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도 자극적이며 매력적인 
광고 문구인가. 이 책의 띠지에 붙은 저 글은 아마도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되는 <이방인>의 놀라운 첫 문장 만큼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충격적이다. 카뮈의 <이방인>만 하더라도 너무나 유명한 소설인데,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저런 '외관'을 지니고 새롭게 번역되어 나타난 책을 어느 누가 쉽게 외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은 적지 않은 독자들에게 '책을 미리 사서 읽기도 전에'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미리보기'를 듬뿍 제공한, 그래서 우리에게 더욱 낯설게 다시 다가온 책이 되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독자들에게 이렇듯 매우 어리둥절한 방식으로 다시 한번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킨 <이방인>이라는 소설 자체가 기묘한 성격을 지녔다 싶어 더욱 흥미롭다.

<이방인>을 둘러싼 '뜨겁게 불타오른' 오역 논쟁을 한동안 두루 살펴본 덕분에, 이정서 님이 번역한 새움판과 김화영 님이 번역한 민음사판의 차이를 어느 정도 미리 알게 되었다. 그런데 '새움판 <이방인>'을 둘러싸고 대판 벌어진 '칼날이 번쩍이는 듯한' 격렬한 싸움을 지켜보는 일이 어느새 '소설 이방인' 못지 않게 흥미로웠다. 그러나 그 싸움의 배경에 '어떤 전리품'이 깔려 있든지에 관계없이, 나같은 독자로서는 이미 그 치열한 싸움에 자칫 잘못 끼어들었다가는 무슨 화를 입을지도 모르겠다 싶었고, 이러다 무슨 큰 사단이 나지나 않을까 싶어 슬쩍 겁부터 났다.

내가 뒤로 돌아서기만 하면 모두 끝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햇볕으로 이글거리는 해변 전체가 뒤에서 나를 압박했다. 나는 샘을 행해 몇 걸음 내디뎠다. 아랍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아직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85쪽)



나는 아마도 새움판 <이방인>을 미처 읽기도 전에 '이방인 오역 논쟁'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벌써 어떤 압박감을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때 내가 잠시나마 떠올렸을 생각이 아마도 <이방인> 속에 담긴 앞의 인용문과 닮았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일까. 앞에서 인용한 대목은 <이방인>의 주인공인 뫼르소가 '홀로' 다시 '아랍인'에게로 다가가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이다.

<이방인>이라는 책을 둘러싼 '이글거리는' 논쟁으로부터 나는 '그냥' 돌아서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의 호기심이란 그리 쉽게 억눌려 있기가 어려운 성질이었던지, 나는 결국 지난주 어느날 퇴근할 무렵에 일부러 서점으로 발걸음을 옮겨 이미 눈에 익은 이 책을 집어들고 책값을 계산했고, 결국 <이방인>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도대체 <이방인>을 둘러싼 번역 논쟁이 왜 그토록 뜨겁게 불타오를 수밖에 없는지, 나는 무엇보다도 그 실체적 진실이 궁금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단편적인 조각들' 말고 '하나의 덩어리 전체'를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다.


『이방인』을 집어들자 말자 그 소설은 정말 단숨에 읽혔다. 그 소설을 읽던 날 밤엔 '온갖 부조리'로 가득찬 엄청나게 우울한 '세월호 참사' 소식이 벌써 사흘째 생방송 중일 때였다. 가슴이 먹먹한 안타까운 소식들이 전해질 때마다 연신 훌쩍거리는 아내와 함께 그 참담한 소식을 두 시간 이상씩이나 계속 지켜보는 일이 영 마뜩찮아 TV에서 물러난 나는, 그저 퇴근길에 사 온『이방인』이라도 붙잡을 도리밖에 없었다. 그 책을 금새 읽고 나서도 '극심한 우울 모드'는 여전히 지속될 뿐이어서 언제 글 한 줄 쓰고 싶은 생각조차 도무지 들지 않았다. 이런 글은 써서 도대체 뭐하나 싶은 자괴감만 계속 머릿속을 맴돌 뿐.

