은-18살의 나로서는 감당키 힘든 충격이었다. 나는 다시는 혁명이란 거짓말을 믿지 않기로 했고 다시는 '우리'를 믿지 않기로 했다. -138-139쪽

그런데 세상을 둘러보니 다들 그런 거야. 다들! 다들 돼지발정제를 마신 것처럼 땀을 흘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져 있어. 아무래도 놈들이 원하는 건 돈과의 교미가 아닌가 싶어.이미 마신 이상은......그 끝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거지..... 그래, 분명 누군가가 우리에게 그걸 먹였어. 우리가 마셔온 물에, 우리가 먹어온 밥에, 우리가 읽는 책에, 우리가 받는 교육에, 우리가 보는 방송에, 우리가 열광하는 야구경기에, 우리의 부모에게, 이웃에게,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게...... 놈은 차곡차곡 그 약을 타온 거야. 너도 명심해. 그 5분이 지나고 나면, 우리도 어떤 인간이 되어 있을지 몰라......-182쪽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었지. 물론 처음엔 <섹스>와 <프로>를 함께 수입하라는 조언을 들었겠지? 물론 <섹스>는 양념이니까. 즉 <프로>를 더 잘 배양하기 위한 - 유산균 발효유로 치자면 올리고당과 같은 존재였지. -244쪽

그 <자신의 야구>가 뭔데?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른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 - 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251쪽

프로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놈들이 바라는 이 세계의 여건은 완벽해지는 것이니까.
세계의 여건?
물론이지. 우리는 미국의 프랜차이즈니까. 언제나 이 점을 잊어선 안 돼. <착취>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행해진 게 아니었어. 실제의 착취는 당당한 모습으로, 프라이드를 키워주며, 작은 성취감과 행복을 느끼게 해주며, 요란한 박수 소리 속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던 거야. 얼마나 큰 보증금이 걸려 있는가는 IMF를 통해 이미 눈치 챘잖아.-253쪽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니 지난 5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264쪽

남아 있는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할지를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어떤 공을 치고 던질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고, 어떤 야구를 할 것인가와도 같은 문제였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279쪽

뭐랄까. 자세한 기분은 알 수 없지만 - 나는 그 두근두근한 뱃속의 생명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의 공, 나의 야구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 프로의 세계에서 - 이제는 사라진 그 마지막 야구를. 그리고 나의 2세가 지치고 힘이 들 때면, 언제라도 회상하며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 있을 아버지의 야구를.-298쪽

플레이 볼.
조성훈이 소려쳤다.
재구성된 지구의 맑고 푸른 하늘을 지나
공이 날아왔다.
만삭의 아내가 손을 흔들었다.
저 두근거림 앞에서
이제 나는
저 공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

플레이 볼이다.-2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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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7-09-12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플레이 볼." 이던가요? 저는 이 소설이 너무나 재미있었지만, 이렇게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을 가장 좋아했어요. 플레이 볼. 지금 네꼬 씨는 플레이 볼, 상태예요. 혜경님, (뜬금없이) 보고 싶어요.

프레이야 2007-09-12 19:46   좋아요 0 | URL
어머, 네꼬님, 두 칸 더 추가했어요. "플레이 볼이다." !!
포물선을 그리는 마지막 문장이요.^^(어쩜 이런 깜찍한 표현은 네꼬님만 할 수 있는 표현이에요) 전 야구를 잘 모르고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최하위 야구팀에 빗댄 인생철학에 감복했어요. 이렇게 살아가야하는거에요. 그죠? 이 책은 정말 신선하더군요. 박민규의 최고작 같아요. 플레이 볼!, 상태면,, 네꼬님 좋은 상태 맞나요?^^. 두근두근 자신감 있게 시작하시기 바래요, 뭐든요.^^
참, 벤트 페이퍼 봤는데 갑자기 뜨악했어요. 제가 가장 기억하고픈 한 가지가 뭐지? 잘 모르겠는 거 있죠. 이럴수가요!!
귀여운 네꼬님, 앙앙~

사마천 2007-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화로는 보았는데 이렇게 철학적 구절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가르쳐 주신 혜경님 감사합니다. 계속 일깨워주세요 ^^

프레이야 2007-09-13 08:39   좋아요 0 | URL
사마천님, 이범수가 나온 수퍼스타 감사용, 말씀이시죠?
저도 그 영화 봤는데 이 책보다는 너무 못 미치더군요.
이 책과의 공통점이라면 삼미수퍼스타즈가 소재가 되었다는 것밖에요.. ^^ 물론 그 영화는 이 책을 원작으로 한 건 아닐거에요. 고요한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