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번의 정신은 모든 저명한 서구 역사가들 중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하고 눈부시다. 기번은 역사를 탐구하고, 구성하고, 서술하면서 역사 분야뿐 아니라 그 어느 문학 장르의 작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걸작을 만들어 냈다.

 - 아놀드 토인비

 

 * * *

 

꼬박 두 달이 넘도록 매달린 끝에『로마제국쇠망사』를 다 읽었다. 후련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마침내 장대한 산맥 하나를, 중도에 힘에 부쳐 지레 포기할 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지닌 채 성큼 들어섰던, 온갖 험난한 지형과 울창한 삼림들과 사나운 야생의 짐승들로 둘러싸인 그런 산맥을 용케 넘어섰다는 후련함이 왜 없겠는가. 소문으로만 익히 들어왔던 에드워드 기번의 장려한 문장들과 벌써(!) 이별이라니 진한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때로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처럼 재기발랄하고 다정다감한 문장들을 툭툭 던지면서도, 필요할 때마다 맹렬한 폭포수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그의 문장들은 얼마나 박력이 넘치고 해박하고 놀라운가. 숱한 역사가들이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모른 체 일부러 덮어버리곤 했던 역사의 진실 앞에서 그의 탐구심은 얼마나 맹렬하게 타오르고, 그의 판단력은 얼마나 날카롭고, 그의 기개는 얼마나 당찼던가. 역사가에게 주어진 자유 혹은 의무를 위해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단호하게 써내려간 그의 붓끝은 얼마나 매섭고도 아름답게 빛나는가.

 

이 방대한 역사책을 읽고 난 감회를 쓰자니 문득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옛날엔 책 한 권을 뚝 떼면 책거리로 '떡'을 지어 먹었다. 나도 초등학교에 다닐 때 책 덕분에 떡을 얻어먹은 적이 있었다. 당시 중학교에 다니던 형이 우리 마을에서 학식이 가장 높으신 어르신 한테서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을 배웠는데, 그 중에 어떤 책을 다 배우고 났을 무렵에 어머님께서 떡을 만들어 어르신한테 갖다 드렸고, 형 덕분에 나에게도 떡을 먹을 기회가 돌아왔던 것이다. 시쳇말로 마누라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말은 누구나 들어봤겠지만, 책 한 권을 뗐다고 떡이 생기더라는 말을 들어보긴 처음인 알라디너도 없지는 않을 듯하다. 사실, 알라디너에겐 책을 다 떼면 짐만 생긴다.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지만 괜히 독후감을 써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생겨나니 말이다.

 

아무튼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책은 너무나 방대하기로 널리(!) 소문난 책인지라, 왠지 '책거리'로 떡이라도 누구한테서 받아먹고 싶어지는 그런 책임에는 틀림없다. 우선 외관 하나만 보더라도 이 책은 얼마나 우람한가.

 

(책소개에 나오는 사양은 이렇다. 양장본, 4,150쪽, 152*228mm, 6,225g. 실제로는 3,719쪽이다 )

 

 

이 방대한 저작을 읽고 난 느낌을 솔직히 어떤 방식으로 정리해야 옳을지 잘 모르겠다. 역사가나 문장가로서의 작가의 탁월함과 위대함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수도 없고, 얄팍한 독서 이력을 지닌 머나먼 변방의 일개 독자가 느끼는 경외감과 곤혹스러움과 왜소함만을 강조할 수도 없을 뿐더러, 작품 속에 담긴 온갖 엄청난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들에 대해 새삼 개괄할 수도 없고, 온갖 사료들로부터 그지없이 꼼꼼하게 발굴한 끝에 페이지마다 거장다운 솜씨로 흩뿌려놓은 그 많은 지식들을 한낱 가냘픈 조막손으로 솜씨 좋게 다시 옮기고 펼칠 재주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책에 대한 감회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남겨보고픈 욕망은 억누르기가 어렵다. 책을 읽는 동안에 수없이 자주 느꼈던 독특한 감회들을 이런 기회에 기록하지 않으면 영영 되살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감회를 밝힐 때 첫 번째로 눈길을 돌려야 마땅할 방향은 당연히 작가의 서재 쪽이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꼬박 20년 이상을 로마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온전히 다 바쳤지 싶다. 그는 아마도 이 책을 쓰기 위해 결혼도 기꺼이 포기했던 듯하다. 불후의 작품을 쓰기 위한 그의 노고의 흔적들을 살펴보면 평탄한 결혼 생활과 장기간의 방대한 연구 과정을 필요로 하는 걸작의 출산이 순조롭게 병행되기는 어려웠으리라는 생각부터 앞선다.

 

그가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다루는 역사의 범위는 5현제의 치세가 시작되는 서기 98년부터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1453년까지 1,355년 동안이다. 그러나 어떤 역사가라도 이 기간 동안의 로마 역사를 깊이있게 다루기 위해서라면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서기 97년까지의 선행 역사를 도저히 따로 떼어놓을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로마제국 쇠망사』는 로마가 건국된 B.C 753년부터 5현제의 치세가 시작되기 직전인 기원후 97년까지 850년의 역사가 자연스레 덧보태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로마 건국 초기의 역사가 상당 부분 자세하게 다뤄진다. 또한 건국 초기의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에 이를 때까지 로마의 역사를 좌지우지했던 숱한 인물들도 수없이 자주 등장한다.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스키피오 가문의 영웅들을 비롯하여,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브루투스, 카토,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등이 여러 차례 기번의 붓끝에서 되살아 난다.

 

로마의 건국으로부터 제국의 멸망까지 다루는 데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또다른 역사는 수많은 이민족들의 역사다. 여기에 포함되는 국가와 민족들은 쉽게 말하자면 아메리카 신대륙을 빼고는 거의 다 포함된다고 봐도 좋다. 로마 제국의 영토와 겹쳤던 프랑스, 독일,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이란, 이라크, 사우디 정도로만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의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는 물론 저 멀리 볼가 강과 돈 강 너머에 살았던 러시아 대륙, 티무르가 지배했던 중앙아시아, 징기스칸의 몽골, 무굴제국의 인도, 중국은 물론 '고려(Corea)'까지도 두루 자세히 언급된다.

 

이 작품이 다루는 역사적인 무대의 시공간적인 방대함이야말로 외형적으로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봐도 좋다. 물론 아놀드 토인비가 쓴 『역사의 연구』라는 작품이 전 인류의 전 지구적인 역사를 다룬다는 점에서는 훨씬 더 방대한 시공간을 자랑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로마의 기나긴 역사에 대한 기번 특유의 깊이 있는 고찰, 로마 제국을 둘러싸고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받았던 수많은 이민족 국가들과의 경쟁에 대한 상세한 연구(게르만족, 사라센족, 페르시아, 몽골족, 타타르족, 투르크족 등), 십자군 전쟁에 관한 자세한 연구,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과 종파 간의 갈등, 그리스도교 세력들과 이슬람 세력들과의 분쟁 등을 포함하는 기번의 방대하고 깊이 있는 연구는 토인비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그 어떤 역사책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방대함과 깊이를 자랑한다.

 

기번의 역사책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느끼게 되는 특별한 감동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저자의 방대한 독서 경험과 놀라울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이다. 그는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기록해 나가는 동안에 특별히 기억할 만한 역사적 장소와 장면을 묘사할 때마다 거기에 딱 어울릴 만한 또다른 인물이나 장면들을 다른 책에서 끌어와 절묘하게 겹쳐 놓는다. 똑같은 무대에서 주인공만 바뀐 채 500년 혹은 100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지는 '영웅들의 행위'를 비교하는 재주야말로 기번을 따를 역사가가 없을 듯하다. 그가 로마의 역사를 설명하는 동안에 끊임없이 불러 내는 인물들은 역사상으로 실재했던 영웅들도 많지만, 특별히 문학작품들로부터 인용하는 경우도 아주 흔하다.

 

가장 자주 인용되는 작품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이다. 단순히 로마 제국의 영토가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와 겹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번의 호메로스에 대한 이해는 참으로 웅숭깊은 데가 많다. 훗날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를 설명하는 몇몇 대목들만 보더라도 그는 호메로스를 얼마나 자주 불러냈던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였던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 사실상 볼모나 마찬가지 상태에서 로마 황제였던 사촌 형님 콘스탄티우스와 함께 전차를 타고 궁정으로 귀환하는(사실상 끌려가는) 동안 마음 속으로 암송했던 싯구절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운데 어떤 대목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놀라운가. 율리아누스 황제는 특히 웅변 실력도 탁월했는데, '호메로스의 연구'를 통해 그런 실력을 갈고 닦았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메넬라우스의 단순하고 간결한 화법, 겨울의 싸락눈처럼 쏟아져 나오는 네스토로의 달변, 오뒷세우스의 감상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웅변을 모방하는 방법이야말로 율리아누스가 호메로스를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라는 식이다.

 

기번이 호메로스를 어떤 식으로 인용했는지 두 대목만 더 소개하고 넘어 가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경기 대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그리스에서는 저명한 이들이 직접 경기에 참가한 반면, 로마에서는 관람객들이 저명한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올림피아 경기장은 부와 공훈, 야망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경기에 출전하는 자가 스스로의 기술과 민첩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면 디오메데스와 메넬라오스의 발자취를 따라 전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봄직도 했다.(56쪽)

 

(기번의 주석)

『일리아스』 23권을 읽어 보면 전차 경주의 방법과 예절, 그 열정과 정신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고대 올림피아 경기에 관한 학술 논문을 보면 더욱 흥미진진하고 근거가 분명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그는 거친 군대 생활을 통해 강인한 심신을 무쇠처럼 단련했다. 스뱌토슬라프는 곰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말안장을 베개 삼아 땅 위에서 잠자곤 했다. 그는 먹는 음식도 거칠고 소박해서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고기를(주로 말고기) 석탄에 구워 먹었다. 실전을 거치면서 그의 군대는 안정되고 규율이 잡혀갔다. 대장이 누리는 것 이상의 사치를 감히 누릴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532쪽)

 

(기번의 주석)

『일리아스』 9권에 나오는 아킬레스의 식사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서사 시인이 이런 묘사를 했다면 자기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독자들의 비위를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의 서사시는 조화로우며 사어(死語)라서 실감나게 다가오지도 않는다. 2700년의 세월을 둔 지금으로서는 고대의 원시적인 풍습에 재미를 느낄 따름이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호메로스 다음으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들은 고대의 시인, 철학자, 역사가들이다.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등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와 희극을 쓴 메난드로스, 고대 로마의 시인이었던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 철학자 키케로, 역사가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리비우스,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가 대표적이다. 기번과 비교적 가까운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도 자주 인용되는데, 손에 꼽을 만한 인물들은 페트라르카, 마키아벨리, 세르반테스,  셰익스피어, 밀턴, 몽테스키외, 볼테르, 데이비드 흄, 루소, 아담 스미스 등이다.(특히 볼테르, 데이비드 흄, 아담 스미스는 기번과 직접적으로 교류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쓴 작품 속의 내용들이 얼마만큼 정교하게 '로마제국 쇠망사'에 녹아드는지는 기번의 작품을 직접 읽어보지 않은 독자들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울지 모르겠다. 가령 셰익스피어가 쓴 『헨리 4세』의 주인공은 내란을 통해 권력을 찬탈했기 때문에 무너져 가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더라도 도와줄 여력이 전혀 없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런 '놀라운 주석'을 덧붙인다.

 

여러 날 런던에 머무는 동안 마누엘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영국은 성전에 참여할 준비를 하기에는 프랑스보다도 상황이 더욱 좋지 않았다. 이 해에 세습 국왕이 왕위에서 쫓겨나 사형을 당한 데다가, 지금의 왕 헨리 4세는 왕위를 성공적으로 찬탈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야망에 대한 벌을 받기라도 하듯이 시기심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랭커스터 가문 출신의 헨리 4세는 끊임없이 왕좌를 위협하는 음모와 반역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성전에 직접 참전하는 것은 고사하고 병력을 빌려 줄 여유조차 없었다. 헨리 4세는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의 인품을 칭송하며 연일 연회를 베풀어 주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만약 영국의 군주가 십자가를 메는 체 했다면, 그것은 경거한 대의명분을 따르는 시늉으로 신민들의 마음과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달래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394∼395쪽)

 

(기번의 주석)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는 왕이 십자군 서약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맨 마지막에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죽었을 것이라는 추측으로 극을 마친다.

 

(나의 생각)

셰익스피어의 『헨리 4세』라는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나는 그 작품을 읽고 난 뒤로도 헨리 4세가 다 쓰러져 가는 동로마 제국 황제로부터 간절한 파병 요청을 받았을 줄은 꿈에서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또한 그 작품이 시작되는 부분이 '십자군 전쟁'과 연관된 줄도 전혀 몰랐다. 또한『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으면서 헨리 4세가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느끼게 될 줄도 몰랐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책의 표지를 뒤집어 펼치면 각 권마다에 해당하는 세계 지도가 펼쳐진다. 겉표지를 벗긴 책의 모습은 왠지 너무 고색창연한 색상이어서 조금은 아쉽다.)

 

이토록 많은 인물들의 작품을 『로마제국 쇠망사』에 절묘하게 버무려 녹여 낸 기번의 박학다식함과 정교함에 놀라지 않을 독자가 얼마나 될까. 기번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자주 느꼈던 생각 가운데 하나는 훌륭한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체력뿐만 아니라 책력(冊歷, '책을 읽은 이력'을 뜻하는 나만의 신조어)도 알맞게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기번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내가 이미 읽었던 책들과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얼마나 기쁘고 새로운 힘이 솟구치는 걸 느꼈던가. 기번의 책들을 읽는 동안에 내가 아직까지도 읽지 못한 무수한 책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얼마나 의기소침해지고 시무룩해졌던가.

 

이 책을 읽은 감회를 정리하기 위해 '기번의 서재 쪽으로' 향했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언급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기번의 문장력이다. 기번 특유의 지독한 만연체는 새삼스레 강조할 필요가 없다. 6권을 읽는 동안에 '만연체' 때문에 문장의 정확한 뜻을 해독하는데 애를 먹은 경우가 아예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아마도 기번에게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났다고 믿고 싶다. 그런 문장들만 제외한다면 기번의 독특한 만연체가 독해를 특별히 방해한다거나 작품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도리어 특유의 긴 호흡 한 번으로 유장하고도 장중하게 역사를 매조지하는 점에서는 기번의 만연체만큼 멋들어진 역사 서술도 찾기 어렵다는 생각도 자주 들었다.

