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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으로부터의 사색 -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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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함부로 읽지 못했다. 그냥 가볍게 읽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책 앞 뒤를 살피니 2002년에 구매했는데, 정작 읽기는 2004년 1월1일이었다. 책 앞에는 '가슴설레며 책 꽂이에 꽂아두었다'는 말이 있다. 너무 묵혀두지 않나 싶어 갑신년 새해 서둘러 손에 들었던 것 같다. 선생님 타계 소식에 병신년에 손에 다시 들었으니 12년 만이다.

 

<사색>은 감옥에서 외부로 보낸 편지, 엽서글이다.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급수가 바뀌어서 한달에 네번까지 편지를 보낼 수 있다고 표현이 된다. 다른 책을 보면 편지의 내용을 며칠동안 생각하고, 머리속에서 퇴고까지 거친 글이라는 설명이 있다. 그만큼 생각에 생각을 통해 다듬은 글이 편지가 된 것이다.

 

전에는 독서, 책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이 눈에 들어왔다. 피상적인 독서가 빠질 수 있는 실천없는 지식을 경계하는 부분이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결코 많은 책을 읽으려 하지 않습니다. 일체의 실천이 배제된 조건하에서는 책을 읽는 시간보다 차라리 책을 덮고 읽을 바를 되새기듯 생각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지식을 넓히기보다 생각을 높이려함은 사침(思沈)하여야 사무사(思無邪) 할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85쪽)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은 수시로 상기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188쪽)

 

징역 속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맨 처음 시작하는 일이 책을 읽는 일입니다. 그러나 독서는 실천이 아니며 독서는 다리가 되어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시 한 발 걸음이었습니다. 더구나 독서가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한 발 걸음이라 더디다는 데에 있다기보다는 '인식→인식→인식····'의 과정을 되풀이 하는 동안 앞으로 나아가기는 커녕 현실의 튼튼한 땅을 잃고 공중으로 공중으로 지극히 관념화해 간다는 사실입니다.(279쪽) 

 

12년만에 읽은 책에서는 선생님의 글씨에 대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글씨에 선생님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후 <강의>의 주제였던 '관계'가 이미 글씨 속에 담겨 있던 것이다. 나무가 더불어 숲이 되는 것과도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연대체, 어깨동무체라 불리는 글씨체가 담긴 의미를 볼 수 있다.

 

일껏 붓을 가누어 조신해 그은 획인 그만 비뚤어버린 때 저는 우선 그 부근의 다른 획의 위치나 모양을 바꾸어서 그 실패를 구하려 합니다.

이것은 물론 지우거나 개칠(改漆)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획의 성패란 획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획과 획의 '관계' 속에 있다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이 다른 획을 만나지 않고 어찌 제 혼자서 '자'(字)가 될 수 있겠습니까. 획도 흡사 사람과 같아서 독존하지는 못하는 '반쪽'인듯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때는 그 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자로써 그 결함을 보상하려고 합니다. 또 한 '행'(行)의 잘못은 다른 행의 배려로써, 한 '연'(聯)의 실수는 다른 연의 구성으로써 감싸려 합니다. 그리하여 어쩌면 잘못과 실수의 누적으로 이루어진, 실패와 보상과 결함과 사과와 노력들이 점철된, 그러기에 더 애착이 가는, 한 폭의 글을 얻게 됩니다.(101쪽)

 

그뿐만 아니라 어머님께서 전에 써보내 주시던 모필서간문(毛筆書簡文)의 서체는 지금도 제가 쓰고 있는 한글서체의 모법(母法)이 되어, 궁체와는 사뭇 다른, 서민들의 훈훈한 체취를 더해주고 있습니다. 어머님은 붓글씨에 있어서도 저의 스승인 셈입니다.(262쪽)

 

<사색>은 선생님이 쓴 책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생각이 한권에 잘 어울려 있다. 짧게 말한 부분이 다른 편지에서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되고, 다른 사례에서는 획을 뒷받침하듯 생각을 연결하여 만든다. 모자이크 같은 편지 하나하나가 모여 서로 돕고 서로 보충하여 한권의 책을 만든다.

