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책 속에서 저명한 책들의 저자를 만나는 건 흔한 일이다. 에드워드 기번이 쓴 『로마 제국 쇠망사』에도 수많은 '책들의 저자'가 등장한다. 역사가는 어쨌거나 책을 통해 얻게 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할 수밖에 없으니 어쩌면 이건 지극히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별의별 희한한 이름을 지닌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한들 결국 평범한 독자들은 한 귀로 듣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그런 역사가들의 책은 척박한 국내의 여건에서는 번역본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기번보다 뛰어났던 고대의 역사가들은 그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귀가 솔깃해진다. 그런 역사가들의 작품은 대체로 기번의 역사서보다 앞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역사가들의 이름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사』를 쓴 티투스 리비우스, 『게르마니아』, 『연대기』 등을 쓴 타키투스, 『갈리아 원정기』를 쓴 카이사르, 『역사』를 쓴 헤로도토스, 『페르시아 원정기』, 『키루스의 교육』 등을 쓴 크세노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 『로마사 논고』를 쓴 마키아벨리 등. 이런 쟁쟁한 역사가들과 작품들을 기번의 책 속에서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런 역사가와 작품들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늘 궁금하다.
기번의 책 속에는 이처럼 저명한 역사가들만 등장하는 건 아니다. 이름난 철학자와 시인들도 꽤나 자주 등장한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는 시인들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이다. 『아이네이스』의 베르길리우스, 『변신』의 오비디우스도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민다. 기번의 머리 속에 이들 시인들의 작품이 항상 머리속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장 자주 등장한다. 이들 말고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의 위안』의 저자 보이티우스도 등장하는데, 이들 세 사람의 철학자들은 작품의 저자로서보다는 '역사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역사적 인물'로서 상세히 다뤄진다는 점이 또다른 특징이다.
우리에게 『철학의 위안』 이라는 저자로 잘 알려진 보이티우스는 『로마제국 쇠망사_제4권』의 초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인물이다. 나는 이 인물이 기번의 역사서에 등장할 때만 하더라도 『철학의 위안』을 쓴 뛰어난 철학자 겸 정치가 정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유명한 고대의 철학 작품이 쓰여지는 과정까지 길게 서술된 설명을 들어보니 이 인물의 삶 자체가 그 당시의 역사나 다름없을 정도로 비중이 큰 인물이었음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보이티우스(480~526년)가 활동하던 때는 이미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였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동로마는 여전히 제국의 지위를 유지한 반면, 서로마 제국은 최초의 야만족 왕인 오도아케르의 치세를 지나 테오도리크(재위 488∼526년)가 지배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런데 테오도리크는 동고트 족의 왕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일찌감치 콘스탄티노플에서 볼모로 붙잡혀 있는 동안 '로마식 교육'을 받은 덕분에 로마인 특유의 관대한 포용 정신으로 넘쳐나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야만족의 왕으로서 이탈리아를 지배했지만 행정 관리들은 대부분 로마인들로 채웠고, 로마의 문화 유산들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데도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기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훌륭하고 용감했던 고대 로마인들과 함께 동상을 만들어 세울 만한 자격이 있는 고트족 출신 왕'이었다.
Coin depicting Flavius Theodoricus (Theodoric the Great).
그토록 이탈리아에게 행운으로 여겨졌던 이 인물에게도 마침내 먹구름이 끼게 되었으니, 그의 말년에 찾아온 민중들의 증오와 귀족들의 유혈사태 때문이었다. 그때 가장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걸출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보이티우스였고, 그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감옥에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었다.
이제부터는 보이티우스라는 인물이 어쩌다가 그토록 관대한 테오도리크에게 미움을 샀으며, 그가 어떤 품성을 지녔고, 얼마만큼의 드높은 학문적 경지를 지녔던 인물이었는지를 보다 자세히 살펴볼 차례다.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그를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주저없이 규정한다.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인물이 저 유명한 플루타르코스였음을 고려한다면 그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칭호를 이 인물에게 부여한 셈인가.
