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네 시대

첫 번째 시대는 황금시대였다. 이 시대에는 벌주는 자도 없고

법이 없어도 모두들 스스로 신의를 지키고 정의로운 일을 행했다.

·····
또한 대지는 시키지 않아도, 괭이에 닿거나 보습에

다치지 않고도 저절로 온갖 것을 제공해주었다.

·····
마지막으로 온 것은 단단한 철(鐵)의 시대였다.

더 저급한 금속의 시대가 되자 지체 없이 온갖 불법이 쳐들어왔다.

부끄럼과 진실과 성실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에는 기만과 계략과 음모와 폭력과 저주 받을 탐욕이

들어찼다. 뱃사공은 여태까지 잘 알지 못했던 바람들에게 돛을 맡겼고,

전에는 높은 산 위에 서 있던 용골(龍骨)들은

여태까지 알지 못했던 파도 위에서 오만하게 춤추었다.

그리고 전에는 햇빛과 공기처럼 공유물이었던 지면(地面) 위에

세심한 측량사가 경계선을 길게 그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지면에게 씨앗과 그것이 우리에게 빚지고 있는

식량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대지의 내장 속으로 파들어갔다.

그리하여 대지가 스튁스의 그림자들 근처에다 감춰둔

재보(財寶)를 파내니, 재보야말로 악행들을 부추기는 자극제이다.

그리하여 어느새 유해한 무쇠와 무쇠보다 더 유해한 황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이 두 가지를 두고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져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요란하게 울리는 무기들을 휘둘렀다.

사람들은 약탈을 생업으로 삼았다. 친구는 친구 앞에서,

그리고 장인은 사위 앞에서 안전하지 못했고,

형제들 사이에서도 우애는 드물었다.

남자는 아내가 죽기를, 아내는 남편이 죽기를 바랐다.

무시무시한 계모들은 사람을 창백하게 만드는 독약을 조제했고,

아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수명을 알아보았다.

경건함이 패하여 쓰러져 눕자, 처녀신 아스트라이아가

하늘의 신들 중에 마지막으로 살육의 피에 젖은 대지를 떠났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1권 143∼150행

 

 

[The Statue of Ceres] 1612∼1615, 루벤스, 판 유채, 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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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으로 읽는 변신이야기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오비디우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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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만 위로 들린 얼굴을 주며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대지를 내려다보는데
신은 인간에게만은 위로 들린 얼굴을 주며 별들을 향하여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보라고 명령했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우주와 인간의 탄생>, 제1권  84∼86행

 

 

아마 아직 어떤 동물도 별이 있는 하늘을 주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해는 여전히 의지의 직무를 위해 요구되는 데까지만 미친다. 지각과 지각된 것에 의해 청원되는 것은 완전히 구별되지 않는다. 심지어 좀 더 영리한 동물은 객체들에서 자신과 관계있는 것만을, 즉 자신의 의지에 관련되거나 어쩌면 미래에 관련될 수도 있는 것만을 본다. 마지막 경우의 예를 들면, 고양이는 장소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에 대해 동물들은 둔감하다. 아마 아직 어떤 동물도 별이 있는 하늘을 주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의 개는 우연히 처음으로 해를 바라보았을 때 크게 놀라서 펄쩍 뛰었다. 가장 영리하고 또 훈련을 통해 교육된 동물들에게서 주변에 대한, 관심 없는 이해의 최초의 약한 흔적이 가끔 나타난다. 개들은 이미 사물을 뚫어지게 바라보기까지 한다.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것을 주의 깊게 쳐다보는 개들을 우리는 자주 본다. 원숭이는 마치 주변에 관해 숙고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가끔 주위를 둘러본다. 인간에게서 비로소 동기와 행위 및 표상과 의지가 완전히 명백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이 분리가 의지에 대한 지성의 예속 상태를 즉시 지양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일상인은 사물들에서 그 자신과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어떤 관계를 갖는 것(그에게 관심있는 것)만을 참으로 명백하게 이해한다. 나머지 다른 것에서 그의 지성은 엄청나게 게으르다. 따라서 그 나머지는 배후에 머무르며 완전하고 환한 명백성을 갖고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현상에 대한 철학적 경탄과 예술적 감동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그에게 영원히 이질적인 것으로 남는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상인에게는 모든 것이 저절로 이해되는 것으로 보인다. 지성을 의지와 의지의 직무로부터 완전히 분해하고 분리하는 것은 내가 내 책의 미학 부분에서 상세히 보여주었듯이 천재의 특권이다. 천재는 객관성이다. 사물이 직관 안에서(이 기초적이고 내용이 풍부한 인식에서) 나타날 때 갖는 순수한 객관성과 명백성은 실제로 매 순간 의지가 동일한 사물에서 받아들이는 몫과 반대의 관계에 서 있다. 그리고 의지 없는 인식은 모든 미학적 이해의 조건이며 실로 그 본질이다. 왜 인상적인 화가는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풍경을 그렇게 나쁘게 묘사하는가? 그가 그것을 더 아름답게 보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는 풍경을 더 아름답게 보지 않는가? 그의 지성이 의지로부터 충분히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분리의 정도는 인간들 사이에서 큰 지적 차이를 만든다. 인식은 의지로부터 더 많이 벗어날수록 더 순수하며, 결국 더 객관적이고 정확하기 때문이다. 자라난 땅의 뒷맛을 갖지 않은 열매가 가장 좋은 열매인 것처럼 말이다. 

 

 - 쇼펜하우어,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 <식물생리학>, 145∼1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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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광고 문구인가. 이 책의 띠지에 붙은 저 글은 아마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이방인>의 놀라운 첫 문장 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충격적이다. 카뮈의 <이방인>만 하더라도 너무나 유명한 소설인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저런 '외관'을 지니고 새롭게 번역되어 나타난 책을 어느 누가 쉽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은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책을 미리 사서 읽기도 전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보기'를 듬뿍 제공한,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낯설게 다시 다가온 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이렇듯 매우 어리둥절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방인>이라는 소설 자체가 기묘한 성격을 지녔다 싶어 더욱 흥미롭다.

<이방인>을 둘러싼 '뜨겁게 불타오른' 오역 논쟁을 한동안 두루 살펴본 덕분에, 이정서 님이 번역한 새움판과 김화영 님이 번역한 민음사판의 차이를 어느 정도 미리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새움판 <이방인>'을 둘러싸고 대판 벌어진 '칼날이 번쩍이는 듯한' 격렬한 싸움을 지켜보는 일이 어느새 '소설 이방인'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싸움의 배경에 '어떤 전리품'이 깔려 있든지에 관계없이, 나같은 독자로서는 이미 그 치열한 싸움에 자칫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무슨 화를 입을지도 모르겠다 싶었고, 이러다 무슨 큰 사단이 나지나 않을까 싶어 슬쩍 겁부터 났다.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모두 끝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는 샘을 행해 몇 걸음 내디뎠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아직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85쪽)



나는 아마도 새움판 <이방인>을 미처 읽기도 전에 '이방인 오역 논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어떤 압박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잠시나마 떠올렸을 생각이 아마도 <이방인> 속에 담긴 앞의 인용문과 닮았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가 '홀로' 다시 '아랍인'에게로 다가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방인>이라는 책을 둘러싼 '이글거리는' 논쟁으로부터 나는 '그냥' 돌아서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이란 그리 쉽게 억눌려 있기가 어려운 성질이었던지, 나는 결국 지난주 어느날 퇴근할 무렵에 일부러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겨 이미 눈에 익은 이 책을 집어들고 책값을 계산했고, 결국 <이방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도대체 <이방인>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 왜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지, 나는 무엇보다도 그 실체적 진실이 궁금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단편적인 조각들' 말고 '하나의 덩어리 전체'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이방인』을 집어들자 말자 그 소설은 정말 단숨에 읽혔다. 그 소설을 읽던 날 밤엔 '온갖 부조리'로 가득찬 엄청나게 우울한 '세월호 참사' 소식이 벌써 사흘째 생방송 중일 때였다. 가슴이 먹먹한 안타까운 소식들이 전해질 때마다 연신 훌쩍거리는 아내와 함께 그 참담한 소식을 두 시간 이상씩이나 계속 지켜보는 일이 영 마뜩찮아 TV에서 물러난 나는, 그저 퇴근길에 사 온『이방인』이라도 붙잡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 책을 금새 읽고 나서도 '극심한 우울 모드'는 여전히 지속될 뿐이어서 언제 글 한 줄 쓰고 싶은 생각조차 도무지 들지 않았다. 이런 글은 써서 도대체 뭐하나 싶은 자괴감만 계속 머릿속을 맴돌 뿐.

 

그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햇볕이 내 뺨을 불태웠고,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 특히나 그때처럼 나는 이마가 지근거렸고, 피부 밑에서 모든 정맥이 울려 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85∼86쪽)



방금 인용한 대목은 소설 <이방인>의 '1부'를 장식하는 결정적 장면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책의 역자를 떠올렸다.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한 역자는 아마도 (그가 보기에는 '부조리한' 오역으로 가득찬 김화영 번역본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떤 뜨거움에 내몰려, 한 걸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오역 논란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정말 놀라웠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미 책을 읽기도 전에 얼마간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역자 노트'도 그에 못지않게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새롭게 나온 번역판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카뮈의 소설『이방인』은 그동안 결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역자 노트'에서 예시된 이전의 번역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긍하게 되면 '그런 사정'을 얼마간 이해할 만하다 싶기도 했다. '역자 노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상세히 밝힌 대로 '새로운 번역'에 따라 이 소설을 읽으면 <이방인>은 그렇게 어렵게만 읽히는 소설이 결코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매끄럽게 읽히고, 카뮈가 치밀하게 배치해 놓은 소설 속 문장들이 저마다 절묘한 호응을 주고받는 느낌마저 생생했다.

'새로운 <이방인>'과 '역자 노트'를 다 읽고 나니, 어쩌면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그토록 함축적이고도 절묘하게 그려낸 '부조리'가 '역자노트' 속에 기이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듯한 착각조차 들 정도였다.

 

우리는 마침내 저 멀리 해변 끝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모래 사이로 흐르고 있는 작은 샘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그 아랍인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워 있었는데, 기름때 전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평온하고 거의 만족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왔음에도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81쪽)



기존의 번역이 정말 역자의 주장대로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카뮈 작품에 대한 권위자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려온 김화영 님의 번역이 정말 '<이방인>이라는 걸작 소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일개 독자로서 함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싶다. 그래서 역자가 심혈을 기울인 '작가 노트' 내용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수긍할 수는 있지만, 기존 번역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판을 담은 그의 주장에 대해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번역'에 명쾌한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에는 누구라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역자의 지나치게 확신에 찬 주장들에 대해선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느낌부터 앞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존의 번역'이 '작품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번역'이라는 주장은 누가 뭐래도 너무 심했다 싶다.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번역은 기존의 번역보다 정말 매끄럽고 설득력이 넘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 그저 단순하게만 읽히던 문장들이 하나 하나 긴밀한 연계성을 띄고 되살아나 서로를 이끌고 잡아당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확인시켜주기까지 한다. 물론 수준높은 독자라면 '기존의 번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방인> 속에 담긴 '작품의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역자의 열의에 가득 찬 새로운 번역을 따라가다보면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카뮈의 문학적 천재성을 금새 느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쩌면 느닷없이 낯선 외국의 여행지를 홀로 다녀오고 난 뒤에, 뒤늦게 그 여행지를 안내하는 어느 여행 전문가의 친절한 TV 해설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만큼 역자의 설명은 그동안 이 작품의 해석을 어렵게 만든 여러 대목들을 환하게 밝힌 부분들이 적지 않다 싶고, 그래서 이 책은 기존의 번역 작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번역들과 역자가 새롭게 찾아낸 여러 확신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기존의 번역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그가 내뿜는 입김은 불에 데일 듯 뜨겁다.

 

모든 것이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86쪽)



카뮈의 <이방인>을 아주 오래 전에 '어렵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한데 뒤늦게나마 '새로운 번역'으로 단숨에 읽고 나니 개운한 느낌조차 없지 않다. 이 책이 아무리 '오역 논란'으로 여전히 시끄럽다고 하지만, 일개 독자로서는 그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기존의 번역에 결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점에 얼마쯤 동감하고, 새로운 번역으로 카뮈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인내심이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올리며 소리쳤고, 그로 인해 그의 소매가 아래로 처지면서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났다. "도대체 이 피고가 기소된 것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서입니까, 사람을 죽여서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검사가 다시 일어서더니, 그의 법복을 바로 잡고는 선언했다. 이 두 사실의 범주 사이에 있는 깊고,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지각하지 못하려면 존경하는 변호사님처럼 순진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힘주어 소리쳤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묻었음을 고발합니다." (133쪽)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엄청난 궁지에 내몰린 '새움판 <이방인>의 번역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을 아주 단순하게만 바라본다면, 그는 기존의 번역상의 오역들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죄밖에 없다. 그런데 역자에게는 이미 '번역상의 문제' 말고도 다른 수많은 '나쁜 혐의'가 잔뜩 추가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역자는 어느새 카뮈의 <이방인> 속에 나타난 '부조리'를 얼마쯤 닮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새움 번역판의 역자를 둘러싼 논란'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독특한 감정들이었다.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 '부조리'는 도처에 깔려 있다. <이방인> 속 부조리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조리는 결국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생각이었다.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장되고, 어떻게 예기치 않게 일찍 마무리되든 주인공 뫼르소는 그에 대해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는 크게 동떨어진 사고와 행동을 보여준다. 그게 무에 그리 큰 대수로운 차이란 말인가 하는 식이다.