 

기번의 역사책 속에서 가장 매혹적인 문장들은 아마도 '너무나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표현들'을 역사 서술에 서슴없이 과감하게 도입했다는 점일 듯하다. 그런 문장들은 일일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하는데, 빛나는 명문장들을 일일이 여기에 소개할 수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수도사들은 독방에서 보내는 낮 시간에는 개개인의 신앙이나 열정에 따라 묵도나 통성 기도를 했다. 저녁이 되면 모두 모여서 밤이 되어도 자지 않고 수도원의 공공 예배에 참석했다. 이집트의 맑은 하늘에는 거의 구름이 끼는 일이 없었으므로 정확한 시간은 별의 위치로 정해졌다. 예배 시간을 알리는 신호는 투박한 모양의 뿔피리나 나팔을 두 번 울려 광활한 사막의 침묵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불행한 사람들의 마지막 피난처라 할 수 있는 수면마저도 엄격히 제한되었다. 노동도 쾌락도 없는 수도사들의 공허한 시간은 느릿느릿 무겁게 흘러갔으므로, 하루가 끝나기 전까지 그들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태양의 지루한 발걸음을 탓했다.(448∼449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3권』

 

 

십자군 전쟁의 일단을 소개하는 대목은 이렇게 멋지게 마무리된다.

 

왕실 역사가인 아불페다는 하마 부대에 종군하면서 성전을 직접 목격했다. 아무리 타락한 프랑크인이라 해도 열정과 절망으로 용기를 불태웠다. 그러나 그들은 열일곱 명이나 되는 대장들의 불화로 갈가리 찢겨 사방에서 술탄의 병력에 제압당했다. 33ㅇ리간의 공방전 끝에 이중 성벽이 이슬람군에게 돌파당하고, 중심 탑도 그들의 공성 무기 앞에 무너졌다. 마말루크인들의 일제 공격에 도시는 초토화되고, 6만 명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죽음 아니면 노예가 디는 운명을 맞았다. 요새에 가까운 템플 기사단의 수도원은 사흘을 더 버텼으나, 대장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으며 500명의 기사 중 살아남은 자는 단 열 명이었다. 그러나 부당하고 잔인한 사형 명령에 따라 교수대에서 고통을 겪었다는 점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보다 운이 나빴다. 예루살렘 국왕, 총대주교, 요하네스 기사단의 대장은 해안에 도착할 수 있었으나 바다는 거칠었고 배도 부족했다. 대부분의 도망자들은 키프로스 섬에 닿지 못하고 익사했다. 술탄의 명령으로 라틴인들이 건섫나 도시의 교회와 요새들이 파괴되었다. 탐욕이나 공포심 때문에 여전히 일부 신앙심 깊은 비무장 순례자들에게 성묘로 가는 길을 열어 주기고 했으나, 세계적인 항쟁이 그토록 오랜 세월 메아리쳤던 해변에는 이제 슬픔에 잠긴 고독의 침묵만이 깔렸다.(113∼114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6권』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진두지휘한 끝에 완성된 성 소피아 성당을 묘사한 대목은 또 얼마나 철학적인가!

 

어느 시인은 성 소피아 성당의 초기 모습의 광휘를 보고, 10∼12종의 대리석과 벽옥, 반암의 색상과 음영 그리고 반점까지 하나하나 다 열거하면서, 특히 각 광석의 반점은 자연이 매우 열심을 다하여 다양하게 만들어 낸 것으로 마치 매우 뛰어난 화가가 배합하고 대조시킨 것 같다고 감탄했다. 그리스도의 승리로 이교도들에게서 빼앗아 온 마지막 노획품으로 이 성당을 장식하기도 했지만, 그 값비싼 돌의 대부분은 소아시아의 채석장, 그리스 본토와 여러 섬들, 이집트, 아프리카, 갈리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 둥근 천장의 빛나는 모습은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했다. 지성소에는 4만 파운드가 넘는 은이 사용되었고, 성스러운 물병들과 제단의 옷들은 순금으로 만들어지고 수많은 보석들로 장식되었다. 이 교회가 땅에서 위로 2큐빗의 높이가 되기 전에 이미 4만 5200파운드의 돈이 소비되었고, 결국 전체 비용은 총 32만 파운드에 이르게 되었다. …… 장엄한 성전은 그 나라의 취향과 종교를 반영하는 칭찬할 만한 기념비이다. 열렬한 신자는 성 소피아가 신의 거처이거나 심지어 신이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건축물도 성전 바닥을 기는 가장 하찮은 벌레가 만들어 놓은 벌레집과 비교해 보면, 인간의 재주란 얼마나 둔하고 그 수고는 얼마나 하찮은지!(93∼94쪽)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장구한 세월에 걸쳐 펼쳐지는 무수한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두루 살펴보노라면 새삼 인간의 삶이 하찮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그 드넓은 공간이라고 해 봐야 기실 지구에서 충분히 멀리 벗어난 거리에서 바라보면(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이미 그만큼 멀리 떨어진 우주탐사선에 딸린 특별한 눈으로 그런 광경을 생생하게 바라봤다!) 거대한 우주 속에서 빛나는 창백한 푸른 점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머나먼 우주 밖에서 보내온 한 장의 감동적인 사진에 마음을 온전히 다 빼앗긴 채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를 한낱 부처님의 손바닥 가운데 일부인 것처럼 하찮게 여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우리의 현실 공간으로 돌아 오자.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수많은 도시들과 바다와 강과 산맥들은 우리의 귀에 익숙한 경우보다는 낯선 경우가 훨씬 많다.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옛 지명 그대로 쓰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그 이름이 변치 않은 도시들, 가령 로마, 밀라노, 라벤나, 나폴리, 베네치아, 파리, 아테네,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메카, 메디나 등을 만나면 반갑기도 하고 이해하기도 쉽지만, 그 반대인 경우에는 보다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인터넷을 뒤져야 하는 번거로움도 뒤따랐다.

 

카르타고는 오늘날의 튀니스 북동쪽 도시, 틴기스는 오늘날의 탕헤르, 싱기두눔은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 베로이아는 오늘날 시리아 북부 도시인 알레포, 니시비스는 지금의 터키 누이시빈, 아미마는 지금의 터키 디얄바클, 싱가라는 지금의 이라크 신자라, 안티오크는 지금의 터키 안타키아, 나이수스는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니슈, 무르사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오시예크, 크테시폰은 지금의 이라크 테시폰, 트레브는 지금의 독일 트리어로 명칭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읽는 작업은 흥미로울 때도 있지만 독서의 흐름을 방해할 때도 많았다.

 

수많은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이 보상이나 약속을 믿고, 혹은 전리품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혹은 그들이 정복하는 영토는 영원히 그들 소유로 해 주겠다는 보장을 믿고 라인 강을 건넜다. 그러나 임시 방편으로 이렇듯 경솔하게 야만족들의 탐욕을 부추긴 황제는 일단 로마의 비옥한 영토 맛을 본 이 막강한 야만족 동맹군들을 다시 쫓아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닫고 후회해야만 했다. 이 제멋대로인 도적떼들은 충성과 반역도 구분하지 못하고 그들이 원하는 재산을 소유한 로마인이라면 누구든 적으로 간주했다. 통그르, 콜로뉴, 트레브, 보름스,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를 비롯한 마흔다섯 개 도시와 그보다 훨씬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그들에게 약탈당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했다. 여전히 조상들의 신조를 충실하게 지키던 게르마니아 야만족들은 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것을 혐오하면서 그런 곳을 감옥이나 무덤 등으로 불렀다. 그들은 라인 강, 모젤 강, 뫼즈 강변에서 독립 가옥들을 짓고 큰 나무를 쓰러뜨려서 길을 가로막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기습 공격의 위험에 대비했다.(134쪽)

 

(나의 생각)

통그르는 벨기에의 통게렌, 콜로뉴는 독일의 쾰른, 트레브는 독일의 트리어, 보름스와 슈파이어는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 주의 보름스와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는 프랑스 북동부에 있는 도시로 프랑스어로는 스트라스부르, 독일어로는 스트라스부르크로 불린다. 유럽의 도시 이름에 익숙하지 않은 변방의 독자들은 이들 도시가 옛 이름인지 현재 쓰이는 이름인지조차 분간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나는 이들 도시 가운데 트리어만 가 봤고, 트리어를 떠난 뒤 스트라스부르크를 그냥 지나쳤던 일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다루는 수많은 도시들과 산과 강들을 살필 때는 '구글 어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 수만 혹은 수십 만의 군대가 건곤일척의 대전투를 벌였던 유명한 장소들이 지금은 그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폐허로 변한 곳도 드물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위치조차 파악하기 어려운 장소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유명한 전쟁이 과연 로마 제국의 어드메쯤에서 일어났는지를 지구의를 돌려 보듯이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현대인들에게만 주어진 놀라운 특권이 아닐 수 없다. 기번이 유럽의 온갖 도서관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켜켜이 먼지가 쌓인 채 낯선 고대의 언어들로 쓰여진 수많은 사료들을 뒤지거나, 혹은 고대 여행자들의 온갖 자질구레한 기록들과 지리지(志)들까지 꼼꼼하게 살피고 비교 검토한 끝에 최대한으로 오류를 바로 잡아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위치 정보는 오늘날의 독자들이 그냥 책상 앞에 앉아서 편리한 검색과 클릭만으로 찾아가기가 미안할 정도다.

 

아무튼 그렇게 드넓은 로마 제국의 영토들을 (기번의 문장과 구글 어스를 따라)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가끔씩 '나도 이미 가 봤던 장소들'을 마주치는 기쁨은 생각보다 컸다. 이탈리아의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같은 도시들은 단 한 번밖에 찾지 못했지만 그런 도시들을 가 보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싶은 아찔한 생각마저 들었다.(특히 '제국의 수도'로서 너무나 특별했던 도시인 로마에 대한 기번의 언급은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자주 반복되기 때문에 그 도시를 미처 가 보지 못한 독자들에게 엄청난 여행 욕구를 불러일으킬 게 틀림없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 성 베드로 대성당, 콜로세움,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포로 로마노 등등에 대해서 기번은 얼마나 자주 감탄하며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던가.)

 

프랑스의 경우 수도인 파리밖에 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이번에 뼈저리게(?) 느꼈다. 아비뇽, 아를, 릴, 스트라스부르크 등등의 도시들에 대해 단 하나의 이미지조차 떠올리지 못한다는 건 괴로운 일임에 틀림없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의 부다페스트, 독일의 여러 도시들(뮌헨, 베를린, 드레스덴, 하이델베르크, 트리어 등)을 여행했던 경험은 기번의 책을 읽는데 특히 도움이 되었다. 이집트의 카이로, 멤피스, 아스완, 리비아 사막 등을 여행했던 경험은 그리스도교의 발달과 이집트 수도원의 발달 과정을 이해하는데 유익했다.(알렉산드리아를 빠트린 건 두고두고 아쉽다. 기번의 책에서도 이 도시는 특별 취급을 받는다.)  저 멀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실크로드와 티무르의 무덤을 찾았던 여행 경험은 타타르족의 대활약을 다룬 대목들을 읽을 때 특히 유익했다. 유럽을 여행할 때 구경했던 여러 강들도 독서에 보탬이 됐다. 이집트의 나일 강, 독일의 라인 강, 모젤 강, 엘베 강, 네카 강, 동유럽을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을 여행지에서 만난 경험은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기번의 독서와 결합될 때 한층 강렬하게 되살아났다. 지중해, 아드리아해, 북해, 대서양까지도 여행지에 포함시킨다면 너무 지나친 걸까.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는 동안에 맞닥뜨리는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이 여전히 내게 단 하나의 이미지도 불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크게 놀랍지는 않다. 그건 로마 제국이 그만큼 드넓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유럽권의 독자들이 유럽을 이웃나라처럼 쉽사리 드나들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라벤나, 볼로냐, 피사, 파비아, 제노아, 팔레르모 등), 스페인(바르셀로나, 톨레도, 발렌시아, 코르도바, 세르비아, 그라나다 등)과 포르투갈(리스본),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들(알렉산드리아, 트리폴리, 카르타고, 탕헤르 등), 그리스(아테네, 크레테 등), 터키(콘스탄티노플, 아드리아노플, 니케아, 에페수스, 안티오크, 알레포 등),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메카, 메디나, 바그다드, 티그리스강, 유프라테스강, 흑해, 홍해, 카스피해 등등 수많은 도시들과 강과 바다가 내겐 여전히 미답의 상태로 남아 있다.

 

여행지에서 돌아와 이제 다시 기번의 책으로 들어가 보자.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흔히 '기번의 잡담'이라고 불리는 저자의 각주가 엄청나게 붙어 있다. 기번이 원본에 달아놓은 깨알같은 각주는 무려 8,300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국내 완역본 기준으로 따져 보더라도 한 페이지에 평균 2개가 넘는 각주가 딸려 있는 셈이다. 영문판조차 이 방대한 주석이 부담스러워 4,700여 개로 대폭 줄인 '버리 판'이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국내 최초의 완역본이라고 자부하는 민음사 판본 또한 이 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아무튼 기번의 각주가 너무나 방대한 까닭에 번역자의 주석이 단 하나도 붙지 않는 건 아쉽다. 온갖 함축과 비유가 가득 담긴 기번 특유의 문장들에 대해 '번역자의 주석' 하나 없이 독자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 책을 모조리 읽어내야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적잖은 선행 독서를 요구하는 셈인지도 모르겠다.(유럽의 지리뿐만 아니라 종교, 문화, 역사 등에 두루 생경할 수밖에 없는 비유럽권 독자들이 기번의 역사책을 능숙하게 독파하기란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선행 과제로서 다음 두 가지를 권장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유럽과 동유럽을 적어도 두세 번쯤은 여행할 것. 많을수록 좋으니 서양 고대의 이름난 고전들을 최대한 많이 읽을 것. 물론 이 책부터 먼저 읽고 난 뒤에 강렬한 자극을 받고 나서 서둘러 유럽 여행길에 오르거나, 서양 고전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방대한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의 말미마다 적어 두었던 메모를 보노라니 이 책에 담긴 내용이 얼마나 풍성했던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까마득한 옛날 <세계사 수업 시간>에 주마간산 격으로 배웠던 온갖 세계사적 사건들을 기번의 책을 통해 비로소 소상하게 알게 되는 건 '기본 소득'일 뿐이다. 예수의 가시 면류관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옮겨오게 되었는지, 암살자(assassin)라는 단어가 페르시아의 전멸한 종교 분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산 마르코 대성당을 장식하는 네 마리의 청동 기마상은 언제 어떤 경로로 베네치아로 옮겨 오게 되었는지, 풍차의 기원, 화약의 발명과 사용, 인쇄술의 발명, 제지술의 전파, 나침반의 발견, 전서구의 도입, 체스 게임의 기원, 결투의 기원 등에 관해 박학다식한 역사가로부터 명쾌하고도 상세한 '역사적 설명'을 듣는 건 뜻밖의 소득이다. 또한 숱한 인물들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남긴 촌철살인의 명연설이나 위대한 인물들이 남긴 주옥 같은 대화나 기록들은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교훈적이고 훌륭하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1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 『로마제국 쇠망사_제2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 『로마제국 쇠망사_제3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 『로마제국 쇠망사_제6권』 을 읽는 동안에 적은 메모들

 

