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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 - 한국의 미를 지킨 대수장가 간송의 삶과 우리 문화재 수집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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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의 삶은 언제 한번 주목받아야 한다. 사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친일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간송 전형필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친일과 친일행적이 모호해져 버린 시대에 여전히 친일파를 가려내는 일이 중요하다 보니 일제시대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간송은 상대적으로 관심 밖의 일이다. 


책 <간송 전형필>은 간송이 우리 문화재를 지켜낸 과정을 그려낸 전기물이다. 작가가 앞부분에서도 이야기하듯이 일부 픽션이 있지만, 간송의 삶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네이버캐스트에서 간송전형필을 검색하면 책에 있는 많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 굳이 줄거리를 적을 필요는 없다. 



간송전형필은 문화재를 수집함에 있어, 중개상이나 소장자가 부르는 가격보다는 간송이 생각하는 가치를 쳐서 준다. 때로는 그 가치가 기와집 수십채에 해당할지라도 가치가 있다면 아끼지 않았다. 


전형필은 서화 골동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자신의 취향보다는 그것이 이 땅에 꼭 남아야 할지 아니면 포기해도 좋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숙고는 하지만 장고는 하지 않았고, 때문에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이 나타났을 때 놓친 적이 거의 없다. (26)


간송이 우리 문화재 지킴이로 나선데는 주변 인물의 영향이 컸다. 먼저 사촌인 월탄 박종화의 영향으로 서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박종화는 간송에게 그런 뜻을 넌지시 전한다. 위창 오세창은 그에게 문화재 감식안과 더불어 우리 문화에 대한 시각을 가르친다. 


“내가 자꾸 묻는 건, 뜨거운 가슴과 재력이 있으니 한번 본격적으로 모아보겠다는 자네의 생각이 틀려서가 아니네. 그런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잘 아네. 그러나 나는 자네가 우리 서화 전적과 골동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지키겠다는 건지 알고 싶네."

 전형필은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이제까지 서화 전적이 왜 중요한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서화 전적과 골동은 조선의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오세창은 잠시 전형필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마침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조선 땅에 서화 전적과 골동품을 모으는 사람은 많다네. 자네처럼 이렇게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하는 수집가도 제법 있지, 그러나 뜻을 갖고 모으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네. 대부분 재산이 많거나 돈이 좀 생기자 고상한 취미로 내세우기 위해 모으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들은 수집벽이 식거나, 체면을 충분히 세웠다 싶으면 더 이상 모으지 않는다네, 그러나 자네는 조선의 자존심이기에 지키겠다고 하니, 그 뜻이 가상하군.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네. 하하하” (82-83)


간송과 오세창의 대화처럼 간송은 단순히 개인적인 취미를 위해, 혹은 재산을 자랑하기 위해 문화재를 수집한 것은 아니었다. 

“지난 1년간 모시면서 간송이 다른 수집가들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조선 초기 서화작품부터 체계적으로 수집하시는 걸 보면 위창 선생님처럼 책을 만드시려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근역서화징)에 겨우 한두 줄 언급된 화가와 서예가들의 작품까지 애지중지하시는 보면,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심중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서 외람되게 여쭙는 겁니다." 

전형필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 선생, 지나간 세월이 어디 좋을 때만 있었겠소? 그림이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중국 그림이나 글씨를 모방하던 때도 있었고, 그런 모방에서 벗어나려던 과도기나 영 . 정조 때와 같은 번성기도 있었지요.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암울하던 때도 있었고 내가 위창 선생 님의 수집품을 보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유명한 서화가의 명품과 명필만 모아서는 500년 조선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라오. 그래서 유명하지 않은 서화가의 작은 그림과 글씨도 작품 수준에 관 없이 소중하게 생각하며 모으는 겁니다. (154-155)


간송은 자신의 전재산을 모아 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리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 