 

그걸 마치고는 나를 "여보게"라고 부르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사형수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사형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 막고는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더구나 어떤 경우라도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58∼159쪽)



이 짧은 대목 속에서도 '부조리'는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결국 교도소의 간수가 '호출'하는 순간에 삶을 마감하게 되어 있는 사형수를 닮았다.(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천 년이라도 살 듯이 악착스레 삶에 매달린다. 그런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뫼르소가 오히려 사제에게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습조차 내겐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은 <이방인>을 두고 화끈하게 불붙은 '오역 논쟁'을 지켜봐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여러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렸을 법하다. 그 가운데 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본 일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단단하게 뿌리내린 '기성 권력이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였다. 그 단단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힘과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혹은 거기에 돈키호테를 닮은 무모한 용기는 또 얼마나 필요하며, 슬기로운 지혜는 또 얼마만큼 요구되는 것일까.

이번의 오역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찰스 다윈을 잠시 떠올렸었다. 비록 이번 일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례이고 서로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라는 난공불락의 '기성 권위'를 무너뜨린 찰스 다윈의 '위대한 도전'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자연선택 이론'은 '인간의 유래'에 관한 '신의 권위'마저 완전히 박탈하고야 말겠다는, 일찌기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려운 일을 너무나 아름답게 성취해 냈다. 그가 그토록 힘든 일을 그토록 손쉽게(?) 이뤄낸 비결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평생을 바친 철저한 연구.
둘째,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한' 표현.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는 우리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했다. 바로 '태양과 죽음'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딱 어울릴 만한 명언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을 남긴 라로슈푸코를 무척이나 존경하며 그를 자주 인용했던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그 또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헤겔을 상대로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보기엔 헤겔의 철학이 엉터리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당대 철학계의 거두'였던 헤겔을 뛰어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철학에 매진한 끝에 얻어낸 훌륭한 결실들은 결국 훗날에 이르러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쇼펜하우어가 '논쟁'의 대가라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도 쇼펜하우어가 했던 인상적인 말들을 몇 번씩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 철학자만큼 이번 '새움판 이방인 ' 논쟁에 어울릴 만한 적절한 표현들을 두루 언급한 인물도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떠올리고 새삼 찾아봤던 '쇼펜하우어의 글들'은 어쩌면 '새움판 이방인'에 딸린 '역자 노트'처럼 어딘가 본궤에서 너무 벗어난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숨겨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관심있게 읽어보신 분들을 위해서는 이런 사족도 전혀 값어치가 없지는 않을 듯싶어 덧붙여 본다. 아무쪼록 '접힌 부분'까지 펼쳐 읽으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으면 좋겠다.

 

 

접힌 부분 펼치기 ▼

 

 

긍정적인 것을 보라


불평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악으로 몰아가는 음울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저주한다. 이는 통찰과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비열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눈 속의 티끌을 대들보로 과장해 비난하는 것과 같다. 불평하는 자는 맡은 일마다 천국을 지옥으로 바꾸고, 더욱이 비열한 열정으로 모든 것을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반대로 고귀한 심성을 지닌 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려 한다. 일부러 잘못을 눈감아주고 의도는 좋았다고 말해줌으로써 모든 일에 용서할 줄 안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나를 만들어가는 지혜' 中에서

 


 

 

증오와 아첨 


증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첨이다. 증오는 오점을 씻어내려 하나 아첨은 그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원망에서 배울 점을 찾는다. 이는 호의보다 더 충실하다. 강력한 역풍은 맥빠진 순풍보다 낫다. 적의 덕택에 행운을 얻은 사람들도 많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경쟁자를 이기는 지혜' 中에서

 

 


예의는 호의를 얻는 마법약이다 


예의를 지켜라. 그것만으로 호감을 얻는 데 충분하다. 예의는 교양에서 나오며, 모든 사람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묘약이다. 반대로 무례함은 사람들의 경멸과 반감을 산다. 무례함이 자만에서 오면 혐오스럽고, 조악함에서 오면 경멸스러우며, 무지에서 오면 유감스럽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진실을 말할 때는 말을 신중히 골라서 하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때는 신중히 말을 고르고 예의를 잊지 않기 바란다. 똑같은 진실이라도 말하는 방법에 따라 기분좋은 보고도 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되기도 한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시간으로 자기를 길들이라


기회가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계절은 숨어 있던 것을 무르익게 하고 완성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시간의 버팀목은 헤라클레스의 쇠곤봉보다 더 강하다. 신은 채찍이 아닌 시간으로 인간을 길들인다.

'시간과 나는, 또 다른 시간 그리고 또 다른 나와 겨루고 있다'는 위대한 말을 상기하라.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행운을 불러들이는 지혜' 中에서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누가 공격하면 공격을 받은 사람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명예 회복의 절차에 따라 자기 손으로 되찾지 않으면, 그 명예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절차는 아무래도 그 생명, 자유, 재산, 마음의 평정 등에 위험이 닥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남자의 행위가 성실하고 고귀하며, 심성이 순결하고, 두뇌가 대단히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방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사람은 그저 지금까지 이 명예의 법칙을 어긴 일이 없으면 되고, 그 외에는 보잘것없는 인간 쓰레기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자이건, 게으름뱅이, 도박꾼, 빚쟁이라도 무방하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곧 명예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즐기는 자는 대개 앞에서 말한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세네카가, "경멸해도 싼 놈팡이일수록 그 혓바닥이 고약하다"라고 한 것도 적절한 표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이야말로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감정이 상하는 모양이다. 됨됨이가 상반된 사람은 서로 미워하게 마련이며, 볼품없는 자가 뛰어난 사람을 은근히 경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괴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그대와 같이 성품이 뛰어난 자는

      영원히 그들의 눈에 난 가시로다.
      어찌 이들이 그대의 벗이 되랴!

                                                                           《서동시집》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 


이것은 누구나 자기와 동질적인 것만을 이해하고 평가할 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이, 저열한 사람에게는 저열한 일이, 그리고 머리가 명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혼돈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각각 동질적인 것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바로 그것이 그와 가장 동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의 전설적인 인물인 에피카르모스(그리스의 희극 시인)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조금도 놀랄 건 없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제 마음에 들어 의기양양한 것뿐이다.
      그들은 자기가 실로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다.
      개에게는 개가,
      그야말로 제일 아름다운 것 ······. 역시 그렇다, 소에게는 소가,
      노새에게는 노새가, 돼지에게는 돼지가.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그가 믿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완전히 그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면, 므두셀라만큼 오래 살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남하고 이야기할 때 아무리 호의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 쉽지만, 잘못을 바로잡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이치에 닿지 않더라도 제3자인 우리는 개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서투른 연극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세상에 진리나 교훈을 전하려는 사람이 그 임무를 무난하게 마쳤다면 그것은 하나의 요행이며, 오해와 푸대접과 반항, 그리고 학대를 받게 마련이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는 오랜 처세의 가르침은 해야 할 말만 요령 있게 하고 그 해석은 남에게 맡기라는 뜻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하므로, 그 자리를 떠난 뒤에야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격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되며, 그때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잖은 태도로 조용히 말하면, 무례한 말이라도 당장 눈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같은 짓을 곧잘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악기에서는 운지법을 가르치고, 검술에서는 장검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하자. 학생은 열심히 하려고는 하지만 배운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훈련을 거듭하면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하는 동안에 차츰 익숙해진다.

라틴어로 글을 쓰거나 이야기하기 위해 문법 규칙을 배울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교양 없는 자가 관리가 되거나, 신경질이 심한 자가 사교가가 되거나, 대범한 자가 소심하게 되는가 하면, 고귀한 자가 익살꾼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오랜 습관에 의해 얻은 자기 훈련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제에 대항하는 것을 자연은 결코 중지하고 있지 않으며, 가끔 뜻하지 않은 때에는 이 강제를 물리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추상적인 법칙에 의한 모든 행위와 천성에서 비롯되는 행위의 관계는, 마치 형태나 움직임이 서로 상관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시계와 같은 인위적인 제작품과, 형태나 재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된 산 유기체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천적으로 얻은 성격을 선천적인 성격에 비추어 나폴레옹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불완전하다"고 한 말이 정당함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육체적 및 정신적인 모든 일에 타당한 하나의 규범으로서, 이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광물학자들에게 알려진 천연 수정이 인공 모조품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허식을 경계해야 한다. 허식은 언제나 경멸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거짓으로서이며, 거짓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비겁한 것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탄핵선고로서이며, 이것은 자기가 아닌 것, 즉 자기를 더 과장해 돋보이려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특질을 내세워 자랑삼는 것은, 그가 그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건 학식이건, 또는 정신, 기지, 여자에 대한 인기, 재산, 고귀한 신분,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그것 하나를 자랑한다면, 그에게 그 특질이 결여되어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특질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므로, 그는 자신이 가진 특질에 대하여 담담한 심정으로 있을 수 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말굽쇠는 못이 하나 빠져 있다'는 스페인의 속담은 이를 가리킨다.

(중략)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가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가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언젠가는 탄로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한다. "아무도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위장은 곧 자기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이다."(세네카 《관용에 대하여》제1권 제1장)

인간은 자기의 몸무게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탱하고 있지만 다른 물체를 움직이려고 하면 그 무게를 느끼는 것처럼, 자기의 결점이나 부덕은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것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신 모든 사람들은 타인 속에 하나의 거울을 갖고 있어 그 거울 속에 자기의 온갖 부덕과 결함, 무례 및 고약한 성질 등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누구나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같은 짓을 곧잘 한다. 개는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다른 개인 줄 알고 짖어대는 것이다.

남의 결함을 들추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도 된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자기 혼자만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취미와 습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시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처럼 자주 엄격하게 비난하는 일이라면, 자기 스스로도 이를 피하려는 정의감과 긍지와 허영심까지도 충분히 지니게 될 테니 말이다.

관대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서로 눈을 감아 준다"(호라티우스《시론》)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에 들어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가"하고 적절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인간의 눈은 본래 외부의 사물은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은 잘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자기 결점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남이 갖고 있는 결점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것이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 하나의 결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쇼펜하우어,『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항상, 가끔, 대체로

'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그 귀결이 그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다른 근거에서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하나의 귀결에 그 귀결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근거를 설정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오성이 실제로 부족하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와의 결합을 직접 인식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더 빈번한 경우이긴 하지만,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귀결에 어떤 근거를 규정하는 경우, 물론 그 근거는 가능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추리 전체에 첨가하여, 그 해당 귀결은 '항상' 그가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완전한 귀납을 행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전제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항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광범한 개념이며, 그 대신 '가끔'이라든가 또는 '대체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론은 미결정의 것으로 되며, 그러한 결론으로서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상술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추론하는 것은 조급한 탓이 아니면 가능성에 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행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는 가상과 유사하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따른 표상, 경험과 학문의 목적> 中에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내가 스토아학파의 윤리학 정신을 이해한 것에 의하면, 그 근원은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나오고 있다. 이성은 인간의 커다란 특권이며, 간접적으로 계획적인 행동과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 의해 인생과 그 무거운 짐을 현저하게 가볍게 하는 것이지만, 이 이성은 또 직접적으로, 즉 단순한 인식에 의해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고뇌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구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이성으로 무한한 사물이나 상태를 포괄하고 전망하면서도 현존에 의해 아주 잠시 동안, 불안한 인생의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거나 격한 욕구나 도피에서 생기는 큰 불안과 고뇌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장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간은 틀림없이 이러한 고뇌를 초월하고 불사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안티스테네스는 "이성과 목을 맬 밧줄,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플루타르코스, 《스토아학파의 모순에 대하여》, 제14장)고 말했다. 그 의미는 인생에는 실로 많은 괴로운 일과 번거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사상을 정돈하여 이것들을 초월하거나, 인생을 버리는 것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결핍이나 고뇌는 직접 또는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핍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가난함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고통을 가져온다."(에픽테토스, 《단편》, 제25)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

그뿐만 아니라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라는 것이 경험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피할 수 없는 악도 아니고, 도저히 수중에 넣을 수 없는 재물도 아니며,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문제이다. 또 절대적으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절대적으로 피하기 힘든 것을 피할 때만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수중에 넣기 힘든 것을 손에 넣고 상대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을 피할 때도 우리의 마음은 아주 평안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성에 이미 깃들어 있는 악과 그 개성이 단념해야만 하는 재물과는 상관 없이 고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만약 그것을 기르는 기대가 없다면 곧 소멸하고 더 이상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은 오직 우리의 요구와 우리가 얻는 것 사이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둘 다의 양을 감소하는 것으로도 다른 쪽의 양을 증대하는 것으로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본래 우리가 욕망하고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확실히 인식에 존재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더 높은 식견이 생기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시포스는 "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한 경험에 따라 살아야 한다"(《스토바에오스 선집》, 제2권, 제7장, p.134)고 했는데, 그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어떤 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행을 당해 실신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꺽이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사물이 자기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무생물은 우연에 의해, 생물은 반대로 목적이나 악의에 의해, 어떠한 개인의 의지도 매사에 방해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러한 상태를 일반적으로 알기 위해 그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대체로 알고 있어도 하나하나에 관해 자세하게 재인식하지 않아서 이에 놀라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판단력이 부족했거나 어느 한쪽이다.*

* "일반적인 개념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원인이므로"
   (에픽테토스의 《
논문집》
, 제3권 26장)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따른 표상, 경험과 학문의 목적> 中에서



 

겸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을 얻는 이유

'이데아'는 개념의 적절한 대표라고 정의할 수는 있지만, 순수하게 직관적이고 무수한 개체를 대표하면서도, 또한 철저하게 규정된 것이다. 이데아는 개체에 의해서는 결코 인식되지 않고, 모든 의욕과 개성을 넘어서 순수한 인식 주관에까지 올라간 사람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따라서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천재와 많은 경우 천재의 작품에 자극되어 자기의 순수한 인식력이 고양된, 천재적인 정서를 갖게 된 사람만이 가진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약 밑에서만 전달될 수 있다. 즉, 예술 작품으로 재현된 이데아는 사람의 마음을 각자의 지적 가치의 정도에 따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즉 천재의 가장 고귀한 작품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영원히 닫혀진 책으로 머물러야만 하고, 또 폭넓은 심연으로 갈라져 접근할 수 없어서, 마치 왕들의 교제가 서민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정평 있는 걸작의 권위를 인정하여 자기의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남몰래 언제나 그러한 걸작에 유죄 선고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자기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만 서면, 전부터 마음이 끌리지 않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을 굴욕스럽게 한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해, 또 이것들을 창조한 사람들에 대해, 오랫동안 억눌려 온 증오심을 터뜨리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타인의 가치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반대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가치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미 중에서도 겸손이 꼭 필요한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과 유사한 덕 가운데 겸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뛰어난 사람을 찬양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덕을 그 사람에 대한 찬사에 덧붙여서, 타인의 환심을 사고 무가치함에 대한 노여움을 진정하려고 한다. 비열한 질투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겸손이란, 장점이나 공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걸하는 수단으로 취하는 거짓 겸손 외에 무엇이겠는가? 정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정직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예술 작품의 개념과 이데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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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23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번역이 예전보다 나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다만, 처음 번역된 책과 꾸준히 다시 번역되는 책들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앞선 이들 열매를 받아먹으면서
다시금 새로운 번역을 할 수 있기도 해요.

