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셰익스피어의 대표작들만이라도 천천히 읽어 봐야지 했던 '셰익스피어 읽기'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셰익스피어 전집'을 모조리 읽는 쪽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셰익스피어를 제대로 만난 지 이제 겨우 두 달이 지났다. 하지만 끝없이 펼쳐진 그의 희곡 작품들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관련서'까지 읽다 보니 그를 만난 지 어느새 일 년쯤은 훌쩍 지난 듯한 착각마저 든다. 대략 이쯤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단상'을 글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태껏 읽은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정확히 21편이다. 그걸 읽은 차례대로 나열해 보고 싶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목록이 얼마나 길게 늘아날 수 있는지도 구경할 겸.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로미오와 줄리엣』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좋으실 대로』

『십이야』

『잣대엔 잣대로』

『겨울 이야기』

『태풍』

『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헨리 5세』

『헨리 8세』

『리처드 2세』

『리처드 3세』

『말괄량이 길들이기』


이렇게 나열해도 그의 전작품을 다 읽기 까지는 아직도 16 작품이 더 남았다. 그의 희곡 작품이 무려 37개나 되니 말이다. 아직 6할도 못 읽은 셈이다. 아직까지 미처 못 읽은 작품들은 민음사에서 출간 중인『셰익스피어 전집』시리즈가 마저 나오는 대로 천천히 읽을 작정이다.


(최종철 교수가 '전10권'을 목표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시리즈. 전집 1권, 4권, 5권 , 7권에 담긴 작품들(모두 16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의 '운율을 살린 운문 번역'이면서 '가장 최신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작품마다에 딸린 '풍부한 작품 해설'과 '충실한 주석' 등도 돋보인다. 간혹 지나친 '운문 번역'이 드라마틱한 극중 대사의 묘미를 반감시키는 면도 없지는 않다.)


(민음사 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도 다른 번역자의 판본으로 더러 찾아 읽었다. 신정옥 교수가 '전작품'을 완역한 '전예원' 판은 번역된지 너무 오래된 상태여서 '외국어 표기'가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고, 산문체 번역이어서 '시적인 대사'를 감상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성일 교수가 번역한 '나남'의 『리처드 2세』는 '감정을 격동시키는 대사'에 관한 번역이 특히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들도 대체로 무난했다. 몇 권의 '셰익스피어 관련서'도 매우 유익했다.)


이제부터 내 나름대로 파악한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설마 이 모든 것을 윌리엄이 썼다고 믿습니까?”


이 말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이 내뱉은 말이다. 셰익스피어는 문인집안 출신도 아니고, 옥스퍼드나 캠브리지 대학을 나온 적도 없는 시골 출신 청년이었다. 그런 인물이 어떻게 갑자기 그토록 많은 걸작을 쏟아낼 수 있었는지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말투였다. 


셰익스피어라는 인물이 진짜로 원작자가 맞느냐는 논쟁을 키운 건 미국 여성 델리아 베이컨이었다. 그녀는 영리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다. 열다섯에 소녀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떠안은 채 교사로 일하던 즈음에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빠져들었다. 각종 기록을 세밀히 검토한 그녀는 셰익스피어 작품의 원작자가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이 유명한 얘기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등장한다.


선량한 베이컨: 곰팡이 냄새 어린 채. 셰익스피어가 베이컨이라는 황량한 논법.251) 한 길을 걸어가는 암호의 사기꾼들. 위대한 탐색의 탐정가들. 무슨 도시로, 위대한 명사들이여?


251) Shakespeare Bacon's wild oats. 미국의 여류 소설가 델리아 베이컨(1811∼1859,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과 인척관계라 주장함)은 그녀의 저서인 『드러난 셰익스피어 연극의 철학(Philosophy of the Plays of Shakespeare Unfolded』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썼다고 주장함. 또한 셰익스피어 작품은 그보다 학식이 많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씌어졌을 것이라는 부정적 설도 있음.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9장 국립도서관(스킬라와 카립디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수많은 '셰익스피어 전문가들'조차 델리아 베이컨의 의견에 대해 동조 내지는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대표적 인물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단정 짓지는 못해도 프랜시스 베이컨 등 주변 인물의 도움이 분명 있었을 거라며 델리아의 의견을 옹호했다. 에머슨과 오랜 우정을 쌓았던 토머스 칼라일도 델리아의 작업을 지지했다. 에머슨과 소로우 등과 함께 콩코드에서 함께 살았던 너대니얼 호손은 델리아의 책 출간을 은밀하게 지원했다고 한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이 저런 말을 했다고 해서 별로 놀랄 일도 아닌 셈이다. '음모론적 시각'은 무슨 일에든 개입하기 좋아하는 법이다. 그런 얘기는 이쯤에서 그치자.


셰익스피어는 20여 년간 무려 37편의 극작품과 154편의 소네트를 썼다. 그는 무려 1,100여 명의 캐릭터를 창조하였고, 등장 인물들이 느꼈던 수만 가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2만여 개의 단어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우리가 그에게 압도되는 건 작품의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비록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지만, 수많은 작가와 비평가들은 '천재가 빚은 예술작품'에 여전히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그 많은 작품들이 골고루 걸작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시인들조차도 각자 서사시, 비극시, 희극시 등으로 그 분야를 나뉘어 작품을 썼지만 이 인물에게만은 그런 '영역 구분'조차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는 희극 · 비극 · 사극 · 로맨스 · 소네트 · 시 등에 전방위적으로 두루 걸출했다. 또한 모든 작품들이 고유의 색깔과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심지어 10편의 사극에서조차 인물의 성격 뿐만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와 구성 등이 모두 다르다.


셰익스피어는 소년 시절 문법학교에 다닌 게 교육의 전부로 알려져 있다. 소년 셰익스피어는 이 단계에서 로마의 희극 작가 테렌티우스나 웅변가 키케로뿐 아니라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등 로마 시인들의 작품을 두루 접했다. 나중에 런던으로 진출하여 극작품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몽테뉴의 『수상록』등으로부터 특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의 천재답게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놀라운 재능 덕분에 그는 '원전'과는 또다른 온갖 독창적인 작품을 쏟아낼 수 있었다.

단적인 예가 초창기에 쓴 『비너스와 아도니스』란 작품이다. 오비디우스가 약 70행으로 읊은 이 짧은 이야기를 셰익스피어는 무려 1200행가량의 장시로 늘렸다. 이 무렵 셰익스피어는 사극『헨리 6세』3부작과 『리처드 3세』의 창작을 마친 신출내기 극작가였다. 이처럼 사극을 쓰다가 느닷없이 오비디우스풍의 서사시를 쓴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작품이 출판되자마자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점과 셰익스피어가 시인으로서 일약 명성을 얻었다는 점이다. 이 무렵 로버트 그린이라는 작가가 셰익스피어의 극작가로서의 성공을 시기하여 그를 "벼락출세한 까마귀"로 비하한 일이 있었는데, 셰익스피어가 보기 좋게 자신의 시적인 능력을 보여준 셈이었다.

그 작품의 제사(題詞) 또한 흥미롭다.(그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노래>에서 인용했다.)

속물들은 잡것에 혹하게 놔두고
금빛 머리 아폴로여, 저에게는
영감이 가득한 샘물 잔 내리소서.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기(1564∼1616)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였다. 또한 유럽 사회 전체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거대한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였고, 에스파냐에서는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소식이 온 유럽으로 퍼져 나갈 무렵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1517년)도 시작된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였다.『돈키호테』의 저자인 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1571년)에 참가했고, 몽테뉴(1533∼1592)는 『수상록』(1580년)을 간행했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1565년)라는 시조를 지었고, 정철이 『관동별곡』(1580년)을 발표했고,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 『한여름 밤의 꿈』을 완성했을 땐 임진왜란이 터져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과 노량대첩을 벌일 때였고, 『리어 왕』(1605년)과 『맥베스』(1606년)을 발표할 무렵에는 허균이 『홍길동전』(1607년)을, 허준이 『동의보감』(1613년)을 간행할 무렵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위대한 점은 당대의 독특한 시대적 배경을 '훨씬 뛰어넘는' 작품들을 썼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언제나 '살아 있으면서 고민하거나 괴로워하거나 기뻐하는 인간 그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그의 비극이 고대 그리시 비극시인들의 '운명적 비극'과 달리 '성격적 비극'으로 불리는 이유 또한 지극히 현대적이다. 『햄릿』을 비롯한 그의 수많은 희곡 작품들이 현대에 와서도 활발하게 연극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는 자체가 셰익스피어 작품의 탁월한 예술성을 증명하는 셈이다.


그의 희곡이 빛나는 또다른 이유는 문장이 너무나 절묘하고도 아름답다는 점이다. 그는 음악처럼 그 다음이 듣고 싶어지는 대사를 쓰기 위해 '운문' 형식을 특히 많이 사용했다. 또한 리듬이 넘치는 말을 사용해서 극적 효과를 높였다. 가령 '적의 아들인 로미오를 사랑하다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말할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아, 로미오, 로미오, 어째서 당신의 이름은 로미오인가."

뒷날 『리어 왕』을 썼을 때, 그는 짧은 한 문장을 주인공에게 말하게 했다. "부탁하네, 이 단추를 풀어주지 않겠는가?" 이 글은 겨우 5단어로 되어 있으면서 적어도 3가지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실제로 옷의 단추를 풀라는 의미와 현세의 허영의 상징인 의복을 벗어버린다는 의미, 그리고 이 삶의 고뇌를 벗고 떠나고 싶다, 즉 죽고 싶다는 주인공의 비통한 소망을 포함한 의미이다. 등장인물의 성격과 상황에 대응한, 유연한 살아있는 말을 쓰는 능력을 셰익스피어는 긴 세월 동안 창작 활동을 통해 습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뛰어난 시란 어떤 것일까? 간결한 말에 여러 의미를 포함시킨다. 말에서 각각의 이미지가 넓어진다. 읽는 이가 분명 그러하다고 납득하게 만든다. 그러면서도 저마다 나름대로 해석하는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뛰어난 시라고 평가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러한 작품을 썼다. 그의 희곡작품은 극이면서 동시에 시인 극시인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시인이었고, 그가 시성(詩聖)이라고 불리는 이유와 작품의 끝없는 깊이도 거기에서 나온다.(571쪽)


 - 동서문화사,『햄릿/오델로/리어 왕/맥베드/로미오와 줄리엣』, <셰익스피어의 생애와 사상> 중에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후세에 끼친 영향을 우리는 얼마만큼이나 파악할 수 있을까. 문학, 연극, 음악, 미술, 영화 등 수많은 예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이걸 종합적으로 조망하는 그림을 그려내기란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셰익스피어는 심지어 정치학과 철학, 심리학과 정신분학석 등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도 『자본론』과 『경제학·철학수고』에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인용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편지'에도 셰익스피어가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또한 '오이디푸스 이론의 근간을 마련하기 위해 '소포클레스의 희곡과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탐닉했다고 한다.(프로이트 역시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작품들이 지나치게 높은 문화수준을 갖추었다는 점 때문에 '원작자'가 따로 있다고 보았던 인물이다.)


