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멸망한 원인 가운데 '민족의 대이동'을 빼놓을 순 없다. 제국이 번창하는 기나긴 시간 동안 유럽에서의 로마의 국경은 대체로 라인강과 도나우강이 한계였다. 그 너머로는 숲들이 울창할 뿐만 아니라, 호전적인 야만인들이 살고 있어서 정복하기도 어려웠고, 정복해 봤자 야만인들은 쉽게 교화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로마 제국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면서 황제들의 군사적 역량과 리더십에 따라 변방의 이민족들과의 분쟁이 잦아지거나 수그러드는 경향을 반복하는 데도 시간적인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의 중앙 아시아뿐만 아니라 저 멀리 고대 중국의 변방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던 훈족(이들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흉노족'이었다는 견해가 아직도 분분하다. 기번도 이런 견해를 주장한 학자들의 견해를 자주 소개했다.)들이 차츰 유럽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훈족의 발생지라고 믿어졌던, 기원전 205년경 묵돌선우 통치하 흉노족의 영토와 영항(출처:위키백과)

 

역사가들이 훈족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들이 말 그대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활동했던 기록을 영구히 보존할 방법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훈족들로부터 시달림을 당했던 이웃 문명 국가의 역사 기록으로부터 그들의 활동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록들에 의해 재구성된 그들의 이동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훈족의 서쪽으로 이동을 추정한 경로(출처:위키백과)

 

훈족이 유럽에서도 드넓은 지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위력을 떨친 시기는 아틸라가 왕위에 오른 때였다. 아틸라는 로마 제국의 멸망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훈족의 왕 아틸라, 고트족의 왕 알라리크, 반달족의 왕 가이세리크를 로마를 멸망케 한 '3대 인물'로 꼽는다. 로마 제국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395년) 이후 무능한 두 아들(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 황제, 서로마의 호노리우스 황제)에 의해 동로마와 서로마로 완전히 분리된 이후 두 제국의 힘은 갈수록 약화된 반면, 훈족과 반달족과 고트족들의 활동은 나날이 위력을 더해 갔다.

 

아틸라가 훈족을 이끌 무렵의 영토가 얼마나 방대했던지는 아래 지도만 봐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아틸라의 최대 판도 (434-453)(출처:위키백과)

 

아틸라가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할 무렵 서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 동안이나 굳세게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로마가 아닌) 라벤나의 궁정에서 자신의 안위만 걱정할 뿐 국사에는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했다. 이 당시의 서로마 제국의 정황을 기번은 이렇게 표현했다.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는 28년간의 길고 불명예스러운 재위 기간 동안 동로마를 통치한 형 아르카디우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조카 테오도시우스 2세와 담을 쌓고 지냈다. 콘스탄티노플은 겉으로는 무관심을 가장하고 내심으로는 은근히 즐기면서 로마에 닥친 재난들을 구경했다. 플라키디아의 기이한 모험들은 동서 두 제국 간의 동맹 관계를 되살리고 한때 고트족의 포로 신세에서 여왕이 되었다가, 사랑하는 남편(아돌푸스)을 잃고 무례한 암살자의 손에 사슬로 묶여 끌려 다녔다. 그러다가 복수의 기쁨을 맛보고 평화 협정에서 밀 60만 포대와 교환되었다. 플라키디아는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온 후 가족의 품에서 재혼이라는 새로운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동의 없이 결정된 결혼에 반감을 나타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호노리우스는 내키지 않는 결혼에 저항하는 아돌푸스의 미망인의 손을 참제들을 쓰러뜨린 데 대한 고귀한 보상으로 용감한 콘스탄티우스에게 넘겨주었다. 플라키디아는 혼례를 치른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호노리아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어머니가 되어 감사해 하는 남편에게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275∼27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나의 생각)

이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 '호노리아 공주'의 혈연 관계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딸이자 서로마 황제인 호노리우스의 여동생이었던 플라키디아는 무능한 황제였던 오빠의 옆자리에 재혼한 남편인 콘스탄티우스를 내세웠다. 황제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강요하여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불과 7개월 만에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나서 플라키디아는 비열한 음모에 휩쓰려 오빠와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플라키디아와 자녀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궁정을 떠난 뒤에야 소란은 가라앉았다.