앞선 번역이 없었으면 '새로운 번역'이란 없겠지요.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에 앞서 존경과 고마움을 내비치면서
즐겁게 '새 번역'을 우리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이었으면
오래도록 사랑받는 실마리를 열었으리라 느낍니다.

번역은 '읽어서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옛이야기도 '구술자마다 다 다른 입맛'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주지요.
설화와 신화와 민담에 '정답이 하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답이 하나이길 바란다면
외국말을 배워서 외국책으로 읽어야겠지요.

oren 2014-04-23 11:01   좋아요 1 | URL
이번 새움판 이방인을 둘러싼 논란 덕분에 저도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된 듯해요.

똑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수많은 감상평이 존재하듯이, 외국어로 쓰여진 원작에 대해서도 번역자에 따라 온갖 다양한 번역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텐데, 새움판의 역자가 너무 '정답'에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그렇지만 제 판단으로는, 새움판 <이방인>이 기존에 나온 번역판보다 훨씬 더 잘 읽히는 번역판임은 분명한 듯해요.

애써 번역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외국어를 잘 몰라도 우리말로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독자들은 늘 번역하시는 분들이 고마울 따름이지요. 비록 번역자들마다 '번역의 질'은 다소 다르더라도, 우리말로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 번역하신 분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는 셈이고, 그래서 저는 웬만해서는 '번역의 품질'을 따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더라구요.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할 경우, 부지런한 독자들이라면 따로 비교해가며 읽어도 '번역의 질'은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마립간 2014-04-23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쇼펜하우어를 멋있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 글, 많은 명언 감사합니다.^^ 저도 겸손에 관해서는 부족한 사람이라...

알라딘에서 '쇼펜하우어 삶의 지혜'가 검색되지 않는데, '행복한 내일을 위한 삶의 지혜' '인생을 보는 지혜' '나를 만나는 지혜' '꿈을 찾아가는 지혜'가 모두 같은 책인가요?

oren 2014-04-23 11:25   좋아요 1 | URL
쇼펜하우어의 <삶의 지혜>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사람이 쓴 원작을 편역한 작품입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17세기에 신학을 공부한 신부이자 철학자였는데, 쇼펜하우어가 그의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편역'을 내놓으면서 유명하게 된 작품이지요. 그러고 보면 쇼펜하우어도 자신의 주저이자 걸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내놓고 나서도 꽤나 오랫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한 대신에, 그라시안의 작품을 편역한 <삶의 지혜>를 계기로 비로소 전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이니, 번역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인 셈이네요.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여러 권의 작품이 담긴 '쇼펜하우어 전집'과도 비슷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맨 앞부분에 담긴 <삶의 지혜>가 바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작품을 편역한 책이고, 그 작품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다른 판본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쇼펜하우어'가 편역한 책이지 싶습니다. 그 작품은 쇼펜하우어가 원작을 단순히 번역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글도 제법 포함시킨 덕분에 어느 정도는 '쇼펜하우어의 책'이 되다시피 한 작품이지요.

(마립간 님이 궁금해 하시는 부분은 제 글에 담아 놓은 <세상을 보는 지혜>를 클릭하셔서 그 책의 '목차'를 한번 살펴보시면 금방 이해되실 겁니다.^^)

마립간 2014-04-23 11:51   좋아요 1 | URL
oren님, 감사합니다. (우선 동서문화사 '세상을 보는 지혜'를 읽어야겠네요.^^)

표맥(漂麥) 2014-04-24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의 논쟁을 쭈욱 봐 왔습니다. 끼어들기엔 너무 높은 곳에서의 다툼인지라 뭐라하기 힘들었는데... oren님의 글을 읽으니 속이 시원합니다. 참 객관적이고 동감하는 글입니다. oren님을 알게되어 무지 기쁘군요...^^

oren 2014-04-24 11:23   좋아요 1 | URL
표맥 님 반갑습니다. '새로 나온 <이방인>'을 둘러싼 논쟁이 그렇게 뜨거울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어디 끼어들기가 겁이 날 정도로 여러 글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들이 번쩍거리더군요. 몇몇 언론들의 끈질기고도 집요한 공격도 놀라웠구요. ㅎㅎ

저는 이정서 님의 번역 덕분에 '카뮈의 <이방인>'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답니다. 심정적으로는 그 분을 훨씬 더 편들고(?) 싶었으나,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여러모로 완곡하게 표현하느라 글이 좀 어정쩡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표맥 님께서 이렇게 동감해 주시니 고맙고 또 반갑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19-08-21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이방인을 읽어보려고 하는데,누구의 번역을 읽을까 고민했는데 결정했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 )

oren 2019-08-21 22:33   좋아요 0 | URL
네,,, 이정서의 <이방인>... 정말 치열하게 번역한 책임에는 틀림없답니다.^^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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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여러모로 놀라운 책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어떤 식으로 이 책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지와는 크게 상관없이 이 책은 내게 실로 많은 생각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좀 더 거창하게 얘기한다면 '문예' 일반에 대해 예전에는 미처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새롭게 깨우쳐 주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인물에 대해 뚜렷한 선입관 하나를 가지고 있다. 그가 고대 그리스 철학이 활짝 피어나 '만물'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던 시기, 다시 말해서 인류가 미망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던 무렵을 대표하던 세 사람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계보의 맨 마지막 주자(走者)로서 막중한 임무를 분에 넘치게 수행했던 인물이었으며, 그가 관심을 갖지 않은 분야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학의 아버지'라는 영광스러운 칭호까지 부여받았지만, 그 모든 위대한 면모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정적으로 '너무 무미건조하고 흥미없는 인물'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라는 점이 그것이다.

나 역시 그에 대한 그런 '폭넓게 지지받는 인물평'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그의 책을 쉽사리 집어들 수 없었음을 나 스스로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왔었고, 그의 이름이 숱한 고전에서 아무리 자주 언급되더라도 그건 '철학자'들이나 연구할 몫이지 나는 크게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여겼다. 더구나 어떤 책에서 읽은 다음 대목은 그에 대한 흥미를 더욱 떨어뜨렸음은 말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려면 고통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의 스승 플라톤과는 다르게, 그는 매력이 없다. ······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中에서


그런데 위의 책을 조금만 더 인용하면 우리는 금세 생각이 좀 바뀐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쓴『시학』을 무작정 못본 채 외면할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을 쉽사리 떨쳐내지 못하고 그에게 붙잡히고 만다.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 『시학』은 후대의 문학 평론에 엄청난 영향을 지속적으로 미쳤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가 인생에 접근하는 태도는 플라톤에 비하여 현실적이었고 덜 유토피아적이었으며 보통사람들의 성품과 능력에 더 관심이 많았다.


더군다나 이 책은 역사상 최초의 '문예 비평'으로 널리 인정받는 책이다. 그러니 문학과 예술 일반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은 언젠가 한번쯤은 이 책을 꼭 읽어야만 될 듯한 까닭모를 의무감에 시달릴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책을 좀 더 흥미롭게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은 얼마쯤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나는 이 책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일반적인 시(詩)'를 다룬 책인 줄로만 알았다. 실로 엄청난 착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도대체 어느 시대의 사람인가. 그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BC384∼BC322년이다. 출생으로만 따지만 지금으로부터 무려 2,398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가 쓴 이 책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기는 하지만,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놀랐던 사실은 이 책이 쓰여질 당시만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당시의 '시'란 일반적으로 비극시와 서사시를 말하는 것이었고, 현대시의 주류를 이루는 서정시는 그 무렵에는 아예 싹도 제대로 트지 못했던 듯하다. 글쎄, 그땐 '문학'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비극을 분석한 책이다. 이 사실만 미리 제대로 알고 접근하더라도 우리는 많은 억측들을 물리칠 수 있으며, 이 책을 읽고 나면 혹시라도 그 어려운 '시'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앞으로는 더욱 좋은 시를 쓸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까지도 슬그머니 거둬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우리가 '고대 그리스 비극'을 여태까지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는데도 우리가 이 책을 굳이 읽어야만 할까? 아니면 우리의 그런 딱한 처지를 고려해서라도 이 책을 읽는 시도를 일찌감치 포기해야만 옳은 일일까? 이 책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도 아직까지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못했다. 다만 비극작가들의 이름과 제목과 등장인물들의 이름만 가끔씩 들어봤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내가 '고대 그리스 비극의 이해'로까지 나의 얘기를 끌어올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무미건조한 글쓰기'를 통해 고대 그리스 비극을 논한 '시학'을 읽어 보면 우리는 비극시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원된 온갖 형태의 '문화예술'이 어떻게 발전되어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오면서 우리의 삶에 얼마만큼 뿌리깊게 영향을 미쳐온 것인지에 대해 그 '연원'과 '원형'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도 있게 된다.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출발한 공연 예술이 세월을 더해감에 따라 나중에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연극작품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수많은 공연 예술인 오페라와 뮤지컬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와 드라마로까지 이어져 왔음을 그 누가 자신있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리스 비극이 인간의 모방 본능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의 행동을 모방한다는 뜻에서 그것이 '드라마'로 불렸다는 사실과, 고대 그리스 비극의 목적이 감정의 순화와 배출을 의미하는 카타르시스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은 흔히 문학에서 다루는 이론의 골격이라고도 부를 만한데 그런 내용들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다루는 핵심이다.

그런데 '모방'이란 얼마나 놀라운 성질인가.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발전을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추동력을 인간의 '모방하는 놀라운 힘'에서 찾았다. '모방'에 관해서는『역사의 연구』에서만 그 힘을 새삼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몽테뉴가 이미 옛 시인의 입을 빌어 '흉내의 귀재'인 원숭이를 보고 우리 인간을 떠올리며 감탄해 마지 않았던 적도 있었고, 다윈은 마침내『인간의 유래』를 통해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이 영장류 가운데서도 특히 협비류(狹鼻類) 긴꼬리원숭이임을 밝히기에 이르렀다.

가장 못난 짐승인 저 원숭이, 어찌도 그리 우리를 닮았는가!     (엔니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中에서

결국 시(詩)란 '인간의 행동'을 '모방'하는 예술이고,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고 통찰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시의 탄생'을 연역한 것은 옳았다. 그런데 그의 스승인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나오기 이전에 이미 《국가》를 통해 진실재인 '이데아'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대상을 화가처럼 '모방'하기만 하는 '모방자'에 불과한 시인을 명쾌한 논리로 비판한 적이 있다. 그 내용이 바로 이 책에 담긴 플라톤의 시론(詩論)이다.
 
플라톤 스스로 '시의 매력'에 한없이 이끌리면서도 결국 '이데아'를 추구하는 자신의 철학과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이 그토록 흠모하는 호메로스를 비롯한 '시인'을 비판해야 하는 서글픈 처지를 지켜보노라면 솔직히 기분이 좀 묘하다. 플라톤의 이 유명한 '시인에 대한 비판적 철학 이론'은 나중에 결국 쇼펜하우어에 의해 '플라톤의 결함'으로 비판받게 되고, 니체는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으로까지 불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비록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시'에 대해 서로 확연히 다른 철학적 입장 차이를 보인 점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시학』이 작시술(作詩術)을 다룬 책이라기보다 '시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다룬 책으로 평가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이 일반 독자들의 접근을 어렵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우리가 이 부분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파고들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은 '자제해야 마땅할 감정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는 시인을 못마땅히 여겨 '이상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와 달리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며 스승인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결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와 개연성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함으로써 결국 '보편적인 진리'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작품만 실려 실려 있는 게 아니다. 이 두 명의 철학자를 제외하고도 두 명의 저자가 더 있다. 호라티우스와 롱기누스가 나머지 저자들인데 그들이 쓴 글은 아무래도 철학자의 작품보다는 훨씬 더 쉽게 읽힌다.

호라티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가 남긴 《시학》은 비록 짧은 내용이지만 몹시 알차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탁월하게 설명한다. 이 책 역시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롱기누스의 《숭고에 관하여》는 비록 그리스 고대의 비극 작품과 서사시(특히 호메로스의 두 작품)라는 한정된 소재를 중심으로 쓴 책이긴 하지만, '훌륭한 글쓰기'에 대해 매우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시가 풍성하게 들어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쉽게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실용적 조언들'이 가득하다. 가령 어떤 글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고 어떤 글이 유치한 글인지, 혹은 접속사와 은유는 어떻게 다뤄야 좋은지 등에 대한 설명은 글을 써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들이어서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시를 잘 읽고 쓰기 위해 『시학』을 펼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혹은 더 나아가 문예 비평에 관심이 많은 독자들이라면 이 책으로부터 커다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문예 창작에는 무관심한 나조차도 이 책에 반했다. 나는 이 책을 순식간에 두 번 읽었다. 처음엔 눈으로 읽었고 두 번째는 손으로 쓰면서 읽었다. 베끼면서 읽을 때도 전혀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만큼 즐겁게 읽었다.