마르크스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자주 읽었고, 이를 굉장히 좋아하여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셰익스피어를 그리스의 아이스킬로스와 함께 인류가 낳은 가장 위대한 극작가 중 한명으로 존경했다. 또한, 그는 작품에 등장하는 단역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저서에도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상당히 많이 인용되고 있다.


"볼테르는 셰익스피어를 술 취한 야만인이라고 했다. 이처럼 프랑스인에게 반발심을 불러 일으킨 영국 비극의 특성 중 하나는 숭고한 것과 저속한 것, 두려운 것과 익살스러운 것, 영웅과 광대가 독특하게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영웅극의 서두를 이야기하는 역할을 광대역에게 맡기지는 않았다." <의회에서의 전쟁토론>(1854년)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가 찾아왔다』, <괴테, 톨스토이, 마르크스가 읽은 셰익스피어>


이토록 온갖 분야에 두루 영향을 끼친 셰익스피어는 과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어떤 '사상이나 철학'을 설파하고자 했을까.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항상 열린 자세로' 독자들의 판단에 맡길 뿐 자기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법이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작품에 제시된 세계는 '모색(摸索)으로 가득 찬 세계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어떤 사상을 배우려고 하는 건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 『평생독서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도 이 점을 간파하고 명쾌하게 결론내렸다. "그는 위대한 독창적 사상가는 아니다. 시인들은 대개 독창적 사상가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의 주특기가 아니다. 세상을 바꾸어 놓은 사상을 찾는 사람은 셰익스피어에게 물어보면 안 된다."라고.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그는 당대의 인기 최고의 드라마 작가였다. 오늘날도 사정은 비슷하다. 우리가 '인기 최고의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서 무슨 고매한 철학이나 사상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이런 경향은 그가 '철학'을 두고 표현하는 '극중 인물들의 대사'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에게는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이다. 그는 'Philosophy(철학=논리적인 것)'이라는 말을 그의 모든 작품을 통틀어 14번 사용했는데, 모두 부정적인 의미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자. 줄리엣의 사촌을 죽여 베로나에서 추방당한 로미오는 자신을 위로하려고 논리로 설득하는 로렌스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직도 '추방' 얘깁니까? 철학 따윈 개나 줘버려요! 철학으로 줄리엣을 만들 수 있나요, 마을 전체를 뒤집어엎을 수 있나요, 아니면 영주님의 판결이 뒤바뀔 수 있게 하나요. 철학 따윈 아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더 말씀 말아 주세요."


그리고 햄릿은 아버지의 망령에게서 친동생이 자신의 목숨과 왕관과 부인까지도 빼앗아갔다는 말을 듣는다. 그때까지 갖고 있던 인간관이 모두 무너진 그는 친구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호레이쇼, 이 세상에는 우리들의 철학으로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네." (58∼59쪽)


 - 오다시마 유시, 『셰익스피어가 내가 찾아왔다』, <셰익스피어의 인간관·역사관의 형성>


시정이 이렇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위대함이 훼손될 일은 없다. 셰익스피어는 여전히 문학의 최고봉으로 우뚝 솟아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이후에 활동한 수많은 작가들이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가 되었다. 오죽하면 괴테가 이런 말을 남겼을까.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면 그가 인간의 본성 전체를 모든 면에서, 그리고 모든 깊이와 모든 높이에서 철저히 연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그 이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해서 극작가나, 소설가, 시인이 모두 펜을 접어야 하는 건 아니다. 이미 셰익스피어 스스로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여럿 참고해서 자신의 작품을 썼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괴테는『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는데 그 작품은 괴테가 쓴 『햄릿』이라고 평가받는 작품이다. 체호프의 <갈매기>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햄릿』을 다시 쓸 수 있는 자유마저 박탈당한 건 아닌 셈이다. 물론 세익스피어의 작품 앞에 압도된 나머지 작가가 되는 길을 지레 포기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는 셰익스피어를 연구하는 데 평생을 바친 사람들도 많았다. 그토록 우뚝 솟은 '문학의 거봉'이 자신의 품 안에서 먹여 살릴 사람들의 숫자는 얼마나 많을까. 이 또한 오래 전부터 반복된 '익숙한 전통'이자 당연한 귀결이긴 하지만 말이다.

플루타르크의 판단에 의하면, 그('호메로스'를 가리킨다)는 독자에게 언제나 전혀 다르게 나타나며, 항상 새로운 우아미로 개화하며, 결코 사람들을 물리게 하거나 염증 나게 하는 일이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가라는 특별한 찬사를 받는다. 장난하기 좋아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학자로 자처하는 어떤 자에게 호메로스 한 권을 달라고 요구했더니, 가진 것이 없다고 하자, 따귀를 한 대 갈겨 주었다. 그것은 마치 우리 신부님들 중에 성무 일과서(聖務日課書)를 갖지 않은 자를 보는 식이다.


크세노파네스가 어느 날 시라쿠사의 폭군 히에론에게 자기는 하인 둘을 먹여 살릴 거리도 갖지 못했다고 불평을 하자, 그가 대답했다. "뭐? 그대보다 훨씬 더 가난하던 호메로스는 아무리 죽을 지경이언정 만 명 이상의 학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파나이티오스가 플라톤을 철학자들의 호메로스라고 말했을 때에, 이 말에 무슨 부족한 것이 있었던가?


 - 몽테뉴, 『수상록』, <가장 탁월한 인물들에 대하여>


셰익스피어의 삶이 미스터리에 둘러싸인 까닭은 그가 '작품' 말고는 다른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필 원고는 전무하고 그가 서명한 서류 몇 건과 출생 및 사망 증명서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의 작품을 통해 거꾸로 '작가의 삶'을 연구하고 밝혀 보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어질 듯하다. 정답이 없는 문제만큼 마음놓고 계속 떠들 수 있는 주제도 드물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전기'만 하더라도 이미 얼마나 많이 쓰여졌던가. 구매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도서관에서 대충 훑어 보기만 했던 책들 가운데서도 '셰익스피어를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매력적인 책들이 꽤나 많았다. 가령 스티븐 그린블랫의 세계를 향한 의지와 리처드 폴 로의 셰익스피어의 이탈리아 기행 같은 책들이 그랬다. 그런데 이런 류의 책들은 잘만 읽으면 무척이나 유익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다 보면 도리어 쓰디쓴 맛만 안겨주는 고약한 책으로 돌변하기도 쉽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감동을 두루 충분히 맛보지 않은 상태에서 읽으면 저자가 느낀 만큼의 깊은 감흥에 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마치 몸이 몹시 허약한 사람한테는 비싼 보약조차도 함부로 처방하기가 어려운 경우를 닮았다고나 할까.

셰익스피어 원작자를 둘러싼 논쟁이나 음모론들은 사실 일반 독자들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셰익스피어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승패'가 달린 문제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에 관한 일반 독자들의 문제는 언제나 셰익스피어의 숱한 명작들을 직접 읽느냐 마느냐에 달렸다. 그것이 『햄릿』이든 『로미오와 줄리엣』이든 『한여름 밤의 꿈』이든 『겨울 이야기』든 도대체 무슨 상관이랴. 선택은 언제나 독자들의 '뜻'에 달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제목만으로도 이 글을 맺을 수 있다는 건 유쾌하다. 『좋으실 대로(As you like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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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쓰고 나니 문득 '생각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차지하는 위상은 어떤 것일까가 궁금했다. 결론은 내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문학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지만 '사상'에는 별로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특히 "인물들은 과거의 고전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문주의와 전혀 무관하며, 학문에 의존하지도 않는다."라는 몹시 썰렁한(?) 평가는 '셰익스피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르네상스와 함께 인류 전체가 '죽음보다 깊은 잠'에서 막 깨어나 힘찬 도약을 위해 경쾌한 발걸음을 내딛던 시기가 바로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철학도 아니고 교훈 이야기도 아니다. …… 용기와 체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 대한 태도다."라는 격찬을 받았던 『돈키호테』도 바로 '셰익스피어의 시대'에 쓰여졌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 비춰 보면 '생각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차지하는 위치는 아무리 봐도 좀 유별나고 독특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그 자체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라고 극찬했던 에머슨도 이런 측면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했다.


17세기 초까지 '연기'라는 용어는 런던의 연극 배우에게만 적용되었다. 이는 '변사'의 지위가 크게 높아졌고 인물 연기와 성격 묘사가 한층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배우는 아직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공연 목록이 관례화되면서 전혀 다른 여러 역할을 거의 연속적으로 소화하는 배우의 능력이 중요해지자 사람들은 배우의 다재다능함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도 1604∼1605년에 존 던은 『조신 도서목록』을 쓰면서 희곡을 목록에 넣지 않았다. 희곡은 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온 희곡은 두 가지 필수 요소를 포함했다. 하나는 당시의 기법이 허용하는 한 최대한의 사실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서적 직접성이다(초기 런던의 연극에는 저널리즘의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연극이 당시 관객들도 깨닫고 있는 변화하는 세계를 반영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회적 상황은 변화하고 있었다. 낡은 규칙들이 붕괴하고, 사적인 독서가 늘고, 사람들의 경제 형편이 갈수록 좋아졌다.


