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4월말 가나자와에 있는 윤봉길의사 암장지에 다녀왔다. 

(가나자와 다녀온 글) ☞ https://blog.aladin.co.kr/rainaroma/10851563

윤봉길의사의 유해가 모셔진 효창공원 삼의사묘에 6월초 다녀왔다. 


삼의사묘에 대한 설명은 <윤봉길>에 잘 설명이 되어 있다. 


유해발굴과 봉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3월에 유해봉환단에 의해 추진되었다. ..  유해봉환단은 동경에 있던 박열을 비롯하여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본한인건국청년동맹의 중심인물인 이강훈과 서성한 등에 의해 조직되었다. 179-180쪽


이들 유골봉환단은 윤봉길 · 이봉창 · 백정기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하기로 하고 묘지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봉창 의사는 1932 년 10 월 10 일 동경의 이치 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고 사이타마현 우라와 시에 있는 우라와 형무소에 매장 되었다 . 봉환단은 우라와 형무소에서 교회사로 일했던 일본인을 찾아 이봉창의사가 우라와 형무소의 부속 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유골을 수습할 수 있었다 . 백정기 의사의 유골은 이강훈이 같은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윤봉길의사의 유골을 찾아야 하는데 , 장소를 확인할 수 없었다 . 

서상한과 이강훈을 비롯한 네 명의 임시 정부 발굴단이 가나자와에 도착한 것은 3 월 2 일 오전 10 시경 이었다 . 3 월 3 일 부터 위치를 고증 받기 시작 하여 육군 묘지구내에 묻혔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

....

9 시반 부터 시작한 유골 수습이 4 시간 반 이나 걸렸다 한다 . 유골은 모두 201개 수습 되었는데 , 7 개가 모자랐다면서 이는 손뼈 등이 고문으로 상하여 13 년의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소나무 뿌리 속에서 없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 유골을 수습한 후 ‘순국의사 윤봉길 지구‘ 라고 쓰여진 새관에 옮겼다 . 유해는 가나자와 재일본 조선인 연맹 본부 사무실에 옮겨 졌다가 3월 8일 아침 가나자와역을 떠나 다음 날 아침 도쿄의 우애노역에 도착하였다 . .... 윤의사의 유해가 우에노역에 도착하자 이미 사무실에 안치되어있던 이봉창 ,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나가 윤의사 의 유해를 맞이 했다 . 181-1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월말 일본 가나자와에 다녀왔다. 쿠로베 알펜루트를 다녀온 후 다음날 가나자와 여정은 윤봉길 의사의 암장지로 시작했다. 윤봉길의사가 의거를 거행했던 당시 상해 주력부대가 가나자와이다 보니 가나자와까지 압송했다. (사형집행이 연기되며 가나자와까지 온 점도 있다.)

윤봉길 의사는 사형집행 후 묘역 없이 매장됐다. 매장된 곳은 공동묘지와 이시가와현 군 전사자 묘역 사이 길이었다. 일본인들이 유해를 밟고 다니게 했다고 해석된다. 

일단 윤봉길의사를 다룬 두 권의 책에서 관련된 부분을 발췌한다. 

 발굴 4 일째 되던 3 월 6 일 박성조가 매장할 때 독경을 했다는 각존원의 야마모토 료도라는 여승을 데리고 왔다 . 여승은 헌병이 가리키던 곳 보다 더 육군 묘지 가까운 통로를 가리키면서 그곳에 북침으로 매장했다고 알려 주었다 . 그곳은 며칠 동안 발굴단이 휴식처로 사용했던 장소로 사람들이 다니는 길 한복판였다 . 박동조가 소금을 가지고 와서 일대를 깨끗이 하고 술을 따르는 의식을 마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 25센티미터 정도 파니 지층이 달랐다 . 다시 60 센티를 파자 십자가 형태의 나무 틀이 나오고 , 구두가 나오고 관 뚜껑이 보였다 . 뚜껑 을 열었다 . 8 푼 두께의 관이었다 . 함성이 울렸고 전원이 모여 손으로 흙을 파내니 '홈스팡'의 상의에는 피의 흔적이 역력 했다 . 조각 조각 된 옷을 제쳐 놓으니 나무뿌리가 꽉 들어차 있으나 유골이 나타났다 . 모두 일손을 멈추고 묵념을 올렸다 . 당시 가나자와 외과 대학 학생 였던 주정균은 이건우와 함께 들어가 맨손으로 정중히 뼈 하나 하나를 모았다 . 머리 부분에 탄흔이 있는 것을 보고 흐느끼는 대원도 있었다. 주정균의 육성 증언에 의하면 , 이마에 총상이 있었고 후두부에 구멍이 있었으며 , 옷에 피가 위에서 아래까지 묻어 있었다고 하였다 . 그는 수습된 뼈 를 정성 을 다하여 알콜로 소독 하였다 . 9 시반 부터 시작한 유골 수습이 4시간 반이나 걸렸다 한다 . 유골 은 모두 201 개 수습 되었는데 , 7 개가 모자랐다면서 이는 손뼈 등이 고문으로 상하여 13 년의 세월 을 견디지 못하고 소나무 뿌리 속에서 없어 진 것이라고 하였다 . 유골을 수습한 후 '순국의사윤봉길지구‘ 라고 쓰여진 새관에 옮겼다 . 