 

그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햇볕이 내 뺨을 불태웠고, 눈썹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 특히나 그때처럼 나는 이마가 지근거렸고, 피부 밑에서 모든 정맥이 울려 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그 뜨거움이 나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들었다. 나도 알았다. 그것이 어리석은 짓임을, 한 걸음 더 옮겨 봤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한 걸음을, 다만 한 걸음을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85∼86쪽)



방금 인용한 대목은 소설 <이방인>의 '1부'를 장식하는 결정적 장면 가운데 한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이 책의 역자를 떠올렸다. 카뮈의 <이방인>을 새롭게 번역한 역자는 아마도 (그가 보기에는 '부조리한' 오역으로 가득찬 김화영 번역본에 대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어떤 뜨거움에 내몰려, 한 걸음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던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는 (오역 논란을 새까맣게 잊을 정도로) 정말 놀라웠고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미 책을 읽기도 전에 얼마간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역자 노트'도 그에 못지않게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새롭게 나온 번역판의 친절한 설명에 따르면 카뮈의 소설『이방인』은 그동안 결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역자 노트'에서 예시된 이전의 번역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수긍하게 되면 '그런 사정'을 얼마간 이해할 만하다 싶기도 했다. '역자 노트'에서 이 책의 저자가 상세히 밝힌 대로 '새로운 번역'에 따라 이 소설을 읽으면 <이방인>은 그렇게 어렵게만 읽히는 소설이 결코 아니었다. 이상하리만치 매끄럽게 읽히고, 카뮈가 치밀하게 배치해 놓은 소설 속 문장들이 저마다 절묘한 호응을 주고받는 느낌마저 생생했다.

'새로운 <이방인>'과 '역자 노트'를 다 읽고 나니, 어쩌면 카뮈가 『이방인』을 통해 그토록 함축적이고도 절묘하게 그려낸 '부조리'가 '역자노트' 속에 기이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듯한 착각조차 들 정도였다.

 

우리는 마침내 저 멀리 해변 끝의 커다란 바위 뒤에서 모래 사이로 흐르고 있는 작은 샘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리는 그 아랍인 두 명을 발견했다. 그들은 누워 있었는데, 기름때 전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평온하고 거의 만족스러워 보였다.  우리가 왔음에도 어떤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81쪽)



기존의 번역이 정말 역자의 주장대로 '인물들의 성격과 특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리고 카뮈 작품에 대한 권위자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려온 김화영 님의 번역이 정말 '<이방인>이라는 걸작 소설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이 작품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일개 독자로서 함부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싶다. 그래서 역자가 심혈을 기울인 '작가 노트' 내용들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을 수긍할 수는 있지만, 기존 번역에 대한 너무 지나친 비판을 담은 그의 주장에 대해 온전히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번역'에 명쾌한 정답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에는 누구라도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역자의 지나치게 확신에 찬 주장들에 대해선 '이건 좀 너무하다' 싶은 느낌부터 앞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기존의 번역'이 '작품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엉터리 번역'이라는 주장은 누가 뭐래도 너무 심했다 싶다.

사정이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새로운 번역은 기존의 번역보다 정말 매끄럽고 설득력이 넘친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면 그저 단순하게만 읽히던 문장들이 하나 하나 긴밀한 연계성을 띄고 되살아나 서로를 이끌고 잡아당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확인시켜주기까지 한다. 물론 수준높은 독자라면 '기존의 번역'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이방인> 속에 담긴 '작품의 묘미'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역자의 열의에 가득 찬 새로운 번역을 따라가다보면 평범한 독자라 하더라도 카뮈의 문학적 천재성을 금새 느껴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쩌면 느닷없이 낯선 외국의 여행지를 홀로 다녀오고 난 뒤에, 뒤늦게 그 여행지를 안내하는 어느 여행 전문가의 친절한 TV 해설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들지 모르겠다. 그만큼 역자의 설명은 그동안 이 작품의 해석을 어렵게 만든 여러 대목들을 환하게 밝힌 부분들이 적지 않다 싶고, 그래서 이 책은 기존의 번역 작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새로운 번역들과 역자가 새롭게 찾아낸 여러 확신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설명은 '기존의 번역들'을 휘청거리게 만들고 그가 내뿜는 입김은 불에 데일 듯 뜨겁다.

 

모든 것이 휘청거린 건 바로 그때였다. 바다로부터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실려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86쪽)



카뮈의 <이방인>을 아주 오래 전에 '어렵게' 읽은 기억이 어렴풋한데 뒤늦게나마 '새로운 번역'으로 단숨에 읽고 나니 개운한 느낌조차 없지 않다. 이 책이 아무리 '오역 논란'으로 여전히 시끄럽다고 하지만, 일개 독자로서는 그게 그토록 중요한 문제인가 싶은 생각도 없지 않다. 기존의 번역에 결코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점에 얼마쯤 동감하고, 새로운 번역으로 카뮈의 훌륭한 문학작품을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면 나로서는 충분하다.

