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책엔 리베카 솔닛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와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중 3부 '떠나간자와 머무른자'와의 경합이다. 그냥 고민하지 말고 두 편 다 뽑을까. 그렇다면 표지 타이틀은 누구로? 결국은 원상태로군. 에라 모르겠다.
1.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세상 모든 곳의 소녀들에게
나는 당신 곁에 있습니다. 혼자라고 느끼는 밤에, 내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의심하거나 무시할 때, 내가 당신 곁에 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내가 매일 싸웠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싸움을 멈추지 마세요.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 당신은 침묵당하지 않을 겁니다.“
p75
책 전체를 통해 나는 위 문장이 뇌리에 남았다. (얼마나 뇌리에 남았냐면 이 문장을 인용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이 책을 재 대출했다.)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을 폭로했을 때도 위 문장을 들려주고 싶었다. 얼굴도 모르는 성폭행 피해자에게도 이 글을 들려주고 싶다. 성폭행은 있어서는 안 되는 범죄기도 하거니와 내가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이렇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전현상이랄까. 왜 가해자는 당당하고 피해자가 부끄러워해야 하지?? 정말로 화가 난다. 서지현 검사가 카메라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를 냈을지 감히 상상도 못 하겠다. 성폭행 피해자 분들도 어려운 일이긴 하겠지만 이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아닐까. 침묵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앞으로도 발생할 수 있는 또 다른 성폭력을 묵인, 방조하여 가해자를 도와줄 뿐이다. 비록 나는 당신을 위해 싸우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당신 곁에 있고 싶다.
2. 힐빌리의 노래. j.d 벤스
김훈, 홍기빈, 정혜윤, 빌 게이츠 등 국내외를 망라한 여러 기라상같은 작가 및 유명 인사들의 추천 글. 내가 뽑은 ‘2017년의 외국문학’ 후보기도 했다. 읽어보니 나의 착각. 작가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신의 이웃들을 위해 이 글을 쓴 게 아니다. 어디서 누굴 속이려 들어?? 성공한 사람들은 그렇게 읽었나? 빌 게이츠같은 이들은 어쩌면 책의 본질을 알고서도 금수저로 태어난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흙수저 성공 신화를 이용하려는 걸까?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과 비교해보면 이 책의 관점이 훤히 드러난다. 페란테의 시선으로 가난은 근본적으로 사회 제도의 문제이다. 반면 j.d 벤스는 가난한 이들은 그들이 게으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가 보기에 복지제도는 그들을 나태하게 만들어 더더욱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어쩜 그리 새누리당 정책과 똑같은지. 한마디로 흙수저 성공신화. 재수없는 놈.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렇다면 왜 끝까지 읽었는가? 재미는 있었기 때문이다. 재수없는 놈. 그러고보니 밤하늘 별만큼이나 많은 작가들 중 에인 랜드를 거들먹거렸지. 내가 가장 혐오하는 작가를 좋아하다니, 말 다했다.
3. 문학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도코 고지 외
‘베스트 셀러는 과연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사이토 미나코는 “그럼 제가 대신 읽어드리지요”하고 나서서 일본 베스트 셀러를 분석해 <취미는 독서>란 책을 썼다. 결론은? 읽어본 결과 사이토 미나코가 보기에 베스트 셀러는 그다지 읽을 가치가 없다.
<취미는 독서>와 비슷하게 이 책은 ‘과연 문학상 수상작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란 의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보지요.” 하고 여러 작가, 평론가 등 문학 관계자들이 실험에 참여한다. 결론은?
여기서 잠깐, 가즈오 이시구로 이야길 해볼까?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을 항상 읽을려고 했었다. 이번엔 한 번 읽어볼까, 할 즈음에 가즈오 이시구로가 덜컥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러자마자 너도 나도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더라. 청개구리 심보라그런지 그 이후엔 이시구로는 거들떠보기도 싫어졌다.
이 책에서 기대한 결론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읽어보니 문학상 수상작은 그다지 읽을 가치가 없네요” 하지만 웬걸. 결론은 정반대. ‘문학상 수상작은 꽤나 읽을만한다.’라는 게 공론. 그중에서도 맨부커상은 그 해 가장 작품성있는 소설에 상을 수여한다고. 이 책을 읽고서는 읽고 싶은 소설이 한 무더기 생기고 말았다. 리스트로 정리해야지. 가즈오 이시구로도 그만 미워하고 이제는 읽어야겠지.
