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인류 역사상 다시는 반복되기 어려우리만큼 영광스럽고 찬란하던 나날들을 뒤로 하고 마침내 오욕과 치욕으로 점철된 굴욕스런 날들을 견디다가 끝끝내 두 동강으로 영구히 갈라선 때가 395년이었다. 강력했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나약한 두 아들이 제국을 동과 서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하면서 두 제국은 어느 하나 제 앞가림조차 버거워 하면서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로부터 대략 80년쯤 지난 뒤 나약했던 서로마 제국이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거기서 다시 50년쯤 더 흐르고 나면 지리멸렬하던 동로마 제국에서 일순 카리스마 넘치는 걸출한 황제가 나타나 '로마의 옛 영광'을 되찾고자 강렬한 열망을 드러낸다. 그 황제의 이름은 유스티니아누스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모자이크(재위 527~565) (출처 : 위키백과)

 

이 황제가 무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농사꾼 출신의 삼촌 유스티누스 황제로부터 어떻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받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할 겨를은 없다. 어쨌든 그는 45세에 합법적인 황제로 승인 받았고, 로마 제국을 38년 7개월 13일간 통치했다. 이 정열적인 황제가 기나긴 치세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벌였고,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을 치렀는지는 벨리사리우스라는 걸출한 장군의 비서가 자세한 기록을 남긴 덕분에 후세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었다. 유창한 말재주로 원로원 의원과 콘스탄티노플의 장관까지 지낸 이 비서의 이름은 역사가 프로코피우스였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벨리사리우스 장군이 치렀던 페르시아, 반달족, 고트족과 벌인 전쟁을 여덟 권의 책으로 기록해 놓았는데, 이 탁월한 장군의 빛나는 업적들이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영광을 흐리게 만드는 바람에 또다른 책을 써야 할 정도였다.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의 업적을 돋보이게 하려고 『건축사』를 썼는데, 거기서 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테미스토클레스와 키루스의 미숙함을 능가하는 입법자요 정복자라고 찬양했다. 그 책을 황제에게 바쳤으면서도 자신이 기대했던 바를 얻지 못한 프로코피우스는 황제에게 은밀한 복수를 하게 되는데, 그 책에서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추악하고 비열한 폭군으로 돌변하고, 황제와 그 배우자인 테오도라는 인류의 파멸을 위해 인간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두 마리 악마로 표현된다.(국내에서는 프로코피우스의 대표작인 『전쟁사』와 『건축사』는 번역되지 못했지만 악명높은 그의 독설들이 가득 찬 『비사』는 번역되어 나와 있다. ☞ 프로코피우스의 비잔틴제국 비사)

 

이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 동로마 최고의 장군이었던 벨리사리우스와 그의 비서이자 역사가였던 프로코피우스까지 조금씩이나마 소개했으니, 본격적으로 벨리사리우스 장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차례다. 이 대목에서 일부 사람들은 그 유명한 테오도라 황후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왜 건너뛰느냐고 항의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놓자면 만화책 1권의 분량이 추가로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국내에서도 그녀를 소재로 엮은 책이 이미 나와 있다! (☞ 테오도라 - 천민에서 동로마의 황후가 된) 어쨌든 그녀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의 아내가 되기 전까지의 짧은 스토리만 읽어 보더라도 그녀는 왠지 모르게 나중에 동로마 제국을 손아귀에 움켜 잡고 자신의 성미가 이끄는 대로 마음껏 쥐락펴락 농락했을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세 딸은 나이가 듦에 따라 미모가 출중해졌고, 비잔티움 제국인들의 사적인 자리나 공적인 자리에서 즐거움을 주도록 계속해서 헌신하게 되었다. (…) 테오도라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플루트를 연주하지 못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기술은 오로지 무언극이었다. 테오도라는 익살꾼이나 광대의 흉내를 내는 데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테오도라가 익살스럽게 두 볼을 크게 부풀리고 웃기는 목소리로 투덜거리다가 한 방 얻어맞는 시늉을 하면 콘스탄티노플의 극장에 웃음소리와 박수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하지만 테오도라가 받은 찬사의 진정한 대상이자 더욱 강렬한 기쁨의 원천이 되었던 것은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이었다. 테오도라는 섬세하고 균형 잡힌 외모를 갖고 있었다. 다소 창백해 보이기도 하는 얼굴빛은 자연스러운 색감을 띠고 있었고, 그 생기 넘치는 두 눈동자는 숨김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지만 우아한 몸집에서 풍겨 나오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몸짓은 품위를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이나 그녀를 추종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녀의 비할 데 없는 뛰어난 외모를 시나 그림으로 제대로 그려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빼어난 자태는 대중의 눈에 노출되고 음탕한 욕망에 팔려 나갔다는 점에서 그 품위가 저하되었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운 용모는 돈에 좌우되어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온갖 직종과 직급의 사람들에게 팔려나갔다. 운 좋게 하룻밤의 즐거움을 약속받았다 하더라도 더 강하거나 더 부유한 자가 나타나면 가차 없이 테오도라의 침대에서 쫓겨나야 했다. 테오도라가 거리를 거닐면, 추문을 피하고자 하는 이나 유혹을 받지 않으려 하는 이들은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려야 했다. 세태를 비꼬는 풍자적인 역사가는 얼굴도 붉히지 않고 『비사』에서 테오도라가 극장에서 부끄럼도 없이 나체를 드러냈던 일에 대해 노골적으로 묘사헀다. 관능적인 쾌락을 느끼는 일에 체력을 모두 소진한 후에 테오도라는 불쾌한 얼굴로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투덜거렸다고 한다. 한동안 도시인들의 경멸과 기쁨으로 권세를 떨치던 테오도라는 티르 출신의 에케볼루스를 따라 살게 되었는데, 그는 아프리카의 펜타폴리스를 다스리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결합은 허술하고 일시적인 것이었다. 에케볼루스는 곧 돈이 많이 들고 정절을 지키지 못하는 첩을 버렸고, 테오도라는 엘렉산드리아에서 극심한 곤궁에 빠져 지냈다. 마침내 테오도라는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게 되었으며, 이 때 들른 동로마 제국의 모든 도시는 키프로스 섬의 이 아름다운 여인을 마음껏 즐기고 흠모한다. 테오도라의 아름다움은 베누스 여신의 혈통을 잇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테오도라는 성교를 애매하게 이끌고 정말 귀찮지만 필요한 피임 조치를 잘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에 처하는 일은 없었다.(48∼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Mosaic of Theodora - Basilica of San Vitale (built A.D. 547), Italy.(출처:위키백과)

