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사후 거의 2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신성ㅎ나 노역을 정력적으로 재개하여 결국 완성했다. (…) 신앙심 깊은 황제는 이교에 대한 최초의 실험이 성공한 데 고무되어 금지령을 거듭 선포함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갔다. 처음에는 동로마의 속주를 대상으로 공포되었던 법률이 막시무스가 패배한 이후 서로마 제국 전체에까지 적용되었다. 테오도시우스가 거둔 승리 하나하나가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신앙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희생 제의를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범죄 행위라고 선언하여 금지함으로써 이교 신앙의 급소를 공격했으며, 희생 제물의 창자를 살펴보는 일은 더욱 엄격하게 비난했다. 이후 부속 칙령들은 이교 신앙의 핵심인 제물을 바치는 행위 전체를 동일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 신전들은 희생 제의를 바칠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국민들이 위험한 유혹에 넘어가 황제가 입안한 법을 어기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자비로운 군주의 의무였다. (…) 그들은 신전을 폐쇄하고, 우상 숭배에 쓰이는 도구들을 압수하거나 파괴하고, 신관들의 특권을 폐지하고, 신전에 헌납된 재산을 황제나 교회, 군대가 쓰도록 몰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쯤에서 신전의 파괴를 중지했더라면 더 이상 우상을 섬기는 데 쓰이지 않고 버려진 신전 건물들을 광신이 몰고온 파괴적인 분노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신전들은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념물이었고, 황제도 자기 도시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 장려한 건축물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념하는 영구불멸의 전리품으로 남겨 두어도 좋았을 것이다. 예술이 쇠퇴한 시대에 이 건물들은 창고, 공장, 공공 집회 장소 등으로 유용하게 쓰이거나 신전 벽을 성스러운 의식으로 충분히 정화한 뒤 참된 신을 섬기는 장소로 바꾸어 우상을 숭배한 과거를 속죄하게 할 수도 있엌ㅆ다. 그러나 신전들이 존재하는 한 이교도들은 제2의 율리아누스가 나타나 신들의 제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어리석고ㅗ 비밀스러운 소망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효과도 없는 탄원을 황제에게 진지하게 바치는 모습은 가차 없이 미신을 뿌리째 뽑아 없애고 말겠다는 그리스도교도 개혁자들의 열정을 더욱 붇돋웠다. 황제가 내놓은 법은 좀 더 온건한 편이었으나, 법 집행 과정에서 보여 준 냉담하고 무성의한 태도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앞장서거나 뒤에서 부추긴 광신과 약탈 행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갈리에엇 투르의 주교였던 성 마르티누스는 충성스러운 수도사 무리를 이끌고 그의 광대한 교구에 있는 우상들과 신전들, 봉헌수(봉헌수)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마르티누스가 이 고된 작업에 기적의 힘을 빌렸는지 인간의 무기를 썼는지는 독자의 신중한 판단에 맡긴다. 시리아에서는 테오도레투스에 의해 '거룩하고 훌륭한 마르켈루스'라고 불렸던 주교 마르켈루스가 사도로서의 열정에 넘쳐 아파메아 교구에 있는 장려한 신전들을 초토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피테르 신전은 워낙 뛰어난 기술로 단단하게 건축되어 있어서 그의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건물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사면에 걸쳐 둘레 16피트에 달하는 열다섯 개의 큰 기둥이 높이 솟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이 기둥을 이루는 큰 돌들은 납과 쇠로 단단히 고종되어 있었다. 온갖 강하고 날카로운 도구도 여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기둥의 토대를 부수기로 하고 나무로 된 지주를 불태우자, 기둥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 승리감에 도취한 마르켈루스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자 자신이 직접 나섰다. 교회의 깃발 아래 수많은 병사들과 검투사들이 진군하여 아파메아 교구의 마을과 지방 신전들을 잇달아 공격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마르켈루스는 이교도의 저항에 직면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에 싸우거나 도망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살이 닿지 않을 곳까지 멀리 피해 있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이 오히려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갑자기 격분한 한 떼의 농부들이 그를 덮쳐 살해한 것이다. 속주의 종교 회의는 지체 없이 마르켈루스가 신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선언했다. 분노한 수도사들이 이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사막에서 노도처럼 몰려와 자신들의 신앙심과 열성을 과시했다. 이교도들이 그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탐욕스럽고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약탈로 탐욕을 채우고 자기들의 너덜거리는 의복, 고래고래 부르는 찬송가 소리, 창백하게 꾸민 얼굴 따위를 찬미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주머니에서 우려낸 돈으로 실컷 먹고 마셔댔다. 몇몇 신전들만이 민정 관리나 성직자들의 공포심 ㅓㄱ에, 혹은 그들이 매수된 탓에, 아니면 그들의 취향이나 신중함 덕에 보호되었다. 카르타고에서 반경 2마일에 걸쳐 성역을 형성하고 있던 거룩한 베누스 신전은 현명하게도 그리스도교 교회로 바뀌었다. 장엄한 로마의 판테온도 비슷한 조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의 대부분 지역에서 광신도 무리들은 권한도 규율도 없이 평화로운 주민들을 침략했다. 이때 파괴된 건축물들의 폐허는 아직까지도 남아 야만인들이 열성적으로 자행한 파괴 행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유린 행위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세라피스 신전의 파괴는 특히 눈길을 끈다. 세라피스는 미신이 번창했던 이집트의 토착신이나 괴물들 중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첫 번째 왕은 어느 날 꿈속에서 폰투스 해안에서 오랫동안 시노페 주민들의 숭배를 받아 온 신비스러운 이방의 신을 맞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신의 셩격과 권세는 애매했으므로, 그가 태양을 상징하는가 아니면 어두운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인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조상들의 종교르 ㄹ고수해 온 이집트인들은 이 이방의 신을 자기들 도시의 성벽 안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첨꾼인 신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왕들이 준 뇌물에 넘어가 폰투스에서 온 신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토착신으로서의 영예로운 계보를 꿈 주었다. 그리하여 이 찬탈자는 운 좋게 이시스이 남편으로서 이집트의 거룩한 군주인 오시리스의 왕좌와 침대를 차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특별히 그의 보호를 청하여 세라피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누렸다. 이 신의 신전은 위풍당당한 유피테르 신전과 겨루기 위해 도시의 다른 부분보다 백 단 정도 높게 인공으로 쌓아 올린 산의 널따란 정상에 세워졌다. 내부의 벽이 없는 부분은 아치로 단단히 지탱했고 지하에는 납골당과 다른 지하 공간으로 분리해 놓았다. 사각형의 주랑이 신전 건물을 둘러쌌으며, 웅장하고 화려한 홀과 정교한 동상들이 예술의 극치를 과시했다. 잿더미에서 새롭게 재던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고대 학문의 보배들이 보관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칙령으로 엄격히 금지된 이교의 희생 제의가 세라피스의 도시와 신전에서만은 여전히 용인되었다. 이렇게 유일한 예외가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미신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나일 강의 범람과 이집트의 풍작, 그로 인한 콘스탄티노플의 생존을 보장해 준다는 고대 의식을 감히 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는 테오필루스였다. 그는 평화와 미덕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피와 금으로 번갈아 가며 손을 더럽힌 대담하고 부패한 악한이었다. 그는 세라피스가 누리는 영예에 분개했다. 테오필루스가 바쿠스의 신전에 가한 모욕을 기억하는 이교도들은 그가 훨씬 더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소란스러운 이집트 수도에서는 극히 사소한 도발조차도 내전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세라피스의 신도들은 힘으로 보나 수로 보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적수가 못 되었지만, 신들의 제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철학자 올림피우스의 선동에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광신적인 이교도들은 세라피스 신전을 요새화하고 대담한 반격과 단호한 방어로 포위군을 격퇴했으며, 그리스도교인 포로들에게 비인간적인 가혹 행위를 가하면서 절망감을 달랬다. 신중한 속주 총독의 노력 덕에 테오도시우스의 답변으로 세라피스의 운명이 결정 날 때까지 두 세력이 휴전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비무장 상태로 대광장에 모인 자리에서 황제의 칙서가 공개 낭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우상들에 대한 파괴 명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기쁨의 환호를 올렸다. 반면 불운한 이교도들은 분노가 경악으로 바귀면서 적들의 분노를 피해 황급히 자리를 물러나 도망치거나 은둔했다. 이제 세라피스 신전을 파괴하러 나선 테오필루스를 막는 것은 신전 자재의 무게와 견교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장애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토대는 그대로 남겨 두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잔해를 치운 자리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교회가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의 귀중한 도서관도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텅 빈 서가의 모습은 종교적 편견에 완전히 물들지 않은 구경꾼들로부터 비탄과 분노를 자아냈다. 영영 회복할 수 업시 소멸되어 버린 고대 천재들의 저작은 후세의 즐거움과 교육을 위해서라도 우상 숭배의 파괴 대상에서 제외시켰어야 했다. 값진 전리품들만으로도 대주교의 신앙열과 탐욕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테오필루스는 금은으로 만든 동상과 항아리들은 셋ㅁ하게 녹였고, 값이 덜 나가는 금속 제품들은 망가뜨려 거리에 내동낻이쳤다. 그는 우상을 모시는 신관들의 기만과 악덕, 즉 자석을 이용한 교묘한 속임수, 속이 빈 조각상 속에 사람을 넣는 비밀스러운 수법들, 신앙심 깊은 남편들과 의심할 줄 모르는 여자들의 신뢰를 악용해서 저지른 비행 등을 폭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비난들은 교활하고 불순한 이교의 정신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가. 그러나 이미 쓰러진 적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비열한 소행도 그보다 낫다고 는 할 수 없다. 또한 실제로 기만 행위를 입증하는 것보다느 ㄴ가공의 이야기를 꾸며 내는 편이 훨씬 쉽다느 ㅈ점을 생각하면 그러한 비난들을 선뜻 빋기도 어렵다. 세라피스의 거대한 조각상은 자기의 신전과 조요과 함꼐 폐허 속에 묻혔다.(7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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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왕권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위와 같이 하신다면 국민들은 전하의 정의와 사랑에 감동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써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 <디온 편>

 

 * * *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대부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만 하더라도 무려 31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데다가, 그의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황제 또한 '가문의 대학살' 이후 탄탄하게 구축된 자신의 통치 기반 위에서 무려 24년 동안 황제의 지위를 누렸고, 이 두 황제의 치세 동안 그리스도교를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황제가 기독교를 옹호한 방식은 적잖은 차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찌감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믿을 자유'를 사상 최초로 공인했고, 차츰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종교 정책을 꾸준히 확산시켰던 반면에, 콘스탄티우스는 기독교 가운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내몰린)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반면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는 끈질기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 두 황제의 기나긴 치세가 막을 내리자 그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율리아누스였다. 전임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나자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오직 율리아누스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촌 형인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로마의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동안 그가 일찌감치 부황제로서 로마의 서쪽을 떠맡아 이미 훌륭한 무공과 명성을 쌓은 덕분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특이하게도 이 인물에 대해서는 지면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재위기간이 불과 2년을 넘지 못했고, 황제로 부임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고작 32세에 전사하고 만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로마 제국 쇠망사』 전체를 둘러보더라도 그 어떤 인물에 못지 않게 자못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그에 대해 유난히 공을 들여 언급하는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가 좀 더 오래도록 살았더라면 인류 역사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뒤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에 얽힌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그에 대한 이야기가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의 곳곳에 골고루 담겨 있는 데다가, 그의 행적 가운데 여러 대목들이 눈길을 끌기 때문에 이 인물의 활약상을 짧게 요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가 두 번째 부인을 맞아 생산한 3남 3녀의 자식들 가운데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31년에 태어난 율리아누스는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337년)할 때만 하더라도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사촌 형님인 콘스탄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에 자행된 저 끔찍한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이복형인 갈루스도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는 당시 열두 살이었다. 두 형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족이었다.

