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절판


그가 일상적인 것에 대해 묻는 것처럼 "왜 나는 나일까?" 라고 말했을 때, 용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나는 호자에게 왜 그가 그인지 모른다고 말한 후, 그 문제는, 그곳에서, 내가 살던 나라 사람들이 많이 질문하고,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질문하던 것이라고 덧붙였다.-86쪽

그리고 묘한 목소리로 "마치 귓속에서 누가 계속 내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 같아"리고 말했다. 귓속에 들리는 그 노래는 그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에게도 그런 가수가 있었지만, 노랫소리는 달랐다. "내 가수는 항상 후렴구가 같아" 라며,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나는 나다, 나는 나다, 아!"-87쪽

그가 궁금한 것은 그 소리가 왜 그 구절을 계속 반복하는가였다. 나는 "권태 때문이지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기적인 아이들이 권태에 빠지면 생산적이거나 엉뚱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나는 그 후렴구가 들리는 원인이 아니라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
그는 결국 "그러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라며 속수무책으로 물었다. 나는 그에게 자신이 왜 자신인지를 생각하라고 말했다.-88쪽

'그들'은 터키 사람보다 거울을 더 많이 본다고 말해주었다. 왕, 공주, 귀족이 사는 궁전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집에도 정성스럽게 만든 액자에 끼워진 거울이 벽마다 걸려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곳에서 거울 보는 일이 많은 이유는 거울을 걸어놓기 때문이 아니라, 시종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다.-89쪽

인간이 서로를 끝까지 안다는 것은 충분히 매력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까지 아는 사람의 마력에, 악몽을 사랑하는 것처럼, 빠져들 수도 있을 거라고 나는 주장했다.-103쪽

우리는 몰락이라는 말을, 제국의 손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했던가? ...... 그렇지 않다면, 몰락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는 의미였던가?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이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166쪽

왼손잡이 서예가가 깨끗하게 베껴놓은 결론 부분에는, 호자가 아주 좋아했던 그 '가득 찬 서랍으로 비유'된, 우리 뇌의 복잡한 비밀에 대한 수수께끼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는 정형시가 있었다. 자부심 가득하고 잔잔다하고 할 수 있는 이 시의 잔잔한 안개는, 호자와 함께 썼던 가장 좋은 책을 슬픔으로 끝냈다.-168쪽

파디샤는 화약과 질산칼륨 냄새가 나는 우리의 남루한 천막에서 나와 아름다운 하얀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멈춰서더니 나란히 서 있는 우리에게 돌아섰다. 그는 신이 인간의 오만함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엉뚱함을 알리기 위해 창조한 비할 데 없이 멋진 것 중의 하나인 완벽한 난쟁이 혹은 똑 닮은 쌍둥이를 본 것처럼 미소 지었다.

그날 밤 나는 파디샤를 생각했다. 그러나 호자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다. 호자는 여전히 그에 대해 경멸한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그를 경멸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느긋한 그의 모습, 사랑스러움,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말해버리는 그 버릇없는 아이의 모습이 좋았다. 나도 그처럼 되고 싶었다. 또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172쪽

그는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게 나의 개성을 나로부터 분리시켜 호자의 것으로, 호자의 개성을 나의 것으로 결합시켰다. 파디샤는 이 상상의 창조물을 제자리에 배치하는 것으로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알게 된 것 같았다.-176쪽

파디샤는 이야기의 세부적인 것을 궁금해했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옷에 단추가 아주 많이 달려 있다는 것을 항상 반복했다. ...... 한번은 나에게 사실상 모든 인생은 서로 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왠지 그 말이 두려웠다. 파디샤의 얼굴에는 그 전에 내가 전혀 보지 못했던 어떤 악마 같은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에게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싶었다. 두려운 얼굴로 그를 보며 "저는 접니다" 라고 속으로 말하고 싶었다. 이 엉뚱한 말을 할 용기가 있었다라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려고 온갖 계략을 꾸미는 그 모든 험담꾼, 호자 그리고 파디샤의 게임을 헛일로 만들고 계속 평온하게 살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온갖 불확실한 말을 언급하기조차 꺼리는 사람들처럼 나도 두려워하며 입을 다물었다.-187쪽