이런 세계에 셰익스피어가 등장했다. 헤럴드 블룸은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셰익스피어는 우연이었을까? 어쨌든 그는 처음부터 엄청난 재능을 보이지는 못했다. 블룸이 말하듯이 셰익스피어가 말로처럼 스물아홉 살에 죽었다면 그의 걸작은 전혀 인상적이지 못했을 것이다. …… 말로가 죽고 5년 뒤 셰익스피어는 『한여름 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2부작『헨리 4세』를 필두로 선배이자 라이벌을 뛰어넘게 된다. 보텀, 샤일록, 폴스타프는『존 왕』의 팔콘브리지를 능가하며, 특히『로미오와 줄리엣』의 머큐시오는 말로의 재능과 관심을 크게 뛰어넘은 새로운 극중 인물을 보여준다. …… 폴스타프가 창조된 뒤 13∼14년 동안 뛰어난 극중 인물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로잘린드, 햄릿, 오셀로, 이아고, 리어, 에드먼드, 맥베스, 클레오파트라, 앤서니, 코리올라누스, 타이먼, 이모젠, 프로스페로, 캘리번 등이다. 1598년에 셰익스피어는 명성을 굳혔고 폴스타프는 그 명성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까지 다른 어떤 작가도 셰익스피어의 풍부한 언어 구사력을 따르지 못했다. 『사랑의 헛수고』에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에 완전히 봉착했음을 느낀다. (610∼612쪽)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Ⅰ』, <19. 상상력의 폭발> 중에서


그는 신학도, 형이상학도, 도덕도 없고 정치 이론과도 멀다


생각의 역사에서 셰익스피어는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았으며, 스스로 근본적인 두 가지 혁신을 일구었다. 하나는 가변성이다. 셰익스피어의 주요 인물들은 독백을 통해 변화의 능력, 심리적 · 도덕적 측면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요소다. 햄릿과 리어에게서도 그 점을 볼 수 있지만 최고는 셰익스피어의 가장 위대한 극중 인물인 폴스타프다. 둘째는 흔히 간과되는 측면인데, 도시화와 관련된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그리스도교화를 거부한다." 그의 희곡은 그 자체의 세계에 존재하며, 세계는 그들 자체에서 끝난다. 우리는 그 점을 즉각 받아들일 수 있다. 인물들은 과거의 고전으로부터 영감을 끌어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인문주의와 전혀 무관하며, 학문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셰익스피어는 열정에 찬 사람이 아니다(적어도 그의 결혼은 그랬다). 그는 신학도, 형이상학도, 도덕도 없고 정치 이론과도 멀다." 그 대신 진정한 의미에서 그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심리'를 발명했다. 아마 가장 셰익스피어다운 희곡은 『리어 왕』일 것이다. 블룸은 이 작품의 결말에서 생존 인물들은 '우주론적 공허함'에 빠진다고 말한다. "『리어 왕』의 결말에는 초월이 없다. …… 리어의 죽음은 그에게는 해방이지만 생존자들에게는 아니다. …… 또한 우리에게도 해방이 아니다. …… 국가만이 아니라 자연도 치명상을 입는다. ……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의 훼손이다. 우리의 삶에서 자연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감각이 무너진다." 이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요소다.(612쪽)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 Ⅰ』, <19. 상상력의 폭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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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6-24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틈틈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있는데, 극의 짜임새도 좋지만 대사 중간에 나오는 문장은 정말 숨막히게 합니다... 가슴 깊이 꽂히는 대사 하나하나를 읽다보면 멈출 수가 없네요^^: 정말 외우고 싶은 문장이 많은 셰익스피어 작품입니다...

oren 2017-06-25 13:59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언어는 경이로움 그 자체인 듯해요. ˝HOW TO READ 셰익스피어˝를 읽어보니 그가 사용한 언어들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되더군요.
* * *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즉각적이고 강렬한 느낌은 그가 언어를 사랑한다는 느낌이다. 말을 가지고, 그리고 말이 초래할 수 있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은 제 생명이 따로 있거나 기계적인 힘이 있는 듯 느껴진다. 하나하나가 작은 검색 엔진이며, 참견쟁이 꼬마 도깨비이며,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기이한 생물 같다.˝

cyrus 2017-06-25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만약 셰익스피어 희ᆞ비극 전 작품을 수록한 주석판이 나온다면 분량이 엄청나겠어요. 본문보다 주석의 분량이 많을 겁니다. ^^

oren 2017-06-25 14:27   좋아요 1 | URL
『HOW TO READ 셰익스피어』의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7개‘를 ‘일곱 개의 단어‘로 기가 막히게 설명해 놓았더군요. 가령, 『햄릿』은 ‘벙어리들‘로, 『맥베스』는 ‘안전한‘으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끄덕임‘으로 설명하는 식이죠. ‘주석이 없는 셰익스피어‘를 읽을 수밖에 없는 독자들은 ‘셰익스피어의 언어‘가 갖는 온갖 놀라운 비밀들을 ‘거의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지나치며 읽고 있다고 봐야 옳겠더군요.
* * *
…… 그러나 이러한 단어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드퀸시(Thomas De Quincey, 1785∼1859)가 1823년 셰익스피어를 읽는 경험에 대해 했던 말이 얼마나 예리했는지 입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드퀸시는 이렇게 말했다. ˝탐구를 계속할수록, 조심성 없는 눈은 우연성밖에 보지 못하던 곳에서 설계와 자립적 배치의 증거를 점점 더 많이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넘치는 펜으로 옮겨지면 보잘것없는 연극소극장도 하나의 드넓은 우주로 변해 온갖 계층의 신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무대가 좁다'는 듯이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만다.

 - 랄프 왈도 에머슨

 

 * * *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다. 뒤늦게 만난 셰익스피어의 글을 도둑질하듯 밤마다 찾아 읽느라 정신이 없다. 뿔 달린 달님조차 눈을 감은 오밤중이나, 희뿌연 여명이 밤을 쫓아낼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도 그가 남긴 연극의 대사를 찾아 읽느라 짧은 밤이 아쉬울 지경이다. 심지어『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는 새벽 장면마저도 '글 도둑질에 빠진 사람'의 심정을 묘사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해봤다. 이 밤이 지나면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길고도 무료한 낮을 또 보내야만 해요, 하는 심정이라고나 할까. 우린 서로 아무 사이도 아니고 연인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줄리엣

가려고요? 날은 아직 밝지도 않았는데,

걱정하는 당신의 텅 빈 귀를 꿰뚫은 건

종달새가 아니라 밤 꾀꼬리였어요.

밤마다 저기 저 석류나무 위에서 우니까.

내 말을 믿으세요, 여보, 밤 꾀꼬리였어요.


       로미오

종달새였다니까, 아침의 전령이지

밤 꾀꼬린 아니오. 저 봐요, 저 건너 동녘에

시샘하는 빛살이 터진 구름 수놓는 걸.

밤 촛불은 다 꺼지고 유쾌한 낮의 신이

안개 낀 산마루에 발끝으로 서 있다오.

난 가서 살거나 남아서 죽어야만 한답니다.


       줄리엣

저 빛은 햇빛이 아니란 걸 알아요, 예,

저것은 태양이 내뿜은 혜성으로

오늘 밤 당신 위해 횃불잡이 노릇하며

만토바로 가는 길을 밝히려 한다고요.

그러니까 머물러요, 갈 필요 없다니까.


       로미오

잡혀가게 해 줘요, 죽임을 당하도록.

당신이 그러기를 원하면 난 만족이랍니다.

나는 저 잿빛이 아침의 눈망울이 아니라

창백한 달님 이마 반사한 것뿐이며

저 높은 곳에서 노래로 창공을 울리는 게

종달새가 아니라고 우겨 말할 테니까.

난 가려는 의지보다 머물 맘이 더 많아요.

죽음이여 어서 와라. 줄리엣의 뜻이다.


       줄리엣

밝았어요, 밝았어. 어서 여길 떠나세요.

거슬리는 불협화음 불유쾌한 올림표로

엉망진창 노래하는 저것은 종달새랍니다.

종달새는 고운 음을 분산 연결한다는데

저것은 못 하네요. 우릴 분리시키니까.

종달새와 역겨운 두꺼비가 눈을 바꿨다는데

오, 서로의 목소리도 바꿨으면 좋았을걸.

그 소리에 놀라서 우리 포옹 풀어지고

일어나라 노래하며 당신 쫓아내니까요.

아, 이제 가요, 점점 더 밝아지고 있어요.


       로미오

날은 점점 밝아지고 우리 한탄 짙어지네.


『로미오와 줄리엣』, <3막 5장>

 


『햄릿』부터 시작하여『오셀로』, 『맥베스』,『리어왕』을 차례대로 만난 뒤,『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를 빠르게 지나쳤다. 눈물 없인 만날 수 없는『로미오와 줄리엣』을 (안타깝게도) 메마른 눈으로 만난 뒤에는 다시『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나서 『베니스의 상인』을 만났다. 별이 총총한 새까만 밤,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 위의 망대에서 출발했던 여정이 어느새 데스데모나가 살았던 베네치아의 길거리로 되돌아와 있었다.


셰익스피어 덕분에 내가 만나는 인물들이 갑자기 부쩍 많아졌고, 생전 못 가 본 '장소'까지도 실컷 쏘다니는 기분도 든다. 그런데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온갖 인물들을 아무리 실감나게 실컷 만나고 돌아다녔더라도 내가 그들을 또다른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생생하게 재현할 방법이 없다는 점은 여간 아쉬운 게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도록 만든 인물들을 어찌 나의 둔필로 다시 살려낼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모습을 전하고자 애를 쓸수록 도리어 그들을 덧칠해서 셰익스피어가 본래 그렸던 그림을 더 망칠 뿐이라는 생각마저 고개를 든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인물들이 지닌 특색 한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성격이나 모습이나 생각이 '모호'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햄릿만 하더라도 그렇다. 누가 그를 두고 '이런 인물'이라고 단정적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극중 인물들이 명쾌하게 '나, 이런 사람이야' 하고 곧바로 독자들에게 선명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물론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많은 인물들은 독자들에게 명쾌하게 '규정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게 바로 셰익스피어 희곡의 특징이자 매력인 듯하다.


거듭 말하지만 셰익스피어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 번만 만나서는 결코 그들의 진면목을 제대로 다 알기 힘들다. 그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로지 '등장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서만 그들을 파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극작가는 희곡을 쓸 때 '배경 설명'만 생략하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대화'나 '장면'까지도 생략하기 마련이다. 그런 생략과 함축을 통해 작가는 독자들의 주의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싶어 하고, 독자들이 각자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가능한 한 풍부하게 남겨주고 싶어하는 듯하다.


셰익스피어 읽기의 숱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독자들만이 겪고 있는 특별한 고충을 나 또한 절감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우선 극이 쓰여졌던 시대 상황이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르다. 그의 작품들은 우리나라 역사에 대입하자면 임진왜란이 한창일 무렵에 머나먼 영국땅에서, 그것도 고대 영어로 쓰여진 '고색창연한 연극의 대본'인 셈이다. 그러니 그 대본이 우리 실정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상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거기서 연유하는 문제는 곧바로 번역상의 어려움으로 이어진다. 수많은 대사들이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숱한 뒤틀림이 생길 게 너무나 뻔하다. 우리말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무려 400년 전에 다른 나라 언어로 씌여진 대사가 온전히 우리가 쓰는 지금의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거듭 '여러 번' 읽으라고 권유하는 듯싶다. 심지어 소설도 '여러 번' 읽을 것을 강조하는 형편인데 희곡이야 오죽하랴.


