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밤. 루터, 문학자이기에 혁명가

 

저번에는 비평가와 전문가라는 두 가지 지의 나쁜 형상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움을 받아 그가 말한 변질하여 가치판단의 힘을 잃어버린 철학자칼리오스트로 같은 철학자라는, 역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형상과 반향하면서 말이지요.

 

p67. 사람들은 거기서 적어도 여섯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호칭이야 논자마다 다르지만 일단 열거하기로 합시다. 중세 해석자 혁명, 대혁명, 영국혁명, 프랑스혁명, 미국혁명, 러시아혁명,

 

p68. 혁명은 보통 영어로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일반적인 된 것은 프랑스 혁명의 어느 유명한 에피소드에서 입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았을 때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반란이다라고 말하자 측근인 라 로슈포코 리앙쿠르 공작이 아닙니다, 폐하. 이건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옵니다.”라고 했다는 극적인 장면입니다.

 

p69. 12세기 중세 해석자 혁명, 별칭으로 교황 혁명은 유럽에서 최초의 혁명 이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의 슬로건”, “상징적인 기도 문구이고 은유”(르장드르)였습니다. 그 슬로건, 기도, 은유란 어떤 것이었을까요? ‘Reformatio totius orbis’라고 합니다. 번역하면 세계 전체에 형태를 다시 주는 것이 됩니다. 요컨대 세계혁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Reformatio’를 혁명이라고 번역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버먼이 이를 독일혁명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앞에서 말했습니다만, 역시 원어를 보면 독일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대혁명이라고 번역하지 못할 이유도 없습니다.

 

p73.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가요? 폭력이고 유혈이며 참극입니다. 영국혁명의 일부를 이루는 명예혁명은 영어로 ‘Glorious Revolution’이라고 합니다. ...‘빛나는 혁명’, ‘영광스러운 혁명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불리는 걸까요? 무혈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p75. 마르틴 루터가 일으킨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p79. 수도원은 원래 학문과 노동과 금욕과 명상의 장소입니다. 그러나 부패한 수도원은 이제 귀족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소굴, 패셔너블한 사교장으로 전락해갔던 것입니다.

 

p81.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을 벌하는 정의의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증오했다. 그리고 모독이라고는 말하지 않아도 신에 대해 분노를 안고 있었다. 가련한, 영원히 상실된 죄인을, 죄 때문에, 십계명에 의해 온갖 종류의 재앙으로 우리를 압박하는 것만으로 신은 만족하시지 않는 걸까 ?

 

p83. 그는 알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에는,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성서에는 교황이 높은 사람이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쓰여 있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대주교 자리를, 주교 자리를 마련하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황제가 높은 사람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교회법을 지키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십계명을 지켜라라고 쓰여 있을 뿐입니다. 수도원을 지으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공의회를 열라고도, 그 결정에 따르라고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성직자는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면죄부는 논할 계제도 못 됩니다.

 

p84. 이 세계의 질서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질서는 완전히 썩어빠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이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세계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고, 따라서 이 세계의 질서는 옳고 거기에는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루터를 제외하고, 교황이 있고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고, 모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서에는 그런 것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p85.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

 

p86.루터가 말했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루터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되풀이해서 읽으라고 충고하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잇습니다.

 

그러나 이에 질려 한 번도, 두 번도 이미 충분히 읽었고 들었고 말했다. 뭐든지 근저에서부터 알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런 생각을 갖는 자는, 때 아닌 때에 열매를 맺는 과일 같은 것으로, 절반도 익지 않은 채 떨어져버릴 것이다.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릅니다. 주위 사람들은 다들 이 세계에는 준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만 미쳤는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륀베델처럼요. 저는 이를 준거의 공포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정말 그런 것이 그 책에 쓰여 있었는지 완전한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다, 정확한 근거를 보여준다,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그저 자신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책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준거의 공포에 사로잡히면서, 그래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추궁해야 합니다. - 반복하겠습니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을 일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일입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성전입니다. 성전을 바꿔 읽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바꿔 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고독한 싸움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시 루터는 아무래도 자신이 미쳤다고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눈을 비벼도 거기에는 그렇게 쓰여 있고, 또는 그렇게 쓰여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지 않으므로 몇 번이고 말합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쓰여 있다고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91. 루터는 설사 보름스 시내 지붕의 기와가 모두 적이 되어 습격해온다고 해도 나는 간다.”라고 말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성기를 창출한 황제 카를 5세가 기다리는 보름스 국회의 소환에 응합니다. 거기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성서의 증언이나 명백한 이유를 가지고 따르게 하지 못한다면, 나는 계속 내가 든 성구를 따르겠다. 나의 양심은 신의 말에 사로잡혀 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자주 잘못을 저질렀고, 서로 모순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주장을 철회할 수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양심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은, 확실하기는 해도 득책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p93. 사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는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습니다. 좀 더 넓게 잡아도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의 전체 서적의 3분의 1을 차지합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9월성서>1534년까지 85쇄를 찍어 냈고 10만 부가 팔렸습니다.

 

p97. 루터는 1520년 비텐베르크 빈민 구제법이라는 법률을 공포하고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금부터 이 도시에 가난한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구걸을 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실제로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합니다.

 

p102. 어쨌든 법을 어떻게 적용할지, 그때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인지 하는 물음에 루터파 법학은 양심이라고 대답한 겁니다. 재판관의 양심적인 판단이지요. 서구의 현행법이 루터파에 가장 많이 빚지고 있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법을 구체적인 사례에 공정하게적용한다는 것은 양심에 따라판단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p104.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작가 고토 메이세이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고 자문하고는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사람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 특유의 넉살 좋고 이상한 느낌으로 답했습니다. 이는 사실 똑같은 일입니다. 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쓰는 것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쓸 수밖에 없습니다. 고독한 싸움일지라도, 그륀베델 같은 광기의 위험이 있더라도, 책을 읽는다는 것을 그 정도까지 예민하게 생각하면, 책을 읽고 다시 읽는 것만으로 혁명은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p106. 연설은 이렇습니다.

