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얼마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베르나르 뷔페>전에 다녀왔다. 전시회를 갈 때면 기존의 알고 있던 부분에서 감동받기도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작가를 만났을 때의 생소함과 설레임 또한 잊지 못한다. <뷔페>는 그렇게 언젠가 한번 마주쳤고, 그 이름을 기억했던 작가다. (국내 전시가 아닐수도 있다. 최근에는 가까운 곳으로 가지만 미국이나 유럽을 갈 때면 항상 그 지역의 유명 미술관을 들르곤 한다. 아니면 일본 미술관일수도)


일단 3년 전에 있었던 샤갈, 달리 , 뷔페전을 기억한다. 샤갈과 달리라는 거장들과 나란히 이름을 건 뷔페는 누구일까라는 궁금점과 함께 전시회에서의 당혹감과 신선함. 뷔페라는 이름 하나는 분명히 기억했다. 


그리고 운좋게 도슨트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 전시는 도슨트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던 전시다. 도슨트가 안내한 뷔페는 '50년대 피카소보다 더 유명했던 그러나 철저하게 사라진' 뷔페를 설명했다. 적지 않은 미술책을 가지고 있음에도 뷔폐를 최근에야(아마도 10년내) 알게 되었고, 당췌 책 한권 구할 수 없는 뷔페에 대한 실마리를 도슨트가 풀어주었다. 


평론가들의 눈 밖에 나고, 정치적으로(추상화가를 키우려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매장된, 그래서 제대로 된 정보 조차 찾기힘들었던 뷔페. 최근 그 뷔페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몇 년이 지나면 그에 대한 제대로 된 책 몇 권을 손에 들 수 있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도록으로 마음을 달랠 수 밖에



* <베르나르 뷔페> 전은 훌륭하다. 원화 몇 점에 데생과 판화로 채워져 있는 대가의 이름이 붙은 전시와 달리 이 전시는 모든 그림이 원화다. 그리고 시대별로 구성되어 있어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알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oolcat329 2019-08-19 2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사진으로 봤는데 첫눈에 반했습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집에 걸어두고 싶을 정도로 끌리더군요.

雨香 2019-08-19 23:01   좋아요 0 | URL
네, 굉장히 인상적인 작가임에 틀립없습니다. ^^
 

자끄 루시에 트리오 Jacques Loussier Trio의 리더인 자끄 루시에 타계 소식이다. 


'바흐 음악의 재즈적 해석' 佛 피아니스트 자크 루시에 별세


마음이 번잡해서인지 뒤늦게 페이스북을 통해 타계 소식을 들었다. 

자끄 루시에 하면 바로 떠오르는 건 바로 바흐Bach이다. Bach의 음악을 재즈로 해석하는데 천착했던 그의 초중기 활동은 바흐였다.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 골드베르크 변주곡 Goldberg Variations는 클래식계에도 호평을 받는 앨범중에 하나이다. 

* 물론 여기에는 그가 클래식 전공자라는 것도 한 몫 하지 않나 싶다. 키스 자렛 Keith Jarrett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클래식계에서는 많은 혹평이 따라다닌다. 


음악 매니아라기는 그렇지만 90년대에는 재즈에 관심이 많았다. 초반에는 스윙감 넘치는 재즈나 마일스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빌리 할러데이와 같이 메인스트림을 따라 듣곤 했다. 그러면서 Cool Jazz나 Acid Jazz까지 찾아 듣다 클래식을 재즈로 연주한 앨범을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 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Eugene Cicero와 Jacques Loussier에 이르러서는 푹 빠져들어 버렸다. 


요즘은 클래식을 듣는 시간이 좀 많은데, 재즈에서 클래식으로의 문을 자끄 루시에가 친절하게 열어 주었다. 


자끄 루시에의 CD를 찾아봤다. 일단 10개를 찾았다. 그런데 기억을 짜내고 짜내보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있었고, 헨델도 있었다. 게다가 사티의 짐노페디는 어디 갔노. Play Bach라는 제목의 앨범도 샀던 기억이 있고, 대충 15개 정도를 구매한 듯 싶다. 초장기 Jacuqes Loussier CD는 광화문 교보 Hottracks나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알라딘과 합병한 음반 사이트 PHONO였다. 


자끄 루시에의 앨범을 보면 우선 Goldberg 변주곡에는 엄지를 치켜 세울 수 밖에 없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경우엔 글렌 굴드의 Glenn Gould의 55년판, 81년판에 안드레 쉬프 버전까지 4개의 CD를 가지고 있다.) 개인 취향이지만 Play Debussy 앨범과 Satie : Gymnopedies/Gnossiennes는 자주 듣는 편이다. 베토벤 7번 교향곡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 Beethoven : Allegretto Fro Symphony No.7 Theme & Variations는 색다른 느낌이다. 