보이티우스는 카토나 키케로가 자신의 동포라고 인정해 주었을 최후의 로마인이었다. 부유한 고아였던 그는 아니키우스 가문의 세습 재산과 지위를 물려받았는데, 이 가문은 당대의 왕이나 황제들이 야심차게 이 집안 사람임을 자칭했던 유명한 가문이었다. (…) 보이티우스의 청년 시절에는 아직껏 로마의 학문이 완전히 버려지지 않고 있었다. 한 집정관이 교정한 베르길리우스의 책이 지금까지 남아 있고, 문법학, 수사학, 법학 교수들이 관대한 고트족 덕분에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리고 연금까지 받으며 보호되고 있었다. 그러나 보이티우스의 열렬한 학문적 호기심은 라틴어를 통독하는 것만으로 충족되지 않았다. 그는 프로쿨루스와 그 제자들의 열의와 학식, 그리고 근면성으로 유지되던 아테네의 학교들에서 18년간이나 열심히 공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인하면서도 섬세한 감각과 플라톤의 경건한 명상과 숭고한 상상력을 조화시키려 했던 살아 있거나 죽은 스승들의 정신을 흡수하고 학문적 방법들을 모방했던 것이다. 로마로 돌아와서 벗인 심마쿠스의 딸과 결혼한 이후에도 보이티우스는 상아와 대리석으로 이뤄진 궁궐 같은 집에서 같은 학문을 연구했다.(29∼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보이티우스는 자신이 감옥에서 억울하게 죽고 나서 1,000년도 더 흐른 뒤에 나타난 걸출한 로마사의 권위자로부터 '최후의 로마인'이라는 영광스런 칭호를 자신이 부여받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싶다. 아무튼 그의 학문적인 위상은 댕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불려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의 재능은 로마의 독자들을 위해 그리스의 기초적인 과학과 학문을 가르치려는 노력을 통해 표출되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 피타고라스의 음악, 니코마코스의 산술, 아르키메데스의 역학,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플라톤의 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그에 대한 포르피리오스의 주석 등이 이 지칠 줄 모르는 로마 원로원 의원의 펜 끝에서 번역되고 또 설명되었다. 또한 그는 여러 가지 경이로운 과학 기구들, 예를 들어 해시계나 물시계, 천체의 운동을 보여주는 구(球) 등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여겨졌다. 그러다가 보이티우스는 이러한 심오한 학문의 세계에서 사적 · 공적인 생활에 수반되는 사회적 의무들의 세계로 내려앉았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올라앉았다. 그는 자선을 베풀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고, 데모스테네스나 키케로의 연설과 비교되곤 했던 웅변에서는 일관되게 청렴결백과 인간애를 호소하였다.(30∼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뛰어난 미덕을 지닌 인물을 어찌 안목 있는 군주가 놓칠 리 있었겠는가. 그는 이내 집정관과 명예고관이라는 칭호로 장식되었고, 그의 재능은 직책에 어울릴 만큼 훌륭하게 발휘되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있을 때 그의 두 아들까지도 아직 어렸지만 같은 해에 집정권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그는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었던가. 그가 생애 말년에 감옥에 갖혀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을 쓰며 세상을 한탄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그가 행복의 절정에 이르렀던 때를 기번은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이 취임하던 기념할 만한 날에 그들은 원로원과 군중들의 환호에 둘러싸여 엄숙하고도 화려한 행렬을 이루어 자택에서 포룸까지 행진했는데, 로마의 실세 집정관이었던 그들의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서 왕의 은혜를 칭송하는 연설을 마친 후에 대경기장의 경기에 막대한 하사금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다. 명예와 재산, 공적 직위와 사적 인척 관계, 학문의 수양과 미덕의 함양, 이 모든 것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보이티우스는 아마도 행복이라는 변덕스러운 형용사를 말년의 한 인간에게 붙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그 단어에 꼭 들어맞는 인물이었다.(3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이토록 행복했던 인물에게도 마침내 불행이 찾아 왔으니, 테오도리크 치세의 암울했던 말년에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그의 신세를 돌변하게 만들었다. 그 무렵 원로원 의원 가운데 알비누스라는 인물이 '로마의 자유'를 '희망'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이미 유죄선고를 받아 놓고 있었다고 한다. 