 

 

 

그는 가문의 대학살이 진행되는 내내 목숨이 간당간당했을 뿐만 아니라, 용케 살아남은 이후에도 늘 불안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인 갈루스와 그는 어릴 때부터 유폐되다시피 지내는 동안 언제나 특별관리되었으며 성년으로 자라나자 마지 못해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부황제'로 잠깐 등용되었을 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갈루스는 재능도 적응력도 유연성도 없었고 침울하고 난폭한 성격 때문에 이내 콘스탄티우스의 노여움을 샀고, 끝내 살해되고 만다. 갈루스는 황제의 시종장으로부터 범죄 행위에 대한 심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황후인 콘스탄티나가 사주했다고 변명했고(자신의 잘못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는 못난이는 로마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더욱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이자 율리아누스의 형은 결국 흉악범처럼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감옥 안에서 목이 잘렸다. 

 

 

이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많은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율리아누스 한 명뿐이었다. 황제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불운 때문에 율리아누스도 갈루스 몰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다시 휩쓸려 들어갔다. 평화로운 이오니아 지방에서 은거 생활 중이던 율리아누스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밀라노의 궁정으로 호송되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곳에서 7개월 이상을 날마다 그의 몰락한 가문의 친구나 지지자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자신에게도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보내야 했다. (…)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건함과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배웠다. (…)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신의 가호 덕분이었다고 굳게 믿었다. 신들은 불경한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응당 받아야 할 파멸을 선언했지만, 무고한 율리아누스만은 면제해 주었다는 것이다. 신들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도와 준 가장 든든한 매개는 황후인 에우세비아였다.(11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황후의 중재 덕분에 밀라노에 소환된 후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졌다. 신하들이 '갈루스의 피'를 복수할 자를 살려두는 건 위험하다고 역설했으나 황후의 온정론이 그를 살렸다. 그 후에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유배지인 아테네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의 언어와 풍습과 학문과 종교에 이끌렸던 율리아누스로서는 너무나도 기쁜 명예로운 유배지였다. 아카데메이아 동산에서 당대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낸 세월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내전의 상흔을 가까스로 수습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외적들의 침입에 또다시 시달리자 어쩔 수 없이 율리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해서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한다. 부황제 임명에 대한 환관들의 집요한 반대가 있었지만 황제는 또다시 황후의 영향력에 굴복했고, 여동생인 헬레나를 그와 결혼시킨 다음 부황제 칭호를 내렸다. 부황제 즉위식이 열리던 날은 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즉위식을 마친 후 황제와 부황제가 같은 전차에 타고 궁정으로 귀환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마음 속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 호메로스의 시를 반복해서 암송했다고 한다. 행운과 두려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자신의 운명을 대입시켜 볼 싯구들이 『일리아스』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갈리아 속주 지방은 비옥한 영토 맛을 본 야만족 동맹군들이 온통 휘젓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통그르, 콜로뉴(오늘날의 쾰른), 트레브(오늘날의 트리어), 보름스,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를 비롯한 마흔다섯 개 도시와 그보다 훨씬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야만족에게 약탈당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다. 로마 군단은 급여나 보급품도 받지 못했고, 전력이나 기강도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4세기 경 갈리아 지방의 국경 지도)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젊은이가 갈리아 속주를 구원하고 통치하도록, 혹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국의 위대성이라는 공허한 이미지를 과시하도록 임명된 것이다. 은거하면서 현학적인 교육만 받아 온 율리아누스는 무기보다는 책과, 산 자보다는 죽은 자들과 더 가까웠으며, 전쟁이나 통치의 실제적인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제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군사 훈련을 어색하게 반복하면서 한쉼을 쉬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오, 플라톤이여, 플라톤이여, 철학자에게 이 무슨 고역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실무자라면 경멸해 마지 않을 이런 사색적인 철학은 율리아누스의 정신을 고귀한 교훈과 빛나는 모범들로 채워 주었고, 미덕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경멸 등의 덕목을 그에게 고취시켜 주었다. 아카데메이아에서 배운 절제의 습관은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천성적으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침식도 절도 있게 조절했다. 율리아누스는 식탁에 올라오는 산해진미들을 경멸하며 물리치고는 말단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거칠고 평범한 식사로 만족했다.(135∼1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전쟁 경험이 거의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명성을 빛나게 만든 첫 전투는 스트라스부르크 전투였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의 용맹과 기백으로 이끈 승리였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이 눈부신 승리의 전리품인 알레만니 왕 크노도마르를 공손하게 황제에게 진상했다.알레만니족을 몰아낸 율리아누스는 잇따라 프랑크족을 몰아냈고, 라인강 너머로도 세 차례나 진군했다. 특히 세번째 원정에서는 무려 2만 명의 로마인 포로들을 야만족들의 사슬에서 구했는데, 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번은 예전의 포에니 전쟁이나 킴브리 전쟁의 승리에 견줄 만큼 높이 평가했다.

 

갈리아의 여러 도시를 복구한 율리아누스는 동계 막사에서 지내는 여유로운 시간 동안에는 민정에 전념하여 장군보다는 행정관의 업무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의 흥미로운 일화 한가지는 이렇다.

 

전시냐 평시냐에 관계없이 국가의 통치에서 군주의 이해는 대부분의 경우 일반 국민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자신이 피폐해지고 억압받는 나라에서 착취한 공물의 일부를 율리아누스의 선정으로 빼앗겼다고 여기며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부황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아누스로서는 하급 대리인들의 건방진 약탈 행위를 시정하고 그들의 부패를 파헤친 후 보다 공평하고 관대한 조세 체계를 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 업무는 갈리아의 민정 통독인 플로렌티우스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었다. 이 민정 총독은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모르는 소심한 독재자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는 아무리 정당하고 온건한 것이라고 해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오만불손한 자였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경우를 당하고 오히려 자신의 허약함을 탓해야 했다. 율리아누스는 임시 조세를 징수하려는 명령서에 서명해 달라는 민정 총독의 요청을 분연히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국민들의 비참상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가 콘스탄티우스의 궁정을 크게 화나게 했다. 율리아누스는 가까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했는데 이 편지는 지금도 읽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취한 생동을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어떻게 내가 한 행동 이외의 행동을 할 수 있겠나? 어떻게 내게 맡겨진 불행한 국민들을 저버릴 수 있겠나? 이 무자비한 도적떼들의 거듭된 약탈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었던가? 자기 임지를 버린 지휘관은 처형당하고 매장의 영예를 누릴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위기 상황을 맞아 내가 맡은 훨씬 막중하고 신성한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무슨 명목으로 내가 그에게 처형을 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께서 나를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올려 주셨으니, 그의 섭리로 나를 이끌고 도와 주실 것이다. 만약 내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순수하고 공정한 양심의 증거라고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겠다. (…) 그들이 나를 파면하려고 하면 나는 아무 불만 없이 따르겠다. 오랫동안 죄를 눈감아 주며 지위를 누리느니 짧은 기간이나마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148∼1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로마인들이 환관들과 사제들의 폭정 아래서 고통받고 있을 동안에도 율리아누스에 대한 찬사는 제국의 방방곡곡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부상에 반감을 지닌 궁정의 총신들에게는 그러한 소문들이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민중의 벗이란 곧 궁정의 적을 뜻할 따름이었다.

 

어느새 율리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한 교묘한 계획들이 궁정의 대신들에 의해 짜여졌다. 그들은 율리아누스의 신변과 위엄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소환하여 그를 무장 해제 시킨 다음, 라인 강변에서 가장 사나운 게르만족을 물리쳤던 이들 강인한 정예 부대를 멀리 페르시아 군주와의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파리의 겨울 병영에서 선정을 베풀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에 황제의 명령을 받은 율리아누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애정으로 보살펴야 할 부하들의 파멸까지 동의하는 셈이었고, 대놓고 거부한다면 반역 행위나 전쟁 선포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무자비한 질투심과 음흉하고 단호한 명령의 성격상, 그가 정당하게 변명하거나 솔직하게 해명할 여지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갈등 끝에 율리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군주에 대한 복종'을 선택했다. 곧바로 황제의 칙령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명령들을 선포하고 군대의 일부를 알프스로 출정시키고 일부 병력들은 집결지로 이동시켰다. 파리에 운집한 병사들을 격려하고 훈계하기 위해 도시의 성문 앞 평원에 세워진 단상에 오른 그는 '강력하고 관대한 군주에게 봉사하는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격려와 함께 황제의 명이니만큼 지체없이 기쁘게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병사들은 고집스럽게 침묵으로 버텼다. 막사로 물러난 병사들은 고달픈 운명을 한탄하기 바빴다.

 

그러던 끝에 그들은 대담하게도 떠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책을 논의하여 뜻을 모았다. 이미 극에 달한 분노가 이 음모를 은밀하게 부채질 했고, 이유 있는 불만은 격정에 의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술까지 여기에 불을 붙이니, 출발하기 전날 밤 군대는 통제 불능의 혼돈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깊은 밤중에 흥분한 병사들은 검과 술잔, 횃불을 손에 쥐고 밖으로 몰려나와 부황제의 궁을 에워싸고, 닥쳐올 위험은 아랑곳없이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한 마디 말,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이러한 저항에 더욱 흥분한 병사들은 급기야는 힘으로 궁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율리아누스를 정중하지만 강압적으로 끌어다가, 검을 빼어들고 파리 시내를 통과해 호위해 와서는 단상 위에 올려놓고 환호성으로 그들의 황제를 추대했다. 율리아누스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뿐 아니라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라도 병사들의 대역 무도한 기도에 저항해야만 했다. (…)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중죄를 저질렀음을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황제의 관용보다는 차라리 율리아누스의 후의에 기대기를 택했다. 그들의 흥분은 서서히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격분으로 바뀌었다. 마음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는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탄원과 질책, 협박에도 꿋꿋이 버티었으나, 살아남고 싶다면 왕좌에 오르는 데 동의하는 길밖에 없다는 거듭된 주장에 결국 굽히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전군의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방패 위에 들어올려져, 우선은 왕관 대신 즉석에서 바친 화려한 군복 기장을 받고 적당한 하사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으로 예식을 마무리지었다.(271∼27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위키 백과에서 율리아누스를 검색해 보면 그 당시의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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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율리아누스, 360년 2월> (출처:위키 백과)

 

하루 아침에 부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황제에 오른 율리아누스에게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와의 우호적인 협상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맡겨졌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공정한 조약에 서명한다면 갈리아 속주를 평화롭게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겟다는 서신을 작성하여 특사로 임명한 인물들에게 맡겼다. 율리아누스의 사절들은 친서의 낭독을 듣는 콘스탄티우스의 무성의한 태도를 보고 분노와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더군다나 둘 사이를 능히 중재해 줄 만한 인물이었던 헬레나(콘스탄티우스의 여동생이자 율리아누스의 아내)와 에우세비아 황후마저도 이때는 이미 죽고 난 뒤였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율리아누스 진영의 군중들에게 공개 낭독된 일이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는 다음 대목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율리아누스는 아첨조르 한껏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즉위시킨 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버리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제안은 단숨에 묵살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시여, 그대가 구하신 군대와 백성과 공화국의 권위로 계속 집권하소서." 라는 외침이 광장 구석구석에서 일제히 천둥처럼 울려 퍼지자 콘스탄티우스의 사절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편지의 일부는 나중에 낭독되었는데, 그것은 황제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였던 율리아누스를 유년 시절부터 돌보면서 그토록 정성껏 애정으로 교육해 주고 부황제의 특권까지 내려 주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저버렸다고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고아라고!