전형필은 박물관 만들 결심을 굳혔을 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꿈이 하나 있었다. 좋은 그림, 좋은 글씨 좋은 도자기 좋은 책을 각각 100 점씩 박물관에 모으겠다는 꿈. 그래야 박물관을 통해 선조들이 남긴 문화의 궤적 을 제대로 이해하고, 동포들에게 우리 민족의 위치가 지금 이 자리가 아 라는 것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204)


간송미술관 ☜ 네이버캐스트


간송은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문화재 수집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해방후에는 더 이상의 수집을 멈춘다. 물론 그의 삶이 항상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어렵게 모은 문화재가 한국전쟁으로 많은 작품이 흩어졌다. 그 작품을 다시 돈을 들여 모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전쟁을 겪으면서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나면서도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조형예술 모든 분야에 걸쳐 철저한 검증을 거쳐 체계적으로 수집한 간송의 소장품 중 서화가 지니는 의미를 간단히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화뿐 아니라 전적을 함께 엄선해서 모은 점을 들 수 있다. 동양의 한자문화권에서 서화는 시작이 같은 뿌리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감상과 연구가 병존하는 전통문화의 바른 이해라는 입장에서 문헌사료와 유형문화재는 상호보완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둘째, 그림은 고려말과 조선왕조 전체, 20세기 근대 화단에 이르기까지 장기간에 걸친 화가들 모두를 체계적으로 망라해 수장한 점을 들게 된다. 간송미술관에서는 매해 봄가을 두 차례씩 특별전을 통해 소장품을 일반에게 공개했다. 특히 서화는 시대별, 장르별, 작가별-유파별 기획전을 열 수 있었다. 18세기 최고의 서화수장가인 김광국이 조선의 이름난 화가들의 그림을 모아 화첩으로 만든 <석농화원>과, 오세창이 모은 《근역화휘》가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것은 의발전수의 상징 적 의미를 지닌다. 


셋째, 회화사적 의의가 큰 거장의 걸작 100선을 목표로 모은 점이다. 이는 간송미술관에서 연 기획전을 통해 분명해진다. 진경산수를 이룩한 정선, 남종문인화의 국풍화를 이룩한 심사정, 19세기 예원의 총수로 학예 양면에 족적이 큰 김정희, 조선 말기 화단을 최후로 화려하게 장식한 장승업 등 개인별 전시와, 정선·심사정·조영석 등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세 사람의 사인삼재 , 풍속화의 쌍벽으로 사농공상 사회를 담은 김홍도와 한량과 기녀의 애정에 초점을 둔 신윤복, 장승업의 제자로 근대 화단의 시발인 안중식과 조석 진 등 2~3인 공동전시가 가능했다. 


물론 작품수로 보면 간송미술관의 작품수는 보잘 것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혜원 그림의 의미를 알아차린 점, 겸재 그림의 진수를 파악하고 연구결과를 낸 점 등을 들여 볼 때 간송미술관은 우리문화지킴이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간송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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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 36 : 회화 - 우리 문화와 역사를 담은 옛 그림의 아름다움
백인산 지음 / 컬처그라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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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부터 2016년까지 간송미술관의 작품들이 DDP 나들이를 했다. 사실 간송미술관의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1년에 봄,가을 2주씩 두번만 특별기획전을 열었다. 이곳에 다녀온 이마다 작품 뿐만 아니라 주변환경을 들어 추천하였지만 실제 발검음을 한번도 하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이 바깥 나들이를 하면서 같이 나온 책이다. 간송미술관의 회화 작품 36편이 책으로 소개되었다. 조선의 그림을 주로 소개하는데, 소개된 그림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그림도 소개된다. 그림아래 소개되어 있는 화가(문인화가도 화가로 보자면)들의 연대를 보면 1500년대에서 부터 1800년대 후반까지의 그림의 흐름을 볼 수 있다.