 

테오도라가 단 한 번 어머니가 되어 낳은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성장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에서야 아들에게 황후의 아들임을 알렸다고 한다. 세상 물정 모르던 이 젊은이는 희망에 부풀어 서둘러 콘스탄티노플의 궁으로 가서 그의 어머니를 알현했다. 하지만 그 젊은이의 모습은 그 이후로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한다. 테오도라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감추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도 앗아 갔다는 비난을 들었다. 그녀가 유스니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가 된 스토리를 짧게나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장차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될 것임을 깨달은 테오도라는 파플라고니아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서는 노련한 배우답게 얌전하고 품위 있는 여성으로 가장하고 지냈다. 기특하게도 양모를 자아 털실을 만드는 노동을 통해 곤궁한 생활을 해결하고, 나중에 거대한 사원으로 변모하게 될 작은 집에서 혼자서 지내며 정절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우연인지 아니면 책략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테오도라의 아룸다움은 유스티니아누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미 유스티니아누스는 숙부의 이름을 빌려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아마도 테오도라는 이전에 가장 비천한 남자들에게도 마구 뿌려 댔던 그녀의 타고난 매력의 가치를 한껏 올리는 방법을 용케도 찾아냈던 모양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아주 신중하게 몸을 사리는 것으로 남자를 자극하고, 마지막에는 관능적인 매력으로 연인의 욕망을 자극했를 것이다. 그래서 지극한 신앙심 또는 원래 타고난 성품 탓으로 오랜 철야 기도와 절제된 식사에만 익숙해 있던 젊은이를 흥분시켰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첫 번째 무아지경이 진정되고 난 후에도 테오도라는 뛰어난 분별력과 침착함으로 여전히 그의 마음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다. 유스티니아수느는 기꺼이 사랑하는 여인을 부유하게 해 주고 신분을 높여 주었다. 동로마 제국의 온갖 보물을 테오도라의 발치에 쏟아 부었다. 결국 유스티누스의 조카는 아마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는지, 이 내연의 처에게 신성하고도 적법적인 아내의 신분을 부여할 결심을 굳혔다.(50∼5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예전에는 창녀였던 여인이 이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에서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움켜 쥔 여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음은 쉽게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녀가 그런 비난 때문이었든지 자신의 타고난 성격 때문이었든지에 관계없이 그녀는 황제와 함께 제국의 공동 통치권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고, 그 과정에서 극도의 잔인함을 드러낸 악행들도 수없이 저질렀다.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타고난 매력과 후천적으로 익힌 기교를 통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사랑을 지속적으로 누린 끝에 제국을 다스린지 22년 되던 해에 암으로 시들고 만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 때문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몹시도 애통해 했다고 한다. 일국의 황제라면 얼마든지 동로마 제국에서도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귀한 처녀를 골라 보란 듯이 배우자로 맞아들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는 극장에서 일하던 창녀였던 아내를 그토록 애달파했던 것이다. 테오도라 얘기는 이만 하고 다시 벨리사리우스에게로 돌아가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했을 때는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고도 50년쯤 지난 뒤였다. 이때 고트족과 반달족이 세운 왕국은 이미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든든한 기반을 다진 끝에 어느 정도 합법적인 통치권을 누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오른 뒤 처음 5년 동안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정열을 쏟다가 적잖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불안정한 휴전을 얻어냈다. 제국의 동쪽이 안전을 보장받게 되자 황제는 마침내 서로마 제국의 옛 영토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 있었고, 때마침 로마 군대에게 알맞은 동기를 부여해 준 아프리카의 반달족을 토벌하는 임무를 벨리사리우스에게 맡겼다. 그는 트라키아의 농가에서 태어난 미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서기 529∼532년 동안 페르시아 전쟁에서 전공을 쌓은 벨리사리우스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자 콘스탄티노플로 물러나 있었다. 마침내 아프리카 전쟁이 많은 이들의 화제에 오르내리면서 전쟁의 참여 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이 오가는 동안 벨리사리우스가 최고사령관으로 낙점되었다. 이때 그 전쟁을 반대했던 다른 장군들의 시기심이 컸으며, 이런 분위기는 벨리사리우스라는 영웅이 그 아내의 음모에 의해 은밀히 지원받고 있다는 의심을 더욱 키웠다.