『로마제국 쇠망사』는 단지 우리가 교실에서 배웠던 역사의 큰 물줄기들에 관한 역사적 고증과 고찰만 다루는 책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로마제국 쇠망사』에 담긴 무수한 대사건들만 따로 떼놓고 보면 오늘날의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건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적을지도 모른다. 고대 로마가 웅장한 건축물들로 장식된 과정,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로마제국 재통일과 그리스도교 공인 과정, 그리스도교의 발전 과정에 나타난 다양한 분파들간의 분쟁, 게르만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 과정,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 편찬과 정복 사업들, 이슬람교의 발생과 전파 과정, 십자군 전쟁의 발생 원인과 진행 경과, 징기스칸의 몽골족과 티무르의 타타르족 서정(西征), 동로마 제국의 쇠락과 오스만 제국의 부상,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제국의 소멸 등은 그 자체로 인류 역사의 대사건들임엔 틀림없지만, 하루 하루를 바삐 살아가는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그저 머나먼 과거에 일어났던 온갖 거창한 사건들을 명명하는 타이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낸 건 결국 사람이었다. 그들이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 자신의 시대를 영광스럽게 장식했는지 혹은 오욕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는지를 살피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읽는 또다른 중요한 목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을 움직이게 만드는 욕망 가운데 가장 강렬하다는 권력욕과 성욕과 재물욕을 위해 제위 찬탈은 물론 골육상쟁을 마다않는 온갖 인간 군상들의 우행과 만행, 황제가 지닌 무소불위의 권력을 오로지 개인의 뒤틀린 욕망에만 허비해 버린 한심스런 제왕들의 언행들을 통해 기번은 끊임없이 인간 행위의 불완전성과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인류의 위대한 예술혼들이 빚어낸 온갖 찬란한 예술품들과 저작들과 건축물들이 한낱 종교적 편견과 무지 때문에 마구 짓밟히고 불태워지고 폐허로 변한 모습 앞에서 기번은 얼마나 탄식했던가. 인간의 무지와 맹목과 편견으로 빚어진 어리석은 행위들을 이만큼 장구한 세월에 걸쳐 빠짐없이 끌어모은 역사책도 다시는 구경하기 어렵지 싶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에드워드 기번이 일반인들로서는 감히 상상으로도 접근하기가 어려운 '칼리프의 삶'을 역사 연구에만 몰두했던 자신의 삶과 대비해 놓은 다음 이야기는 누구라도 한번쯤 곱씹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압달라만 3세 대왕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왕후 제흐라를 위해 코르도바에서 3마일 떨어진 곳에 도시와 궁전, 정원을 조성하였다. 모든 것을 완성하는 데 25년이라는 세월과 300만 파운드 이상의 돈을 썼는데, 인색함 없이 자신의 취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왕은 당대 최고 기술의 조각가와 건축가인 콘스탄티노플의 예술가들을 초빙했다. 스페인, 아프리카, 그리스,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대리석으로 만든 1200개의 기둥은 장식적인 기능까지 하고 있었다. 알현실의 벽면은 황금과 진주로 장식되어 있었고, 중앙에 있던 거대한 연못 주위는 동물과 새의 진기하고 값비싼 조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 그런데 압달라만의 궁전에는 왕후와 후궁, 흑인 환관의 수가 무려 6300명에 달했다. 압달라만이 출정할 때면 1만 2000명의 기병이 그를 호위했는데 병사들의 언월도와 허리띠에는 금이 박혀 있었다.

 

한 개인의 입장에서 우리의 욕망은 가난과 종속으로 끊임없이 억압을 받지만 전제 군주에게는 무수히 많은 목숨과 노동력이 바쳐지는데, 전제 군주가 세운 법은 맹목적으로 집행되며 그가 바라는 것은 즉시 충족된다. 그 화려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대로 압도된다. 이성적으로 아무리 냉정하게 판단한다 해도 당시 왕족들이 누리던 보살핌과 안락함을 느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완강하게 거절할 수 있는 이가 지극히 드물 것이다. 그래서 압달라만의 경험을 빌려 보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가 선보인 호사스러움은 우리의 감탄과 선망을 자아낼 것이다. 그러면 이 칼리프가 죽은 뒤 그의 개인 방에서 발견된 믿을 만한 문서를 여기에 옮겨 보겠다.

 

나는 지금까지 약 50년 동안 평화와 승리 속에서 제국을 통치해 왔다. 백성들은 나를 사랑하고 적들은 나를 두려워하며 동맹국은 나를 존경한다. 부, 명예, 권력, 쾌락은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누릴 수 있어서 지극히 행복하니, 지상에는 내가 누리지 못할 그 어떤 축복도 없다. 이런 환경에서 온전히 내 몫이라 할 수 있는 진정으로 행복했던 날을 꼽아 보았더니 겨우 14일이었다. 오, 사람들이여! 현세의 것에 대해서 그 어떤 확신도 갖지 말지어다!

 

(390∼391쪽)

 

(기번의 주석)

솔로몬이 이 세상의 덧없음에 대하여 한탄했던 이 고백과(수도원장의 장황하지만 설득력이 있는 시를 읽어 보라.) 세그헤드 황제의 행복했던 열흘에 관한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 대해 중상모략하려는 자들에 의해 자랑스레 인용될 것이다. 이들의 기대는 과도하고 이들이 어림하는 정도는 공정하지 않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예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했던 시간은 스페인의 칼리프가 계산한 얼마 안 되는 숫자보다는 훨썬 더 많다. 그리고 나는 주저함 없이 덧붙여 말할 수 있는데, 그 시간 중 상당 부분이 지금의 글을 쓰는 동안에 느꼈던 행복이다.

 

 - 『로마제국 쇠망사_제5권』

 

 

오래 전부터 읽기를 열망했던 『로마제국 쇠망사』는 어느덧 다시 책장으로 되돌아갔고, 이 책을 읽은 감회를 쓰는 작업도 이제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아무리 고생스럽게 이 책을 읽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은 나에게 떡 하나 사 주지 않았다.'고 장난스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기번이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쳐 그토록 힘겹게 연구하고 노력하여 웅편거작을 완성하는 동안에 '칼리프의 삶'보다 훨씬 더 많은 날들을 행복을 느꼈듯이, 쉽사리 읽기 힘든 기번의 대작을 끝까지 다 읽은 독자들은 다른 책에서는 좀처럼 맛보기 어려운 남모르는 희열을 느끼며 그런 즐거움을 오래도록 간직할지도 모르겠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오래도록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꿋꿋이 버티던 『로마제국 쇠망사』가 '언젠가는 읽어야 할 책'에서 어느덧 '이미 읽은 책'으로 변신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흐뭇해지니 말이다.

 

 - 내가 처음으로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은 건 2005년 무렵 대광서림판 축약본을 통해서였다.

    ☞ https://blog.aladin.co.kr/oren/624784

 

에드워드 기번은 이 대작을 끝맺는 글에서조차 '자신의 불완전함'과 자료 부족'을 탓했다. 로마 제국과는 너무나 먼 데서 태어나고 자란 일개 변방의 독자로서는 '지리적 불리함'과 더불어 '이해력 부족'과 '기억력 부족'을 탓하고 싶은 생각부터 앞선다. 이토록 방대한 내용을 담은 역사서를 단 한 번 읽었다고 해서 이 책에 담긴 내용들을 과연 얼마만큼이나 제대로 이해했으며 또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오래 기억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 대작을 읽고 나면 다른 작품들이 일순간 얄팍해 보이는 듯한 착시 현상이 생긴다.

   이렇게 힘이 불끈 치솟을 때 해치울 만한 책이 뭐가 있을까? 리비우스의 로마사? 몸젠의 로마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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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6-29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정말 oren님의 치열한 독서는 귀감이 됩니다..... 절로 고개가 다 숙여지네요. 진짜 숙였어요....

oren 2019-06-29 13:54   좋아요 0 | URL
어떤 작품이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 완성시킨 걸작들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두고두고 변치 않는 듯합니다.^^ 기번이 기울였던 엄청난 노력들에 비하면,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노고쯤이야 너무나 조촐한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볼 때마다 기번에게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Angela 2019-06-29 0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쾌한 정리와 설명까지~대단하십니다. 몸젠의 로마사는 금방 해치우시겠어요~^^

oren 2019-06-29 14:06   좋아요 0 | URL
몸젠의 로마사는 ‘로마의 건국에서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다룬 역사책이어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는 시대적으로 전혀 겹치지 않아서 언젠가는 꼭 읽어 보고 싶은 책입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도 조만간 읽어볼 작정인데, 오래 전부터 숱한 인물들이 리비우스를 두고두고 칭송한 걸 보더라도(플루타르코스, 몽테뉴, 기번, 마키아벨리 등등) 그를 오래도록 외면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Nussbaum 2019-06-29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 님 ! 일단 엄청난 인내의 시간에 박수를 드립니다. 길고 긴 텍스트와 함께한 시간과 마음의 공간은 많은 것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조만간 저도 뭔가를 정리하려고 하는데 약간의 두려움이 앞서네요 ^^

oren 2019-06-29 14:15   좋아요 1 | URL
Nussbaum 님 반갑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는 생각보다는 진도가 너무 잘 나가는 책이었답니다. 흥미로운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이 나올 때마다 좀 더 자세한 내용들을 알고 싶어 인터넷을 뒤지느라 상당한 시간들이 소요되긴 했지만요. 아무래도 기번의 책에는 그 흔한 지도 한 장이나 그림 하나 곁들여진 게 없으니까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읽은 작품들을 제때 정리하지 않고 그냥 넘기고 나면 나중에 두고두고 후회가 되더라고요. 아무쪼록 Nussbaum 님께서도 뭔가 정리하시고자 계획중인 일을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카알벨루치 2019-06-30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작을 치열하게 읽으시고 대작같은 페이퍼를 쓰셨네욧! 와우! 오렌님 근데 서재에 묵직한 두개의 그 무엇은 스피커인거죠???

oren 2019-06-30 09:53   좋아요 1 | URL
상상력도 놀라우셔라! 저 외관만 그럴싸한 수납장 문짝을 스피커로 둔갑시키다니요!

저 두 문짝은 책장 수납장과 문짝 꼭다리일 뿐입니다요.

그런데, 참으로 오랜만에 저 문을 열어봤더니 온갖 잡동사니가 한가득이네요..

썬글라스, 벨트, 명함, 여행용 트렁크 자물쇠, 옛날 사진, 워크맨, 잡주머니, 경조사용 봉투, 연하장, 공학용 샤프 계산기, 필통, 수첩, 화투 2목, 알라딘 도서구입 영수증, 책 띠지 수백 개, 볼펜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잘한 것들이 들어앉아 있네요. ㅎㅎ

FLAKSUIT 2023-06-13 11: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청 나군요! 사서 읽어야하나 말아야하나.망설이다 세월이 많이 지났습니다.
 

 

로마 제국이 인류 역사상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우리만큼 영광스럽고 찬란하던 나날들을 뒤로 하고 마침내 오욕과 치욕으로 점철된 굴욕스런 날들을 견디다가 끝끝내 두 동강으로 영구히 갈라선 때가 395년이었다. 강력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나약한 두 아들이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두 제국은 어느 하나 제 앞가림조차 버거워 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로부터 대략 80년쯤 지난 뒤 나약했던 서로마 제국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거기서 다시 50년쯤 더 흐르고 나면 지리멸렬하던 동로마 제국에서 일순 카리스마 넘치는 걸출한 황제가 나타나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강렬한 열망을 드러낸다. 그 황제의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재위 527~565) (출처 : 위키백과)

 

이 황제가 무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농사꾼 출신의 삼촌 유스티누스 황제로부터 어떻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할 겨를은 없다. 어쨌든 그는 45세에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 받았고, 로마 제국을 38년 7개월 13일간 통치했다. 이 정열적인 황제가 기나긴 치세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벌였고,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을 치렀는지는 벨리사리우스라는 걸출한 장군의 비서가 자세한 기록을 남긴 덕분에 후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다. 유창한 말재주로 원로원 의원과 콘스탄티노플의 장관까지 지낸 이 비서의 이름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였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치렀던 페르시아, 반달족, 고트족과 벌인 전쟁을 여덟 권의 책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 탁월한 장군의 빛나는 업적들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광을 흐리게 만드는 바람에 또다른 책을 써야 할 정도였다.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려고 『건축사』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테미스토클레스와 키루스의 미숙함을 능가하는 입법자요 정복자라고 찬양했다. 그 책을 황제에게 바쳤으면서도 자신이 기대했던 바를 얻지 못한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에게 은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그 책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추악하고 비열한 폭군으로 돌변하고, 황제와 그 배우자인 테오도라는 인류의 파멸을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두 마리 악마로 표현된다.(국내에서는 프로코피우스의 대표작인 『전쟁사』와 『건축사』는 번역되지 못했지만 악명높은 그의 독설들이 가득 찬 『비사』는 번역되어 나와 있다. ☞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이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 동로마 최고의 장군이었던 벨리사리우스와 그의 비서이자 역사가였던 프로코피우스까지 조금씩이나마 소개했으니, 본격적으로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이 대목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 유명한 테오도라 황후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왜 건너뛰느냐고 항의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자면 만화책 1권의 분량이 추가로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에서도 그녀를 소재로 엮은 책이 이미 나와 있다! (☞ 테오도라 - 천민에서 동로마의 황후가 된) 어쨌든 그녀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의 짧은 스토리만 읽어 보더라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나중에 동로마 제국을 손아귀에 움켜 잡고 자신의 성미가 이끄는 대로 마음껏 쥐락펴락 농락했을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세 딸은 나이가 듦에 따라 미모가 출중해졌고, 비잔티움 제국인들의 사적인 자리나 공적인 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도록 계속해서 헌신하게 되었다. (…) 테오도라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플루트를 연주하지 못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기술은 오로지 무언극이었다. 테오도라는 익살꾼이나 광대의 흉내를 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테오도라가 익살스럽게 두 볼을 크게 부풀리고 웃기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한 방 얻어맞는 시늉을 하면 콘스탄티노플의 극장에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테오도라가 받은 찬사의 진정한 대상이자 더욱 강렬한 기쁨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이었다. 테오도라는 섬세하고 균형 잡힌 외모를 갖고 있었다. 다소 창백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빛은 자연스러운 색감을 띠고 있었고, 그 생기 넘치는 두 눈동자는 숨김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지만 우아한 몸집에서 풍겨 나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은 품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비할 데 없는 뛰어난 외모를 시나 그림으로 제대로 그려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빼어난 자태는 대중의 눈에 노출되고 음탕한 욕망에 팔려 나갔다는 점에서 그 품위가 저하되었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운 용모는 돈에 좌우되어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온갖 직종과 직급의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운 좋게 하룻밤의 즐거움을 약속받았다 하더라도 더 강하거나 더 부유한 자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테오도라의 침대에서 쫓겨나야 했다. 테오도라가 거리를 거닐면, 추문을 피하고자 하는 이나 유혹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세태를 비꼬는 풍자적인 역사가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비사』에서 테오도라가 극장에서 부끄럼도 없이 나체를 드러냈던 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묘사헀다. 관능적인 쾌락을 느끼는 일에 체력을 모두 소진한 후에 테오도라는 불쾌한 얼굴로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투덜거렸다고 한다. 한동안 도시인들의 경멸과 기쁨으로 권세를 떨치던 테오도라는 티르 출신의 에케볼루스를 따라 살게 되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펜타폴리스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결합은 허술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에케볼루스는 곧 돈이 많이 들고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첩을 버렸고, 테오도라는 엘렉산드리아에서 극심한 곤궁에 빠져 지냈다. 마침내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때 들른 동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는 키프로스 섬의 이 아름다운 여인을 마음껏 즐기고 흠모한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은 베누스 여신의 혈통을 잇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성교를 애매하게 이끌고 정말 귀찮지만 필요한 피임 조치를 잘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48∼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Mosaic of Theodora - Basilica of San Vitale (built A.D. 547), Italy.(출처:위키백과)