 

<사색>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입장의 동일함'이다. 그래서 이번에 책을 손에 들고서도 이 부분을 먼저 찾아 읽었다. 역지사지라는 말 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 입장의 동일함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대를 대상화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함게 하는 것이 아닐까. 격언, 잠언 등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부분은 두고 두고 생각하고 싶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313쪽)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가르친다는 것은 다만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아라공의 시구를 좋아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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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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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가 두권이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무야 나무야>를 여러 권 샀다. 남들한테 가장 많이 선물한 책이지 않나 싶다. 집에 꽂혀 있는 책중에 하나를 들어보니 99년 5월 17일에 다 읽고 메모를 남겨 두었다. 그 뒤로도 몇 번은 손에 들었다.

 

<나무야 나무야> 서평을 남기는 것은 좀 부담스럽다. 감히 선생님의 생각에 대해 평할 것도 안되지만 나에게 주시는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옮겨본다.

 

먼저 삶에 대한 자세와 사람과 사람에 대한 자세이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鑑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천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동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28쪽)

 

그리고 개인의 목표와 그 과정을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한 부분이다. 목표의 올바름 그리고 과정의 올바름 바로 이 시대 우리가 놓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아닐찌.

목표의 올바름을 선(善)이라 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의 올바름을 미(美)라 합니다.

목표와 과정이 함께 올바를 때를 일컬어 우리는 그것을 진선진미(眞善眞美)라 합니다. (116쪽)

 

사회에 대한 생각이다. 사실 사람조차 인적자원으로 부르는 현 시대 대한민국은 눈에 보이는 만족, 피상적 성공, 자기 안위가 목표인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 방법을 잘 알거나 그 위치에 가까운 사람이 바로 현명한 사람일 것이다. 사회는 자꾸 사회의 요구에 맞는 현명한 사람을 만드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 우직함이 그냥 어리석음으로 평가되는 세상. 선생님의 말씀이 더 생각나는 요즘이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82쪽)

 

<나무야 나무야>를 읽으면 바로 앞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다른 책에 적혀 있다.

<나무야 나무야>가 독자들의 가슴에 강하게 와 닿는 이유는 글 전체를 부드러운 교감의 장으로 만들어주는 경어체의 서간문과 그 수신인인 '당신'의 역할 때문이다. 물론 독자에 대한 친밀감과 공감의 장을 확대하는 저자의 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막연한 일반 독자나 단순한 문학적 장치로만 제한되기엔 그 역할이 매우 구체적이고 또 저자와 특별한 사적 공감대가 형성된 존재이다. '당신'은 저자를 방문지로 안내하고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주는 정신적 여행가이드이자, 훌륭한 충고자이며 절친한 친구로, 때로는 저자의 내면의 목소리나 제2의 자아와 같은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다. (145쪽, 신영복 함께 읽기)

 

사실 신영복선생님 타계에 맞춰 다시 책을 읽으면서 몇 몇 부분이 눈에 더 들어온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르고 난 뒤 보면 예전에 그리고 지금은 흘려 보냈을 부분이 다시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런 기대가 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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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 - 노회찬, 작심하고 말하다
노회찬.구영식 지음 / 비아북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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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대중에게는 좀 버거운 책이다. 대한민국 진보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하는데,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나에게도 전반부는 그다지 잘 읽히지 않는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했다면 오히려 후반부를 중심으로 책 한권을 만들어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우리나라 진보운동은 민주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그에 반해 큰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하다. 노회찬이 지적하듯이 1987년 체제가 지속되고, 진보운동이 정당화 되지 못하면서 실제 정치에서는 배제된 것이 사실이다.