이만 각설하고, 나는 이쯤에서 내가 읽은 작품들 가운데 '명대사' 만이라도 몇 대목쯤 다시 찾아 보고 거듭 재음미하고 싶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즐거움이 반드시 그의 작품이 다루는 이야기에만 있는 건 결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숱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잊지 못할 대사 하나 하나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찬란하게 빛내는 보석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보석은 원래 자리잡고 있던 보석함에서 잠시 꺼내 놓더라도 결코 그 가치가 퇴색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셰익스피어의 반짝이는 대사들을 여기에 옮겨 적는 일은 구석진 내 서재를 잠시나마 그런 보석들로 환하게 빛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많은 보석들을 여기에 한꺼번에 꺼내 놓아 '보석 구경'에 싫증을 일으킬 생각까지는 없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려진 '보석 같은 명대사'를 식상하게 다시 꺼내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랬다가는 이내 보석을 돌처럼 여기고 금방이라도 고개를 돌릴지 모를 테니까 말이다.


우선『햄릿』부터 시작해 보자. 그가 바로 셰익스피어를 영원토록 빛낼 대표적인 인물이니까.


나에겐 까마득한 옛날에 아동용 버전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읽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때의 기억들은 뿔뿔이 어디론가 다 흩어지고 달아났지만 아직까지도 단 한 가지는 남겨 놓았다. 그건 바로 '암투에 휩싸인 궁궐 속 인물들이 서로 싸우다가 죽이고 죽는 이미지'다. 햄릿이나 오셀로나 맥베스나 리어 왕이나 하나같이 '궁궐'과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 빠지지 않았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내가 읽었던 아동용 작품 속에 그런 이미지들이 실제로 그림으로 실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햄릿』의 수많은 대사 가운데 나는 다음 대목을 맨 처음으로 내세우고 싶다. 대사의 맨 끝 부분에 특히 주목하기 바란다.


       호레이쇼

보십시오, 왕자님, 왔습니다.


            햄릿

구원의 천사들은 저희를 지키소서!

네가 좋은 귀신이든 저주받은 악귀든

하늘 바람 타고 왔든 지옥 돌풍 몰아왔든

네 의도가 사악하든 자비롭든지 간에

질문하기 알맞은 모습으로 왔으니까

난 말을 걸겠다. 난 너를 햄릿, 대왕, 아버지,

덴마크 왕이라 부르겠다. 오, 대답하라.

내가 몰라 터질 것만 같으니 말을 해라,

죽었을 때 예를 갖춰 입관한 시신이 왜

수의를 찢었으며 묘지는 왜 너를

우리가 봤을 땐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도

육중한 대리석 턱을 열고 입 밖으로

다시 토해 내었는지, 이게 무슨 뜻이기에

너, 죽었던 시신이 완전 무장 다시 하고

이렇게 명멸하는 달빛 속에 되돌아와

이 밤을 무섭게 만들면서 자연의 노리개인

우리의 마음을 영혼이 못 미칠 생각들로

이토록 끔찍하게 흔드느냐? 웬일이냐?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햄릿』, <1막 4장>



비단『햄릿』만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쓴 많은 희곡들을 읽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뭣 때문에?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이냐?' 이 말이야말로 우리가 『햄릿』을 읽고,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을 더 찾고, 더 나아가 숱한 문학작품을 끊임없이 찾아 읽는 궁극적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햄릿과 묘를 파는 산역꾼>, 빠스깔 다낭-부베레, 1883년



《햄릿》의 오필리아,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트라우트숄트(1815∼1877), 독일



이제 『오셀로』로 넘어가 보자. 이 질투심 많은 무어 인 장군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질책을 하진 말자. 그가 데스데모나를 죽일 만큼 강력한 질투심을 일으킨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말이다. 그가 '자신의 행적과 인간성'을 베네치아 정부에 고할 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려달라고 말한 대목만큼 인상적인 대사도 드물다.


           오셀로


무엇을 줄이거나

악의로 적지도 마시오. 그러면 당신은

분멸없이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을

질투를 쉽게 하진 않지만 하도록 만들면

극도로 혼란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자기네 부족보다 더 값진 진주를 던져 버린

비천한 인도인 같은 자를, 차분한 두 눈은

기분 따라 쉬 녹진 않지만 아라비아 나무가

약용 진액 흘리듯 눈물을 줄줄 쏟는 사람을

말해야만 할 것이오.


『오셀로』, <5막 2장>


<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헨리 먼로(1791∼1814)


오셀로와 가슴 아픈 사별을 나눴다면 늙은 리어 왕을 한결 가볍게 만날 수도 있다. 그는 비록 늙어 비참한 모습으로 두 딸로부터 버림까지 받아가며 방황하는 노인이지만, '아내를 죽이고 자결한 오셀로' 만큼 독자들을 울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을 가장 사랑했던 막내딸 코델리어가 자객에게 죽임을 당한 걸 알고 나서 비통하게 울부짖는 리어 왕의 다음 대사는 눈물 없이는 듣기 어려운 대사가 이닐 수 없다.


          리어 왕


불쌍한 내 바보가 죽었다. 생명이 없다 없어!

왜 개나 말이나 쥐는 살아 있는데

넌 숨조차 못 쉬느냐? 넌 다시 못 돌아와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리어 왕』, <5막 3장>


<감옥에서 아버지 리어왕을 위로하는 코델리아>, 조지 윌리엄 조이(1844∼1925), 1886년


『햄릿』과 『오셀로』와 『리어 왕』의 주인공이 하나같이 독자들에게 일종의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인물이라면, 『맥베스』는 도리어 주인공의 죽음이 독자들에게 만족을 안겨준다는 점이 다르다. 그것도 맥베스에 의해 부인과 어린 아들까지 잃은 맥더프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맥베스가 맥더프의 처자식들을 죽인 뒤에 '휩싸인 불안' 때문에 겪는 고통을 노래하는 대목은 '인생 무상'을 떠올리게도 만드는 '아주 여운이 긴' 대사이다.


         맥베스

내일과 또 내일과, 내일과 또 내일이

이렇게 쩨쩨한 걸음으로, 하루, 하루,

기록된 시간의 최후까지 기어가고

우리 모든 지난날은 죽음 향한 바보들의

흙 되는 길 밝혀 줬다.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

인생이란 움직이는 그림자일 뿐이고

잠시 동안 무대에서 활개치고 안달하다

더 이상 소식 없는 불쌍한 배우이며

소음, 광기 가득한데 의미는 전혀 없는

백치의 이야기다.

『맥베스』, <5막 5장>


벌써 우리는 덴마크의 엘시노어 성(『햄릿』의 무대 배경)에서 출발하여 베네치아와 키프로스 섬(『오셀로』의 무대 배경)을 거쳐 브리튼의 리어 왕궁과 스코틀랜드의 덩컨 왕궁(『맥베스』의 무대 배경)을 모두 빠르게 지나왔다. 이젠 지중해에 자리잡은 알렉산드리아와 로마를 숨가쁘게 오갈 차례다. '세기의 연인'으로 불려 마땅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활동무대가 바로 거기이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사는 '클레오파트라'를 몹시도 궁금해 하는 '로마 사람들'에게 '안토니우스의 부관 이노바부스'가 그녀를 묘사하는 대목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도 『안토니우스 편』에 이르면 갑자가 귓가를 세차게 때렸던 칼 부딪치는 소리와 대포소리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와 '여인의 향기'가 꼬끝을 휘감는 듯한 분위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할 정도인데,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보다 한술 더 뜬다.



     이노바부스

그녀가 탄 배는 물 위에서 불타는

빛의 옥좌 같았는데 선미는 금박이고

돛은 자주색으로 향수 냄새 진동하여

바람이 상사병에 걸렸죠. 피리 소리 따라서

은으로 된 노 저을 때 부딪치는 물결은

얻어맞는 애무를 받고 싶어 하는 듯

더 빨리 따라가게 되었죠. 그녀의 자태는

형용이 불가능했답니다. 천막 안에

금실로 수놓은 옷을 입고 누웠는데

실물보다 상상력이 뛰어난 그림 속의

비너스보다 더 나았지요. 그녀의 양쪽엔

귀여운 보조개 소년들이 큐피드처럼 웃으며

색색의 부채 들고 섰었는데, 그 바람은

섬세한 그녀 뺨을 식혔다가 태우는 듯

한 일을 망치는 것 같았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2막 2장>


'세상의 절반을 가졌던' 남자와 '세상의 전부를 가질 수도 있었던 남자를 사랑했던' 여자의 러브 스토리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안토니우스가 좀 더 팔팔했던 한 때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할 때 자칫 도매금으로 그와 함께 휩쓸려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브루투스의 방심'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선 남자 주인공이지만『율리우스 카이사르』에서도 남우조연상을 받을 만큼 두루 맹활약을 펼친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당에 의해 카이사르가 살해된 직후, 죽은 카이사르의 명예를 빠르게 회복시킨 건 바로 그였다. '사자후'를 토하듯 뜨겁게 쏟아낸 그의 연설이 로마 시민들을 삽시간에 흥분시키고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일당은 '안토니우스의 명연설' 때문에 졸지에 '개혁의 상징'에서 '불의의 쿠데타 세력'으로 내몰려 도망다니는 신세로 돌변한다.


『줄리어스 시저』의 주인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브루투스이다. 이 멋지고 용감하고 고상한 로마인은 단지 자신만 훌륭한 게 아니었다. 小카토의 딸이었던 그의 아내 또한 브루투스 못지 않았다. 몽테뉴와 마키아벨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위대하다고 칭송했던 로마의 인물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아니라 小카토와 브루투스였다.『줄리어스 시저』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은 아마도 브루투스가 고백한 말 "내가 시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었소. 나는 로마를 시저보다 더 사랑했을 뿐이오."라는 대사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브루투스의 죽음 이후에 안토니우스가 그를 기려 고별사에서 했던 말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런 대사를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접했기 때문이다.


        브루투스

이 사람이 그들 중 가장 귀한 로마인이었다.

그를 뺀 나머지 공모자들 모두는

위대한 시저에게 악심 품고 그 짓 했다.

오직 그만 공적이고 정직한 생각에서

모두의 공익을 위하여 한패가 되었다.

그의 삶은 고귀했고 인성은 완벽하여

자연의 여신조차 일어서서 온 세상에

'이게 사람이었다,'라고 했을 것이다.