 

망명길에 오른 황족들은 테오도시우스 2세의 결혼 직후 페르시아에 거둔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을 즈음에 콘스탄티노플에 상륙했다. 그들은 친절하게 환대를 받았으나 서로마 궁정에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동상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미망인에게 황후의 호칭은 허락되지 않았다. 플라키디아가 도착한 지 몇 달 안 되어 한 발빠른 사자가 부종으로 인한 호노리우스 황제의 죽음을 알렸다. (…)

 

군주제에서 왕위 계승은 다양한 선례에 따라 추대나 세습, 장자 상속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여성과 방계 혈족의 계승권을 명확히 규정하기란 불가능했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혈연상으로나, 또는 정복자의 권리로 로마인들의 유일한 정통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아마도 눈앞에 펼쳐진 무제한의 권력이 잠시 동안 그를 유혹했겠지만, 나태한 기질의 그는 건전한 정책상의 요구를 따랐다. (…) 그는 야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조부(테오도시우스 대제)의 중용을 본받아 서로마의 제위에 사촌 발렌티니아누스를 앉히기로 결심했다. (…) 로마 제국을 뒷전에서 지배하던 세 여성의 동의에 따라 플라키디아의 아들은 테오도시우스와 아테나이스 사이에서 난 딸 에우독시아와 혼약을 맺었다. (…)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의 칭호를 받았을 때의 나이는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의 오랜 미성년기 동안 서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어머니가 후견인 역할을 맡았다. 플라키디아는 그럴 능력도 없으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아내와 누이의 평판과 미덕, 즉 에우도키아의 우아한 재능과 풀케리아의 현명하고 성공적인 정책을 질투했다. 발렌티니아누스의 어머니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감당하지도 못할 권력을 탐냈다. 그녀는 25년간 아들의 이름으로 통치했다.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황제의 성격을 놓고 플라키디아가 방만한 교육으로 그의 젊음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남자답고 명예로운 목표 쪽으로 주의를 돌리지 못하도록 온갖 수를 써서 막았다는 의혹이 점점 커져 갔다.(276∼28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3장>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2세가, 서로마 제국은 여섯 살짜리 발렌티니아누스가 황제로 앉아 있는 동안, 제국의 국경 너머에서는 훈족에 밀려 고트족과 반달족들이 점차 로마의 국경을 넘어 왔다. 민족 대이동의 흐름 속에서 가장 강력하고 규모가 큰 민족들은 하나같이 로마 속주들의 변경 지대로 이동했다. 아틸라의 숙부인 로아스가 이끄는 훈족의 대집단은 현재의 헝가리에 있는 평원에 마을을 꾸리고 정착했다. 그들은 서로마가 내분을 겪는 동안 찬탈자를 돕기 위해 무려 6만 명의 대군들을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 지대로 진군한 적도 있었다. 로마는 그들의 행진과 퇴각에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훈족의 왕위는 로아스가 죽고 나서 조카인 아틸라로 이어졌다. 이 유명한 야만족 왕은 그 생김새와 성격부터 독특했다. 이 대목에서는 기번의 설명을 직접 듣는 게 훨씬 더 낫지 싶다.

 

아틸라는 문주크의 아들로 그의 가계는 중국 왕조와 대립했던 고대 훈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 고트족 사가의 관찰에 따르면, 그의 용모는 자기 민족의 태생적 특징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아틸라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큰 두상, 거무스름한 피부색, 작고 푹 꺼진 눈, 낮은 코, 숱이 적은 수염, 떡 벌어진 어깨, 균혀이 잘 안 맞는 짧고 땅딸막하지만 기운이 넘치는 몸 등 현대 칼무크인의 추한 외모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훈족 왕의 오만한 걸음걸이와 행동거지는 다른 모든 인간들에 대한 그의 웅뤌감을 드러내 주었다. 또한 그는 남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을 즐기는 듯 사납게 눈을 부라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 야만스러운 영웅에게도 동정심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에게 애원하는 적들은 그의 평화나 사면 약속을 얻을 수 있었고, 자신의 국민들에게는 올바르고 관대한 군주로 여겨졌다. 그는 전쟁을 즐겼다. 그러나 성년이 되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손보다는 머리를 써서 북방 정복을 달성했으므로, 모험을 즐기는 용장으로서의 명성 대신 현명하고 성공적인 지장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스키타이의 정복자였던 아틸라는 흔히 칭기즈칸과 비교되는데, 그들이 미개한 동포들로부터 신과도 같은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던 방법은 참으로 교묘했다. 현대인들이 들으면 한낱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미개인들은 너무나 철석같이 믿었다.

