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월든』을 만날 시간



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제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시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 * *

(다음에 인용하는 글들은 모두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책에서 뽑은 것이다. 사진들은 모두 지난주 금요일, 즉 8월의 첫날 저녁에 찍었고 시간대 순으로 올렸다. 각각의 사진에 어울릴 만하다 싶은 인용글부터 먼저 내세우고 사진을 뒤이어 붙였는데, 결국 인용글과 사진들이 너무 많아 그들 사이의 긴밀한 연관성은 적잖이 줄어든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이런 시도가 애초부터 무리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이왕 여기까지 내친 걸음이라 그대로 올려봤다.)


이런 조용한 저녁 무렵이면

요즈음에는 하루하루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우연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행복한 하루를 보내는 이런 조용한 저녁 무렵이면 시간이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영영 흐르지 않을 것만 같다. 기우는 햇빛이 반사되어 금물결을 일으키는 마른 들판과 그 들판의 현삼(玄參)이 나의 양식이다. 자연의 현재 모습을 '젖 먹이는 어머니' 이외에 또 달리 표현할 말이 어디에 있겠는가!

 - 『소로우의 일기』, 1838년 9월 20일



 

오후 세 시에도 마치 새벽 세 시인 양 앉아 있는 것을 보면

나는 얼마간 녹이 슬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방 안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저녁의 그림자가 햇빛과 이미 섞이기 시작해 하루를 벌충하기에는 너무 늦은 오후 네 시, 그 막바지 시간에도 산책을 하러 살며시 집을 빠져나오는 데 속죄해야 할 어떤 죄라도 저지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주 혹은 몇 달, 나아가, 합하면 대략 몇 년 동안이나 자기들 스스로를 하루 종일 가게나 사무실에 가둘 수 있는 내 이웃들의 도덕적 무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인내력이 나를 놀라게 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지금 오후 세 시에도 마치 새벽 세 시인 양 앉아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도대체 어떤 물질로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다.
보나파르트가 새벽 세 시의 용기를 말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당신네들이 아침 내내 본 것처럼 스스로의 본성에 반하여 오후 이 시간에도 명랑하게 앉아 있어서, 공감이라는 강력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는 한 주둔군을 굶겨서 기어코 밖으로 나오게 하는 사람들의 용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때쯤, 말하자면 조간신문이 오기에는 너무 늦고 석간신문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오후 네다섯 시 사이에 대로를 가로질러 큰 폭발이 일어나서 낡고 촌스러운 개념과 변덕을 사방으로 날려 거풍시키지 않는지-그리하여 악이 스스로를 정화하지는 않는지 궁금하다.


 -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129쪽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혹은 얼마나 가까이 좁게 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자연현상의 아주 많은 부분을 이런 이유로 인해 사는 동안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정원사는 단지 자신의 정원만 본다. 정치경제학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공급은 수요에 응한다. 자연은 돼지 앞에다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풍경은 우리가 소중히 여길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한 티끌의 더도 아니라-의 아름다움만을 우리에게 내보인다. 어떤 사람이 한 특정한 언덕 꼭대기에서 보게 될 실제 사물들은 다른 사람이 보게 될 사물과는 바라보는 사람이 다른 것만큼 상이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진홍참나무가 이미 당신 눈 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에 관한 생각에 사로잡혀 그것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그렇게 되면 우리는 다른 것은 거의 볼 수 없다.

 - 『가을의 빛깔들』, 216∼217쪽







 

서산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는 하늘의 별보다 더 자유롭다. 불평 따위를 여행 가방에 넣고 다닐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짐이 무거울 텐데. 나는 여론, 정부, 종교, 교육,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내년 봄에 나는 어쩌면 미들섹스 군에서 과세 투표용지를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니아의 야자수 아래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창을 던지고 있을지도. 혹시 메사추세츠 주에서 옥수수와 감자를 재배하거나 소아시아에서 무화과나 올리브를 키우고 있지는 않을까? 그게 아니면 혹시 스테이트 가의 사무실에서 온종일 앉아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타타르 지방의 초원지대를 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지는 않을까? 거인국을 찾기 위해 아르헨티나 남부의 파타고니아 지방을 돌아다닐지도 모른다. 또는 소인국을 찾아 유럽 최북단의 라프랜드를 항해하고 있을까?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에서의 아라비안나이트 이상으로 흥미 있는 모험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페납스콘 강 상류에서 일하는 벌목공이 된다면 아마 먼 훗날 물과 땅을 오갔던 강귀신에 대한 전설 속에 내 이름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또는 트리턴이나 프로테우스에 버금가는 쟁쟁한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도 있다. 누트카의 모피를 중국으로 가져간다면 나와 누트카의 모피는 제이슨과 그의 유명한 황금빛 양털보다 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겠지. 아니면 남해를 탐험하여 한노(Hanno), 마르코 폴로, 만데빌 등이 걸었던 길을 되짚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땅에 매인 운명도 아니고, 우리가 사는 마을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 해거름에 보조를 맞추어 길을 걷다가 서산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소로우의 일기』, 1840년 3월 21일



 

호수와 연못들은 하늘의 빛을 얼마나 많이 즐기고 있는가.