『줄리어스 시저』, <5막 5장> 중에서



《줄리어스 시저》의 한 장면, 브루투스 역의 에드먼드 킨, 제임스 노스코트(1745∼1831)



연극의 무대가 아직까지도 지중해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 베로나가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몬터규 家와 캐풀릿 家의 싸움이 벌어지는 베로나 거리는 서둘러 건너뛰도록 하자. 이미 로미오와 줄리엣이 날이 새도록 나눴던 대화를 앞에서 길게 인용했으니 말이다.


이젠 슬픔과 비탄과 유령과 무덤과 죽음 등이 가득했던 비극을 건너 뛰어 '유쾌한 희극'으로 넘어갈 차례다. 내가 찾은 첫 번째 무대는 테세우스가 다스리는 그리스의 아테네다. 그곳에선 세 쌍의 커플이 곧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지만, '한여름밤의 꿈'을 꾸고 나서 한바탕 '대소동'을 치를 때까진 '아직' 아니다. 연인들끼리 서로 복잡한 사랑의 갈등을 겪기 때문인데, 그 갈등을 풀기 위해 오베론이 쓰는 '마법의 즙'이 도리어 일을 더 꼬이게 만든다.


        오베론

바로 그 순간에 (너는 못 봤지만) 나는 봤어,

차가운 달님과 땅 사이를 날아가는

중무장한 큐피드를. 서쪽에서 등극한

아름다운 정녀(貞女)를 그는 겨냥했었고

십만의 가슴을 뀌뚫을 듯 세차게

사랑의 화살을 시위를 놓으면서 날렸지.

하지만 그 어린 큐피드의 불같은 화살은

순결하고 습기 찬 달빛 속에 꺼졌으며

수녀 여왕께서는 연정에 안 빠진 채

처녀의 명상을 계속하고 계셨단다.

근데 난 그 화살이 떨어진 곳 지켜봤어.

서쪽의 작은 꽃에 떨어졌고 원래의 우윳빛이

사랑의 상처로 이제는 자주로 변했는데

처녀들은 그것을 팬지라고 부른단다.

내가 한 번 보여 줬던 그 꽃을 가져와라,

잠자는 눈꺼풀에 그 꽃 즙을 바르면

눈 뜨고 처음 보는 생물에게, 남자든 여자든

미치도록 혹하게 만들 수 있단다.

그 약초를 가져와, 그런 다음 너는 다시

큰 고래가 삼 마일을 가기 전에 여기로 와.


『한여름 밤의 꿈』, <2막 1장>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라이샌더, 존 시몬즈 作



《한여름 밤의 꿈》의 허미아와 헬레나, 조지프 세번(1793∼1879)



이제 아테네 근처 숲에서 겪은 대소동은 '한여르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나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다시 한번 건너갈 필요가 생겼다. 악명높은 유대인 샤일록이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계약 이행'을 하라며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안토니오는 이미 파산지경이라 돈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처녀를 신부로 맞아들인 친구 바사니오가 원금의 몇 배를 쳐서 그 빚을 갚아주겠다고 나섰으나 샤일록은 오로지 '1파운드의 살'만 가져가겠노라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특히 '삶의 교훈'으로 삼을 만한 '뛰어난 처세훈' 이 많은 게 특징이다. 그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 보겠다. '베네치아의 신사' 그라티아노가 말한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이라는 말은 몽테뉴가 『수상록』에서 거듭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 가운데 하나다. 이런 대목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몽테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명백한 증거다. 그렇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싯구들은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다면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표현임에 틀림없다.


        살라리노

오, 비너스의 비둘기는 안 깨진 서약을

지켜 주러 갈 때보다 사랑의 새 언약을

맺어 주러 날아갈 때 열 배나 더 빠르다네.


     그라티아노

언제나 맞는 말씀. 연회석에 앉을 때의

그 왕성한 식욕 갖고 그 누가 일어서죠?

지겨운 걸음걸음 같은 길을 되밟는데

처음 뛸 때 치솟았던 열기가 살아나는

그런 말은 또 어딨죠? 이 세상 모든 것은

얻었을 때보다 좇을 때가 더 좋은 법.

깃발 덮인 범선이 고향 해안 떠나갈 때

창녀 같은 바람 품에 얼싸안긴 그 모습은

얼마나 멋들어진 막내 또는 탕아인가!

창녀 같은 바람에게 돈 뺏기고 몸을 망쳐

비바람에 찢긴 늑골, 걸레 조각 돛을 달고

돌아올 땐 또 얼마나 비참한 탕아인가!


 『베니스의 상인』, ,2막 6장>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악명높은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조연일 뿐이다. 몇 척의 배를 '모험 사업'에 몽땅 올인한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 역시 조연이다. 진짜 주인공은 '막대한 유산'과 '미모'와 '미덕'을 두루 갖춘 예비 신부감 포셔다.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신랑감을 고르기 위해 '유언'과 함께 준비해 놓은 '금궤, 은궤, 납궤 고르기 게임'과 '반지의 혼란'이 '인육 재판'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낭만적 희극의 묘미'를 만끽하게 만든다.


《베니스의 상인》의 포셔, 찰스 에드워드 페루기니(1839∼1918, 이탈리아)


또한『베니스의 상인』에서는 '음악'이 유별나게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다. 샤일록의 현명한 딸 제시카와 그녀에게 구혼하는 로렌초가 주고 받는 '달빛 소나타' 같은 이중창은 그 어떤 오페라의 이중창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이런 밤에' 이토록 멋진 가락을 제쳐 놓고 『베니스의 상인』을 서둘러 덮긴 힘들다. 게다가 '별이 빛나는 깜깜한 밤'에 이 글을 시작했으니 '달빛이 밝은 밤'이 나오는 대사로 마무리짓는 것도 나로선 그리 나쁜 선택이 아닐 듯싶다. 벌써 어디선가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린다. 어서 여길 벗어나 다시 셰익스피어로 되돌아 가자. 그가 유혹하는 다음 작품이 맞춤하다.『좋으실 대로』


        로렌초

달빛이 참 밝네. 이 같은 밤이었지.

달콤한 바람이 나무에게 부드럽게 입 맞추면

나무는 소리 없이 서 있는 이런 밤에

트로일로스는 트로이 성벽에 올라가

크레시다 잠자는 그리스 편 천막을 향하여

혼 빠진 듯 한숨을 쉬었겠지.


        제시카

                                    이런 밤에

티스베는 겁을 내며 이슬 밟고 걷다가

사자의 그림자를 사자 앞서 보고는

놀라서 도망을 쳤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황량한 바닷가 제방에 디도는 홀로 서서

버들가지 잡은 손을 애인에게 흔들었지,

카르타고 다시 찾아오라고.


        제시카

                                    이런 밤에

메데이아는 이아손 노인을 정말로 회춘시킨

마법의 약초를 모았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제시카는 부유한 유대인에게서 도망쳐

반편이 애인과 더불어 베니스를 벗어나

저 멀리 벨몬트로 달아났지.


        제시카

                                    이런 밤에

로렌초는 확실한 사랑을 맹세하며

수많은 서약으로 그녀 혼을 훔쳤는데

진실된 건 하나도 없었지.


        로렌초

                                    이런 밤에

어여쁜 제시카는 말괄량이 소녀처럼

애인을 욕했으나 그는 용서했었지.


          제시카

아무도 안 왔으면 밤새 해도 이길 텐데.

하지만 들어 봐, 사람의 발소리야.


『베니스의 상인』, <5막 1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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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5-19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익스피어를 깊이 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읽다보니 대화 하나하나가 ‘시‘로 구성되어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대화 몇 구절만 외워도 별 의미없는 영어회화 공부하는 것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요즘 「맥베스」를 읽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19 11:23   좋아요 1 | URL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들이 ‘대사의 절반 이상이 운문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번역 과정‘에서 그런 운율을 충분히 제대로 살릴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더군요. 다행히 최종철 교수님이 ‘운문 형식‘으로 새로 번역한 ‘민음사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는 그런 문제점을 적잖이 해소한 중요한 시도라 보여집니다. 최종철 교수님이 번역한 똑같은 작품도 더러 비교해 봤더니 ‘과거의 산문 번역‘과 ‘새로운 운문 번역‘은 적잖은 차이가 있더군요. 겨울호랑이 님께서 지금 읽고 계신 『맥베스』의 영문판은 소위 ‘약강 오보격 무운시‘의 형식을 얼마만큼이나 느낄 수 있는지도 갑자기 궁금해 지는군요. 이쯤에서 다시 한번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에머슨이 셰익스피어의 ‘시적인 문장들‘에 대해 남겼던 참으로 인상적인 말을 다시금 떠올려 봅니다.
* * *
셰익스피어 극의 명대사는 그 모두가 마음이 황홀해질 정도의 문장이고 누구나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 주옥같은 명문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데 동시에 그 문장에는 논리학자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시종 훌륭한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작품의 피날레도 훌륭한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조리가 또 대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호 양립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요소를 절묘한 창의로 결부시키는 문장의 묘기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이다. 어디로 가건 아름다운 문예의 꽃을 피울 수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수한 산문의 대지를 걸을 필요는 전혀 없다.

겨울호랑이 2017-05-19 11:36   좋아요 1 | URL
영어 원문을 읽기는 하지만, 그 깊이를 영문화권에 사는 이들처럼 느끼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다소 아쉬움이 들지만, 자주 접하다보면 더 깊이 있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가져봅니다.^^:
 


인간에게 전후를 살피도록 풍부한 판별력을 부여하신 분이,
그런 능력과 존엄한 이성을 주었을 땐,
사용도 못해본 채 곰팡이가 생기도록
하시려 함은 확실히 아니렷다.