 

테오도라가 단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낳은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성장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서야 아들에게 황후의 아들임을 알렸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던 이 젊은이는 희망에 부풀어 서둘러 콘스탄티노플의 궁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를 알현했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모습은 그 이후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감추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도 앗아 갔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녀가 유스니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가 된 스토리를 짧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을 깨달은 테오도라는 파플라고니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는 노련한 배우답게 얌전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가장하고 지냈다. 기특하게도 양모를 자아 털실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 곤궁한 생활을 해결하고, 나중에 거대한 사원으로 변모하게 될 작은 집에서 혼자서 지내며 정절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책략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오도라의 아룸다움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의 이름을 빌려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마도 테오도라는 이전에 가장 비천한 남자들에게도 마구 뿌려 댔던 그녀의 타고난 매력의 가치를 한껏 올리는 방법을 용케도 찾아냈던 모양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아주 신중하게 몸을 사리는 것으로 남자를 자극하고, 마지막에는 관능적인 매력으로 연인의 욕망을 자극했를 것이다. 그래서 지극한 신앙심 또는 원래 타고난 성품 탓으로 오랜 철야 기도와 절제된 식사에만 익숙해 있던 젊은이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첫 번째 무아지경이 진정되고 난 후에도 테오도라는 뛰어난 분별력과 침착함으로 여전히 그의 마음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수느는 기꺼이 사랑하는 여인을 부유하게 해 주고 신분을 높여 주었다. 동로마 제국의 온갖 보물을 테오도라의 발치에 쏟아 부었다. 결국 유스티누스의 조카는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이 내연의 처에게 신성하고도 적법적인 아내의 신분을 부여할 결심을 굳혔다.(50∼5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예전에는 창녀였던 여인이 이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움켜 쥔 여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음은 쉽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가 그런 비난 때문이었든지 자신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든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황제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권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잔인함을 드러낸 악행들도 수없이 저질렀다.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타고난 매력과 후천적으로 익힌 기교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누린 끝에 제국을 다스린지 22년 되던 해에 암으로 시들고 만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몹시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일국의 황제라면 얼마든지 동로마 제국에서도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처녀를 골라 보란 듯이 배우자로 맞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극장에서 일하던 창녀였던 아내를 그토록 애달파했던 것이다. 테오도라 얘기는 이만 하고 다시 벨리사리우스에게로 돌아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도 50년쯤 지난 뒤였다. 이때 고트족과 반달족이 세운 왕국은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든든한 기반을 다진 끝에 어느 정도 합법적인 통치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오른 뒤 처음 5년 동안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정열을 쏟다가 적잖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불안정한 휴전을 얻어냈다. 제국의 동쪽이 안전을 보장받게 되자 황제는 마침내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고, 때마침 로마 군대에게 알맞은 동기를 부여해 준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토벌하는 임무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는 트라키아의 농가에서 태어난 미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서기 529∼532년 동안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공을 쌓은 벨리사리우스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콘스탄티노플로 물러나 있었다. 마침내 아프리카 전쟁이 많은 이들의 화제에 오르내리면서 전쟁의 참여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벨리사리우스가 최고사령관으로 낙점되었다. 이때 그 전쟁을 반대했던 다른 장군들의 시기심이 컸으며, 이런 분위기는 벨리사리우스라는 영웅이 그 아내의 음모에 의해 은밀히 지원받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영민하면서도 아름다운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미움을 샀다가 다시 신임을 얻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전차 경기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장 창피스러운 치욕을 당해 정절도 더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저명한 남편의 마음을 오랜 기간 단단히 사로잡고 있었다. 안토니나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정절의 미덕을 업신여겼다고는 하더라도, 벨리사리우스와 남성적인 우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녀가 군 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단호하게 벨리사리우스이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1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가 얼마만큼의 함선과 얼마만큼 많은 말과 무기, 병기, 군수품들을 준비한 끝에 얼마만큼의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로 저 머나먼 카르타고를 수복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항구를 떠났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겨를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에드워드 기번의 말대로, 아프리카 원정 준비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겨룸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 1만 5000명에 뱃사람 2만 명과  5000마리의 말로 꾸려진 600척의 원정대는 15만 이상을 헤아리는 반달족 군대와는 숫적으로 명백한 열세임은 분명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그들이 동로마의 수도를 떠난 때는 533년 6월이었다.

 

때마침 반달족의 군사력이 사르디니아 정복 작전 때문에 적잖이 분산된 데다가, 벨리사리우스의 탁월한 통솔력 덕분에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기대 이상으로 우호적인 협력을 얻어 냈고, 거기에 용의주도한 작전 전개와 용맹성을 발휘한 덕분에, 동로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반달족을 무찔러 나갔다. 무어인 같은 적군에만 익숙하던 반달족은 로마군의 규율 잡힌 군사력과 뛰어난 무기를 버텨낼 수가 없었다. 서기 533년 9월에는 카르타고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반달족의 우두머리인 겔리메르를 굴복시키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의 원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지도는 아래와 같다.

 

Map of the Vandalic War(출처:위키백과)

 

 

반달족을 이끌던 겔리메르는 용케 도망쳐 잡히지 않았는데, 얼마 후 에스파냐를 안전한 망명처로 삼아 도피하던 중에 로마군에 발각되었고, 추격당하던 반달족의 왕은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파푸아 산으로 숨어들었다. 로마군 추격부대는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다가 110명의 병사를 잃은 끝에 '기근과 고통'으로 적을 포획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포위된 군주와 포위군의 지휘자는 이때 서로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항복을 권유했는데, 반달족 왕은 비참한 마음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답장을 쓸 수가 없다면서 이런 글을 보내왔다.

 

"친애하는 파라스여, 간청하오니, 나에게 리라와 스펀지, 그리고 빵 한 덩어리나 좀 보내 주시오."

 

반달족의 사신으로부터 이런 서신을 받은 로마군 추격대장은 이렇게 단순한 부탁을 하게 된 동기를 파악했다. 아프리카의 왕이 빵을 맛본 지가 한참 되었으며, 극심한 피로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로 인하여 안질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반달족 왕은 자신의 불운한 인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수금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우울한 시간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물이 보내지자 포위를 당해 있던 군주도 마침내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판단을 내렸다. 마침내 겔리메르의 고집도 모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불가결한 필요에 의해 꺾이게 되었던 것이다.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사절은 신변의 안전과 명예로운 대접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황제의 이름으로 추인해 주었고, 반달족 왕은 산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공식 접견은 카르타고의 교외에서 열렸다. 포로가 된 국왕은 정복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극단적인 슬픔이 겔리메르의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지적인 관찰자들에게는 이런 비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때아닌 환희와 웃름은 헛되고 일시적인 인간의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사건이었다.(15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권력을 지닌 자에게는 아부가 따르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에게는 시기가 따른다는 통속적인 진리는 벨리사리우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전쟁을 치렀던 로마군의 지휘관들이 개인적으로 사절을 보내어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가 명성이 자자한 것에 자만하여 그 스스로 반달족을 다스리는 왕위에 앉으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말들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런 은밀한 말들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나자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아프리카에 남느냐 아니면 수도로 돌아가느냐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굳게 확신한 벨리아리우스는 현명하게도 제국의 수도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충성심에 감격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은 성대한 개선식까지 열어줬다. 온갖 볼거리가가 제국의 수도를 누비는 동안 반달족의 귀족들도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 로마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겔리메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줏빛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왕의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고 한숨도 한 번 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솔로몬의 말을 되뇌면서 자신의 자존심 또는 경건한 신심에 은밀한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겸손한 정복자는 말 네 필이나 코끼리가 끄는 개선 마차에 타는 대신 자신의 용감한 동료들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갔다.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벨리사리우스는 일개 신하에게는 참으로 이목을 끄는 명예라고 거절한 듯하다. (…)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은 대경기장 문을 들어섰고,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호를 받다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가 앉아 있는 옥좌 앞에서 멈춰 섰다. 황제와 황후는 포로가 된 왕과 승리한 영웅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듣기 위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관례에 따른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칼 한 번 빼 보지 않은 군주와 극장에서 춤추던 창녀의 발치에 입술을 대었다. (…) 천성적으로 예속과 복종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벨리사리우스 역시 은밀히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156∼15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는 535년 12월에는 어느덧 시칠리아를 침공해 그곳을 정복한다. 이탈리아는 정복자 테오도리크의 딸인 아말라손타가 오랫동안 훌륭하게 통치하다가 어느새 사촌인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이 넘어가 있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갑자기 죽고 나자 일부러 테오도리크의 남자 혈족을 찾은 끝에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을 나눠 맡겼는데, 도리어 그에게 배반당한 끝에 볼세나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투옥된 후 목욕을 하던 중에 질식사했다.) 여왕의 의심스러운 죽음과 왕위를 강탈한 새로운 군주의 죄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사력이 개입하는 걸 정당화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때에도 아주 작은 병력만으로 뛰어난 작전을 펼쳐 위풍당당하게 시라쿠사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었다.

 

테오다투스는 동로마 황제와 치욕스러운 화평 조약을 협상하다가(고트 왕국과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남은 여생을 철학과 농경 연구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비참한 절망과 맹목적인 좌절감에서 비롯된 변덕을 부렸고,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에 충분한 주둔군을 남긴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나폴리를 함락하기까지는 20일 이상의 지리한 포위 작전이 필요했지만 400명의 로마 병사들이 수로를 타고 숨어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간단히 정복되었다. 그 와중에 로마에 숨어 있던 테오다투스는 군주로서의 품성이나 능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바람에 부하들로부터 배척당했고, 비티게스 장군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병사들의 선택을 받은 비티게스는 승승장구하며 다가오는 동로마 군대가 두려워 로마는 주민들의 손에 맡기기로 하고 라벤나로 숨어들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아시나리아 성문을 통해 로마로 입성했을 때는 536년 12월이었다. 그리하여 60년간 예속당하고 있던 로마 시는 야만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완전한 수복까지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비티게스는 겨울 동안 궁리한 용의주도한 계획을 부지런히 실행에 옮겼다. 무려 15만이나 되는 군사가 왕의 깃발 아래 모여 로마로 진군했다. 테베레 강을 건넌 고트족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해서 1년 이상 엄청난 공격을 지속했다. 로마에 있던 열네 개의 성문 가운데 일곱 개가 포위된 상태였다. 부족한 병력과 기근 등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던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끝끝내 고트족들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포위공격을 당한지 1년 하고도 9일이 지난 때였다. 

 

그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인 라벤나를 함락할 때까지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적군 한 명 맞닥뜨리지 않고 난공불락의 도시의 거리를 행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고트족의 처지와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계략 때문이었다. 라벤나에 갇혀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버티던 고트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왕의 약한 모습과 벨리사리우스의 명성과 우세함을 비교한 끝에 비상한 일을 계획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그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라벤나의 요새와 자신들의 재산과 무기를 모두 바치겠다고 제의해 온 것이다. 이 대담하고 영민한 로마군 총사령관은 고트족의 자발적인 항복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섰고,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적군들로부터 활짝 열린 성문을 제공받았다.

 

라벤나가 점령되자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을들도 그 본을 따랐다. 파비아와 베로나에서 무장한 채 독립적으로 지내던 고트족들도 벨리사리우스에게 복종했다. 그러자 다시금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로부터 의심스러운 호출이 왔다.

 

벨리사리우스가 두 번째 승리를 거두자 질투심이 다시 항제의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영웅을 불러들였다.

 

고트족과의 나머지 전쟁을 위해서 벨리사리우스가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인자한 군주는 그의 수고에 상을 내리고 그 지혜를 빌려 자문하고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수많은 적군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그뿐이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가 품은 의혹을 알아차리고 그가 내민 구실을 받아들여 노획품과 기념품을 가지고 라벤나에서 출발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렇게 순종하자 이탈리아의 통치를 그만두고 급작스럽게 소환해 가는 것이 경솔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이탈리아의 정복자는 자신이 당연히 얻어야 할 두 번째 승리의 영예를 불평 한 마디 없이 한숨 한 번 내쉬는 법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칭송은 모든 겉치레나 과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노예근성이 만연한 시기였지만 온 나라에서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자자했으니 그것으로 공허하게만 전하는 몇 마디 칭찬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208∼20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는 얘기는 바로 벨리사리우스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벨리사리우스의 빛나는 활약사대한 기번의 묘사만 들어봐도 그가 얼마나 칭송 받을 만한 인물인지 금세 감이 잡힐 것이다.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엄격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사과 하나도 나무에서 따내거나 옥수수 밭을 함부로 다니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고상하고 건전했다. 군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방종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벨리사리우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포로가 된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절세 미인들이 벨리사리우스 앞에서 섰지만 그는 그 매력을 물리치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단 한 번도 부부간의 정절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의 공훈을 기록한 역사가와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전쟁의 위험이 닥친 와중에도 벨리사리우스는 경솔함 없이 용감했고, 두려움 없이 신중했으며, 순간 순간의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해 가며 대처했다고 전한다. 가장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때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거나 실제로 희망을 찾아내어 활기를 잃지 않은 반면 가장 운이 좋은 순간에도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미덕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과거의 군사 전략의 귀재들과 어때를 나란히 하거나 심지어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육상과 해상, 그 어디에서도 그의 군대는 승리했다. 그는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굴복시켰다. 가이세리크와 테오도리크의 후계자들을 포로로 끌고 왔고, 콘스탄티노플에 적들의 전리품을 가득 쌓아 놓았으며, 6년 사이에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의 절반을 되찾았다. 명성과 높은 덕, 부와 권력으로 인해 그는 제국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제일가는 인물이 되었다. 질투심 어린 목소리만이 그가 중요한 인사로 대접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과장하여 말했다. 황제가 자신이 벨리사리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등용하였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정도로 만족했다면 참으로 좋았을 일이었다.(21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던 시점(붉은색)과 재위 기간 중에 확장된(오렌지색) 영토의 비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은 벨리사리우스의 용맹 덕분이었다.(출처 : 위키백과)

 