 

간송미술관의 많은 유물중에서 이들 그림을 선정한 이유는, 이것이 조선시대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이야기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래서 간혹 이 그림은 별론데 왜 넣었을까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수 있지만, 소위 잘 알려진 명작 뿐 아니라 그다지 주목 받지 못한 작품일지라도 그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넣은 겁니다. 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그림을 통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가장 컸습니다. (17)

 

간송 전형필은 일제시대 옛 문화재를 소장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돈을 사용했다. 그런데 단순히 수장가들 처럼 유명 작품 중심으로 구매하지 않고, 우리 문화를 잘 알려줄 수 있는(시대가 불화하여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작품들을 선별하여 구매하였다.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싶었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단순 수집가가 아니었던 것은 해방후에는 더 이상 작품 소장을 하지 않은 것인데, 더 이상 일제로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간송미술관은 단순히 옛 문화재를 소장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존과 연구에도 힘썼다. 겸재나 겸재시대 연구에 있어서는 독보적인 연구성과를 낸 것이 그렇다. <간송미술36 : 회화>는 그 연구결과를 대중에게 소개하는 귀중한 작업이다.

 

<간송미술36:회화>는 조선의 그림 36점을 설명한다.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조선미술에 대한 다양한 가이드를 제공한다.

 

'삼원 삼재'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을 일컬을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기원은 명확치 않지만 대체로 삼원은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지칭하고, 삼재는 ‘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을 꼽는다. 다들 조선시대 회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대가들인데, 공교롭게도 삼원은 모두 화원화가이고 삼재는 모두 사대부화가이다. ...

조선시대의 허다한 문인화가들 가운데 이들을 유독 '사인삼재'라 통칭하며 중시하는 이유는 단지 기량이나 명성 때문만은 아니다. 삼재라는 호칭은 각기 조선 후기 회화의 세 축이라 할 수 있는 진경산수화, 조선남종화, 풍속화를 창안하여 조선 후기 회화 발전의 기틀을 다지고 절정에 올려놓은 업적에 대 한 역사적 평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마땅히 진경산수화는 겸재, 조선남종화는 현재의 자리이다. 문제는 풍속화다. 연배로 보아서는 공재 윤두서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하지만 공재의 풍속화를 보면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풍속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선의 의관과 풍물을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선구적이나 한계가 보인다. 바로 기법의 문제이다. 공재의 풍속화는 여전히 중국의 영향이 강했던 조선 중기 이전의 인물화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

후배 문인 이규상은 "우리나라의 그림이 조영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크게 독립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 관아재는 동문 선배인 겸재와 더불어 진경시대 인물 풍속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냈고, 그것은 곧 조선 후기 풍속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했다.(144-147)

 

몇 해 전 조선화공을 소재로 한 드라마(물론 픽션이지만)를 계기로 혜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단순히 드라마 때문은 아니다. 그 전 부터 혜원 신윤복의 그림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일제 시대 문화재를 거래하던 일본인들은 단원이나 겸재 못지 않게 혜원의 그림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풍속화에 한정된 혜원의 작품에 대한 평이 높지 않을 때 였다. (물론 그럼에도 간송은 혜원의 그림을 꾸준히 모았다.)

 

혜원의 그림에 우리보다 일본인들이 먼저 반응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우리 것의 소중함을 몰랐다는 일반적인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겸재나 단원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유독 혜원이 홀대받은 것은 조선시대에 혜원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졌고, 그다지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의 심미안이 탁월했던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는 온전히 기호와 취향의 차이에서 비롯된 문제이다. 혜원의 그림이 지닌 화려한 색감과 감각적인 필치, 그리고 은밀한 선정성 등이 우리보다는 일본인들에게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듯하다. 그러나 누가 먼저 혜원의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 알렸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미술 작품은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혜원도 그렇다 2백여 년간 홀대받던 혜원과 그의 작품이 근대 이후 재조명 받은 것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혜원의 평판과 인기가 겸재는 물론 단원까지 압도하는 현상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이 같은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혜원은 특이한 그림을 그린 일탈적 화가가 아닌, 우리 미술사의 한 복판에 우뚝 선 거목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근대성이나 현대적 감각을 운운하며 혜원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지만, 혜원이 이전의 어떤 화가도 보여 주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고, 그 수준 또한 탁월했음은 분명하다. (258-259)

 