<햄릿> 4막 4장, 36-39


 * * *


셰익스피어는 거대한 사람이다. 인도와도 맞바꾸지 않겠다는 어느 영국인의 호언장담이 빈 말도 아니었다. 그는 인도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자신의 그림자로 가릴 만큼 충분히 거인이니까 말이다. 그런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이 얼마나 다채롭고도 장엄할까. 그러나 그가 거대한 사람이니만큼 그에게 다가서려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그만큼 주춤거리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평생 독서 계획』을 쓴 클리프턴 패디먼은 '셰익스피어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요약했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것과 약간 비슷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


참으로 멋진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젊어서 한 때는 암벽 등반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났던 등산학교 담임 선생님께서 직접 네팔에서 사다 주신 '에베레스트 실물 사진'이 아직도 내 책상 머리맡에 걸려 있다. 한때나마 나는 꽤나 자주 그 사진을 올려다 보며 '언제쯤 저길 오를 수 있을까' 하고 꿈꾸었지만 이젠 좀처럼 그 사진을 올려다 보지 않는다. 그런 도전을 하기엔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탓이다. 다만, 그런 사연들이 쌓인 덕분에 마침내 4년 전에 히말라야로 떠날 수 있었고, 그때 비로소 '희박한 공기'를 온 몸으로 체감하며 눈덮힌 고봉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래서 조금은 안다.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사실대로 말하자면, 숱한 전문 산악인 조차도 에베레스트 정복은 힘들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내가 경험했던 체르코리(해발 4,950m) 등정만 하더라도 돌아보면 몹시 힘겨웠다. 평소 풍부한 등산 경험과 막강한 체력을 갖춘 등반 애호가들 12명이 함께 도전에 나섰으나 상당수는 4,500m를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픽픽 쓰러졌으니 말이다. 나를 포함해 겨우 셋만 고지를 정복했는데 4,500m 이상에서 허리까지 푹푹 빠지는 눈덮인 너덜지대를 통과할 땐 털썩 주저앉고 싶은 때가 정말 여러 번이었다. 불과 두세 걸음을 옮긴 후에도 극심한 메스꺼움을 느끼면서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어야 했다. 거기엔 산소가 평지의 1/3에 불과했다. 그토록 희박한 공기 속에서 중력과 사투를 벌이는 일이 얼마만큼 고역인지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체험이었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들었던 얘기 하나도 문득 떠오른다. 한국 사람들은 성미가 급해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거꾸로' 다녀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이렇다. 해발 4,000m든 5,000m든 최종 목적지를 헬기로 먼저 이동한 다음 거기서부터 도보로 천천히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주 가끔씩 시도되는 그런 방식이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점이 진짜로 문제다. 대략 해발 2,800m 이상에서는 으레 '고산병 증세'가 찾아오기 마련인데, '고소 적응 과정'도 없이 갑자기 4,000∼5,000m 고지에 오르면 '고산병'이 아주 극심해진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 가운데 이런 식으로 트레킹에 나섰다가 하산 도중에 고산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목숨을 잃는 경우도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


다시 셰익스피어로 돌아오자.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싶은 욕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단번에 그 높은 봉우리를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어쩌면 셰익스피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와 같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오를 수만 있다면 그와 함께 절경을 내려다볼 수도 있겠지만 도리어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참패'를 맛볼 가능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셰익스피어가 거인이라고 하더라도 에베레스트에 비유한 건 과장이 좀 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이를 악물고 도전한다면 누구라도 셰익스피어를 읽어낼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등정의 결과가 달라진다'는 패디먼의 말에는 고도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고소 적응 훈련'도 생략한 채 너무 무리해서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다가는 자칫 '고산병 증세'를 견디지 못하고 너무 일찍 하산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셰익스피어에 다가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가 보여주는 멋진 절경들'을 즐겁게 보며 만끽하고 싶은 것이지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단지 오르는 데만 최종 목표를 둔 게 결코 아니다.


이쯤에서 패디먼의 말을 조금만 더 들어보자. 그의 말엔 조금 더 효율적인 등반 안내 지침도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인간이었지 반신半神이 아니었다. 그는 콜리지가 말한 것처럼 "일천 가지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매슈 아놀드가 말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무오류의 인간도 아니었다. 인류가 낳은 많은 천재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극단에 소속된 장인이었고, 바쁜 배우였으며, 영리하여 점점 번영을 구가한 사업가였다. 천재도 평범한 삶을 살 수 있고, 셰익스피어가 그 좋은 사례이다.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읽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사람이 평균적으로 70세를 산다고 보고 그 중에서 반년 정도의 시간을 투입하여 전집을 읽는다면 충분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에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사람마다 다르게 판단하겠지만,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37편 중에서 다음 12편을 필독서로 권한다. 한꺼번에 다 읽을 생각을 하지 말고 평생에 걸쳐 한 권씩 한 권씩 읽는 방법이 더 좋다. 『베니스의 상인』, 『로미오와 줄리엣』, 『헨리 4세』1부와 2부, 『햄릿』, 『트로일로스와 크레시다』, 『되에는 되로』, 『리어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오셀로』, 『태풍』.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이쯤 되면 패디먼의 이야기는 '에베레스트 정복'보다 한결 수월해 보이고, 한껏 고무적인 이야기로 변한다. 사실을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저런 이야기를 가슴에 꼭꼭 담아 두고서 '세익스피어는 최대한 천천히 만나자'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더랬다. 내가 앞에서 인용한『평생 독서 계획』속 문장들을 알라딘 페이퍼로 옮겨 놓은 게 어언 7년 전이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셰익스피어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http://blog.aladin.co.kr/oren/4369861)


셰익스피어를 억지로 외면한다고 해서 그가 영영 우리들 눈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마치 우리가 네팔이나 히말라야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소에 영화나 TV 프로그램 등을 통해 '에베레스트'를 심심찮게 구경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꾸준히 책을 읽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런 예고조차 없이 불쑥 나타나는 셰익스피어를 가끔씩이라도 만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그랬다. 사실 이 글의 맨 앞에 인용한『햄릿』의 대사 또한 내가 13년 전에 어느 책의 리뷰를 쓸 때 인용했던 문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이번에 재인용하게 된 터이니 말이다.(http://blog.aladin.co.kr/oren/521441) 우리는 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가끔씩이나마 셰익스피어와 마주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비록 그 유명한 『햄릿』을 단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한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작품 속의 대사 몇 가지는 충분히 외울 정도로 셰익스피어에게 이미 익숙하기도 하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혹은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은 그 유명한 대사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여기저기서 거듭 만나게 되는 셰익스피어를 보면서도 한사코 그를 계속 외면하는 일은 '지금 당장' 작심하고 그를 만나러 가는 것만큼이나 고역일 때도 있다. 셰익스피어를 만나러 가자니 그를 너무나 몰라볼 내가 두렵고, 그를 계속 피하자니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을 내가 너무나 몰라볼까 두렵다고나 할까. 혹시라도 누가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나『오셀로』에 나오는 그 나쁜 이아고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올 가능성은 이제까지는 물론 앞으로도 결코 없다고 누가 과연 보장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말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다면서 끝끝내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은 『리어 왕』의 막내딸 코델리어에 대해서라면? 『헨리 4세』의 1부와 2부에 계속 연이어 등장하는 폴스태프는? 헨리 4세도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폴스태프를 알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알라디너 Falstaff라면 또 몰라도... 차라리『로미오와 줄리엣』에 관한 이야기라면 뭔가 조금이라도 아는 체를 할 수도 있으련만...


내가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몰라 가장 곤혹스러웠던 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다. 그 작품 또한 '침투하기가 불가능한 소설처럼 보인다'는 말을 진작부터 들은 터였지만, 나는 사생결단 작정을 하고 그 소설을 읽어 냈다. 그리고 그 소설을 읽은 사람들이 장담한다고 약속했던 '기기묘묘한 풍경들'을 충분히 엿볼 수도 있었다. 그 소설은 인상적이지 않은 장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내겐 특히 마지막 장이 백미였다. 쉼표 하나 없이 끝없이 펼쳐진 '몰리의 독백'을 읽는 기쁨은 정말 숨이 가쁠 정도로 짜릿했다! 물론 그런 기쁨은 내가 사투 끝에 최초로 올랐던 '해발 716m의 암봉'을 완등했던 경험과도 사뭇 닮은 데가 있었다. 가슴 한가득 터질듯 밀려오는 '완등의 기쁨'은 『율리시스』의 마지막 장에 담긴 '몰리의 독백'이 끝난 이후에 곧바로 찾아올 '완독의 기쁨'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를 게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나는 또한 몇 번씩이나 '햄릿처럼' 망설임에 휩싸였던 순간들이 있었음도 고백해야겠다. 내가 겪었던 그 망설임을 '햄릿'처럼 표현해야 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비슷하리라. '이대로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을 것인가, 아니면 영국 런던으로 훌쩍 건너갈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왜냐하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속 공간인 '아일랜드 더블린'에 계속 남아서 그의 작품 속 인물들과 계속 대화를 나누기에는 '아일랜드 국립 도서관'이 너무나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다시 풀어서 말하자면, 『율리시스』 의 <제9장 국립도서관>에 등장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관한 이론'이 내겐 너무나 혼란스러웠다는 말이다. 그 대목들은 마치 사나운 파도처럼, 혹은 무서운 폭풍처럼 격랑을 일으키며 나를 금방이라도 쓰러뜨릴 것처럼 엄습해 왔다.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시바삐 '제임스 조이스'에서 벗어나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서 '셰익스피어'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율리시스』의 제9장은 특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가운데 '스퀼라와 카륍디스'에 대응하는 장이어서 '격랑'이 특별히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듯하다. ☞ http://blog.aladin.co.kr/oren/7136986)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인용된 부분을 따로 기록해 놓았다. 나중에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게 되면 '해당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어볼 셈이었다. 이 기록만 보더라도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얼마나 자주, 그리고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율리시스』에 깊게 녹아들었는지 알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비극, 희극, 사극, 로맨스, 소네트 등 온갖 분야를 마음먹은 대로 표현하고 다룰 줄 알았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었던 조이스 역시 천재성이 남달랐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을 율리시스에 자유자재로 담아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단연 걸작인 만큼 조이스도 쉴 새 없이 『햄릿』을 인용했다. 나는 지금까지 읽은 작품들인 『햄릿』, 『오셀로』, 『리어 왕』, 『맥베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등이 인용된 부분을 일일이 '다시 찾아서' 읽어봤다. 제임스 조이스가 셰익스피어를 어떤 식으로 인용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작품들도 읽는 대로 다 확인해볼 참이다. 저런 기록을 남겨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셰익스피어를 좀 더 빨리 만나도록 나에게 자극을 준 또다른 인물은 엉뚱하게도 에머슨이었다. 그는 이미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라는 말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바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온통『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만 관심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보다는 플루타르코스를 먼저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코스 때문에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났다. 나는『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두 번이나 거듭 읽고 난 뒤에 에머슨의 『위인이란 무엇인가』를 찾아 읽었다. 내가 그 책으로 건너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영웅들에 대한 '에머슨의 평가'가 어떤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그 책 속에 몽테뉴가 등장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본 듯했기 때문이었다. 몽테뉴가 가장 좋아한 작가가 플루타르코스였으니 에머슨이 들려주는 '몽테뉴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에머슨의 『위인이란 무엇인가』에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등장하는 '영웅'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내가 기대했던 몽테뉴도 없었다!