유해는 가나자와 재일본조선인 연맹 본부 사무실에 옮겨 졌다가 3 월 8 일 아침 가나자와역 을 떠나 다음 날 아침 도쿄의 우에노 역에 도착하였다 . 먼저 발굴한 이봉창 , 백정기 의사의 유해는 동경 의 간다에 있는 오키쿠배규에 있는 전 일본 육군 대학 건물내의 신조선 건설 동맹 사무실에 모셔져 있었다 (자유 신문 , 1946 년 4월 3일). 윤의사의 유해가 우에노 역에 도착하자 이미 사무실에 안치되어 있던 이봉창 ,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앞세우고 나가 윤의사의 유해를 맞이 했다 . (182-183쪽)



 성지로 조성 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자와 일대에 살고 있던 재일 동포들과 양심적인 일본인 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힘 입은 바 크다 . 박동조 , 박성조 , 박인조 선생 과 김진수님,장태화 님의 암장지 발굴과 조성 사업 , 그리고 가나자와 지역의 박현택 회장 , 암장지를 영구 임대 할 수 있도 록 행정적으로 지원해 준 야마데 전 가나자와 시장 , 다무라 교수 , 한자와 교수 , 고 히라타 시의원 , 모리모토 도의원 , 모리 시의원 , 아마 모토 시의원 , 전 후루카와 학산시 의 원 , 야마구치 학산시의원 등 많은 분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양심적 일본인의 마음 이 합쳐져 서로 손을 굳세게 잡은 결과다 . 윤봉길 의사를 통해 한 · 일 양국의 국민들은 서로 마음을 열고 하나가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54






* 윤봉길 의사 암장지 가는 길이다.구글맵에서 윤봉길의사 암장지가 검색된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오른편에 묘지석들이 끝나고 공원이 보일때 좌측으로 보이는 샛길로 들어가면 된다.


샛길로 들어서면 다음과 같은 공원묘지 표지석이 나온다.


샛길로 들어서면 바로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안내판이 나온다.

윤의사 순국비는 오른쪽으로 올라가고, 암장지는 정면 방향이다.


조금 가다보면 왼쪽으로 공동묘지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이시가와현 군 전사자 묘역이 있다.

정면에 있는 좁은 길로 직진하면 된다.


조금만 가면 오른편에 윤봉길의사 암장지가 보인다.



윤봉길 의사 암장지.


자료고를 열었다. 빨간색 수첩이 방명록이다. 



며칠전에 관련기사가 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9-05-12 16: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윤봉길의사의 업적이 항일 독립 투쟁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우리가 너무 잊고 지내왔음을 느끼게 됩니다... 양재역 매헌윤봉길 기념관을 찾는 이도 많지 않은 요즈음 우향님께서 의미있는 방문을 하셨습니다^^:)

雨香 2019-05-12 22:43   좋아요 2 | URL
가나자와에 윤봉길의사의 암장지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윤봉길 전기 두 권을 읽고 다른 자료들을 찾으며 윤봉길 의사의 역할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됐습니다.
올해가 1919년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이라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려고 하고 있습니다. 역사저널 그날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는데, 이 기회에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많은 연구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해 전 일본에서 이런 사진을 봤다. 급하게 지나가느라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했다. 우연하게 이곳이 시라카와고白川郷 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난 연말 이곳에 다녀왔다. 

3년 전 겨울, 남자친구는 이 세상에 없는 듯한 마을 사진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뽀족한 지붕을 한 나무집 서른 채 정도가 산 속에 모여 있었다. 지붕 위에는 30센티미터도 훨씬 넘어 보이는 두께의 눈이 쌓여 있었다. 남자친구는 여기에 함께 가자고 했다. “이거 그림이야 사진이야? 이런 데가 있단 말이에요?” 나는 이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135쪽, 오후를 찾아요)

  

원래 아래와 같은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인데, 돌아다니기 힘들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다. 