대지의 표면에 있는 각각의 호수와 연못들은 하늘의 빛을 얼마나 많이 즐기고 있는가. 호수 위의 빛이 없다면 어떤 숲도 그렇게 깊고 어둡지 않다. 호수의 창문이나 천창(天窓)은 그 수면만큼 넓다. 호수는 하늘과 맞닿는 곳까지 뚜렷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산의 정상에서는 숲으로 인해 빛을 볼 수 없다. 그러나 호수 위에서는 빛으로 목욕을 하게 된다.

                                                                                                                               1852년 10월 12일 일기

 - 『흐르는 강물처럼』114쪽







 

일몰의 하늘을 바라볼 때

일몰을 바라볼 때마다 해가 지는 곳만큼이나 멀고 아름다운 서부로 가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 해는 매일 서쪽으로 이동하며 자기를 쫓아오라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는 우리 국민이 따라가는 위대한 서부 개척자이다. 태양빛에 마지막 황금으로 물든 산 능선들이 단지 수증기로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밤새 지평선에 있던 능선을 꿈꾼다. 아틀란티스 섬과 헤스페리데스 섬들과 정원 같은 지상의 낙원들은 신비와 시(시)에 싸여 있는 고대의 위대한 서부였던 것 같다. 일몰의 하늘을 바라볼 때 상상 속에서 헤스페리데스의 정원과 이 모든 우화들의 근원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142쪽





 


인간이 천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인간이 천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우리는 호수에 비친 고요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호수에 간다. 우리가 잔잔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호수에 가지 않는다. 통치자나 피통치자 모두 아무런 원칙 없이 사는 나라에 무슨 고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정치가의 비속함에 대한 나의 기억이 산보를 방해한다. 나의 생각은 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나는 자연을 보려하나 다 헛된 노력일 뿐이다. 나의 생각은 어쩔 수 없이 국가에 대해 모반을 꾀하는 쪽으로 간다.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라면 모두 그 모반에 동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소로우의 일기』, 1854년 6월 16일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시간은 내가 낚시질하는 강을 흐르는 물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 강물을 마신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모래 바닥을 보고 이 강이 얼마나 얕은가를 깨닫는다. 시간의 얕은 물은 흘러가 버리지만 영원은 남는다. 나는 더 깊은 물을 들이켜고 싶다. 별들이 조약돌처럼 깔린 하늘의 강에서 낚시를 하고 싶다. 나는 셈을 전혀 할 줄 모른다. 알파벳의 첫 블자도 모른다. 나는 태어나던 그날처럼 현명하지 못함을 항상 아쉬워한다.

 - 『월든』141쪽





 


 

기억 속에서 아득히 멀어진 계절들이 있다.

나는 갈수록 더 자연에 몰입하고 있다. 지적인 면에서 난 이전보다 자연에 더 순종하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그다지 잘 순종하지 않는다. 기억 속에서 아득히 멀어진 계절들이 있다. 스스로를 강제하는 일은 적어진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나의 천박함에 익숙해지고 나의 낮은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된다. 오, 나 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길 수만 있다면! 밑으로 추락할 때마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소로우의 일기』, 1851년 10월 12일







 

꿈속에서 양서류가 된 나는

꿈속에서 양서류가 된 나는 시내와 호수에서 농어, 잉어와 장난을 친다. 꿈속에서 나는 물고기들이 물가를 노닐면서 만든 복도처럼 구불구불한 물결 한가운데에서 강꼬치고기들과 함께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 『소로우의 일기』, 1840년 2월 14일



 

물에 하늘이 비치는 것은

물에 하늘이 비치는 것은 나의 마음이 하늘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 자체가 고요하고 투명하고 평온하기 때문이다. ······ 지하의 푸른 하늘인 강에는 지금 붉은 색조의 구름이 깔리고 있다.

『소로우의 일기』, 1851년 8월 31일



 

언젠가는 태양이 이전보다도 더 밝게 빛나며...

지난 어느 날 일몰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 그것은 우리가 한 순간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빛이었고 공기 또한 너무나 따뜻하고 고요해서 그 들판을 천국으로 만드는 데 부족한 것이라곤 없었다. 이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어떤 일회성 현상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저녁에 영원히 계속해서 일어나 그곳을 걷는 마지막 아이를 기쁘게 하고 다시 용기를 내게 하리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찬란해 보였다.

