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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구달]을 주제로 읽기 중이다. <희망의 이유>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다. 제인 구달은 학위도 없었지만(나중에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아 강단에 서기도 한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 연구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어릴 적 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이야기하는 부모-자녀와의 관계가 아니라, 틀에 박힌 자녀와의 존중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호기심, 관찰, 자녀교육 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 부분이다.

 

 

며칠이 지나자 나는 점점 더 알쏭달쏭해졌다. 암탉의 어디에 알이 나올 만큼 그렇게 큰 구멍이 있단 말인가? 아무도 이를 적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나는 내 힘으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암탉을 따라 나무로 만든 작은 닭장 중 하나로 들어갔다. 그러자 닭은 끔찍하게 꽥꽥거리면서 재빨리 도망쳤다. 그때 어린 생각으로는 내가 먼저 그곳에 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닭장으로 기어들어가 닭이 들어와 알을 낳기를 기다렸다. 짚 덤불에 몸을 숨기고 구석에 조용히 웅크리고 앉아 계속 기다렸다. 마침내 암탉 한 마리가 들어와서 짚단을 여기저기 헤집다가 내 바로 앞에 둥지를 틀고 앉았다. 나는 닭이 놀랄까봐 매우 조용히 있어야만 했다. 이윽고 닭이 반쯤 앉았고 동그란 하얀 물체가 서서히 암탉의 다리 사이 깃털 속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풍 하면서 달걀이 짚 위에 떨어졌다. 암탉은 기뻐서 꼬꼬댁거리며 깃털을 흔들었고 부리로 알을 쿡쿡 찌른 후 떠났다. 내가 사건의 전과정을 이다지도 명확하게 기억 하고 있는 것이 무척 놀랍다.

흥분에 휩싸인 채 암탉의 뒤를 따라 기어나와 집으로 뛰어갔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그 작고 답답한 닭장에서 거의 네 시간이나 있었던 것이다. 온 가족이 나를 찾아다녔다는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집에서는 나를 잃어버렸다고 경찰에 신고까지 해놓았다. 걱정하며 찾고 있던 어머니가 흥분해서 집으로 뛰어오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꾸짖지 않았다. 대신 초롱초롱 빛나는 내 눈빛을 보고는 자리에 앉아서, 암탉이 어떻게 알을 낳았는지 알이 마침내 땅에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라웠는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나에게 생명에 대한 애정과 지식에 대한 열정을 길러주고 격려해준 현명한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행운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자녀들은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철학이었다. 내가 만약 엄격하고 무감각한 규율로 모험심을 억누르는 집에서 자랐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때로 궁금해진다. 혹은 규칙도 경계도 없는 가정에서 응석받이로 자랐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도 궁금하다. 어머니는 규율이 중요하다고 확신하셨고, 왜 어떤 것은 허용되지 않는지를 늘 설명해주셨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공정하고 한결같고자 노력하셨다. (희망의이유, 25-26쪽)

 

나는 그때 매우 어렸지만, 그사건에 대해서는지금도 꽤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궁금했다. 도대체 달걀이 나올 만한 큰 구멍이 닭의 어디에 있는 것일까? 누군가에게 그것을 물어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물어보았어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직접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나는 닭 한 마리가 닭장에 들어가는 것을보며 '아, 이제 쫓아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나 봐야지.' 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닭을 쫓아 닭장에 비집고 들어가자, 닭은 놀라서 꼬꼬댁거리며 뛰쳐나가 버렸다.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다. 나는 닭장에 먼저 들어가 닭이 들어와 달걀을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닭장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동물에 대해 알고 싶다면 참을성이 많아야 한다 (제인구달, 16-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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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석명절이다. 고향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 친척을 찾아 먼길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 명절이면 빠지지 않는 뉴스가 바로 교통정체이다.

 

 <세상물정의 물리학>에서는 교통정체에 대해 유령정체phantom traffic jam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Youtube 화면에서도 나오지만 모두가 동일속도, 동일차로를 달린다면 교통정체가 없을텐데 실제 화면에서 보듯이 1대가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을 때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

 

 이는 밀도 차이에 의한 것으로 이런 밀도가 해소되지 않는 한 해결하기 힘들다. 그런데 해결방안이 있기는 하다. 운전자의 반응속도의 차이에 의한 정체라면 모든 차가 동시에 일정한 간격,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면 가능하다. 아마도 100% 자율주행차라면 정체없는 운전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는 밀도를 분산시키는 방법이 최선인 것 같다.

