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
버릇처럼 한 선배님을 찾아가곤 했었지.
기름기 없고 푸석한 내 몰골이
그 집의 유리창에 어른대곤 했는데,
예쁘지 못한 나는
이쁘게 단장된 그분의 방에 앉아
거실과 부엌과 이층과 대문 쪽으로
분주하게 오가는 그분의 옆얼굴을 훔쳐보거나
가끔 복도에 낭랑하게 울리는
그 가족들의 윤기 흐르는 웃음소리,
유독 굳건한 혈연으로 뭉쳐진 듯한
그 가족들의 아름다움에 밀려
초라하게 풀이 죽곤 했는데,
그분이 배려해 준
영양분 가득한 밥상을 대하면서
속으로 가만가만 젖곤 했는데,
파출부도 돌아간 후에
그 집의 대문을 쾅, 닫고 언덕을 내려올 땐
이유 없이 쏟아지던 눈물.
혼자서 건너는 융융한 삼십대
---------------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을 보고 나오는데
'어머님과 호박국이 그리운 날이면'으로 시작되는 고정희 시인의 시 <객지>와
나의 친구가 생각났다.
2, 3개월 전 우리는 2박 3일 제주도 겨울여행을 함께했다.
하룬가 이틀 수업을 빼먹고 딸아이까지 따라붙은 여행이었는데
이상하게 뭔가 자꾸 삐그덕거렸고 결국 마지막날 밤에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형식적인 화해를 하고 헤어지는 공항에서
우연히 그녀의 수첩을 봤다.
조그맣게 오린 고정희 시인의 사진이 수첩 맨 앞장에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