 

영민하면서도 아름다운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미움을 샀다가 다시 신임을 얻기를 반복하는 여자였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전차 경기 선수 집안에서 태어났고 가장 창피스러운 치욕을 당해 정절도 더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저명한 남편의 마음을 오랜 기간 단단히 사로잡고 있었다. 안토니나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한 정절의 미덕을 업신여겼다고는 하더라도, 벨리사리우스와 남성적인 우정을 가지고 있었음은 분명했다. 그녀가 군 생활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언제나 단호하게 벨리사리우스이 곁을 지켰기 때문이다.(13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가 얼마만큼의 함선과 얼마만큼 많은 말과 무기, 병기, 군수품들을 준비한 끝에 얼마만큼의 기병대와 보병대를 이끌로 저 머나먼 카르타고를 수복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의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항구를 떠났는지는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겨를도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에드워드 기번의 말대로, 아프리카 원정 준비는 카르타고와 로마 사이에 벌어진 마지막 겨룸이라는 위상에 걸맞은 규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병사 1만 5000명에 뱃사람 2만 명과  5000마리의 말로 꾸려진 600척의 원정대는 15만 이상을 헤아리는 반달족 군대와는 숫적으로 명백한 열세임은 분명했다. 기대반 우려반으로 그들이 동로마의 수도를 떠난 때는 533년 6월이었다.

 

때마침 반달족의 군사력이 사르디니아 정복 작전 때문에 적잖이 분산된 데다가, 벨리사리우스의 탁월한 통솔력 덕분에 동로마 제국의 군대는 엄격한 규율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사람들로부터 기대 이상으로 우호적인 협력을 얻어 냈고, 거기에 용의주도한 작전 전개와 용맹성을 발휘한 덕분에, 동로마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반달족을 무찔러 나갔다. 무어인 같은 적군에만 익숙하던 반달족은 로마군의 규율 잡힌 군사력과 뛰어난 무기를 버텨낼 수가 없었다. 서기 533년 9월에는 카르타고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11월에는 반달족의 우두머리인 겔리메르를 굴복시키고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의 원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지도는 아래와 같다.

 

Map of the Vandalic War(출처:위키백과)

 

 

반달족을 이끌던 겔리메르는 용케 도망쳐 잡히지 않았는데, 얼마 후 에스파냐를 안전한 망명처로 삼아 도피하던 중에 로마군에 발각되었고, 추격당하던 반달족의 왕은 소수의 부하들을 이끌고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파푸아 산으로 숨어들었다. 로마군 추격부대는 가파른 산을 기어오르다가 110명의 병사를 잃은 끝에 '기근과 고통'으로 적을 포획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었다. 포위된 군주와 포위군의 지휘자는 이때 서로 서신까지 주고받으며 항복을 권유했는데, 반달족 왕은 비참한 마음이 너무 커서 더 이상 답장을 쓸 수가 없다면서 이런 글을 보내왔다.

 

"친애하는 파라스여, 간청하오니, 나에게 리라와 스펀지, 그리고 빵 한 덩어리나 좀 보내 주시오."

 

반달족의 사신으로부터 이런 서신을 받은 로마군 추격대장은 이렇게 단순한 부탁을 하게 된 동기를 파악했다. 아프리카의 왕이 빵을 맛본 지가 한참 되었으며, 극심한 피로와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로 인하여 안질을 앓고 있었다는 걸 알아챈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반달족 왕은 자신의 불운한 인생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수금에 맞추어 노래하면서 우울한 시간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선물이 보내지자 포위를 당해 있던 군주도 마침내 자신을 위해서 유익한 판단을 내렸다. 마침내 겔리메르의 고집도 모진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불가결한 필요에 의해 꺾이게 되었던 것이다.