나는 이제껏 글쓰기에 관한 책을 몇 권 산 적은 있으나 여태껏 그런 책들을 붙들고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따분한 책들을 읽을 바에는 차라리 그 시간에 훌륭한 작가가 쓴 훌륭한 책을 단 한 권이라도 더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은 아직까지도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글쓰기'는 분명히 특별한 재능과 특별한 지식이 필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책이 꼭 훌륭한 작품을 쓰고 싶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님은 분명하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글, 더 훌륭한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글솜씨를 꾸준히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런 사람들에게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을 책이다. 2,000년 이상 전해져 내려온 이 책의 역사가 그걸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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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 詩學

플라톤의 입장

예술에 대한 그의 주된 공격은 『국가』제10권에서 전개되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이데아론에 입각하여 예술가들은 진실재(眞實在)인 이데아를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상(模像) 또는 영상(影像)을 모방하는 데 불과하므로 가장 위험한 존재들이라고 매도하고 있다.

그가 시를 공격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시는 우리의 자제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고삐를 풀어줌으로써 '우리가 마땅히 시들어지게 해야 할 것에다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플라톤에게는 감정은 제거되어야 할 잡초와 같은 것이었다.(11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시인이 모방하는 것은 진실재인 이데아가 아니라 그 모상 또는 영상에 불과하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관하여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변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더 많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견해를 간접적으로 공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따르면,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 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 데, 다시 말해서 하나의 보편적인 진리를 말하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플라톤이 말하는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인 것이다. (13쪽)


카타르시스의 기능

시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플라톤의 견해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계속해서 억압될 경우 언젠가는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는 감정을 안전하게, 관례적으로 그리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출케 하는 도덕적 기능, 즉 카타르시스의 기능을 드라마에 부여함으로써 간접적인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13쪽)


비극의 목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목적은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이러한 사실이 뚜렷하게 지적된 적이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문학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한 최초의 문예 비평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비극이 제공하는 특정한 쾌감은 우리의 감정을 좋은 의미에서 구제해주는 선한 활동에 수반되는 쾌감이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감정은 위험하게 폭발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비극에서 얻는 쾌감은 위험 부담을 남에게 전가하고 얻는 경험의 쾌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우리 자신이나 이웃에 불행과 고통을 주지 않고는 배출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의 스릴을 비극이라는 안전판 위에서는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이다. (14∼15쪽)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

『시학』의 명백한 결점 하나는 내용상 '시학'이라기보다는 '드라마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할 만큼 거의 드라마에 관해서만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서사시조차 드라마와 비교하여 간단하게 논한 다음, 서사시는 비극보다 열등한 예술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서정시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그가 서정시를 음악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음악은 그가 별로 관심을 느끼지 못한 소수의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19쪽)

모방의 대상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인간의 성격이 거의 언제나 이 두 범주에 속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덕과 부덕에 의하여 그 성격이 구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방의 대상이 되는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우리들 이상의 선인이거나, 또는 우리들 이하의 악인이거나, 또는 우리와 동등한 인간이다. (31∼32쪽)


모방한다는 것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 ······

그럴 것이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 비록 그들의 배움의 능력이 적다고 하더라도 - 최상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건 그 사람을 그린 것이로구나' 하는 식으로 각 사물이 무엇인가를 추지(推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실물을 전에 본 적이 없는 경우에는 모방의 대상이 아니라 기교라든가 색채라든가 그 밖에 그와 유사한 원인에 의하여 쾌감을 느낄 것이다. 이와 같이 모방한다는 것과 화성과 율동에 대한 감각은(운율은 율동의 일종임이 명백하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인 바 인간은 이와 같은 본성에서 출발하여 이를 점진적으로 개량함으로써 즉흥적인 것으로부터 시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37∼38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

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한 행동과 고상한 인물들의 행동을 모방한 반면 저속한 시인들은 비열한 자들의 행동을 모방했는데, 전자가 찬가(讚歌, hymnos)와 찬사(讚詞, enkomion)를 쓴 것처럼 후자는 처음에는 풍자시를 썼다. (38쪽)


비극의 본질

우선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으로부터 비극의 본질을 정의해보자. 비극은 진지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며,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를 사용하되 각종 장식은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서술적 형식을 취하지 않으며,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행한다. '쾌적한 장식을 가진 언어'란 말은 율동과 화성을 가진 언어 또는 노래를 의미하고, '작품의 상이한 제부분에 따로따로 삽입된다'는 말은 어떤 부분은 운문에 의해서만 진행되고 어떤 부분은 노래에 의해서 진행됨을 의미한다.

배우가 스토리를 실연(實演)하기 때문에, 첫째 장경(場景, 또는 배우의 분장)이 불가피하게 비극의 일부분이 될 것이고, 다음은 노래와 조사(措辭)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모방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사란 다름 아니라 운문의 작성을 의미하며, 노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고 행동은 행동자에 의하여 행해지는 바 행동자는 필연적으로 성격과 사상에 있어 일정한 성질을 가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에 의하여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일정한 성질의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동의 원인은 자연히 두 가지인데 사상과 성격이 그것이며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과 실패도 이 두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행동의 모방은 플롯이다.

······ 그러므로 모든 비극은 여섯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되며 이 여섯 가지 요소에 의하여 비극의 일반적인 성질도 결정되는데, 플롯과 성격과 조사와 사상과 장경과 노래가 곧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가지는 모방의 수단에 속하고, 한 가지는 모방의 양식에 속하고, 세 가지는 모방의 대상에 속한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49∼51쪽)


플롯

이 여섯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다. 비극은 인간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과 생활과 행복과 불행을 모방한다. 그리고 행복과 불행은 행동 가운데 있으며 비극의 목적도 일종의 행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인간의 성질은 성격에 의해서 결정되지만 행·불행은 행동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드라마에 있어서의 행동은 성격을 모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격이 행동을 위하여 드라마에 포함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결합, 즉 플롯이 비극의 목적이며 목적은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52쪽)


비극의 제1원리

그러므로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이와 유사한 예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색채라도 아무렇게나 칠한 것은 흑백의 초상화만큼도 쾌감을 주지 못할 것이다.)
 (53쪽)


플롯의 구성

시초는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성질의 것이다. 반대로 종말은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것 다음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중간은 그 자체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또 그것 다음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플롯을 훌륭하게 구성하려면 아무 데서나 시작하거나 끝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름다운 것은 생물이든 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물이든 간에 그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일정한 질서를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크기와 질서에 있기 때문이다. (56∼57쪽)


전체와 부분

그러므로 다른 모방 예술에 있어서도 하나의 모방은 한 가지 사물의 모방이듯, 시에 있어서도 스토리는 행동의 모방이므로 하나의 전체적 행동의 모방이어야 하며 사건의 여러 부분은 그 중 한 부분을 다른 데로 옮겨놓거나 빼버리게 되면 전체가 뒤죽박죽이 되게끔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있으나마나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61쪽)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함은 다시 말해 이러저러한 성질의 인간은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이러이러한 것을 말하거나 행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시가 등장 인물들에게 고유한 이름을 붙인다 하더라도 시가 추구하는 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62∼63쪽)


삽화적 플롯

단순한 플롯과 행동 중에서 최악의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나는 여러 가지 삽화들이 상호간에 개연적 또는 필연적 인과 관계도 없이 잇달아 일어날 때 이를 삽화적 플롯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종류의 행동을 졸렬한 시인들은 자신들의 무능으로 인해 구성하고, 우수한 시인들은 배우에 대한 고려에서 구성한다. 경연을 위하여 작품을 쓰다 보면 우수한 시인들도 종종 무리하게 플롯을 연장하여 사건의 전후 관계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66쪽)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의 모방이다. 이러한 사건은 불의에, 그리고 상호간의 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날 때 최대의 효과를 거둔다. 사건은 이와 같이 발생할 때 저절로 또는 우연히 발생할 때보다 더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의도에 의하여 일어난 것 같이 보일 때 가장 놀랍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66쪽)


'인하여' '이어서'

급전이나 발견은 플롯의 구성 자체로부터 발생해야만 하므로 선행 사건의 필연적 또는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과 다른 사건에 '이어서' 일어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68쪽)


훌륭한 비극

가장 훌륭한 비극이 되려면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모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 종류의 모방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77쪽)


비극의 쾌감

비극의 쾌감은 연민과 공포에서 오는 쾌감인 바 시인은 이러한 쾌감을 모방에 의하여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인이 모방하는 사건에는 이러한 쾌감의 원인이 되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85쪽)


플롯의 구성과 표현 방식

시인은 플롯을 구성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서 1) 되도록이면 실제 장면을 눈앞에 그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시인은 사건을 직접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적절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모순된 점을 간과하는 일이 가장 적을 것이다. ······

2) 또한 시인은 되도록이면 작중 인물의 제스처로 스토리를 실연(實演)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의 재능이 같을 경우에는 표현되어야 할 감정을 실제로 느끼는 쪽이 더 설득력있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

3) 스토리에 관하여 말하자면, 기존의 것이든 시인 자신의 창작이든 간에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잡은 다음 삽화를 삽입하여 늘여야 한다. ······

4) 모든 비극은 '분규' 부분과 '해결' 부분으로 양분된다. 드라마 밖의 사건과 그리고 종종 드라마 안의 사건 가운데 일부가 '분규'를 구성하고 나머지는 해결을 구성한다. 나는 스토리의 시초부터 주인공의 운명에 전환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를 '분규'라 부르고, 운명의 전환이 시작된 뒤부터 마지막까지를 '해결'이라 부른다. ······ (104∼108쪽)


조사의 특징

조사(措辭)는 무엇보다도 명료하면서 저속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된 조사는 가장 명료하기는 하나 저속하다. 클레오폰과 스테넬로스의 시가 그 예다. 이에 반해 생소한 말을 사용하는 조사는 고상하고 비범하다. 생소한 말이란 방언과 은유와 연장어와 일상어가 아닌 모든 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부가 이러한 말들로만 된 시는 수수께끼나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즉 은유로만 되었다면 수수께끼가 될 것이고 방언으로만 되었다면 야만족의 말이 되고 말 것이다. (129쪽)


비극과 서사시

따라서 비극이 이러한 모든 점에서 그리고 또 시적 효과를 산출함에 있어(왜냐하면 비극과 서사시는 임의의 쾌감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바 있는 특정한 쾌감을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더 우수하다면 서사시보다 시의 목적을 더 훌륭하게 달성하므로 더 우수한 형식의 예술임이 명백하다. (162쪽)




호라티우스 / 詩學

호라티우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경험적 사실을 분석하여 시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규명해보려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는 달리, 호라티우스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라틴 문학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 기법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67쪽)

위대한 시인이 쓴 라틴 문학의 유일한 시론인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론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18세기까지만 해도 서양 문학 이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서양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읽어야 할 이론서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괴상한 그림

가령 어떤 화가가 사람의 머리에다 말의 목을 이어 붙이고 몸통은 다채로운 깃털로 장식하는 등 온갖 동물에서 그 지체(肢體)를 빌려온 결과 위쪽은 아름다운 여인이지만 맨 아래쪽은 보기 흉한 잿빛 물고기가 되어버린 괴상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대들을 자신의 화실로 불렀다고 한다면, 친구들이여, 그대들은 과연 이런 그림을 보고도 폭소를 금할 수 있을까요? (171쪽)


단일성과 통일성

이거야말로 도공이 손잡이가 둘 달린 큰 항아리를 만들고자 녹로(轆轤)를 돌렸지만 겨우 조그마한 단지 하나가 만들어진 경우와 뭐가 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그대가 만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173쪽)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

우리들 시인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고 맙니다. 간결함을 추구하다 보면 모호해지고, 유려함을 추구하다 보면 박력과 불길이 꺼져버립니다. 장엄함을 찾다보면 부자연스러워지고, 너무 소심하게 감정의 비약을 피하다 보면 땅바닥 위를 기는 꼴이 되고 맙니다. 단일한 소재에다 대담한 변화를 통하여 생기를 불어넣고자 하는 이는 숲에다 돌고래를 그려 넣고 파도에다 멧돼지를 그려 넣습니다. 그러나 예술 감각이 결여된 경우에는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173쪽)


능력에 맞는 소재

작가들이여, 그대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하시라. 그대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이며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오랜 시간을 두고 심사숙고하시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한 작가는 조사(措辭)와 언어의 명쾌한 배열 때문에 곤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명쾌한 배열의 장점과 매력은 내가 알기로는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뒤로 미루어 지금은 말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174쪽)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

계절이 바뀌면 나뭇잎도 바뀌어 옛 것은 떨어지고 새 것이 돋아나듯 단어도 낡은 것은 시들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 마치 새로 태어난 사람들처럼 생을 구가하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행적은 사멸을 면치 못하는 법입니다. 어떤 왕이 큰 공사를 일으켜 해신 넵투누스를 육지에 가두어놓고 그로 하여금 함대를 북충으로부터 지키게 하든, 오랫동안 배 없이는 다닐 수 없던 불모의 늪이 인근 도시를 부양하고 쟁기의 무게를 느끼게 되든, 곡식을 위협하던 강물이 진로를 바꾸어 보다 순탄한 길로 흘러가게 되든, 인간이 해놓은 일은 언젠가는 퇴락하게 마련이거늘 어찌 언어만이 유독 변함없는 효력과 영광을 누려야 한단 말입니까? 이미 사멸했던 많은 것들이 다시 태어나고 지금 영광을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소멸할 것입니다. 이는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인즉 필요야말로 언어의 법칙과 규범을 결정하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176∼177쪽)

(나의 생각)
오래 전에 읽었던 어느 '불멸의 고전' 속에서 발견했던 '호라티우스의 말'을 여기서 다시 만났다. 몹시 반갑다.