도시에 아낌없이 퍼부었던 그 모든 영광과 광채를 안고 어쩌면 이전에 졌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집 한 채 보이지 않는 외딴 들판 위로 해가 진다. 거기에는 날개를 태양빛으로 도금한 외로운 개구리매나 굴에서 밖을 내다보는 사향뒤쥐가 있을 뿐이고, 늪지 한가운데는 검은 빛 작은 시내가 있어 썩어가는 그루터기를 휘감으며 막 굽이쳐 흐르기 시작했다. 마른 풀과 나풋잎들을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너무나도 부드럽고 평온하게 빛나는 정말 순수하고 밝은 빛 속으로 걸어가면서, 잔물결이나 소리 하나 없는 그 같은 황금빛 큰물에 목욕을 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숲과 언덕의 서쪽 면은 엘뤼시온(66)의 경계처럼 빛났고 등 뒤에 있는 태양은 저녁에 우리를 집으로 몰고 가는 온유한 목자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성지(聖地)를 향해 걸어간다. 언젠가는 태양이 이전보다도 더 밝게 빛나며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을 비춰 가을에 제방의 경사면 위로 내리는 따뜻하고 평온한 황금빛 같은 위대한 각성의 빛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

 -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173∼174쪽







 

자연의 경치는 인간적인 애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자연을 보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인간적 견지에서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 자연의 경치는 인간적인 애착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고향의 경치는 여느 경치와는 다르다. 자연은 그 찬미자에게 가장 큰 의미를 지니고 나타난다. 자연에 대한 찬미자는 인간에 대한 찬미자이기도 하다. 만일 나에게 어떤 친구도 없다면 자연이 나아게 무슨 의의를 지니겠는가?

『소로우의 일기』, 1852년 6월 30일



 

이 세상에 석양 진 하늘만큼 숭고한 그림은 없다.

이 세상에 석양 진 하늘만큼 숭고한 그림은 없다. 석양을 보기 위해서 그 누구와 만날 필요는 없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사람들과 단절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명확히 자각하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은 인간 사회로부터 멀어진다. 교제에 대한 나의 욕망은 무한히 크지만 실제 사회에 대한 나의 적응력은 오히려 감소한다.

 - 『소로우의 일기』, 1852년 7월 26일







 

나는 시간의 뚜껑을 열고 그 아래를 들여다본다.

자연의 소리를 듣다 보면 젊은 시절의 낭만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될 때가 있다. 유년기에는 천국이 우리 옆에 있었다. 지금도 천국은 우리 옆에 있다. 자연의 소리는 격하거나 지나치지 않고 거짓 또한 없다. 자연의 소리는 언젠가 꿈꾸었단 나의 꿈을 꿈이 아닌 유일한 실질적인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그리고 기적만이 만족시킬 수 있는 믿음을 고양시킨다. 나는 다시 극히 섬세한 본능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된다. 다시금 영웅의 자질을 생각하게 되고 또 생각한 것들을 확신하게 된다. 자연의 소리는 나에게 남은 시간들이 거쳐야 할 삶이 아닌 삶, 삶을 넘어선 삶이 된다. 나는 시간의 뚜껑을 열고 그 아래를 들여다본다.

 - 『소로우의 일기』, 1841년 1월 30일






 

 

시간을 지켜라. 열차 시간이 아니라 우주의 시간을 준수하라.

가사 일도 서두르면 낭비가 생기듯이 인생에서도 성급함은 낭비를 낳는다. 시간을 지켜라. 열차 시간이 아니라 우주의 시간을 준수하라. 70년을 살았다 할지라도 개인의 삶이 우주의 삶과 일치하는 신성한 여가의 순간들을 누리지 못하고 급하고 거칠게만 살았다면 도대체 인생에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우리는 너무 급하고 거칠게 산다. 너무 빨리 음식을 먹기 때문에 음식의 진짜 풍미를 맛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소로우의 일기』, 1852년 12월 28일


 

 

하늘에서는 자개와 무지개 색조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왕래하고 있었다.

서쪽 하늘에 평화롭게 떠다니는 저 구름들처럼 생각의 물고기들이 강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숭고하게 왔다갔다할 수 있도록 우리는 경건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을 건넌다. 또는 부드럽게 서로를 부축해 준다. 우리가 걸을 때 마치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 같았고 정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춤하는 것 같았다. 또 하늘에서는 자개와 무지개 색조들이 모였다 흩어졌다 왕래하고 있었다. 나는 대적(大敵)과 함께 싸울 동지를 한 사람 얻었다.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푸른 하늘 아래 살고 있다.

 - 『소로우의 일기』, 1853년 5월 9일



 

그것들의 원경(遠景)과 비속성(非俗性)은 무한한 격려이다.

