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드디어 내일이면 히말라야로 간다!
1. 드디어 네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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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달린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깊이 읽기 ㅣ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3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제프리 S. 크래머 엮음, 강주헌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월든』의 경이로운 문장들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가장 절실한 체험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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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달린 월든』 31쪽)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책은『월든』과 『주석달린 월든』달랑 두 권만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 봄에 한꺼번에 무려 여덟 권을 더 샀었다. 그때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날 예정이었던 히말라야 트레킹 때 짐꾸러미에 챙겨 넣을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소로우가 쓴 책이라면 따져볼 필요가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들과 함께 걷는 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던가. 소로우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문명'에서 오롯이 벗어난 그곳 히말라야와는 너무나 잘 어울릴 것이라 여겨졌다.
히말라야로 떠나는 준비물 가운데 '몇 권의 책'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일찍 산행을 끝내고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다음날 아침까지는 '별 보는 일'과 '책 읽는 일' 말고는 별달리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의 구르카 병사들을 이끌고'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 능선 저편으로 영원히 사라진 '시대의 반항아' 알버트 머메리가 쓴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비롯해 소로우의 책도 세 권씩이나 챙겼다.(2년 전에 실크로드로 여행을 갔을 때 나는 걷는다 1를 쓴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책 네 권을 들고 갔다가 깔끔하게 다 읽고 돌아온 기억도 그런 '무모한 욕심'에 보탬이 되었다. 사실 올리비에의 책은 걷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지만 나는 정작 '날아다니며' 거의 다 읽었던 듯싶다. 인천 공항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까지 오가는 비행시간이 제법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히말라야의 장엄한 풍경 속에 잠겨 '시대의 반항아'이자 '참된 등산가'였던 머메리의 책과 '문명의 반항아'이자 '참된 철학자의 삶'을 살았던 소로우의 책을 읽는 재미는 얼마나 짜릿할까. 기대가 무척 컸었다. 실제로 네팔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를 벗어나 히말라야에 접어든 첫날 밤에는 (다음날부터 만나게 될 히말라야의 눈덮힌 산봉우리들을 상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른 채 침낭 속에 들어가 머메리의 책을 두세 시간쯤 읽다가 잠들었었다. 그러나 히말라야에서 책을 펼치는 일은 그날 밤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내 얘기를 히말라야의 여러날 밤 속으로 더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서 빨리 소로우에 대한 얘기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올해 봄에 사들였던 소로우의 책은 나와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던 목사님(네팔 카트만두에 거주)께서 '여긴 읽을 만한 책들이 별로 없으니 다 읽은 책들은 좀 남겨두고 가라'는 부탁까지도 애써 외면한 채 고스란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나는 그때 무사히 되돌아온 그 책들을 다행히 요 몇 달 동안 거의 다 읽었다.
엊그제 마침내 제법 두툼한-그리고 주석도 제법 많이 달린-『소로우의 강』(원제는『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을 다 읽고 나니 이제야『주석달린 월든』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움마저 생겨났다. (이 책은 진작에 사 두고 가끔씩 드문드문 펼쳐보기만 했다. 왠지 소로우의 다른 책들을 다 읽고 나서 읽어야만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다시 펼치는『월든』이지만 빼곡하게 '주석이 달린' 이 책은 역시나 처음에 읽었던 그냥『월든』과는 확실히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월든』에 왜 이토록 방대한 주석이 덧붙여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제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듯하다.
『월든』에 필요한 주석을 쓰느라 오랜 시간을 바쳤던 제프리 S. 크래머는 말한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라고. 그래서 '이 책은 신화처럼 읽힌다.'라고. 나도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르고 싶다. 그의 말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월든』을 한번 읽어보고 나서 판단해도 물론 늦지 않다. 영웅을 그린 신화는 그렇게 쉽게 읽히지 않는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멀리서 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소로우 스스로 이 책 속의 한 장인 「독서」에서 그 방법을 미리 밝혀 놓았다.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영웅처럼' 여기고 있다. 『월든』은 어느덧 영웅에 대한 이야기로 격상된지 얼마쯤 지났고, 어떤 독자들에게는 신화처럼 읽혀야 하는 책으로 바뀌었다.『주석달린 월든』은 괜히 나온 책이 결코 아니었다.
이 책 속에 담긴 주석은 과연 얼마나 될까. 두 번씩이나 두드린 내 계산기는 정확하게 1,640개라고 두 번 말한다. 놀라운 숫자이고 이렇게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은 여태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내게는 더욱 놀라운 책이다.
소로우 형제와 함께 '일주일 동안'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으로 보트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콩코드의 숲속으로 되돌아가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 놓인 빈 의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그의 곁에 앉아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이번에는 소로우가 말하는 대로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아 가면서 들어야겠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는 그의 권고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이 없었더라면 새까맣게 놓치고 말았을 얘기들이 과연 얼마나 많을지 몹시 궁금하다.
(『주석달린 월든』 52쪽)
어떤 날씨에나, 낮이나 밤 어떤 시간에나 나는 시간의 홈85을 활용하고 그 순간을 내 지팡이86에도 표시해두고 싶었다. 달리 말하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영원이 만나는 점,87 요컨대 현재의 순간에 서고 싶었고, 현재라는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고 싶었다.88 (52쪽)
주석
85. ['시간의 홈'은 'the nick of time'을 번역한 것이다-옮긴이] 이 표현은 16세기에 'in the nick'으로 처음 사용됐다.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nick'이라는 단어는 '아슬아슬한 순간'이나 막대에 새겨진 눈금을 뜻한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문이 닫혔다면 그는 용케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들어간 것이며 따라서 '시간의 홈'에, 즉 아슬아슬하게 들어간 것이 된다.