 

훈족과 몽골족의 왕조는 대중의 미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처녀의 몸으로 기적에 의해 수태했다는 칭기즈칸 어머니의 이야기는 그를 보통 인간들 이상의 위치로 끌어올렸다. 벌거벗은 예언자가 신의 이름으로 그에게 지상의 제국을 부여했다는 이야기는 몽골족의 용맹을 세차게 타오르게 했다. 아틸라는 자기 시대와 나라의 성격에 맞게 종교를 적절히 이용했다. 스키타이인들이 전쟁의 신을 특별히 숭배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태를 갖춘 상징물을 만들어 낼 능력이 없었으므로, 쇠로 만든 언월도 한 자루를 자기들의 수호신으로 숭배했다. 한 훈족 양치기가 어느 날 풀을 뜯던 암소 한 마리가 발에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핏자국을 따라갔다가, 풀숲에서 오래된 칼을 발견했다. 그는 칼을 땅에서 파내 아틸라에게 바쳤다. 관대하기보다 교활한 이 군주는 이를 신이 자신에게 내린 호의라며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이 마르스의 검을 소유한 자로서 지상을 다스릴 권리를 신으로부터 정당하게 받았으니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30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곧 마르스의 총아로 신격화되었고, 그의 정복 사업도 아주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야만족의 왕들은 신과 같은 이 훈족 왕의 존엄한 자태를 감히 오래 쳐다볼 수도 없다는 등 온갖 아첨과 숭배를 바쳤다고 한다. 나라의 상당 부분을 공동 통치하고 있던 형 블레다는 아틸라에 의해 왕홀뿐 아니라 목숨까지 빼앗겼는데, 이러한 잔인한 행위조차도 초자연적인 힘 탓으로 돌려졌다. 여기서 잠시 그의 모습을 감상하고 넘어가자.

 

 

19세기 아틸라의 묘사. 체르토사 디 파비아 건물의 파사드에 있는 메달리온.

라틴어 비문은 이 사람이 바로 신의 채찍, 아틸라라고 적혀있다.(출처:위키백과)

 

아틸라는 과히 야만족의 제왕이라 불릴 만했다. 그는 고대와 현대의 정복자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막강한 두 왕국, 게르마니아와 스키타이를 통합했다. 그는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크족의 내정에까지 개입했고, 저 멀리 동쪽으로는 유연(柔然)족의 칸에게 굴욕적인 패매를 안기고 중국에 사절을 보내어 동맹 관계를 맺고자 협상했다. 그들은 결국 서로마와 동로마뿐 아니라 페르시아까지도 호시탐탐 넘보는 강성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윽고 흑해에서 아드리아 해에 이르기까지 500마일에 달하는 유럽 전체가 아틸라가 전장으로 끌어낸 무수한 야만족들에게 침략당하고 점령되어 초토화되었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과 세 번의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했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에서 테르모필라이(영화 『300』의 주무대였던 그리스의 협곡)까지,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교외 지역에서 그는 거침없이 무자비하게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속주들을 유린했다. 동로마 제국의 일흔 개 도시들이 겪은 참화에 대해서는 '완전한 몰살과 전멸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쓸 표현이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겁 많고 이기적인 서로마인들은 동로마 제국을 훈족의 손에 내버려 두었다. 동로마 황제는 오만한 자세로 가혹하고 굴욕적인 화명 조건을 전하는 아틸라에게 자비를 구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때 동로마는 도나우 강 남쪽 유역을 따라 싱기두눔(오늘날의 베오그라드)에서 트라키아 지역 노바이까지의 넓고 중요한 영토를 양도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의 공물인 보조금으로 금 연간 2100파운드로 증액하고, 훈족 포로들의 무조건적인 석방과 로마인 포로들에 대한 조건부 석방이라는 가혹하고 치욕스러운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왕은 한번 무릎을 꿇은 동로마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에게 거듭 모욕을 가했다. 적들로부터 뜯어낸 재물로 자기 총신들의 배를 채워주는 걸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았던 아틸라가 틈만 나면 비잔티움 궁정으로 사절단을 보냈고 온갖 성가신 댓가들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황제가 보낸 사절들의 인품과 지위를 의심하면서 오만하게 따질 때도 있었다. 집정관 직위를 지낸 고위급을 사절로 자신에게 보낸다면 먼 데까지 나가서 영접하겠노라는 제안에 이 야만족의 영웅이 기거하는 본거지까지 찾아간 인물은 명망 높은 막시미누스였다.