자끄 루시에가 연주하는 라벨의 볼레로 Ravel's Bolero와 비발디 사계 Vivaldi - The Four Seasons New Jazz Arragement 는 뜬금없이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쇼핑의 녹턴은 조금 다른 느낌 Impressions on Chopin's Nocturnes


(책은 3.1운동을 기념으로 1919년을 전후로 읽고 있는 중이고) 음악은 작년부터 러시아를 주제 삼아 차이코프스키를 관심있게 듣고 있는데, 잠시 별세한 이의 명복을 빌며 그의 앨범들을 찾아들어 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니메이션 <에델과 어니스트>는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에델이고, 남자가 어니스트이다. 두명의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밋밋하다. 


         


그런데 그 밋밋한게 평양냉면처럼, 막 쪄낸 두부처럼, 도토리 묵 처럼 맛이 없는데 맛이 있듯 매력이 있다. 

밋밋하기만 한데, 흐뭇하면서도 마음 한켠 이야기 하기 힘든 감정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복받쳐 오르진 않는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스토리를 알고 봐도 괜찮은 영화다. 


우유배달부 어니스트와 귀족집안의 메이드 에델이 만나 기족을 꾸린다. 둘은 레이먼드라는 아이를 하나 낳는데 얼마 되지 않아 독일의 침공으로 영국도 전쟁을 하게된다. 전쟁 중 어니스트는 소방대원으로 징집된다.

항상 유쾌한 어니스트가 침울한 장면이 세 번 정도 나오는데 그 중에 두번이 전쟁이다. 전투 중 그는 소방활동을 하는데 삶의 의지를 잃은 듯한 그는 폭격으로 아이들이 산산히 찢겨졌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번은 전쟁이 끝나고 주민들이 모여 파티를 하던 중 유쾌한 그 답게 춤을 추머 즐기다 한켠에 서있기만 하는 친구에게 같이 즐기자고 한다. 그 친구는 ‘나는 아들을 잃었잖나’라는 말에 그는 곧 사과하며 얼굴이 어두어진다. 전쟁을 겪어낸 부모를 그림과 동시에 전쟁이 남긴 상처도 함께 무심히 보여준다. 


에델과 어니스트의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는 장면도 재밌다. 노동당이 집권했는데 전쟁때보다 못하다는 걸 지적하는 에델과 토리당이 집권하니 더 나빠졌다며 에델을 놀라는 어니스트의 모습은 한편으로 5-60년대 영국의 정치적 변동과 경제적 상황을 보여준다. 


에델은 정치성향 만큼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도 크다. 아들이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미술학교에 간다고 했을 때 실망한다. 아들이 결혼하겠다고 데려온 진에 대해서도 맘에 들어하지 않지만, 며느리가 조현병으로 애를 낳기 힘들다는 말에 (잘은 모르지만) 아들의 손을 꼭 잡아준다. 물론 당시 히피문화를 대변하는 아들의 장발에 아들만 보면 빗을 꺼내는 완고한 엄마이기도 하다. 


어니스트는 항상 유쾌하다. 그리고 항상 에델과 아들 옆에서 꿋꿋하게 서 있다. 평생을 우유배달일을 했지만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을 부러워 하지 않는다. (신문을 보다 자신의 주급이 노동자 평균 보다 낮다는 사실과 아들의 일당이 자신의 주급보다 많다는 사실에 짜증을 내는 장면이 있긴 하다)


20세기를 관통하는 사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독일과의 긴장관계에서 전쟁 그리고 노동당과 토리당의 정권교체에서 60년대 히피 문화까지 에델과 어니스트의 주변에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삶에 있어서도(미시사라고 할 수 있겠지만) 빨래방이 생기고, 텔레비전이 들어오고, 인간이 달에 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집안에 전화기가 놓이고, 자신들만의 승용차가 생기는 장면까지 시대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전쟁중 레이몬드는 당시 정부 정책에 따라 시골로 피신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배나무 씨에서 틔운 싹을 뒷마당에 심는다. 그리고 에델의 말처럼 집처럼 커진 배나무를 바라보는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부부의 아들로 부부의 행복이었던 소년에서 장발의 청년이었던 레이몬드는 그림책 스노우맨(국내엔 눈사람 아저씨로 출간)의 저자이다. 노년에 부모를 기억하고자 동명의 그래픽 노블을 출간했다. 그렇게 20세기 중반을 살아낸 부모, 그리고 그 시대를 오롯이 버텨낸 서민들에 대한 헌사이다. 