 

 

차가 많아도 모든 차가 다 함께 정확히 같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같은 속도로 달리면 막힐 이유가 없다. 하지만 도로 위에 차가 많아지면 차 사이 거리가 줄어든다. 이때 차 1대가 살짝 브레이크를 밟아 속도를 조금만 줄여도 그 뒤를 바짝 쫓아오던뒤차는 깜짝 놀라 속도를 갑자기 줄이게 되고, 그 차의 또 뒤차는 어쩌면 아예 서버릴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정체가 생기는 것이다. 이처럼 교통정체는 사고가 나지 않아도, 갑자기 앞 트럭에서 짐이 떨어지거나 고라니가 도로로 뛰어들 않더라도 얼마든 생길 수 있다. 이를 유령 정체phantom traffic jam라 부른다. 

유령 정체가 생기는 이유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운전 습관 차이, 교통상황에 대한 판단 차이, 자동차의 가감속 능력의 기계적 차이 등을 생각하면 도로 위 자동차들이 다르게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차이로 균일하던 교통 흐름에 작은 교란이 생길 경우, 교란은 마치 퐁당퐁당 던진 돌멩이가 만드는 호수 위 물결처럼 파동 형태로 도로 위를 움직인다. 도로 위에 차가 많지 않다면 1 대가 만든 작은 교란은 뒤차에 영향을 주지 않고 곧 사라진다. 그러나 차들이 많아 촘촘히 움직일 때는 작은 교란도 바로 뒤 차로 전달되며 증폭 확대된다. 

 

다시 말해 운전자의 반응시간이 길고, 도로 위의 차 움직임이 균일하지 않으며, 운전자가 교통 상황에 과잉 반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고 가 나지 않아도 차만 많아지면 도로 위에 정체가 나타나는 이유다. (115-116쪽)

 

일단 고체 상태가 되면 온도를 변화시키지 않는 한 절대로 스스로 알아서 액체 상태로 돌아가지 못하는 손난로처럼 고속도로 위 정체도 차의 밀도가 변하지 않는 한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온도를 많이 올렸다 식혀서 다시 액체로 만드는 손난로처럼, 차의 밀도가 작아져야만 교통 정체가 해소되고 이후 차 대수가 천천히 늘어나 이전 정체가 있던 차의 밀도에 이르면 교통 흐름은 원활한 비평형 상태에 머무를 수 있다.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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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의 유럽연합 EU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1950년대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노력이 지속되었지만 정작 연합체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의 일이다. 연방주의자들과 국가주의자들의 대립도 강했지만, 무엇보다 유럽연합을 만들기 위한 공동통화의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았다. 유럽연합을 구성하는데 앞장 선 프랑스와 달리 서독은 마르크화를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소련의 해체와 더불어 갑작스럽게 상황이 반전된다. 통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된 서독은 프랑스의 협조가 필요했고, 프랑스는 단일통화 사용으로 궁극적으로 독일을 유럽국가내에 묶어 둘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두번의 전쟁을 일으킨 독일을 감안하면)

 

기존 유럽공동체 EC에 공동 외교,안보와 사법협력이 이루어지면서 유럽연합의 기틀을 갖게 된다. 물론 이 조약이 유렵연합의 전부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후에도 조약들이 개정되었으니까...

 

1989년의 사건은 전대미문의 격변이었다. 소비에트블럭이 해체되어 공동체가 동유럽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열렸고, 독일의 통일 또한 가능해졌다. 그러나 콜 총리는 미테랑 대통령의 지원이 필요했다. 공식적으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프랑스가 점령국으로서 독일 통일을 거부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브란트 의해 시작되고 추구되던 정책, 즉 유럽공동체와 프랑스-독일의 동반자 관계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동유럽 관계를 보장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었다. 미테랑은 단일통화가 독일이 공동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족쇄가 될 것이므로, 따라서 독일 통일의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마스트리트 조약이었다. 마스트리트 조약은 유로화,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뿐아니 라, 다른 권능과 제도 개혁도 규정했다. 공동체에는 교육, 청소년, 문화, 공공 보건 같은 분야와 관련해 일부 권한이 주어졌다. 각료이사회에서 가중다수결 투표의 범위를 더 넓히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제도가 강화됐다. 유럽의회의 기능은 여러 분야의 법률에서 각료이사회의 결정뿐 아니라, 유럽의회의 승인까지 요구하도록 하는 '공동 결정' 절차를 통해 향상됐다. 또한 유럽의회는 신임 집행위원 임명에 관한 승인, 불승인 권한도 확보했다. 공동체와 더불어 새롭게 두 개의 기둥(pillar)이 마련됐는데, 하나는 공동 외교안보정책(Common Foreign and Security Policy, CFSP) , 이고 다른 하나는 사법 및 내무 협력(Cooperation in Justice and Home Affairs, GJHA, 암스테르담 조약에서 범죄 문제에 관한 경찰 및 사법 협력'으로 명칭이 바뀜)' 이라고 불리는 자유로운 이동, 역내 치안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 두 기지는 공동체 제도와 연관되긴 했지만, 정부간주의가 그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중앙 기둥, 공동체 등으로 불리는제1기둥과 다른 두 기둥 을 합쳐 거대한 전체 구조를 유럽연합이라고 이름 붙였다. (48-50)