벨리사리우스의 나무랄 데 없는 명성이나 미덕도 일부나마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 아내의 잔인함과 탐욕 때문이었다고 역사가는 전한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극장에서 일하는 창녀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비천했던 전차 기수였다고 한다. 가정 배경이 이렇게 다채로운 까닭에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했다. 행실이 나쁘고 야망이 컸던 두 여인은 비슷한 쾌락을 즐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적 부도덕에서 나온 질투심으로 갈라섰다가 결국에는 공통의 죄의식을 가지고 화해했다. 안토니나는 벨리사리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남편과 많은 연인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남편 소생의 아들까지 있었다. 이제부터는 기번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안토니나가 트라키아 젊은이와 수치스러운 애정 행각에 정신없이 빠져 지내게 된 것은 그녀가 나이 들어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에우노미우스를 추종하는 이단 신앙을 갖고 자랐다. 아프리카 원정은 첫 번째로 승선한 병사에 대한 세례와 그 상서로운 이름으로 인해 신성시되었고, 이 개종자는 자신의 영적 부모, 즉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의 가족이 되었다. 이들이 아프리카 해안에 닿기 전에 이 성스러운 친족은 호색적인 애정의 대상으로 타락하였다. 곧 안토니나는 정숙함과 신중함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게 되어,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해 모르는 이는 로마의 최고 사령관 혼자뿐이었다.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최고 사령관은 두 연인이 지하실에서 단둘이 거의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안토니나가 말했다. "이 젊은이의 도움으로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유스티니아누스 모르게 숨기고 있었어요." 젊은이는 옷을 다시 입었고, 신앙심 깊은 남편은 자신의 지각기관을 통해 직접 얻은 증거를 믿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한 벨리사리우스는 시라쿠사에서 매사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마케도니아라는 여자의 정보에 의해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이 시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 다음에 안토니나의 간통 장면을 종종 목격했던 두 명의 시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테오도시우스는 아시아로 재빨리 도망가 화가 난 남편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근위대 중 한 명에게 테오도시우스의 살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눈물과 교묘한 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하는 우리의 영웅은 아내의 무죄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의와 판단을 흐리게 하여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고 비난하게 만든 경솔한 두 친구를 저버리게 되었다. 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여자의 복수는 앙심이 깊고 유혈이 낭자한 것이었다. 불행한 마케도니아는 두 명의 증인과 함께 안토니나의 잔인한 하인에 의해 사로잡혀 혀를 잘리고 온몸이 토막난 채 시라쿠사의 바다에 버러졌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상대가 되었던 그 소년보다 간통한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경솔하지만 현명하기 짝이 없는 충고를 한 것을 안토니나는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그가 절망에 빠져 벨리사리우스의 뜻을 거스르자 안토니나는 잔인한 충고를 하여 그의 처형을 서두르게 했다.(212∼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전쟁터에서도 대담한 애정 행각을 저질렀던 안토니나였으니 전쟁이 끝난 후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후에도 사정은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안토니나의 열정은 전혀 약해지지 않고 더욱 격렬해져 갔다. 그러나 두려움과 신앙심, 그리고 어쩌면 권태로움까지 더해졌던 테오도시우스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퍼진 떠들썩한 추문을 두려워했고, 벨리사리우스의 아내의 무분별한 애정 공세를 무서워하여 그녀의 품을 피해 에페수스로 숨어들어 머리를 깎고 수도자의 생활이라는 피난처를 찾았다. 이 새로운 아리아드네의 절망은 남편의 죽음으로도 설명되지 않을 정도였다. 안토니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면서 온 궁전을 울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 가장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며 근면한 친구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간절한 요청에다가 벨리사리우스의 기도까지 더해도 에페수스에서 독거하고 있는 성스러운 수도사를 끌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것은 총사령관이 페르시아 전쟁을 위해 출정한 후였다. 자신도 페르시아로 떠나게 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안토니나는 사랑과 쾌락을 정신없이 탐닉했다.(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안토니나의 애정 행각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남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소생의 아들인 포티우스도 있었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아들을 일찌감치 추방해 버렸다. 티그리스 강 너머에 있는 진지에서 어머니의 은밀한 박해를 받았던 포티우스는 육친의 망신스러운 짓거리에 화가 나서 이번에는 자신이 가족이라는 감상을 치워 버리고 벨리사리우스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의무를 모두 저버린 여자의 비열함을 고해 바쳤다.

 

로마의 최고 사령관은 놀라면서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아마도 이전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는 안토니나의 아들의 무릎을 끌어안고 출생의 정보다 의무를 기억하도록 서약시키고, 제단에 서서 서로를 지켜 주고 복수해 주자는 신성한 맹세를 했다.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국경에서 돌아와 안토니나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아내의 신체를 감금하고 목숨을 위협했다. 포티우스는 정말 어머니를 처벌하려고 마음먹고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에페수스로 직접 가서 충직한 환관에게서 안토니나의 죄악에 대한 고백을 강요해 얻어 낸 다음, 성 요한 교회에서 테오도시우스의 신병과 재산을 압류했다. 그리고 이 포로를 킬리키아의 외딴 숲에 숨겨 두고 처형 기회를 기다렸다. 사법 제도를 위반하는 이런 대담한 불법 행위는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없었다. 안토니나가 항의를 제기하자 황후가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황후는 최근에 어떤 총독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일과 교황의 추방과 암살의 공을 세운 일로 안토니나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마친 벨리사리우스는 황실의 소환을 받았는데 평소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에 반하는 명령을 받는다 해도 벨리사리우스의 복종은 진심으로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령에 따라 아내를 포옹하게 되었을 때, 황후 앞에서 이 자애로운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고 싶어졌다. 테오도라의 너그러움은 친구를 위해 더 소중한 호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황후가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귀족 부인에게 줄 더없이 귀중한 진주를 찾아 놓았다. 지금껏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보물이다. 하지만 이 보물을 보고 소유하는 일은 오로지 내 친구만이 할 수 있다.

 

호기심과 조바심으로 가득 차 기다리는 안토니나에게 갑자기 침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그녀의 연인이 나타났다. 부지런한 환관들이 은밀하게 가두어 놓았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놀라움은 감사와 기쁨의 탄사로 터져 나왔다. 안토니나는 테오도라를 자신의 여왕이라 부르고 은인이며 구세주라 불렀다. 에페수스의 수사는 궁정에서 사치스럽게 지내면서 야망을 키워 갔다. 하지만 약속받은 대로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는 못하고 이 호색적인 만남에서 생긴 최초의 과로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214∼21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졸지에 연인을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었던 안토니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는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과연 엽기적인 그녀였다. 이 젊은이는 재판도 없이 벌을 받았다. 하지만 지조가 굳은 포티우스는 채찍질과 고문의 심한 고통을 견뎌내며 벨리사리우스에게 했던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 아무 소용 없는 학대가 끝난 뒤 안토니나의 아들은 어머니가 황후와 즐겁게 지내는 동안 그녀의 비밀 지하 감옥에 갇혀 밤낮의 구분도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포티우스는 두 번 탈옥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유서 깊은 성소인 성 마리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던 압제자들은 동정심을 모르는 것만큼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성직자들과 민중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도 포티우스를 두 번 다 제단에서 끌어내 토굴 감옥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옥은 성공했다. 3년이 지났을 때, 예언자 자카리아 또는 죽음을 각오한 어떤 친구가 도망칠 방법을 일러 주었던 것이다. 포티우스는 황후의 친위대와 스파이를 속여서 예루살렘의 성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수사가 되었다. 수도원장이 된포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이집트의 교회들을 정화하고 통제하는 일에 힘썼다.(21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의 45쪽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이 불세출의 영웅은 여기(216쪽)에서 무려 100쪽 이상을 더 읽는 동안에도 계속된다.(그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한 대목은 318쪽에 가서야 만날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반란, 토틸라에 의한 고트족 왕국의 부활, 로마의 함락과 탈환 등에서 매번 중요한 역할을 떠맡아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해 온갖 충성을 다 바쳤다. 무수한 역경과 힘겨운 전투를 다 치르고 죽을 날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마지막 역경이 찾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에 걸렸을 때 그가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고, 벨리사리우스는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여 일개 병사나 시민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가 그만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때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인격과 아내 덕에 살아났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는 남편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반려자인 그를 완전히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벨리사리우스에게 퇴락하는 이탈리아의 상태를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군사도 없이 귀환하자 동부에는 냉담한 명령이 하달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그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초라한 수행원과 함께 지나자 그 비참한 몰골에 모두들 경악하며 동정했고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차가운 배은망덕으로 그를 맞이했고 아첨하는 패거리들도 무례한 시선으로 경멸감을 드러냈다.(216∼21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Bélisaire, by François-André Vincent (1776).

Belisarius, blinded, a beggar, is recognised by one of his former soldiers. (출처:위키백과)

 

저녁이 되자 그는 황폐해진 집으로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몸이 불편하다는 거짓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를 변명으로 안토니나가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안토니나가 주랑 현관에서 오만한 얼굴로 조용히 서성이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슬픔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면서 로마의 성벽 아래서는 몇 번이고 용감하게 맞섰던 죽음을 기다렸다.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에 황후로부터 사자가 도착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호기심 반, 걱정반인 심정으로 자신의 운명이 적힌 서한을 열었다.

 

부관은 내 역정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토니나의 충성심을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안토니나의 탄원과 그 높은 덕을 생각해서 부관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한다. 원래는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 재산도 일부는 지니고 있도록 해 주겠다. 당연히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나, 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바란다.

 

이 영웅이 말도 안 되는 용서의 말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고 기술된 이야기를 정말로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는 아내 앞에 앞드려 그 구세주의 발에 키스하고 안토니나의 유순한 노예가 디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엄숙하게 약속했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이 재산 중에는 12만 파운드가 벌금으로 징수되었다. 그는 궁전의 마사를 관리하는 직위를 받고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국민들은 모두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되면 곧 자유를 되찾아 위선을 버리고 그의 아내와 테오도라, 그리고 어쩌면 황제까지도 정당한 보복의 희생생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리사리우스의 엄청난 인내심과 충성심은 범인을 뛰어넘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참 아래의 수준으로 보인다.(217∼2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세세히 전달하느라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에 대한 글은 이쯤에서 맺는 게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의 이미지다. 이 유명한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 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그림이다. 이 성당은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했던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고 한다. 무려 1,500년 전에 그려 넣었던 모자이크가 아직도 생생하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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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24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벨리사리우스가 부족한 동로마의 재정지원으로도 다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음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그의 탁월함으로 무모한 원정이 지속되어 제국의 수명은 짧아지게 된 것은 아니었나도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5-24 11:54   좋아요 1 | URL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지요. 유스티니아누스의 기나긴 치세 동안 잦은 해외 원정 만으로도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끼쳤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대규모 토목건축사업(대표적으로 소피아 성당 건설)과 황실의 사치와 낭비까지 더해졌으니 쇠약한 신체 상태로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셈이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탁월한 인물이 없었더라면 동로마 제국 역시 호전적인 이민족들의 침략에 무너져 일찌감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역사책 속에서 저명한 책들의 저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에도 수많은 '책들의 저자'가 등장한다. 역사가는 어쨌거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별의별 희한한 이름을 지닌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 평범한 독자들은 한 귀로 듣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런 역사가들의 책은 척박한 국내의 여건에서는 번역본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번보다 뛰어났던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역사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기번의 역사서보다 앞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역사가들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사』를 쓴 티투스 리비우스, 『게르마니아』, 『연대기』 등을 쓴 타키투스,  『갈리아 원정기』를 쓴 카이사르,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 『페르시아 원정기』, 『키루스의 교육』 등을 쓴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 『로마사 논고』를 쓴 마키아벨리 등. 이런 쟁쟁한 역사가들과 작품들을 기번의 책 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런 역사가와 작품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늘 궁금하다.

 

기번의 책 속에는 이처럼 저명한 역사가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름난 철학자와 시인들도 꽤나 자주 등장한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 『변신』의 오비디우스도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민다. 기번의 머리 속에 이들 시인들의 작품이 항상 머리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이들 말고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의 저자 보이티우스도 등장하는데, 이들 세 사람의 철학자들은 작품의 저자로서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역사적 인물'로서 상세히 다뤄진다는 점이 또다른 특징이다.

 

우리에게 『철학의 위안』 이라는 저자로 잘 알려진 보이티우스는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인물이다. 나는 이 인물이 기번의 역사서에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철학의 위안』을 쓴 뛰어난 철학자 겸 정치가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유명한 고대의 철학 작품이 쓰여지는 과정까지 길게 서술된 설명을 들어보니 이 인물의 삶 자체가 그 당시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중이 큰 인물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보이티우스(480~526년)가 활동하던 때는 이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는 여전히 제국의 지위를 유지한 반면, 서로마 제국은 최초의 야만족 왕인 오도아케르의 치세를 지나 테오도리크(재위 488∼526년)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테오도리크는 동고트 족의 왕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모로 붙잡혀 있는 동안 '로마식 교육'을 받은 덕분에 로마인 특유의 관대한 포용 정신으로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야만족의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지만 행정 관리들은 대부분 로마인들로 채웠고, 로마의 문화 유산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훌륭하고 용감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함께 동상을 만들어 세울 만한 자격이 있는 고트족 출신 왕'이었다.

 

 

 Coin depicting Flavius Theodoricus (Theodoric the Great).

 

그토록 이탈리아에게 행운으로 여겨졌던 이 인물에게도 마침내 먹구름이 끼게 되었으니, 그의 말년에 찾아온 민중들의 증오와 귀족들의 유혈사태 때문이었다. 그때 가장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보이티우스였고,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감옥에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었다.

 

이제부터는 보이티우스라는 인물이 어쩌다가 그토록 관대한 테오도리크에게 미움을 샀으며, 그가 어떤 품성을 지녔고, 얼마만큼의 드높은 학문적 경지를 지녔던 인물이었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 차례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주저없이 규정한다.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인물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였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를 이 인물에게 부여한 셈인가.