* 애니는 단순한 스토리로도 좋지만, 이야기 자체가 당시 시대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변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2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영국을 폭격했을 때 영국 정부는 어린이들을 시골로 보내기도 했고, 부모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구세군에 연락해야 겠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주요 유품을 제외하곤 구세군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애니 <너의 이름은> 더빙판이 개봉하면서, 신카이 마코토의 소설 세편을 연달아 읽었다. (7월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소설로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지만, 묘사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데 감탄하며 그 묘사를 읽기 위해 소설을 집어 들었다. 


애니 <너의 이름은>은 많은 이들이 소개하고, 추천하였기 때문에 굳이 애니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달 필요는 없다. 

커뮤니티 등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교하면 신카이 마코토를 비하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우주, 세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가 분명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신카이 마코토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고, 70년대생인 신카이 마코토는 끝물을 잠깐 맛봤을 뿐, 잃어버린 20년을 실감한 세대이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시대에 세상에 나온 청년세대와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너의 이름은>을 보는 순간 동일본 대지진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지진 전 센다이를 다녀온 나는 지진 뉴스를 가슴아프게 봤고,기억속에 남아있다. <너의 이름은>을 보면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잃은 이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했다.) 예술가로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한 신카이 마코토를 다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신카이 마코토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애니가 최선이다. 


소설과 영화는 스토리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화자는 조금 다르다. 소설은 타키와 미츠하의 1인칭, 즉 두 사람의 시점만으로 그려 진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한편 영화는 애초에 3인칭, 즉 카메라가 비추는 세계다. 그러므로 타키와 미츠하 이외의 인물도 포함해, 말 그대로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많다.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즐겨주기를 바라지만 이처럼 미디어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상호보완적이 되었다. 

소설은 혼자서 쓰지만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 쳐 완성되는 건축물이다. ... 이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형태가가 장 잘 어울린다'고 썼는데, 그것은 영화가 앞서 말한 수많은 분들의 재능이 모여 맺어진 화려한 결정체이기 때문이 다. 영화는 개인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도 나는 결국 이 소설을 썼다. 

어느 순간부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어딘가에 타키나 미츠하와 같은 소년소녀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이 이야기는 물론 판타지지 만 그래도 어딘가에 그들과 비슷한 경험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다.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를 잃고 말았지만 발버둥 치자고 결심한 사람 아직 만나지 못한 무엇 인기에, 언젠가 반드시 만날 것이라 믿으며 계속 손을 뻗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마음은 영화의 화려함과는 다른 절실함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느꼈기에 나는 이 책을 썼다. (287-289쪽 ,작자후기)


* 신카이 마코토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나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을 보면 그의 작품세계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은 감독이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올 봄 도쿄에 다녀왔다. 마지막날 숙소는 운좋게 도쿄도청 근처였다. 마지막날 아침 일찍 혼자 숙소를 나와 가까운 곳에 있는 <초속5cm>와 <너의 이름은>의 장소를 산책겸 돌아다녔다. 성인이 된 타카키가 밤에 찾아든 편의점에서 캔 커피를 하나 사들고 나왔다. 아쉽게도 ampm이던 편의점은 패밀리마트로 바뀌어 있었다. 



  



<언어의 정원>이 비와 초록빛 나무, 호수를 아름답게 그려냈고, <너의 이름은>이 단풍을 아름답게 그려냈다면, <초속5센티미터>는 단연 눈내리는 도시의 밤과 벚꽃내리는 광경이 압권이다. 

그리고 밤 눈길을 달리는 열차의 장면도. 



<언어의 정원>에서도 그랬지만, <초속5센티미터>역시 다시 보면서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이 무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신카이 마코토가 젊은 사토리 세대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초속5센티미터>는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십대 초반에서 십대 중반, 그리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젊은 청년


수평선 약간 위쪽에 걸려 있는 아침 태양 때문에 주위의 수면이 눈부시게 빛났다 .하늘은 흠잡을 곳 없이 푸르렀고 살갗을 적시는 물은 따뜻했으며 몸은 몹시 가벼웠다. 나는 지금 빛나는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다. 이런 때는 내가 꼭 굉장히 특별한 존재처럼 느껴져서 언제나 살짝 행복한 기분에 빠지고 만다. 사실은 지금 많은 문 제를 끌어안고 있음에도. 

애초에 이런 식으로 천하태평에 금세 행복하단 생각을 해버리는 것이 모든 문제의 원인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나는 신나게 다음 파도를 향해 팔을 젓기 시작했다. 아침 바다는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서서히 높아지는 파도의 매끄러운 움직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색채 나는 그것들에 정신을 빼앗기면서 내 몸을 실은 보드를 파도의 페이스에 밀어 넣으려 했다. 몸이 들려 올라가는 부력을 느끼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어느새 나는 균형을 잃고 파도 밑 으로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또 실패다 코에 바닷물 이 들어가눈안쪽이 찡했다. 