아! 나는 고독이 필요하다. 인간보다 더 웅장한 것과 만나 이야기하기 위해 석양에 언덕에 올라 저기 지평선상에 걸린 산맥을 바라본다. 그것들의 원경(遠景)과 비속성(非俗性)은 무한한 격려이다. 내가 굳건한 고독을 구하는 것은 나의 무한한 열망과 동경 때문이다. 

 - 『소로우의 일기』, 1854년 8월 14일



 

호수는 자연의 응접실, 자연이 앉아서 몸단장을 하는 곳이다.

여름에 호수는 액체로 만들어진 지구의 눈, 자연의 가슴에 있는 거울이 된다. 나무의 죄들도 이 호수 속에서 모두 씻겨 나간다. 나무들이 호수를 중심으로 원형경기장처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을 보라. 호수는 자연의 모든 상냥함을 보여주는 경기장이다. 모든 나무들은 여행자를 호숫가로 인도하고, 모든 오솔길들도 호수로 연결되며, 새들은 호수를 향해 날고, 네 발 달린 짐승들은 호숫가로 도망치고, 대지도 호수를 향해 경사져 있다. 호수는 자연의 응접실, 자연이 앉아서 몸단장을 하는 곳이다.

자연의 고요한 질서와 정결함을 생각해 보라. 태양은 매일 아침 증기를 몰고 와 호수 표면의 먼지들을 말끔히 치워버리고, 덕분에 깨끗한 수면에선 끊임없이 물이 샘솟는다. 그리하여 호수 속에 그 어떤 불순한 것들이 축적되든, 봄이 되면 어김없이 수면이 투명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면 조용한 음악이 수면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 『겨울 산책』







 

그 무엇도 내가 누구인가를 여름 햇빛만큼 잘 말해줄 수는 없다.

그 무엇도 내가 누구인가를 여름 햇빛만큼 잘 말해줄 수는 없다. 나는 나이지 나라고 말한 내가 나인 것은 아니다. 존재가 가장 위대한 설명자이다.

『소로우의 일기』, 1841년 2월 26일







 

인생은 이 사소한 일들의 최종적인 결산이다.

모든 문장은 오랜 시련의 결과이다. 속표지에서 책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책 속에는 저자의 인품이 속속들이 배어 있다. 이는 저자라도 교정볼 수 없다. 작가만의 특징이 담긴 육필을 읽기 위해서는 글을 읽을 때 장식적인 측면에 구애받아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다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생은 행위 하나하나를 점점이 이은 선, 곧은 자로 줄을 그은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많은 도약을 했느냐에 관계없이 그 선은 늘 직선이다. 우리의 인생은 극히 사소한 일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의해 평가받는다. 인생은 이 사소한 일들의 최종적인 결산이다. 우리를 지켜보는 눈도 없고 상벌도 없는 평범한 날들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고 잤으며 작은 시간들을 어떻게 쪼개 썼는지에 따라 앞으로의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권위와 능력이 결정된다.

 - 『소로우의 일기』, 1841년 2월 28일




여행자

여행자!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여행자는 여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존경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우리의 인생을 가장 잘 상징하는 말이 '여행' 아니겠는가. 개인의 역사란 결국 요약하면 '어디'에서 '어디'를 향해 가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여행자 중에서도 특히 밤에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

『소로우의 일기』, 1851년 7월 2일







 

각 계절의 영향력에 너 자신을 맡겨라.

계절이 지나가는 대로 각 계절 속에 살아라. 계절의 공기를 호흡하고, 계절의 음료를 마시며, 계절의 과일을 맛보아라. 각 계절의 영향력에 너 자신을 맡겨라. 계절들로 하여금 너의 유일한 식품, 음료, 약초가 되게 하라. 8월에는 딸기를 먹고 살아라. 육포와 페미컨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말라.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거나 북부의 끝없는 사막 지대를 통과할 때에나 필요한 것들이다. 땀구멍들을 모두 열고 사철 내내 자연의 모든 시내와 대양과 조수에 멱을 감아라. 독기와 병마는 우리 내부에서부터 온다. 자연이 주는 거대한 영향력을 흡수하기는커녕 부자연스러운 생활만을 계속하다가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른 환자는 특정한 풀로 끓인 차만 마시면서 여전히 부자연스런 생활을 계속한다. 그는 판편으로는 아끼면서 한편으로는 낭비한다. 그는 자연과 인생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병들어 죽는다. 어떤 의사도 그를 낫게 할 수 없다. 봄에는 푸르게 자라라. 그리고 가을에는 노랗게 익어가라. 계절의 영향력을 마셔라. 자연이 각별히 당신을 위해 온갖 치료약을 섞어 만든 진정한 만병통치약을 마셔라. 진정한 몰약을 마셔라. 여름의 음식이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하실에 보관해 둔  음식이 사람을 병들게 만든다. 과일주를 마셔라. 당신이 염소 가죽이나 돼지 가죽에 담근 술이 아니라 자연이 무수히 많은 싱싱한 딸기 껍질들 속에 담가놓은 술을 마셔라. 자연으로 하여금 음식 저장용 용기가 되게 하고 음식을 절이는 소금이 되게 하라. 자연은 우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 매순간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연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이다. 그 이외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자연에 저항하지 말라. 일부러 건강해지려고 애쓰지 않을수록 병드는 일도 없게 된다. 사람들은 야생적인 것 중에서 몇 가지는 유익하나 자연 전부가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별견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왜 '자연'이 건강의 또 다른 명칭이고 사계절이 왜 건강의 각기 다른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특정한 계절이 몸에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계절 탓이 아니라 자기 자신 탓임을 사람들은 잊고 산다.