 

벨리사리우스가 보낸 사절은 신변의 안전과 명예로운 대접을 보장해 준다는 약속을 황제의 이름으로 추인해 주었고, 반달족 왕은 산에서 내려왔다. 첫 번째 공식 접견은 카르타고의 교외에서 열렸다. 포로가 된 국왕은 정복자의 이름을 크게 부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극단적인 슬픔이 겔리메르의 정신을 온전치 못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좀 더 지적인 관찰자들에게는 이런 비통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때아닌 환희와 웃름은 헛되고 일시적인 인간의 영화를 진지하게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는 사건이었다.(15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권력을 지닌 자에게는 아부가 따르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자에게는 시기가 따른다는 통속적인 진리는 벨리사리우스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함께 전쟁을 치렀던 로마군의 지휘관들이 개인적으로 사절을 보내어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가 명성이 자자한 것에 자만하여 그 스스로 반달족을 다스리는 왕위에 앉으려는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말들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런 은밀한 말들이 황제의 귀에까지 들어가고 나자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아프리카에 남느냐 아니면 수도로 돌아가느냐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았다. 자신의 결백을 굳게 확신한 벨리아리우스는 현명하게도 제국의 수도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충성심에 감격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단 한 번도 개최되지 않은 성대한 개선식까지 열어줬다. 온갖 볼거리가가 제국의 수도를 누비는 동안 반달족의 귀족들도 전리품의 일부가 되어 로마 시민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겔리메르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자줏빛 예복을 차려입은 그는 왕의 위엄을 지키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았고 한숨도 한 번 쉬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솔로몬의 말을 되뇌면서 자신의 자존심 또는 경건한 신심에 은밀한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겸손한 정복자는 말 네 필이나 코끼리가 끄는 개선 마차에 타는 대신 자신의 용감한 동료들의 맨 앞에 서서 걸어갔다. 신중하고 분별력 있는 벨리사리우스는 일개 신하에게는 참으로 이목을 끄는 명예라고 거절한 듯하다. (…) 화려하고 장엄한 행렬은 대경기장 문을 들어섰고,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원로원 의원들의 환호를 받다가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가 앉아 있는 옥좌 앞에서 멈춰 섰다. 황제와 황후는 포로가 된 왕과 승리한 영웅에게서 충성의 맹세를 듣기 위해 와 있었다. 두 사람은 관례에 따른 예를 올렸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칼 한 번 빼 보지 않은 군주와 극장에서 춤추던 창녀의 발치에 입술을 대었다. (…) 천성적으로 예속과 복종에 길들여져 있었다 하더라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벨리사리우스 역시 은밀히 반발감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156∼15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는 535년 12월에는 어느덧 시칠리아를 침공해 그곳을 정복한다. 이탈리아는 정복자 테오도리크의 딸인 아말라손타가 오랫동안 훌륭하게 통치하다가 어느새 사촌인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이 넘어가 있었다.(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를 통치했던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갑자기 죽고 나자 일부러 테오도리크의 남자 혈족을 찾은 끝에 테오다투스에게 왕권을 나눠 맡겼는데, 도리어 그에게 배반당한 끝에 볼세나 호수에 있는 작은 섬에 투옥된 후 목욕을 하던 중에 질식사했다.) 여왕의 의심스러운 죽음과 왕위를 강탈한 새로운 군주의 죄가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사력이 개입하는 걸 정당화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이때에도 아주 작은 병력만으로 뛰어난 작전을 펼쳐 위풍당당하게 시라쿠사에 당당히 입성할 수 있었다.

 

테오다투스는 동로마 황제와 치욕스러운 화평 조약을 협상하다가(고트 왕국과 이탈리아를 포기하고, 남은 여생을 철학과 농경 연구로 지낼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이었다.) 비참한 절망과 맹목적인 좌절감에서 비롯된 변덕을 부렸고, 벨리사리우스는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위해 시칠리아 섬에 충분한 주둔군을 남긴 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했다. 나폴리를 함락하기까지는 20일 이상의 지리한 포위 작전이 필요했지만 400명의 로마 병사들이 수로를 타고 숨어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간단히 정복되었다. 그 와중에 로마에 숨어 있던 테오다투스는 군주로서의 품성이나 능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바람에 부하들로부터 배척당했고, 비티게스 장군이 국왕으로 옹립되었다. 병사들의 선택을 받은 비티게스는 승승장구하며 다가오는 동로마 군대가 두려워 로마는 주민들의 손에 맡기기로 하고 라벤나로 숨어들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끄는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아시나리아 성문을 통해 로마로 입성했을 때는 536년 12월이었다. 그리하여 60년간 예속당하고 있던 로마 시는 야만족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의 완전한 수복까지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듬해 3월이 되자, 비티게스는 겨울 동안 궁리한 용의주도한 계획을 부지런히 실행에 옮겼다. 무려 15만이나 되는 군사가 왕의 깃발 아래 모여 로마로 진군했다. 테베레 강을 건넌 고트족의 군대는 로마를 포위해서 1년 이상 엄청난 공격을 지속했다. 로마에 있던 열네 개의 성문 가운데 일곱 개가 포위된 상태였다. 부족한 병력과 기근 등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던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끝끝내 고트족들을 격퇴시키는데 성공한다. 포위공격을 당한지 1년 하고도 9일이 지난 때였다. 