 

그러나 내 변호사는 인내심이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두 팔을 높이 쳐들어 올리며 소리쳤고, 그로 인해 그의 소매가 아래로 처지면서 풀 먹인 셔츠의 주름이 드러났다. "도대체 이 피고가 기소된 것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러서입니까, 사람을 죽여서입니까?" 방청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검사가 다시 일어서더니, 그의 법복을 바로 잡고는 선언했다. 이 두 사실의 범주 사이에 있는 깊고, 비장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지각하지 못하려면 존경하는 변호사님처럼 순진해야 할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는 힘주어 소리쳤다. "나는 이 사람이 범죄자의 심정으로 자신의 어머니를 묻었음을 고발합니다." (133쪽)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엄청난 궁지에 내몰린 '새움판 <이방인>의 번역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을 아주 단순하게만 바라본다면, 그는 기존의 번역상의 오역들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번역을 내놓은 죄밖에 없다. 그런데 역자에게는 이미 '번역상의 문제' 말고도 다른 수많은 '나쁜 혐의'가 잔뜩 추가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역자는 어느새 카뮈의 <이방인> 속에 나타난 '부조리'를 얼마쯤 닮아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새움 번역판의 역자를 둘러싼 논란'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독특한 감정들이었다.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낸 '부조리'는 도처에 깔려 있다. <이방인> 속 부조리 가운데 내게 가장 인상깊게 다가온 부조리는 결국 '죽음'에 대한 뫼르소의 생각이었다. '엄마의 죽음'과 '아랍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연장되고, 어떻게 예기치 않게 일찍 마무리되든 주인공 뫼르소는 그에 대해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는 크게 동떨어진 사고와 행동을 보여준다. 그게 무에 그리 큰 대수로운 차이란 말인가 하는 식이다.

 

그걸 마치고는 나를 "여보게"라고 부르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사형수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사형수인 셈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가로 막고는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더구나 어떤 경우라도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158∼159쪽)



이 짧은 대목 속에서도 '부조리'는 가득하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부조리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결국 교도소의 간수가 '호출'하는 순간에 삶을 마감하게 되어 있는 사형수를 닮았다.(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교도관처럼 우리 등 뒤에서 회초리를 들고 감시한다'고도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천 년이라도 살 듯이 악착스레 삶에 매달린다. 그런 '부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뫼르소가 오히려 사제에게 '그건 같은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습조차 내겐 '부조리'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내놓은 <이방인>을 두고 화끈하게 불붙은 '오역 논쟁'을 지켜봐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여러 다양한 생각들을 떠올렸을 법하다. 그 가운데 내가 좀 더 관심을 기울이고 지켜본 일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미 단단하게 뿌리내린 '기성 권력이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의 위험성에 대한 고려였다. 그 단단한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커다란 힘과 용기가 필요한 것일까. 혹은 거기에 돈키호테를 닮은 무모한 용기는 또 얼마나 필요하며, 슬기로운 지혜는 또 얼마만큼 요구되는 것일까.

이번의 오역 논쟁을 지켜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찰스 다윈을 잠시 떠올렸었다. 비록 이번 일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례이고 서로 비교 자체가 안 된다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기독교의 창조론'이라는 난공불락의 '기성 권위'를 무너뜨린 찰스 다윈의 '위대한 도전'에서 적어도 한 가지는 참고할 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었던 '자연선택 이론'은 '인간의 유래'에 관한 '신의 권위'마저 완전히 박탈하고야 말겠다는, 일찌기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만큼 위험한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어려운 일을 너무나 아름답게 성취해 냈다. 그가 그토록 힘든 일을 그토록 손쉽게(?) 이뤄낸 비결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내 생각으로는 딱 두 가지였다. 첫째, 평생을 바친 철저한 연구.
둘째,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한' 표현.

프랑수아 드 라로슈푸코는 우리가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말했다. 바로 '태양과 죽음'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 딱 어울릴 만한 명언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을 남긴 라로슈푸코를 무척이나 존경하며 그를 자주 인용했던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그 또한 당대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헤겔을 상대로 끊임없이 싸웠다. 그가 보기엔 헤겔의 철학이 엉터리로 보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가 말년에 이르도록 '당대 철학계의 거두'였던 헤겔을 뛰어넘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철학에 매진한 끝에 얻어낸 훌륭한 결실들은 결국 훗날에 이르러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쇼펜하우어가 '논쟁'의 대가라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둘러싼 논쟁을 보면서도 쇼펜하우어가 했던 인상적인 말들을 몇 번씩이나 떠올렸는지 모른다. 그 철학자만큼 이번 '새움판 이방인 ' 논쟁에 어울릴 만한 적절한 표현들을 두루 언급한 인물도 드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떠올리고 새삼 찾아봤던 '쇼펜하우어의 글들'은 어쩌면 '새움판 이방인'에 딸린 '역자 노트'처럼 어딘가 본궤에서 너무 벗어난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숨겨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관심있게 읽어보신 분들을 위해서는 이런 사족도 전혀 값어치가 없지는 않을 듯싶어 덧붙여 본다. 아무쪼록 '접힌 부분'까지 펼쳐 읽으시는 분들이 적지 않았으면 좋겠다.