 

 

보이티우스는 카토나 키케로가 자신의 동포라고 인정해 주었을 최후의 로마인이었다. 부유한 고아였던 그는 아니키우스 가문의 세습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이 가문은 당대의 왕이나 황제들이 야심차게 이 집안 사람임을 자칭했던 유명한 가문이었다. (…) 보이티우스의 청년 시절에는 아직껏 로마의 학문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있었다. 한 집정관이 교정한 베르길리우스의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문법학, 수사학, 법학 교수들이 관대한 고트족 덕분에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연금까지 받으며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티우스의 열렬한 학문적 호기심은 라틴어를 통독하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프로쿨루스와 그 제자들의 열의와 학식, 그리고 근면성으로 유지되던 아테네의 학교들에서 18년간이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감각과 플라톤의 경건한 명상과 숭고한 상상력을 조화시키려 했던 살아 있거나 죽은 스승들의 정신을 흡수하고 학문적 방법들을 모방했던 것이다. 로마로 돌아와서 벗인 심마쿠스의 딸과 결혼한 이후에도 보이티우스는 상아와 대리석으로 이뤄진 궁궐 같은 집에서 같은 학문을 연구했다.(29∼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보이티우스는 자신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고 나서 1,000년도 더 흐른 뒤에 나타난 걸출한 로마사의 권위자로부터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자신이 부여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싶다. 아무튼 그의 학문적인 위상은 댕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재능은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의 기초적인 과학과 학문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통해 표출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피타고라스의 음악, 니코마코스의 산술, 아르키메데스의 역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플라톤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그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석 등이 이 지칠 줄 모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펜 끝에서 번역되고 또 설명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과학 기구들, 예를 들어 해시계나 물시계, 천체의 운동을 보여주는 구(球)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보이티우스는 이러한 심오한 학문의 세계에서 사적 · 공적인 생활에 수반되는 사회적 의무들의 세계로 내려앉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라앉았다. 그는 자선을 베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고,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의 연설과 비교되곤 했던 웅변에서는 일관되게 청렴결백과 인간애를 호소하였다.(30∼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뛰어난 미덕을 지닌 인물을 어찌 안목 있는 군주가 놓칠 리 있었겠는가. 그는 이내 집정관과 명예고관이라는 칭호로 장식되었고, 그의 재능은 직책에 어울릴 만큼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의 두 아들까지도 아직 어렸지만 같은 해에 집정권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었던가. 그가 생애 말년에 감옥에 갖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쓰며 세상을 한탄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그가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던 때를 기번은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이 취임하던 기념할 만한 날에 그들은 원로원과 군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엄숙하고도 화려한 행렬을 이루어 자택에서 포룸까지 행진했는데, 로마의 실세 집정관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서 왕의 은혜를 칭송하는 연설을 마친 후에 대경기장의 경기에 막대한 하사금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명예와 재산, 공적 직위와 사적 인척 관계, 학문의 수양과 미덕의 함양, 이 모든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보이티우스는 아마도 행복이라는 변덕스러운 형용사를 말년의 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 단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행복했던 인물에게도 마침내 불행이 찾아 왔으니, 테오도리크 치세의 암울했던 말년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의 신세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원로원 의원 가운데 알비누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자유'를 '희망'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이미 유죄선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보이티우스가 이런 사태를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보이티우스는 "알비누스가 유죄라면 원로원 전체와 나 자신도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알비누스도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고 웅변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순수하고 헛되이 희망하는 것까지는 법률이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음모를 알았더라도 압제자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이티우스의 성급한 고백은 묵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알비누스의 변호인(보이티우스)은 곧 자신의 의뢰인이 처한 위험과 죄상에 휘말려 들어갔다. 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달라고 동로마 황제에게 요청하는 원본 교서에서 그들의 서명이 발견되었고, 지위는 높았지만 평판은 좋지 않았던 세 명의 목격자가 이 로마 귀족의 반역 음모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테오도리크에게 변명할 기회도 박탈당한 채 파비아의 탑에 엄중히 감금당했고, 그곳으로부터 5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던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가장 저명했던 동료 의원에게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아, 그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인다. (…) 원로원에 대한 진지하고 충실한 애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원로원 의원들의 떨리는 목소리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었다.(33∼3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불세출의 충신과 만고의 역적 사이는 언제나 단 한 발짝만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루 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황제의 처형 명령을 기다리게 된 처지는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기가 막힌 상황에서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얼마나 간절한 호소들을 담고 있을 것인가. 아무튼 이 역사적인 인물이 쓴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써내려간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전한다.

 

 

보이티우스가 족쇄에 채워져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파비아의 탑에 갇혀 있을 때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다.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이 훌륭한 책은 그 시대의 야만성과 작가가 처한 상황을 보면 더욱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가 로마와 아테네에서 줄곧 도움을 받았던 천상의 인도자가 이제는 친히 그의 지하 감옥을 비추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의 상처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 주었다. 또한 그에게 지금까지 누린 영광과 현재의 고난을 비교해 보고 이렇게 불확실한 인생사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도출해 보도록 가르쳤다. 이성은 인생의 은혜들이란 변덕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경험은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그 은혜들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아무 회한 없이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의 미덕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행복도 빼앗지 못한 적들의 무기력한 악의를 조용히 경멸하게 되었다. 보이티우스는 '최고선'을 찾기 위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우연과 운명, 통찰력과 자유의지, 시간과 영원의 형이상학적 미로를 탐험했고, 신의 완벽한 속성과 그 도덕적 물리적 체계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무질서라는 모순을 온건한 방식으로 화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명하고도 모호하고 또 난해한 주제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위안해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철학적 노력으로 불행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 작품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철학과 시, 웅변을 솜씨 있게 결합시켜 놓은 이 현자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담대한 평정심을 이미 체득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힘들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사형 집행인이 테오도리크의 극악무도한 명령을 실행에 옮겼거나 아마도 한 발 더 나아가 집행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밧줄을 보이티우스의 목에 감고 눈알이 거의 빠져나올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죽는 순간까지 곤봉으로 때린 좀 더 가벼운 고문이 오히려 자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살아남아 로마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었다.(34∼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이티우스를 묘사한 그림(출처:네이버백과)

 

 

에드워드 기번이 보이티우스가 남긴 이 하나의 작품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또다른 묘사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철학자의 저술들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국왕의 손으로 번역되었고, 오토라는 이름을 쓴 세 번째 황제는 아리우스파 박해자들의 손에 의해 순교자가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의 명성을 얻은 이 가톨릭 성인의 유골을 보다 영예로운 묘지로 이장해 주었다. 보이티우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두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장인이기도 했던 고매한 심마쿠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비탄에 잠긴 심마쿠스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고 무모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친구의 죽음에 복수하고 말겟다고 탄식했다. 결국 심마쿠스는 사슬에 묶여 로마에서 라벤나의 궁정까지 끌려왔으며, 테오도리크의 의심은 이 죄 없는 늙은 원로원 의원의 피로 겨우 진정되었다.(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방금 인용한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만 들어서는 이 책이 어떤 인물에 의해서 번역되었는지 조금 아리송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알라딘 상품 소개'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에드워드 기번보다 훨씬 더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은 9세기에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번역한 이래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이 계속 번역하였다. 10세기에 고대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중세 때 프랑스어로 수없이 번역되고 필사되었다. 프랑스어 번역 중 장 드 묑의 번역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이 번역본을 필립 4세에게 헌정하였다. 이 역본은 특히 아름다운 채식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지성의 번역본은 장 드 묑의 역본에 있는 유명 삽화 8장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삽입하였다.

『철학의 위안』은 카롤링거 왕조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철학 입문서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학에서, 단테는 『신곡』에서 여러 번 이 책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라는 책에서 『철학의 위안』을 인용하고 모방하였다.

 

 - 알라딘 상품 소개

 

 

이 인물과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회한 많은 테오도리크의 죽음에 관한 일화다. 그가 죽은 때는 서기 526년 8월이었다.

 

 

인간이라면 양심의 판결과 국왕의 회오를 증언해 줄 보고를 듣고 싶을 터인데, 혼란스러운 공상과 병약해진 육체에 시달리다 보면 무시무시한 망령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철학에서도 다루어지는 현상이다. 미덕과 영광의 삶을 살았던 테오도리크는 이제 치욕과 죄의식과 함께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로 인해 그의 마음은 초라해졌고 당연한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테오도리크는 어느 날 저녁 식탁에 머리가 큰 생선이 나오자, 갑자기 심마쿠스의 노한 얼굴이 보인다고, 두 눈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입에는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왕은 즉각 방으로 돌아가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학질에 걸린 듯 덜덜 떨다가 시의(侍醫)인 엘피디우스에게 보이티우스와 심마쿠스를 죽인 일을 후회한다고 더듬더듬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사흘간이나 설사를 계속하다가 재위 33년만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날부터 계산한다면 37년만에 라벤나의 궁정에서 숨을 거두었다.(35∼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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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18 11: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이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을 읽긴 했습니다만, 정작 인물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 알았습니다. oren님 덕분에 자세히 배워 갑니다. 감사 합니다.^^:)

oren 2019-05-18 11:15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이 유명한 책을 진작에 읽으셨군요. 저는 다른 책을 읽다가 이 책이 등장할 때면 그저 ‘어떤 책인가‘ 하고 살펴보기만 했더랬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러 이런 글을 쓰기도 했으니, 저도 머잖아 이 오래된 책을 꼭 읽을 날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oren 2019-05-18 12:25   좋아요 1 | URL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는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언급되어 있었나 궁금해서 다시 한번 찾아봤습니다. 다른 대목에서 이 책을 언급한 부분은 잘 찾지 못하겠고(몇 번씩이나 언급되었던 듯한데 말이지요.), 책의 맨 마지막 부분인 ‘초서의 고별사‘에서 언급된 부분만 덧붙여 봅니다.

* * *

(… ) 성서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적혀진 것은 모두 우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제 목표도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겸허하게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리스도가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인간의 허영을 다룬 저의 번역물과 글을 쓴 것에 대해 뉘우치고자 합니다. 그 중에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더』, 『명예의 전당』, 『착한 여인들의 전설』, 『공작 부인의 책』, 『새들의 토론』을 비롯하여 『캔터베리 이야기』에 수록된 죄를 짓는 이야기들과 『사자의 책』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또한 음탕한 노래들과 시들도 있습니다. 무한하게 자비로우신 그리스도여, 이런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반면에 보에티우스의 『철학의 위안』이나 성인들의 전설에 관한 책, 도덕과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번역서들에 대해서 저는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와 복되신 성모님과 천국에 계신 모든 성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제가 죽는 날까지 제 죄를 뉘우치고 제 영혼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연구하도록 은총을 베출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

겨울호랑이 2019-05-18 15:45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초서가 보에티우스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의 위안」에서 스토아 철학의 자취를 많이 느꼈습니다. 중세 철학자 기준에서는 이교 사상이라 볼 수 있는 면이 있음에도 초서는 보에티우스 사상을 긍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마치 단테의 「신곡」 에서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살라딘이 떠오릅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 가운데 '민족의 대이동'을 빼놓을 순 없다. 제국이 번창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유럽에서의 로마의 국경은 대체로 라인강과 도나우강이 한계였다. 그 너머로는 숲들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야만인들이 살고 있어서 정복하기도 어려웠고, 정복해 봤자 야만인들은 쉽게 교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면서 황제들의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에 따라 변방의 이민족들과의 분쟁이 잦아지거나 수그러드는 경향을 반복하는 데도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의 중앙 아시아뿐만 아니라 저 멀리 고대 중국의 변방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던 훈족(이들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흉노족'이었다는 견해가 아직도 분분하다. 기번도 이런 견해를 주장한 학자들의 견해를 자주 소개했다.)들이 차츰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훈족의 발생지라고 믿어졌던, 기원전 205년경 묵돌선우 통치하 흉노족의 영토와 영항(출처:위키백과)

 

역사가들이 훈족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들이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기록을 영구히 보존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훈족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던 이웃 문명 국가의 역사 기록으로부터 그들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록들에 의해 재구성된 그들의 이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훈족의 서쪽으로 이동을 추정한 경로(출처:위키백과)

 

훈족이 유럽에서도 드넓은 지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위력을 떨친 시기는 아틸라가 왕위에 오른 때였다.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멸망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훈족의 왕 아틸라,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로마를 멸망케 한 '3대 인물'로 꼽는다. 로마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395년) 이후 무능한 두 아들(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이후 두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화된 반면, 훈족과 반달족과 고트족들의 활동은 나날이 위력을 더해 갔다.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 무렵의 영토가 얼마나 방대했던지는 아래 지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출처:위키백과)

 

아틸라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할 무렵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 동안이나 굳세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로마가 아닌) 라벤나의 궁정에서 자신의 안위만 걱정할 뿐 국사에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이 당시의 서로마 제국의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표현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간의 길고 불명예스러운 재위 기간 동안 동로마를 통치한 형 아르카디우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와 담을 쌓고 지냈다. 콘스탄티노플은 겉으로는 무관심을 가장하고 내심으로는 은근히 즐기면서 로마에 닥친 재난들을 구경했다. 플라키디아의 기이한 모험들은 동서 두 제국 간의 동맹 관계를 되살리고 한때 고트족의 포로 신세에서 여왕이 되었다가, 사랑하는 남편(아돌푸스)을 잃고 무례한 암살자의 손에 사슬로 묶여 끌려 다녔다. 그러다가 복수의 기쁨을 맛보고 평화 협정에서 밀 60만 포대와 교환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가족의 품에서 재혼이라는 새로운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의 없이 결정된 결혼에 반감을 나타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내키지 않는 결혼에 저항하는 아돌푸스의 미망인의 손을 참제들을 쓰러뜨린 데 대한 고귀한 보상으로 용감한 콘스탄티우스에게 넘겨주었다. 플라키디아는 혼례를 치른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호노리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가 되어 감사해 하는 남편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275∼27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나의 생각)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 '호노리아 공주'의 혈연 관계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딸이자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이었던 플라키디아는 무능한 황제였던 오빠의 옆자리에 재혼한 남편인 콘스탄티우스를 내세웠다. 황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강요하여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만에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나서 플라키디아는 비열한 음모에 휩쓰려 오빠와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플라키디아와 자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궁정을 떠난 뒤에야 소란은 가라앉았다.

 

망명길에 오른 황족들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결혼 직후 페르시아에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환대를 받았으나 서로마 궁정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동상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미망인에게 황후의 호칭은 허락되지 않았다. 플라키디아가 도착한 지 몇 달 안 되어 한 발빠른 사자가 부종으로 인한 호노리우스 황제의 죽음을 알렸다. (…)

 

군주제에서 왕위 계승은 다양한 선례에 따라 추대나 세습, 장자 상속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여성과 방계 혈족의 계승권을 명확히 규정하기란 불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혈연상으로나, 또는 정복자의 권리로 로마인들의 유일한 정통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눈앞에 펼쳐진 무제한의 권력이 잠시 동안 그를 유혹했겠지만, 나태한 기질의 그는 건전한 정책상의 요구를 따랐다. (…) 그는 야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조부(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중용을 본받아 서로마의 제위에 사촌 발렌티니아누스를 앉히기로 결심했다. (…) 로마 제국을 뒷전에서 지배하던 세 여성의 동의에 따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은 테오도시우스와 아테나이스 사이에서 난 딸 에우독시아와 혼약을 맺었다. (…)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의 칭호를 받았을 때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오랜 미성년기 동안 서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어머니가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플라키디아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와 누이의 평판과 미덕, 즉 에우도키아의 우아한 재능과 풀케리아의 현명하고 성공적인 정책을 질투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지도 못할 권력을 탐냈다. 그녀는 25년간 아들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황제의 성격을 놓고 플라키디아가 방만한 교육으로 그의 젊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남자답고 명예로운 목표 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를 써서 막았다는 의혹이 점점 커져 갔다.(276∼28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은 여섯 살짜리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앉아 있는 동안, 제국의 국경 너머에서는 훈족에 밀려 고트족과 반달족들이 점차 로마의 국경을 넘어 왔다. 민족 대이동의 흐름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민족들은 하나같이 로마 속주들의 변경 지대로 이동했다. 아틸라의 숙부인 로아스가 이끄는 훈족의 대집단은 현재의 헝가리에 있는 평원에 마을을 꾸리고 정착했다. 그들은 서로마가 내분을 겪는 동안 찬탈자를 돕기 위해 무려 6만 명의 대군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 지대로 진군한 적도 있었다. 로마는 그들의 행진과 퇴각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훈족의 왕위는 로아스가 죽고 나서 조카인 아틸라로 이어졌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그 생김새와 성격부터 독특했다. 이 대목에서는 기번의 설명을 직접 듣는 게 훨씬 더 낫지 싶다.