 - 『소로우의 일기』, 1853년 8월 23일



 

음악을 들을 때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표현이 충분히 일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적인 믿음과 통찰이라는 좁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는 한계를 긋지 않고 말하기를 원한다. 내가 납득한 진리를 적절히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야 어느 한 사람의 순간적 깨달음이 다수의 순간적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탁 트인 초원의 먼 지평선 쪽으로 정처 없이 걷는다. 음악만큼 법에 복종하고 법에 매여 있으면서도 모든 사소하고 편협한 속박들을 가차없이 거부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음악을 들을 때마나 나는 나의 한계 속에서 길들여진 말로 이야기하고 있지나 않은지 두려움을 느낀다. 

 - 『소로우의 일기』, 1854년 2월 5일



 

그 하찮은 악곡이 얼마나 귀중한 우리의 인생에 대한 논평인가!

누군가 계단 아래에서 기타 퉁기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살아온 순간들을 일깨우는 소리이다. 그 하찮은 악곡이 얼마나 귀중한 우리의 인생에 대한 논평인가! 그 악곡은 우주의 모든 소란과 진창으로부터 나를 들어올린다. 나는 깨끗한 옷자락을 펄럭이며 나의 인생의 장 위를 올라가 떠다닌다. 동심(同心)의 영역 안에 있는 인생 안의 인생이다. 내가 수고하는 곳이면서도 언젠가는 쓸모없게 될 장이 이처럼 또 다른 인생을 위한 장이기도 한 것이다. ······ 이 희미한 기타 소리에 감명을 받는다는 사실은 앞으로 다가올 나의 봄들 안에 아직도 건강함과 불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야말로 만병 통치약이다. 이 세상에 잠시 들러 보온용 접시덮개 밑에 살던 내가 지금은 천국 아래 산다. 그 소리가 나를 방면한다. 나를 얽매던 속박을 끊어버린다. 거의 모든 것, 아니 모든 것이 비교해서 말하자면 진부한 절망에 불과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운명의 완전한 장관이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늘 우리의 운명을 평가절하한다. 불신만을 말한다. 왜 인간이라는 종족은 불신만 하는가? 황홀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아주 희귀한 순간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성향과 더불어 나의 믿음은 결국 무엇이 되고 마는가? 이 가련하고 소심하고 미개하고 둔감한 피조물이 무엇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음악을 들을 때 나는 어떤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는 난공불락의 요새가 된다. 내 눈에는 어떤 적도 보이지 않는다. 최초의 나와 최후의 나가 이어진다.

잠과 죽음에 가까운 인생에서 영원히 깨어 죽지 않는 인생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수준의 인생이 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개개인의 인생만큼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없다. 나는 군중이 자신들의 운명이 아주 아름답고 웅장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 『소로우의 일기』, 1857년 1월 13일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시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시가 될 수 있을까? 삶이 시가 아니라면 우리의 삶은 삶이 아니라 죽음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삶에 너무나도 넌더리가 나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일까? 원래 사람들은 일상의 삶 따위를 문제 삼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까? 나는 가장 중요한 물음은 우리가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야 올바른 생을 살아가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해답을 찾고자 한 책을 아직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정직하지 못하게 그릇된 방법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답할 자격이 없다. 우리 사회는 많은 기술을 갖추었지만 이 점에 대해서만은 아무런 능력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 『소로우의 일기』, 1851년 2월 18일







 

해 진 후 별들이 언덕과 나무숲 뒤에서 무리 지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

해 진 후 별들이 언덕과 나무숲 뒤에서 무리 지어 나오는 모습을 보면 좀 더 호기심에 차고 감동적인 밤을 보내지 못한 나의 무능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 『소로우의 일기』, 1840년 7월 26일



 

한때는 여름이었다.