나는 원정중에 처음으로 병사들이 적을 두려워하는 만큼이나, 어떤 때는 적보다 더 불운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불운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파디샤도 병사들처럼 어린애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놀이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호기심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병사들처럼 그도 하루 동안 일어난 것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고 호자에게 물었다. 지는 해 앞에 있던 빨간 구름, 낮게 나르는 송골매, 한 시골집의 깨진 굴뚝, 남쪽으로 가는 황새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호자는 이 모든 것을 좋은 징조로 해석했다.-199쪽

그도 성을 점령했다는 승전보가 우리의 마지막 행운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그러나 사실은 이 행운을 믿지 않고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도저히 점령할 수 없는 성에 대한 분노 때문에 불태워버린 마을의 불길 속에 있는 작은 교회, 불타는 종탑, 용감한 목사가 중얼거리는 기도는 새로운 인생을 연상케 한다는 것을, 북진하고 있을 때 우리 왼쪽에 있던 숲의 언덕 뒤로 지는 태양이 나 만큼이나 그에게도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끝나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완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218쪽

......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몇 년 동안 우연하게 경험했던 많은 것이 지금은 필연이라는 것을, 우리 군대가 성의 하얀 탑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219쪽

처음에 나를 불안하게 했던 내 정체에 관한 질문에 대해 이제는 노련하게 대답했다.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 라고. 파디샤는 이 문을 통해 내 머리 내부의 서랍으로 들어온 것 같다.-229쪽

내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는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 이 지겨울 정도로 지루한 세상에 대항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이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모든 인생을 여행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에서 이야기를 찾으며 보냈단다. 그러나 우리는, 이상하고 놀라운 것을 우리 마음속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을 찾는 것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오랫동안 생각하는 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한다고 말했다. 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엑 일어난 일도 이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하며, 이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237쪽

나는 '그'를 사랑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속수무책에 슬퍼 보이는 내 모습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 모습의 수치스러움, 분노, 죄책감 그리고 슬픔으로 숨이 막히는 것처럼, 슬퍼하며 죽어가는 야생동물을 보며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것처럼, 내 아들의 버릇없는 행동에 화를 내는 것처럼, 바보 같은 혐오감과 바보 같은 기쁨을 통해 내 자신을 아는 것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 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238쪽

우리의 파디샤를 위해 한 권의 책을 쓰려고 할 때,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 둘은 한순간 사소한 것에 온 신경을 쓴 적이 있었다. 아침에 함께 보았던 젖은 개, 두 그루 나무 사이에 쭉 널린 빨래들의 색깔과 형태에서 볼 수 있었던 비밀스런 기하학, 인생의 균형을 갑자기 드러나게 만드는 말더듬! 나는 지금 무엇보다도 이러한 것들이 그립다.-2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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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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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18쪽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아주 빠르게 배워나간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만성적인 허기다.-50쪽

음악의 곡조는 열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똑같다. 행진곡이나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민요다. 그 곡조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아마 수용소의 기억 중 우리가 가장 나중까지 잊지 못할 것일 게다. 그것은 수용소의 목소리이고 그 기하학적 광기를 지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말살시킨 다음 나중에서야 서서히 우리를 죽여버리려는 그들의 결단을 예리하게 표현한다.-73쪽

우리의 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탄탈로스의 꿈과 이야기의 꿈이 점점 더 구별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천으로 짜여나간다. 굶주림과 구타, 추위와 노동, 두려움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낮의 고통이, 밤이 되면 전대미문의 폭력이 담긴 무형의 악몽으로 변한다. 자유로운 삶에서는 열에 들뜬 날 밤에나 나타나는 것들이다. 매순간 공포로 얼어붙어, 사지를 떨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명령을 외치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잠을 깬다.-92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110쪽