86. 소로는 측량하기 위해 눈금이 새겨진 막대를 갖고 다녔지만, 여기에서는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를 빗댄 표현이다. 크루소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시간을 기록했다. 소로는 일기에서도 "로빈슨 크루소가 막대기에 매일 표식을 했듯이, 우리는 매일 우리의 품성에 눈금을 매겨야 한다"(일기 1:220)라고 썼다. 소로는 자급자족하며 독립된 삶을 살았던 크루소에게 매력을 느꼈던지 「커타딘 산」과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거듭 크루소에 대해 언급했다.
87. 토머스 무어(Thomas Moore, 1779-1852)가 동양의 화려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삼아 쓴 이야기체 시 「랄라 루크」에서 "과거와 미래-두 영원! / 두 끝없는 바다 사이의 이 좁은 지협"을 빗댄 표현으로 여겨진다.
88. '출발선에 발끝을 대고 서라toe the line'는 선원들에게 갑판 점호 시간에 두 판재를 이은 자리에 발끝을 대고 서라는 지시였다. 그래야 열이 반듯하게 정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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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쓴 제프리 S. 크래머의 머리말 가운데 소로우가 쓴 편지에 실린 '등산에 대한 숙제'도 무척 흥미롭다.)
머리말
"『월든』출간." 『월든』이 출간된 1854년 8월 9일, 소로가 일기에 쓴 내용의 전부다. 그가 월든 호수로 이주한 후 9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쓴 후에 맺은 결실이었다.
(중략)
월든 호수로 이주한 날의 일기도 간단하기 그지없다. "7월 5일 토요일. 월든-어제 이곳에 살려고 왔다."
(중략)
소로는 일기에서 언급하고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에서 되풀이했듯이, 자서전이 전기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내가 내가 아니면 누가 나이겠는가?" 라고 묻고, 『월든』을 출간한 후인 1857년 10월 21일의 일기에서 "시인이라면 자신의 전기를 써야 하는가? 훌륭한 일기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창조해낸 상상의 영웅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현실의 주인공이었던 그가 매일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월든』이 엄격한 의미에서는 자서전이 아니라, 소로가 자신이 만들어간 신화적인 삶에 예술적인 완전함을 더하기 위해 자유롭게 써내려간 문학 작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중략)
소로가 쓰고 있던 것은 분명히 신화였다. 『월든』을 의도된 방향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읽는 독자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소로는「독서」에서 "올바른 독서,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요즘의 세태가 높이 평가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든 운동이다.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이 요구되고, 책을 읽겠다는 마음가짐을 거의 평생 동안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처음 씌어졌을 때처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읽혀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월든』을 월든 호숫가에 잠시 살았던 사람의 기록으로 생각해서 자서전으로 읽는다면, 소로가 에머슨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누이들이 빨래를 대신 해주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쓸데없이 트집 잡는 사람들의 주장에 귀가 솔깃해질 수 있다.
소로는 「독서」에서 "영웅을 그린 책들이 우리 모국어의 문자로 인쇄되더라도 타락한 시대에 사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와 용기와 관용을 발휘해 일상적인 용법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추측해가며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의 뜻을 열심히 찾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의도와 방향을 분명히 밝혔다. 소로는 먼 옛날의 책, 동서양의 정신적인 고전에 대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소로는 지금 당신이 손에 쥐고 있는 책에 대해 쓴 것이다. 『월든』은 한 영웅에 대한 책이기 때문에 영웅을 그린 책이다.
(중략)
소로가 경험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방법은 1857년 11월 16일 블레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네에게 숙제 하나를 내겠네. 산을 오르는 게 궁극적으로 자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고 빠짐없이 적어보게. 그렇게 쓴 글을 반복해서 읽고, 자네 경험의 중요했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만족할 때까지 고쳐 써보게. 인간은 앞으로도 산에 올라야 할 테니 자네가 산에 올랐던 이유를 먼저 자네 자신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해보게. 처음 열두 번 정도를 시도해서 정확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게. 하지만 끈기 있게 반복해보게. 특히 충분한 휴식을 가진 후에 자네가 문제의 핵심이나 정점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면 다시 도전해서 산에 오르는 이유를 자네 자신에게 설명해보게. 이야기가 꼭 길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간략하게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네. 산에 오르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자네가 진정으로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자네가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에서 무얼 보았는지 묻고 싶군. 자네도 알겠지만, 모든 것이 그런 식으로 입증되는 걸세. 산 정상에 올라 상쾌한 기분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네. 정상에 오르면 우리는 더 이상 오르지 않으니까. 대신 점심 같은 걸, 여하튼 집에서처럼 푸짐하게 먹네. 어쩌면 집에 돌아온 후에야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네. 산이 뭐라고 말하던가? 산이 무엇을 하던가?
『월든』을 읽는 독자에게도 똑같은 충고가 주어질 터다. 『월든』을 읽는 데는, 즉 산을 오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진정으로 산에 올랐는가?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는가?'라고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월든』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은 시대마다, 또 개인에게도 매년 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산에 오르고 월든 호수로 되돌아가며 『월든』을 다시 읽는다. 『월든』이 출간된 지 15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슴에 설득력 있게 와 닿는 글이라는 사실은, 위대한 스승의 우화처럼 보편성을 띤다는 증거이며, 우화를 만드는 선각자이자 시인이었던 소로에게 보내는 찬사다.
- 제프리 S. 크래머(주석을 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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