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에는 1월말 2월초 벚꽃이 필 무렵 다녀왔다. 2013년에 이어 두번째




(이전 패이퍼에도 남겼듯이) 불과 서른시간 전에 예약했기 때문에 계획없이 호텔을 중심으로 동선을 짰다. 


  
* 왼쪽 동선이 2013년, 오른쪽 동선이 2019년

오키나와를 한번 더 다녀올 생각인데, 그 때는 남부를 둘러볼 생각이다. 남부에도 볼 만한 자연경관이 있고, 거기에 더해 평화공원 등 오키나와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공간이 있다. 

지금까지는 다소 오키나와를 다룬 가벼운 책을 읽었는데, 그 때는 조금 무거운 내용을 읽을 생각이다. 

마침 시사인 에 참고할 만한 기사가 있다. <두 섬>이라는 책을 펴낸 이명원 평론가와 여행작가 전명윤의 글이다. 

환타(전명윤) :<두 섬>에도 나오지만 당시 오키나와 전쟁에서 조선인 1만명이 죽었다(당시 오키나와에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1만5000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 남부에 있는 평화공원 위령비에 보면 대한민국(82명)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64명) 출신의 이름이 분리되어 새겨져 있다. 사망자에 비해 인원이 너무 적었다. 단순히 유족들이 비극적인 죽음을 기록하는 걸 반대했기 때문은 아니었던 것 같더라.


이명원:자민당 계열 지사가 등장한 뒤 예산 지원을 끊어버렸다. 보수화된 오키나와 정부가 추가 발굴 작업을 지원하지 않았다. 시신을 수습할 때도 일본군은 유족과 시신의 DNA를 비교해서 발굴했지만, 조선인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보상 문제가 불거지기 때문에 아예 원천 배제했다. 그래서 대다수 조선인은 실종자가 되어 있다.


환타:오키나와 평화공원에 가면 미군에 쫓기던 사람들이 집단 자결하는 장면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영상을 보면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마치 삼단뛰기 하듯 뛰어내린다. 수학여행 온 일본 학생들은 그걸 보고 운다. 당시 일본 군부가 미군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며 오키나와인들에게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나이 든 오키나와 사람들을 만나보면 일본 본토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한국인의 그것보다 더 적대적인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장면을 보고 이해했다.


이명원:오키나와 평화공원의 딜레마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다 섞여서 새겨졌다는 점이다. 모두가 희생자가 되면서 역사적 맥락이 휘발됐다. 원래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을 총으로 겨누는 조형물이 있었는데, 자민당 쪽에서 (총구 방향을) 바꾸도록 했다. 오키나와에 있던 조선인 문제는 아직 조사할 게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정부 산하의 전쟁자료실에 오키나와에 대한 웬만한 자료가 다 있다. 당시 일본 군부가 오키나와에서 전쟁 증거를 제대로 소각하지 못했다. 우리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사실을 파헤칠 수 있다.


환타:나는 가이드북 작가치고는 역사적 배경에 분량을 많이 할애하는 편인데, 그런 점에서 기존 가이드북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어떤 가이드북은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은 소개하지 않으면서 일본 우파들이 좋아하는 히메유리 탑(일본 전쟁에 앞장선 학생을 기리는 탑)은 소개해놓았다.


http://v.media.daum.net/v/20171016085713830


(시사인 해당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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