 

마침 그의 벗이자 역사가였던 프리스쿠스는 그 위험한 사절단에 자발적으로 동행했다. 그 특사단의 중차대한 임무 가운데 하나는 '아틸라 암살'이었으나 그 계획은 미리 발각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어쨌든 역사가 프리스쿠스 덕분에 아틸라가 머물던 도나우 강변 야만족 왕이 거주하는 마을과 궁정의 모습이 기번에 의해 생생하게 재현될 수 있었고, 프리스쿠스가 직접 관찰했던 풍경을 묘사해 놓은 '왕의 연회'는 1000년 가까이 흐른 뒤에도 수많은 화가들의 화폭 위에서 재탄생했다. 막시미누스의 사절단이 아틸라에게 파견된 때는 서기 448년이었고, 콘스탄티노플에서 아틸라의 궁정까지는 국경지대인 나이수스(지금의 세르비아 니슈)까지 가는 데만도 13일이 걸렸다고 한다.

 

 

"아틸라의 연회". 헝가리의 로망스풍 그림, 탄 모어 작(1870).

 

에드워드 기번은 '동로마 제국의 사절단'이 아틸라의 왕궁을 찾아가 협상을 벌이는 이야기를 무려 13쪽에 걸쳐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그 이야기가 아무리 흥미롭고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훌쩍 건너뛰어야 마땅하다. 그 이야기까지 이 글에 포함시키다 보면 '호노리아 공주 이야기'는 긴 글에 지친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달될 가능성이 더한층 낮아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특이하게도, 그 사절단 속에는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가 될 인물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고, 이탈리아 최초의 야만족 왕이 될 사람의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아틸라 암살 음모'가 발각된 데 따라 치르게 된 곤욕 한 가지는 여기서 소개하고 넘어가야 마땅할 듯하다. 아틸라는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나자 즉각 고압적인 사절 두 명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했고, 황제 앞에 대담하게 나아간 사절은 옥좌 옆에 선 환관(음모를 꾸민 범인)을 꾸짖은 다음 동로마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고명하고 존경받는 어버이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아틸라 대왕도 그에 못지않게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셨으며, 문주크 부왕으로부터 물려받은 권위를 행동으로 지켜 오셨습니다. 그러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께서는 부왕의 명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공물을 바치는 데 동의함으로써 노예의 상태로 전락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노예처럼 뒷전에서 주인을 해하려는 음모를 꾸밈기보다는 운과 위업에서 우위에 있는 자에게 존경의 뜻을 바치는 것이 마땅할 줄 압니다.