 

율리아누스가 낭독 중간에 분노를 토했다.

 

내 가족을 암살한 장본인이 내가 고아로 남겨졌다고 말하다니? 내가 오랫동안 잊으려 애써 왔던 피해에 복수하도록 만든 건 바로 그자란 말이다! (278∼27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몰아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고, 지나는 곳마다 로마 시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 전쟁 중 샤푸르의 퇴각으로 한숨 돌리고 있던 중 율리아누스의 행군과 빠른 진전을 알리는 첩보를 받았다. 병력들과 무기와 군수품들은 빠르게 내전용으로 전환되었다. 머잖아 두 황제 사이의 참혹한 내전이 권력의 향배를 결정지을 터였으나, 급작스럽게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내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극도의 정신적 흥분 상태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가벼운 열병에 걸렸고 결국 타르수스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숨을 거뒀다. 45년간의 삶과 24년간의 통치가 거기서 마감된 셈이었다.

 

자만심과 나약함, 미신적인 사고와 잔인함으로 가득 찬 그의 성품은 앞서 기술된 내정과 교회 정책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동시대인들이 보기에는 중요한 인물이었겠지만, 개인의 가치만이 주목의 대상이 되는 후세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아들은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하고 결점만 이어받은 자라는 평가밖에는 받지 못할 것 같다. 콘스탄티우스는 사망하기 전 후계자로 율리아누스를 지명했다고 전해진다.(28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이리하여 율리아누스는 30세의 나이에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은둔 생활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었지만, 고귀한 출생과 운명의 장난으로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도 아카데메이아의 숲에 파묻혀 아테네 시민들과 사교를 즐기는 삶을 진정으로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든 싫든 콘스탄티우스의 행위에 따라 일신의 명예를 황제의 지위에 따른 위험에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마음 자세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무리를 다스리는 일은 항상 더 우월한 종족에게 맡겨져야 하듯이,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는 신과 맞먹는 권능을 요한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이 원칙으로부터 그는 통치하고자 하는 인간은 무릇 신성이 갖는 완전무결성을 지향하여 자신의 영혼에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면을 정화해야 할 뿐 아니라, 탐욕을 억제하며 지력을 기르고 열정을 다스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생한 비유에 따르자면 반드시 폭군의 자리로 끌어가게 될 야수적인 거친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확고해진 율리아누스의 왕좌는 이성과 미덕의 자리였다. 그는 명성을 멸시하고 쾌락을 거부했으며, 끊임없는 성실성으로 고귀한 직책의 의무를 다했다. 이 철학적인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엄격한 법을 따르는데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면, 그의 신하들 중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왕관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고 나설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종종 황제의 검약한 식사를 함께 하곤 했던 그의 가장 가까운 벗 중 하나는 황제가 먹는 빈약하고 가벼운 음식 덕에 그의 심신이 저술가로서, 제사장으로서, 행정관으로서, 장군으로서, 황제로서의 갖가지 책무들을 힘들이지 않고 활기차게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29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는가는 기번의 역사서에 충분히 실려 있으며, 그의 설명을 일일이 옮기기에는 이 공간이 너무 비좁다. 기번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글씨를 쓰면서도 귀로는 경청하고 입으로는 구술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었으며, 망설이거나 실수하는 일없이 여러 갈래의 생각의 흐름을 금세 좇아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애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정략적으로 했던 짧은 결혼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여성과 동침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전임 황제들이 그토록 즐겼던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도 그에게는 한낱 시간 낭비로만 생각되었다. 그가 취임 초기에 있었던 일화 하나만 살펴 보더라고 그가 얼마나 개혁적인 인물이었는지 금세 파악된다.

 

율리아누스의 통치 과제 중 가장 급선무였던 것 하나는 궁정의 개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 들어온 후 얼마 안 되어 이발사를 부른 일이 있었다. 그러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리가 나타났다.

 

내가 부른 건 이발사지 세금 걷는 관리가 아니다.

 

황제는 짐짓 놀란 척 외쳤다. 그리고 그 관리의 급료에 대해 묻자, 많은 급료와 제법 되는 부수입을 제하고도 약 스무 명의 하인들과 그만한 수의 말들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1000명의 이발사들, 1000명의 급사들, 1000명의 요리사들이 호화롭게 꾸며진 여러 부처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환관의 수는 여름날 창궐하는 벌레들만큼이나 많았다. 콘스탄티우스는 공적이나 미덕으로 신하들을 앞설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고작해야 의복, 식탁, 건물, 행차의 위압적인 화려함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이 세웠던 웅장한 궁정들은 다양한 색의 대리석과 엄청난 양의 황금 장식들로 꾸며졌다. 또한 먼 지역애서 가져온 새들, 먼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 제철이 아닌 과일들, 겨울에 핀 장미, 한여름의 눈 등 미각보다는 자만심만을 채워 줄 최고로 희귀한 진미들이 바쳐졌다. 궁정의 종복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군단에 들어가는 비용을 초과했으나, 이 돈 많이 드는 무리들 중 쓸모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왕좌의 위용을 세우는 데에라도 도움이 될 인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 율리아누스는 이 폐해를 모두 일소하여 골칫거리를 덜고 국민들의 불만을 하루빨리 진정시키고 싶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근면하게 노동한 결실이 실제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세금 부담도 덜 불만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업은 유익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는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성급하고 가혹하게 진행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단 한 차례의 훈령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을 허허발판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나이와 공로, 재산의 소유 정도, 황족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 여부 등을 타당성 있게 따져 보거나 인정상의 예의를 두는 일도 없이 노예들과 하인들을 남김 없이 굴욕적으로 내쫓아 버렸다. 율리아누스의 기질이 이러했으니, 진정한 덕성은 양극단에 위치한 악덕의 중간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292∼29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전임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에 켜켜이 쌓였던 적폐들을 어떻게 청산했는지, 어떤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었고, 어떤 경우에는 단호하게 단죄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문장들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배웠던 인문학적 소양들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는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콘스탄티우스가 원로원의 집회에 나가기를 피한 반면,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을 공화주의자로서의 신조와 웅변가로서의 재능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으로 여겼다. 그는 마치 웅변도장에서 하듯이 찬사와 비판, 권고 등 여러 가지 화법을 번갈아 가며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의 친구 리바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호메로스의 연구를 통해 메넬라우스의 단순하고 간결한 화법, 겨울의 싸락눈처럼 쏟아져 나오는 네스토르의 달변, 오디세우스의 감상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웅변을 모방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판관으로서의 직분이 황제로서의 직분과 충돌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율리아누스는 의무감에서뿐만이 아니라 재미있는 도락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민정 총독의 성실성과 통찰력을 신뢰하는 경우에도 종종 판관석에 배석하곤 했다.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그의 정신은 진실을 은폐하고 법을 왜곡하는 변호인들의 궤변을 찾아내 꺽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설사 평민으로 태어났더라도 혼자 힘으로 능히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을 것이라고 기번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초상을 아주 꼼꼼하게, 작은 흠이라도 잡아낼 셈으로 살펴본다면, 전체 인물상이 완전무결함과 기품을 얻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기번 특유의 날카롭고 재기 넘치는 예리한 평가를 조금 더 들어 보자.

 

그의 천재성은 카이사르의 것보다는 강렬함과 장엄함에서 좀 떨어지며, 아우구스투스의 완벽한 신중함도 갖추지 못했다. 덕행으로 평가하자면 트라야누스의 진지함과 자연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철학에 비하면 간결성과 일관성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역경을 맞을 때는 굳은 의지로 견디어 냈고, 성공을 누릴 때는 중용의 태도를 견지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후 120년이 지나서야, 로마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사기를 되살리고자 힘쓸 뿐 아니라, 뛰어난 인물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덕 있는 자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다른 당파, 심지어 종교적으로 다른 파벌조차도 전시에나 평화시에나 그의 우월한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 만한 자라고 탄식 섞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30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질 게 뻔하다. 그러나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까지 찍혀 있는 이 황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종교관이나 종교 정책을 완전히 제쳐둘 수는 없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역사서에서 그 부분을 매우 상세히 다룬다. <로마 제국 쇠망사> 제23장은 율리아누스의 종교(이교 숭배의 부활, 예수살렘 신전의 재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교묘한 박해 등)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에서는 기번의 개괄적인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배교자라는 낙인은 율리아누스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으며, 그의 미덕을 훼손한 종교적 열정은 그의 과오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 놓았다.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가 제국 내의 종교적으로 다른 당파들을 동등하게 보호하려고 노력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칙령을 내린 시기부터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당한 시기까지 대중을 혼란에 빠뜨렸던 신학적 열광을 진정시킨 철학적인 군주였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실제 성격과 행동을 더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호의적인 선입견은 사라지고, 결국 황제도 시대를 휩쓸었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우리는 후세인으로서 그의 열렬한 찬미자들이 그린 율리아누스의 모습과 무자비한 적들이 그린 그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30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행적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단연 페르시아 원정이었다. 그는 게르만 전쟁의 성공을 통해 얻은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좀 더 영광스럽고 기억될 만한 업적을 거두어 자신의 치세를 드높이고 싶었다. 그가 무력을 겨룰 유일한 경쟁자는 키루스의 후계자인 사산 왕조의 샤푸르였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행군을 시작하여 소아시아의 속주들을 거쳐 그의 전임자가 죽은 지 약 8개월 만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로마 군단을 재정비하면서 겨울을 보낸 황제는 363년 3월에 드디어 출정했다. 황제를 배웅하겠다는 안티오크 원로원들을 경멸과 질책으로 쫓아 버렸고, 다시는 안티오크로 돌아오지 않겠다고도 결심했다. 동방 로마의 수도였던 그곳은 그의 취향과는 너무 다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크를 출발한 로마 군단은 베로이아(오늘날의 알레포)와 히에라폴리스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의 아주 오래된 도시인 카레로 향했다. 거기서 황제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눴다. 친족인 프로코피우스와 이집트인 지휘관 세바스티아누스에게는 3만 명의 병사를 딸려 티그리스 강쪽으로 진군하도록 했고, 자신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행군하여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를 포위할 즈음이면 크테시폰 성벽 아래에서 합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안티오크에서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로마 영토의 동쪽 끝인 키르케시움의 탑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페르시아 원정에 동원한 군대 중에서 최대 규모인 6만 5천 명의 정예 부대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어떤 행군 대열을 갖췄으며, 보병대와 기병대는 어떤 지휘관이 맡았는지를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들이 행군했던 경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어느 영웅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굴의 용기와 함께 그 지역을 통과했던 유서깊은 지역이라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만인대(萬人隊)를 이끌었던 그 영웅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크세노폰이었다.

 

카보라스에서 아시리아의 농경 지대까지 가면서 통과한 지역은 인간이 가진 어떤 기술로도 개간이 불가능하여 버려진 거칠고 메마른 황무지로,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로 간주되는 곳이었다. 율리아누스는 700년 전 젊은 키루스가 밟았으며, 그의 원정에 동반했던 지혜롭고 영웅적인 인물 크세노폰이 묘사했던 바로 그 땅 위를 행군했다.

 

이 지역은 바다처럼 평평하게 펼쳐져 다북쑥류의 풀이 무성히 자라는 평원 지대이다. 여기에서 자라는 관목이나 잡풀은 어떤 종류든지 강한 향내를 풍긴다. 그러나 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업삳. 느시와 타조, 영양과 야생 당나귀들만이 이 사막 지대의 유일한 주민인 것 같다. 이들을 사냥하는 일을 오락 삼아 행군의 피로를 풀었다.