 

아틸라는 문주크의 아들로 그의 가계는 중국 왕조와 대립했던 고대 훈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고트족 사가의 관찰에 따르면, 그의 용모는 자기 민족의 태생적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큰 두상, 거무스름한 피부색, 작고 푹 꺼진 눈, 낮은 코, 숱이 적은 수염, 떡 벌어진 어깨, 균혀이 잘 안 맞는 짧고 땅딸막하지만 기운이 넘치는 몸 등 현대 칼무크인의 추한 외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훈족 왕의 오만한 걸음걸이와 행동거지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 대한 그의 웅뤌감을 드러내 주었다. 또한 그는 남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듯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야만스러운 영웅에게도 동정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애원하는 적들은 그의 평화나 사면 약속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의 국민들에게는 올바르고 관대한 군주로 여겨졌다. 그는 전쟁을 즐겼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손보다는 머리를 써서 북방 정복을 달성했으므로, 모험을 즐기는 용장으로서의 명성 대신 현명하고 성공적인 지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스키타이의 정복자였던 아틸라는 흔히 칭기즈칸과 비교되는데, 그들이 미개한 동포들로부터 신과도 같은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방법은 참으로 교묘했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한낱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미개인들은 너무나 철석같이 믿었다.

 

훈족과 몽골족의 왕조는 대중의 미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처녀의 몸으로 기적에 의해 수태했다는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를 보통 인간들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벌거벗은 예언자가 신의 이름으로 그에게 지상의 제국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는 몽골족의 용맹을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아틸라는 자기 시대와 나라의 성격에 맞게 종교를 적절히 이용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전쟁의 신을 특별히 숭배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태를 갖춘 상징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었으므로, 쇠로 만든 언월도 한 자루를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한 훈족 양치기가 어느 날 풀을 뜯던 암소 한 마리가 발에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핏자국을 따라갔다가, 풀숲에서 오래된 칼을 발견했다. 그는 칼을 땅에서 파내 아틸라에게 바쳤다. 관대하기보다 교활한 이 군주는 이를 신이 자신에게 내린 호의라며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마르스의 검을 소유한 자로서 지상을 다스릴 권리를 신으로부터 정당하게 받았으니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30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곧 마르스의 총아로 신격화되었고, 그의 정복 사업도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야만족의 왕들은 신과 같은 이 훈족 왕의 존엄한 자태를 감히 오래 쳐다볼 수도 없다는 등 온갖 아첨과 숭배를 바쳤다고 한다. 나라의 상당 부분을 공동 통치하고 있던 형 블레다는 아틸라에 의해 왕홀뿐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겼는데, 이러한 잔인한 행위조차도 초자연적인 힘 탓으로 돌려졌다. 여기서 잠시 그의 모습을 감상하고 넘어가자.

 

 

19세기 아틸라의 묘사. 체르토사 디 파비아 건물의 파사드에 있는 메달리온.

라틴어 비문은 이 사람이 바로 신의 채찍, 아틸라라고 적혀있다.(출처:위키백과)

 

아틸라는 과히 야만족의 제왕이라 불릴 만했다. 그는 고대와 현대의 정복자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막강한 두 왕국, 게르마니아와 스키타이를 통합했다. 그는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크족의 내정에까지 개입했고, 저 멀리 동쪽으로는 유연(柔然)족의 칸에게 굴욕적인 패매를 안기고 중국에 사절을 보내어 동맹 관계를 맺고자 협상했다. 그들은 결국 서로마와 동로마뿐 아니라 페르시아까지도 호시탐탐 넘보는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윽고 흑해에서 아드리아 해에 이르기까지 500마일에 달하는 유럽 전체가 아틸라가 전장으로 끌어낸 무수한 야만족들에게 침략당하고 점령되어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과 세 번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에서 테르모필라이(영화 『300』의 주무대였던 그리스의 협곡)까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 지역에서 그는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속주들을 유린했다. 동로마 제국의 일흔 개 도시들이 겪은 참화에 대해서는 '완전한 몰살과 전멸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쓸 표현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겁 많고 이기적인 서로마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훈족의 손에 내버려 두었다. 동로마 황제는 오만한 자세로 가혹하고 굴욕적인 화명 조건을 전하는 아틸라에게 자비를 구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 유역을 따라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트라키아 지역 노바이까지의 넓고 중요한 영토를 양도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의 공물인 보조금으로 금 연간 2100파운드로 증액하고, 훈족 포로들의 무조건적인 석방과 로마인 포로들에 대한 조건부 석방이라는 가혹하고 치욕스러운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왕은 한번 무릎을 꿇은 동로마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거듭 모욕을 가했다. 적들로부터 뜯어낸 재물로 자기 총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걸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아틸라가 틈만 나면 비잔티움 궁정으로 사절단을 보냈고 온갖 성가신 댓가들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황제가 보낸 사절들의 인품과 지위를 의심하면서 오만하게 따질 때도 있었다. 집정관 직위를 지낸 고위급을 사절로 자신에게 보낸다면 먼 데까지 나가서 영접하겠노라는 제안에 이 야만족의 영웅이 기거하는 본거지까지 찾아간 인물은 명망 높은 막시미누스였다.

 

마침 그의 벗이자 역사가였던 프리스쿠스는 그 위험한 사절단에 자발적으로 동행했다. 그 특사단의 중차대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아틸라 암살'이었으나 그 계획은 미리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어쨌든 역사가 프리스쿠스 덕분에 아틸라가 머물던 도나우 강변 야만족 왕이 거주하는 마을과 궁정의 모습이 기번에 의해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었고, 프리스쿠스가 직접 관찰했던 풍경을 묘사해 놓은 '왕의 연회'는 100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수많은 화가들의 화폭 위에서 재탄생했다. 막시미누스의 사절단이 아틸라에게 파견된 때는 서기 448년이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틸라의 궁정까지는 국경지대인 나이수스(지금의 세르비아 니슈)까지 가는 데만도 13일이 걸렸다고 한다.

 

 

"아틸라의 연회". 헝가리의 로망스풍 그림, 탄 모어 작(1870).

 

에드워드 기번은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이 아틸라의 왕궁을 찾아가 협상을 벌이는 이야기를 무려 13쪽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가 아무리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훌쩍 건너뛰어야 마땅하다. 그 이야기까지 이 글에 포함시키다 보면 '호노리아 공주 이야기'는 긴 글에 지친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가능성이 더한층 낮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특이하게도, 그 사절단 속에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가 될 인물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고, 이탈리아 최초의 야만족 왕이 될 사람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 암살 음모'가 발각된 데 따라 치르게 된 곤욕 한 가지는 여기서 소개하고 넘어가야 마땅할 듯하다. 아틸라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자 즉각 고압적인 사절 두 명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고, 황제 앞에 대담하게 나아간 사절은 옥좌 옆에 선 환관(음모를 꾸민 범인)을 꾸짖은 다음 동로마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고명하고 존경받는 어버이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틸라 대왕도 그에 못지않게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셨으며, 문주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권위를 행동으로 지켜 오셨습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부왕의 명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공물을 바치는 데 동의함으로써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노예처럼 뒷전에서 주인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밈기보다는 운과 위업에서 우위에 있는 자에게 존경의 뜻을 바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첨에만 익숙했던 동로마 황제는 이토록 가혹한 말에 경악하고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고 한다. 그토록 나약했던 테오도시우스 2세가 50세를 일기로 재위 43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만장일치로 동로마의 여제(女帝)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해 줄 원로원 의원 마르키아누스를 '공동 통치 황제'로 선택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틸라 왕에게 공물을 바치던 나약하던 동로마 제국은 군인 출신의 마르키아누스 황제 덕분에 다시금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차츰 동로마 제국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마 제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년) 치하의 서로마는 황후 플라키디아와 실권자 아이티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훈족과의 동맹관계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아이티우스 덕분에 훈족과는 전쟁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등장한 돌출 변수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호노리아 공주였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누이(호노리아)는 라벤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녀의 결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리 뻔뻔한 신하라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호노리아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신에게 고귀한 사랑의 기쁨을 영원히 빼앗아 버린 성가신 지위를 증오하게 되었다. 호노리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불만스럽기만 한 허식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탄식하다가 욕망에 굴복하여 시종장인 에우게니우스의 팔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죄와 수치(이것은 오만한 남자의 어리석은 표현이다.)는 임신의 징후가 나타남으로써 곧 탄로났다. 황후 플라키디아는 경솔한 언행으로 황족의 불명예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녀는 딸을 엄격하고 치욕스러운 감금 상태에 두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불행한 공주는 테오도시우스의 누이들과 그들이 선택한 시중드는 처녀들하고만 교제하면서 12년 내지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호노리아는 그 처녀들과 같은 영광을 바랄 처지도 아니면서 기도와 단식, 철야로 채워진 그들의 열성적인 금욕 생활을 억지로 따라 해야 했다. 길고 희망 없는 금욕 생활에 넌더리가 난 그녀는 기이하고 절망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342∼34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철부지 공주에게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좋을지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그녀는 아무튼 느닷없이, 뜬금없이, 난데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아팉라에게 시집을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세상에나!

 

 

아틸라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익숙하면서도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파견하는 사절들은 그의 막사와 황제의 궁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플라키디아의 딸은 사랑을 갈구해서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모든 의무와 선입관을 버리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쓸 뿐 아니라 인간 같지도 않은 외모에 혐오스러운 종교와 관습을 지닌 이 야만인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한 충실한 환관의 도움으로 그녀는 아틸라에게 애정의 증표로 반지를 전해 주고 자신을 비밀 약혼한 적법한 배우자로 요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점잖지 못한 접근은 냉담하고 경멸스러운 태도로나마 받아들여졌다. 훈족 왕은 아내의 숫자를 계속해서 늘려 왔으나, 애정보다 더 강력한 감정인 탐욕과 야심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공주 호노리아를 황제의 세습 재산 가운데 정당하고 동등한 몫과 함께 공식적으로 요구한 뒤, 이를 빌미로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의 선조들인 고대의 선우(Tanjou)들도 똑같이 적대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로 중국의 공주들을 자주 요구하곤 했다. 아틸라의 요구는 그 못지않게 로마의 존엄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절들에게 온건하지만 단호한 거절의 뜻이 전달되었다. (…) 훈족 왕과의 관계가 발각되자 죄인이 된 공주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탈리아로 쫓겨났다. 그녀는 목숨은 구했지만 이름 모를 남성과 허울뿐인 혼례를 치른 후 영원히 유폐되어, 항제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죄와 불행을 탄식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343∼34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서기 451년에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는 순식간에 그 지역을 경악에 빠트렸다. 이때 갈리아의 도시들이 겪은 기구한 운명은 수많은 순교자들과 기적들에 대한 전설을 낳았다. 그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고된 행군 끝에 도달한 오를레앙은 그나마 완강하게 버텼다. 초기 성직자들의 거룩함과 헌신성은 기적을 바랬다. 마침내 기다리던 로마군과 고트군 연합군에 그들을 구원하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훈족 왕은 그들이 진군해 오자 즉시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갈리아 심장부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치명적인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센강을 다시 건너 스카타이 기병대가 작전을 펼치기 좋은 평탄한 땅인 샬롱의 평원에서 그들은 적을 기다렸다.

 

샹파뉴 지역으로 불리는 넓은 땅에 펼쳐진 카탈라우눔 평원에서의 전투는 전면전이었다. 훈족의 진영에는 루기아족, 헤룰리족, 튀링기아족,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게피다이족, 동고트족이 전투 대형을 펼쳤고, 로마 군과 서고트족 연합군은 알라니족과 합세하여 진영을 짰다. 이 기념비적인 대전투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는 불행하게도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에도 '그 전투에 대해서는 '야만적이고, 집요하며 복잡하고 방대한" 전투였다는 기록 외에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기번 또한 그 점을 아쉬워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방대한 규모뿐이다. 그러나 카시오도루스는 이 기념비적인 전투에 참전했던 고트족 전사 여러 명과 나눈 깊이 있는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전투는 격렬했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측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혈전을 벌였다. 과거에도 당대에도 이와 견줄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전사자들의 수가 16만 2000명을 헤아렸고 다른 계산에 따르면 30만 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믿기 힘든 과장이지만 이를 통해 실제의 손실을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왕들의 광기로 한 시간 만에 한 세대 전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한 역사가의 말도 과장이라 할 수 없다.(351∼35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조차도 모를 대혼전 속에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결과는 로마군의 승리였다. 이때 아틸라는 마차를 둘러쳐 만든 요새 안으로 퇴각했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도 참호 안에서 꼼짝도 않고 쳐박혀 있었다. 이때 그는 꼼짝없이 생포될 운명이었으나 로마군의 지휘자인 아이티우스가 훗날을 내다보고 혜안을 발휘한 덕분에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다. 로마의 지휘관은 훈족이 궤멸된 후에 고트족의 오만과 무력이 공화국에 짐이 될 것을 더 우려했던 것이다. 이 당시의 경과를 몽고메리 장군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했다.

 

아에티우스는 여세를 몰아 승리를 확고히 하지 않았는데, 훈족이 멸망하면 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듬해 아틸라는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는 기근과 질병 때문에, 그리고 로마 제국의 동쪽 지원군과 교황 레오 1세의 외교적 수완 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453년 그는 새 아내를 얻었는데, 결혼식 초야에 혈관이 터져 사망했다. 훗날 초서Jeoffrey Chaucer(1342∼1400)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보라, 저 대단한 정복자, 아틸라를

그는 대취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치욕스럽게도 자다가 죽었느니

대장이라면 모름지기 술을 삼가야 하거늘.(242쪽)

 

 -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6. 로마의 수비와 야만인 이주> 중에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지만 결혼식 초야에 코피가 터져 죽은 이 야만인을 비웃은 초서의 멋진 시까지 소개하는 재주를 부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역사』 어디에서도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아틸라 못지 않게 호노리아 공주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래서 샬롱 전투 이후 아틸라의 행적을 다시금 되짚을 필요를 느낀다. 다시 기번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아틸라의 기백, 병력, 평판은 갈리아 원정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호노리아 공주와 그녀의 세습 재산을 요구했으나 다시 한 번 거부당했다. 분개한 연인은 즉시 전투를 개시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략하고 야만족 대군이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35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고대 로마 시대의 가장 번성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아퀼레이아는 3개월의 포위 공격에도 굳세게 버텨냈지만 마지막으로 시도된 아틸라의 맹공격에 마침내 무너졌고, 이때의 공격으로 아퀼레이아는 후세 사람들이 그 폐허조차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응징 후에 아틸라는 진군을 계속해서 알티눔, 콩코르디아, 파두아, 비켄차, 베로나, 베르가모, 밀라노, 파비아 등을 돌무덤이나 잿더미로 바꾸고 지나갔다.