 

유럽연합으로 가는 길 역시 만만하지는 않았다. 유럽연합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찌보면 지금의 브렉시트가 갑자기 터져 나온 것이 아니라 처음 시작부터 절반의 찬성과 절반의 반대로 이루어져 EU 존재 이유에 대한 의문부호가 지속적으로 따라왔다.  

 

1992년 2월 마스트리트 조약이 서명됐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1월 발효됐다. 덴마크에서는 두 번의 국민투표가 실시돼 첫 번째 국민투표에서는 부결됐으며, 약간의 손질을 거친 후에야 두 번째 국민투표에서 통과했다. 프랑스는 유권자들이 근소한 차이로 국민투표를 거쳐 받아들였으며, 런던에서는 하원에서 비준 과정이 위태로웠고, 독일에서는 헌법재판소에서 기나긴 심리를 거친 후에야 이 조약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주장이 기각됐다. 이런 소동은 유럽연합에 대한 시민의 호응이 회원국 대부분에서 줄어들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특히 연방주의를 지향하던 사람들에게 는 경고로 보였다.(51쪽)

 

마스트리히 조약에 대한 설명 블로그 : 마스트리히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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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이란 유럽 연합(European Union) 회원국 간 국경 시스템을 최소화하는 국경 개방 조약이다. 유럽 각국의 자유로운 인적 교류를 목적으로 가입국 간 국경을 철폐하고 정보를 교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솅겐조약에 가입된 솅겐국가(Schengenland) 범위 안에서는 한 국가를 여행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 솅겐조약 가입국 사이에는 별도의 출입국심사가 없으며, 이동 시 여권이나 비자 등이 필요하지 않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d672

 

유럽연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약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유럽연합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 그중에 자유로운 통행과 관련된 조약이 솅겐조약이다. 셍겐은 독일, 프랑스와 국경을 맞댄 룩셈부르크 지역이다. 이곳에서 자유로운 통행에 대한 조약을 맺는다. 유럽여행을 가서 별도의 비자없이, 검문없이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이 조약 때문이다.

 

기사 : <브렉시트> 반난민·이민 정서 표출에 '이동자유' 솅겐조약 위기

 

1958년 이미 로마 조약은 회원국 간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있는 네 가지 자유에 상품, 서비스, 자본과 함께 사람을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서 '사람'은 노동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권리에 한정된다. (152)

그러나 연방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회원국은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려고 했다. 즉, 회원국 간 상호 국경 통제를 폐지하고, 모두가 자유롭게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1985년과 1990년 룩셈부르크의 작은 마을 솅겐에서 체결된 솅겐 협정에 법적인 표현으로 등장했다. 솅겐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을 나란히 접하는 상징적인 마을인데, 이들 세 나라에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합류해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 영국과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연합 회원국과 유럽자유무역연합(European Free Trade Association, EFTA) 회원국이 참여해 가맹국 수는 종종 솅겐 지대(Schengenland)라고 불릴 만큼 많아졌다. 

 

솅겐 협정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첫째는 국경 검문에 관한 것이다. 즉 , 솅겐 지대에서는 역내 국경 검문을 철폐하고, 역외와 통하는 국경에 순회검문소를 설치하며 난민·이민·타국인이 이 지역 안에서 거주 및 이동할 때 적용할 규정을 만든다는 것이다. 둘째는 범죄와의 전쟁에서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153쪽)

 

셍곈조약 등에 설명된 블로그 : 솅겐조약은 무엇인가?