 

 

접힌 부분 펼치기 ▼

 

 

긍정적인 것을 보라


불평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악으로 몰아가는 음울한 심성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저주한다. 이는 통찰과 인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단지 비열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눈 속의 티끌을 대들보로 과장해 비난하는 것과 같다. 불평하는 자는 맡은 일마다 천국을 지옥으로 바꾸고, 더욱이 비열한 열정으로 모든 것을 극단으로 몰아붙인다. 반대로 고귀한 심성을 지닌 자는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려 한다. 일부러 잘못을 눈감아주고 의도는 좋았다고 말해줌으로써 모든 일에 용서할 줄 안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나를 만들어가는 지혜' 中에서

 


 

 

증오와 아첨 


증오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첨이다. 증오는 오점을 씻어내려 하나 아첨은 그것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원망에서 배울 점을 찾는다. 이는 호의보다 더 충실하다. 강력한 역풍은 맥빠진 순풍보다 낫다. 적의 덕택에 행운을 얻은 사람들도 많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경쟁자를 이기는 지혜' 中에서

 

 


예의는 호의를 얻는 마법약이다 


예의를 지켜라. 그것만으로 호감을 얻는 데 충분하다. 예의는 교양에서 나오며, 모든 사람의 호의를 얻을 수 있는 묘약이다. 반대로 무례함은 사람들의 경멸과 반감을 산다. 무례함이 자만에서 오면 혐오스럽고, 조악함에서 오면 경멸스러우며, 무지에서 오면 유감스럽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진실을 말할 때는 말을 신중히 골라서 하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릴 때는 신중히 말을 고르고 예의를 잊지 않기 바란다. 똑같은 진실이라도 말하는 방법에 따라 기분좋은 보고도 되고, 귀청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 되기도 한다.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지혜' 中에서

 


 

시간으로 자기를 길들이라


기회가 오기까지는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참고 기다리다 보면 계절은 숨어 있던 것을 무르익게 하고 완성의 기쁨을 맛보게 한다. 시간의 버팀목은 헤라클레스의 쇠곤봉보다 더 강하다. 신은 채찍이 아닌 시간으로 인간을 길들인다.

'시간과 나는, 또 다른 시간 그리고 또 다른 나와 겨루고 있다'는 위대한 말을 상기하라.

 - 쇼펜하우어,『세상을 보는 지혜』, '행운을 불러들이는 지혜' 中에서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누가 공격하면 공격을 받은 사람은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명예 회복의 절차에 따라 자기 손으로 되찾지 않으면, 그 명예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절차는 아무래도 그 생명, 자유, 재산, 마음의 평정 등에 위험이 닥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남자의 행위가 성실하고 고귀하며, 심성이 순결하고, 두뇌가 대단히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를 비방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사람은 그저 지금까지 이 명예의 법칙을 어긴 일이 없으면 되고, 그 외에는 보잘것없는 인간 쓰레기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자이건, 게으름뱅이, 도박꾼, 빚쟁이라도 무방하다)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곧 명예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을 즐기는 자는 대개 앞에서 말한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그리고 세네카가, "경멸해도 싼 놈팡이일수록 그 혓바닥이 고약하다"라고 한 것도 적절한 표현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인간이야말로 처음에 말한 바와 같은 사람을 만나면 감정이 상하는 모양이다. 됨됨이가 상반된 사람은 서로 미워하게 마련이며, 볼품없는 자가 뛰어난 사람을 은근히 경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이와 비슷하게 괴테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적하는 자에게 그대는 무어라고 중얼거리는가?
      그대와 같이 성품이 뛰어난 자는

      영원히 그들의 눈에 난 가시로다.
      어찌 이들이 그대의 벗이 되랴!