 

 2000년 5월 하버드대와 버클리대의 노동정치학회가 공동으로 심포지엄을 열고 한국과 브라질의 노동운동가를 한 명 씩 초청하여 발표 하게 한 적이 있었다. 나(노회찬)는 한국측 발표자로 초청되었는데, 이 심포지엄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진 문제는 '한국과 브라질은 비슷한 시기에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왜 그 후의 과정은 전혀 다르냐' 하는 것이었다. 즉 브라질 노동운동은 곧바로 정치세력화로 활발하게 나아갔는데, 한국은 노동운동이 정치세력화나 제도 개선 보다는 임금 문제 등 개별 자본과의 투쟁에 매몰되어 있나 하는 문제였다.
.....
민주화의 결과가 아니라 민주화 과정에서 브라질 노동운동은 처음부터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여 1979년 브라질노동자당(PT)을 창당하였다. 브라질 민주노총 격인 CUT는 그 후 PT가 나서서 1983년에야 만들었다. ...
그러던 1988년 대통령 직선제가 챙취되자 대선에 도전하기 시작하여 결국 2002년 노동자당의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지금까지 네 번 연속 집권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도 브라질처럼 ... 정당을 만들어 정당으로 대응해야 했다. ... 하지만 노동운동이 이를 훗날의 과제로 미루고 경제투쟁에만 매몰됐다.
그러면서 노동문제를 보편적 문제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당사자 문제로 축소되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왜곡돼 힘 있는 당사자들의 문제, 싸울 수 있는 노동조합의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대기업 노조는 계속해서 좋아졌지만, 싸우기도 힘들고 노동조합 만들 힘도 없는 노동자들의 문제는 방기됐다. 노동문제가 보편적 문제가 아니라 힘 있는 사람들의 '철밥통'을 지키는 운동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회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잃어버리고 자기 실리는 지키는 운동이 돼버렸다.   (75~76쪽)

 

아마도 진보진영이 정당화 되었다면 우리나라 정치 지형도 달라지지 않았을지 잘 모르겠지만, 진보정당이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진보에 표를 던지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진보는 무상보육 등의 의제를 내세웠지만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해 왔다. 진보정당이 표를 얻은 것은 민주진영이 정권을 잡았던 10년 동안에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 동안 진보정당은 보수진영이 아닌 민주정당 공격에 애를 썼다.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하지만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진보정당의 가치가 비로소 드러난게 아닌가 싶다.

 

 

시대의 변화를 봤을 때 노회찬의 생각처럼 진보에게 기회가 올 것 같지는 않다. 외려 새누리(옛 한나라)대 새정치(옛 민주당) 구도로 가는 것이 현실적인 것 같다. 물론 자기들만의 생각에 갖혀 있는 사람들 생각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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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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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유시민의 대답은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라이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있다. 책을 읽어라.

 

일단 잘난 사람들이 보여주는 겸손 또한 때로는 교만으로 느껴질때가 있다. 솔직히 책의 앞부분에서 그런 생각을 좀 했다. 그리 잘나지 않게 운좋게 살아왔다는 이야기에 소외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니까. 하지만 이내 저자의 속내가 드러난다. 하니 저자가 읽어 온 책이 드러난다.

 

먼저 볼 부분은 인간 존엄이다.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첫번째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존엄

"나는 힐링 열풍이 조금 불편하고 불안하다. 각자 남들을 조금 더 배려하고 제도를 더 합리적으로 바꾸기만 하면 모두 존엄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지 않나 걱정이 된다. 정직하게 말하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에게 타인의 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단지 삶의 환경을 조금 덜 냉혹하게 만들 뿐, 그 자체가 내 삶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52쪽)

"사람은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존엄이란 무엇인가? 이 단어의 어원은 라틴어 '디그니타스dignitas'이다. 존엄은 일상 언어생활에서는 존경과 고귀함을 의미한다. 철학적 정치적 학술적인 토론에서는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존엄성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견해를 길잡이로 삼을 만한다. 칸트에 따르면 존엄한 것은 '가치value'를 따질 수 없다. 어떤 것의 '가치'는 사람들이 가치를 인정하는지, 인정한다면 얼마만큼 높게 평가하는지에 좌우된다.
그러나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도덕적 차원을 가진 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이의 선택을 나타내는 것만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인간다움humanity, 존엄성dignigy이 그런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필수 조건은 자유의지free will이다. 살든 죽든, 인간의 존엄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과 관련되어 있다."(138-139쪽)

 

그런데 살다보면 어느쪽엔가 서야 할 일이 생긴다. 나는 생각에서는 진보이지만 생활 등의 다른 부분에서는 보수적인 부분이 많다. 하지만 우리사회에서 중도는 없다. 어느 편인가가 중요해지는데, 진보와 보수에 대한 유시민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구태연연하게 이야기하는 진보와 보수보다 훨씬 분명하게 다가온다.