 * * *
또한, 세월은 수많은 변화와 반전을 불러온다. 여기서 권두에 실은 호라티우스의 인용문을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원래 시인들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우리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업의 일생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Multa renascenyur quae cecidere, cadentque Quae nunc sunt in honore.
"지금은 실패했지만 회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고, 지금은 축하받지만 실패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 호라티우스Horace <시론 Ars Poetica>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는 아름다운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시는 물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웃는 자와 더불어 웃고, 우는 자와 더불어 우는 법입니다. 그대가 나를 울리고자 한다면 먼저 그대 자신이 고통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텔레포스여 그리고 펠레우스여, 그대의 불행이 나를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대가 남이 시키는 말만 서투르게 늘어놓는다면 나는 하품과 웃음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비장한 말은 슬픈 얼굴에 어울리고, 위협적인 말은 성난 얼굴에 어울립니다. 그리고 변덕스런 말은 익살스런 얼굴에 어울리고, 진지한 말은 엄숙한 얼굴에 어울립니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키도 하며, 무거운 근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 조이게도 합니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그 통역 노릇을 합니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든 로마 인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입니다. (180쪽)


만인의 공유물

소재가 만인의 공유물인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그대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처리하거나, 통역관처럼 글자를 한 자 한 자 그대로 옮긴다거나, 모방자로서 궁지에 빠진 나머지 원전에 대한 외경심과 원전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82쪽)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바란다면

만일 그대가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배우가 박수를 청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관객들의 갈채를 바란다면 나와 더불어 모든 관객들이 요구하는 것을 들으시라. ······ 보호인으로부터 갓 해방된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젊은이는 말이나 개나 양지바른 연병장의 잔디밭을 좋아합니다. 이 시절에는 밀랍처럼 유연하기 때문에 쉽사리 나쁜 길로 유혹되며, 좋게 타일러도 잘 듣지 않으며, 이해 타산에 어둡고 금전 낭비가 심합니다. 그리고 포부가 크며, 사랑하던 것을 금세 단념해버립니다. 그러나 장년이 되면 성향이 달라져서 권력과 명예를 중시하고 세도가와 친분을 맺고 싶어하며 차후에 애써 보상하지 않으면 안 될 모험은 조심스레 피합니다. 노년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는 법입니다. 고생을 하면서도 저축한 것이 아까워 감히 쓰지 못합니다. 만사를 냉정하고 소심하게 처리하되 시간이 지나면 다소 나아지리라는 생각에서 뒤로 미루기가 일쑤고, 무기력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을 생각하며, 성미가 까다롭고 괴팍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년이었던 시대를 찬양하며 젊은이들을 꾸짖고 훈계합니다. 오는 세월은 많은 선물을 가져다주지만 가는 세월은 많은 것을 빼앗아가버립니다. ······ 우리는 연령별로 그 특성을 잘 알아서 거기에 충실해야 합니다. (185∼186쪽)


그리스인들의 작품

그대들은 그리스인들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으시오. 그대들의 선조들은 플라우투스의 시구와 재치를 듣고 감단해 마지않았습니다. (193쪽)


물리치시라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잘 깎은 손톱으로 열 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일랑 물리치시라.
(195쪽)


만인의 갈채를 받을 작가

시인은 이익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을 주려 하거나 또는 쾌감과 인생에 유익한 것을 동시에 주려 합니다. 그대의 교훈은 간결하고 정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영혼이 재빨리 포착하여 깊이 간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일단 충만하게 되면 나머지는 모두 흘려버리게 마련입니다. ······ 투표권이 있는 나이 지긋한 사람은 도덕적으로 무익한 작품을 비난하고, 거만한 젊은 기사들은 도덕적으로 엄격한 작품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유익한 것에 달콤한 것을 가미하여 쾌감과 교훈을 동시에 주는 작가는 만인의 갈채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책은 소시우스 형제들에게 돈을 벌게 해줄 뿐 아니라 해외로 나가 작가에게 불멸의 명성을 보장해줄 것입니다. (198쪽)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시는 그림과도 같습니다. 어떤 것은 가까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습니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炯眼)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되기를 원합니다. 어떤 것은 한 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해서 보아야만 마음에 듭니다. (199∼200쪽)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200∼201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예술'을 논하는 부분,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에 대하여>에서 '플라톤의 詩論'을 비판함과 동시에 시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호라티우스의 시학'을 인용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9년 동안

그대는 언행에 있어서 결코 미네르바의 정신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언젠가 무엇을 쓰게 되면 그대의 부친과 나의 면전에서 비평가 마이키우스에게 낭독해주시오. 그리고 그 원고를 9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시오. 발표하지 않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지만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쪽)


여우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

그대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었거나 주려고 한다면 그가 환희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는 그대의 시를 내놓지 마시오. 그는 감격하여 '오, 얼마나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확합니까!' 하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그는 얼굴이 창백해지기도 하고, 우정의 눈물로 시구를 적시기도 하고, 기뻐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할 것입니다. 마치 장레식 때 돈 받고 곡하는 자들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자들보다 더 애절한 말을 하고 더 슬픈 표정을 짓듯이 마음속으로 조소하는 자일수록 진심으로 찬양하는 자보다 더 감격한 체하는 법입니다. 왕들은 자신들의 총애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어떤지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고 싶으면 괴로울 정도로 술을 많이 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시를 쓴다면 여우 껍질을 뒤집어쓴 거짓 친구가 그대를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204쪽)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퀸틸리우스에게 무엇을 낭독해주면 그는 '이것은 더 손질하시오. 그리고 이것도'라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는 전부 다 지워버리고 그 잘못된 시구를 처음부터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시정하는 대신 옹호하려고 들면 그는 그대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도취될 수 있도록 일언반구의 헛수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비예술적인 시구는 지적하고, 딱딱한 것은 나무라고, 무미건조한 것은 새까만 횡선을 치고, 지나친 장식은 잘라내고, 어두은 것은 밝게 하고, 모호한 것은 분명하게 하고, 고칠 것은 고치도록 할 것입니다. 그는 그대의 아리스타르코스가 될 것이며, '사소한 일로 친구의 기분을 상하게 할 게 뭐람?' 하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소한 일로 말하자면 언젠가 그가 관객들로부터 조소와 비난을 받게 되는 날 그에게 심한 고통을 안겨줄 것입니다. (205쪽)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나병이나 황달이나 무도병(舞跳炳)이나 월야방황증(月夜彷徨症)에 걸린 사람을 보면 모두들 피하듯이 현명한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을 보면 무서워 달아납니다. 아이들만이 야유하며 멋모르고 따라다닙니다. 그가 고개를 높이 쳐들고 시구를 토하다가 실족하여 지빠귀 사냥꾼처럼 우물이나 구덩이 속에 빠지는 날에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하고 아무리 큰 소리로 불러보았자 그를 구해줄 사람은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누가 그를 구하려고 새끼줄을 내려보낸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여기 이 자가 고의적으로 뛰어들지 않았는지 어떻게 아시오. 그는 어쩌면 구조를 원치 않을는지도 모르오.' 나는 그에게 시켈리아 시인의 최후에 관하여 이야기해줄 것입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신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 냉정하게 아이트네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소. 사람들은 시인들에게 자살할 권리와 자유를 허용해야 하오. 삶에 지친 자들의 목숨을 구한다는 것은 살인이나 다름없소. 이런 짓은 여기 이 자가 처음이 아니오. 그리고 그를 끄집어내보았자 그는 다른 사람들 같지 않을 것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죽음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할 것이오. 게다가 그가 어떻게 해서 시를 짓게 되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해를 모독했거나 아니면 신성불가침한 낙뢰(落雷) 자리를 제거했기 때문에 부정을 탔을지도 모를 일이오. 아무튼 그는 제정신이 아니오. 이 지긋지긋한 시인은 우리의 창살을 부수고 뛰쳐나온 곰처럼 무시한 사람이건 유식한 사람이건 모두 쫓아버립니다. 그러다가 혹시 누구라도 붙잡는 날에는 꼭 붙들어놓고 자신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지루해 죽게 만듭니다. 거머리는 피를 잔뜩 빨아먹기 전에는 피부에서 떨어지지 않는 법이거든요.' (206∼207쪽)




플라톤 / 詩論

시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플라톤

플라톤은 시와 예술에 관해 따로 책을 쓴 적이 없고 주로 『이온 Ion』과 『파이드로스 Phaidros』와 『국가』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피력하고 있다. 시와 예술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잡하다. 먼저 나온 두 대화편에서 그는 시인들을 칭찬하고 있으나 『국가』에서는 매우 위험한 자들이라며 가차없이 자신의 '이상국가'에서 추방하고 있다. 시인들에 대한 그의 칭찬은 모호하고 유보적인 반면 비판은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니체는 플라톤을 '유럽이 낳은 예술의 가장 강력한 적'이라고 불렀다. (211쪽)


모방의 종류

모방의 문제는 특히 『국가』제10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거기서 플라톤은 모방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예컨대 침대의 경우 첫째로 이데아(idea)의 세계에 있는 신이 만든 불변의 침대 또는 침대 그 자체가 있고, 둘쨰로 이것을 모방하여 목수가 만든 개개의 침대가 있고, 셋째로 화가 또는 시인이 목수가 만든 침대를 모방하여 그린 침대, 즉 이데아 또는 진리로부터 세 단계나 떨어져 떨어져 있는 가상의 모상(模像)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 또는 예술은 모방술(模倣術)이며 "모방술은 그 자신 열등한 것으로서 열등한 것과 결합하여 열등한 것을 낳는 만큼" 시인들은 당연히 이상국가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2쪽)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

플라톤 자신도 가끔 호메로스에 대한 존경심과 시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을 내비친다. 그리고 그의 대화편들이 고대 그리스를 넘어 서양 산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 받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시공을 초월한 숭고한 주제들뿐만 아니라 신화와 비유 같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것을 풀어나가는 표현 방법, 즉 시적 요소들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해야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13쪽)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그러나 우리는 호메로스가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 가운데 가장 중대하고 가장 훌륭한 것, 즉 전쟁이나 원정이나 국가의 통치나 인간의 교육에 대해서는 물어서 알 권리를 갖고 있네. (228쪽)


시인들은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

"그렇다면 이런 점들에 관하여 우리의 의견이 꽤 일치된 셈이네. 즉 모방자는 자기가 모방하고 있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 모방은 일종의 유희이며 진지한 것이 못 된다는 점, 그리고 비극 시인들은 단장격 운율로 작시하든 서사시 운율로 작시하든 간에 가장 진정한 의미의 모방자들이라는 점에 관해서 말일세." (236쪽)


화가를 닮은 시인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를 붙들어다가 화가의 한짝으로서 그와 나란히 세워도 좋을 것이네. 왜냐하면 그는 진리에 비해 열등한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나 혼의 열등한 부분과 교제하고 가장 훌륭한 부분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가를 닮았기 때문이네. 따라서 훌륭한 제도를 가져야 할 국가 안으로 우리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행동은 정당하네. 그것은 그가 혼의 열등한 부분을 일깨워서 가꾸어주고 강하게 만들어줌으로써 이성적인 부분을 손상하기 때문이네. 그것은 마치 어떤 국가에서 어떤 사람이 악당들을 권력자로 만들어 그들에게 국가를 맡기고 보다 선량한 자들은 파멸케 하는 것과도 같네." (244∼245쪽)


플라톤이 시인을 비판하는 이유

"그러면 내 말을 듣고 잘 생각해보게나. 자네도 알다시피, 어떤 영웅이 비탄에 빠져 장탄식을 늘어놓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괴로워서 가슴을 치는 장면을 호메로스나 다른 비극시인이 모방할 때면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들조차도 이에 쾌감을 느끼게 되어 자신을 잊고 공감하면서 이끄는 대로 따라가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기분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주는 시인일수록 훌륭한 시인이라고 진지한 태도로 칭찬하네."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게 걱정거리가 생기게 되면, 자네도 알다시피, 그와는 반대로 침착하게 잘 견뎌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네. 그것이 남자다운 행동이고 우리가 방금 칭찬했던 것은 여자다운 행동이라는 생각에서 말일세."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렇다면 그런 칭찬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는커녕 오히려 부끄러워하게 될 그런 인간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는 대신 기뻐서 칭찬한다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제우스 신에 맹세고,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246∼247쪽)


억압되어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본래는 실컷 울고불고 탄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 자신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는 억압되어 이런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부분, 바로 이 부분이 시인들로부터 만족과 쾌감을 얻는 부분이네. 한편 우리 안에 있는 본성적으로 가장 훌륭한 부분은 이성과 습관에 의하여 충분히 교육되어 있지 못하므로 눈물이 많은 부분에 대한 감시를 늦춰버리네. 왜냐하면 그것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남의 고통이고 또 선량한 인간으로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슬퍼할 때 그 자를 칭찬하거나 동정하는 것은 그에게는 조금도 수치스런 일이 아니기 때문이네. 오히려 그는 거기서 얻는 쾌감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네. 왜냐하면 남의 것을 즐기면 그 중 일부는 필연적으로 자기 것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니까 말일세." (247∼248쪽)


시의 모방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는 일

"또한 애욕과 분노에 관해서도, 그리고 우리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는 욕망과 고통과 쾌락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말하자면 시의 모방은 이런 것들에 관해서도 우리에게 똑같은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시들어 없어져야 하는데도 시는 이런 것들에게 물을 주어 가꾸고 있으며, 사악하고 비참하게 되는 대신 선량하고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런 것들을 지배해야 하는데도 시는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우리들의 지배자로 만들고 있으니까 말일세." (249쪽)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우리는 시로부터 완고하고 세련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하여 철학과 시는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는 사실을 시에게 말해주기로 하세. 왜냐하면 '주인을 향하여 깽깽 짖어대는 개'라든가, '바보들의 쓸데없는 잡담 속에서나 위대한 자'라든가, '지나치게 영리한 머리의 오합지졸'이라든가, '어떻게 하다가 결국 거지가 되고 말았는지에 관하여 세심하게 사색하는 자들'이라든가 그 밖에 다른 많은 험담들이 철학과 시 사이의 오래된 불화를 입증해주고 있으니까 말일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렇게 말해두기로 하세.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시나 모방이 훌륭하게 통치되고 있는 국가에 필요불가결하다는 증거만 제시할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것들의 귀국을 환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도 시의 매력에 이끌리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을 배반하는 것은 불경한 짓이 될 것이다'라고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자네도 역시 시의 매력을 느끼지 않나? 특히 호메로스를 통해서 시를 볼 때 말일세." (251∼252쪽)