 

사막의 모래는 종종 먼지구름과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키곤 했으므로, 수많은 병사들이 예기치 않은 폭풍의 습격에 갑자기 천막째 땅 위에 내동댕이쳐지곤 했다.(37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Route of Xenophon and the Ten Thousand> (출처:위키백과)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이 황량한 지역을 벗어나 어떤 도시를 수중에 넣었고, 어떤 요새를 포위공격하는데 고전했으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오던 1100척의 로마 함대들을 어떤 방식으로 티그리스 강으로 무사히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생략하겠다. 어쨌든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모든 난관을 뛰어넘어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의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거기서 합류하기로 예정된 3만 명의 로마 군대와 합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황제는 작전 회의를 열어 충분한 토론을 거친 끝에 크테시폰 공격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용감하고 노련한 장군의 지휘와 충분한 수의 배와 군량, 대포, 군수품의 지원을 갖춘 6만여 명의 로마군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도시를 공략하는 일을 포기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명예욕과 용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율리아누스였던 만큼 공격을 포기할 만한 합당한 이유는 충분했으리라는 게 기번의 판단이다.

 

율리아누스는 이때 샤푸르가 제안한 평화 협상마저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이때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의 한 귀족이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황제의 막사로 탈주해 왔고, 로마군의 인질이 되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노련하고 현명한 호르미스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귀족의 말을 믿었던 율리아누스는 누가 보더라도 비난할 만큼 경솔한 명령을 내리고 만다. 수많은 노고와 희생을 치러 500여 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해 온 전 해군의 함대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병사들을 위해서는 겨우 20일 정도 버틸 식량만 남겨 놓고 나머지 군수품은 티그리스 강에 정박되어 있던 1100여 척의 함대와 함께 황제의 엄명에 따라 모조리 불태워졌다. 로마 군이 내륙 지역으로 전진해 들어갈 경우 크테시폰의 성문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엄청난 수의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계책이었다. 그들은 이내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식량 조달을 위해 인근 도시와 마을을 찾아 나섰지만 그들은 가축류는 끌고 갔고 곡식과 풀은 불태워버린 뒤였다.

 

뒤늦게 함정에 빠진 사실을 알아챈 로마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으로 퇴각해 코르두에네 국경까지 서둘러 행군하여 군대를 구하는 길만이 유일한 수단이라 판단했다. 페르시아를 타도할 부푼 꿈으로 카보라스를 건넌지 겨우 70일 만에 로마군은 낙담한 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면서도 행군을 이어가던 어느 날, 새벽 일찍 진군 나팔을 울리고 험준한 지역을 통과해서 행군 중이던 로마 군대는 그 지역의 언덕마다에 매복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한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흉갑을 벗은 상태였음에도 병사들을 구하러 후방과 전방으로 분주히 질주하던 황제는 도주하는 야만족들을 추격하던 중 갑자기 패주하던 기병대로부터 비처럼 쏘아대는 화살과 투창 공격을 받는다. 그때 날아온 투창 하나가 황제의 팔을 스치고 지나가 갈비뼈를 꿰뚫고 간장 아래쪽에 꽂혔다. 황제는 의식을 잃고 말등에서 떨어졌고, 대량 출혈로 실신 상태에 빠졌던 율리아누스는 그날밤 늦게 가까스로 정신을 회복하지만 기력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그는 영웅이자 현인다은 간결한 태도로 임종의 순간을 맞았다.

 

이 불행한 여정에 동행했던 철학자들은 율리아누스의 막사를 소크라테스의 감옥에 비유했으며, 의무감 또는 우정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그의 침상 주위에 모여든 목격자들은 비탄에 잠겨 죽어가는 황제의 마지막 유언에 귀를 기을였다. 

 

벗들이여, 그리고 짐의 병사들이여, 이제 짐이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기꺼이 빚을 갚으러 가는 채무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의 부름에 따르리다. 짐은 일찍이 철학을 통해 영혼이 육체보다 값진 것이니, 더 고귀한 실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고통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임을 배웠소. 또한 종교를 통해서는 때이른 죽음은 신의 보상을 받는다고 배웠소. 그러니 이 죽음의 일격을, 지금까지 덕과 인내로 지켜 온 짐의 인격을 더럽힐지도 모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구해 주려는 신의 호의로 받아들이오. 짐은 생전에 죄 없이 살았으니 후회 없이 가오. 짐의 사생활이 순결했음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며, 신들의 힘의 발화라 할 제왕으로서의 최고 권력이 짐의 손 안에서 순수하고 흠없이 유지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짐은 전제 정치의 타락하고 파괴적인 원칙을 혐오했고, 국민의 행복을 정부가 취해야 할 목표라 여겨왔소. 짐이 취한 행동들은 신중함과 정의와 중용의 법을 따랐으며, 모든 것을 신의 섭리에 맡겨 왔소. 평화가 공공의 이익에 합치하는 한 짐의 목표는 평화였으나 조국이 짐에게 무기를 들라고 절박하게 청할 때는, 짐이 언젠가는 검을 맞고 쓰러질 운명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위험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소. 이제 잔인한 폭군이나 음모자의 단검, 혹은 질병의 느린 고통으로 죽은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신 영원한 존재에게 감사를 바치고 싶소. 또한 신은 짐에게 명예로운 삶을 살던 가운데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떠나도록 해주셨소. 운명의 일격을 간청하는 것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비겁한 일일 것이오. 이상이 짐이 말하고자 한 것이오. 이제 짐의 힘이 다하여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소. 다음 황제의 추대 문제에 관해 여러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말은 삼가도록 하겠소. 짐의 선택은 신중하지 못하거나 현명하지 못할 수도 있소. 또한 군대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짐이 천거한 인물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소. 짐은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으로서, 모쪼록 로마인들이 덕망 높은 군주를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 그는 냉수를 청하여 조금 마시고는 곧 고통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이리하여 한 비범한 인간의 삶이 막을 내렸으니, 그의 나이 32세, 콘스탄티우스 사후 왕위에 오른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나,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덕과 명예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396∼39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알렉산드로스를 꿈꾸었던 걸출한 황제의 급작스런 전사는 로마 군대를 더욱더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급작스럽게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는 황제로서의 미덕과 용기가 부족했다. 기근에 허덕이는 로마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지도 못한 채 아사 직전까지 내몰았고, 샤푸르에게 병사들의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샤푸르와의 협상에서 전임 로마 황제들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굴욕적인 화평 조약까지도 모조리 받아들였다. 이 치욕스런 화평은 당연히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에서 기억할 만한 전기가 된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제2권에서 이토록 길고도 상세하게 묘사한 율리아누스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율리아누스의 유해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 매장되었으나, 서늘하고 평온한 키드누스 강변에 세워진 그의 장려한 묘소에 대해서는 이 비범한 인간의 기억을 아끼고 기리는 충실한 벗들의 불만이 많았다. 철학자들은 그가 플라톤의 사도로서 아카데메이아의 관목 숲 속에서 영면을 취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반면에 병사들은 율리아누스의 유골은 마르스 광장에 있는 로마의 미덕을 기리는 고대 기념비들 사이에 카이사르와 함께 매장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제왕들의 역사에서 이와 겨룰 만한 사례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412∼4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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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제1권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숱한 황제들의 제위 찬탈과 온갖 악행들이 제1권을 두루 점철했다면 제2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의 정치 체제를 집약적으로 다룬다. 제2권의 대부분은 사실상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고 봐도 좋다.

 

로마의 숱한 황제들 가운데서도 유독 우뚝한 인물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며,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로마 최초로 공인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래 4분할 통치로 나뉘어 있던 로마 제국을 단일 통치 체제로 재통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랜 제위 기간(31년) 동안에 쌓은 탁월한 치적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과오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출중한 재능을 갖춘 아들조차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고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독살하는 우를 범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수도를 옮기고 행정 및 종교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해 왔다. 감사의 열의로 가득찬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를 교회의 구원자라고 부르고 영웅과 성인의 자질들을 지녔다고 찬양했다. 반면 불만을 품은 패배자 측은 그를 악행과 결점으로 황제의 명예를 더럽힌 전제 군주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폭군에 견주었다. 이렇게 양측의 상반된 감정은 어느 정도 후대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품성은 풍자 또는 찬양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가장 열렬한 찬미자들조차 인정하는 그의 결점과 가장 무자비한 적들조차 인정하는 그의 미덕, 이 두 가지를 공평하게 종합해 보면, 이 버범한 인물의 올바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진실하고 공정한 역사적인 평가로 주저 없이 승인할 만하다.(5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콘스탄티누스 대제(출처:위키 백과)

 

오랜 세월 동안 통치했던 그가 죽자 로마 제국은 이내 세 명의 아들에 의해서 다시 분할되었고, 세 아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최종적으로 단 한 명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로 귀결되는 과정 동안 숱한 황족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 가문의 비극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번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다. 오죽했으면 그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비극을 두고 저 유명한 그리스 비극의 가장 음울한 이야기였던 펠롭스 가(家)의 저주를 떠올렸겠는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은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한번쯤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 가문에서 숱한 황제가 출현해서 유럽인들의 삶을 통쨰로 뒤흔들었고, 그리스도교의 흥망까지도 좌우했으니 말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군기를 항상 따라다녔던 행운의 여신은 그의 가정 생활에서도 희망과 안락을 보장해 주었던 것 같다. 역대 황제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번성기를 누렸던 몇몇 황제들, 즉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조차도 이 점에서만큼은 후세에 실망을 안겨 주었다. 잦은 반란으로 재위 기간 중에 황실 가문을 확장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트족 출신의 클라우디우스가 시조인 플라비우스 황실 가문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제위를 이어갔다. 이 가문 출신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부황에게 물려받은 영예로운 지위를 그대로 자식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두 번 결혼했다. 젊은 시절의 연인으로 출신은 미천하지만 정실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는 아들 크리스푸스만을 남기고 죽었다. 뒤이어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세 딸과 서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형제들, 즉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는 모두 야심이 없어서 일반 평민으로 바랄 수 있는 한도에서는 가장 영예로운 지위와 풍족한 부를 누리도록 허용받았다. 이들 가운데 막내 한니발리아누스는 명성이 높지 않았으며 또한 자손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두 형은 부유한 원로원 의원의 딸들과 결혼하여 황실 혈통을 이은 새로운 분가를 형성했다. 귀족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였다. 달마티우스의 두 아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감찰관이라는 명예직만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누이동생 아나스타시아와 에우트로피아는 각각 명문가 출신의 원로원 의원으로 집정관 신분이던 옵타누스 및 네포티아누스와 결혼했다. 막내 여동생 콘스탄티아는 영광과 불행이 뒤섞인 삶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처형당한 리키니우스 황제의 미망인이었다. 그녀의 간청으로 목숨을 구한 무고한 아들은 한때나마 자신의 생명과 부황제라는 칭호, 나아가 장래 황제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으리라는 불안정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집안의 여자들과 친척들을 제외하고도, 오늘날의 궁정 용어로 표현하자면 황족이라 불리는 남자만도 열 명 내지 열두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출생 순서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잇든지 아니면 황제를 보좌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30년도 채 못 되는 시간이 흐른 뒤에 이 번창하던 가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콘스탄티우스와 율리아누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즉 이들 두 사람만이 비극 시인들이 탄식했던 펠롭스와 카드무스의 저주받은 생애와 유사한 연이은 죄악과 재난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59∼6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나의 생각)

 

펠롭스 가문의 저주는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 3부작>에 잘 나타나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은 부정한 아내에게 살해되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다. 이 모든 비극의 연쇄는 펠롭스 가문의 오랜 저주 때문이었다.