 

내가 보수정당을 싫어하는 이유는 보수주의가 인간 여러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기 때문이다.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 독점욕, 증오, 복수심, 두여움, 강자의 오만, 약자의 굴종 같은 것이 진화적으로 익숙하고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보수주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 가운데서 가장 원초적인 것에 기반을 둔다. 그래서 어떤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에서나 강력한 보수정치 세력이 존재한다.

....

진보정당은 인간 본성 가운데 '진화적으로 새롭게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것을 대변하고 부추기는 정당이다. 자유, 정의, 나눔, 봉사, 평등, 평화, 생태 보호를 추구하는 것은 진화론적으로 새롭고 생물학적으로 덜 자연스러운 행동이다.(188쪽)

 

생물학적 접근법에 따르면 진보주의란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이다. 이러한 의미의 진보주의자는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러운 덜 자연스러운 생각과 행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진화가 인간에게 설계해놓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가족과 친척이 아닌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것은 기나긴 생물학적 진화의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난 행동 방식이다. 이것 역시 진화의 산물이기는 하지만 혈연 집단에 대해서만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동물 행동 일반과 비교하면 새롭고 덜 자연스러운 것임에 분명하다. (251쪽)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 보면 20세기 생각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계급이 어떻고... 음... 최근의 연구들 진화심리학, 인지과학이 어느 정도 해답을 주는데,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꽤나 아집에 빠져있다. 하지만 유시민 또한 이런 접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반갑고, 유시민이 단순히 알고 있는 것 보다도 더 알고 싶은 것이 많고, 다양한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다.

(왜 가난한 사람은 진보정당에 표를 주지 않고, 고소득층에 많은 이들이 진보정당에 표를 주는 것일까?) 나는 계급적 귀속이 사회적 의식을 결정하는 유일한 요소가 아니며 가장 결정적인 요소 역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의식의 주체는 계급이 아니라 개인이다. 계급적 귀속과 같은 사회적 환경이 곧바로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은 뇌활동의 산물이고, 뇌는 유전자가 만든다. ...

거칠게 대답하면 '나는 뇌'이다. 내 자아는 뇌에 기거한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뇌가 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뇌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방식으로 일하는 것일까? 모르면 자료를 조사하는 '먹물'의 습관에 따라 근자에 대유행하고 있는 뇌과학 과련 진화심리학 책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놀랍게도 인간 일반과 내 자신을 이해하는 데 철학서를 비롯한 인문학 책 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다. (110쪽)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공감하는 능력은 자연이 우리에게 준 본능이다. 유복한 집안의 머리 좋은 도련님이었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앵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쓴 것도 바로 이 본능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상은 계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두뇌에서 만들어진다. 계급적 귀속이 사람의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을 전적으로 구속하지는 못한다. 생각은 자유롭다. 그 무엇도 가둘 수 없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똑같이 서울 강남에 살면서 특목고를 나와 명문대학에 간 젊은이들 중에서 '우파'와 '좌파'가 나온다. 이유가 무엇일까? 철학자나 정치학자, 사회학자 누구도 그럴듯한 설명을 해주지 못했다.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준 것은 뇌 과학자들이었다. 인간의 대뇌피질에는 특별한 기능을 하는 신경세포가 있다. 이것이 타인의 고통이나 기쁨에 감응하게 만든다. 과학자들은 여기에 '겨울 뉴런 mirror neuro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245쪽)

 

유시민에게 듣는 어떻게 살것인가? 개인의 충실하고 개인의 존엄성을 추구하고(놀고 일하고) 타인에 대한 공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사랑하고 연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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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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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불편하다.

5명 모두 먹고 살만한 집에서 태어났다. 사회에 대한 고민이 없어도 삶을 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래서 관계에 대한 고민이 그를 16년이나 붙잡고 있을 수 있다.