  

 

아첨에만 익숙했던 동로마 황제는 이토록 가혹한 말에 경악하고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고 한다. 그토록 나약했던 테오도시우스 2세가 50세를 일기로 재위 43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의 누이 풀케리아가 만장일치로 동로마의 여제(女帝)로 추대되었다. 그녀는 현명하게도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인정해 줄 원로원 의원 마르키아누스를 '공동 통치 황제'로 선택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불리한 입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틸라 왕에게 공물을 바치던 나약하던 동로마 제국은 군인 출신의 마르키아누스 황제 덕분에 다시금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차츰 동로마 제국에서 고개를 돌려 서로마 제국을 넘보기 시작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재위 425∼455년) 치하의 서로마는 황후 플라키디아와 실권자 아이티우스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훈족과의 동맹관계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아이티우스 덕분에 훈족과는 전쟁을 피하고 있었다. 이때 난데없이 등장한 돌출 변수가 있었으니, 그녀는 바로 호노리아 공주였다.

 

발렌티니아누스의 누이(호노리아)는 라벤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녀의 결혼이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었으므로, 아무리 뻔뻔한 신하라도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아우구스타'의 칭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아름다운 호노리아는 열여섯 살이 되자 자신에게 고귀한 사랑의 기쁨을 영원히 빼앗아 버린 성가신 지위를 증오하게 되었다. 호노리아는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불만스럽기만 한 허식으로 가득 찬 생활 속에서 탄식하다가 욕망에 굴복하여 시종장인 에우게니우스의 팔에 자신을 내던졌다. 그녀의 죄와 수치(이것은 오만한 남자의 어리석은 표현이다.)는 임신의 징후가 나타남으로써 곧 탄로났다. 황후 플라키디아는 경솔한 언행으로 황족의 불명예를 만천하에 공개했다. 그녀는 딸을 엄격하고 치욕스러운 감금 상태에 두었다가 콘스탄티노플로 추방했다. 불행한 공주는 테오도시우스의 누이들과 그들이 선택한 시중드는 처녀들하고만 교제하면서 12년 내지 14년의 세월을 보냈다. 호노리아는 그 처녀들과 같은 영광을 바랄 처지도 아니면서 기도와 단식, 철야로 채워진 그들의 열성적인 금욕 생활을 억지로 따라 해야 했다. 길고 희망 없는 금욕 생활에 넌더리가 난 그녀는 기이하고 절망적인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342∼34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 철부지 공주에게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좋을지 당혹스러울 지경이다. 그녀는 아무튼 느닷없이, 뜬금없이, 난데없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아팉라에게 시집을 가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세상에나!

 

 

아틸라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익숙하면서도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그가 파견하는 사절들은 그의 막사와 황제의 궁정 사이를 끊임없이 오갔다. 플라키디아의 딸은 사랑을 갈구해서가 아니라 복수심에서 모든 의무와 선입관을 버리고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언어를 쓸 뿐 아니라 인간 같지도 않은 외모에 혐오스러운 종교와 관습을 지닌 이 야만인의 손에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한 충실한 환관의 도움으로 그녀는 아틸라에게 애정의 증표로 반지를 전해 주고 자신을 비밀 약혼한 적법한 배우자로 요구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러한 점잖지 못한 접근은 냉담하고 경멸스러운 태도로나마 받아들여졌다. 훈족 왕은 아내의 숫자를 계속해서 늘려 왔으나, 애정보다 더 강력한 감정인 탐욕과 야심에 마음이 동했다. 그는 공주 호노리아를 황제의 세습 재산 가운데 정당하고 동등한 몫과 함께 공식적으로 요구한 뒤, 이를 빌미로 갈리아를 침공했다. 그의 선조들인 고대의 선우(Tanjou)들도 똑같이 적대적이고 위압적인 태도로 중국의 공주들을 자주 요구하곤 했다. 아틸라의 요구는 그 못지않게 로마의 존엄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의 사절들에게 온건하지만 단호한 거절의 뜻이 전달되었다. (…) 훈족 왕과의 관계가 발각되자 죄인이 된 공주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탈리아로 쫓겨났다. 그녀는 목숨은 구했지만 이름 모를 남성과 허울뿐인 혼례를 치른 후 영원히 유폐되어, 항제의 딸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겪지 않았을 죄와 불행을 탄식하며 여생을 보내야 했다.(343∼34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서기 451년에 갈리아를 침공한 아틸라는 순식간에 그 지역을 경악에 빠트렸다. 이때 갈리아의 도시들이 겪은 기구한 운명은 수많은 순교자들과 기적들에 대한 전설을 낳았다. 그가 승기를 굳히기 위해 고된 행군 끝에 도달한 오를레앙은 그나마 완강하게 버텼다. 초기 성직자들의 거룩함과 헌신성은 기적을 바랬다. 마침내 기다리던 로마군과 고트군 연합군에 그들을 구원하러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왔다. 훈족 왕은 그들이 진군해 오자 즉시 포위망을 풀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갈리아 심장부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치명적인 결과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센강을 다시 건너 스카타이 기병대가 작전을 펼치기 좋은 평탄한 땅인 샬롱의 평원에서 그들은 적을 기다렸다.