정의감에 불타는 보이티우스가 이런 사태를 그냥 좌시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보이티우스는 "알비누스가 유죄라면 원로원 전체와 나 자신도 같은 죄를 저지른 것이다. 우리가 죄가 없다면 알비누스도 똑같이 법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 고 웅변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고의 행복을 순수하고 헛되이 희망하는 것까지는 법률이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만약 음모를 알았더라도 압제자에게 알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보이티우스의 성급한 고백은 묵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알비누스의 변호인(보이티우스)은 곧 자신의 의뢰인이 처한 위험과 죄상에 휘말려 들어갔다. 고트족으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켜 달라고 동로마 황제에게 요청하는 원본 교서에서 그들의 서명이 발견되었고, 지위는 높았지만 평판은 좋지 않았던 세 명의 목격자가 이 로마 귀족의 반역 음모에 대해 증언하였다. 그는 테오도리크에게 변명할 기회도 박탈당한 채 파비아의 탑에 엄중히 감금당했고, 그곳으로부터 500마일이나 떨어져 있었던 원로원에서 자신들의 가장 저명했던 동료 의원에게 재산 몰수와 사형을 선고한 것으로 보아, 그는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쓴 것으로 보인다. (…) 원로원에 대한 진지하고 충실한 애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원로원 의원들의 떨리는 목소리에 의해 범죄로 규정되었다.(33∼3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불세출의 충신과 만고의 역적 사이는 언제나 단 한 발짝만 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하루 아침에 '반역죄인'이 되어 차가운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황제의 처형 명령을 기다리게 된 처지는 얼마나 기가 막힐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바로 그 기가 막힌 상황에서 피를 토하듯 써내려간 그의 글들은 얼마나 간절한 호소들을 담고 있을 것인가. 아무튼 이 역사적인 인물이 쓴 역사에 길이 남을 저서를 써내려간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전한다.
보이티우스가 족쇄에 채워져 사형 집행을 기다리면서 파비아의 탑에 갇혀 있을 때 쓴 작품이 『철학의 위안』이다. 플라톤이나 키케로가 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이 훌륭한 책은 그 시대의 야만성과 작가가 처한 상황을 보면 더욱 형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그가 로마와 아테네에서 줄곧 도움을 받았던 천상의 인도자가 이제는 친히 그의 지하 감옥을 비추어 그의 용기를 북돋아 주고 그의 상처에 치유의 연고를 발라 주었다. 또한 그에게 지금까지 누린 영광과 현재의 고난을 비교해 보고 이렇게 불확실한 인생사로부터 새로운 희망을 도출해 보도록 가르쳤다. 이성은 인생의 은혜들이란 변덕스러울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쳤고, 경험은 그것들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한 점 부끄럼 없이 그 은혜들을 누렸으므로 이제는 아무 회한 없이 그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의 미덕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그의 행복도 빼앗지 못한 적들의 무기력한 악의를 조용히 경멸하게 되었다. 보이티우스는 '최고선'을 찾기 위해 지상에서 천상으로 올라가 우연과 운명, 통찰력과 자유의지, 시간과 영원의 형이상학적 미로를 탐험했고, 신의 완벽한 속성과 그 도덕적 물리적 체계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무질서라는 모순을 온건한 방식으로 화해시키고자 시도하였다. 이처럼 자명하고도 모호하고 또 난해한 주제는 인간 본연의 감정들을 위안해 주지는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철학적 노력으로 불행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 작품 속에 다양하고 풍부한 철학과 시, 웅변을 솜씨 있게 결합시켜 놓은 이 현자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했던 담대한 평정심을 이미 체득했음에 틀림없다. 마침내 힘들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사형 집행인이 테오도리크의 극악무도한 명령을 실행에 옮겼거나 아마도 한 발 더 나아가 집행했던 것 같다. 단단한 밧줄을 보이티우스의 목에 감고 눈알이 거의 빠져나올 때까지 잡아당겼는데, 죽는 순간까지 곤봉으로 때린 좀 더 가벼운 고문이 오히려 자비롭게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살아남아 로마의 가장 어두운 시대에 진리의 빛을 비추었다.(34∼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자신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보이티우스를 묘사한 그림(출처:네이버백과)