절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는 'klepsiklepse'인데, 그리스어에 그 어원이 있는 게 분명하다. 테살로니키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온 사람들 중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스페인어와 그리스어, 이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고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들의 존재야말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의식적인 지혜의 보고로, 그 지혜 속에 지중해 문명의 모든 전통이 뒤섞여 있다. 이 지혜가 수용소에서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도둑질 및 자리 강탈, 물물교환 시장의 독점으로 변형되었지만, 이유 없는 잔인성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 적어도 잠재된 인간의 존염성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놀라운 의식이 그리스인들을 수용소에서 가장 민족적인, 그리고 이런 점에서 가장 문명화된 집단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120-121쪽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136쪽

유대인 특권층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히다. 현재,과거,고래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물론 몇몇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137쪽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189쪽

코만도의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마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216쪽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241쪽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세 사람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샤를과 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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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으로 머리로 읽을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읽을 책이네요... 휴...

프레이야 2007-02-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님, 좋은 책이더군요. 특별한 감동을 줍니다...

달팽이 2007-0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감동, 맞아요..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절판


정말 이상한 일이에요. 아직 사는 데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벌써 죽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 위로 난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어요. 필사적으로 땅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심연 속의 영원함에 매력을 느껴요. 때로는 몸을 내밀고 영원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을 느껴요.

우리는 거의 신경을 쓰고 있지 않지만, 절벽 가장자리에는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지. '몸을 내밀면 위험합니다.'-16쪽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개혁과 새로운 것, 혁명적인 것을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싸우고 법석을 떨지요? 결국에는 자연의 법칙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 말이에요. 혹시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오늘 당신이 떨어진 것처럼 위에서 떨어지지 않았던가요?-25쪽

우리가 나폴리를 향하고 있지만, 지금 내려가지 않고 올라간다고 해서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은 아니오. 물론 북쪽은 위에 있고, 남쪽은 아래에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쪽으로 가면 오르막길이 없고, 북쪽으로 가면 내리막길이 없는 것은 아니오.-27쪽

어느 순간 아버지는 집 안에 이방인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새로운 눈으로 아버지를 관찰하는 아들이다. 아들이 자신의 적을 탐색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다. 결국 아들은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에 대해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더 강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동맹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결코 자기 자신에게 위선적이지 않아야 한다.-78쪽

선물을 살 때 사람들은 가장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사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진짜 선물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좋아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중요한 것은 소유가 아니라 정복이라고나 할까.-88쪽

파시오나리아, 나는 네 손을 놓아야 하고, 너는 벽 사이의 작은 구멍 속으로 들어가야 해. 그러니까 파시오나리아, 너도 안녕. 너는 나의 삶에서 떠나 국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저들은 너에게 국가의 위선을 가르치겠지. 이제 더 이상 네 생각도 네 것이 아니게 될 테고, 너는 교육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겠지. -113쪽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철도를 만들고, 밤이면 도시들을 환한 불빛으로 비춰준다. 그렇지만 우리의 자유를 빼앗고, 우리의 행동과 생각까지 규제하고, 법률과 규정의 풀어헤칠 수 없는 실타래 속에 우리를 더욱더 옭아매고, 우리를 더욱더 하찮은 톱니바퀴로, 피를 빨아먹으면서 헛되이 돌아가는 무서운 기계의 톱니바퀴로 만든다.-114쪽

완전히 나만의 세계이지만, 그것은 내가 완전히 거기에 속해 있다는 의미에서 그래요. 나는 그 신비로운 세계, 그림자들과 욕망들, 두려움들이 가득한 그 세계의 포로이고 절망적으로 혼자예요. 나는 고통스러운 발을 이끌고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끝이 없는 길을 헤매고 있어요.