사정을 좀 더 살펴 보고 나서야 알았다. 그 책은 원제목이 《대표적 인물 Representative Men》(1849)이라는 책이었고, 거기엔 원래 나폴레옹, 괴테, 셰익스피어, 스베덴보리, 몽테뉴, 플라톤이 담겨 있는데, 우리나라로 건너 오면서 하필 '몽테뉴'만 쏙 빠트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뭐 어떠랴 싶었다. 그 책엔 뜻밖에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가득 들어 있어서 당초에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예상 밖의 소득을 얻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나 몽테뉴를 갑자기 잃어버린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다 하소연을 해야 좋을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몽테뉴의 글이 너무 살아 있어서 단어들을 자르면 피가 나올 것 같다."는 식의 에머슨의 놀라운 표현들을 잔뜩 기대했던 나로서는 몽테뉴가 통째로 잘려 나간 번역본을 보면 아직도 몽테뉴가 진짜로 피를 흘리며 잘려나간 듯해서 가슴이 아프다. 그래도 나중에 언젠가는 에머슨의 글로 쓰여진 몽테뉴가 보란 듯이 이 땅에 버젓이 나타날 날도 있으리라.


'여태껏 셰익스피어를 만나지 않고 아주 잘도 지내 왔군.' 하고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내게 안겨준 또다른 인물은 예일대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강의해온 헤럴드 블룸 교수였다. 그가 쓴 『교양인의 책읽기』는 여러 명의 소설가와 시인과 극작가를 다루고 있는데 셰익스피어는 특별히 <시인편>과 <극작가편>에 거듭 얼굴을 내민 유일한 인물이었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다룬 부분에서는 특별히『햄릿』을 매우 깊이있게 다루고 있어서, 그 작품을 미처 읽어보지 못한 나로서는 여간 당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 편도 제대로 읽지 못한 학생이 '셰익스피어의 <햄릿> 특강'을 다루는 예일대 강의실에 불쑥 끼어든 꼴이라고나 할까.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더 이상 셰익스피어와 햄릿을 외면할 수 없는 더없이 강력한 자극제였다.


더군다나 헤럴드 블룸은 그 책에서 '셰익스피어'를 '문학 일반'을 다룰 때에도 너무나 자주 언급하고 있어서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를 모르면 숱한 다른 문학작품들 속에 셰익스피어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영향을 끼치거나 몰래 숨어들어 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조차 없다는 식의 설명들도 많았다. 그러니 내가 받은 압박감이 어느 정도로까지 치솟았을지는 더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남들이 너무나 빤히 아는 인물들에 대해서 실컷 얘기하며 웃고 떠들고 있을 때를 가정한 뒤에, 그런 대화에 낀 참석자들 가운데 유독 나만이 대화에 오른 화제의 인물들에 대해 새까맣게 모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 당혹감이야말로 사람을 더이상 견디지 못하게 굴복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셰익스피어의 책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부터 펼쳐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나는 '햄릿'의 대사에 화들짝 놀랐다. 거기엔 놀랍게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가 숨어 있었고, 심지어 소포클레스의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헤카베』까지도 숨어 있었다. 『햄릿』2막 2장에 나오는 '극중극'에서 햄릿은 배우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은연중에 그 자신이 '배우'이자 '시인'이 되어 '극중극'의 대사를 배우에게 들려준다. 다음과 같이.


                 햄릿

그 극에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대목이 있는데 그건 아이네이아스가 디도에게 해 준 얘기로, 특히 그가 프리아모스의 도륙을 말하는 부근이야. 기억할 수 있거든 이 줄에서 시작해 보게 ㅡ 어디 보자, 어디 보자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히르카니아의 야수처럼' ㅡ

이게 아냐. 퓌로스로 시작하는데 ㅡ

'험상궂은 퓌로스가 불길한 목마 속에

쭈그리고 앉았을 땐 칠흑 같은 갑옷이

자신의 의도처럼 검은 밤을 닮았더니

지금은 그 무섭고 검은 모습 더욱더

불길한 색깔로 물들었소. 그는 지금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시뻘겋게

아비, 어미, 딸들과 아들들의 핏물로

끔찍이 채색되어 그들 왕의 살해에

포악과 저주를 더하면서 불타는 거리에서

바짝 말라 구워졌소.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석류석 붉은 눈빛, 지옥 같은 퓌로스가

프리아모스 노친을 찾는다오.'

이어서 자네가 계속하게


      폴로니우스

            맹세코, 왕자님, 잘 읊으셨습니다. 억양도 좋으시고 분별력도 좋습니다.


                                                                                  

                                                                                    - 『햄릿』, <2막 2잘> 중에서



셰익스피어가 『햄릿』에서 '극중극'으로 '퓌로스'를 등장시킨 건 뚜렷한 의도가 있었다. '친부 살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햄릿의 롤모델이 바로 퓌로스였기 때문이다. 사실 『햄릿』에서 '햄릿'과 똑같은 처지(자신의 부친이 살해당한 데 대해 복수를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인 아들)에 있는 인물은 햄릿 말고도 포틴브래스와 레어티스까지 셋이나 된다. 거기에 더해 셰익스피어는 '극중극'을 통해 '퓌로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퓌로스는 일명 네옵톨레모스라고도 불리는데,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이면서 호메로스의 서사시『일리아스』에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주제이다. 그의 분노가 전쟁을 멈추게도 하고 원정군을 극도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도 만들지만, 그의 분노가 가라앉을 땐 적국의 대왕인 프리아모스를 감동시킬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아킬레우스는 전쟁 중에 파리스의 화살에 아킬레스건을 맞아 죽고, 그의 아들 '퓌로스'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쟁에서 놀라운 맹활약을 펼친다. 그는 10년 동안이나 함락되지 않는 트로이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헤라클레스의 활'을 구하기 위해 필록테테스를 만나러 갈 때에도 중요한 임무를 띠고 오뒷세우스와 함께 렘노스 섬으로 파견된다. 결국 오뒷세우스는 가엾은 필록테테스와 그가 지닌 '헤라클레스의 활'을 동시에 얻게 되지만, 필록테테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꾀고 설득하는 임무를 띤 건 '착한 퓌로스'였다. 그는 필록테테스가 잠든 사이에 활을 훔쳐내지만 '활도 없이 섬에 홀로 남아 지낼' 그를 너무나 가엾게 여겨 그에게 되돌아간다. 그리고 훔친 활을 도로 돌려준다. 그토록 착한 퓌로스였지만 그가 트로이아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분노'는 트로이아의 왕 프리아모스와 왕비 헤카베에겐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참혹한 광경의 연속일 정도로 가혹했다.


나는 『햄릿』을 읽다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퓌로스가 정말 그토록 '분노와 불길에 딱딱해진 피껍질을 온몸에 덮어쓰고' 맹렬하게 날뛰었는지를 새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리스와 로마 신화'가 곳곳에 숨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미리부터 알고 있던 댱대의 관객들이나 후대의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다 까닭이 있었던 셈이다.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에 셰익스피어의 로맨스극 『겨울 이야기』를 번역했던 이윤기 선생님의 설명도 참고할 만하다.


종교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종교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신비 참여 체험' 때문이다. 이 '신비 참여 체험'은 오로지 종교에서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독서는 어떨까? 나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은 책을 탐독하는 것이 '문맥에 참여하는 재미의 체험' 때문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보면서 혹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오비디우스의 텍스트를 떠올리는 재미는 참으로 별난 경험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서 자주 신화의 편린을 찾아내고는 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겨울 이야기』재미나게 읽기> 중에서



(내가 가진 셰익스피어 책은 이게 전부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셰익스피어 읽기'를 한사코 미루어 왔는지는 이 사진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최종철 교수가 '운문'으로 번역한 '셰익스피어 전집'은 <전10권>으로 나올 예정인데 지금까지는 다섯 권이 나와 있다. 이 가운데 전집 1,4,5,7권에 담긴 작품은 총 16편이며, 나는 이 가운데 전집 4권과 5권에 담긴 비극 작품들부터 읽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클리프턴 패디먼이 말한 '37편의 드라마 중에서 필독서 12편'이 전집 1,4,5,7권에 무려 11편이나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 네 권만 읽어도 대충 패디먼의 권유는 따르는 셈이다.)


나는 이제야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여섯 편을 읽었지만 그 속에서 호메로스, 소포클레스, 오비디우스, 플루타르코스의 영향들을 심심찮게 자주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줄리어스 시저』등을 읽을 땐 플루타르코스를 통해 읽었던 '영웅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붓끝에 의해 얼마나 훌륭하게 '연극'으로 생생하게 되살아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었다.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역사적인 대사건을 두고도 천재 시인은 몇몇 제한된 배우들의 극적인 대사 만으로도 더없이 훌륭하게 되살리는 비상한 재주를 맘껏 뽐내고 있었다. 복잡한 배경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도 셰익스피어는 단지 배우들의 아주 짧은 방백만 가지고도 더없이 날렵하게 다른 장면들로 사뿐히 건너뛰고 내달렸다. 그런 재미까지 두루 맛볼 수 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어느 정도의 선행 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윤기 선생님의 다음 말은 셰익스피어를 읽기 위한 예비 독자들에겐 더없이 훌륭한 조언일 수도 있다. 비록 뒤늦게 셰익스피어를 만났지만 나는 그의 말에 격하게 동의한다.


셰익스피어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작가가 아니다. 나는 셰익스피어를, 호메로스로부터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같은 신화 작가들,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뤼피데스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 헤로도토스, 플루타르코스 같은 역사가들로부터 흘러온 길고 깊은 강이라고 생각한다. 도도하게 흐르는 서양 문학의 강이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그 강으로 풍덩 뛰어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셰익스피어 지음, 이윤기 이다희 옮김,『겨울 이야기』, <셰익스피어, '압축 파일' 풀기> 중에서


셰익스피어를 극찬한 사람들은 예로부터 아주 많았다. 그만큼 높이 솟은 문학의 봉우리를 우리는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발견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제 겨우 셰익스피어의 작품 대여섯 편을 읽은 읽은 독자 주제에 내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너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먼 발치에서라도 에베레스트를 힐끗 올려다본 사람은 그 아득한 봉우리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떠들기 마련이다. 이미 이십 년쯤 전에 히말라야를 훌쩍 다녀온 친구 녀석으로부터 내가 들었던 가장 강력한 말은 이랬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지. 히말라야에 가 본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음하하하." 수많은 작가들을 높은 산들에 비유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도 누군가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세상엔 셰익스피어를 읽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이다.


