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밤. 문학의 승리
p15. 프란츠 카프카는 “초조해하는 것은 죄다”라고 말했습니다.
p17. 이제 막 시단에 새로이 등장한 폴 발레리가 스승을 우러러보던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시작의 충고를 구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말라르메는 어떻게 답장을 썼을까요? “유일한 참된 충고자, 고독이 하는 말을 듣도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일화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도 듣지 말라는 얘깁니다. 누구의 ‘부하’도 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의 ‘명령’도 들어서는 안 됩니다.
p23. 질 들뢰즈의 강력한 말이 있습니다. “타락한 정보가 있는 게 아니라 정보 자체가 타락한 것이다”라는.
p24.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p25.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p31. 재현과 미. 그대는 아름다운 교양을 가진 인간을 찾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마치 아름다운 지방을 찾을 때처럼 역시 제한된 전망과 광경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전경적 인간들도 있다. 확실히 그들은 전경적인 지방처럼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다.
비트겐슈타인은 “현재를 좇는 자는 언젠가 현재에 따라잡힌다”라고 말했습니다만, 바로 현재를 좇으려고 하는 이런 초조함에서 절대적으로 잃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자기 ‘아래’로 조망하려고 하면 반드시 손끝에서 달아나는 것이 있습니다.
p32. 니체는 온갖 책에서 ‘회임, ’임신‘이라는 은유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책에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임신 상태보다 장중한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이 장중함 안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기대되는 것이 사상이든 행위든 – 우리는 모든 본질적인 완성에 대해 임신이라는 관계 이외의 관계를 갖지 않는다”라고.
임신, 회태, 수태. 이런 은유를 그는 반드시 ‘침묵’, ‘과묵’과 연결시켜 말합니다. 또는 휴식이 양생이라든가, 어쨌든 소요는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들뢰즈는 철학이란 개념concept의 창조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개념이란 무엇일가요? 그것은 애초에 ‘잉태된 것conceptus’이라는 뜻입니다. ‘개념으로 한다, 개념화한다.conception’라는 말도 ‘임신conceptio’이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마리아의 수태’는 ‘conceptio Mariae’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개념화conceptio에 의해 산출된 개념인 것입니다.
p33. 질 들뢰즈가 ‘쓰는 것’과 ‘여성이 되는 것’의 연결을 강조하며 “쓰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남자라는 것의 부끄러움이 아닐까”라고 묻는 건 이치에 맞는 것입니다.
p34. 그렇습니다. 철학이란, 그리고 쓰는 것이란 ‘여성이 되는 것’입니다.
p35. 그의 책을 읽었다기 보다 읽고 말았습니다. 읽고 만 이상, 거기에 그렇게 쓰여 있는 이상, 그 한 행이 아무래도 옳다고밖에 생각되지 않은 이상, 그 문구가 하얀 표면에 반짝반짝 검게 빛나 보이고 만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 행의 검은 글자, 그 빛에. 그러므로 저는 정보를 차단했습니다. 무지를 택하고, 어리석음을 택하고, 양자택일의 거부를 택하고, 안테나를 부러뜨리는 것을 택하고, 제한을 택했습니다.
p39. 그러나 그 벌것벗은 형태의 ‘읽기’라는 게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륀베델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이었습니다.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이. 그는 아마 그 텍스트를, 어렸을 때부터 품어온 동경과 사랑을 모조리 털어놓는 거울처럼 보고 말았을 겁니다. 거기에 비친 자신의 무의식을 그대로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미쳐버리고 말았겠지요. 아마도.
그러므로 이런 것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입니다.
왜 사람은 책을 성실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왜 책에 쓰여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왜 읽고서 옳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채 ‘정보’라는 필터를 꽂아 무해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일까요? 아시겠지요. 미쳐버리기 때문입니다.
p40. 카프카나 횔덜린이나 아르토의 책을 읽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알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 제 정신으로는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니체의 “나는 일개 다이너마트다”라는 대사를, 뭔가 과장되고 멋이나 부린 농담이나 그 비슷한 것쯤으로 흘려듣는 만만한 태도에 우리는 아무래도 너무 익숙해져버린 것 같습니다.
p42. 읽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읽어버리면 미쳐버리고 맙니다.
