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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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18쪽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있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 과거와 미래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것을 아주 빠르게 배워나간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만성적인 허기다.-50쪽

음악의 곡조는 열두 개 정도밖에 되지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똑같다. 행진곡이나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민요다. 그 곡조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다. 아마 수용소의 기억 중 우리가 가장 나중까지 잊지 못할 것일 게다. 그것은 수용소의 목소리이고 그 기하학적 광기를 지각 가능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말살시킨 다음 나중에서야 서서히 우리를 죽여버리려는 그들의 결단을 예리하게 표현한다.-73쪽

우리의 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탄탈로스의 꿈과 이야기의 꿈이 점점 더 구별하기 힘든 이미지들의 천으로 짜여나간다. 굶주림과 구타, 추위와 노동, 두려움과 혼란으로 뒤범벅된 낮의 고통이, 밤이 되면 전대미문의 폭력이 담긴 무형의 악몽으로 변한다. 자유로운 삶에서는 열에 들뜬 날 밤에나 나타나는 것들이다. 매순간 공포로 얼어붙어, 사지를 떨며, 분노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명령을 외치는 듯한 느낌 속에서 잠을 깬다.-92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110쪽

절도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표현하는 단어는 'klepsiklepse'인데, 그리스어에 그 어원이 있는 게 분명하다. 테살로니키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온 사람들 중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스페인어와 그리스어, 이 두 개의 언어를 사용했고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그들의 존재야말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의식적인 지혜의 보고로, 그 지혜 속에 지중해 문명의 모든 전통이 뒤섞여 있다. 이 지혜가 수용소에서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도둑질 및 자리 강탈, 물물교환 시장의 독점으로 변형되었지만, 이유 없는 잔인성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 적어도 잠재된 인간의 존염성을 지켜내려는 그들의 놀라운 의식이 그리스인들을 수용소에서 가장 민족적인, 그리고 이런 점에서 가장 문명화된 집단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120-121쪽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 그의 얼굴과 눈에서는 생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136쪽

유대인 특권층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상은 슬프면서도 주목할 만히다. 현재,과거,고래의 고통들, 이방인에 대한 전승되고 학습된 적개심이 그들 안에서 하나가 되면,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비사교적이고 무례한 괴물로 만든다. 그들은 독일 수용소가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전형적인 작품이다. 노예 상태에 있는 몇몇 개인에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자리, 어느 정도의 편안함과 높은 생존 가능성이 제공되는데, 대신 그들은 동료들과의 자연스러운 연대감을 배신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물론 몇몇은 그 요구를 받아들인다.-137쪽

우리는 '허기'라는 말을 쓴다. '피로', '공포', '고통'이라는 말도 쓴다. '겨울'이라는 말도. 하지만 이것은 전혀 다른 것들이다. 자기 집에서 기쁨을 즐기고 고통을 아파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인간들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자유로운 단어들이다. 만일 수용소들이 좀더 오래 존속했다면 새로운 황량한 언어들이 탄생했을 것이다. 영하의 날씨에 바람 속에서 셔츠와 팬티, 올이 성긴 천으로 만든 윗도리와 바지만 입은 채, 더할 수 없이 허약해지고 굶주린 육체로, 종말이 다가와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하루종일 노동하는 것의 의미를 설명하려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189쪽

코만도의 동료들은 나를 부러워한다. 그러는 게 당연하다. 어떻게 내가 만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아침에 내가 사나운 바람을 피해 실험실의 문지방을 넘어서는 순간 바로 내 옆에 한 친구가 등장한다. 내가 휴식을 취하는 순간마다, 카베에서나 쉬는 일요일마다 마타나던 친구다. 바로 기억이라는 고통이다. 의식이 어둠을 뚫고 나오는 순간 사나운 개처럼 내게 달려드는, 내가 인간임을 느끼게 하는 잔인하고 오래된 고통이다. 그러면 나는 연필과 노트를 들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쓴다.-216쪽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241쪽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세 사람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샤를과 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2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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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2007-02-07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으로 머리로 읽을 책이 아니라 마음으로 가슴으로 읽을 책이네요... 휴...

프레이야 2007-02-07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페인님, 좋은 책이더군요. 특별한 감동을 줍니다...

달팽이 2007-02-07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별한 감동,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