 

카드무스는 테바이의 설립자인데, 그의 손자뻘인 랍다코스는 저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할아버지였다. 그의 아들 라이오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오이디푸스를 낳았고, 신탁의 저주를 피해 어릴 때 일찌감치 왕가에서 버림받았던 오이디푸스는 떠돌이로 세상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스핑크스의 비밀을 푼 덕에 테바이의 왕이 된다. 그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고, 그가 떠돌이 시절에 삼거리에서 우연히 저지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의 얽히고 설킨 '혈연 살해 사건'들을 이처럼 유명한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에 빗댐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사실 또한 신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대해 어느 한 인물이라도 빠짐없이 세세히 분석했던 탓에 이 정도로 너무 간략하게(?) 소개하는 게 도리어 마뜩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은 이토록 한꺼번에 수많은 인물들을 소개받으면 누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록 품이 많이 들긴 하지만) 도표로 정리해 봤다. 그림이 글보다는 훨씬 더 명쾌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테니 말이다.

 

 

위의 그림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콘스탄티누스 가문'이 얼마나 많은 황제들을 배출했는지 알 수 있다. 정식 황제로 등극했던 인물만 따지더라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인과 매형까지 포함하면) 무려 여덟 명이다.  여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 콘스탄티누스 대제이지만, 재위 기간이 25년에 가까웠던 그의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나 조카인 율리아누스 황제의 행적도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성녀 헬레나>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헬레나> (출처 : 위키 백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낳은 모후. 그녀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전설과 전승이 존재한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재통일할 때 로마 군대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최후의 경쟁자인 리키니우스 황제를 쓰러뜨린다. 그때 난공불락의 적군 함대가 버티던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돌파한 건 자신의 첫째 아들인 청년 크리스푸스였다. 그토록 용맹하고 탁월한 무공을 발휘한 아들을 두고 콘스탄티누스는 점차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첫째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대중적인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쏟아지는 걸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방 국민들은 콘스탄티누스와 크리스푸스 두 사람, 즉 모든 덕성을 겸비한 황제와 신의 총아이자 부황을 꼭 빼닮은 훌륭한 아들이 세계를 함께 제압하여 다스리게 되었다며 열렬하게 환호했다. 노년인 황제가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대중적인 인기가 젊은 크리스푸스에게 쏟아졌다. 크리스푸스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실제로 궁정과 군대, 그리고 국민의 애정을 한몸에 받았다. 국민들은 황제의 노련한 통치를 마지못해 인정하거나 때로는 불만과 불평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들은 황태자의 막 피어나는 미덕에 대해서는 국가의 경사일 뿐 아니라 개인의 경사라고 기뻐하며 무한한 희망을 나타냈다.(6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이자 황제로서 자신과 대등한 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없다. 그리고 아들의 충족되지 않은 야심에서 비롯될지도 모를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했다. 눈부신 치적으로 빛나는 황제의 또다른 이면에는 이토록 권력 앞에서 한없이 비정하고 잔인한 모습이 숨어 있었다. 기번의 빈틈없는 역사 서술은 늘 균형이 잡혀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적은 그리스도교 옹호자들의 붓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많았다고 판단한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황제는 궁전을 니코메디아에서 로마로 옮겼고, 그곳에서는 황제를 맞이하는 준비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언행이 로마 국민들의 행복을 표현하는 듯했고, 축제라는 위선의 베일이 한동안 복수와 살인 계획을 덮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축제가 한창일 때 불운한 크리스푸스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황제는 아버지로서의 다정함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재판자로서의 공정성마저 잃어 버렸다. 심문은 간결하고도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젊은 황태자의 최후를 로마 시민의 눈에서 감추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황태자는 엄중한 감시하에 이스트리아의 폴라로 압송되었고, 처형되었는지 아니면 그보다는 너그럽게 독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순식간에 처형되었다. 한편 사랑스러운 젊은이 리키니우스 부황제도 크리스푸스의 죽음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들의 목숨을 애원하는 누이동생의 기도와 눈물도 완고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의심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리키니우스의 죄목이라면 그의 신분밖에 없었다. 그가 처형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도 오래 살지 못했다. 이들의 불운한 이야기와 그들 죄의 성질과 증거, 재판의 형식, 처형 상황 등은 비밀의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황제의 영웅적인 미덕과 신앙을 찬양하는 작품을 남긴 궁정 주교조차도 이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신중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처럼 여론을 무시하는 거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성에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대제국 군주가 취한 매우 다른 태도를 상기시킨다. (…)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푸스의 결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정교의 창시자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리면서, 아울러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이 존속 살인죄를 가볍게 보이도록 애썼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변론하고 있다. 즉 이미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이 허위 고발을 믿고 경솔하게도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 세상에 널리 자신이 후회하고 있음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또 40일 동안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목욕과 모든 일상의 안락을 멀리 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크리스푸스의 황금 조각상을 세우고

 

내가 부당하게 처형한 나의 아들을 위하여

 

라는 유명한 비문을 새겨 넣었다. 매우 교훈적이고 흥미로운 일화이지만 좀 더 권위 있는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오래 되고 신뢰성 높은 작가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회는 오히려 또 다른 유혈과 복수 행위를 통해서만 표명되었다. 다시 말해 무고한 아들을 살해한 보상으로 무고죄를 저지른 아내를 처형한 것이었다. 즉 크리스푸스의 불운은 계모 파우스타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무자비한 증오 때문인지 또는 좌절된 사랑 때문인지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에서 히폴리투스와 파이드라의 고대 비극을 재현한 것이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는 미노스의 딸과 마찬가지로, 의붓아들 크리스푸스가 아버지의 아내인 자신을 범하여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질투심에 불타는 황제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가장 무서운 경쟁자인 젊은 황태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쉬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모인 헬레나는 손자 크리스푸스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몹시 슬퍼했고 이에 복수했다. 즉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파우스타가 황실 마구간 소속의 노예와 내통을 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그녀는 즉각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간통을 저지른 이 여인은 온도를 엄청나게 높인 욕탕에서 증기에 질식사했다고 한다. (…) 로마 국민들은 황제의 아들과 조카의 죽음, 그리고 이들의 죽음에 연루된 수많은 무고한 명문가 출신 친구들의 처형에 불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번성기였지만 동시에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네로 황제의 통치기를 비교하는 풍자시를 궁정 정문에 붙였다는 사실은 당시 어떤 소문이 퍼져 있었는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할 것이다.((63∼6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나의 생각)

 

계모가 의붓아들에게 반해 벌어지는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힙폴뤼토스』에 담겨 있다. 파이드라는 크레테 왕 미노스와 왕비 파시파에의 딸이자 아리아드네와 자매 사이였고, 테세우스의 두 번째 아내였다. 파이드라는 남편의 전처 소생 아들에게 반했지만 자신의 구애가 끝내 실패하자 도리어 힙폴뤼토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편지를 남기고 자결한다. 이 유명한 고대의 신화를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살해 사건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들은 단번에 이 사건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칫 지루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고대의 역사가 거장의 손길 덕분에 순식간에 문학과 예술과 부드럽게 뒤섞이는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즉위 30주년이나 되는 성대한 축전이 열린 이후 열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병사였다. 예순네 살로 역사에 길이 남을 자신의 삶을 마감한 직후의 풍경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비탄하거나 애도를 표하는 행사들이 로마 전역에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그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자의와 왕관으로 꾸며진 시신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전 안에 화려하게 장식된 방의 황금 침상에 안치되었다. 그가 죽고 나서도 매일 정해진 시각에 민정, 군사, 황실에 관련된 여러 장관들이 무릎을 꿇고 엄숙한 표정으로 죽은 황제에게 다가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런 '연극 같은 절차'는 얼마 동안 지속되었고, 아첨꾼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신의 특별한 은혜 때문에 죽은 뒤에도 로마를 통치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제의 죽음은 곧바로 '궁정의 파벌 싸움'으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직계인 3형제와 방계인 두 조카(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들의 운명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의 궁궐 도착 이후에 이내 판가름났다.

 

본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언에서 자신의 장례 문제를 신앙심 깊은 콘스탄티우스에게 일임했다. 그는 인접한 동방을 통치하고 있어서 이탈리아와 갈리아 등 먼 곳에 있는 형제들보다 빨리 달려올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궁정을 장악하자마자 그가 시행한 첫 번째 조치는 인척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함으로써 그들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일은 경솔하게 행한 이 약속의 의무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벗어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 일이었다. 잔인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동원하였다. 가장 신앙심 깊은 인물이 명백한 위조 문서를 진짜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주교에게 부황의 친필 유언장임이 확인된 한 권의 중요한 두루마리를 전달받았다. 이 유언장에서 죽은 황제는 동생이 자신을 독살한 것 같다는 의혹을 표명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범죄자를 처벌하여 안전을 도모하라고 충고하였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비난에 대해 불운한 황제들이 생명과 명예를 지키고자 갖가지 이유를 들어 변명해 보았지만, 즉각적으로 적들에게 판결을 내려 사형 집행을 선언한 군대의 격앙된 목소리 앞에서 침묵당하고 말았다. 무차별적인 학살로 법률 준수의 정신과 절차상의 형식은 모조리 묵살되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콘스탄티우스의 두 숙부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일곱 명의 사촌, 부황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옵타투스, 막대한 권력과 재산으로 재위를 노렸던 총독 아블라비우스 등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이 무시무시한 학살을 더욱 끔찍하게 만든 것은,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우스 숙부의 딸과 결혼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은 사촌 한니발리아누스와 결혼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국민들의 정서는 무시한 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략적으로 황실 가문들을 연결시킨 것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국민들 앞에 황실 사람들은 부부간의 애정에도 냉담하며, 혈족 관계나 무고한 젊은이들의 애원에조차 무관심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결과만 가져왔다. 황실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두 어린 아들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뿐이었다. 어느 정도 학살자들의 분노도 가라앉아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형제들이 없는 사이 발생한 이 일로 모든 죄와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미숙한 젊은이로서 고관들의 거짓 충언과 군부의 맹렬한 폭력에 휩싸여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며 언뜻 일시적인 회한을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77∼7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 기번의 주석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간신이 모면했던 이 학살이 전적으로 콘스탄티우스의 책임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매우 판이한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은 콘스탄티우스의 적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조시무스도 이와 동일한 고발에 동참하고 있다.

 

(나의 생각) 

 

콘스탄티우스는 부황(父皇)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승인했던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줄곧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진영을 옹호하는 쪽이었고, 그 반대파인 아타나시우스파는 끈질기게 박해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는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정통파와 뿌리 깊은 악연을 맺었던 그의 후계자들(콘스탄티우스 황제, 율리아누스 황제) 사이에 얽힌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저 이름만 들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로마 황제들과의 싸움에서 실제로 어떤 활약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생각하면 아직도 로마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그의 화려한 개선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번의 설명을 듣고 나면 우리는 이 개선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엄청난 용맹을 발휘하여 막센티우스를 무찌르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명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개선문에는 도리어 당대 예술의 쇠퇴를 보여주는 우울한 증거들이 여럿 발견된다는 것이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312년 10월 28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가  로마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하고 이후 사두정치체제를 끝내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집권하는 길을 걷게 되고 상대편인 막센티우스는 결국 전사하였다.

