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기생뎐
이현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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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에 질로 못 믿을 인간이 말로 묵고사는 종자와 글로 묵고사는 종자들이다.... 문화건달이 어떤 종자들인고 하면, 명함을 대문짝만학 박아가꼬 댕기기는 하제마는 도대체 뭘 하는지 알쏭달쏭 정체불명인데다가 이리 보면 그냥저냥 하루하루를 닝기는 날건달도 겉고 저리 보면 반 사기꾼처럼도 보이는 인간들을 통칭 문화건달이라 안 카나.-89쪽

인간은 약간 오염이 되어 있어야 편하다는 말은 만고의 진리다. 그는 지극히 순정한데다가 대단히 이기적이기도 하다. 애인의 조건으로서는 최악인 셈이다.-91쪽

사랑은 말이다. 가루비누랑 똑같은 기다. 거품만 요란했지 오래 쓰도 못 허고, 생각 없이 그 물에 손을 담그고 있으마 살 속의 기름기만 쪽 빼묵고 도망가는 것도 글코, 그 물이 담긴 대야를 홱 비아뿌만 뽀그르르 몇 방울의 거품이 올라오다가 금세 꺼져뿌는 기 똑 닮었다.-119쪽

나이나 적나. 옛날로 치마 환갑노인이다. 느들, 아무 데나 침을 질질 흘리고 댕기미 오도방정이란 방정은 다 떠는 저런 환갑노인 본 적 있나? 맨 농약 친 쌀만 묵고 살아서들 그런가, 요시로는 아고 어른이고 철딱서니가 없어놔서 큰일이라카이. 말세가 따로 있나, 어른 없는 시상이 말세지.-122쪽

오십대는 삼, 사십대와는 다르게 늙는다. 급속도로 늙는다. 게다가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의나 갈망을 체념한, 무방비한 상태로 생이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개운치는 않지만 넉넉하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의지가 얼굴 전면에 펴져있다. 그래서 더욱 미련없어 보인다.-138쪽

이 사람아, 땅 위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지.
영화나 소설 속에서처럼 리얼리티가 심각하게 결여될 때에만 사랑은 그 이름값으로 간신히 아름답네. 자네도 아다시피 사랑은 시작이 퍽이나 중요하다네. 어떤 방식으로 시작하는가에 따라 사랑의 형태가 결정지어진다네. 그러하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셈이네. 놓쳐버린 꼴이지.-156쪽

식물들에게 물을 줄 때에야 난 겨우 나의 본색을 되찾네. 물을 줄 때마다 나는 느끼네. 식물들에게는 우리가 알지 못할 위엄이 있다고. 거목은 한 알의 씨앗이 숲에 떨어진 그 순간부터 살아왔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을 말없이 견뎌왔겠나. 그에 비하면 내 사랑은 하찮다는 생각이 드네. 발부리에 걸리는 돌이나 잡풀처럼. 그러나 진정 불쌍한 것은 그 하찮은 것들 아니겠나.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끓는 마음이 아니겠나. 그 마음을 들킬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또다른 마음이 아니겠나.-163쪽

줄기와 잎이 빽빽이 들어찬 대숲은 밤새들이 몸을 숨기고 잠들기에 좋단다. 대숲에는 댓잎이 흔들리는 소리, 때까치 우는 소리가 끊이질 않으니 소리 공부를 하기에 더없이 좋지. 바람 속의 대를 본 적이 있더냐. 가만한 바람에도 잎새는 흔들려. 는실난실 앞새를 따라 줄기도 기껍게 나부끼지. 거센 바람이라도 몰아칠 양이면 우는 듯 갈구하는 듯 나무 밑동까지 전신으로 흔들리지 않더냐. 어떤 춤사위에 비할까. 이렇듯 대숲은 공부도 되지만 지나가는 밤새조차 마다 않고 품는 넉넉함을 본받아 기방에 온 손도 그처럼 품으라고 옛부터 기방 뒤뜰에는 대를 즐겨 심었나니.-183쪽

우리가 말하는 운명은 기대와 노력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우연하게 형성되는 거라고. 이해할 수 있겠니? 우리 같은 인간을 옴쭉달싹 못 하게 옭아매는 운명이라는 것이 실은 튼튼한 고리와 고리로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우연에 의해 이리저리 왔다갔다할 수 있게끔 느슨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190쪽