 

아틸라의 포악한 오만무도함은 극에 달하여 그의 말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야만스런 파괴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형향으로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새로 탄생시켰으니, 그곳이 바로 베네치아다. 훈족의 칼을 피해 도망친 아퀼레이아, 파두아, 인근 마을의 많은 가족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근처 섬으로 숨어들었으니, 그곳의 조수 간만은 아주 약했고, 그 끝에는 백여 개의 섬이 대륙과 얕은 물을 사이에 두고 육지의 긴 단층 몇 개로 파도를 막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휩쓸고 지나가자 황제인 발렌티나아누스는 궁정이 있던 라벤나에서 로마로,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무방비의 수도로 황급히 퇴각했다. 아틸라의 진군을 방해하기도 벅찬 아이티우스로서도 더 이상 고트족이나 동로마 황제의 구원을 받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서로마 황제는 아틸라의 분노를 달래 보고자 특사단을 파견했고, 집정관과 민정 총독뿐 아니라 교황까지도 그 사절단에 합류하기 위해 기꺼이 발벗고 나섰다.

 

레오의 재능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정통 신앙과 교회 규율의 신성한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와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 교황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마의 사절들은 아틸라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아틸라는 민키우스 강이 천천히 굽이쳐 베나쿠스 호의 포말 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에 진을 치고 스키차이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카툴루스와 베르길리우스의 농장을 짓밟고 있었다. 야만족 군주는 호의를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존중하는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호노리아 공주의 몸값 또는 지참금 명목으로 막대한 액수를 내놓으면 이탈리아에서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쉽게 조약의 체결에 동의하고 서둘러 퇴각한 것은 그의 군대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36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전쟁을 시작할 때나 화평 조약을 맺을 때나 이처럼 집요하게 '호노리아 공주'를 이용했다. 이 국가적인 재난 앞에서 기적적으로 로마를 구출한 교황 레오의 업적은 이 사건이 있던 때로부터 1000년이 더 지난 후에 태어난 천재 화가 라파엘로의 붓끝에서 다시 한번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라파엘로교황 레오와 아틸라 간의 회담성 베드로사도 바울의 호위를 받는 교황 레오 1세가 로마 외각에서 훈족의 왕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다.(출처 : 위키백과)

 

 

레오의 간곡한 열변과 위엄 있는 풍모, 사제복은 아틸라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적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환영이 아틸라 앞에 나타나 자기들 후계자의 기도를 물리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으리라고 위협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 고귀한 전설들 중 하나이다. 로마의 안전은 천상의 존재가 중대할 만한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라파엘로의 화필과 알가르디의 정이 전하는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36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 기번의 주석

라파엘로의 그림은 바티칸에 있고 알가르디의 부조상은 성 베드로의 제단들 중 한 곳에 있다.

 

(나의 생각)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목이 아프도록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 그림은 어디에 있었지? 베드로 성당에서는 기나긴 줄의 맨 끝에 서서 기어코 베드로의 '빛나는 맨발'을 만진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언제 다시 로마를 찾아 '기번의 주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나.

 

 

이제 이 무시무시한 야만족 왕이 호노리아 공주를 생애 마지막으로 울궈 먹은 이야기를 할 차례다. 아틸라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때만큼 '호노리아 공주'를 들먹일 좋은 기회도 더 이상 없었다. 기번의 얘기를 들어보자.

 

 

훈족 왕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에 앞서 만일 자신의 신부 호노리아를 조약에 명기된 기한 안에 그의 사절들에게 인도하지 않으면 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보복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아틸라는 일디코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수많은 아내들의 목록에 새로 올려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두 사람의 혼례는 도나우 강 너머 그의 목조 궁전에서 야만족 풍습에 따라 호화스러운 축제로 치러졌다. 군주는 밤늦게 연회를 마치고 술과 잠에 취해 혼례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종들은 다음 날 거의 날이 저물 때까지 그가 쾌락을 즐기든지 쉬든지 방해하지 않고 놔두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길어지자 공포와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큰 소리로 아틸라를 깨워 보려고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자 마침내 왕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옆에서 겁에 질린 신부가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밤 사이 절명한 왕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자신에게 미칠 위험을 한탄하고 있었다. 동맥의 한 곳이 갑자기 터져서 반듯이 누워 있던 아틸라의 콧구멍으로 피가 나오지 못하고 폐와 위로 역류해 들어가는 바람에 질식하고 만 것이다. (…) 그들은 살아서는 영광스러웠고 죽어서도 무적이었으며, 국민들에게는 아버지 같고 적에게는 재앙이었으며 전 세계의 공포였던 영웅을 기리는 장례식 노래를 불렀다. 훈족의 관습에 따라 야만족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 보기 흉한 상처를 내어 여자들의 눈물이 아니라 전사들의 피로 용맹스러운 군주의 죽음을 슬퍼했다. 아틸라의 유골은 금, 은, 철로 만든 세 겹의 관에 넣어 훈족의 전리품과 함꼐 한밤중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무덤을 팠던 포로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아틸라가 숨을 거둔 그 행운의 밤에 마르키아누스가 꿈에서 아틸라의 활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무시무시한 야만족의 모습이 로마 황제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361∼36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뒤늦게 알고 보니 아틸라와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아틸라 역은 안소니 퀸이 맡았고 호노리아 공주 역은 소피아 로렌이 맡은 모양이다. 안소니 퀸이야 워낙에 독특한 외모를 지닌 배우이니만큼 야만족 왕에게도 충분히 어울릴 법하지만, 호노리아 공주 역을 맡은 소피아 로렌이 알맞은 배역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철딱서니 없는 공주는 자신의 감정 하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자신의 조국인 서로마 제국을 더욱더 어려운 처지로 내몬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데, 소피아 로렌이라는 여배우가 그 정도로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꾸며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민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몹시나 흥미롭다. 『전쟁의 역사』에는 이름조차 발견되지 않은 서로마 제국의 공주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영역에서 다뤄지는 점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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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은 공중 목욕탕을 과연 어떻게 이용했을까?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을 들어 보자.

 

아우구스투스 자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경탄할 만한 수로들은 황제가 관대하게 로마 시 곳곳에 건설한 공중 목욕탕에 물을 공급해 주었다. 원로원 의원들과 시민들이 차별 없이 사용하도록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여는 안토니누스 카라칼라 욕장은 대리석으로 만든 1600개 좌석을 갖추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은 3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높은 욕실 벽은 화필로 그린 듯 우아한 디자인과 다양한 색채의 정교한 모자이크로 덮였다. 이집트산 화강암이 누미디아의 귀한 초록색 대리석을 보기 좋게 장식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빛나는 은으로 만든 수많은 수도꼭지를 통해 넓은 웅덩이로 계속해서 쏟아졌다. 로마 시민 중 가장 비천한 자라도 동전 몇 닢만 있으면 아시아의 왕들도 질투할 호사를 온종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건물들로부터 신발도 못 신고 망토 하나 못 걸친 지저분한 누더기 투성이의 평민들이 쏟아져 나와 온종일 광장이나 거리를 배회하며 주워들은 소식으로 논쟁을 벌이고, 처자식들의 비참할 만큼의 적은 생활비를 허황된 도박에 탕진해 버렸다. 그러고는 음침한 여관이나 매음굴에서 상스럽고 천박한 육욕에 탐닉하면서 밤을 지샜다.(18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역사가의 설명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들이 아직도 로마에 그대로 남아 있다.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에 담긴 '카라칼라 욕장'을 보면 그 엄청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 사진에 딸린 설명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화려한 황제의 목욕탕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들에서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졌다. 카라칼라 황제가 세운 이 목욕지구에는 온탕, 냉탕, 상점, 도서관, 마사지실, 피부 미용실은 물론 정원도 있었다.(55쪽)

 

 - 『유네스코 세계고대문명』 중에서

 

 

카라칼라 욕장 (1899년 추측해서 그려낸 복원 그림) (출처 : 위키백과)

 

카라칼라 욕장은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공중 목욕탕 유적을 말한다. 카라칼라 황제의 명령으로 212년부터 216년까지 지어졌다. 이 공중 목욕탕은 6세기까지 남아서 그대로 사용되다가, 고트 전쟁 중에 동고트족 군대가 공격하여 파괴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카라칼라 욕장의 디자인과 양식은 뉴욕 시의 펜실베이니아 역의 디자인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1960년 하계 올림픽 체조 종목의 공식 경기장으로 사용되었고, 2009년에는 카라칼라 욕장의 발굴 유적지가 2009년 라퀼라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출처 : 위키백과)

 

 

로마인들이 목욕탕 만큼 자주 들렀던 곳은 '원형 경기장'이었다. 그들이 거기서 벌어지는 경기들을 얼마만큼 광적으로 좋아했는지는 기번의 설명만큼 생생한 것도 드물지 싶다. 앞에서 인용했던 기번의 문장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은 이렇다.

 

그러나 이 나태한 대중의 오락 중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화려한 것은 자주 열리는 공공 경기들과 구경거리였다.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군주들은 비인간적인 검투사들의 싸움을 폐지했지만, 원형경기장은 여전히 로마 시민들의 집이며 신전이고 공화국의 본거지였다. 성급한 군중들은 동이 트자마자 자리를 잡으려고 달려갔다. 근처의 주랑 현관에서 잠도 못 자고 마음 졸이며 밤을 보내는 자들도 많았다. 구경꾼들의 숫자는 떄로는 40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들은 아침부터 밤까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초조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말과 기수들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 채, 자기가 선택한 깃발의 승패에 따라 희망과 두려움 사이를 오고 갔다. 이쯤 되니 로마의 행복이 한낱 경기 결과에 달려 있는 듯 보일 지경이었다. 그들은 경기에 고함을 지르고 갈채를 보낼 때 못지않은 열정으로 야수 사냥과 다양한 형식의 무대 공연을 즐겼다. 여기에 비하면 오늘날 대도시에서 벌어지는 공연들은 순수하고 우아한 취향과 미덕의 교육장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181∼18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제31장> 중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출처:위키백과)

 

 

Colosseum 2013(출처:위키백과)

 

 

The Christian Martyrs' Last Prayer, by Jean-Léon Gérôme (1883) (출처:위키백과)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도 자세히 묘사했지만, 자신이 죽고 난 뒤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자신이 사망한 뒤 불과 1세기만에 영국인들이 로마의 콜로세움 못지 않은 대규모 축구장을 짓고 나서 매주마다 광적으로 축구 경기를 즐기기 시작했으며, 거기서 다시 1세기가 더 흐르고 나서는 전세계의 수많은 축구팬들이 '단 하나의 경기 결과'에 얼마나 미쳐 날뛰듯이 광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조차도 언급한 게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내일 새벽 경기에서는 또 어떤 극적인 드라마가 쓰여질까. 오늘 새벽처럼 전세게를(특히 한국을?) 뒤집어 놓을 드라마틱한 경기가 또다시 재연될까. 벌써부터 몹시 궁금하다. 이토록 큰 경기를 코 앞에서 놓칠 순 없는 노릇이지만, 이토록 야심한 새벽 시간에 열린다는 게 늘 문제다. 까마득한 옛날 박지성이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아스널을 맞아 멋진 선제골을 넣을 때, (정말 뜻밖에도!) 편안한 저녁 시간에 외국인들과 함께 그 경기를 봤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9년 5월 어느날, 토론토에 있을 때였지 싶다. 그땐 또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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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09 0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많은 스포츠 경기가 새벽에 있는데, 그럴 때는 밤늦게 시청하기가 쉽지 않네요. 특별한 경우에만 하이라이트를 보고 넘기고 있는 저로서는 밤늦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를 시청하고도 다음날 무리없이 일상으로 돌아오시는 분들이 부럽기만 합니다.

oren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EPL 경기는 그나마 주말 밤에 게임이 열려서 밤늦도록 중계 방송을 보더라도 생활에 별 지장(?)이 없는데, 챔피언스 리그는 꼭 주중에, 그것도 새벽 4시대에 열리니까 생중계 보는데 진짜로 애로가 많더라구요. 챔피언스 리그 주요 경기를 생중계로 근 10년 가까이 보다가, 요즘은 녹화된 하이라이트만 보는 형편인데, 오늘 새벽 게임은 모처럼 본방 사수했네요. 더군다나 오늘 경기는 두고두고 기억될 역사적인 경기여서 생중계로 본 보람도 컸네요. 하루 전에 있었던 ‘안필드의 기적‘보다 훨씬 더 극적인 ‘암스테르담의 기적‘을 봤으니까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9-05-09 11:33   좋아요 1 | URL
어재 경기가 그렇게 재밌었다는데 oren님께서는 실시간으로 보셔서 정말 기분좋게 하루를 보내시겠습니다^^:)

oren 2019-05-09 11:38   좋아요 1 | URL
후반 인저리타임에 역전골 넣었을 땐 정말 소리 지르고 싶어 미치겠더라구요. 야심한 새벽이라 도저히 고함을 지를 순 없었고, 어디에선가 도저히 못 참고 뿜어내는 극적인 환호성을 조용히 음미하기만 했답니다.^^

cyrus 2019-05-09 16: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츠 중계를 보는 날 중 가장 기분이 좋았던 날은 어제였어요. 제가 바라던 결과가 나왔거든요. 류현진 선발 경기, 삼성 라이온즈 투수 윤성환 선발 경기, 대구 FC 아시아챔스리그 조별 경기, 그리고 오늘 새벽에 본 토트넘 경기까지 제가 응원한 팀들 모두 이겼어요... ㅎㅎㅎ

oren 2019-05-09 16:32   좋아요 0 | URL
어제 하루 그렇게나 많은 경기에서 모조리 승리를 챙겼군요. ㅎㅎ
류현진 완봉승도 대단했지요. 저도 실시간 중계를 틈틈이 챙겨봤습니다만.. ㅎㅎ

카알벨루치 2019-05-10 0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의 이런 면 좋아합니다 오우 본방사수하셔서 희열을 느끼셨겠습니다 모우라가 미친날! 가끔 큰 경기는 한 두사람이 미쳐주는 팀이 이기죠 ㅎㅎ

oren 2019-05-10 13:05   좋아요 1 | URL
전반전이 진행될 때만 해도 토트넘이 너무 못한다 싶었고, 상대적으로 아약스가 매우 짜임새 있게 토털 축구를 훌륭하게 펼친다 했는데, 후반전에 요렌테 투입하고 나서 게임이 완전 달라지더군요. 그 틈바구니에서 모우라는 ‘상상 그 이상‘의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고요. 간만에 대박 경기를 생중계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