얼마전 인문학 대중화의 선두에 있던 이가 방송에서 오원 장승업을 극찬했다. 그런데 극찬한 작품이 오원의 작품이 아니었다. 과연 오원은 어떤 인물일까? 물론 오원에 대한 잘못된 설명은 2016년에 책은 2014년에 나왔으니 그런 일을 예상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원의 그림은 왕실과 사대부, 혹은 부유한 중인층의 기호와 수요에 맞춰 그린 주문작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개성이나 감흥을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의 화풍은 중국의 자취가 매우 강하게 묻어나며, 심지어 중국 그림을 그대로 모방한 작품도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독자성과 창의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오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은 분명 일리가 있다. 

 

하지만 이는 오원 개인의 역량 탓으로 돌릴 문제는 아니다. 대개의 예술작품이 그렇듯이 오원의 그림도 시대적 산물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성리학은 물론 추사 김정희가 수용해 들인 청나라 고증학까지 외래 이념에 의해 압도당한 이념의 공백기이자 혼란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불학무식한 화공 오원에게 치열한 시대 정신이나 선구적 독창성 등을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다. 그는 탁월한 기량으로 별다른 의식 없이 시대적 기호와 수요에 적절히 부응했을 뿐이다. (290쪽)

 

이런 조선미술에 대한 지식 뿐만 아닐 각 그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설명은 옛 그림을 보는 법을 기를 수 있는 아주 좋은 가이드를 제시한다. 꾸준히 이 책을 보면 우리 옛 그림을 보는 안목은 키울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보고 덮을 책이 아니다.) 우리 그림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 관심의 폭을 확대하는데,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궁금했다면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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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소담 - 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 간송미술관의 그림책
탁현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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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정담>과 <그림소담>은 편하게 옛 그림을 들려준다. 

간송미술관의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림소담>은 간송미술관의 그림을 통해 우리 옛 그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림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찬찬히 알려준다. (간단하게 후기를 남겨본다.)


우리 옛 그림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겸재가 그린 그림은 소나무에 앉아 있는 매미의 모습이다. 그냥 지나칠 만한 매미가 너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구성도 아름답지만, 매미와 소나무의 조화도 놓치기 힘들다. 



화면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소나무 가지하나가 자연스레 휘었고, 여기에 매미 한 마리가 나뭇가지와 나란히 붙어 있다. 매미를 묘사하는 데 어느 부분 하나 소홀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투명 앞날개 안에 작은 뒷 날개의 모습까지 정확하게 그려 넣었다. 가지 끝에 솔잎을 그린 것을 보면 오래된 솔잎 떨기는 엷은 녹색으로 약간 번지게 해서 겹쳐 그렸고, 그 위에 새로 난 짙은 녹색 솔잎 하나하나를 가는 붓으로 그렸다. 그 결과 새로 난 솔잎의 파릇파릇함이 돋보이는 효과를 낸다.


화면 왼쪽 솔가지는 거의 생략하고 솔잎 떨기만 강조해 매미가 붙어 있는 가지로 시선 을모으는 동시에 화면 왼쪽을 채웠다. (163-164)



역시 겸재의 그림 중에 하나이다. 책 <그림소담>에 있는 많은 그림들이 눈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어떤 그림은 그림의 아름다움에 또 어떤 그림은 세밀함에. 이 그림은 수묵화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어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도성 내 가옥들은 안개에 파묻혀 보이지 않지만 멀리 남산과 관악산의 능선은 어슴푸레 잡히고 키 큰 나무숲도 거뭇가뭇 드러났다. 하늘과 안개는 여백으로 비워두어 먹보다 종이 바탕이 더 많은데 과감한 여백 덕분에 안개 낀 달밤 한양 풍광이 박진감 넘치게 다가온다. 이로써 비우면서 완성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다. 