 

남자들은 술과 여자로 몸을 망칠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술을 금지하고 여자를 죽이라고 할 것인가?

태양과 별이 우리를 속인다고 한다면,

그것을 하늘에서 떼어내야 하는가?

그런 성급함이나 폭력은 신에 대한 신뢰의 결여를 드러내는 것이다.

나는 기도하고 설교하는 것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이 나를 통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하셨는지를 생각해보라.

말이 그 모든 것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루터가 읽은 것기도이고 명상이며 시련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을 떠올립시다. 의미는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성급함이나 폭력을 부정하고 말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p109.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들뿐입니다. 부당하게도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명문화된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95개조의 의견서가 있었던 것처럼 12개조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전적으로 루터적인 방식으로 성서에서 합법적인 근거를 찾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흘린 피는 무익했을까요?

 

아닙니다. 전쟁이 종결된 이듬해인 1526년 슈바이엘에서 제국의회가 개최됩니다. 거기에서 농민의 요구에 대한 대위원회가 설립되었고, 논의 끝에 황제에게 보고서가 제출되었습니다. 이 보고서가 12개조의 요구를 원안으로 삼은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부당한 징세가 폐지되었고, 농노제도 폐지되었으며, 이동의 자유나 토지의 반환이 제기되었습니다.

 

p111.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사상의 힘을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대학교수의 조용한 서재 안에서 나온 철학적 개념이 한 문명을 파괴해버리는 일도 있다고 말이지요. 하이네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유럽의 이신론의 목을 잘라버렸고, 루소의 책은 로베스피에르를 매개로 앙시앵레짐을 파멸시킨 피투성이의 무기라고 했습니다.

 

p112.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 대혁명에서 집중해야 하는 것은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에 의해 권력을 탈취하는 것이 선행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텍스트를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번역하고, 천명하는 것.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것이 나타나는 일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혁명에서는 텍스트가 선행합니다.

 

p113. 됐나요? 텍스트를, 책을, 읽고, 다시 읽고, 쓰고, 다시 쓰고, 그리고 어쩌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 이것이 혁명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래도 이렇게 됩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근원이다, 라고. 루터는 문학자였습니다. 말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상 최대의 혁명가였습니다.

 

p114. 혁명이 문학적 몽상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혁명은 문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다릅니다. 결코 다릅니다.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입니다. 혁명은 문학으로부터만 일어나고, 문학을 잃어버린 순간 혁명은 죽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문학을 폄하하고 문학부를 대학에서 추방하려고 할까요? 왜 문학자 스스로가 문학을 이렇게 업신여길까요?

 

그것은 바로 문학이 혁명의 잠재력을 아직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것에 겁을 먹고 있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토록 정보의 틈새에서 괴로워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을 통치하는 텍스트라는 것이 무미건조한 정보이자 서류인 어느 시공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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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11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사키의 주장에 따르면 `책을 불태운 사람들`은 `책의 놀라운 힘`을 제대로 직시했던 게 틀림없었던 듯합니다. 정성들여 옮겨주신 덕분에 `책 속에 담긴 저자의 생생한 목소리`를 일부나마 엿들을 수 있어서 참 좋네요. 혁명가 루터에 대한 이야기는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겔도 여러 곳에서 `그의 영향력`을 거듭 강조하더군요. 다른 한편으로, 니체는 `르네상스 혁명`으로 거의 다 죽어가던 `기독교`를 `루터`가 기어이 다시 살려냈다면서 ˝르네상스가 ㅡ 의미없는 사건으로, 엄청난 헛수고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니!`라고 탄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끝장내버리지 못한다면, 독일인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그를 몰아세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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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불태우는 사람들

책을 불태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지우고 과거를 파기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1933년 5월 10일 베를린, 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서적 2만여 권이 불태워지는 동안 선전 부장이던 파울 요셉 괴벨스가 환성을 지르는 10만여 명의 군중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고 있었다. ˝오늘 밤 여러분들이 과거로부터 내려온 이 왜설스런 것들을 불길로 집어던지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이거야말로 전세계를 향해 낡은 정신은 죽었다고 선포하는 막강하고 상징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정신의 불사조가 일어날 것입니다.˝

당시 열두 살 소년으로 훗날 런던의 유대학을 위한 레오 백 연구소 소장이 된 한스 파우커도 그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화염 속으로 책을 집어던질 때는 엄숙함을 더하기 위해 이런저런 연설이 이어졌다고 그때를 회고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책들을 던지기 전에는 검열관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비난을 퍼부었다. ˝정신의 파괴적 분석에 기초를 둔 무의식적 충동이라는 허풍에 맞서서, 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기꺼이 불길에 맡기겠노라.˝ 스타인벡, 마르크스, 졸라, 헤밍웨이, 아인슈타인, 프루스트, H.G. 웰스, 하인리히 만과 토마스 만, 잭 런던,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포함한 수백 명의 저자들이 이와 비슷한 묘비명으로 경의를 받았다.

* * *

피노체트의 판단

예를 들면 1981년에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군사 정권은 칠레에서 『돈키호테』를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는 이 작품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호소와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공격이 담겨 있다는 판단에서였다(피노체트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시이소오 2016-03-11 23:33   좋아요 1 | URL
이토록 장문의 댓글을. ㅋ 감사합니다. 책을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니까요. 지배자들 입장에선 다루기가 어려워지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