 

그 이후 난공불락의 요새인 라벤나를 함락할 때까지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적군 한 명 맞닥뜨리지 않고 난공불락의 도시의 거리를 행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고트족의 처지와 벨리사리우스의 뛰어난 계략 때문이었다. 라벤나에 갇혀서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버티던 고트족은 자신들의 불행한 왕의 약한 모습과 벨리사리우스의 명성과 우세함을 비교한 끝에 비상한 일을 계획했다. 모든 조건이 완벽한 그 자신이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주기만 한다면 기꺼이 라벤나의 요새와 자신들의 재산과 무기를 모두 바치겠다고 제의해 온 것이다. 이 대담하고 영민한 로마군 총사령관은 고트족의 자발적인 항복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그 어둡고 구불구불한 길로 들어섰고,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 줄 것이라 믿었던 적군들로부터 활짝 열린 성문을 제공받았다.

 

라벤나가 점령되자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 마을들도 그 본을 따랐다. 파비아와 베로나에서 무장한 채 독립적으로 지내던 고트족들도 벨리사리우스에게 복종했다. 그러자 다시금 제국의 수도에서 황제로부터 의심스러운 호출이 왔다.

 

벨리사리우스가 두 번째 승리를 거두자 질투심이 다시 항제의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영웅을 불러들였다.

 

고트족과의 나머지 전쟁을 위해서 벨리사리우스가 더 있을 필요는 없다. 인자한 군주는 그의 수고에 상을 내리고 그 지혜를 빌려 자문하고자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수많은 적군에 대항해 동로마 제국을 지킬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그뿐이다.

 

벨리사리우스는 황제가 품은 의혹을 알아차리고 그가 내민 구실을 받아들여 노획품과 기념품을 가지고 라벤나에서 출발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렇게 순종하자 이탈리아의 통치를 그만두고 급작스럽게 소환해 가는 것이 경솔할 뿐만 아니라 사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이탈리아의 정복자는 자신이 당연히 얻어야 할 두 번째 승리의 영예를 불평 한 마디 없이 한숨 한 번 내쉬는 법 없이 포기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칭송은 모든 겉치레나 과시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노예근성이 만연한 시기였지만 온 나라에서는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존경과 칭송이 자자했으니 그것으로 공허하게만 전하는 몇 마디 칭찬을 대신하고도 남음이 있었다.(208∼20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파도 파도 미담만 나온다는 얘기는 바로 벨리사리우스를 두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벨리사리우스의 빛나는 활약사대한 기번의 묘사만 들어봐도 그가 얼마나 칭송 받을 만한 인물인지 금세 감이 잡힐 것이다.

 

벨리사리우스의 군대는 엄격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사과 하나도 나무에서 따내거나 옥수수 밭을 함부로 다니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고상하고 건전했다. 군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든지 방종할 수 있었지만 그 누구도 벨리사리우스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포로가 된 고트족이나 반달족의 절세 미인들이 벨리사리우스 앞에서 섰지만 그는 그 매력을 물리치고 안토니나의 남편으로서 단 한 번도 부부간의 정절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그의 공훈을 기록한 역사가와 옆에서 지켜본 이들은 전쟁의 위험이 닥친 와중에도 벨리사리우스는 경솔함 없이 용감했고, 두려움 없이 신중했으며, 순간 순간의 상황에 따라 완급을 조절해 가며 대처했다고 전한다. 가장 비참한 지경에 빠졌을 때도 희망적인 생각을 하거나 실제로 희망을 찾아내어 활기를 잃지 않은 반면 가장 운이 좋은 순간에도 신중하고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미덕으로 인해 벨리사리우스는 과거의 군사 전략의 귀재들과 어때를 나란히 하거나 심지어 더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 육상과 해상, 그 어디에서도 그의 군대는 승리했다. 그는 아프리카, 이탈리아, 그리고 인접한 섬들을 굴복시켰다. 가이세리크와 테오도리크의 후계자들을 포로로 끌고 왔고, 콘스탄티노플에 적들의 전리품을 가득 쌓아 놓았으며, 6년 사이에 서로마 제국의 속주들의 절반을 되찾았다. 명성과 높은 덕, 부와 권력으로 인해 그는 제국에서 상대를 찾을 수 없는 제일가는 인물이 되었다. 질투심 어린 목소리만이 그가 중요한 인사로 대접받는 것이 위험하다고 과장하여 말했다. 황제가 자신이 벨리사리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여 등용하였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정도로 만족했다면 참으로 좋았을 일이었다.(21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즉위하던 시점(붉은색)과 재위 기간 중에 확장된(오렌지색) 영토의 비교.

