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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에드워드 기번 지음 / 대광서림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내가 로마 땅을 밟게 된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나의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
- 괴테,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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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10월 29일, 괴테는 그렇게도 동경하던 로마에 첫발을 딛게 되었다. 마침내 이 '세계의 수도'에 도착한 괴테의 로마를 향한 그 동안의 갈망이 얼마나 컸으면 이 날에 대한 감격을 제사(題詞)와 같이 표현하였을까?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는 괴테가 로마에 도착한 날보다 10년 앞선 1776년 2월에 첫째권이 발매되었다고 한다. 영국의 명문 가문에서 출생한 기번이 갑자기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사건 때문에 재학중이던 옥스퍼드 대학에서 추방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유럽의 여러 도시를 순방하는 여행을 떠난 일은 이 책이 탄생한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기번이 로마의 여러 유적지를 찾아 소요하던 어느날 해질 무렵에 불현듯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관한 것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스쳐갔으며, 사적(史跡)에 감도는 고대 로마의 장엄성에 감동된 바, 그 때에 받은 강렬한 인상에 대하여 잊을 수 없는 날짜를 기번은 자기의 회상록에 극명하게 써놓았다고 한다. 그것은 괴테가 로마를 밟기 정확히 22년 하고도 14일 전이었던 1764년 10월 15일이었다.
불후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책의 원저서는 1776년∼1788년에 전6권으로 간행된 방대한 분량의 역사서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간행된 책은 여태껏 영문 원저서에 기초한 제대로 된 완역판이 없다고 한다. 위의 책도 일본어판을 우리말로 옮긴 대광서림의《로마제국쇠망사》(전11권) 가운데 전체를 모두 읽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 대강의 흐름만을 발췌 요약한 1권 분량의 다이제스트판에 불과하다.
어쨌든 이 책은 세계의 역사를 움직였던 많은 인물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독자로서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과 인도 수상 자와하르랄 네루,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등이 손꼽힌다고 한다.
기번의 이 책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왔던 이유가 그의 방대한 역사적 지식에만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애초부터 자기의 저서에 철학성을 부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며, 그래서 그는 철학적 고찰을 듬뿍 담는다 해도 역시 지루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연대기를 독자들로 하여금 참말로 매력을 느끼게 하려고 고심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몇 번이나 다시 쓴 끝에 사람들을 단숨에 매료시킬만큼 유려하고도 장엄한 문체를 찾아냈으며, 이 책은 첫째권이 발매된 즉시 희세의 명저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출간 당시부터 이 책은 교양을 쌓는 증거로서 또는 교양에 대한 동경심으로부터 '각 가정의 식탁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주부들의) 화장대에까지도 놓여졌다'고 한다.
기번의『로마제국쇠망사』는 로마 역사에서도 가장 위대했던 5현제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하여 트라야누스(재위 98∼117) 황제 시대에서 시작하여 서로마제국의 멸망, 유스트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의 동로마제국 건국, 샤를마뉴(재위 768∼814)에 의한 신성로마제국 건국, 투르크의 침입에 의한 비잔틴제국의 멸망까지 약 1,3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의 역사를 단정하고도 고전적인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그리스도교의 확립,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슬람의 침략, 십자군 원정 등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는 동안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어난 온갖 흥미진진한 사건을 다루므로서 고대와 근세를 이어주는 교량 구실을 하기도 한다.