첫번째 문제, 지난 반년 동안 단 한 번도 파도 위에 서지 못했다. (73쪽)


하늘도 바다도 같은 색이라 나는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바다 쪽으로 더 나가기 위해 패들링과 돌핀 스루를 반복하는 사이에 점점 마음과 몸의 경계, 몸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져 간다. 바다를 향해 패들링을 하면서 다가오는 파도의 모양과 거리 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계산해보고 안 될 것 같다는 생 각이 들면 보드를 잡고 몸을 \으로 밀어 넣어 파도를통과했다. 될 것 같은 파도가 오면 턴해서 파도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보드가 파도에 들려 올라가는 부력이 느껴진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하면서 나는 짜릿함을 느낀다. 파도의 페이스를 보드가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나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두 발로 보드를 디딘 후 중심을 올린다 일어서려 한다. 눈높이가 확 올라가 면서 세상이 그 비밀스러운 광채를 보여준다. 

그렇지만 딱 한순간뿐이다. 다음 순간, 나는 어김없이 파도에 빠진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세상이 나를 거부하는 것은 아님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멀리 떨어져서 본다면, 가령 언니의 시선으로 본다면 나는 이 빛나는 바다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바다를 항해 패들링해나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날 아침, 마침내 나는 파도 위에 섰다. 거짓 말처럼 갑작스럽게,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120-121쪽, 코스모너트)


-눈이다 

'적어도 한마디라도……'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 한마디만을 절실하게 원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그 한마디뿐이건만 어째서 아무도 그 말을 해주지 않는 걸까. 염치없는 바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게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랜만에 본 눈이 가슴속 아주 깊은 곳에 있던 문을 열어버린 것 같다 그리고 한 번 그것을 깨닫고 나자 자신이 지금껏 줄곧 그 말을 바라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오래전 어느 날, 그 애가 해줬던 말 

'타카키, 너는 분명 괜찮을 거야” 라는 그 말을. (200쪽, 초속5센티미터) 


한번도 서보지 못했던 그리고 마침내 서냈던 십대중반. 언제부터인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신카이 마코토는 꿈이 있던, 없던, 건강했던 십대를 상기시키고, "괜찮아"라고 속삭인다. 신카이 마코토에 대해 좋은 감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있잖아, 꼭 눈 같지 않아?” 

아카리는 나보다 두 걸음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런가? 글쎄…….” 

"흥. 됐어.” 아카리는 새침하게 말하면서 나를 향해 빙글 돌아섰 다. 밤색 머리카락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아 카리는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꺼냈다.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 래." 

“뭐가?"

 "무엇일 것 같아?" 

“모 르겠어.” 

"스스로 생각 좀 해봐, 타카키.” 

그래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솔직하게 모르겠다고 대 답했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래." 

(10-11쪽, 벚꽃이야기)



4월, 도쿄 거리는 벚꽃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틀 때까지 일을 한 탓에 그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해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커튼을 열자 창밖은 햇살로 가득했다. 봄 안개에 가려져 흐릿한 고층 빌 딩의 창문들 하나하나가 태양 빛에 기분 좋게 빛나고 있다. 주상복합 빌딩 사이로 군데군데 만개한 벚꽃이 보인다. 도쿄에는 정말로 벚꽃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한다. 
...
회사를 나온 이후 그는 거리에 시간대별로 각각 다른 냄새가 있다는 사실을 몇 년 만에 기억해냈다. 이른 아침에는 그날 하루를 예감케 하는 이른 아침만의 냄새가 있고, 저녁에는 하루의 마지막을 상냥하게 감싸주는 저녁만의 냄새가 있다. 별밤에는 별밤만의 냄새가 있고 흐린 날에는 흐린 날만의 냄새가 있다. 그것은 인간과 도시와 자연의 작업이 하나로 뒤섞인 냄새였다 상당히 많은 것을 잊고 있었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주택가 좁은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목이 마르면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공원에서 마셨고, 교문 밖으로 뛰어나와 그를 추월해 달려가는 초등학생들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했으며, 육교 위에서 쉬지 않고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을 구경하기도 했다. 주택과 주상 복합 빌딩 너머로 신주쿠의 고층 빌딩들이 보였다 사라 지곤 했다. 그 뒤로는 마치 파란색 물감을 듬뿍 풀어놓 은물처럼 푸른 하늘이 펼쳐졌고 흰 구름 몇 개가 바람 결에 흘러가고 있다. 
그는 철도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철도 건널목 옆 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서 있었고, 그 근방 아스팔트는 떨어진 벚꽃 잎으로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문득,

초속5센티미터다 

(224쪽, 초속5센티미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