우연이라고 할까, 다섯명은 모두 대도시 교외의 '중상류' 가정에서 자랐다. 부모는 이른바 베이비붐 세대로, 아버지는 전문직이거나 대기업 사원이었다. 자식 교육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계층이었다. 가정 또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평온하고 이혼한 부모도 없었으며 어머니는 거의 집에 있었다. 학교는 대학 진학률이 높은 명문고에 성적 수준도 꽤 높았다. 생활 환경으로 볼 때 그들 다섯은 차이점 보다 공통점이 더 많았다.(13쪽)

 

이 책의 소재는 '색채 가득한 네 명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24쪽)이다. 다섯명은 캠프에 참여했다가 '나는 지금 올바른 장소에서 올바른 친구를 만났다'(12쪽)는 느낌으로 한 그룹이 되었다. 쓰쿠루를 제외한 나머지는 이름에 색깔이 있다.

남자 둘은 성이 아카마쓰(赤松)와 오우미(靑海)이고 여자 둘은 성이 시라네(白根)와 구로노(黑埜)였다. 다자키만이 색깔과 인연이 없었다. ... 다른 넷은 당연한 것 처럼 곧바로 서로를 색깔로 부르게 되었다. '아카(赤)','아오(靑)','시로(白)','구로(黑)'라고. 그는 그냥 그대로 '쓰쿠루'라 불렸다. (14쪽)

그러나 쓰쿠루는 무언가를 짓는 다는 뜻의 '作'을 가지고 있다. 다자키 쓰쿠루(多崎作).

 

이들 5명이 모이면 하나와 다름없었다. 나고야에서 만난 그들은 쓰쿠루가 도쿄의 대학으로 입학하고 1년 후 5명 그룹이 깨진다. 어느 순간 쓰쿠루는 그 모임에서 추방을 당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다. 그의 안에 있는 무거운 짐을 새로운 여자친구 사라가 눈치채고 그들의 연락처를 알아낸다. 그리고 쓰쿠루는 16년만에 그들을 하나씩 찾아다닌다. 그가 자신의 추방이유를 알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상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그 짐을 해결해야만 한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서 '그가 시로를 강간해' 모임에서 그를 배제시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듣게 된다. 물론 그들은 쓰쿠루가 시로를 강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핀란드에서 만난 구로(에리)의 설명처럼 모임을 지키기 위해 쓰쿠루를 떨쳐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 그들은 다섯일 때 완벽한 존재였다. 네 색깔의 균형을 잡아준것이 바로 색채가 없는 쓰쿠루였다.  

 

쓰쿠루는 어릴 때 부터 역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역과 관련된 업무를 하게 된다. 이는 그의 이름과도 관련되고, 5명의 그룹과도 연관된다. 다른 네명이 각각의 기차라면 쓰쿠루는 역이었다. 다섯명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쓰쿠루라는 역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소설적 완성도에서는 글쎄다.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고 독자는 가만히 읽고, 동화되기만 한다. 독자가 생각해야 할 것은 없다. 초반부에는 3인칭 소설이라고 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사전 상황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들이 잘 짜여진 스토리가 되어 서로 잘 엮여진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구로(에리)는 너무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필요없는 설명이 너무 많다. 핀란드 부분부터는 책을 읽는 속도가 떨어진다. 다섯명의 모임에 있어서 쓰쿠루의 역할이 너무 자세하게 설명이 된다. 굳이 그렇게 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색채가 없는 쓰쿠루의 역할과 역을 좋아하던 쓰쿠루, 그리고 쓰쿠루의 이름속에서 그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핀란드의 뒷부분에 가서는 중언부언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생뚱맞은 부분도 나온다. 프란츠 리스트의 Le Mal Du Pays 순례의 해. 소설의 제목으로 생각한 그리고 16년만에 과거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해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억지로 끌어다 맞춘 느낌이다. 클래식에 문외한이 아닌데도 라자르 베르만이 생소한데, 핀란드에서 라자르 베르만과 알프레드 브렌델은 비교하는 장면이란. (혹시 본인의 음악에 대한 자랑을 소설속에서 이딴식으로)

 

읽고나니 이 소설이 리얼리즘 소설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장정일의 독서평처럼 시로는 쓰쿠루에게 강간당했다고 했는데 왜 그녀가 교살당했을 때 쓰쿠루는 조사를 받지 않았을까? 여기저기 빈틈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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