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푸르나는 우리가 빈 손으로 갔지만 앞날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다시없는 보물이다. 안나푸르나를 오르고 우리 인생의 새 장이 열렸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있다."
- 모리스 에르조그(1950년 인류 최초로 고도 8,000미터가 넘는 안나푸르나에 오른 프랑스 원정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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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넓고 가보고 싶은 데도 참 많은 것 같다. 세상의 수많은 오지와 극지 가운데 히말라야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곳도 드물지 싶다.
나는 대학에 다닐 때 우연히 '안나푸르나 원정에 성공한 어느 등반대의 사진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아마도 '히말라야에 대한 동경'의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후 오랫동안 잊고 지내다가 1994년에 '암벽등반'에 도전하기 위해 코오롱 등산학교를 다니면서 다시금 '히말랴야'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어느새 '히말라야 14좌'로 불리는 산들의 이름과 고도는 물론 초등자까지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 후 히말라야는 그저 막연히 오르고 싶은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곳은 언젠가는 기필코 가봐야 할 곳으로 변했다.
(코오롱 등산학교 교재 중 일부)
등산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마침 '에베레스트 원정'을 다녀오신 정갑수 선생님께서 직접 우리반 학생들을 위해 '에베레스트 사진'까지 사다 주셨다. 그 멋진 선물을 받은 나는 두루마리 사진을 들고 동네가게로 달려가 얼른 유리액자에 담아서 내 방 책상 위에 걸어두고서 언제까지나 '그곳'을 가볼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히말라야'를 드디어 내일 찾아가게 된 것이다.
(내 방 한켠에 십수년째 '변함없이' 걸려 있는 히말랴야 사진)
(책상위에 반듯하게 걸려있는 에베레스트 사진)
(제목 그대로 'Top of the World', 실로 오랜만에 액자를 벽에서 떼어 내려놓아 보았다)
(해발 5,545m에 위치한 칼라파타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
금년 2월경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최종 결정하고 난 뒤 별다른 준비도 없이 막상 장거리 산행을 떠나자니 일말의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산행 준비를 하는 과정 자체가 걱정보다 즐거움과 설렘이 앞섰다.
침낭은 오래전 등산학교에 다닐 때 쓰던 게 상태가 너무 좋아 그대로 쓸 수 있지만, 해발 4,000m∼5,000m까지 오르기 위해서는 '고소 내의'를 비롯한 여러가지 준비물들이 적지않이 필요한 것 같다.
무엇보다 높은 고도에서의 희박한 산소 때문에 겪게 마련인 '고산병'이 걱정이다. 입맛도 떨어지고 무기력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저런 밑반찬까지 준비하다 보니 '짐'이 장난이 아니다.
저 많은 물건들을 트레커들이 직접 힘겹게 지고 올라갈 수는 없다. 다행히 20kg에 가까운 짐도 '포터'를 고용하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해서 무거운 망원렌즈는 물론 삼각대까지 챙겨넣었다. 내 짐을 지게 될 포터에게는 팁이라도 좀 더 줘야 할 지 모르겠다. 내가 메고 갈 배낭은 딸랑 40리터 짜리에 불과하다.
히말라야는 정말 오랫동안 '신들이 사는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인간의 발길을 허용한 지가 겨우 수십 년에 불과하다. 그 지난한 도전의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등반객들이 목숨을 잃었고, 또 많은 이들은 아직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거기에 묻혀 있다.
그 가운데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알버트 머메리이다. 그는 '머메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인물인데 그의 주장은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된다.
"보다 어렵고 다양한 루트(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로 올라라!"
그는 '등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지만 지독한 독서광이기도 했다. <산업생리학>(1891)이라는 경제학 저서를 직접 출판하기도 했으며 워즈워드와 테니슨의 시를 읊조리고,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그리스 신화에서 구약과 신약을 거쳐 조로아스터교에 이르기까지의 성전(聖典)들까지 들먹이는 수준이 되었다.
나는 여러 해 전에 불세출의 경제학자 케인즈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머메리의 경제학 저서 및 그의 이론'이 수십페이지에 걸쳐서 매우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적도 있었다!
그가 쓴 '산악문학의 걸작'이 바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라는 작품이다.
"참된 등산가는 하나의 방랑자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일찌기 인류가 도달하지 않은 곳에 가고 싶어하는 사람, 일찌기 인간의 손가락이 닿지 않은 바위를 붙잡거나, 대지가 혼돈에서 일어난 이래 안개와 눈사태에 그 음산한 그림자를 비쳐온 얼음으로 가득 찬 걸리를 깎아 올라가는데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의미한다.
바꾸어 말하면 참된 등산가는 새로운 등반을 시도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는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마찬가지로 그 투쟁의 재미와 즐거움에 기쁨을 느낀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느껴야 한다. 그것은 행복에 대한 강력한 감정이다. 그것은 온 혈관에 욱신거리는 피를 흐르게 하여 모든 냉소의 자국을 파괴하고 비관적인 철학의 뿌리 그 자체를 강타한다."
"인생의 근심걱정은 금권주의 및 사회의 본질적 속악함과 함께 아득히 저 아래쪽에 남는다. 위쪽에서 우리는 맑은 공기와 날카로운 햇빛 속에서 신들과 함께 걷고, 인간은 서로를 알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를 안다."
희대의 반항아는 결국 1895년 6월에 그 당시로서는 아무도 넘보지 않았던 히말라야의 8,000m급 고봉 낭가파르밧을 오르기 위해 인도의 봄베이로 떠났지만, 두차례의 등정 시도가 좌절된 이후 다른 루트를 찾아보기 위해 친구들과 헤어진 뒤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능선 저편으로 사라졌다.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의 마지막 장은 마치 그의 유언처럼 들린다.
"등산가는 자신이 숙명적인 희생자가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산에 대한 숭앙을 거의 버리지 못한다."
머메리가 쓴 책의 서문에는 그가 낭가파르밧에서 부인에게 부친 편지내용도 실려있다. 그는 희대의 반항아다운 고별사를 남겼다.
"우리는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설령 낭가파르밧에서 실패한다 하더라도 이 거대한 봉우리를 보고, 훈자와 러시아 국경 저편에 있는 위대한 산들을 바라보았으니 후회는 조금도 없소."
(낭가파르밧은 머메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었다)
머메리는 '길이면 가지 말아라'라고 말한다. 그가 남긴 이 한 마디야말로 알피니즘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며, 몇년 전 안나푸르나에서 목숨을 잃은 한국의 위대한 산악인 박영석 대장 역시 머메리와 똑같이 아직도 히말라야에 묻혀 있다.
세상엔 그 어떤 스토리보다 더욱 감동적인 '위대한 실패'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끝끝내 살아 돌아온 위대한 성공도 빼놓을 순 없다. '아직도 살아있는' 라인홀트 메쓰너 역시 히말라야 등정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나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끊임없이 도전했던 8,000m급 고봉을 오를 능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이번에 히말라야를 가더라도 고작(?) 5,000m 정도까지만 오를 작정이지만 그래도 열흘 정도는 매일 고된 산길을 걸어야 하고 계곡을 건너야 한다. 때로는 가파른 설산을 걸어 올라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이 모두 염려해 주시는 만큼 나 스스로도 무사히 다녀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시 또 일상으로 무사히 복귀해서 열심히 일하고 나중에 또다시 더 멋진 곳을 계속 찾아나설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