겨울은 눈송이처럼 빠르게 다가 오고 있다. 노인들의 예측이 늘 맞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한때는 여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겨울이다. 자연은 어찌나 이 리듬을 좋아하는지 아무리 되풀이해도 지겨워하지 않는다.

 - 『소로우의 일기』, 1856년 12월 7일







 

언젠가 시 한 수를 짓겠다.

언젠가 '콩코드'를 제목으로 시 한 수를 짓겠다. 강, 숲, 호수, 언덕, 들판, 늪, 초원, 거리, 건물, 마을 사람들 등으로 장을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아침, 정오, 저녁, 봄, 여름, 가을, 겨울, 밤, 인디언의 여름, 지평선상의 산맥도 독립된 장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소로우의 일기』, 1841년 9월 4일



 

인생만이 중요할 뿐이다.

어떠한 주제라도 나에게는 하찮은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일상적인 주제에 입각한 글을 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글의 주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만이 중요할 뿐이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직 인생이 자아내는 깊이와 강렬함이다. 우리가 다루는 주제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지만 경험이라는 우리의 피라미드 또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참여 정도에 의해 우리의 글이 보다 폭넓은 기반 위에 자리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난다. 즉 인간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연이 인간을 밖으로 끌어내어 그를 비추기 전까지는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 『소로우의 일기』, 1856년 10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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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겹의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자연은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늘 속도가 일정하다. 싹은 마치 짧은 봄날이 무한히 길기라도 하듯이 서두르거나 허둥대는 일 없이 서서히 싹튼다. 자연은 무엇이든 자신이 하는 일 하나하나에 지극히 공을 들인다. 마치 유일한 목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연과 달리 왜 인간은 극히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에 마치 영원보다 더한 어떤 무엇이라도 맡겨진 양 그다지도 서두르는 것일까? 몇 겹의 무한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인간은 손톱 깎는 일 따위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는 해가 마지막 남은 하루를 잘 마무리하라고 당신을 재촉한다고 여겨지면 귀뚜라미의 울음소리를 들어보라. 항상 변함없는 고르디 고른 곡조의 울음소리는 지금의 시간을 영원으로 여기라는 충고가 아니겠는가! 현명한 사람은 늘 마음이 고요해서 들뜨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딛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산책하는 사람과도 같은 모습이다. 반대로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축적된 피로가 쉬라고 강요하기 전깢비는 다리 근육의 긴장을 풀지 않는다.

『소로우의 일기』, 1839년 9월 17일



 

내면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한적한 시골집에서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지금 이 시절이 내가 그런 삶을 선택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를 제공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의 평범한 사고, 지루한 습관을 그곳으로 가져가 그곳 풍경을 망쳐놓고 싶지는 않다. 내면에서 아름다운 풍경이 실현되지 못한다면 밖의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 『소로우의 일기』, 1850년 10월 31일



 

삶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듣는다는 기분으로

삶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를 듣는다는 기분으로 자연의 소리에 경건히 귀 기울이자.

『소로우의 일기』, 1851년 6월 12일



 

그들은 과연 그들인가?

아! 나의 감각이 순수했으면 좋겠다. 내가 나인 적도 드문데 나 아닌 남들과 이야기할 필요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과연 그들인가? 따라서 우리는 거리를 두고 멀찍이 떨어져서 만나야 한다. 여름의 씨앗은 꽃부리에서 여물어 바람에 흔들리다 땅으로 떨어진다. 과거에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 너를 알지 못했다면 오늘 내가 너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아! 저 시냇물은 옛날보다도 더 많은 풍경을 담고 있다. 아! 저 시냇물은 미래를 예언하는 신비한 문장이다, 아무리 얕은 곳도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바라보는 자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시내를 무슨 수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

 - 『소로우의 일기』, 1851년 8월 17일



 

사냥꾼의 코트에서 사향쥐 냄새가 풍겨 나오듯이

사냥꾼의 코트에서 사향쥐 냄새가 풍겨 나오듯이 사물의 진리를 존중하는 자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진리가 풍겨 나오게 마련이다. 진리에 흠뻑 젖어보지 못한 자는 진리를 전할 방도가 없다. 젊은이에게는 열정인 것이 성숙한 이에게는 기질이 된다. 그는 자극이나 흥분이나 열정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들뜨게 하고 젊음을 자극했던 세상을 가만히 관조할 수 있다. 사물이 의미심장해야 말도 의미심장해진다. 어떤 사물이 경박하고 피상적으로만 이야기되는 이유는 순전히 말하는 자의 잘못일 뿐이다. 신탁도 숙명도 아닌, 듣는 이를 설득하지 못하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독특한 표현이다. 격식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소로우의 일기』, 1851년 11월 1일



 

올바른 관점에 서면 모든 폭풍과 빗방울이 하나의 무지개이다.