힘들겠군, 마르게리타. 혹시 자전거라도 한 대 살 가능성은 없소? 노고를 상당히 덜어 줄 텐데.-141쪽

나는 단지 선생님을 위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뱉는 독약은, 국가의 태만함과 관료제의 귀머거리연한 무관심 때문에 공동체의 선을 위해 정직하게 일하고 힘겹게 살아온 삶의 마지막 날들을 슬프게 보낸 그 모든 사람들과 내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165쪽

고양이보다 훨씬 더 대단한 영웅, 고양이보다 훨씬 더 커다란 승리를 거둔 영웅이다. 왜냐하면 나는 치촐라타 덩어리를 부수고 깨뜨렸으며, 바로 오늘 저녁에는 완벽하게 파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다. 나는 내 영혼을 장애물 너머로 내던졌으며, 단지 하느님만 나를 제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물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230쪽

마르게리타, 어제는 당신이 '추론'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오늘은 '신랄하다'고 말하는군. 당신 생각을 표현하는 데 평범한 낱말들로는 충분하지가 않소? 당신도 이제 애매한 지성주의의 오솔길을 걷고 있는 것이오?

아뇨. 단지 낱말들의 꽃밭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어떤 이국적인 꽃을 하나 꺾어 낡은 생각을 새로운 꽃으로 치장해 보는 것이 좋아요.-316쪽

과거는 맥주 한 잔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모욕을 주는 사람은 그 모욕을 모래 위에 쓰지만, 모욕을 받은 사람은 청동에 새겨 두는 법이에요.-319쪽

조반니노,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저건 악마 같은 전략이에요. 만약 열다섯 사람이 누군가에게 덤벼든다면 그것은 공격이에요. 하지만 이백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격분한 군중의 납득할 만한 반응'으로 소개될 수 있어요. 법은 군중을 처벌할 수 없어요. 군중은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있지요.-323쪽

나는 지금 아프지 않게 해 주는 기계들이 있는 치과에 가는 것이 아니야. 옛날식 치과에 갈 거야. 어렸을 때 우리를 아프게 했던 치과에 말이야. 그런 고통을 포기하면 내 젊음을 배신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우리 세대는 엘리베이터와 비행기를 불신하지만 고통을 두려워하지는 않아!-339쪽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세대란 메스가 자신의 생살을 찢는 것을 확고한 눈으로 지켜볼 수 있고 울지도 않는 세대라는 의미가 있어요. 그 사람들은 자신의 개성을 너무나도 존중해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심지어 자신의 살이 외과 의사의 칼에 의해 고통당하는 것도 포기하지 않아요.-340쪽

햄릿, 기술의 발전이 단순한 사람들을 매혹시키듯 너 또한 매혹시키는구나. 너는 거기에 혹하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너는 기술 발전을 문명과 혼동하게 될 것이고, 또 네 근본에서 벗어나게 될 거야. 사람들이 사람다움을 유지할 수 없을지라도 너는 개다움을 배신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해.-348쪽

나는 근무를 할 때마다, 또 치명적인 커브 지점에 도착할 때마다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에게 인사하는 것을 보며 생각하지. '다음번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뛰어내릴 거야.' 권태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마르게리타. 그리고 더욱더 내 일을 힘들고 어렵고 불쾌하게 만들지 나는 절망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고 싶고, 바로 몇 년 전부터 창가에 있는 아가씨의 미소 속에서 내가 읽어 내는 초대에 응하고 싶어. 그런데 매번 뒤로 미루지. 바로 특급열차 136호 기관사의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야.-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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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잊지 못할 한 구절 - 명사 28명이 소개하는 '내 인생의 시와 문장들'
신경림.김명곤.장영희.최영미 외 지음 / 예담 / 2006년 6월
절판


"산에 숨지 않고 속세로 내려가 죄 짓고 살 수 있는 힘을 얻고자 함입니다. 죄를 짓는 것은 오히려 큰 일이 아닙니다. 죄 짓지 않고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모든 죄는 저마다 자기 속에서 사해질 것이니 타인의 죄는 타인에게 주고 자신의 죄는 마땅히 스스로 풀며 사십시오. 모든 고통은 한계가 있어 그 너머에 진실이 있으니 느낄 수 없을 때까지 느끼십시오. 그것이 고통과 진정으로 관계하는 법입니다."
어쩌면 인생은 고통을 풀어 둥지를 만드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 이주향-44쪽

사랑한다는 것은
허무의 바다 건너가기입니다
한쪽은 나룻배가 되고
다른 한쪽은 사공이 되어.