 

샹파뉴 지역으로 불리는 넓은 땅에 펼쳐진 카탈라우눔 평원에서의 전투는 전면전이었다. 훈족의 진영에는 루기아족, 헤룰리족, 튀링기아족, 프랑크족, 부르군트족, 게피다이족, 동고트족이 전투 대형을 펼쳤고, 로마 군과 서고트족 연합군은 알라니족과 합세하여 진영을 짰다. 이 기념비적인 대전투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는 불행하게도 상세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몽고메리가 쓴 『전쟁의 역사』에도 '그 전투에 대해서는 '야만적이고, 집요하며 복잡하고 방대한" 전투였다는 기록 외에는 확실히 알려진 것이 없다.'고 아쉬워 할 정도였다. 기번 또한 그 점을 아쉬워 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끄는 것은 방대한 규모뿐이다. 그러나 카시오도루스는 이 기념비적인 전투에 참전했던 고트족 전사 여러 명과 나눈 깊이 있는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냈다.

 

전투는 격렬했고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측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혈전을 벌였다. 과거에도 당대에도 이와 견줄 만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전사자들의 수가 16만 2000명을 헤아렸고 다른 계산에 따르면 30만 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믿기 힘든 과장이지만 이를 통해 실제의 손실을 대략이나마 가늠할 수 있다. 이 정도 숫자라면 왕들의 광기로 한 시간 만에 한 세대 전체를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한 역사가의 말도 과장이라 할 수 없다.(351∼35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조차도 모를 대혼전 속에 기나긴 밤이 지나갔다. 결과는 로마군의 승리였다. 이때 아틸라는 마차를 둘러쳐 만든 요새 안으로 퇴각했으며, 날이 밝을 때까지도 참호 안에서 꼼짝도 않고 쳐박혀 있었다. 이때 그는 꼼짝없이 생포될 운명이었으나 로마군의 지휘자인 아이티우스가 훗날을 내다보고 혜안을 발휘한 덕분에 간신히 퇴각할 수 있었다. 로마의 지휘관은 훈족이 궤멸된 후에 고트족의 오만과 무력이 공화국에 짐이 될 것을 더 우려했던 것이다. 이 당시의 경과를 몽고메리 장군은 다음과 같이 간략히 요약했다.

 

아에티우스는 여세를 몰아 승리를 확고히 하지 않았는데, 훈족이 멸망하면 서고트족이 너무 강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듬해 아틸라는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그러나 그는 기근과 질병 때문에, 그리고 로마 제국의 동쪽 지원군과 교황 레오 1세의 외교적 수완 때문에 더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453년 그는 새 아내를 얻었는데, 결혼식 초야에 혈관이 터져 사망했다. 훗날 초서Jeoffrey Chaucer(1342∼1400)는 다음과 같이 썼다.