하지만 안개 낀 달밤이라도 이렇게 보이지 는 않을 것이다. 겸재는 생략하고 단순화 해 안개 낀 달밤이 주는 인상만 그린 것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모네가 템스 강의 안개 낀 풍경을 그린 방식과 비슷하다. 진경 산수는 실재와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부분은 빼고 필요한 부분은 강조하는 생략과 확대를 적절하게 섞는 화풍이다. 겸재는 이런 방법을 극대화 해 서울의 안 개낀달밤을 가장 덜 그렸어도 가장 사실감 넘치는 그림으로 완성했다. (79-80)



<고화정담>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혜원이나 단원의 그림은 그림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그 시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당시 유행했던 옷 맵시를 찾아볼 수 있고, 집은 어떻게 꾸몄는지, 그리고 놀이문화는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서 있는 선비는 자줏빛 띠를 가슴에 매고 호박을 이어 갓끈 삼아 호사를 다했으니 멋쟁이 선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진정 멋쟁이는 장침에 편안히 기대어 오른 손으로는 부채를 잡고 왼손으로는 연죽을 들고 음악에 몰두한 풍채 좋은 저 선비다. 호박 갓끈을 왼쪽 귀에 돌려 맨 저 모습을 보라. 이것이 당시 한양 귀족들의 일급 맵시다. 가슴의 붉은 띠는 한복 끈 치레의 또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마당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에는 돌을 두 단으로 쌓아 나무를 심는 조경 방식은 지금도 궁궐에 가면 볼 수 있는 전통 방식이다. 연못도 흙을 파내고 사방을 돌로 둘러 쉽게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 보인다. 이 그림에서 한가지 더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선인들이 야외에 나갈 때 항상 돗자리를 가지고 다니다가 좋은 장소를 발견하면 자리를 펴서 유흥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31-33)


책은 겸재 정선,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등 잘 알려진 이들 외에도 이인문, 김득신 심사정 등 조금은 덜 알려진 이들의 그림도 소개한다. 옛 그림에 대한 틀을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옛 그림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 좋은 가이드 북이다. 


게다가 간송미술관은 작품의 보존 뿐 아니라 연구에서도 뚜렷한 결과를 낸다. 유명한 작품들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연구하여 정치적 암흑기라고 하는 시대에서도 문화의 꽃을 피워냈음을 증명해낸다. 특히 '진경 시대'에 연구는 우리 옛 문화 연구의 좋은 길잡이를 마련했다.  


한 시대 문화는 식물에 비유할 수 있다. 뿌리가 이념이라 면 꽃이 예술이다. 꽃이 풍성하고 생기 있다는 것은 뿌리가 튼튼하고 둥치와 가지 모두 건실하다는 뜻이다. 만약 식민 사관에서 말하듯 조선 후기가 당쟁에 골몰해 어지러운 시 기였다면 어떻게 겸재와 단원 같은 뛰어난 화가가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숙종 대부터 정조대에 이르는 125년간의 우리 문화 황금기를 최완수 선생은 1996년에 '진경 시대'라 이름 붙였고, 이로써 우리는 오랜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 조선 후기 문화를 다시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되었다. 공론을 주도하는 식자층 일부에서 여전히 식민사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1990년대중반 간송미술관에서 탄생한 '진경 시대'란 개념은 간송 선생의 문화재 수집만큼이나 값진 것이었다 간송 선생이 우리 미술품을 목숨과 같이 아 끼며 지켜낸 참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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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정담 - 간송미술관의 다정한 그림 간송미술관의 그림책
탁현규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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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畵情談 : 옛 그림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정겨운 이야기

 

라는 뜻의 <고화정담>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작품 중 30 작품에 대한 소개이다.

사군자, 영모, 진경산수, 풍속, 도석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나누고 설명한다. 조선 그림을 주제별로 크게 구분해서 알려준다.

 

1년에 몇 번씩 큰 전시회를 통해 서양화가들의 유명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많지만, 우리의 옛 그림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눈에 담을 기회도 많지 않고, 그래서 지나쳤던 옛그림들. 하지만 <고화정담>을 통해 우리 옛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림 하나 하나가 갖는 의미가 남다르고,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이 어떤지 조금씩 트이는 기분이다. 우리가 알던 몇 몇 작가들 외에 심사정, 김득신 등의 그림을 접하는 것 또한 쏠쏠한 즐거움이다. 알아간다는 즐거움.