말이 통하지 않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여인들이 일본 유곽에서 어떤 일을 했겠니? 그들은 유곽에서도 가장 밑바닥 생활을 했어. 수출산업의 역군? 기생의 역사에 있어서 그처럼 가혹한 시기는 없었다. 돌아보면 야만의 시대였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여전히 두 눈을 부릅떠야만 했어.-193쪽

꽃이 진다. 오마담이 우뚝 걸음을 멈춘다. 꽃이 지고 있다. 오마담은 돌아보지 않는다. 눈을 감고 다만 등으로 듣는다. 보지 않아야 꽃 지는 소리가 들린다. '파'음으로 떨어지는 꽃은 낮은 가지에 핀 꽃이다. 봄꽃이나 가을꽃보다 여름꽃 지는 소리가 잘 들리고 아침이나 낮보다 해질녘에 잘 들린다. 바람이 눅고 습도가 높은 날 운이 좋으면 뒤란에서 계면조 음계로 지는 꽃들을 만나기도 한다.-199쪽

모든 예술은 하나로 통한다. 소리가 그러하고 춤이 그러하다. 나뭇가지에서만 놀면 재가 승하게 되고, 재가 승하면 생명력이 길지가 않아. 나무의 가지만 보지 말고 몸통도 보아야 하느니. 그렇다고 뿌리까지 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마라. 많고 적음은 곧 하나거든. 뿌리까지 봐버린 예인들은 단순하게 변하고 말아. 단순하다는 건 초월의 의미도 있지만 물기 없이 쪼그라들었다는 뜻이기도 해.-203쪽

타박네는 영준이로 말미암아 자신의 몸이 숭고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영준이를 보듬고 젖을 물릴 때 모유뿐만 아니라 타박네의 배와 가슴, 몸을 이루는 뼈와 영혼까지도 즙이 되어 영준이의 입 속으로 흘러드는 것만 같았다. 젖이 홀쭉해질수록 가슴속이 시원했다. 내어주는 기쁨이 그토록 큰 것일 줄이야. 퉁퉁 불었던 젖이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는 과정들이 말할 수 없이 신비하게 느껴지고 몸의 한 기관에 불과하다고 여겼던 자신의 가슴과 자궁을 찬찬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230쪽

허무니 절대고독이니 운운하는 이들은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머리나 신념에 기대지 않고 몸으로 사람과 자연에 가까워지면, 오직 몸으로 말을, 사랑을, 삶을 익히면 그것들은 자연스럽게 몸을 타고 내면으로 스며들어 영혼 속에 새겨집니다. 그래서 나는 정신보다는 몸을 신뢰합니다. 몸으로 사는 이 땅의 모든 것들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그 몸이 되어 보질 않고서야 오묘한 자연의 이치를 어찌 알겠습니까.-235-236쪽

그런 삶도 있으려니, 그런 사랑도 있으려니 하면 그뿐. 도덕이나 규범도 규정짓기 나름이고 사랑도 규정하기 나름 아니겠소....... 왜 하필이면 이 세상에 기생으로 나왔나, 내가 내게 묻지 않듯이 난 한시도 기생이 아닌 적이 없었소. -236-237쪽

손을 공중에서 무상하게 떨구어 가을 낙엽 지듯 꺾는 춤사위를 '낙엽사위'라고 한다. 낙엽사위는 가슴속의 시름을 쓰다듬어 울게 하는 손짓이어야 한다. 무겁게, 애통하게. 독하게 맺힌 기운을 풀어주는 춤. 사랑이 그리워서 쫓아가 잡고, 잡을 듯 말 듯 잡지 못하고 아프게 돌아설 때 춤에 무게가 실린다. 한의 무게, 생의 무게를 몸에 실어서 추는 춤이 살풀이다. 살풀이는 교태나 모양만으로 출 수 있는 춤이 아니다.-103쪽

'서랍이 많은 사람'은 부용각의 기생들에겐 하나의 기호, 또는 꿈으로 인식되는 말이다. 서랍이 많은 사람이 되기 위해 누군가는 자신만의 생존전략을 짜고 누군가는 발가락이 구부러지도록 춤을 추는 것이다.-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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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0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06-12-10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함께 점심 저녁을 맛난 걸로 먹었어요. 수술하고 나면 당분간 잘 못 먹을테니.. 통증이 전혀 안 느껴지니 실감을 못하긴 하나봐요.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고 그랬어요. 속으론 많이 떨릴 거에요. 워낙 낙천적인 사람이라 주위사람 마음을 편하게 해줍니다.^^ 그래도 안쓰럽지만 잘 될 거에요. 님의 기도대로 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