 

기독교 전설로 이 다리의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을 처음 사용하여 기독교 신의 도움으로 이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그 내용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일의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였고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와 P를 합친 문자 라바룸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출처:네이버 백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출처 : 위키 백과)

 

 

지금도 남아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당대 예술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 주는 우울한 증거인 동시에 인간의 허영심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보여 주는 보기 드문 증거이다. 이미 제국의 수도에서는 그런 기념 건조물을 꾸밀 만한 실력을 지닌 조각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인의 명성이나 그에 대한 예의 따위는 무시한 채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문의 우아한 조각품들을 마구 떼어다가 사용했던 것이다. 시대와 인물, 공적과 지위의 차이는 완전히 무시되어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는 진군해 본 적이 없는 군주의 발밑에 파르티아인 포로들이 꿇어 엎드려 있다. 또 콘스탄티누스의 전승 기념비 위에 트라야누스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는 사실은 호기심 강한 골동품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옛 조각들 사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끼워 넣은 새로운 장식품들은 매우 조잡하고 서투른 솜씨로 만든 것이었다.(5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1권』, <14장> 중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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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세트 - 전6권 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 외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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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 버지니아 울프

 

 

 

에드워드 기번(1737∼1794)                        

 

 

에드워드 기번은 영국이 자랑하는 역사가이자 문장가다. 그는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는 병약하여 '어머니와 간호사에 둘러싸인 불쌍한 아이'로 자랐다. 15세때 건강이 호전되어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찍 중퇴했다. 당시 교내에서 벌어지던 종교적 논쟁에 연루된 데다가, 로마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학교를 그만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분노한 아버지는 그를 스위스 로잔으로 보냈고, 거기서 기번은 5년 동안 열심히 고전을 읽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를 배웠다. 로잔에 머물면서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다시 개종한 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7년 전쟁의 발발로 보병대 장교로 복무하기도 했다. 종전후 부대가 해산되자 기번은 마침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던 유럽 여행을 따날 수 있었다.

 

1763년부터 시작된 유럽 대륙 여행은 그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여행 도중에 『로마 제국 쇠망사』를 쓰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스물일곱 청년이었던 그가 이 거대한 작품을 쓰기로 마음 먹은 건 로마의 여러 유적지를 찾아 소요하던 어느 날 해질 무렵이었다. 그날의 느낌을 기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764년 10월 15일, 로마에서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위의 폐허에 앉아서 탁발 수도사들이 유피테르에서 저녁 기도를 올리는 소리를 듣고 있던 중 처음으로 이 도시의 쇠망사를 집필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대작의 저술에 착수한 그는 로마의 폐허 위에 서 있던 때로부터 12년째 되던 해인 1776년 2월에 로잔에서 『로마 제국 쇠망사』 제1권을 출간한다. 그 책이 출간되자 말자 그는 하루 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데이비드 흄(1711~ 1776)으로부터 격찬을 받았고, 『도덕감정론』(1759년)의 저자인 애덤 스미스(1723~1790)로부터는 “당신은 이 저서 하나로 유럽 문단의 최고봉에 섰다”는 칭찬을 들었다. 기번의 책에는 이제껏 그 어떤 역사가도 보여주지 못한 풍부함과 정교함과 박식함이 담겨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아하고도 세련되고 장엄한 문체로도 일찌기 그 유례를 찾기 어려웠다.  물론 칭찬만 가득했던 건 아니었다. 특히 초기 그리스도교를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부분(제1권 15장, 16장)에 대해서는 거센 비난도 뒤따랐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우롱하고 경멸하는 듯한 대목들이 그리스도교 학자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1권이 출간되고 나서 5년이 지난 1781년에는 제2권과 제3권이 출간되었고, 나머지 세 권은 일부러 1788년 자신의 생일에 맞추어 출간되었다. 대장정을 마무리했을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고,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기 1년 전쯤이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는 안타깝게도 겨우 5년 동안만 자신의 학문적 성공을 누린 끝에 57세로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평소에 내장과 요도 관련 지병을 앓고 있어서 수술을 받았지만, 오염된 의료 기구에 감염된 탓에 불과 사흘 만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그는 비록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지만 청년 시절 로잔에 머물 때만 하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신교파 목사의 외동딸이며 동갑내기였던 그녀의 이름은 수잔 퀴르쇼였다. 부유한 정치인이었던 기번의 아버지는 아들과 그녀와의 결혼을 극력 반대했다. 그녀의 집안이 재산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일생에 단 한 번 있었던 로맨스는 허망할 만큼 짧게 끝났다. 그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나는 애인으로서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아들로서는 복종을 했다."

 

그런데 이 불세출의 역사가를 사랑했다가 남친의 아버지 때문에 억울하게 실연을 당한 그녀는 나중에 오히려 훨씬 잘 풀렸다고 한다. 그녀는 나중에 프랑스 재무장관에 오르는 자크 네케르와 결혼했고 제르맨이라는 딸까지 낳았는데, 이 딸이 바로 당대의 유명한 지식인으로 필명을 드날렸던 네케르 수탈, 일명 '스탈 부인'이었다.

 

마담 드 스탈(1766~1817)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는 인류의 천재가 남긴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인정받는다. 이 작품이 주목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존속했던 로마 제국의 방대한 역사를 시종일관 정교함과 풍부함과 박식함과 유려한 문체로 장엄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이토록 방대한 영토와 장대한 세월 동안 존속했던 대제국을 그 어떤 역사가가 단 하나의 작품 속에서 온전히 개괄할 수 있었겠는가.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를 6권으로 나누어 출간했다. 그러자 글러스터 공이라는 사람이 이런 논평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두껍고 네모난 책이 나왔군요. 쓰고, 쓰고, 또 쓰더니. 그렇지 않아요, 기번 씨?" 정말로 그렇다. 제1권만 하더라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읽는 기분이 드니 말이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인물들은 황제들만 하더라도 일일이 다 헤아리기 어렵다. 수많은 종족들과 도시와 강들의 이름도 호메로스의 서사시 못지 않게 복잡하다. 강이나 도시의 이름도 오늘날에 쓰이는 이름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콘스탄티누스가 오래도록 머물렀던 트레베라는 고대 로마의 도시가 오늘날 '모젤 와인'으로 유명한 독일의 트리어라는 도시인 줄도 이번에야 알았다.(몇 년 전 독일 여행때 우연히 이 도시에 들러 1박 2일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봤던 '고대 로마 황제의 목욕탕'이 콘스탄티누스 대제때 지어진 줄 이번에야 알았다. 그 당시 우리 일행은 그저 '모젤 와인' 생각밖에 없었다. ☞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들_모젤 강에 얽힌 짧은 추억들)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는 '제국의 역사' 전체가 아닌 일부분을 다룬다. 로마는 기원전 753년에 건국됐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무려 1,000년 이상 존속했으며, 동로마 제국이 멸망(1453년)할 때까지로 늘려 잡으면 무려 2,000년 이상이나 존속했던 초거대 국가였다.  기번은 고대 로마의 왕정 시기와 공화정 시기는 건너 뛰고 기원후 98년때부터 동로마가 멸망할 때까지의 140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의 로마 역사를 다룬다. 

 

기번이 자신의 작품에서 로마 역사의 탐구 대상을 그 시기로 국한한 건 까닭이 있었다. 로마가 건국된 이후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두 차례의 삼두정치 끝에 마침내 아우구스투스에 이르러 제정으로 통치 체제가 바뀔 때까지의 역사는 이미 로마 최고의 역사가인 티투스 리비우스(BC 59년~AD 17년)가 쓴 『로마사』로 충분했던 터였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된 제정 초기의 로마 역사는 기번이 자신의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걸출한 역사가였던 타키투스의 『연대기』가 있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인 저 유명한 5현제의 시대(98∼180년)로부터 시작하여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의 기나긴 역사를 기술해 나간다. 이를테면 '번영의 절정'에서 '쇠망사'를 시작하는 셈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는 따지고 보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뉠 수도 있다. 하나는 서로마 제국 쇠망사다. 대략 400년에 가까운 이 시기의 역사는 제1권부터 제3권까지에 담겼다. 여기엔 5현제의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온갖 우행과 악행들로 가득찬 악명높은 폭군 황제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숱한 황제가 걸핏하면 암살되고 근위대장이 그 뒤를 잇자 말자 또다른 야전 사령관이 황제를 참칭하고 어느새 '1인자의 자리'에 도전한다. 얼떨결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풋내기 황제들은 머나먼 속주들을 다스리던 탁월한 야전사령관들의 거센 도전에 맞서 싸워보지만 대개는 손쉽게 굴복되고 만다. 전투 지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뒤를 이은 황제들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황제가 출현할까봐 불안에 떤다. 유능하고 노련한 인물이었던 어떤 장군이 '황제의 갈리아 원정'을 틈타 부하들로부터 '반란을 일으키도록' 내몰렸을 때 내뱉은 탄식이야말로 '황제로 등극한 바로 그 순간'부터 불행이 시작됨을 웅변하고 있다.

 

그대들은 군주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머리 위에는 언제나 검이 매달려 있다네. 군주는 자신의 근위병들마저 두려워하며 동료도 믿지 못한다네. 움직이거나 쉬는 것을 선택하는 것도 더 이상 군주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네. 또한 나이나 덕성, 품행 그 어떤 것도 질투심에서 비롯되는 비난에서 보호해 줄 수 없다네. 이렇게 나를 제위에 올려 놓았으니, 그대들은 나에게 근심 가득한 일생과 때이른 죽음이라는 운명을 안겨 준 셈이네. 다만 남아 있는 유일한 위안은 나 혼자서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뿐이네.(409쪽)

 

 - 『로마 제국 쇠망사_1권』, <제12장> 중에서 

 

 

혼란의 시기를 지나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분할 통치체제가 들어선다. 황제가 4명으로 늘어나고 잠깐 사이에 6명까지 불어나기도 한다. 그런 어수선한 시기가 지나고 나면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의 재통일을 이룬다. 제2권은 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를 서로 대조하면서 비교한다. 제3권은 야만인들의 점증하는 압박을 다루는데, 알라리크의 세 차례 포위 공격 끝에 마침내 로마가 고트족에게 약탈당한다.

 

제4권부터 제6권까지는 동로마 제국 쇠망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를 버리고 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세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아랍인들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점령, 또다른 서로마 제국이었던 8세기의 샤를마뉴가 등장하고,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의 '중세 암흑 시대'의 십자군 전쟁이 포함된다.

 

이토록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에드워드 기번의 솜씨는 실로 놀랍다. 그가 서술하는 역사가 단지 흥미로운 <황제 열전>의 발췌나 요약이 아니고, 저명한 <교회사>나 <기독교 박해사>의 나열이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기번은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기록한 사료들을 샅샅이 뒤진 끝에 자신만의 확고한 판단과 평가를 내린다. 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심리학자에 못잖은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주며, 특정한 장소에 이르면 그 장소에 얽힌 온갖 고대의 신화까지도 소개하는 걸 잊지 않는다. 고트 족의 로마 침입을 다루는 동안, 흑해 연안의 콜키스에 이르면 <아르고 원정대>의 황금 양모피를 잊지 않고, 타우리케에 이르면 고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를 상기시키고, 트레비존드에 이르면 '만인대(萬人隊)'를 이끌었던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를 언급하는 식이다.