 

 사군자편은 4편의 그림을 설명한다. 사군자는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를 조선의 선비정신과 빗대어 선비들이 줄곧 그려낸 그림이다. 그중 심사정의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옅은 먹으로 국화 잎을 툭툭 쳐내고 바위도 붓으로 최소한으로만 그었다. 먹빛도 묽어 단단한 느낌은 커녕 곧 뭉크러질 것만 같다. 위쪽 국화 잎은 반을 잘라 다 그리지 않았으며 꽃봉오리는 점 몇 개로 단순화했다. 국화 잎이 너무 무성해 약간 비대한 듯 느껴져 단아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것이 심사정 묵화의 중요한 특징이다. 닮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것. 국화 옆 바랭이풀은 먼저 갈색으로 잎을 그리고 그 위에 먹선을 그었고 바위도 마찬가지인데 먹선을 약간 어긋나게 그어 입체감을 주었다. 심사정이 줄겨 사용한 방법이다. 그리고 바위 주변에 녹색 점을 찍어 먹색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났다.(30쪽)

 

 

동물을 그린 영모화는 그림을 그리는 도화서 화원들이 주로 그렸다. 물론 사대부도 동물을 그렸다. 윤두서의 군마 같은 작품이 그렇다. 솔직히 군마를 보고 놀랐다. 단순하면서도 살아있는 듯한(똑같이 그렸다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눈을 자꾸 돌리게

했다.

사군자에서 의미를 담았듯이, 동물에게도 그 뜻을 담았다.

 

그런데 도화서 화원들은 조금 다르게 영모화에 접근했다. 초상화에서 중요한 것이 수염이었는데, 수염으로 원근감 등을 표시할 뿐 아니라, 인물의 특징도 잡아냈다.

초상화에서 알맹이는 얼굴이고, 얼굴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눈동자이지만 가장 공들여야 하는 것은 수염이다. 가늘고 길며 꼬불꼬불한 수염이 한 올 한 올끊이지 않아야 하고 엉켜서도 안 되며 흑백이 섞여야 하고 바람도 통해야 하니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먹의 농담도 일정해야 한다. 먹을 묻혀 정신을 바로잡고 비단 위에 수없이 붓질해야 초상화가 비로소 완성된다.  화원들이 도화서에서 그린 여러 그림 가운데 초상화가 제일 중요했기 때문에 화원들은 수염 그리는 데 선수였다. 

그렇다면 이 수염 그리는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그림은 무엇일까. 당연히 털 짐승 그림이다. 그래서 각기 전념하던 털 짐승 그림이 있었다 정홍래는 매, 김두량은 개, 변상벽은 닭과 고양이를 잘 그렸다. (70)

 

 

진경산수화가 의미있는 것은 실제로 우리 땅을 그렸기 때문이다. 중화사상이 가득했던 조선초중반 해도 중국책에 있는 중국의 산과 강을 그렸다. 겸재가 이 땅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우리 눈으로 우리땅을 그려냈다는 것이다.

우리 옛 땅의 모습이 그림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담은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여백으로 때로는 단순하게 그려내 그림에 예술성을 덧 붙였다.

 

저 기와집엔 양반이 살 테고 초가집엔 평민이 살 텐데, 그래서인지 기와집 자리는 전망 좋고 양지바르다. 재밌는 건 기와집이건 초가집이건 모두 드러난 집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모두 드러나서는 안 된다. 그러면 재미가 없다.  저 나무 뒤에 기둥은 이럴 것이고, 지붕은 저럴 것이다 등등 감상자에게 상상할 여지를 주어야 그림이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산등성이에는 솔들이 한줄로 빼곡해 산 전체에 솔 향기가 가득한데 마을 뒤는 산이 둘러싸고 마을 앞으로는 넓고 푸른 강이 흘러가니 청탄마을 사람들에겐 이곳이 무릉도원일 것이다. 산주름에 먹점을 찍어 키 작은 잡목을 그렸고, 저 멀리 있는 산자락은 주름만 있고 먹점은 찍지 않았으며 뒤에는 주름마저 사라지고 더 멀리는 청색으로 물들였다. 이 보다 박진감 넘치는 원근법을 따라 할 화가는 많지 않다. (116, 겸재 녹운탄)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볼 때면 항상 놀랍다. 다른 그림들이 전체적인 느낌, 분위기에 주목해서 본다면 신윤복의 그림은 선과 색체, 그리고 살아움지이는 듯한 움직임까지.