자연의 어느 부분이 우리의 동정을 자아낸다면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일 뿐이다. 자연은 영원한 건강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의 미를 부분적으로 잠시 볼 뿐이다. 올바른 각도에 선다면 무색의 얼음에서도 황홀한 무지갯빛을 볼 수 있다. 올바른 관점에 서면 모든 폭풍과 빗방울이 하나의 무지개이다. 미와 음악은 단순한 특색이나 예외가 아니다. 미와 음악은 규칙이고 인격이다.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예외일 뿐이다. 나를 황홀경에 빠뜨리는 풍경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알아보고 싶다. 내가 무슨 속성 때문에 이렇게 놀라움을 느끼고 매료되는가조차 도 알 수 없는데 하물며 우리가 우리의 사고와 감정을 은판 사진에 담을 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 『소로우의 일기』, 1855년 12월 11일



 

매듭이 끊어진 게 내 탓도 아니고 너의 탓도 아니다.

이제 또 하나의 우정이 끝났다. 무엇이 그 친구로 하여금 나를 의심하도록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사랑에는 어떤 잘못도 없으며 모든 소원해짐에는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그러나 나의 운이 옹색해진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 때문에 더 넓어졌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물러나 더 높은 곳에서 아치형을 이루었다. 나는 도덕적 고통뿐만 아니라 머리와 가슴에 아픔이 꽉 들어차는, 신들만이 알 엄청난 육체적 고통까지 느낀다. 매듭이 끊어진 게 내 탓도 아니고 너의 탓도 아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운명의 판정만이 영향을 미칠 뿐이다, 나는 만남과 헤어짐을 알 뿐 영원이나 기한, 삶과 죽음은 알지 못한다. 나의 삶은 갑자기 둑에 막혀 출구가 없어진 시내와 같다. 그러나 시냇물은 물을 가둔 언덕으로 더 높이 올라간다. 그래서 깊고 고요한 호수가 된다. 분명(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우리가 아는 존재로부터의 영원한 이별만큼 위대한 장관은 없다. 나는 어느 정도 유한과 무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결코(never)'라는 단어는 얼마나 웅장한 의미를 갖는가! 한번 높은 곳을 함께 걸었던 사람과 다시는 함께 낮은 곳을 걸어갈 수 없다. 우리는 불후의 쓰임새에 서로를 쓰려고 수많은 세월을 함께 애써왔지만 결국 실패했다. 우리의 선한 천재성이 상호간에 적합하지 않음을 발견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 최고의 경의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일관되게 서로를 신성하게 여겨왔다. 어떤 부나 친절도 줄 수 없는 삶의 기회를 서로에게 주어왔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느낄 수 없는 어떤 이유 때문에 이 상호간의 도움을 억제하게 되었다. 각각의 남녀는 모두 진실로 남신이자 여신이다. 그러나 동료들 무리에서는 자신을 감춘다. 각 무리마다 그 가면을 꿰뚫어볼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을 보기 위해 누구에게도 가까이 가지 않은 사람만이 진실로 혼자일 수 있다. 나는 너와의 이별을 무한히 슬퍼한다. 나의 마음에서 너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느니 내 발 아래의 땅이 꺼져버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 『소로우의 일기』, 1857년 2월 8일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희망하는 이는 스스로를 파문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글의 저자는 행인이 아니라 그가 관찰하는 사건들 앞에 영구적으로 뿌리를 내린 사람이어야 한다. 그가 관찰하는 사건들이 아무리 눈에 익다 하여도 지나치는 법은 없다.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타인(관찰자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시인이든 친구이든)에게 가장 가치가 있을 때는 그가 가장 만족스럽고 편한 곳에 있을 때이다. 거기에서 그의 인생은 가장 강렬해지고 순간들을 놓치는 경우도 가장 적어진다. 친숙한 주위의 대상들이 인생 최고의 상징이자 그의 인생을 나타내는 최고의 예증이다. 심오한 체험을 한 사람이 여행기 형식으로 자신의 체험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그는 세계 공통어 대신 유랑민의 언어를 사용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고향 땅에 깊이 뿌리내린 사림이다. 그는 옮겨 심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다. 현재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있기를 희망하는 이는 스스로를 파문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 부유하고 강해질 수 있는 곳은 바로 고향 땅이다. 자신을 좀 더 잘 표현하고 싶어서 나는 고향 땅에서 40년 동안 고향 산천의 언어를 배워 왔다. 대평원으로 여행한다면 대평원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고, 나의 지나온 삶이 대평원의 산천을 묘사하기에 부적절할 것이다. 만일 캘리포니아에 가더라도 여기에서 자라는 수많은 잡초가 캘리포니아의 거목들보다 나의 인생에서 보다 큰 가치를 지닌다. 우리에게 필요한 여행은 우리의 지성에 약간의 야외 바람을 쐬게 하는 정도의 여행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온 힘을 기울인다면 맬서스의 《인구론》이나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의 주장과는 반대로 이 세계에는 아직도 충분한 여유 공간이 남아 있다. 나는 여태까지 행성끼리 충돌했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 『소로우의 일기』, 1857년 11월 20일