 

흑해 동쪽끝을 돌아 피티우스에서 트레비존드까지의 항로는 대략 300마일 정도이다. 이 항로를 따라 가던 고트족은 아르고 호(號)의 모험으로 유명해진 콜키스 왕국에 접근하기도 했으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심지어 파시스 강어귀의 부유한 신전을 약탈하려 한 적도 있었다. 옛 그리스의 식민지로서 '1만 명의 피난처'로 유명한 트레비존드는 아낌없이 베풀던 하드리아누스 황제 덕분에 부와 번영을 누렸다. 안전한 항구 하나 없던 이 해안 지대에 그가 인공 항구를 조성했던 것이다.(313쪽)

 

 - 『로마 제국 쇠망사_1권』, <제10장> 중에서

 

 

방금 살펴본 것처럼 『로마 제국 쇠망사』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는 그 무엇보다도 '지식의 방대함'이다. 기번은 특이하게도 본문에 육박할 만큼의 방대한 각주를 직접 달았는데 원본에는 각주의 갯수가 무려 8,30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이 각주가 너무 방대한 까닭에 기번의 작품은 다양한 축약 편집판이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완역한 번역본(민음사)조차도 기번의 각주를 절반쯤은 포기한 채 4,700여 개로 줄여 놓은 편집판(Bury 版)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다고 한다. 또한 기번의 각주만 하더라도 이미 차고 넘치는 까닭인지 국내 번역본에는 '번역자의 주석'이 단 하나도 없다. 이 점은 돌덩이 같은 책의 무게를 덜어주는 경쾌한 효과는 있겠지만, 박학다식함의 끝판왕이나 다름없는 기번의 문장들을 제대로 음미하는 데는 독자들마다 사정이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할 지도 모른다.

 

이왕에 에드워드 기번의 각주 얘기가 나왔으니 이쯤에서 책 속에 실린 흥미로운 대목을 하나쯤 소개해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얼떨결에 아버지를 따라갔다가 황제가 된 고르디아누스 2세의 얘기다. 

 

이 덕망 높은 총독과 함께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아프리카로 따라갔던 아들도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들의 성격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온화했지만 행실은 그렇게 깨끗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스물두 명의 공식적인 첩과 6만 2000권의 장서를 보유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의 취미가 퍽 다양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가 남긴 산물들을 보면 도서관뿐 아니라 첩들도 단순히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용하기 위해 소유했던 것 같다.

 

 * 기번의 각주

아들 고르디아누스는 스물두 명의 첩마다 서너 명씩의 자식을 남겼다. 문학적인 산물은 그보다는 적기는 했지만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이처럼 기번의 작품 속엔 거대한 제국의 번영과 몰락, 광기 어린 폭군들의 만행과 기행들뿐 아니라 놀랍도록 다양한 문학 작품 속의 등장 인물들이 등장하는가 하면 신화, 역사, 철학, 문학, 종교, 예술, 군사 등 온갖 분야에 두루 해박한 기번의 지식들이 빼곡히 담겨 있다. 호메로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의 작품 속에서 묘사된 이야기가 어느새 역사의 현장으로 틈입(入)되고, 기독교 교리와 영혼 불멸 사상을 다룰 때에는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들이 우르르 한꺼번에 불려나오는 식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제논, 에피쿠로스, 에픽테토스, 플루타르코스, 피론에 이어 로마의 키케로까지.

 

그렇다고 해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를 통해서 까마득한 고대의 역사에만 시선을 고정시키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살고 있던 계몽주의 시대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기번은 특히 볼테르(1694∼1778)와의 친교 덕분에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번이 그리스도교와 중세 시대에 대해 볼테르의 비판을 공유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었다. 기번은 또한 스스로 '최초의 역사가'로 칭송했던 마키아벨리의 영향도 받아들였다. 마키아벨리가 『로마사 논고』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시대의 문제점들을 얘기하던 방식 말이다. 과거는 살아 있으며 항상 현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게 기번의 역사 인식이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훌륭한 설명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서술인 듯하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신학적인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각으로 다룸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철저하게 분석한 최초의 역사가'가 되었다. 그는 교회 조직을 마치 행정 조직이나 제도의 발전 과정을 다루듯이 분석했으며, 그리스도교의 등장이 로마 제국의 흥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자세히 분석했다. 비평가들은 기번이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유를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불평하지만, 제국의 멸망 이유는 기번의 작품 전편에 걸쳐 거듭 제시되어 있다. 부패한 정부(모든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야기되는 문제), 용병에 의존한 국방 시스템, 야만인들의 지속적인 공격, 기독교 문제 등이 주요인이었다. 기번은 특히 로마 제국이 느슨한 종교적 절충주의 대신 완고하고 비세속적인 기독교로 대체된 점을 지적했다. 기독교가 끊임없는 파당과 신학적 논쟁으로 사분오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그는 특히 수도원을 싫어했다. 거기에 기생하는 무수한 기생충이 비생산적 · 광신적 · 반사회적인 자들이라고 공격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는 흔히 로마 제국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개관한 최초의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그런 평가에 걸맞게 기번의 역사 서술은 해박한 고증이나 정확한 사실에 대한 꼼꼼하고 집요한 추적들로 가득하다. 그건 바로 에드워드 기번이 그만큼 성실하고 공정하면서도 결백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다. 또한 기번의 작품은 그 어떤 문학 작품 못지 않은 탁월하고 세련된 작가의 문장력으로도 매력적인 작품이다. 온갖 분야의 책들을 두루 섭렵한 듯 자유자재로 물 흐르듯 서술하는 그의 문장들을 따라 읽노라면 독자들은 순식간에 '역사의 현장'에서 훌쩍 벗어나 어느새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고대의 영웅들이 활약하던 신화의 무대 속을 누비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굽이진 해협을 통해 흑해의 물이 빠르게 쉼없이 지중해까지 흘러가는데, 이 해협이 고대 설화와 역사에 등장하는 유명한 보스포루스이다. 가파르고 숲이 우거진 기슭을 따라 흩어져 있는 수많은 신전과 제단은 서투른 그리스 항해자들이 아르고 호 선원들의 길을 따라 험난하고 위험한 흑해를 탐험하면서 품었던 공포심과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이 기슭들에는 오랜 전설이 전해 오는데, 추잡한 하피들(harpies)이 몰려와 더럽힌 피네우스의 궁정 이야기, 레다의 아들과 권투 시합을 하여 패배한 숲의 신인 아미쿠스 이야기 등이다. 보스포루스 해협은 키아네아 암초들이 한계선을 이루는데, 시인들이 묘사한 바에 따르면 이 암초들은 한때 수면까지 떠올랐다가 흑해의 출입구를 속세의 호기심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신들에 의해 다시 잠겼다고 한다. (…) 이 요새들은 마호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면서 보수하고 강화했다. 그러나 터키의 정복가도 자신이 통치하기 거의 2,000년 전에 다리우스가 이 대륙을 선교(船橋)로 연결하기 위해 이 지역을 택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3∼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2권』, <제17장> 중에서

 

 * 이 짧은 문장에 딸린 '기번의 각주'는 4개다. 그런데 각주마다에 담긴 내용들이 너무나도 상세하고 풍부해서 독자들을 놀라게 만든다. 기번이 '추잡한 하피들(harpies)'이라고 표현한 동물은 일명 '마녀새'로도 불리는 '괴조(怪鳥)'다. 이 새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 신화 <아르고 호 원정대>에도 등장하고, 셰익스피어어의 작품 <템페스트>에도 등장한다.셰익스피어의 『태풍』속에 나오는 마녀새 이야기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는 출간된 지 200년 이상 지나는 동안 역사학 분야만 아니라 정치학, 경제학, 종교학 등 다양한 분야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완간되던 해인 1788년에 태어난 영국의 시인 바이런을 매혹시킨 나머지 그 시인으로 하여금 『로마 제국 쇠망사』를 마지막으로 집필했던 스위스의 로잔을 방문하도록 만들었고, 기번보다 한 세대쯤 늦게 태어난 나폴레옹으로 하여금 '대제국 건설의 야망'을 품게 만들었으며,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처칠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로마 제국 쇠망사』를 여러 번 거듭해서 읽는 동안에 어떤 문장이 어느 페이지에 있는지조차 금방 찾아낼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였던 애덤 스미스도 『로마 제국 쇠망사』의 애독자였고, 『프랑스 혁명사』를 쓴 토머스 칼라일도 마찬가지였다. 『역사의 연구』라는 방대한 역사책을 쓴 아놀드 토인비도 이 책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소설가 E. M. 포스터와 버지니아 울프도 이 책의 애독자였다. 두서 없이 쓴 어설픈 리뷰보다는 그들이 남긴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말들을 통해 이 책의 가치를 가늠해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하다.

 

 * * *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는 동안 에드워드 기번은 언제나 나에게 북극성 같은 길잡이였다. 기번의 정신은 모든 저명한 서구 역사가들 중에서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하고 눈부시다. 기번은 역사를 탐구하고, 구성하고, 서술하면서 역사 분야뿐 아니라 그 어느 문학 장르의 작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걸작을 만들어 냈다.

 - 아놀드 토인비

 

기번은 역사의 바다를 항해하는 항해사이다. 아마도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그의 글은 마치 잘 건조된 배를 보듯 웅장하고 정교하고 듬직하다. 200년 전에 출간되었음에도 『로마제국쇠망사』는 지금도 여전히 우뚝 서 있다. …… 그는 인간 성취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으며, 그가 서술한 로마 제국의 쇠망은 작금의 세상을 뒤흔들 격렬한 변화를 암시하고 예고한다는 점에서 그는 표지판이기도 하다,

 - E. M. 포스터

 

기번은 고대와 근세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이 야만의 세기들이 보여 주는 음울함과 무질서함의 깊고 넓은 수렁을 눈부시게 오간다.

 - 토머스 칼라일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기 시작한 순간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와 문장에 즉시 압도당했다. 나는 게걸스럽게 기번의 책을 탐독했다. 한 장을 다 읽으면 뿌듯한 마음에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서 아주 즐겁게 읽었다. 심지어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주석에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 윈스턴 처칠

 

기번과 함께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위대한 예술가를 잘 보호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 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순서와 사건을 바꾸어 놓고, 강조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 그는 가장 많은 자원을 가진 엔터테이너이다 …… 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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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대와 명성이 높아진 갈레리우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그해 겨울을 니코메디아 궁정에서 지냈는데,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두 황제의 비밀 회담의 대상이었다. 경험 많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관용 정책을 계속 시행하고 싶어했다. 그는 궁정이나 군대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직책을 주지 않는다는 정책에 기꺼이 동의했지만, 저 현혹된 광신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잔인할뿐더러 위험하다고 매우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마침내 갈레리우스 황제는 그로부터 행정과 군사의 소수 고위 관리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회의가 소집되어 주요 문제가 제기되었고, 야심 많은 신하들은 갈레리우스가 끈질기게 요구하는 폭력 시행을 열변으로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쉽사리 감지했다. 아마도 신하들은 그리스도교 파멸이라는 안건에 대해 황제의 자부심, 신앙, 두려움에 영합하는 모든 주제를 강조했으리라 추정된다. 아마도 그리스도교라는 독립적 집단이 속주 중심부에서 존속하고 확장하는 한, 제국을 구하는 위대한 사업은 달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로마의 신들과 제도를 부정하는 그리스도교인은 별개의 공화국을 형성하여, 아직 군사적 힘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미 자체의 법률과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고 공공 재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단정지었다. 또한 모든 구역들이 주교들의 빈번한 회합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주교들의 칙령에 대해서는 수많은 부유한 신자들도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논의가, 내켜하지 않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 방침을 결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671∼672쪽)

 

(나의 생각)

 

인류 최대의 종교로 발전한 그리스도교가 한때는 몇몇 로마 황제들의 손아귀에서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는 사실을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 * *

 