 

보라, 저 대단한 정복자, 아틸라를

그는 대취해 코에서 피를 흘리며

치욕스럽게도 자다가 죽었느니

대장이라면 모름지기 술을 삼가야 하거늘.(242쪽)

 

 - 몽고메리, 『전쟁의 역사』, <6. 로마의 수비와 야만인 이주> 중에서

 

 

몽고메리 장군은 '전쟁의 역사'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지만 결혼식 초야에 코피가 터져 죽은 이 야만인을 비웃은 초서의 멋진 시까지 소개하는 재주를 부릴 줄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역사』 어디에서도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단 한 줄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아틸라 못지 않게 호노리아 공주의 행방이 궁금하다. 그래서 샬롱 전투 이후 아틸라의 행적을 다시금 되짚을 필요를 느낀다. 다시 기번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아틸라의 기백, 병력, 평판은 갈리아 원정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것 하나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듬해 봄, 그는 또다시 호노리아 공주와 그녀의 세습 재산을 요구했으나 다시 한 번 거부당했다. 분개한 연인은 즉시 전투를 개시하여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략하고 야만족 대군이 아퀼레이아를 포위했다.(35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고대 로마 시대의 가장 번성했던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아퀼레이아는 3개월의 포위 공격에도 굳세게 버텨냈지만 마지막으로 시도된 아틸라의 맹공격에 마침내 무너졌고, 이때의 공격으로 아퀼레이아는 후세 사람들이 그 폐허조차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되었다. 이런 무시무시한 응징 후에 아틸라는 진군을 계속해서 알티눔, 콩코르디아, 파두아, 비켄차, 베로나, 베르가모, 밀라노, 파비아 등을 돌무덤이나 잿더미로 바꾸고 지나갔다.

 

아틸라의 포악한 오만무도함은 극에 달하여 그의 말이 밟고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야만스런 파괴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그의 형향으로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새로 탄생시켰으니, 그곳이 바로 베네치아다. 훈족의 칼을 피해 도망친 아퀼레이아, 파두아, 인근 마을의 많은 가족들이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근처 섬으로 숨어들었으니, 그곳의 조수 간만은 아주 약했고, 그 끝에는 백여 개의 섬이 대륙과 얕은 물을 사이에 두고 육지의 긴 단층 몇 개로 파도를 막고 있었다.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를 휩쓸고 지나가자 황제인 발렌티나아누스는 궁정이 있던 라벤나에서 로마로, 난공불락의 요새에서 무방비의 수도로 황급히 퇴각했다. 아틸라의 진군을 방해하기도 벅찬 아이티우스로서도 더 이상 고트족이나 동로마 황제의 구원을 받기 어려운 처지였다. 이때 서로마 황제는 아틸라의 분노를 달래 보고자 특사단을 파견했고, 집정관과 민정 총독뿐 아니라 교황까지도 그 사절단에 합류하기 위해 기꺼이 발벗고 나섰다.

 

레오의 재능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정통 신앙과 교회 규율의 신성한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와 권위를 확립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대' 교황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로마의 사절들은 아틸라의 막사로 안내되었다. 아틸라는 민키우스 강이 천천히 굽이쳐 베나쿠스 호의 포말 속으로 사라지는 지점에 진을 치고 스키차이 기병대의 말발굽으로 카툴루스와 베르길리우스의 농장을 짓밟고 있었다. 야만족 군주는 호의를 보이는 정도를 넘어서 존중하는 태도로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호노리아 공주의 몸값 또는 지참금 명목으로 막대한 액수를 내놓으면 이탈리아에서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그가 쉽게 조약의 체결에 동의하고 서둘러 퇴각한 것은 그의 군대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36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아틸라는 전쟁을 시작할 때나 화평 조약을 맺을 때나 이처럼 집요하게 '호노리아 공주'를 이용했다. 이 국가적인 재난 앞에서 기적적으로 로마를 구출한 교황 레오의 업적은 이 사건이 있던 때로부터 1000년이 더 지난 후에 태어난 천재 화가 라파엘로의 붓끝에서 다시 한번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라파엘로교황 레오와 아틸라 간의 회담성 베드로사도 바울의 호위를 받는 교황 레오 1세가 로마 외각에서 훈족의 왕을 만나는 모습을 묘사한다.(출처 : 위키백과)

 

 

레오의 간곡한 열변과 위엄 있는 풍모, 사제복은 아틸라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영적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 성 베드로와 성 바울의 환영이 아틸라 앞에 나타나 자기들 후계자의 기도를 물리치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으리라고 위협했다는 이야기는 교회사에서 전해 내려오는 가장 고귀한 전설들 중 하나이다. 로마의 안전은 천상의 존재가 중대할 만한 값진 것인지도 모른다. 라파엘로의 화필과 알가르디의 정이 전하는 이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36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 기번의 주석

라파엘로의 그림은 바티칸에 있고 알가르디의 부조상은 성 베드로의 제단들 중 한 곳에 있다.