확장된 영토의 대부분은 벨리사리우스의 용맹 덕분이었다.(출처 : 위키백과)

 

벨리사리우스의 나무랄 데 없는 명성이나 미덕도 일부나마 훼손되고 말았으니 그 아내의 잔인함과 탐욕 때문이었다고 역사가는 전한다. 안토니나는 출생이 비천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극장에서 일하는 창녀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돈은 많이 벌었지만 비천했던 전차 기수였다고 한다. 가정 배경이 이렇게 다채로운 까닭에 안토니나는 황후 테오도라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했다. 행실이 나쁘고 야망이 컸던 두 여인은 비슷한 쾌락을 즐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성적 부도덕에서 나온 질투심으로 갈라섰다가 결국에는 공통의 죄의식을 가지고 화해했다. 안토니나는 벨리사리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남편과 많은 연인을 거느리고 있었고, 전남편 소생의 아들까지 있었다. 이제부터는 기번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안토니나가 트라키아 젊은이와 수치스러운 애정 행각에 정신없이 빠져 지내게 된 것은 그녀가 나이 들어 아름다움이 시들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에우노미우스를 추종하는 이단 신앙을 갖고 자랐다. 아프리카 원정은 첫 번째로 승선한 병사에 대한 세례와 그 상서로운 이름으로 인해 신성시되었고, 이 개종자는 자신의 영적 부모, 즉 벨리사리우스와 안토니나의 가족이 되었다. 이들이 아프리카 해안에 닿기 전에 이 성스러운 친족은 호색적인 애정의 대상으로 타락하였다. 곧 안토니나는 정숙함과 신중함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게 되어,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해 모르는 이는 로마의 최고 사령관 혼자뿐이었다. 카르타고에 머무는 동안 최고 사령관은 두 연인이 지하실에서 단둘이 거의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분노가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안토니나가 말했다. "이 젊은이의 도움으로 우리의 소중한 재산을 유스티니아누스 모르게 숨기고 있었어요." 젊은이는 옷을 다시 입었고, 신앙심 깊은 남편은 자신의 지각기관을 통해 직접 얻은 증거를 믿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기만한 벨리사리우스는 시라쿠사에서 매사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마케도니아라는 여자의 정보에 의해 비로소 현실을 깨달았다. 이 시녀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고 한 다음에 안토니나의 간통 장면을 종종 목격했던 두 명의 시종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테오도시우스는 아시아로 재빨리 도망가 화가 난 남편의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벨리사리우스는 근위대 중 한 명에게 테오도시우스의 살해를 명령했던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눈물과 교묘한 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곤 하는 우리의 영웅은 아내의 무죄를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의와 판단을 흐리게 하여 아내의 정절을 의심하고 비난하게 만든 경솔한 두 친구를 저버리게 되었다. 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여자의 복수는 앙심이 깊고 유혈이 낭자한 것이었다. 불행한 마케도니아는 두 명의 증인과 함께 안토니나의 잔인한 하인에 의해 사로잡혀 혀를 잘리고 온몸이 토막난 채 시라쿠사의 바다에 버러졌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가 "상대가 되었던 그 소년보다 간통한 여인을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경솔하지만 현명하기 짝이 없는 충고를 한 것을 안토니나는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후 그가 절망에 빠져 벨리사리우스의 뜻을 거스르자 안토니나는 잔인한 충고를 하여 그의 처형을 서두르게 했다.(212∼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전쟁터에서도 대담한 애정 행각을 저질렀던 안토니나였으니 전쟁이 끝난 후 콘스탄티노플에 돌아온 후에도 사정은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안토니나의 열정은 전혀 약해지지 않고 더욱 격렬해져 갔다. 그러나 두려움과 신앙심, 그리고 어쩌면 권태로움까지 더해졌던 테오도시우스는 좀 더 신중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퍼진 떠들썩한 추문을 두려워했고, 벨리사리우스의 아내의 무분별한 애정 공세를 무서워하여 그녀의 품을 피해 에페수스로 숨어들어 머리를 깎고 수도자의 생활이라는 피난처를 찾았다. 이 새로운 아리아드네의 절망은 남편의 죽음으로도 설명되지 않을 정도였다. 안토니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면서 온 궁전을 울음소리로 가득 채웠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다. 가장 사랑스럽고 믿음직하며 근면한 친구를 잃은 것이다!" 하지만 안토니나의 간절한 요청에다가 벨리사리우스의 기도까지 더해도 에페수스에서 독거하고 있는 성스러운 수도사를 끌어내기는 역부족이었다. 테오도시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온 것은 총사령관이 페르시아 전쟁을 위해 출정한 후였다. 자신도 페르시아로 떠나게 되기 전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 안토니나는 사랑과 쾌락을 정신없이 탐닉했다.(2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안토니나의 애정 행각에 걸림돌이 되는 사람은 남편뿐만 아니라 전 남편 소생의 아들인 포티우스도 있었다. 안토니나는 자신의 아들을 일찌감치 추방해 버렸다. 티그리스 강 너머에 있는 진지에서 어머니의 은밀한 박해를 받았던 포티우스는 육친의 망신스러운 짓거리에 화가 나서 이번에는 자신이 가족이라는 감상을 치워 버리고 벨리사리우스에게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의무를 모두 저버린 여자의 비열함을 고해 바쳤다.