 

호수를 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

이 계절 숲 속의 작은 호수들을 보기에 가장 좋은 시기는 폭풍우가 얌전하게 스치고 간 이후의 휴지기, 대기와 물은 완벽하게 고요하지만 하늘은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시기이다. 그 첫번째 이유는 이런 때가 되면 호수가 아주 잠잠하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대기가 아주 얕게 수축되어 있어 구름이 낮게 지붕을 이루고 있으므로, 그보다 더 낮은 하늘인 호수가 그만큼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사하는 수면을 갖고 있는 호수는 호수 위의 대기보다도 더 욱 천상의 느낌을 자아내고 더 밝게 빛난다. 
                                                                                                                                   1852년 8월 4일 일기

 - 『흐르는 강물처럼』111∼112쪽



 

이 작은 호수는 8월의 잔잔한 비바람이 불다 멈추다 하는 사이사이에

이 작은 호수는 8월의 잔잔한 비바람이 불다 멈추다 하는 사이사이에 나의 가장 소중한 이웃이 되었다. 그때는 비록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공기와 물이 다 같이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 오후의 한때일지라도 초저녁의 고요함을 지니고 있으며, 티티새의 울음소리만 이 기슭 저 기슭에서 들려왔다. 이런 호수는 바로 그와 같은 때에 가장 잔잔한 것이다. 호수 위의 맑은 공기층은 얇고 구름에 가려 있기 때문에 빛과 반사로 가득 찬 수면은 그 자체가 지상의 하늘이 되며, 나에게는 더욱 소중한 하늘이 된다.

 - 『월든』124쪽



 

호수만큼 순수하고 아름다우며 커다란 것이 또 있을까.

지구의 표면에서 호수만큼 아름답고 순수하면서 커다란 것은 없으리라. 하늘의 물, 그것은 울타리가 필요 없다. 수많은 민족들이 오고갔지만 그것을 더럽히지는 못했다. 그것은 돌로 깰 수 없는 거울이다. 그 거울의 수은은 영원히 닳아 없어지지 않으며,  그것의 도금을 자연은 늘 손질해준다. 어떤 폭풍이나 먼지도 그 깨끗한 표면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호수의 거울에 나타난 불순물은 그 속에 가라앉거나 태양의 아지랑이 같은 솔이, 그 너무나도 가벼운 마른걸레가 쓸어주고 털어준다. 이 호수의 거울에는 입김 자국이 남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입김을 구름으로 만들어 하늘로 띄워 올리는데, 그 구름은 호수의 가슴에 다시 그 모습이 비친다.

 - 『월든』, 271쪽



 

'상궤를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당신이 어떤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표현이 충분히 '상궤常軌를 벗어난' 것이 되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확신하고 있는 진리를 알맞게 표현할 수 있도록 나의 일상적인 경험의 좁은 한계를 벗어나 멀리 나아가지 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상궤를 벗어난다는 것', 그것은 당신이 어떤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새로운 풀밭을 찾아서 다른 위도로 옮겨가는 들소는 젖 짤 시간에 통을 차서 둘러업고 울타리를 뛰어넘어 제 새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암소만큼이나 상궤를 벗어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제한 없이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말이다. 왜냐하면 진실된 표현의 기초만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서는 아무리 과장을 하더라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나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가락의 음악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상궤를 벗어난 투로 이야기하는 것을 그 후로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 『월든』, 463∼4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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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과 사진이 잘 어우러졌어요^^
저도 님 덕분에 책꽂이 아래 있던 월든 꺼내 들었습니다.
젊을때 읽던 느낌이랑은 다를듯 합니다. 편안하게 읽을수 있겠어요.

oren 2014-08-07 12:09   좋아요 0 | URL
세실 님께서 그리 말해주시니 여러 권의 책들을 살핀 보람을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월든』에서부터 시작하여『주석달린 월든』까지 소로우가 쓴 여러 책들을 주욱 읽고 나니 그가『월든』을 얼마나 여러 번 고쳐 썼는지, 또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마다 얼마나 깊은 뜻을 담으려 애썼는지를 더 자세히 알게 되고, 그래서『월든』을 처음 접했을 때 가졌던 느낌보다 훨씬 더 새로운 느낌들을 많이 얻게 되는 것도 흥미로운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