사람을 묘하게 그림에 붙들어매는 능력이 있다. 부분 부분을 보는 것 자체가 예술이다.

 

신윤복의 그림은 그림의 가치도 뛰어나지도 우리 문화를 담아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된다. 당시 문화가 그림속에 담겨있다. 신윤복의 그림은 예술이자, 역사이다.

 

신윤복 그림에는 200년 전 의복, 춤, 음악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과장도 없고 생략도 없다. 따라서 오늘날 좋은 옷을 지어 입으려는 이, 잊힌 춤을 다시 살리려는 이, 옛 가락을 내일로 전하려는 모든 이들은 신윤복 그림을 의지하면 어긋나지 않는다 또 제대로 된 조선 역사극을 만들려고 하는 이 또한 신윤복 그림울 기준으로 고증하면 탄탄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198)

 

 다섯번째 주제인 '도석'은 쉽게 말해 달마도사 등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유교사상이 강한 조선에서 불교 및 도교사상이 그림에 자리잡기는 힘들었는데, 유교의 틀에서 자유로운 화원들은 달마대사나 동자승을 종종 그렸다. 단순히 중국의 소재가 아닌 각자에 맞게 발전시켜서 그렸다.

 

놀라운 것은 맹호도에서 수백 번 붓질로 털 하나하나를 그려 살아 있는 호랑이를 그려낸 김홍도가 이번에는 붓 몇 번 대지 않고 역시 살아 있는 호랑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둥글둥글하며 성근 삽살개의 털을 그리는 것처럼 먹으로만 슬렁슬렁 돌렸는데 영락없는 호랑이다. 바로 이 점에서 김흥도는 대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확인할 수 있다. 대가는 양쪽 끝점을 모두 아우르는 이의 다른 이름이다. 수없이 붓질해 완성한 호랑이와 쓱싹 붓 질몇번해서 그린 호랑이 둘 다 기운생동하다 이 둘이 모두 가능하다는 점 또한 옛 그림 특유의 매력이. 겸재 정선의 소나무 역시 솔잎 하나하나를 그린 것과 붓을 뉘어 툭툭찍어 그린 것이 모두 있었다. 호랑이 꼬리는 굽이치며 솟구쳐 용맹함이 여실하고 날카 운 발톱은 땅을 굳건히 움켜쥐어 안정감이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김홍도의 솜씨는 나한의 옷 선에서 드러난다. 

 

부드럽게 흐물흐물 몸을 따라 흘러내리지만 역시 모든 것을 다 갖췄다. 그리고 나한의 옷 선이 이래야만 호랑이 털과 어울릴 수 있다. 그래서 나한과 호랑이는 한마음 한몸이 된다. 더군다나 모두 먹빛 하나이기 때문에 둘은 더욱 쉽게 결합된다. 나한의 얼굴이 김홍도의 달마도해에 나오는 달마 얼굴과 비슷한 걸로 봐서 김홍도가 스님 얼굴로 좋아한 도상인 듯하다. (245-246)

 

<고화정담>은 이야기하듯 쓰여있어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렇다고 가벼운 책은 아니다.

이 책은 한번에 읽고 말 것이 아니다. 옆에 두고 조금씩 읽어봐야 할 책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통으로 읽어도 좋고, 필요한 부분만 시간 날때 접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그러다 보면 우리 옛 그림에 대한 눈이 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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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뚱해서 행복한, 보테로
이동섭 지음 / 미진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이전에 보테로 전시에 가지 못했을 때 무척이나 아쉬웠다. 보테로의 그림을 보는 순간 확 그림에 빨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건 뭐지.. 도대체 왜 이따위로 그리는거야 라며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2015년 드디어 그의 작품을 만났다. 왜곡되어있지만 오히려 더 사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는 왜 그런 그림을 그린 것일까?