 

로마의 최고 사령관은 놀라면서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아마도 이전에 쉽게 속아 넘어간 것이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는 안토니나의 아들의 무릎을 끌어안고 출생의 정보다 의무를 기억하도록 서약시키고, 제단에 서서 서로를 지켜 주고 복수해 주자는 신성한 맹세를 했다. 벨리사리우스가 페르시아 국경에서 돌아와 안토니나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아내의 신체를 감금하고 목숨을 위협했다. 포티우스는 정말 어머니를 처벌하려고 마음먹고 절대로 용서해 주지 않으려 했다. 그는 에페수스로 직접 가서 충직한 환관에게서 안토니나의 죄악에 대한 고백을 강요해 얻어 낸 다음, 성 요한 교회에서 테오도시우스의 신병과 재산을 압류했다. 그리고 이 포로를 킬리키아의 외딴 숲에 숨겨 두고 처형 기회를 기다렸다. 사법 제도를 위반하는 이런 대담한 불법 행위는 벌을 받지 않고 무사히 넘어갈 수 없었다. 안토니나가 항의를 제기하자 황후가 지지해 주었던 것이다. 황후는 최근에 어떤 총독을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일과 교황의 추방과 암살의 공을 세운 일로 안토니나를 아끼고 있었던 것이다. 전투를 마친 벨리사리우스는 황실의 소환을 받았는데 평소와 마찬가지로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그는 모반을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명예에 반하는 명령을 받는다 해도 벨리사리우스의 복종은 진심으로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령에 따라 아내를 포옹하게 되었을 때, 황후 앞에서 이 자애로운 남편은 아내를 용서하고 또 용서받고 싶어졌다. 테오도라의 너그러움은 친구를 위해 더 소중한 호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황후가 말했다.

 

나의 사랑하는 귀족 부인에게 줄 더없이 귀중한 진주를 찾아 놓았다. 지금껏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던 보물이다. 하지만 이 보물을 보고 소유하는 일은 오로지 내 친구만이 할 수 있다.

 

호기심과 조바심으로 가득 차 기다리는 안토니나에게 갑자기 침실로 통하는 문이 활짝 열리면서 그녀의 연인이 나타났다. 부지런한 환관들이 은밀하게 가두어 놓았던 그를 찾아낸 것이다. 그녀의 놀라움은 감사와 기쁨의 탄사로 터져 나왔다. 안토니나는 테오도라를 자신의 여왕이라 부르고 은인이며 구세주라 불렀다. 에페수스의 수사는 궁정에서 사치스럽게 지내면서 야망을 키워 갔다. 하지만 약속받은 대로 로마 군대의 지휘관이 되지는 못하고 이 호색적인 만남에서 생긴 최초의 과로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214∼21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졸지에 연인을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었던 안토니나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아들을 괴롭히는 일에서 위안을 찾았다. 과연 엽기적인 그녀였다. 이 젊은이는 재판도 없이 벌을 받았다. 하지만 지조가 굳은 포티우스는 채찍질과 고문의 심한 고통을 견뎌내며 벨리사리우스에게 했던 맹세를 어기지 않았다. 아무 소용 없는 학대가 끝난 뒤 안토니나의 아들은 어머니가 황후와 즐겁게 지내는 동안 그녀의 비밀 지하 감옥에 갇혀 밤낮의 구분도 못하고 지내게 되었다.

 