                                                                           《서동시집》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 


이것은 누구나 자기와 동질적인 것만을 이해하고 평가할 뿐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즉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범한 일이, 저열한 사람에게는 저열한 일이, 그리고 머리가 명석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혼돈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각각 동질적인 것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자신이 제작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바로 그것이 그와 가장 동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의 전설적인 인물인 에피카르모스(그리스의 희극 시인)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조금도 놀랄 건 없다. 나는 내 생각을 말하고,
      그들은 자기 자신이 제 마음에 들어 의기양양한 것뿐이다.
      그들은 자기가 실로 훌륭하게 보이는 것이다.
      개에게는 개가,
      그야말로 제일 아름다운 것 ······. 역시 그렇다, 소에게는 소가,
      노새에게는 노새가, 돼지에게는 돼지가.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명예에 대하여' 中에서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남의 견해를 반박하지 마라. 그가 믿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완전히 그에게 납득시키려고 하면, 므두셀라만큼 오래 살더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남하고 이야기할 때 아무리 호의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해서는 안 된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기는 쉽지만, 잘못을 바로잡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을 때, 차마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이치에 닿지 않더라도 제3자인 우리는 개입할 필요가 없다. 단지 그들이 서투른 연극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세상에 진리나 교훈을 전하려는 사람이 그 임무를 무난하게 마쳤다면 그것은 하나의 요행이며, 오해와 푸대접과 반항, 그리고 학대를 받게 마련이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


'격한 어조로 말하지 마라'는 오랜 처세의 가르침은 해야 할 말만 요령 있게 하고 그 해석은 남에게 맡기라는 뜻이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력이 부족하므로, 그 자리를 떠난 뒤에야 해석을 내릴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격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되며, 그때 모든 것은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잖은 태도로 조용히 말하면, 무례한 말이라도 당장 눈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

 - 쇼펜하우어, 『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같은 짓을 곧잘 한다

선생이 학생에게 악기에서는 운지법을 가르치고, 검술에서는 장검 사용법을 가르친다고 하자. 학생은 열심히 하려고는 하지만 배운 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훈련을 거듭하면서 쓰러지고 일어나고 하는 동안에 차츰 익숙해진다.

라틴어로 글을 쓰거나 이야기하기 위해 문법 규칙을 배울 경우에도 이와 마찬가지다. 교양 없는 자가 관리가 되거나, 신경질이 심한 자가 사교가가 되거나, 대범한 자가 소심하게 되는가 하면, 고귀한 자가 익살꾼이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은 오랜 습관에 의해 얻은 자기 훈련은 언제나 외부로부터 강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제에 대항하는 것을 자연은 결코 중지하고 있지 않으며, 가끔 뜻하지 않은 때에는 이 강제를 물리치는 경우도 있다. 그 이유는 추상적인 법칙에 의한 모든 행위와 천성에서 비롯되는 행위의 관계는, 마치 형태나 움직임이 서로 상관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시계와 같은 인위적인 제작품과, 형태나 재료가 서로 융합되어 하나가 된 산 유기체의 관계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천적으로 얻은 성격을 선천적인 성격에 비추어 나폴레옹이 "부자연스러운 것은 불완전하다"고 한 말이 정당함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육체적 및 정신적인 모든 일에 타당한 하나의 규범으로서, 이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광물학자들에게 알려진 천연 수정이 인공 모조품만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허식을 경계해야 한다. 허식은 언제나 경멸을 불러일으킨다. 첫째는 거짓으로서이며, 거짓은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비겁한 것이다. 둘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탄핵선고로서이며, 이것은 자기가 아닌 것, 즉 자기를 더 과장해 돋보이려는 것이다.

어떤 하나의 특질을 내세워 자랑삼는 것은, 그가 그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용기건 학식이건, 또는 정신, 기지, 여자에 대한 인기, 재산, 고귀한 신분, 그 밖의 무엇이건 간에 그것 하나를 자랑한다면, 그에게 그 특질이 결여되어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반대로 어떤 특질을 완전히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내세우거나 자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므로, 그는 자신이 가진 특질에 대하여 담담한 심정으로 있을 수 있다. '쩔렁쩔렁 소리를 내는 말굽쇠는 못이 하나 빠져 있다'는 스페인의 속담은 이를 가리킨다.

(중략)

그리고 어떤 사람이 가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가장하고 있다는 것은 곧 상대방이 알아차리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끝으로 가장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며, 언젠가는 탄로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두고자 한다. "아무도 오랫동안 가면을 쓰고 있을 수는 없다. 위장은 곧 자기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법이다."(세네카 《관용에 대하여》제1권 제1장)

인간은 자기의 몸무게를 의식하지 못하고 지탱하고 있지만 다른 물체를 움직이려고 하면 그 무게를 느끼는 것처럼, 자기의 결점이나 부덕은 의식하지 못하고 남의 것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대신 모든 사람들은 타인 속에 하나의 거울을 갖고 있어 그 거울 속에 자기의 온갖 부덕과 결함, 무례 및 고약한 성질 등을 분명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거의 누구나 거울을 향해 짖어대는 개와 같은 짓을 곧잘 한다. 개는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이 다른 개인 줄 알고 짖어대는 것이다.