 

(나의 생각)

바티칸과 베드로 성당에서 나는 무엇을 보았던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는 목이 아프도록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저 그림은 어디에 있었지? 베드로 성당에서는 기나긴 줄의 맨 끝에 서서 기어코 베드로의 '빛나는 맨발'을 만진 것까지만 기억이 난다. 언제 다시 로마를 찾아 '기번의 주석'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까나.

 

 

이제 이 무시무시한 야만족 왕이 호노리아 공주를 생애 마지막으로 울궈 먹은 이야기를 할 차례다. 아틸라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할 때만큼 '호노리아 공주'를 들먹일 좋은 기회도 더 이상 없었다. 기번의 얘기를 들어보자.

 

 

훈족 왕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기에 앞서 만일 자신의 신부 호노리아를 조약에 명기된 기한 안에 그의 사절들에게 인도하지 않으면 더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보복을 가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 동안에 아틸라는 일디코라는 아름다운 처녀를 수많은 아내들의 목록에 새로 올려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두 사람의 혼례는 도나우 강 너머 그의 목조 궁전에서 야만족 풍습에 따라 호화스러운 축제로 치러졌다. 군주는 밤늦게 연회를 마치고 술과 잠에 취해 혼례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그의 시종들은 다음 날 거의 날이 저물 때까지 그가 쾌락을 즐기든지 쉬든지 방해하지 않고 놔두었으나,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길어지자 공포와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 큰 소리로 아틸라를 깨워 보려고 했으나 아무 반응이 없자 마침내 왕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 옆에서 겁에 질린 신부가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밤 사이 절명한 왕의 죽음과 함께 그것이 자신에게 미칠 위험을 한탄하고 있었다. 동맥의 한 곳이 갑자기 터져서 반듯이 누워 있던 아틸라의 콧구멍으로 피가 나오지 못하고 폐와 위로 역류해 들어가는 바람에 질식하고 만 것이다. (…) 그들은 살아서는 영광스러웠고 죽어서도 무적이었으며, 국민들에게는 아버지 같고 적에게는 재앙이었으며 전 세계의 공포였던 영웅을 기리는 장례식 노래를 불렀다. 훈족의 관습에 따라 야만족들은 머리카락을 자르고 얼굴에 보기 흉한 상처를 내어 여자들의 눈물이 아니라 전사들의 피로 용맹스러운 군주의 죽음을 슬퍼했다. 아틸라의 유골은 금, 은, 철로 만든 세 겹의 관에 넣어 훈족의 전리품과 함꼐 한밤중에 비밀리에 매장되었다. 무덤을 팠던 포로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아틸라가 숨을 거둔 그 행운의 밤에 마르키아누스가 꿈에서 아틸라의 활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무시무시한 야만족의 모습이 로마 황제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361∼36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 , <34장>     

 

 

뒤늦게 알고 보니 아틸라와 호노리아 공주에 얽힌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모양이다. 아틸라 역은 안소니 퀸이 맡았고 호노리아 공주 역은 소피아 로렌이 맡은 모양이다. 안소니 퀸이야 워낙에 독특한 외모를 지닌 배우이니만큼 야만족 왕에게도 충분히 어울릴 법하지만, 호노리아 공주 역을 맡은 소피아 로렌이 알맞은 배역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이 철딱서니 없는 공주는 자신의 감정 하나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해 자신의 조국인 서로마 제국을 더욱더 어려운 처지로 내몬 것밖에는 한 일이 없는데, 소피아 로렌이라는 여배우가 그 정도로 철딱서니 없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꾸며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민족의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몹시나 흥미롭다. 『전쟁의 역사』에는 이름조차 발견되지 않은 서로마 제국의 공주가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는 거의 100쪽에 가까운 영역에서 다뤄지는 점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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