실체를 알게 된 순간 이기도 했다 . 단순히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된 예쁜 마을이라 생각했는데 사진을 통해 본 마을은 그 이상이었다 . 벚꽃속에 파묻힌 시라카와고의 봄과 모내기가 한창인 초여름 , 마을 사람 모두가 나서서 벼를 수확하는 가을 , 눈 덮인 겨울 , 그리고 축제인 도부로쿠 마쓰리와 전통 혼례를 올리는 예쁜 신부의 모습 등 시라카와고의 사계절과 이 지역의 각종 행사를 담은 사진들을 모두 보자면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 았다 . 그중에서 나의 시선을 사로 잡은 사진은 시라카와고의 겨울 풍경이었다 . 뾰족한 장식 지붕에 두껍게 쌓인 하얀 눈과 노란 불빛이 박힌 창문 이곳의 겨울 풍경은 현실 세계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동화 속의 한 장면이었다 . (29쪽)

드디어 2008 년 1 월 1 일 새해 아침이 밝았다 . .... 여전히 눈이 내리는 새해 첫날 , 여관 방 창밖을 보니 연못 주변의 소나무 가지는 금세라도 부러 질 것 같았고 , 두껍게 쌓인 눈은 지붕에서 흘러 떨어지며 육중한 소리를 내 깜짝 깜짝 놀라게 했다 . 아 , 오늘도 눈이구나 . 오랄 때는 안 오고 그만 왔으면 할 땐 멈추지 않는 것이 눈이고 만남이고 인생이었다 . (39쪽, 아시아시골여행)

시라카와고의 가옥은 갓쇼즈쿠리合掌造라 불린다. 합장한 손과 비슷한 모양이라는 뜻인데, 눈이 많이 오는 기후 때문이다. 고립된 지역적 특징 때문에 오랫동안 이런 전통 가옥이 남아있다.

시라카와의 갓쇼즈쿠리는 에도시대 후기부터 메이지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의 옛 정취와 문화를 접해 볼 서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 정부나 관에서도 일본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취지와 함께, 현재 생활하고 있는 주민들이 불편하지 않게 지원울 아끼지 않고 있다. 갓쇼즈쿠리라는 독특한 지붕 양식은 '유이(結)‘ 에 의해 공동으로 지붕을 올리고, 30-40년 마다 한 번씩 이엉을 교체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가족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유지할 수가 없다 .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마음과 기술을 합해 옛 방식 그대로 독특한 민가를 세월로부터 지키고 있다 . 
....

또한 갓쇼즈쿠리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의 가옥 형태로 겨우내 내린 눈이 지붕의 볏집 위에서 얼어 붙고 그 위에 계속 눈이 쌓이기 때문에 눈을 치우지 않으면 하중을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관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 시라카와코 갓쇼의 진수를 보려면 오기마치 진자마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와다가에도 들러 보자 . 이곳은 시라카와 최대 규모의 갓쇼즈 쿠리 가옥으로 , 300년 전부터 촌장이나 관청의 관리를 지낸 명문가다 현재는 국가 중요 문화재 로 지정돼 당시의 정취가 그대로 보존 되어 있다 (238,239쪽 일본소도시여행)

4월말 이곳을 다시 찾았다. 봄의 시라카와고가 보고 싶어서. 그러나 4월말 5월초는 일본의 연휴, 골든위크다. 시라카와고IC에서 나오자마자 차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남은 길 4km.

다음엔 아무것도 없는 평일에 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핸들을 돌렸다. 


시라카와고에 대한 동영상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래 걸어서 세계속으로는 시라카와고 주변에 있는 또 하나의 갓쇼즈쿠리다. 집들의 규모에서는 시라카와고는 많은 차이가 나지만 가옥 구조는 동영상과 유사하다. 


아쉽게도 시라카와고를 별도로 다룬 책을 찾기는 힘들다. 단순한 에피소드를 다루거나 여러 관광지 중 하나의 꼭지로 넘어갈 뿐이다. 물론 시라카와고만을 다루기는 힘들겠지만, 주변지역을 엮어서(가나자와+시라카와고, 시라카와고+도야마) 책을 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단순히 여기에서 뭐 했다. 어느 지점에서 사진 찍으면 좋다 이런 블로그성 내용 말고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키나와에는 1월말 2월초 벚꽃이 필 무렵 다녀왔다. 2013년에 이어 두번째




(이전 패이퍼에도 남겼듯이) 불과 서른시간 전에 예약했기 때문에 계획없이 호텔을 중심으로 동선을 짰다. 


  
* 왼쪽 동선이 2013년, 오른쪽 동선이 2019년

오키나와를 한번 더 다녀올 생각인데, 그 때는 남부를 둘러볼 생각이다. 남부에도 볼 만한 자연경관이 있고, 거기에 더해 평화공원 등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공간이 있다. 

지금까지는 다소 오키나와를 다룬 가벼운 책을 읽었는데, 그 때는 조금 무거운 내용을 읽을 생각이다. 

마침 시사인 에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다. <두 섬>이라는 책을 펴낸 이명원 평론가와 여행작가 전명윤의 글이다. 