- 사랑한다는 것은 - 열애일기 27의 전문(한승원) 중-74쪽

들꽃 한 송이와
한밤에 들에 나와 쳐다보는 보석 같은 별들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은 똑같다. - 한승원-75쪽

사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구름은 내게 와서 나의 벗이 되어 주었다.
내가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거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다음에도...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날 때도 내가 보고 싶은 건 바로...너.
파란 하늘과 흰 구름. - 최영미-136쪽

행복은 선택이다. 행복은 가까운 곳에, 현재에 있다. 행복은 쟁취해서 얻는 먼 훗날의 결과물이 아니다. 더 자주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 우리 존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다. - 조안리-19쪽

진정으로 살고자 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 모두가 연애와도 같은 이토록 뜨거운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주위를 둘러보면 희망과 용기의 재료들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꿈과 행복의 맛이 달라질 것이다. - 서진규-32쪽

나는 인류가 진화되어 가고 있는지 잘 모른다.
이라크에서의 미 제국의 살육과 같은 국가적 대형 범죄를 보거나,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방불케 하는 근육질의 남성들이 이종격투기의 이름으로 서로를 피멍투성이로 만드는 광경을 눈요깃감으로 삼아 즐기는 선남선녀의 경기 중의 눈빛을 보면 솔직히 진화론에 대해 의심이 든다. 지능이 아무리 진화했어도 심성은 토굴에서 살았던 시절보다 퇴보했으면 퇴보했지 선량해진 것 같지가 않다. - 박노자-53쪽

삶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시적 진실이 아닐까. 아름다움이 균형 있는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긴 시간에 걸친 지적 훈련과 인간적인 각성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내 사진 역시 다른 사람들이 살아온 진실의 기록이다. - 최민식-61쪽

힘없이 안나푸르나를 등지고 내려오는 길에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몇 번의 실패와 함께 내 가장 소중한 친구들의 목숨을 잃어야했던 까닭을. 그것은 안나푸르나의 책임도 그무엇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오만이었다. 내 헛된 욕망이었다. 정상을 보는 순간 이번에는 반드시 정복하고 말리라는 헛된 욕망. 그로 인해 무리를 하게 된 경거망동에 풍요의 여신이 벌을 내렸다는 것을.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어리석은 오만에 경종을 울렸다는 것을 - 엄홍길-95쪽

난 길을 걸으면서 배웠다. 내가 해결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일에 저항하는 건 어리석다는 것을. 운명도 그 중에 하나이다. 지금도 난 크고 작은 고민이 닥칠 때마다 해결할 수 없는 것은 그냥 내버려둔다. 고민은 애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길 위에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유재하의 길이 그랬듯, 나의 길은 아직도 멀고 아득하다. 하모니카를 벗 삼아 좀 더 천천히 걸어야겠다. - 전제덕-110쪽

푸른 숲과 푸른 낙원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마음 안에서만 발아하고, 마음 안에서만 꽃을 피우는 사랑처럼 나의 음악도 많은 이들의 마음 안에서 발아하여 꽃을 피우는 감동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부끄럽지만 음악이 나의 사랑, 음악이 나의 휴식이었노라고 고백한다. 내가 걷는 이 길, 결코 끝나지 않을 이 길의 종착지 역시 음악이리라고 나는 확신하다.
- 윤도현-120쪽

동심이 로맨틱을 내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타는 많은 이들을 그러한 로맨틱의 세계로 데려다 준다. 그러하기에 기타를 치는 건 내게 그저 즐거움이고 행복이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타를 치며 살아가는 내게 행복 그 이상이 온 건 행운이었다. - 이병우-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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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4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6-12-1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은 시련을 견뎌낼만한 사람에게 준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110쪽을 읽으며 포기할것과 인정할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겨울 2006-12-14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자의 글에 공감해요. 특히 이종격투기를 보며 즐기라는 의도의 잔인성에 신물이 올라오곤 합니다. 하긴 요즘의 스포츠에서 스포츠 정신을 찾는 건 어리석지요.