남의 결함을 들추는 것은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도 된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자기 혼자만이 조심스럽게, 그리고 날카롭게 비판하는 취미와 습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시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자기가 이처럼 자주 엄격하게 비난하는 일이라면, 자기 스스로도 이를 피하려는 정의감과 긍지와 허영심까지도 충분히 지니게 될 테니 말이다.

관대한 사람은 이와는 반대로 "우리는 서로 눈을 감아 준다"(호라티우스《시론》)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마태복음에는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끌은 보면서 자기 눈에 들어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는가"하고 적절하게 가르치고 있는데, 인간의 눈은 본래 외부의 사물은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은 잘 볼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자기 결점을 돌이켜보기 위해서는 남이 갖고 있는 결점을 찾아내어 비난하는 것이 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결함을 시정하기 위해 하나의 결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 쇼펜하우어,『삶의 예지』, '권고와 잠언' 中에서



 

항상, 가끔, 대체로

'모든 오류는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리'에서 발생하는 것이며, 또한 그 귀결이 그 해당 근거에서 생긴 것이지 다른 근거에서 생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타당하지 않은 추리다. 오류를 범하는 사람은 하나의 귀결에 그 귀결이 전혀 가질 수 없는 근거를 설정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오성이 실제로 부족하다. 말하자면 원인과 결과와의 결합을 직접 인식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또한 더 빈번한 경우이긴 하지만,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귀결에 어떤 근거를 규정하는 경우, 물론 그 근거는 가능하지만, 귀결에서 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추리 전체에 첨가하여, 그 해당 귀결은 '항상' 그가 진술한 근거에서만 생긴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완전한 귀납을 행한 후에 비로소 가능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전제만 하고 있다. 따라서 그 '항상'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광범한 개념이며, 그 대신 '가끔'이라든가 또는 '대체로'라고 말하기만 하면 별 지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결론은 미결정의 것으로 되며, 그러한 결론으로서는 잘못이 없다. 그런데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 상술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추론하는 것은 조급한 탓이 아니면 가능성에 관한 지식이 제한되어 있어서, 그 때문에 행해야 할 귀납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는 가상과 유사하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따른 표상, 경험과 학문의 목적> 中에서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내가 스토아학파의 윤리학 정신을 이해한 것에 의하면, 그 근원은 다음과 같은 사상에서 나오고 있다. 이성은 인간의 커다란 특권이며, 간접적으로 계획적인 행동과 거기에서 생기는 결과에 의해 인생과 그 무거운 짐을 현저하게 가볍게 하는 것이지만, 이 이성은 또 직접적으로, 즉 단순한 인식에 의해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모든 종류의 고뇌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구출할 수는 없을까 하고 생각하는 사상이다. 이성을 부여받은 인간이 이성으로 무한한 사물이나 상태를 포괄하고 전망하면서도 현존에 의해 아주 잠시 동안, 불안한 인생의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심한 고통을 받는다거나 격한 욕구나 도피에서 생기는 큰 불안과 고뇌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은 이성의 장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면, 인간은 틀림없이 이러한 고뇌를 초월하고 불사신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안티스테네스는 "이성과 목을 맬 밧줄, 이 둘 중의 하나를 택하라"(플루타르코스, 《스토아학파의 모순에 대하여》, 제14장)고 말했다. 그 의미는 인생에는 실로 많은 괴로운 일과 번거로운 것이 있기 때문에 사상을 정돈하여 이것들을 초월하거나, 인생을 버리는 것 중의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결핍이나 고뇌는 직접 또는 사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사물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결핍을 느끼게 하고 고통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하고 필연적인 조건이다. "가난함이 고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고통을 가져온다."(에픽테토스, 《단편》, 제25)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