환타(전명윤) :<두 섬>에도 나오지만 당시 오키나와 전쟁에서 조선인 1만명이 죽었다(당시 오키나와에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1만500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 남부에 있는 평화공원 위령비에 보면 대한민국(82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64명) 출신의 이름이 분리되어 새겨져 있다. 사망자에 비해 인원이 너무 적었다. 단순히 유족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기록하는 걸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더라.


이명원:자민당 계열 지사가 등장한 뒤 예산 지원을 끊어버렸다. 보수화된 오키나와 정부가 추가 발굴 작업을 지원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할 때도 일본군은 유족과 시신의 DNA를 비교해서 발굴했지만, 조선인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보상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에 아예 원천 배제했다. 그래서 대다수 조선인은 실종자가 되어 있다.


환타:오키나와 평화공원에 가면 미군에 쫓기던 사람들이 집단 자결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마치 삼단뛰기 하듯 뛰어내린다.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은 그걸 보고 운다. 당시 일본 군부가 미군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오키나와인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나이 든 오키나와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본 본토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한국인의 그것보다 더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해했다.


이명원:오키나와 평화공원의 딜레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다 섞여서 새겨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희생자가 되면서 역사적 맥락이 휘발됐다. 원래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총으로 겨누는 조형물이 있었는데, 자민당 쪽에서 (총구 방향을) 바꾸도록 했다. 오키나와에 있던 조선인 문제는 아직 조사할 게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 산하의 전쟁자료실에 오키나와에 대한 웬만한 자료가 다 있다. 당시 일본 군부가 오키나와에서 전쟁 증거를 제대로 소각하지 못했다. 우리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사실을 파헤칠 수 있다.


환타:나는 가이드북 작가치고는 역사적 배경에 분량을 많이 할애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기존 가이드북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어떤 가이드북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은 소개하지 않으면서 일본 우파들이 좋아하는 히메유리 탑(일본 전쟁에 앞장선 학생을 기리는 탑)은 소개해놓았다.


http://v.media.daum.net/v/20171016085713830


(시사인 해당 페이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 페이퍼에서 오키나와 미군 비행장을 잠깐 이야기했다. 집밥이라 할 만한 식사를 했는데, 후텐마비행장 근처.

후텐마비행장은 이전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이 반갑지만은 않다. 예정지가 듀공의 서식지로 알려진 헤노코 지역인데, 이로 인한 갈등이 만만치 않다. 

듀공 , 소송 을 걸다 


고래 상어로 유명한 추라우미 수족관을 돌아 다니다 매너티 를 만났습니다 매너티는 물에 사는 포유동물로 귀여운 풍선 같이 생겼습니다. 느릿 느릿 부드럽게 물을 유영 다 가슴 지느러미 - 실은 앞발 이에요 - 로 물에 뜬 양상추잎을 잡고 입으로 뜯어 먹기도 합니다 


매너티 와 비슷하게 생겨 옛날 선원 들이 매너티 와 함께 인어로 착각했다는 듀공이란 동물도 있습니다. 오키나와에도 인어가 있었다면 지금 이 수조 안의 아메리칸 매너티가 아니라 듀공이 그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듀공은 실제로 오키나와에 살고 있는 일본의 천연기념물 국제 멸종 위기종이거든요. 그리고 그 오키나와 의 듀공이 미국의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 지도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이 현재 그들의 해병대 비행장인 후텐마의 대체 부지를 헤노코 앞바다로 계획을 정하면서 듀공의 서식 지이자 희귀 생물의 보고 , 아름다운 산호초 바다인 헤노코를 지키려는 오키나와 현민들의 저항에 부딪힌 것 입니다.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이던 럼즈펠드와 듀공의 대결이 됐던 소송 은 듀공의 승리 로 끝난 것처럼 보였지만 대치된 상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익 소송에 관련된 기사중에서 가고시마 대학 평화학의 키무라 아키라 교수의 인터뷰 중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봅니다. 


"오키나와 는 미국과 일본 본토의 이중 식민지입니다 . 미국은 일본 본토와 불평등한  관계 를 맺고 , 다시 일본 본토는 오키나와를 국내 식민지로 삼는 것 입니다." 


여전히 오키나와의 인어 듀공은 미국과 일본 정부 오키나와 사이 의 불편한 관계 를 나타내는 안타까움의 상징이 되고 있습 니다 아름다운 류큐의 바다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듀공의 사존 매너티를 바라보는 여행자의 마음도 안타깝고 복잡 할 수밖 에 없습니다.( 231-233쪽, 다 잘될거라고 오키나와)



별 기대없이 읽었던 책 <다 잘될거라고>는 문득문득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 북플에서 작성 후 PC에서 수정

  

(추라우미 수족관에서 바라본 전경. 좌측 앞에 보이는 낮은 건물이 매너티 특별관으로 기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