숭고에 관하여 / 롱기누스

이 책의 저작 시기

오늘날에는 대체로 이 비평서가 기원후 1세기 또는 2세기 초에 쓰여진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258쪽)


유럽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준 책

······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각각 근대인과 고대인의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 비평서를 내세운 뒤로 이 비평서는 유럽 여러 나라들, 특히 영국의 문예 비평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비평서가 흠 없는 범용보다는 흠 있는 천재를, 이를테면 아폴로니오스(Apollonios)보다는 호메로스(Homeros)를, 에라토스테네스(Eratosthenes)보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를, 박퀼리데스(Bakchylides)보다는 핀다로스(Pindaros)를, 이온(Ion)보다는 소포클레스(Sophokles)를 택하겠다며 그리스 문학의 걸작들인 호메로스, 삽포(Sappho), 핀다로스, 아이스퀼로스(Aischylos),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Euripides), 플라톤(Platon),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의 작품들을 자주 인용하고 이를 정확히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259쪽)


숭고

숭고는 일종의 완벽함 또는 탁월한 표현이고 가장 위대한 시인들과 산문작가들도 다름 아닌 이것을 통하여 일인자들이 되고 자신들을 위하여 영원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라고 장황하게 서론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웅대한 것은 듣는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황홀하게 하기 때문이오. 우리를 경탄케 하는 것이 단순히 설득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보다 언제 어디서나 더 우세한 것은 그것의 놀라게 하는 힘 때문이오. 왜냐하면 우리가 설득되느냐의 여부는 대체로 우리에게 달려 있지만 경탄케 하는 것과 놀라게 하는 것은 대항할 수 없는 권세와 힘을 행사하여 듣는 이를 모두 제압하기 때문이오. 숙달된 창작의 재능과 소재를 정돈하고 배열하는 능력은 한두 구절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전체적인 맥락을 볼 때만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오. 그에 반해 숭고는 제때에 출현하기만 하면 마치 벼락처럼 모든 것을 흩어버리고 단번에 연설가의 능력을 모두 보여주오. (266∼267쪽)


행운과 좋은 판단

데모스테네스는 인생 일반에 관하여 논하며 가장 큰 행복은 행운이고 그 다음이 좋은 판단인데 이것이 결여되면 행운도 완전히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점에서 이것도 행운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소. (269쪽)


어린애 장난

그들은 가끔 자신들이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영감이 아니라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273쪽)


과장

과장은 대체로 가장 피하기 어려운 실수 가운데 하나인 것 같소. 무기력하고 무미건조하다는 비난을 피하려고 장대한 것을 좇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니까요. 그들은 '큰 목표에 못 미치는 것은 역시 고상한 실수이다'라는 명제를 믿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학의 경우에도 부종(浮腫)은 나쁜 것으로서, 이 공허하게 부어오른 불성실은 아마도 의도했던 것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오.


유치함, 무의미한 감정 또는 무절제한 감정

과장은 숭고를 능가하려고 하는 반면에 유치함은 장대함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오. 그것은 모든 점에서 저열하고 편협하고 정말이지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실수이기 때문이오. 그렇다면 유치함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나치게 공들이다가 냉담함으로 끝나고 마는 현학적 사고가 아닐까요? 비범하고 정교하고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이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어 값싸고 야한 겉치레라는 암초에 걸리게 되는 법이오. 이와 관계가 있는 것이 감정의 분야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실수인데, 이것을 테오도로스는 가짜 주신제(酒神祭)라고 부르고 있소. 그것은 감정이 불필요한 곳에서의 때아닌 무의미한 감정 또는 절제된 감정이 필요한 곳에서의 무절제한 감정을 말하오. 어떤 사람들은 가끔 마치 술 취한 것처럼 주제와 무관한, 순전히 개인적이라서 따분하기만 한 감정을 터뜨리곤 하오. 그럴 경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청중에게 그들의 태도는 부적절해 보이지요. 그럴 것이 그들 자신은 황홀하지만 청중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오. (274쪽)


가장 심한 유치함

냉담함은 티마이오스에게서 흔히 볼 수 있소. 그는 다른 점에서는 재능 있는 작가이고 가끔은 장대한 표현을 쓰는 데 성공하기도 하고 박식하고 독창적이지만, 남의 실수는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면서 자기 실수는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언제나 기발한 착상을 좇다가 가장 심한 유치함에 빠지곤 하지요. (275쪽)


부적절한 표현의 원인

이 모든 품위 없는 것들은 문학의 경우 단 한 가지 원인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발상에 대한 욕구에서 비롯되오. 우리의 미덕과 악덕은 같은 바탕에서 생겨나곤 하기 때문이오. 그래서 미려한 문체와 숭고한 표현들과 여러 가지 매력들은 모두 성공적인 글쓰기에 기여하지만 바로 이것들이 성공뿐만 아니라 실패의 원인과 토대가 되는 것이오. (280쪽)


경탄의 대상

친구여, 일상생활에서도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위대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 어떠한 것도 위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오. 예컨대, 부와 명예와 명성과 권력과 기타 겉보기에 매우 화려한 것들이 그렇소.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것들을 큰 선(善)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오. 그런 것들을 경시하는 것 자체가 적잖은 선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실제로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들보다는 가질 수 있는데도 경멸할 수 있을 만큼 고결한 사람들이 더 경탄의 대상이 되는 법이오. (282쪽)


진실로 위대한 것

사려 깊고 문학에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어떤 구절을 몇 번이나 들어도 그것이 그의 마음에 어떤 고양감을 주지 않거나 아무리 숙고해 보아도 말해진 것 이상을 그의 마음에 남기지 않는다면, 아니 오히려 유심히 살펴볼수록 아래로 처지고 진부해진다면, 그것은 진실로 숭고한 것일 수 없소. 그것은 귀에 들리는 순간보다 더 오래 지속되지 못하기 때문이오. 진실로 위대한 것은 거듭된 검토도 견뎌내고, 그 호소력에 저항한다는 것은 어렵거나 불가능하고, 강력하고도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마음속에 남기기 때문이오. 간단히 말해서, 그대는 언제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것이 진실로 그리고 아름답게 숭고하다고 생각하시오. 직업과 생활 방식과 취미와 나이와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같은 작품들에 대하여 똑같은 의견을 갖는다면 그토록 목소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판단은 그들의 경탄이 정당하다는 우리의 신념을 강하고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법이오. (283쪽)


숭고의 다섯 가지 원천

숭고한 문체의 가장 생산적인 원천은 다섯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다섯 가지의 공통된 토대는 언어 구사력이고 그것 없이는 아무것도 될 수 없소.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크세노폰에 관한 나의 저서에서 설명했듯이, 위대한 구상 능력이오. 두 번째는 강력하고도 열광적인 감정이오. 숭고의 이 두 가지 원천은 대체로 타고나는 것이오. 나머지 세 가지는 예술에 의하여 습득될 수 있으니, 문채의 - 여기에는 사상의 문채와 언어의 문채 두 가지가 있소 - 적절한 구성과 이에 덧붙여 고상한 표현법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또 어휘의 선택, 은유의 사용, 언어의 조탁이 포함되오. 위대함의 다섯 번째 원인은 앞서 말한 것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서 품위 있고 고상한 조사(措辭)가 그것이오. (284쪽)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생각건대, 그는 같은 이유에서 그의 재능이 절정에 달했을 때 쓴 『일리아스』는 작품 전체를 극적인 행동과 투쟁으로 가득 채운 반면, 『오뒷세이아』는 대부분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노년기의 특징이오. 따라서 사람들은 『오뒷세이아』에서의 호메로스를 크기는 그대로지만 힘이 없는 지는 해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오. 『오뒷세이아』에서는 그는 이미 『일리아스』의 노래들에서와 같은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니, 그곳에는 결코 범용으로 떨어지지 않는 숭고도 곤두박질치며 쏟아지는 격정도, 다재다능함도, 현실성도, 일상생활에서 끌어온 풍부한 심상도 없기 때문이오. 그것은 마치 오케아노스가 자신 속으로 도로 흘러들어 자신의 경계 안에 조용히 머무는 것과도 같소. (295쪽)


구멍과 틈

······ 이들 작가들이 한 것은 말하자면 가장 탁월한 것만을 갈고 닦아 함께 이어붙이되 과장되고 품위 없고 현학적인 것은 끼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소. 이런 것들은 전체를 망쳐놓게 마련인데, 그것은 이런 것들이 상호 관계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는 조화롭고 인상적인 건축물들에 말하자면 구멍과 틈을 만들기 때문이오. (301쪽)


숭고와 확장

대체로 깍아지른 듯한 숭고가 데모스테네스의 특징이라면 키케로의 그것은 확산이오. 우리 동향인은 자신의 힘과 속도와 기세로 자기 앞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말하자면 한꺼번에 불태우며 흩어버릴 수 있소. 그래서 그는 번개와 벼락에 비유될 수 있소. 키케로는, 내가 보기에, 사방으로 번지며 무엇이든 집어삼키는 요원의 불길과도 같소. 그의 내면에는 지칠 줄 모르는 불이 활활 타며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번지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영양분을 공급받고 있소. (305쪽)


'소리 없는 강물'처럼 숭고에 도달하는 플라톤

플라톤으로 되돌아가, 그는 그렇게 '소리 없는 강물'처럼 흐르는데도 숭고에 도달하고 있소. 그대는 그의 『국가』를 읽었으니 그 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오. "따라서" 하고 그는 말하고 있소. "지혜와 덕을 모르고 언제나 연회 같은 것에 열중해 있는 자들은 아마도 아래를 향하여 움직이며 그곳에서 평생 동안 헤매게 될 것이네. 그들은 진리를 쳐다본 적도 없고 위를 향하여 움직인 적도 없으며 확실하고 순수한 쾌락을 맛본 적이 없다네. 그들은 가축처럼 언제나 아래만 내려다보며 대지와 식탁 위로 머리를 숙이고는 먹이를 먹고 교미한다네. 그리고 그들은 그런 것들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하여 무쇠의 뿔과 발굽으로 서로 차고 서로 떠받다가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서로 죽인다네." (307쪽)

(나의 생각)
이 부분은 플라톤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다. 『평생독서계획』의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 * *
"독자는 플라톤의 핵심 사상 세 가지를 알고 있는 것이 좋다. 첫째는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데, "탐구하지 않는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상이 플라톤의 모든 저작에서 핵심을 이룬다. 두 번째는 지식은 미덕이라는 것이다. 충분한 지혜를 갖춘 사람은 충분히 선량한 사람이다."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

이 작가는, 우리가 유심히 살펴보면, 앞서 언급했던 것들 외에도 숭고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소. 그것은 대체 어떻게 생긴 어떤 종류의 길일까요? 그것은 과거의 위대한 산문 작가들과 시인들을 열심히 모방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친구여, 이 목표를 부단히 추구하도록 합시다. 많은 작가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김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오. (308쪽)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상을 다툰 플라톤

헤로도토스만이 가장 호메로스적이었을까요? 천만에 그 이전에 스테시코로스와 아르킬로코스가 있었고 어느 누구보다도 플라톤이 있었소. 그는 호메로스라는 샘으로부터 그 자신이 사용하기 위하여 수많은 실개천을 냈던 것이오. 나는 그것을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겠지요. 암모니오스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간추려 기록해두지 않았더라면 말이오. 그런 것은 표절이 아니오. 그것은 조각이나 그 밖에 다른 예술에 의하여 아름다운 형상들을 재현하는 것과도 같소. 그리고 생각건대, 플라톤은 마치 젊은 전사가 만인이 경탄하는 경쟁자와 싸우듯이 호메로스와, 제우스 신께 맹세코, 온 마음을 다해 상을 다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철학 이론들을 그렇게까지 꽃비우지 못했을 것이고, 시의 주제와 언어에 그렇게 자주 함께 승선하지 못했을 것이오. 그는 아마도 경쟁심에서 지나치게 투지에 넘쳐 있지만, 그런 다툼은 결코 무익한 것이 아니었소. 헤이오도스에 따르면, "그런 불화는 인간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이오. 그리고 선배들에게 지더라도 그것이 불명예가 아닌 곳에서는 명성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영관은 정말이지 그 무엇보다도 다투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309쪽)


실용적 조언

따라서 우리도 숭고한 표현과 고매한 사상을 요구하는 구절을 쓸 때는, 호메로스는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나 또는 역사에서 투퀴디데스는 이것을 어떻게 숭고하게 만들었을까 하고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좋소. 왜냐하면 경쟁심은 이 위대한 분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줄 것이고, 그러면 그 분들이 우리의 생각들을 우리가 정해놓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줄 것이기 때문이오. 나아가 호메로스나 데모스테네스가 여기 있었다면 나의 이 구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또는 나의 이 구절이 그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 하고 자문해본다면 그것은 더욱더 그러할 것이오. 우리가 그러한 배심원들과 청중이 우리가 하는 말을 듣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영웅적인 심사원들과 증인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꼼꼼히 살펴보도록 맡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큰 경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대가 "내가 이렇게 쓰면 후세 사람들이 모두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고 덧붙인다면 그것은 더 고무적일 것이오. 누군가가 자신의 생애와 시대보다 오래 지속될 것을 말하기를 두려워한다면 그의 마음속 구상들은 필연적으로 불완전하고 발육이 부전하여 유산되고 말 것이며, 후세의 명성의 날을 위하여 결코 완전하게 태어나지 못할 것이오. (310∼311쪽)


문채와 숭고

회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요. 빛과 그림자가 색채로 재현되어 같은 화면 위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도 빛이 먼저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빛이 두드러질 뿐만 아니라 훨씬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오. 그와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감정과 숭고는 우리의 마음에 더 가깝소. 그리고 그것은 타고난 친화력과 광채 때문에 언제나 문채에 앞서 우리의 주의를 끌어 문채의 기교를 가림으로써, 말하자면 그것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오. (325쪽)