그뿐만 아니라 희망을 낳고 키우는 것은 기대나 요구라는 것이 경험을 통해 알려졌다. 그러므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는 것은 많은 사람, 또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피할 수 없는 악도 아니고, 도저히 수중에 넣을 수 없는 재물도 아니며, 인간이 피할 수 있는 것이나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 조금이라도 많으냐 적으냐 하는 문제이다. 또 절대적으로 수중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수중에 넣었을 때나 절대적으로 피하기 힘든 것을 피할 때만 우리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은 아니고, 상대적으로 수중에 넣기 힘든 것을 손에 넣고 상대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것을 피할 때도 우리의 마음은 아주 평안해진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성에 이미 깃들어 있는 악과 그 개성이 단념해야만 하는 재물과는 상관 없이 고찰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이러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어떠한 희망도 만약 그것을 기르는 기대가 없다면 곧 소멸하고 더 이상 고통도 생기지 않는다.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이 모든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행복은 오직 우리의 요구와 우리가 얻는 것 사이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이 관계는 둘 다의 양을 감소하는 것으로도 다른 쪽의 양을 증대하는 것으로도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고통은 본래 우리가 욕망하고 기대하는 것과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과의 불균형에서 생긴다. 그런데 이 불균형은 확실히 인식에 존재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더 높은 식견이 생기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크리시포스는 "본성에서 일어나는 것에 관한 경험에 따라 살아야 한다"(《스토바에오스 선집》, 제2권, 제7장, p.134)고 했는데, 그 의미는 세계 속에 있는 사물에 대한 적절한 지식을 가지고 생활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어떤 일로 마음의 평정을 잃고 불행을 당해 실신하고 화를 내고 기가 꺽이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은 사물이 자기의 기대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그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세상과 인간을 몰랐다는 것, 무생물은 우연에 의해, 생물은 반대로 목적이나 악의에 의해, 어떠한 개인의 의지도 매사에 방해받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의 인생은 이러한 상태를 일반적으로 알기 위해 그의 이성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대체로 알고 있어도 하나하나에 관해 자세하게 재인식하지 않아서 이에 놀라 마음의 평정을 잃는 경우 판단력이 부족했거나 어느 한쪽이다.*

* "일반적인 개념을 개별적인 것에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 모든 인간 악의 원인이므로"
   (에픽테토스의 《
논문집》
, 제3권 26장)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충족 이유율에 따른 표상, 경험과 학문의 목적> 中에서



 

겸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을 얻는 이유

'이데아'는 개념의 적절한 대표라고 정의할 수는 있지만, 순수하게 직관적이고 무수한 개체를 대표하면서도, 또한 철저하게 규정된 것이다. 이데아는 개체에 의해서는 결코 인식되지 않고, 모든 의욕과 개성을 넘어서 순수한 인식 주관에까지 올라간 사람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따라서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오직 천재와 많은 경우 천재의 작품에 자극되어 자기의 순수한 인식력이 고양된, 천재적인 정서를 갖게 된 사람만이 가진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약 밑에서만 전달될 수 있다. 즉, 예술 작품으로 재현된 이데아는 사람의 마음을 각자의 지적 가치의 정도에 따라 끌어당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즉 천재의 가장 고귀한 작품은 어리석은 대중들에게 영원히 닫혀진 책으로 머물러야만 하고, 또 폭넓은 심연으로 갈라져 접근할 수 없어서, 마치 왕들의 교제가 서민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도 정평 있는 걸작의 권위를 인정하여 자기의 약점을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남몰래 언제나 그러한 걸작에 유죄 선고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자기를 노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자신만 서면, 전부터 마음이 끌리지 않았고,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을 굴욕스럽게 한 위대한 것과 아름다운 것에 대해, 또 이것들을 창조한 사람들에 대해, 오랫동안 억눌려 온 증오심을 터뜨리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타인의 가치를 자유롭게 인정하고 반대하지 않으려면, 자신도 가치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미 중에서도 겸손이 꼭 필요한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이것과 유사한 덕 가운데 겸손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명성을 얻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뛰어난 사람을 찬양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덕을 그 사람에 대한 찬사에 덧붙여서, 타인의 환심을 사고 무가치함에 대한 노여움을 진정하려고 한다. 비열한 질투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겸손이란, 장점이나 공적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걸하는 수단으로 취하는 거짓 겸손 외에 무엇이겠는가? 정말로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겸손한 것이 아니라 정직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 쇼펜하우어,『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예술 작품의 개념과 이데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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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4-23 0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번역이 예전보다 나은지 어떤지는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다만, 처음 번역된 책과 꾸준히 다시 번역되는 책들이 있기에
나중에 번역하는 이들은
앞선 이들 열매를 받아먹으면서
다시금 새로운 번역을 할 수 있기도 해요.

앞선 번역이 없었으면 '새로운 번역'이란 없겠지요.
언제나 그렇지만,
비판에 앞서 존경과 고마움을 내비치면서
즐겁게 '새 번역'을 우리한테 선물하려는 마음이었으면
오래도록 사랑받는 실마리를 열었으리라 느낍니다.

번역은 '읽어서 풀어내는 이야기꾼'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옛이야기도 '구술자마다 다 다른 입맛'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로 들려주지요.
설화와 신화와 민담에 '정답이 하나'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정답이 하나이길 바란다면
외국말을 배워서 외국책으로 읽어야겠지요.

oren 2014-04-23 11:01   좋아요 1 | URL
이번 새움판 이방인을 둘러싼 논란 덕분에 저도 여러가지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된 듯해요.