포티우스는 두 번 탈옥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유서 깊은 성소인 성 마리아 성당, 성 소피아 성당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던 압제자들은 동정심을 모르는 것만큼이나 종교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성직자들과 민중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서도 포티우스를 두 번 다 제단에서 끌어내 토굴 감옥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세 번째 탈옥은 성공했다. 3년이 지났을 때, 예언자 자카리아 또는 죽음을 각오한 어떤 친구가 도망칠 방법을 일러 주었던 것이다. 포티우스는 황후의 친위대와 스파이를 속여서 예루살렘의 성묘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수사가 되었다. 수도원장이 된포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이집트의 교회들을 정화하고 통제하는 일에 힘썼다.(21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관한 기나긴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되는 스토리가 아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의 45쪽에서부터 자신의 이름을 드러낸 이 불세출의 영웅은 여기(216쪽)에서 무려 100쪽 이상을 더 읽는 동안에도 계속된다.(그의 죽음을 자세히 묘사한 대목은 318쪽에 가서야 만날 수 있다!) 그는 아프리카의 반란, 토틸라에 의한 고트족 왕국의 부활, 로마의 함락과 탈환 등에서 매번 중요한 역할을 떠맡아 로마 제국과 황제를 위해 온갖 충성을 다 바쳤다. 무수한 역경과 힘겨운 전투를 다 치르고 죽을 날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마침내 그에게 마지막 역경이 찾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가 병에 걸렸을 때 그가 죽었다는 풍문이 돌았고, 벨리사리우스는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에 대비하여 일개 병사나 시민으로서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했다가 그만 곤경에 빠지고 만다. 이때 벨리사리우스는 자신의 인격과 아내 덕에 살아났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는 남편을 더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반려자인 그를 완전히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벨리사리우스에게 퇴락하는 이탈리아의 상태를 혈혈단신으로 찾아가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임무가 맡겨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몸을 지킬 만한 군사도 없이 귀환하자 동부에는 냉담한 명령이 하달되어 그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그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 그가 콘스탄티노플의 거리를 초라한 수행원과 함께 지나자 그 비참한 몰골에 모두들 경악하며 동정했고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는 차가운 배은망덕으로 그를 맞이했고 아첨하는 패거리들도 무례한 시선으로 경멸감을 드러냈다.(216∼217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Bélisaire, by François-André Vincent (1776).

Belisarius, blinded, a beggar, is recognised by one of his former soldiers. (출처:위키백과)

 

저녁이 되자 그는 황폐해진 집으로 떨리는 걸음을 옮겼다. 몸이 불편하다는 거짓인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를 변명으로 안토니나가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런 안토니나가 주랑 현관에서 오만한 얼굴로 조용히 서성이는 동안, 벨리사리우스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슬픔과 두려움에 몸부림치면서 로마의 성벽 아래서는 몇 번이고 용감하게 맞섰던 죽음을 기다렸다. 해가 떨어지고도 한참이 지난 시각에 황후로부터 사자가 도착했다. 벨리사리우스는 호기심 반, 걱정반인 심정으로 자신의 운명이 적힌 서한을 열었다.

 

부관은 내 역정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토니나의 충성심을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안토니나의 탄원과 그 높은 덕을 생각해서 부관의 목숨을 살려 주기로 한다. 원래는 국가에 귀속되어야 할 재산도 일부는 지니고 있도록 해 주겠다. 당연히 감사한 마음을 지녀야 하나, 이를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 주기를 바란다.

 

이 영웅이 말도 안 되는 용서의 말을 듣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고 기술된 이야기를 정말로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는 아내 앞에 앞드려 그 구세주의 발에 키스하고 안토니나의 유순한 노예가 디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노라고 엄숙하게 약속했다고 한다. 벨리사리우스이 재산 중에는 12만 파운드가 벌금으로 징수되었다. 그는 궁전의 마사를 관리하는 직위를 받고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들과 국민들은 모두 그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게 되면 곧 자유를 되찾아 위선을 버리고 그의 아내와 테오도라, 그리고 어쩌면 황제까지도 정당한 보복의 희생생으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벨리사리우스의 엄청난 인내심과 충성심은 범인을 뛰어넘는 것이거나 아니면 한참 아래의 수준으로 보인다.(217∼2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4권』

 

 

벨리사리우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더 세세히 전달하느라 글이 너무 길어졌다. 그에 대한 글은 이쯤에서 맺는 게 좋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남아 있다면 그의 이미지다. 이 유명한 인물에 대한 이미지는 라벤나의 산비탈레 성당 벽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그림이다. 이 성당은 벨리사리우스가 지휘했던 동로마 제국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재정복한 것을 기념해 지어졌다고 한다. 무려 1,500년 전에 그려 넣었던 모자이크가 아직도 생생하다.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Flavius Belisarius, 505년 - 565년) (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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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5-24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벨리사리우스가 부족한 동로마의 재정지원으로도 다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음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그의 탁월함으로 무모한 원정이 지속되어 제국의 수명은 짧아지게 된 것은 아니었나도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5-24 11:54   좋아요 1 | URL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된 셈이지요. 유스티니아누스의 기나긴 치세 동안 잦은 해외 원정 만으로도 국가 재정에 상당한 부담을 끼쳤을 테니까요. 더군다나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동안 대규모 토목건축사업(대표적으로 소피아 성당 건설)과 황실의 사치와 낭비까지 더해졌으니 쇠약한 신체 상태로 무리에 무리를 거듭한 셈이나 마찬가지 꼴이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와 같은 탁월한 인물이 없었더라면 동로마 제국 역시 호전적인 이민족들의 침략에 무너져 일찌감치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을 가능성도 많았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