p42.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p43.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자,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p44.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p47. 프로이트가 10대 때부터 애독했던 작가에 루트비히 뵈르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수필에 <사흘 만에 독창적인 작가가 되는 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컨대 사흘간 방에 틀어박혀 생각한 것을 뭐든지 종이에 적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얼핏 보는 것보다 꽤 어려운 일입니다. 뭐든지, 라는 것은 아무리 부끄럽고 보기 흉한 일이라도, 불쾌한 일이라도, 무의하게 느껴지는 일이라도, 쓰기에 괴로운 일이라도 써야 하는 일이니까요. 무의식의 검열과 억압을 떨쳐내어 쓰고, 또 쓰고 마구 써대고 있으면 뭔가가 보이게 됩니다. 마치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반대입니다. 자동기술이 정신분석의 영향 하에 있고 그 정신분석이 뵈르네의 방법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p48. 리처드 엘먼의 방대한 전기에 확실히 쓰여 있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자신이 프로이트와 이름이 같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즉 ‘환희’또는 ‘향락’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가, 과장해서 말하자면 세계를 바꾼 것입니다. 아니, 과장이 아닙니다.
p50. 그런데 모더니즘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사람은 버지니아 울프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프로이트의 영어 표준판을 낸 제임스 스트레이치는 버지니아 울프에게 구혼한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리튼 스트레이치의 동생입니다. 또 표준판을 출판한 호가스 출판사는 울프 부부가 세운 출판사입니다.
p52. 최후에는 고독한 싸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 정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수필의 제목이 뭐일 것 같습니까? ‘그 책’이란 무슨 책이라고 생각합니까? <로빈슨 크루소>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라는 제목의 책에 대해 쓴 수필입니다. 여기서 그런 소년소녀용의 낡아빠진 책에 대해 뭘 그렇게 정색을 하느냐고 버지니아 울프에게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p53. 로빈슨은 해변에서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는 건가? 아니, 내 발자국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스꽝스럽게 자신의 발자국에 겁먹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음 날 또 그 장소에 가봤더니 발자국은 말끔히 지워져 있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이것은 ‘혼자 본 것은 사실 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p55. 다시 한 번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녀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시원시원하게 이런 말을 써버리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독서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것(독서) 자체가 즐거워서 그것(독서)을 하는 즐거움은 세상에 없는 걸까요? 목적 자체인 즐거움이라는 건 없는 걸까요? 독서는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요?
적어도 나는 때로 다음과 같은 꿈을 꿉니다. 최후 심판의 날 아침, 위대한 정복자, 법률가, 정치가 들이 그들의 보답 – 보석으로 꾸민 관, 월계관, 불멸의 대리석에 영원히 새겨진 이름 등-을 받으러 왔을 때 신은 우리가 옆구리에 책을 끼고 오는 것을 보시고 사도 베드로에게 얼굴을 돌리고 선망의 마음을 담아 이렇게 말하시겠지요. “자, 이 사람들은 보답이 필요 없어. 그들에게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람들은 책 읽는 걸 좋아하니까.”
p57. 애초에 문학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어로 되었던, 당초에 이것은 먼저 쓰는 것, 쓰는 방법 그리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한 문학적 학식 일반을 의미했습니다. 다음으로 어떤 문제에 대해 공간된 저작의 총체를 의미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문헌’이나 ‘서지’에 가깝겠지요.
예컨대 “페스트에 대해서는 방대한 ‘문학’이 있다”라는 용례가 보입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의미에서의 ‘문학’, 즉 아름답다거나 오락을 위한 언어예술 작품으로서의 ‘문학’이라는 의미는 18세기가 되어야 나타납니다. 17세기에 출현한 ‘미적인 문학’이라는 의미를 갖는 벨 레트르라는 어휘도 있습니다.
p57. 좀 더 분명하게 말하지요. ‘문학’이란 읽고 쓰는 기법 일반을 말했습니다.
p59. 라틴어의 용례를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음과 같은 것이 밝혀집니다. 즉 문학이란 “성전을 읽고, 성전을 편찬하고, 또 그것에 대한 주석을, 신학서를 쓰는 기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주 초기의 그리스도교에서 라틴어의 ‘문학’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성전을 읽고 쓰고 번역하고 편찬하는 기법을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법이나 규범, 제도와 관련된 텍스트를 둘러싼 기예도 문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에서 얼마나 협애한 것인지,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문학이라 부르는 것’이 실제로는 얼마나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p61. 그러나 역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광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문학이라 불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넓은 의미에서. 반 = 정보로서의 문학, 회태로서의 문학, 그리고 세계를 변혁하는 것으로서의 문학. 따라서 끝을 모르는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