접속사의 몇 가지 불리한 점

그대가 이렇듯 접속사를 계속해서 삽입할 경우 감정의 긴박함과 울퉁불퉁함이 접속사의 사용으로 매끈하고 평탄해져서 찌르는 맛이 없어지고 금세 열기를 잃게 되오. 달리는 사람이 몸이 묶이면 속력을 빼앗기듯이, 마찬가지로 감정도 접속사와 다른 군더더기에 의하여 방해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소. 그럴 경우 그것은 운동의 자유를 잃게 되어 나는 무기가 발사된 듯한 느낌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오. (332쪽)


인칭 바꾸기

친구여, 그대는 보이지 않으시오. 어떻게 그가 마음속으로 그대를 데리고 그곳을 통과하며 그대가 들은 것을 눈으로 보게 해주는지 말이오? 그런 구절들은 실제 인물에게 직접 말을 건넴으로써 듣는 이를 사건의 현장으로 데려다주는 것이오. (343쪽)


우회적 표현

음악의 경우 이른바 반주에 의하여 주선율이 더 감미로워지듯이, 우회적 표현은 가끔 직접적 표현과 조화를 이루며 그것이 더 아름답게 들리게 해주는데, 우회적 표현이 과장되거나 몰취미하지 않고 쾌적하게 섞일 때에는 특히 그러하오. (347쪽)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

사상과 표현법은 대체로 밀접한 관계가 있소. 따라서 우리는 표현법의 영역에서 아직도 고찰되어야 할 요소들이 남아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오. 적절하고 장대한 말들의 선택은 놀랄 만큼 청중을 유인하고 매료하며, 연설가들과 산문 작가들은 모두 그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 자체로써 우리의 말들에 마치 가장 아름다운 조각에게처럼 대번에 장대함과 아름다움과 매력과 무게와 기운과 힘을 주기 때문이오. 그것은 말하자면 사물들에 생명과 목소리를 불어넣는 것이오. (351쪽)


은유

앞서 문채들에 관해서도 말했듯이, 강력하고 시의에 맞는 감정과 진정한 숭고야말로 중첩된 또는 대담한 은유에 대한 특효약이라는 것이오. 그것들은 급한 물살로 모든 것을 휩쓸어가거나 앞으로 내모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오. 아니, 그것들은 필수적으로 대담한 심상들을 요구하오. 그것들은 청중에게 은유의 수를 세어볼 여유를 주지 않소. 청중도 연설가의 열광에 참여하기 때문이오. (356쪽)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내가 알기로 가장 위대한 천재들은 흠 없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오. 완벽한 정확성은 진부해질 위험이 있으나, 위대한 저술에서는 큰 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간과되지 않을 수 없는 법이오. 아마도 저급하고 평범한 재능들은 모험하지 않고 높은 곳을 노리지 않는 까닭에 대체로 실수로부터 안전할 수밖에 없는 반면, 위대한 재능들은 다름 아닌 자신들의 위대성 때문에 늘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오. 내가 알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무엇이든 그 본성상 언제나 더 나쁜 측면이 더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이오. 실수에 대한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남지만, 탁월성에 대한 기억은 금세 녹아 없어지는 법이오. (360∼361쪽)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

나 자신도 호메로스와 다른 위대한 작가들의 적잖은 실수를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이들 실수들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흐뭇해서가 아니라 그것들이 의도적인 실수라기보다는 천재의 부주의와 소홀함에 의하여 우발적으로 일어난 간과(看過)라고 보기 때문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탁월성들이야말로 설사 그것들이 작품 전체에 걸쳐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하더라고 언제나 상을 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다른 이유가 없다면 그것들이 보여주는 정신의 위대성 때문에라도 말이오. (362쪽)


데모스테네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건대, 휘페레이데스의 아름다움들에는 비록 그 수는 많지만 위대성이 결여되어 있소. 그것은 정신이 맑은 사람의 태작(駄作)으로서 청중을 감동시키지 못하오. 휘페레이데스를 읽으며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말하기 시작하자마자 천재의 탁월성들을 가장 완전한 형태로 보여주니, 숭고한 말의 긴장감, 생동감 넘치는 감정, 충만, 준비성, 필요한 곳에서의 속도 그리고 그 자신의 접근하기 어려운 맹렬함과 힘이 곧 그것이오. 내 말하노니, 그는 신이 보낸 이 모든 재능들을 - 그것들을 인간적인 재능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경한 짓일 테니까요. - 자신 안에 집중함으로써 자신이 갖지 못한 장점들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도 자신이 가진 장점들로 경쟁자들을 모두 이기며 말하자면 천둥과 번개로 모든 시대의 연설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오. 그래서 그의 지속적인 감정의 분출을 태연히 지켜보느니 차라리 떨어지는 벼락을 향하여 눈을 뜨는 편이 더 수월할 것이오. (365쪽)


신들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

그렇다면 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을 추구하고 세세한 정확성을 경멸했던 저 신과 같은 작가들이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연은 열등하고 품위 없는 동물이 되도록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의 관람객이자 명예를 사랑하는 경쟁자가 되도록 마치 큰 축제에 초대하듯 우리를 생명의 세계와 전 우주 속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그래서 자연은 처음부터 무엇이든 위대하고 우리 자신보다 더 신적인 것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욕구를 우리 마음속에 심어놓았다는 인식이오. 따라서 전 우주도 인간의 고찰과 사고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사고는 때로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오. 그리고 인생을 두루 살펴보고 만물 속에서 비범한 것과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얼마나 우세한지 보게 되면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목적을 금세 알게 될 것이오. (366∼367쪽)


문장 구조

말해진 것에 장대함을 부여하는 데 여러 가지 구성 요소들의 결합보다 중요한 것은 없소. 그것은 신체의 경우와 같소. 개개의 사지는 다른 것과 분리되면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나 전체가 결합하면 완전한 통일체를 이루오. 마찬가지로 장대함의 효과들도 서로 분리되면 그것들 자체는 물론이고 전체적인 숭고의 효과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지만, 하나의 전체로 결합되고 화음의 띠들로 둘러싸이면 하나의 완전문(完全文)으로 완결되는 것 자체에 의하여 살아 있는 목소리를 얻게 되는 것이오. (381쪽)


숭고를 저해하는 것들 : 젠체하는 저질 리듬

나약하고 흥분된 리듬만큼 숭고한 구절을 해치는 것은 없소. 이것들은 순수한 무도 리듬으로 변질되고 마오. 지나치게 리듬화된 것은 무엇이든 가장 미세한 감정적 효과도 없이 단조로이 반복됨으로써 금세 부자연스럽고 싸구려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마치 노래가 청중의 주의를 드라마의 줄거리로부터 억지로 자기에게로 끌듯이, 지나치게 리듬화된 산문도 청중에게 말의 효과가 아니라 리듬의 효과만을 전달한다는 것이오. 그리하여 청중은 가끔 끊어지게 되어 있는 부분들을 미리 알고는 무용에서처럼 연설가보다 한발 앞서 그를 위하여 발로 박자를 맞춰주는 것이오. 난도질해놓은 문체 마찬가지로 너무 촘촘하거나 작은 단편들과 짧은 음절들로 잘라놓은 구절들도 장대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소. 그런 구절들은 말하자면 군데군데 나무못으로 거칠고 울퉁불퉁하게 이어 붙여놓은 듯한 인상을 주게 마련이오. (384∼385쪽)


간결과 장황

지나치게 간결한 표현도 숭고를 저해하오. 숭고는 너무 좁은 공간에 갇히게 되면 손상되기 때문이오. 이 말은 적절한 압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것을 작은 조각들로 절단하는 것을 의미하오. 절단은 의미를 저해하지만 간결은 곧장 핵심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오. 반대로 장황한 표현은 때 아니게 늘이는 까닭에 생기가 없소. (386쪽)


여담 : 문학 쇠퇴의 여러 가지 원인

······ 호메로스의 말처럼, "예속의 날은 미덕의 반을 앗아가버리기 때문이오. 그래서" 하고 그는 말을 이었소. "내가 들은 것이 사실이라면 퓌그마이오이 족 또는 난쟁이족을 가두어두는 새장들이 그 안에 갇힌 자들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몸을 옭아매는 사슬들로 그들을 불구자로 만들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예속도 설사 그것이 정당화된다 하더라도 영혼의 새장과 공동의 감옥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답했소. "친구여, 언제나 현재 상황을 헐뜯는 것은 쉬운 일이며 또 인간의 특징이기도 하지요. 아마도 위대한 인물들을 망쳐 놓는 것은 세계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욕망들을 움켜잡고 있는 이 끝없는 전쟁과 오늘날 우리의 생활을 점거하여 이를 뿌리째 파괴하고 있는 열정들일 것이오. 우리 모두가 앓고 있는 탐욕스런 병인 금전욕과 향락욕은 우리를 자신들의 노예로 만들고 있소. 아니, 그것들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익사시킨다고 해야겠지요. 금전욕은 우리를 시들게 하는 병이고, 향락욕은 가장 비열한 것이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가 무한한 부를 그렇게 존중하고도, 아니 신격화하고도 어떻게 거기에 수반되는 악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소. 제어되지 않은 무한한 부에는 사치가 가까이서 사람들 말마따나 보조를 맞추며 뒤따르기 때문이오. 부가 도시들이나 집들의 문을 여는 순간 사치도 함께 들어가 그 안에서 살지요.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 생활 속에 얼마 동안 머물게 되면 철학자들 말마따나 그곳에 둥지를 틀고는 곧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데, 탐욕과 교만과 허영이 곧 그것이오. 이것들은 서자가 아니라 그것들의 적자들이오. 그리고 이들 부의 자식들은 성년이 되면 곧 우리 마음속에 사정없는 폭군들인 오만과 무법과 파렴치를 낳게 되지요. 이것은 불가피한 과정이오.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이를 쳐다보지 않고 자신들의 미래의 명성에 유념하지도 않을 것이오. 이러한 악덕들이 순환하는 가운데 인간들의 삶은 점진적으로 파괴되고 정신의 위대성은 이울다가 사라지며 더 이상 추구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오. 왜냐하면 인간들은 자신들에게서 필멸의 부분은 존중하고 불사의 부분은 개발하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이오. (393∼3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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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4-01-10 17:58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2. 참을 수 없는 글읽기의 '가려움'
    from Value Investing 2014-01-13 14:51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면 그 원인은 필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글 속에 자체적으로 '가려움'이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가려움'을 느꼈거나.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가려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옳을까. 이런 선택이 특히 어려운 경우는 그 '가려움'을 어떤 강도로 긁든지 관계없이 긁는 대상이
  3. 모방에 대하여...
    from Value Investing 2014-02-01 00:16 
    (밑줄긋기)*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발견한 구절들 모방한다는 것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가장 모방을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러한 사실은 경험이 증명하고 있다.(37쪽) 고상한 시인들과 저속한 시인들시는 시인의 개성에 따라 두 가지 종류로 구분되었다. 고상한 시인들은 고상
 
 
숲노래 2014-01-10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러모로 생각하고 돌아볼 이야기가 많이 있네요.
이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마음에 담으면서
아름다운 새 이야기를 환하게 빚을 수 있겠지요.

oren 2014-01-10 19:36   좋아요 0 | URL
아주 오래 전에 쓰여진 옛날 책이지만 지금까지도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책이어서 더욱 놀라운 책이었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가득 담긴 옛 시인이 쓴 책들을 읽어볼 생각을 하니 마치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 들려달라고 조를 때의 심정을 새삼 알 것 같기도 하구요. ㅎㅎ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1. 드디어 네팔이다.
주석 달린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강주헌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 *


(『주석달린 월든』 31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들과 함께 걷는 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던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문명'에서 오롯이 벗어난 그곳 히말라야와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겨졌다.

히말라야로 떠나는 준비물 가운데 '몇 권의 책'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찍 산행을 끝내고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별 보는 일'과 '책 읽는 일' 말고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 능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 알버트 머메리가 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비롯해 소로우의 책도 세 권씩이나 챙겼다.(2년 전에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걷는다 1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네 권을 들고 갔다가 깔끔하게 다 읽고 돌아온 기억도 그런 '무모한 욕심'에 보탬이 되었다. 사실 올리비에의 책은 걷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만 나는 정작 '날아다니며' 거의 다 읽었던 듯싶다. 인천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오가는 비행시간이 제법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 잠겨 '시대의 반항아'이자 '참된 등산가'였던 머메리의 책과 '문명의 반항아'이자 '참된 철학자의 삶'을 살았던 소로우의 책을 읽는 재미는 얼마나 짜릿할까. 기대가 무척 컸었다. 실제로 네팔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를 벗어나 히말라야에 접어든 첫날 밤에는 (다음날부터 만나게 될 히말라야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머메리의 책을 두세 시간쯤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책을 펼치는 일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 얘기를 히말라야의 여러날 밤 속으로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서 빨리 소로우에 대한 얘기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올해 봄에 사들였던 소로우의 책은 나와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던 목사님(네팔 카트만두에 거주)께서 '여긴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으니 다 읽은 책들은 좀 남겨두고 가라'는 부탁까지도 애써 외면한 채 고스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나는 그때 무사히 되돌아온 그 책들을 다행히 요 몇 달 동안 거의 다 읽었다.

엊그제 마침내 제법 두툼한-그리고 주석도 제법 많이 달린-『소로우의 강』(원제는『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다 읽고 나니 이제야『주석달린 월든』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마저 생겨났다. (이 책은 진작에 사 두고 가끔씩 드문드문 펼쳐보기만 했다. 왠지 소로우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만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월든』이지만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이 책은 역시나 처음에 읽었던 그냥『월든』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월든』에 왜 이토록 방대한 주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월든』에 필요한 주석을 쓰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던 제프리 S. 크래머는 말한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라고. 그래서 '이 책은 신화처럼 읽힌다.'라고. 나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싶다.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월든』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물론 늦지 않다. 영웅을 그린 신화는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소로우 스스로 이 책 속의 한 장인 「독서」에서 그 방법을 미리 밝혀 놓았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여기고 있다. 『월든』은 어느덧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격상된지 얼마쯤 지났고, 어떤 독자들에게는 신화처럼 읽혀야 하는 책으로 바뀌었다.『주석달린 월든』은 괜히 나온 책이 결코 아니었다.