황제들의 의향은 마침내 그리스도교인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침울한 겨울 내내 수없이 열렸던 비밀 회의의 결과를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다. 테르미날리아 축제일인 2월 23일이 그리스도교 발전에서 경계선을 긋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날 동이 틀 무렵, 여러 명의 장군, 군 장교, 징세관 들을 거느린 민정 총독이 시내에서 가장 번화하고 아름다운 곳에 있는 니코메디아 중앙 교회로 갔다. 그들은 교회 출입문을 순식간에 파괴하고는 성소로 돌진했다. 예배에 쓰이는 성물을 찾지 못한 그들은 성서 몇 권을 불태우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관들은 수많은 근위병과 선발 부대를 거느리고 요새 도시를 파괴할 온갖 무기들을 갖추고 전투 태세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그칠 새 없는 공격으로 인해, 궁정을 넘어 우뚝 솟아서 오랫동안 이교도들의 분노와 질투를 자극했던 신성한 교회가 삽시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전면적인 박해 칙령이 공포되었다. 여전히 유혈 박해에 반대 입장을 취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갈레리우스 황제의 격노를 누그러뜨리려고 했지만, 그는 희생 제물 공양을 거부하는 자는 모조리 불태워 죽이도록 명했는데, 관강하게 거부한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해진 처벌은 충분히 가혹하고도 효과적이었다. 제국 내 전 지역의 교회를 뿌리까지 파괴하고, 예배 목적으로 비밀 집회를 여는 자는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제 맹목적인 박해 열풍을 이끄는 비열한 역할을 맡게 된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특성을 부지런히 연구했다.(672∼673쪽)

 

 

 * *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처음 공인되었던 박해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필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구체적인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나 락탄티우스의 규탄서(『박해자들의 죽음』)나 고대 순교자전에서 무시무시하고 진저리나는 장면들을 수집하여, 고문대와 채찍, 쇠갈고리와 불로 달궈진 침대, 화염과 강철, 잔인한 야수들과 더더욱 잔인한 사형 집행인 등이 인체에 고통을 가하는 온갖 고문 장면들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처참한 장면들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한 성자들의 죽음을 지연시키거나 승리를 기리고 유물을 찾아내는 수많은 광경과 기적들을 더한다면 더욱 활기가 넘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것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글로 옮겨야 할지를 결정 내릴 수가 없었다. 교회 역사가들 중 가장 신중한 에우세비우스도 교회의 영광과 연결되는 것은 기술하고 치욕스러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감추었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자백은 한 가지 의문, 즉 역사의 근본 법칙들 중 하나를 공공연히 어긴 역사가가 다른 원칙들은 엄격히 준수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그리고 당대의 역사가들 중 경솔한 면은 적었지만 궁정에서의 처세술은 누구보다 능숙했던 에우세비우스의 인물됨을 고려하면, 이런 의심은 더욱 근거가 있다 하겠다. 몇몇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행정관들이 이해관계나 원한 같은 사사로운 동기로 격노하거나, 순교자들이 열정에 휩싸여 신중함과 품위를 잊은 채 제단을 엎어 버리거나 황제에게 저주를 퍼붓고 법정에서 재판관을 때린 경우에,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들이 일편단심인 희생자들에게 가해졌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687∼688쪽)

 

 

 * * *

 

추방과 투옥, 고통과 고문에 관한 애매모호한 서술은 교묘한 웅변가들의 붓놀림으로 너무도 손쉽게 과장되거나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당연히 더 명확하고 확실한 종류의 사실들을 조사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동료들과 후대 황제들의 칙령의 결과로 죽음을 맞게 된 순교자가 정확히 몇 명인가 하는 사실이 궁금해진다. 최근의 순교담들은 무차별적인 박해로 전체 군대와 도시가 단 한 번에 스러졌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작가들은 복음 신앙을 피로써 지킨 정확한 신자 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산만하게 비극적 어조로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는 것에 만족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단 아홉 명의 주교만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에 대한 그의 상세한 계산에 따르면, 겨우 아흔두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주교들의 신앙적 열성과 용기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인 아홉 명으로부터 유용한 추정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후자는 대단히 중요하고 타당한 결론을 입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로마 속주들의 분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동방 제국의 16분의 1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심이었든지 아니면 위장된 자비심이었든지 간에 신자들의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은 총독들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팔레스타인에서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의 통치하에 놓여 있던 동방 세계의 전체 순교자 중 적어도 1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가 배출되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면 전체 순교자수는 대략 1500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숫자를 10년의 박해 기간으로 나누면, 매년 150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셈이다. 이탈리아, 아프리카, 아마도 에스파냐의 속주들에 동일한 비율을 적용해 보면, 그곳에서는 박해 시작 2∼3년 후부터 박해 법률의 엄중한 시행이 유보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대략 2000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전의 어느 박해 시기보다 더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많았고 적들도 더욱 격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아니므로, 이 온당하고도 개연성 있는 수치 계산은 그리스도교를 세상에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바친 초기 성인과 순교자의 수를 어느 정도 추정 가능하게 한다.(689∼690쪽)

 

(나의 생각)

 

『로마제국 쇠망사』 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온갖 세심한 사료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지없이 꼼꼼하게 검토했을 게 분명한 이 불세출의 역사가가 일부러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역사를 축소하거나 과장했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 * *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우울한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즉 순교의 주제에 관해 역사가 기록해 두었거나 종교적 목적으로 위장된 이야기들을 아무런 주저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신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뒤에 이어진 '무지의 시대' 동안, 로마 시의 주교들은 라틴 교회(서방 교회)의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까지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들이 설립했고, 오랫동안 이성의 미약한 노력을 무시해 온 미신 조직은 마침내 12·∼16세기에 종교 개혁가라는 대중적 성격을 취한 용감한 광신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사기 행위를 획득했던 제국을 그때부터는 무력으로 지켜 나갔다. 즉 평화와 자비의 조직이 추방, 전쟁, 대량 학살, 이단 심문소의 건설 등으로 순식간에 오욕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이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사랑으로 기운을 얻자, 가톨릭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성직자의 이해관계와 연결시키고 화염과 무력으로써 영적 감시의 공포를 강화시켜 갔다. 네덜란드에서만 카를 5세의 지배하에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엄청난 숫자는 그로티우스가 증언하고 있다. 천재이자 학자인 그는 종파들이 다투는 광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중용을 지켰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정보의 교류가 손쉬워지고 검열의 위험도 증대된 때에, 시대와 조국에 관한 연대기를 써서 남겼다. 그로티우스의 권위를 믿는다면, 단일 속주 단일 통치 기간에 처형된 신교도의 수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3세기의 통치 기간 중 발생한 초기 순교자의 수를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는 가정이 증거의 가치보다 우세하거나, 그로티우스가 종교 개혁가들의 공적과 수난을 과장했다는 과오가 입증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그렇다면 쉽사리 믿는 고대인들이 남긴 미심쩍고 불완전한 기록들은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그들의 자비로운 군주에게 패한 동료 황제들이나 무시할 만한 선대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했던 박해를 기록하는 독점적 특권을 누린 궁정 주교(에우세비우스)와 격렬한 웅변가(락탄티우스)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690∼69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이토록 단순한 수치 하나만으로도 에드워드 기번은 '일반 사람들의 그릇된 상식 혹은 통념'을 얼마나 통렬하게 무너뜨리고 마는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 기번과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 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순서와 사건을 바꾸어 놓고, 강조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비천()한 데서부터 승진하여,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친위 대장()이 되고, 황제가 암살된 후,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제국을 동서로 구분하여 다스리고, 286년 자기는 동방의 정제로 취임,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한 후, 또 서방에는 정제 막시미아누스,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두어 통치케 했는데, 이로써 제국의 4분치제도()가 성립되었다.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고, 군사() 경제상 중요한 동방을 직할하면서, 전 제국을 통치했다. 동양풍의 의례를 채용하여 군주의 존엄()을 높이고, 전제 군주 정치의 실현을 계획, 황제 예배를 성행케 함과 동시에 갈레리우스의 권면을 수납하여, 303년 기독교의 최후적인 박해를 했다. 그 해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치정 20년 기념제()를 개최하고,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준 후, 달마티아의 살로네(Salonae)에서 여생을 보냈다.(출처:네이버 백과)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에우세비우스

 

팔레스티나의 비자유인으로 출생. 313년 이래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다. 스승 팜필로스의 이름을 따서 에우세비우스 팜필리라고도 부른다. 젊어서부터 팜필로스가 세운 신학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니코메디아의 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궁정에 출입하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아리우스설()에 공명하는 등 교회의 정통적 교리와 다른 견해도 가졌지만 성서학() ·호교학() ·교회사() ·교의신학() 등 당시 신학의 전 영역에 걸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사도(使)시대부터의 교회 역사를 쓴 대표작 《교회사 Ekklesiastike Historia》(10권)가 있다. 또 그의 《연대기 Chronicon》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의 저작에 기초를 두어, 초대 교회 때부터 325년까지에 이르는 세계사 개요와 연표를 다루었는데, 그리스어 원본은 단편()밖에 전하지 않으나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역 및 아르메니아어역이 있다. 이 밖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사실을 쓴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과 호교론서인 《히에로클레스 반박문》 등 다수가 있다.(출처:네이버 백과)

 

 

락탄티우스(240?∼320?)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출생. 니코메디아(현재의 이즈미트)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00년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무렵 콘스탄티누스1세의 초빙을 받고 트리어로 가서 궁정신학자가 되어 황제의 종교정책수행을 돕고, 대제의 맏아들 크리스푸스도 지도하였다. 주요저서에는 《신학체계》 《하느님의 진노에 대하여》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

 

 * 그로티우스(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네덜란드의 부르주아 혁명기의 사람으로서 라이든 대학에서 수학했다. 로테르담 시장으로 재직중 종교투쟁으로 인해 종신금고 및 재산몰수의 형을 받고(1618) 프랑스로 탈출(1620), 그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스웨덴의 주프랑스대사가 되었다.

1645년 네덜란드에 귀국. 부르주아적 자연법 이론을 설명하고, 법과 국가는 지상적인 것이지 천상적인 기원에 의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일치에 의해 국가가 성립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중세의 신학 및 스콜라학으로부터 국가 및 법을 해방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의 저작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1625) 3권에서 자연법적 국제법을 체계화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출처:네이버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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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4-23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내부의 적과 싸우는 내전이 더 치열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갈리아 원정기」와 「내전기」를 비교하면 더 잘 다가온다 생각됩니다. 서로를 더 잘 알기에, 역사에 정통으로 남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발전사에서 외부의 적, 적그리스도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기에는 로마제국,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이교도라는 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oren님 덕분에 초기 기독교회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개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4-23 09:55   좋아요 1 | URL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무척이나 배타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다신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광범위한 제국의 영토 내에서 무수한 신전들이 조상 대대로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경배해 왔었는데, 그걸 모조리 우상 숭배로 치부하고 한사코 부정했으니까 말이지요. 초기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종교 문제로 붙잡혀 갔을 때 ‘제단에 향을 피우는 행위‘만 인정하더라도 풀려나고 방면되었다는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에겐 실소를 자아내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탄압 대상‘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였던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3 10:04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기독교사 초기 신해박해부터 병인박해에 이루어진 탄압의 이유가 제사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조상공경이라 하여 허용하지만, 과거에는 이와 달라 대규모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건 속에서 내용과 형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4-23 11:40   좋아요 1 | URL
초기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 중에는 ‘조상에 대한 제의 거부‘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조상전래의 수호신‘에 대한 거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경우도 있었고, 그걸 끝끝내 참지 못하고 끈질기게 박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들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던 셈이지요. 또한 황제들 주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박해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했고요. 그리스도교가 전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수도 없이 반복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다신교에 대한 전통과 집착이 워낙 강한 탓인지 기독교의 교세가 아직까지도 너무 미미해서 놀랍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