4.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 헤드.
역시나 내가 뽑은 ‘2017년 외국 문학 후보작’ 중 하나다. 가끔 나는 내가 사이코 패스나 소시오 패스가 아닐까 의심하곤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아무리 봐도 사이코 패스는 아닌 걸로. 책을 읽다 여러 부분에서 눈물을 참아야 했는데, 스토리 라인과 상관없이 눈물을 자극한 문장이 있었다. 젠장, 핸폰 사진기로 문장을 찍어놨었는데 다 지워버렸네. 시저의 문장이었는데. 노예주제에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던.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 그는 그야말로 노예였다.”라는 문장. 어쩌면 그래서 나는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육체적으로 노예처럼 살아가지만 책을 읽지 않을 때, 나는 완전히, 완벽히 노예가 되고 만다. 노예가 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나는 책을 읽었던 거구나.
5. 소리내어 읽는 즐거움. 정여울.
참말로 좋은 문장들이 많다. 리스트로 정리해야겠다.
6. 독서만담. 박균호
저자와 알라딘에서 댓글도 주고받았건만. 죄송합니다. 저는 재미가 없었습니다.ㅠㅠ 워낙에 호평이 많아서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었지만 죄송하게도 끝까지 재미가 없더군요. ㅠㅠ 알라딘이 공산당도 아니고 한 명 정도는 재미없어도 되겠지요??
어릴 때부터 만담을 싫어해서였을까? 혹은 책을 소장하는데 아무런 관심도 없기 때문이어서일까. 물론 나 역시 한때는 책을 소장하는데 관심이 있었던 적이 있었더랬다. 장사 말아먹고 집을 날렸을 때, 책 버리느라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리어카로 수십 번을 왔다갔다하면서 책을 버렸었다. 아무리 못해도 오 천권은 버렸다. 책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서울에서 경기도로 이사를 와서는 고새 잊어버리고 또 책을 사 모았다. 그렇게 버렸건만 어느새 삼 천권이나 쌓였었다. 사업 말아먹고 이사 가야할 형편이 돼서 삼 천권을 친구에게 기증했다. 이후로는 책을 안 사기로 진짜 진짜 마음먹었다. 작가라면 모를까 독자 입장에서 꼭 소장해야 할 책은 그렇게 많지 않다. 책이란 모름지기 읽고 나면 쓰레기다. 짐이다. 굳이 사서 쟁여둘 필요없다.
7.그들은 책 어디에 밑줄을 긋는가. 도이 에이지
예상과는 달리 경제경영서, 자기 계발서에 국한된 독서 방법. 사업에 관심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읽을 필요 없다.
8.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 오쓰가 에이지.
오쓰가 에이지의 다른 책도 읽어봤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깨달음. 오쓰가 에이지는 천재다. 오쓰가 에이지는 하루키의 <양을 쫓는 모험>은 노골적으로 캠벨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의 이야기론을 차용했다고 주장한다.
“수많은 양이 풀을 뜯고 있는 녹지. 그것은 ‘양의 나라’이다.
양의 나라에 알 수 없는 여자가 서서 길을 가리키고 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p85
캠벨식 이야기 구조가 하루키 소설에서 어떻게 차용되어 쓰였는지 오스카 에이지가 제시하는 문장은 내 생각엔 소름끼칠 정도로 정확하다. 오쓰가 에이지는 ‘구조밖에 없는’ 하루키 소설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하루키의 세계적인 인기에 편승해 ‘엄청난 일본’이라고 떠들썩한 일본인들에 대해선 한심하게 생각한다. 하루키가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삼은 점에서 일본 우익들은 비난이 거셌고, 한편 한국에서는 우호적인 비평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오쓰가 에이즈는 쓴 소리를 일갈한다.
“‘피해자 의식’이란 것은 진짜 피해자의 마음과는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긍정을 위한 피해자일 뿐이니, 피해자 의식을 통해 자기주장을 하거나 아이텐티티를 가지는 사람하고만 동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피해자에게 공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군위안부 피해자 분들이나 아시아의 전쟁 피해자분들, 혹은 일본 국내의 피해자들, 마이너리티들에게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 역시도, 그런 피해자 의식이 결국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는 증명이 되는 것이죠.”