프레이야 2006-12-14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몽님/ 저도 박노자의 글에 깊이 공감했어요. 인터넷의 폐해 중 하나이기도 해요. 우리 정서, 우리 심성의 퇴보가 의미하는 것이란...

승연님/ 따뜻하고 빛나는 구절들, 어쩌면 평범해서 잊고 사는 생각들이 많았어요.

하늘바람 2006-12-15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윤도현의 글이 와닿네요

2006-12-15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치유 2006-12-15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말들이네요..전제덕님의 글도 좋구요..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네요..이번주특히요.
 
공차는 아이들
김훈 글, 안웅철 사진 / 생각의나무 / 2006년 8월
절판


인간의 도덕과 의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축구에서 배웠다.
- 알베르 카뮈
-13쪽

허공 속에서 공은 많은 천체들과 함께 운행하는 인간의 별처럼 보인다. 높이 뜬 공이 풍경 전체를 사람의 것으로 바꾸어놓는다. 공을 향해 벌린 인간의 두 팔은 비바람 속에서 자족한 나무의 모습이다.-20쪽

발바닥의 굳은살이나 닳아진 구두의 뒤축에는 체중이 시간을 통과해나간 무늬가 찍혀 있다. 맨발로 땅을 달릴 때 나는 진화의 이름을 퇴화해버린 내 발바닥이 가엾다. 가엾기는 하지만, 맨발로 달릴 때 발바닥과 세상과의 직접성은 반갑다. 그 반가움과 함께 나는 조심조심 달린다.-38쪽

팔은 다리의 움직임과 연결되어서 흔들린다. 팔이 다리에 맞추어 흔들릴 때, 이 흔들림에는 직립보행 이전의, 네 발로 땅을 기던 시절의 추억이 살아있다. 인간의 육체 속에서 이 추억은 멀고도 희미한 등불로 깜박인다.-43쪽

공 차는 인간의 육신에는 산하의 모습이 숨어 있다. 공을 찰 때 산하는 인간의 육신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 속의 공 차는 사람이, 다음 순간 땅 위에 쓰러질지 계속해서 달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의 팔다리는 산하의 흔적을 드러내 보인다.-45쪽

장년의 사내들에게서는 오래 산 사람들의 누린내가 풍긴다. 그 누린내는 피로감일 수도 있고 건강함일 수도 있다. 또는 완강함일지도 모르겠다. 피로와 건강은 다른 것이 아니다. 건강한 자들만이 피로의 감미로움을 안다. 그들의 공 차는 모습이나, 등물하는 모습에서도 생활의 냄새는 배어나온다. -57쪽

공차기는 속박과 비상 사이의 떨림이다. 그래서 공을 차는 인간은 때때로 하늘을 날아가는 새의 모습을 보여준다.-61쪽

공이 둥글지 않으면 놀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공은 입체의 중심에서 표면에 이르는 모든 거리가 같다. 이 공간기하학적 사태는 경이롭다. 공은 이 절대적인 등거리성으로 모든 충격을 순수하게 수용하고 반응한다. 공은 거기에 와 닿는 발길에 따라 무수한 질감과 방향성으로 새로 태어난다. 공은 인간의 몸이 아니면서도 몸의 일부이고 몸과 몸 사이의 또 다른 몸이고, 그 연결자이다. 그래서 공을 찬다는 행위는 생명을 밖으로 내질러 낯선 공간 속으로 연장시키는 일이다. 공은 살아 있는 짐승과 같다.-64쪽

닳아진 공을 보니까 공에도 생애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공이 발길에 채여서 튕겨져나갈 때 공은 발길의 힘을 정직하게 반영하는 순결한 매개물일 터인데, 닳아진 공의 표정에도 그 순결의 자취들이 남아 있다. 닳아진 공의 생애는 그 어느 구구의 편도 아닐 채 스스로의 늙음을 완성하면서 남루하지 않고 초라하지 않다. 그 공을 꿰매는 인간의 손과 인간의 작업도구 또한 그러하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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