똑같은 작품에 대해서도 수많은 감상평이 존재하듯이, 외국어로 쓰여진 원작에 대해서도 번역자에 따라 온갖 다양한 번역이 나올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일텐데, 새움판의 역자가 너무 '정답'에만 집착하는 듯한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더군요. 그렇지만 제 판단으로는, 새움판 <이방인>이 기존에 나온 번역판보다 훨씬 더 잘 읽히는 번역판임은 분명한 듯해요.

애써 번역해 주시는 분들 덕분에 외국어를 잘 몰라도 우리말로 그런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독자들은 늘 번역하시는 분들이 고마울 따름이지요. 비록 번역자들마다 '번역의 질'은 다소 다르더라도, 우리말로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분명 번역하신 분들에게 '결정적 도움'을 받는 셈이고, 그래서 저는 웬만해서는 '번역의 품질'을 따지고 싶은 생각이 별로 들지 않더라구요.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할 경우, 부지런한 독자들이라면 따로 비교해가며 읽어도 '번역의 질'은 충분히 헤아려볼 수 있다고도 여겨집니다.

마립간 2014-04-23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쇼펜하우어를 멋있게 만드는 글이네요. 좋은 글, 많은 명언 감사합니다.^^ 저도 겸손에 관해서는 부족한 사람이라...

알라딘에서 '쇼펜하우어 삶의 지혜'가 검색되지 않는데, '행복한 내일을 위한 삶의 지혜' '인생을 보는 지혜' '나를 만나는 지혜' '꿈을 찾아가는 지혜'가 모두 같은 책인가요?

oren 2014-04-23 11:25   좋아요 1 | URL
쇼펜하우어의 <삶의 지혜>는 발타자르 그라시안이라는 사람이 쓴 원작을 편역한 작품입니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17세기에 신학을 공부한 신부이자 철학자였는데, 쇼펜하우어가 그의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편역'을 내놓으면서 유명하게 된 작품이지요. 그러고 보면 쇼펜하우어도 자신의 주저이자 걸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내놓고 나서도 꽤나 오랫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한 대신에, 그라시안의 작품을 편역한 <삶의 지혜>를 계기로 비로소 전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된 인물이니, 번역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인 셈이네요.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는 여러 권의 작품이 담긴 '쇼펜하우어 전집'과도 비슷한 책입니다. 그 가운데 맨 앞부분에 담긴 <삶의 지혜>가 바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작품을 편역한 책이고, 그 작품은 단행본으로 나와 있는 다른 판본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쇼펜하우어'가 편역한 책이지 싶습니다. 그 작품은 쇼펜하우어가 원작을 단순히 번역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글도 제법 포함시킨 덕분에 어느 정도는 '쇼펜하우어의 책'이 되다시피 한 작품이지요.

(마립간 님이 궁금해 하시는 부분은 제 글에 담아 놓은 <세상을 보는 지혜>를 클릭하셔서 그 책의 '목차'를 한번 살펴보시면 금방 이해되실 겁니다.^^)

마립간 2014-04-23 11:51   좋아요 1 | URL
oren님, 감사합니다. (우선 동서문화사 '세상을 보는 지혜'를 읽어야겠네요.^^)

표맥(漂麥) 2014-04-24 1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의 논쟁을 쭈욱 봐 왔습니다. 끼어들기엔 너무 높은 곳에서의 다툼인지라 뭐라하기 힘들었는데... oren님의 글을 읽으니 속이 시원합니다. 참 객관적이고 동감하는 글입니다. oren님을 알게되어 무지 기쁘군요...^^

oren 2014-04-24 11:23   좋아요 1 | URL
표맥 님 반갑습니다. '새로 나온 <이방인>'을 둘러싼 논쟁이 그렇게 뜨거울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어디 끼어들기가 겁이 날 정도로 여러 글 속에서 '날카로운 칼날'들이 번쩍거리더군요. 몇몇 언론들의 끈질기고도 집요한 공격도 놀라웠구요. ㅎㅎ

저는 이정서 님의 번역 덕분에 '카뮈의 <이방인>'을 정말 흥미롭게 읽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만족이었답니다. 심정적으로는 그 분을 훨씬 더 편들고(?) 싶었으나,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여러모로 완곡하게 표현하느라 글이 좀 어정쩡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표맥 님께서 이렇게 동감해 주시니 고맙고 또 반갑습니다. ㅎㅎ

coolcat329 2019-08-21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이방인을 읽어보려고 하는데,누구의 번역을 읽을까 고민했는데 결정했습니다.글 잘 읽었습니다. : )

oren 2019-08-21 22:33   좋아요 0 | URL
네,,, 이정서의 <이방인>... 정말 치열하게 번역한 책임에는 틀림없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