이 책 속에 담긴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두 번씩이나 두드린 내 계산기는 정확하게 1,640개라고 두 번 말한다. 놀라운 숫자이고 이렇게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은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더욱 놀라운 책이다.

소로우 형제와 함께 '일주일 동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보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콩코드의 숲속으로 되돌아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놓인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소로우가 말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아 가면서 들어야겠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새까맣게 놓치고 말았을 얘기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 몹시 궁금하다.



(『주석달린 월든』 52쪽)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85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88
(52쪽)


주석

85. ['시간의 홈'은 'the nick of time'을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이 표현은 16세기에 'in the nick'으로 처음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nick'이라는 단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나 막대에 새겨진 눈금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면 그는 용케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들어간 것이며 따라서 '시간의 홈'에, 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것이 된다.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88.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라toe the line'는 선원들에게 갑판 점호 시간에 두 판재를 이은 자리에 발끝을 대고 서라는 지시였다. 그래야 열이 반듯하게 정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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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쓴  제프리 S. 크래머의 머리말 가운데 소로우가 쓴 편지에 실린 '등산에 대한 숙제'도 무척 흥미롭다.)

                                               머리말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중략)

월든 호수로 이주한 날의 일기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7월 5일 토요일. 월든-어제 이곳에 살려고 왔다."

(중략)


소로는 일기에서 언급하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되풀이했듯이, 자서전이 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이겠는가?" 라고 묻고, 『월든』을 출간한 후인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월든』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서전이 아니라, 소로가 자신이 만들어간 신화적인 삶에 예술적인 완전함을 더하기 위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소로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는「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월든』을 월든 호숫가에 잠시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 생각해서 자서전으로 읽는다면, 소로가 에머슨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빨래를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해질 수 있다.

소로는 「독서」에서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도와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소로는 먼 옛날의 책, 동서양의 정신적인 고전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소로는 지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것이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중략)

소로가 경험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1857년 11월 16일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내겠네. 산을 오르는 게 궁극적으로 자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고 빠짐없이 적어보게. 그렇게 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네 경험의 중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만족할 때까지 고쳐 써보게. 인간은 앞으로도 산에 올라야 할 테니 자네가 산에 올랐던 이유를 먼저 자네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게. 처음 열두 번 정도를 시도해서 정확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끈기 있게 반복해보게. 특히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에 자네가 문제의 핵심이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도전해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자네 자신에게 설명해보게. 이야기가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네. 산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자네가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에서 무얼 보았는지 묻고 싶군.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입증되는 걸세. 산 정상에 올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점심 같은 걸, 여하튼 집에서처럼 푸짐하게 먹네. 어쩌면 집에 돌아온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네. 산이 뭐라고 말하던가? 산이 무엇을 하던가?


『월든』을 읽는 독자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주어질 터다. 『월든』을 읽는 데는, 즉 산을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월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시대마다, 또 개인에게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산에 오르고 월든 호수로 되돌아가며 『월든』을 다시 읽는다. 『월든』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설득력 있게 와 닿는 글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스승의 우화처럼 보편성을 띤다는 증거이며, 우화를 만드는 선각자이자 시인이었던 소로에게 보내는 찬사다.

 - 제프리 S. 크래머(주석을 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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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2) 먼댓글(3) 좋아요(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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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One summer night
    from Value Investing 2014-08-05 18:47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제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2. 허먼 멜빌의 『모비딕』을 둘러싼 이야기
    from Value Investing 2015-12-12 00:14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일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네 안으로 들어가 너를 들여다본다. - 니체, 『선악의 저편』, 제4장 <잠언과 간주곡> 중에서 * * * 내가 이 소설을 만난 건 대략 31년 전쯤이다. 물론 그 때 내가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받았던 대단한 감동은 오랜 세월 탓에 그저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풍경처럼 그저 어슴푸레하
  3. 다시 콩코드와 월든 호숫가로 발길을 옮긴 시간들
    from Value Investing 2017-04-18 16:57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 * * 어떤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그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호메로스가 대표적이다. 작가의 삶이 덜 알려질수록 작품이 더욱 신비로운 색깔로 채색되는 경우도 드물지는
 
 
oren 2013-12-10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는 그 소식만 듣고, 그 이후 '간다, 온다' 소식을 듣지 못한 어느 알라디너 분께서, 그 먼 데까지 '링크'를 걸어달라는 정중한 부탁을 해주신 덕분에, '먼댓글'이 제법 '멀리까지' 내려간 점을 부디 양해해 주세요~

숲노래 2013-12-10 0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은 영웅이라기보다는 시골이웃이리라 하고 생각해요.
어느 책으로 돌아보더라도
호미와 연필을 손에 쥐고 즐겁게 삶을 지은
시골이웃.

이러한 시골이웃, 영웅 아닌 시골이웃이 차츰차츰 늘어날 때에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 수 있으리라 느껴요.

oren 2013-12-10 09:50   좋아요 0 | URL
비록 콩코드에 사는 이웃 사람들 대부분은 소로우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소로우 또한 지역 잡지에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마다 이웃 주민들이 '재미없어 할까봐' 고민했던 흔적도 여러차례 드러냈지만, 그런 점들은 소로우에게 결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했지요. 그는 시골 이웃 사람들로서는 쉽게 짐작하기 어려웠던 '전혀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는 사람이었으니까 말이지요.
* * *
내가 아는 한 청년은 몇 에이커의 땅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는데 그는 '여력만 있다면' 나처럼 살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이 내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 까닭은 그 사람이 내 생활양식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나는 또 다른 생활양식을 찾아낼지 모를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제각기 다른 인간들이 존재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고유한 길을 조심스럽게 찾아내어 그 길을 갈 것이지, 결코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 또는 이웃의 길을 가지는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월든』중에서

oren 2013-12-10 10:20   좋아요 0 | URL
저는 월든을 처음 읽을 때 소로우에게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제 생각을 적어둔 게 있는데,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아직도 가끔씩 그때 떠올렸던 시골 할아버지 생각이 난답니다. 그분은 손수 호미를 들고 밭을 가꾸시기 보다는 주로 꿀벌을 키우셨지만요.

* * *

이웃에 사람이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던 모든 이점이 대단치 않은 것임을 느꼈고 그 후로는 그런 것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솔잎 하나하나가 친화감으로 부풀어올라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었다. 나는 사람들이 황량하고 쓸쓸하다고 하는 장소에서도 나와 친근한 어떤 것이 존재함을 분명히 느꼈다. 나에게 혈연적으로 가장 가깝거나 가장 인간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인간이거나 어떤 마을 사람이지는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부터 어떤 장소도 나에게는 낯선 곳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꼈다.(P189)

(나의 생각)
소로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사시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태어나 자란 마을은 집성촌이었던 때문에 그 할아버지도 집안 어른이셨는데, 학문의 깊이로는 이웃 수십킬로 이내에서는 따라올 만한 분이 없다고 할 정도였었다. 아주 어릴 때의 기억이라 자세한 건 생각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통달하셨고,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대한 깊이가 대단하다고 하셨던 것 같다. 그 할아버지는 특이하게도 우리 마을에서 2∼3km쯤 떨어진 강 건너 산 아래에 홀로 사셨다. 머리도 백발이셨고 콧수염과 턱수염도 백발이셨기 때문에 어떨 땐 산신령을 좀 닮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우리가 가끔씩 강을 건너 산으로 땔깜나무를 하러 다니거나, 한 겨울에 토끼나 꿩을 잡으로 다닐 때나, 농삿일을 도우러 할아버지가 사시던 집 근처를 지나칠 때면, 그 할아버지는 언제나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다. 우리는 늘 '혼자 산 밑에 사시면 깜깜한 밤이 되면 얼마나 무서울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 분의 삶 또한 소로우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연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도 외롭지 않고, 늘 옛 성현들과 만나고 또 그 분들과 대화하기 위해 '고전'을 읽는 데 평생을 보냈던 것 같다.

마녀고양이 2013-12-1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를 모르겠으나,
오늘 제 어깨에 지나치가 힘이 들어가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잠시 힘을 빼봅니다. 하아.......
한때 소로우를 정말 부러워하고 그렇게 살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실은 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와 맞물려 있음을 깨달으면서
소로우처럼 순수하게 그 자연 속에서 사는 목적이 아니었구나 싶더군요. 언젠가
저도 소로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히말라야 여행 궁금합니다. 곧 올려주실거죠? ^^
다시 보니 먼댓글에 다 있었군요.... 와아,

oren 2013-12-10 13:47   좋아요 0 | URL
소로우는 월든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일기에서 "삶! 삶이 무엇이고, 삶이 무엇을 하는지 누가 알겠는가?" 라고 썼을 정도로 '삶 자체를 모험 속에 내던진' 사람이었죠.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일 때였으므로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해요. 누구나 한때 집을 떠나 홀로 살고 싶은 꿈을 꿔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싶어요. 그러나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래저래 여러 '삶의 굴레' 속으로 점점 빠져들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더욱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지도 모르구요.

히말라야에 다녀온지 겨우 일곱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제겐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지네요. ㅎㅎ

다크아이즈 2013-12-11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석달린 월든, 보관함에 담았어요.
제가 이해하든 못하든 오렌님의 발자국이 지나간 책은 관심을 아니 가질 수가 없지요.
소로우처럼 살고 싶지도 않고, 살지도 못해요.
다만 소로우 내면의 행적과 그 삶을 존중하고 알고 싶습니다.

논술 교재로 주석 없는 월든 읽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렌님 안내를 보니 다시 읽어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고맙습니다^^*

oren 2013-12-11 15:38   좋아요 0 | URL
『주석달린 월든』을 찬찬히 읽어 보니 한 권의 책 속에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 역사와 문화, 경제와 철학, 자연과 과학, 소설과 시를 비롯한 문학 등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부분이 빼곡히 들어차 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에서 불쑥 내던지는 원대한 생각은 어른이 된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그 자체로 빛나기 때문에 구름에서 번갯불을 끌어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 소로우 님이 스스로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날만큼 지혜롭지 못한 걸 항상 한탄한다'면서 무려 9년 동안이나 묵히고 다듬어 쓴 글이니, 팜므님이 다시 읽어보시면 틀림없이 새롭게 다가오는 대목이 많으리라 믿어요.

숲노래 2013-12-14 0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육사 위인전을 읽으니,
이육사 님도, 이녁 형제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집안이 넉넉한 살림이었어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학문도 함께 하면서 지내셨더라고요.

oren 2013-12-14 12:15   좋아요 0 | URL
아하.. 이육사 님도 손수 농사지으면서 시를 쓴 시인이었군요. 『소로우의 강』에서 소로우 님이 글을 잘 쓰려면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우라'고 했던 깊은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 * *

한가로이 공부만 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장작 패는 법이라도 배워라. 학자도 땀 흘려 일하고, 여러 사람과 대화하고, 갖가지 일을 보고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 꾸준히 해야 하는 노동은 공부 못지않게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글과 말에서 쓸데없는 수다와 감상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당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하고 나서 그 시간 동안 생각의 흐름을 놓쳤다고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하지만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그날의 경험을 단 몇 줄이라도 적어보라. 상상력은 뛰어나나 게으른 공상에 불과한 글보다는 훨씬 음악에 가까운 진실한 글이 나올 것이다. 작가란 모름지기 노동자들의 세계를 다뤄야 하므로, 그의 삶의 원칙도 그러해야 한다.

짧은 겨울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패서 묶어내야 할 장작들이 많이 쌓여 있는 작가를 상상해보라. 그는 일터에서 쓸데없이 춤을 추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시간을 아껴 굳은살이 박힌 투박한 손으로 도끼를 들어 장작을 내리찍는 소리가 쩌렁쩌렁 숲을 울릴 것이다. 이렇게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나온 그의 글들은 도끼 소리가 잦아들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독자들의 귀에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학자는 손에 못이 박힐 정도로 강인한 진실을 쓰기 위해 애써야 한다. 손에 박힌 못이 그가 쓰는 글을 튼튼하게 만들어준다. 실제로 몸이 활기차지 못하면 정신의 노력이 나아질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우리는 글 쓰는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내몰렸을 때, 금세 힘차고 정확한 글투에 도달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곤 한다. 솔직하고 생기 있고 성실하면서 잘 다듬어진 글투는 학교가 아니라 농장과 일터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런 투박한 손으로 쓰여진 글들은 잘 무두질된 가죽끈이나 사슴의 근육, 소나무 뿌리에 못지않게 질기고 억세다.

그랜드슬램 2017-05-26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3년전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갔을 때
<월든>을 배낭에 넣어서 간 적이 있더랬습니다.
시간관계상 푼힐까지 가는 곳 롯지에서 설산을 바라보며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감자튀김에 맥주를 마시고 홀로 침잠하며 소로우의 삶과 철학을 느꼈는데
여행의 행복이 배가 되었습니다.
항상 금과 같은 리뷰와 페이퍼의 글을 소중히 읽고 있는 독자입니다^^
감사드리고 항상 건강하시어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oren 2017-05-28 23:28   좋아요 0 | URL
오호.. 그랜드슬램 님께서도 히말라야 가셨을 때 <월든>을 가지고 가셨었군요. 정말 놀랍네요. 제가 4년 전에 ‘랑탕계곡‘ 쪽으로 트레킹을 갔을 때 ‘안나푸르나‘ 쪽으로 트레킹 갔다 온 친구도 함께 동행했었는데, 나중에 언젠가는 저도 ABC, EBC 코스로 또다시 트레킹을 나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언젠가 또다시 히말라야를 찾을 때, 그 때도 <월든>을 들고 갈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