- p285
즉, 오스카 에이지는 하루키가 난징 대학살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하루키가 역사에 대한 비판 의식을 지녔다기 보다는 ‘죽이는 쪽의 윤리’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오스카 에이지의 비평에 공감 백만배다. 그러니까 하루키가 역사를 다룰 때 느껴지는 거리감의 원인은 ‘죽이는 입장에서의 피해자 의식’ 때문이었던 것.
9. 낯선 시선. 정희진
한국의 리베카 솔닛. 가끔씩은 문체마저 헷갈릴 때가 있다. 두 분 다 강단에 갇혀있지 않고, 약자와 소수자와의 연대에 기초한 페미니즘을 표방하기 때문은 아닐까.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글은 정희진 쌤의 글이 아니라 쌤의 수강생이었던 나정수님의 이메일 글이었다. 정희진 쌤은 다른 지역과 차별적인 광주의 불공정한 KTX 운행에 분통을 터트린다. 요금은 비싸지고 배차 시간은 길고 운행 시간은 옛날과 똑같이 3시간이다. 강의자 입장에서 광주 강의는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나정수 씨는 이런 메일을 보냈다.
“저는 비대한 서울이 블랙홀이 되어 한국 사회 전체의 발전을 저해하는데 KTX가 크게 일조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KTX를 제대로 소유하지 못한 광주나 전라도는 서울에 가고는 싶지만 가기가 힘들어서 아직은 지방의 병원, 상점 등을 이용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미국이 쿠바에 모든 비료, 원조를 끊었을 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쿠바가 유기농 법을 택하고 성공한 것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KTX를 제발 좀 늘려 달라고, 즉 서울 좀 빨리 가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저항이 아니라 우리는 안 가도 된다고, 서울에 안 가는 대신 우리도 서울과 같은 문화를 누리겠다고 할 때 진정한 서울 중심성에 대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것이 저의 패배적인 지역 사회의 자기 합리화인지 아니면 정말 이것이 진정한 열쇠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P298
마치 하루키가 ‘죽인자의 입장에서 피해자 의식’에 그쳤듯, 정희진 쌤이 제기한 불평등은 사실 ‘서울 사람의 피해자 의식’에 불과했다. 실제로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서 차별에 대한 해결책은 가해자측과는 다를 수 있으니까.
10.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엘레나 페란테
이 책의 가독성에 대해서 한 번 연구를 해볼까. 아직 마지막 편을 읽어보지 않아서 장담할 수는 없지만, 1권보다 2권이, 2권보다 3권이 훠~~얼~~씬 잘 읽힌다. 단발머리님의 감상에 따르자면 4권은 1,2,3 권을 합친 것보다 더 잘 읽힌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뻔하디 뻔한 이야긴데, 어째서 사정없이 몰입하게 되는 걸까. 사정없이 나의 폐부를 후벼 판 문장은 이렇다.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사실 누구나 다 무엇인가가 되기를 꿈꾸지 않나? 한가지만은 확실해 보인다. 나폴리 4부작은 우리가 잃어버렸던 순수, 열정, 욕망, 꿈을 환기시킨다. 내가 사랑한 그녀도 나를 좋아했었을까. 그때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무엇인가가 되고자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지?
페란테의 페미니즘도 내가 추구하는 페미니즘과 닿아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여성의 모든 행동과 생각과 논의와 꿈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은 그 무엇도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심오한 통찰은 정신력이 가장 약한 여성들을 지치게 했다. 이들은 과도한 자아성찰을 견디지 못하고 여성해방을 달성하려면 그저 남성을 자신의 삶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가부장제가 우선은 제도의 문제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페란테와 마찬가지로 벨 훅스나 리베카 솔닛도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고 남성을 내몬다고 해서 가부장제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 남성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 나 역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제 마지막 4부,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를 후딱 읽어야 할지, 최대한 지연시켜야 할지 고민이다. 얼른 읽고 싶지만, 다 읽고 나면 내 영혼이 황량해질 것 같아. 어찌 해야 할까? 흑.
아,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의 ‘미친 가독성’엔 분명 번역하신 김지우님의 공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 연로하신 번역자께서 번역했더라면 ‘이랬소, 저랬소’하면서 번역체 문장 때문에 골치를 썩혔을만한 소설임에 분명하다. 김지우님의 번역은 내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최고의 번역이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