에드워드 기번이 보이티우스가 남긴 이 하나의 작품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는 다음에 이어지는 또다른 묘사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철학자의 저술들은 영국 역사상 가장 명예로운 국왕의 손으로 번역되었고, 오토라는 이름을 쓴 세 번째 황제는 아리우스파 박해자들의 손에 의해 순교자가 되고 여러 가지 기적의 명성을 얻은 이 가톨릭 성인의 유골을 보다 영예로운 묘지로 이장해 주었다. 보이티우스는 최후의 순간까지 두 아들과 부인, 그리고 장인이기도 했던 고매한 심마쿠스가 무사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그러나 비탄에 잠긴 심마쿠스의 행동은 신중하지 못했고 무모하기까지 했다. 그는 대담하게도 친구의 죽음에 복수하고 말겟다고 탄식했다. 결국 심마쿠스는 사슬에 묶여 로마에서 라벤나의 궁정까지 끌려왔으며, 테오도리크의 의심은 이 죄 없는 늙은 원로원 의원의 피로 겨우 진정되었다.(3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방금 인용한 에드워드 기번의 설명만 들어서는 이 책이 어떤 인물에 의해서 번역되었는지 조금 아리송하다. 한국의 독자들은 영국의 역사를 영국인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알라딘 상품 소개'를 인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엔 에드워드 기번보다 훨씬 더 친절한 설명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철학의 위안』은 9세기에 영국의 알프레드 대왕이 번역한 이래 『캔터베리 이야기』를 쓴 제프리 초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등이 계속 번역하였다. 10세기에 고대 독일어로 번역되었으며, 중세 때 프랑스어로 수없이 번역되고 필사되었다. 프랑스어 번역 중 장 드 묑의 번역이 가장 유명한데, 그는 이 번역본을 필립 4세에게 헌정하였다. 이 역본은 특히 아름다운 채식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현대지성의 번역본은 장 드 묑의 역본에 있는 유명 삽화 8장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본문에 삽입하였다.
『철학의 위안』은 카롤링거 왕조 이후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철학 입문서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학에서, 단테는 『신곡』에서 여러 번 이 책을 인용하였으며, 또한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캔터베리 이야기』와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라는 책에서 『철학의 위안』을 인용하고 모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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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물과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 가운데 아직도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회한 많은 테오도리크의 죽음에 관한 일화다. 그가 죽은 때는 서기 526년 8월이었다.
인간이라면 양심의 판결과 국왕의 회오를 증언해 줄 보고를 듣고 싶을 터인데, 혼란스러운 공상과 병약해진 육체에 시달리다 보면 무시무시한 망령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은 철학에서도 다루어지는 현상이다. 미덕과 영광의 삶을 살았던 테오도리크는 이제 치욕과 죄의식과 함께 무덤을 향하고 있었다. 과거와 대비되는 현재로 인해 그의 마음은 초라해졌고 당연한 일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공포로 두려움에 떨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테오도리크는 어느 날 저녁 식탁에 머리가 큰 생선이 나오자, 갑자기 심마쿠스의 노한 얼굴이 보인다고, 두 눈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입에는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나 있어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왕은 즉각 방으로 돌아가서 두꺼운 이불을 덮고도 학질에 걸린 듯 덜덜 떨다가 시의(侍醫)인 엘피디우스에게 보이티우스와 심마쿠스를 죽인 일을 후회한다고 더듬더듬 고백했다고 한다. 그의 병세는 악화되었고 사흘간이나 설사를 계속하다가 재위 33년만에, 이탈리아를 침략한 날부터 계산한다면 37년만에 라벤나의 궁정에서 숨을 거두었다.(35∼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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