 

The Schengen Area
  Schengen Area
  Countries with open borders
  Legally obliged to j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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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매뉴얼>은 유럽연합에 역사와 배경 그리고 운영원리 및 현재의 문제를 잘 짚어주는 책이다. 물론 몇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 지금의 브렉시트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영국이 EU와는 겉돌았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유럽연합내 모든 나라가 유럽연합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각 국가의 정부의 성격에 따라 유럽연합과 대치되는 결정들을 내리곤 했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은 조약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지는데 그 때마다 그 조약에 반대하는 국가들이 있었다.

 

 유럽연합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있겠지만, 유럽연합의 모태는 유럽석탄공동체이다. 프랑스와 독일 국경지대, 여기에 몇 나라가 같이 엮여 있다. 석탄을 공동으로 개발하기 위해 연합체를 만든다. 거기에다 2차대전 후 서유럽이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크게 있었다.  특히 2차대전 후 유럽의 안정을 위해 프랑스는 독일을 묶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범국이었던 독일 입장에서도 다른 유럽나라들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그렇게 유럽연합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달랐다.

 

전쟁에서 패하지도, 점령당하지도 않았던 영국은 다른 유럽인과 주권을 공유할 의사가 없었으며, 미국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 NATO)와의 신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15)

 

그럼에도 영국은 1975년에서야 유럽연합에 가입하는데 경제적 이유가 컸다.

모네의 전통을 따르는 연방주의자 답게 그의 최종 목록에는 단일시장, 단일통화, 공동방위정책 제도 개혁 등이 포함됐다. 이것은 연방주의 방향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처 총리는 연방주의에 대해 드골과 비슷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통화, 방위, 제도 관련 프로젝트에 반감을 표시했다.동시에 급진적인 경제자유주의자였던 그녀는 단일시장을 무역 자유화 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겼다.(42)

 

 하지만 기존 유럽과 영국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노동계층과 노조를 무력화시키고 금융업 및 자유경제를 추진하던 영국의 경제관은 유럽연합과 확연히 달랐다.

영국은 유럽연합에 접근해가는 과정에서 규제철폐(Deregulation)와 유연성을 강조했는데, 그 이면에는 이것들이 유럽 경제를 좀 더 경쟁력 있게 만들고 고용을 증가시키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규제 철폐를 요구하는 노동시장은 경제의 단순한 한 부분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해된다. 이런 영국의 접근 방식은 미국 경제 철학과 유사했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방식이라고도 불린다. 반면, 독일의 주요 모델이었던 라인란트(Rhineland), 접근법이라고 알려진 또 다른 접근 방식도 있다. 노동시장에서 강조되는 것은 유연성 보다 연대감과 사회적 보호이다.(144)

 

이런 다른 경제관으로 영국은 유럽연합과 마찰을 일으킨다. 완전자유경쟁시장을 원했던 영국이 유럽과 대립했던 부분은 농업이다.

농민의 소득은 소비자가 지불하는 비싼 가격과 그 가격으로 생긴 잉여생산물에 자금 지원을 해주는 보조금으로 유지됐는데, 이 보조금은 공동체 납세자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정책은 공동체 초기에는 그럭 저럭 유지됐지만, 영국의 공동체 회원국이 된 이후부터는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국식 자유무역 모델은 가격이 대폭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영국이 공동농업정책의 회원이 된다는 것은 곧 수입 식품에 수입세가 붙어 식량 가격이 높아지는 것, 공동체 예산에 영국이 수준 높은 기여를 한다는 것, 그리고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공동체 예산에서 받는 수령액이 적다는 것 등 삼중의 타격을 의미했다. 

이런 상황은 대처가 1979년 영국 총리가 된 이후 5년간 다른 많은 공동체의 사업을 볼모로 우리 돈을 돌려줘"라 고 주장하던 전투의 출발점이었다. (120)

 

영국은 유럽연합이라는 공동체에 관심이 없었고, 특히나 정치, 국방 등에 있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서만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경제적 주권에서도 분명히 독자권을 갖고자 했는데, 그래서 파운드를 계속 사용하게 된 것이다.

 

<차브>라는 책을 보면 브렉시트에 앞장섰던 백인노동차계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EU매뉴얼>은 유럽연합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중에 영국과 유럽연합에 대한 부분을 읽어볼 수 있다. 영국 내부적으로도 유럽연합과 함께 하기 힘들었지만, 외부적으로도 영국은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지 못하게 계속 외부인으로 남아있었다. 브렉시트를 단순히 결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1980년대 선거에서도 쟁점이 브렉시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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