추상이 대세이던 시기였지만, 이처럼 보테로는 고전 화가들의 작품을 파고들었다. 미대 교수들은 그에게 고전을 따라할 게 아니라 그만의 스타일을 찾으라고 했지만, 그는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었다. 바로 회화란 무엇인지, 회화의 근본적인 체계는 어떠한지에 대한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18쪽)

 

그리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라틴 문화가 담겨있다. 그는 콜롬비아 출신이다.

 

보테로가 추상보다 인물화를 좋아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는 인물화야말로 자신의 뿌리인 남미 문화의 전통과 연결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는 유럽에 머물던 내내 남미 예술가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남미 문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24쪽)

그들의 작품을 면밀히 관찰한 보테로는, 오로스코와 시케이로스의 표현주의 화풍보다는 리베라가 그린 거대한 크기의 멕시코 벽화에 더 끌렸다. 왜냐하면 벽화의 기하학적인 구조와 단순한 구성 등이 그가 좋아하는 회화 스타일, 특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프레스코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보테로는 결정적인 요소 하나를 찾아냈다. 바로 그의 작품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스타일로 자리매김한 거대한 조형성이다.

사실, 인물과 대상을 거대하게 표현하는 방식은 당시 남미 화가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남미 벽화운동의 선구자로서, 화폭의 대부분을 전형적이고 단순화된 인물들로 채우는 리베로의 스타일은 보테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27쪽)

 

사실 그의 그림이 처음부터 둥글둥글했던 것은 아니다.

1950년대의 보테로가 프레스코와 멕시코 벽화 등을 통해 대상의 비율과 크기 등을 탐구했다면, 뉴욕에 정착한 60년부터는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대상을 둥글둥글하고 풍만하게 묘사하는 '볼륨 기법'을 발전시켜 나간다. 거기에 고르고 밝은 색채, 외곽선이 뚜렷하게 보이는 형태 등 남미 민속 미술의 특징을 적극 참조했다. 60년대 초반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다소 거친 붓 터치는 후반기로 갈수록 확연히 부드러워진다. 형태는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색채까지 더욱 밝아지고 깔끔해진다. ... 이렇게 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보테로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완전히 확립된다.(39쪽)

 

그의 볼륨감 넘치는 그림에서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왜 그렇게 그렸을까이다. 아름답기만 한 다른 유명 대가의 작품보다 그의 그림에 확 빠져든 것도 그런 느낌이다.

 

그는 단지 볼륨감 있게만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다. 그의 그림의 바탕에 라틴 문화가 있었던 것처럼 최근의 그의 작품은 전쟁과 학살과 아픔이 담겨있다.

총에 맞은 사람역시 볼륨감있다. 웃기게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게 그림에서 나오게 된다. 단순히 그림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아 .. 맞다. 지금 이런 일이 있지.

볼륨감 넘치는 그림 스타일로 인해 보테로가 삶의 쾌락과 즐거움만을 그린 화가라고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 깊게 뿌리 내닌 조국 콜롬비아가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1990년 후반부터, 그의 작품들은 납치, 학살, 고문, 죽음과 같은 아주 현실적인 주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이던 유머나 여유는 사라지고 어두운 분위기가 짙게 드리워졌다.

최근에도 이와 유사한 주제를 그렸는데,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 시리즈가 그것이다. 이 작품을 통해 보테로는, 이라크 전쟁의 산물인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벌어진, 이라크 죄수들에 대한 미군의 잔혹한 고문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이 시리즈를 통해 삶과 풍만함에 대한 보테로의 찬양은 잔인함과 고통에 대한 증오와 짝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74쪽)

 

전시에서는 그의 최근작들을 보지못했다. 보테로의 최근 그의 그림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꼭 재출간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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