수많은 황제들과 정치가들과 군인들의 탐욕과 악덕, 그들을 둘러싼 세력들이 부추기는 온갖 다양한 음모들과 얄팍한 꾀들을 기번의 붓끝을 통해 접하다 보면, 마치 광활한 중국 대륙을 무대로 펼쳐지는 영웅호걸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담은 삼국지와 별반 다를바 없다는 생각도 여러번 스쳐간다. 기번의 책은 말하자면 서양판 삼국지와도 비슷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축약본이라는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라도 삼국지에서 느낄 수 있는 만화처럼 생생히 떠오르는 전쟁 장면들과 동양적인 친근감이 느껴지는 싸움터에서의 재미난 구경거리들을 기대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이 책을 읽는 의의는 무엇보다도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로마사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접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대개의 경우,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서 배웠던 틀에 박힌 교과서적 문체로서 접한 세계사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한 위대한 역사가의 숨결과 필체를 통해 새롭고도 풍성하게 로마의 역사, 곧 한 때의 세계의 역사를 만나게 되는 즐거움까지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계몽주의적 서양 역사가의 세계사 서술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로마사를 일독한다는 것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관을 얻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고 본다. 특히 이 책이 로마 제국 내의 기독교에 대해 편향되지 않은 역사가의 시각을 굳건히 유지한 채 엄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점은 로마인들의 내면 깊숙히 자리잡은 다신교적 전통, 그리고 기독교의 정통과 이단에 대한 경계 자체가 얼마만큼 많은 굴곡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는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로마제국쇠망사》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역시 제도(帝都)인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이다. 1,000년의 세월에 걸쳐 수많은 만족들의 침공으로부터 동방의 황성을 지켜온 이 철옹성도 술탄 메흐멧의 필사적인 열원(熱願)과 작전 앞에 마침내 무너지고 만다. 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장면에서의 기번의 현장감 넘치는 서술은 '영화의 덧없음'에 대한 깊은 신음소리가 들려올만큼 생생하다. 그러나 기번의 미덕은 이 가슴 아픈 애절한 감상으로부터 곧장 거침없이 높다란 비상으로 우리를 이끄는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이다. 비록 로마의 입장에서보면 정복자에 대한 칭송이라는 아이러니를 포함하는 것이긴 하지만, 굳은 인내를 통해 온갖 곤란함에 대한 자포자기적 경거망동을 억누르는 용기, 그리고 마침내 다다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에 대한 찬미와 감탄은 감동적이면서도 아름답다.
「뜻을 세우라. 그러면 전 우주가 협력한다」
신이여, 이 성시(城市)를 저에게 주옵소서-
로마제국의 긴 역사를 통해 등장했다가 사라진 온갖 인간 존재의 어리석음과 탐욕과 광기들도 기번의 책을 덮고 나면 한낮 일장춘몽처럼 어느새 역사 속으로 되묻히고 만다. 그렇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인간의 존재 이유와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영광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기번의 심오한 이해를 살펴보는 일은 이 책을 읽는 가장 중요한 의의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사실,《로마제국쇠망사》에 대한 이 서평글을 쓰기 전만 하더라도 '로마'에 관한 나의 전반적인 머릿속의 이미지는 오래된 명화인「벤허」와「로마의 휴일」을 비롯해서 비교적 근년에 만들어진「글레디에이터」라는 영화 등에 힘입은 바가 매우 컸었기 때문에, '로마'를 떠올리면서도 그 역사적 무대위에 실존했던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깊은 감정적 교류들은 거의 배제되어 있었던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로마를 동경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그 곳을 밟아봤던 수많은 세계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4년 전에 오래도록 희망했던 로마의 땅을 직접 찾아가 밟고 섰던 감회는 남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만큼 감동적인 느낌으로 남아있다. 내가 가족들과 함께 로마에 갔을 때 우리 일행의 여행 안내를 맡았던 한국인 유학생의 말에 따르면, 로마의 한 해 관광객 수는 약 2,000만명에 이르며, 한 여름 바캉스 시즌에는 로마 시내에 로마시민 보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관광객들의 숫자가 더 많다고도 했다. 로마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 국가의 수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던 말이었다.
"어제 처음 로마에 도착한 사람도 하루만 지나면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에 살고 있었던 듯한 얼굴로 시내를 돌아다닌다. 그들을 맞는 로마 사람들도 그들을 이방인으로 보지 않는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에도 고대가 그림자를 떨구고는 있지만, 고대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다릅니다."
- 시오노 나나미, 황금빛 로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