셰익스피어를 읽는 행위를 에베레스트 산을 정복하는 데 비유한 클리프턴 패디먼의 설명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고도로 훈련된 전문 산악인만이 도전할 수 있는 에베레스트처럼 그렇게 난공불락의 봉우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패디먼도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드라마를 "고전"이라고 생각하며 접근하는 것보다, 새로운 드라마의 첫 공연에 참석하는 것 같은 기대감으로 접근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읽으면서 에베레스트를 오를 때처럼 '희박한 공기' 때문에 숨을 헐떡거리거나 메스꺼움을 느낄 리도 없다. 든든한 장비를 두루 갖추고 아주 유능한 셀파와 함께 목숨을 걸고 도전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히말라야를 다녀온 사람들은 '거기에서 무엇을 발견했느냐'는 사람들의 물음에 가끔씩 전혀 예상밖의 엉뚱한 대답을 하곤 한다. 거기서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내가 보기엔 셰익스피어도 아마 그와 비슷한 작가인지 모르겠다. 끝까지 다 오르기는 몹시 힘들어도 그의 작품을 꾸준히 읽게 되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걸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그런 거대한 산 같은 작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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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1) 이왕 여기까지 내달린 김에 『위인이란 무엇인가』에 담긴 에머슨의 글도 여기에 덧붙이고 싶다. 진작에 베껴 놓은 글이고, 내가 이 글을 쓴 주목적이 독자들을 한 사람이라도 더 셰익스피어에게로 끌어들이는 데 있는 바에야, 굳이 너무 아껴둘 필요도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분량이 많은 게 좀 흠이긴 하다.


셰익스피어의 창작사정

 

사실 셰익스피어는 모든 방면에서 자기작품의 소재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것은 닥치는 대로 활용할 수가 있었다.


그가 기성의 작품을 어느 정도까지 활용하고 있었는지는 말론이라는 역국 문학의 연구자가 셰익스피어의 처녀작 《헨리 6세》에 관해서 고심을 거듭해 얻은 다음의 결과로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연구성과에 따르면 '이 작품 전체의 6043행 가운데 1771행이 고스란히 선배작가로부터의 인용이고 2373행이 과거작가의 문장을 바탕으로 해서 그가 손질을 한 문장이어서 완전히 셰익스피어 자신이 하나에서부터 모두 창작한 문장은 불과 1899행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작품을 차례로 조사해나가면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하나에서부터 써낸 극작품은 한 작품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성과에서 셰익스피어의 외면적인 창작사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69∼70쪽)



언어의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시인은 일상의 흔해빠진 거래를 소재로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개중에는 시인 못지않은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아마추어도 있다. 그들은 평소에 당치도 않은 말을 내뱉다가도 극히 드물게 정신이 번쩍 드는 대사를 토해 내거나 하는데 스스로는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와 달리 시인은 언어의 반짝임에서 그 가치를 자각해 작품 속에서 자유자재로 살릴 수가 있다. 그때 그들은 그 주옥과 같은 언어의 출처가 어딘지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와 같은 행복한 경지에 도달해 있던 시인으로서 대서사시 《오뒷세이아》를 쓴 고대 그리스의 호메로스가 있고 또 《캔터베리 이야기》로 유명한 영국의 초서나 이슬람의 명시인 사디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71쪽)



어떤 크나큰 산도 가까이에서 보았을 경우, 그 크기는 결코 모르는 것

 

우리의 천재시인은 누구의 눈에도 간파되지 않는 '가면'을 쓰고 그 본래의 위대함을 숨기고 있었다. 어떤 크나큰 산도 가까이에서 보았을 경우, 그 크기는 결코 모르는 것이다. 그의 진가가 세상 사람에게 이해되기까지에는 1세기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의 사후 2세기가 지난 무렵에 겨우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제대로 된 비평이 나타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전기가 씌어지게 된 것은 현대로 접어든 뒤부터의 일이다.(71쪽)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

 

셰익스피어 정신의 지평은 끝없이 펼쳐져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누구도 그 전모를 전망할 수 없을 정도이다. 훌륭한 언어의 명가락을 들으면 누구나 '셰익스피어 같다'고 연상할 정도로 우리의 음악적인 어감은 어느 초월적인 언어의 리듬에 의해서 모르는 사이에 갈고 닦아져 온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평소에 막연하게 직감하고 있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미지를 적절한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은 콜리지와 괴테 정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교묘한 언어로 표현할 수는 없어도 조금이라도 문학에 소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셰익스피어 언어의 대단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은밀하게 음미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만큼 많은 영향을 온 세계 사람들에게 준 것은 성서 말고는 생각할 수 없다.(72쪽)

 


아무리 겹쳐 쌓아도 그 '뮤즈(詩神)가 점지한 아이'를 비추는 빛은 전혀 비쳐오지 않는 것

 

역사의 표면에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혈통, 탄생, 출생지, 학력, 교우, 수입, 결혼, 출판, 명성, 죽음과 같은 자잘한 연대기를 죽 써서 늘어놓는데 그와 같은 신변잡기는 아무리 겹쳐 쌓아도 그 '뮤즈(詩神)가 점지한 아이'를 비추는 빛은 전혀 비쳐오지 않는 것이다.(73쪽)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마는 것

 

이미 싸늘한 시체로 변한 당신께서

다시 온몸에 단단히 무장을 하시고

이렇게 희미한 달빛 아래

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시다니

도대체 어인 일이십니까 (제1막 4장)


 

셰익스피어의 상상력이 넘치는 펜으로 옮겨지면 보잘것없는 연극소극장도 하나의 드넓은 우주로 변해 온갖 계층의 신분을 지닌 등장인물들이 '무대가 좁다'는 듯이 대활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순식간에 우리들 주위의 세계가 '희미한 달빛'처럼 현실감을 잃고 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이와 같은 놀라운 마법에 걸리면 무대 뒤에서 '시대고증은 어떤가, 무대장치는 어떤가' 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일은 전혀 사소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73∼74쪽)



온갖 뛰어난 예술작품에 발생한 일이 걸출한 희곡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다는 말

 

요컨대 이집트나 인도에서의 위대한 석조건축, 그리스 균형미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조각, 웅장하고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고딕의 대성당, 이탈리아의 회화, 스페인이나 스코틀랜드의 사랑스런 민요, 그 밖에 온갖 뛰어난 예술작품에 발생한 일이 걸출한 희곡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다는 말일 것이다.


그 작품을 낳은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자 작품의 창조에서 사용된 <하늘에 이르는 사다리>가 제거되고 말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그 위대한 작품을 보고도 그것이 <어떻게 태어냤느냐> 하는 창작의 비밀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전기를 쓸 수 잇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셰익스피어 그 사람 말고는 없다. 그리고 설사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우리가 셰익스피어의 혼과 접촉을 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심경에 도달해 있지 않으면 무엇 하나 중요한 것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74∼75쪽)



곰팡이가 낀 역사자료가 아니고 살아 있는 작품 그 자체인 것

 

고문서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셰익스피어의 창작비밀을 엿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정말로 이 인물의 역사적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것은 곰팡이가 낀 역사자료가 아니고 살아 있는 작품 그 자체인 것이다.(75쪽)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삶과 죽음, 사랑, 빈부의 차, 인생의 목적과 그에 이르는 길, 인간의 성격, 또는 운명을 좌우하는 유형무형의 영향, 또 우리 인생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져오는 것과 같은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 따위는 모든 사람의 혼을 뒤흔들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을 많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펼쳐서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시의 양식이고 우정이나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다감한 정념과 냉정한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심리의 기미를 살며시 속삭여 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여러 가지 희곡 가운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75쪽)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서 세익스피어가 명쾌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이렇게 보면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는 흔히 말하는 평가가 전혀 빗나간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근대사를 통해서 그만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달리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를테면 도덕, 매너, 경제, 철학, 종교, 취미, 처세술과 같은 우리의 관심이 깊은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해서 세익스피어가 명쾌한 지침을 제시하지 않은 것이 있을까. 판편 셰익스피어는 세상의 신비적인 일에 관해서도 의의깊은 통찰을 보여 주고 있고 모든 계층의 직업 특징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었다.(76쪽)



그는 단순한 희곡작가의 테두리를 훨씬 초월한 종합적인 거인

 

약간 세련된 실펵파 비평가 중에는 '셰익스피어를 논할 바에는 우선 무엇보다도 그 희곡을 문제로 삼는 것이 정도이고 그를 함부로 시인이나 철학자 취급을 하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 해도 그의 희곡을 높이 평가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은 않다. 그러나 '희곡만이 그의 본래의 가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견은 바꿀 생각이 없다. 그는 단순한 희곡작가의 테두리를 훨씬 초월한 종합적인 거인이고 언제나 의미가 있는 강한 메시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 두뇌에서 쏟아져 나오는 상념이나 비전을 구현하는 분출구로서 가장 편한 적합한 형식인 희곡을 채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말한 내용은 희곡이라는 틀에는 도저히 거둬들일 수 없을 정도의 보편성과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어느 성자의 전기가 운문이나 산문을 불문하고 전 세계의 모든 국어로 번역되어 노래나 그림이야기로 묘사되고 때로는 속감이 되어 민중 사이에 친숙해지고 있는 경우에 이제는 그 성자전의 내용이 얼마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고 그것이 대화체인가, 기도문인가, 또는 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는 2차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와 똑같은 일이 셰익스피어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것이다. 그는 근대 음악극의 '기조음계'(기조음계)'를 연주해 근대 생활이나 급관의 전형을 묘사하고 영국인이나 유럽인들뿐만 아니라 우리의 선조인 미국인들의 모습까지도 생생하게 묘사했다. 남녀의 기미, 그 성실함, 망설임, 그리고 악덕으로 생각한 것이 미덕이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인간세계의 불가사의한 역설까지 절묘하게 표현했다. 또 아이의 얼굴을 묘사해도 어디가 부친을 닮고 어디가 모친을 닮았는지와 같은 것까지 정확하게 묘사해 냈고 자유와 운명의 미묘한 경계선도 확실하게 그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대자연의 질서를 유지하는 억제의 감각에 통해 있었고 부침에 만만치 않은 인간 세상의 운명까지도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처럼 생생하게 차분한 필치로 묘사할 수가 었었다. 셰익스피어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은 인생의 지혜야말로 존귀한 것이고 그것이 씌어지는 형식이 희곡이냐 서사시냐는 2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국왕의 칙명을 기록한 종이가 어떤 종류인가를 탐색해도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76∼77쪽)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현자는 아무리 현명하다고 해도 이럭저럭 어림짐작 내에 들 정도인데 셰익스피어의 현명함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초과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플라톤은 인류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데 열심히 읽으면 그의 사고회로를 뒤쫓는 것은 어떻게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손을 들게 된다. 어떻게 그와 같은 작품이 완성되었을까 하는 것조차 상상을 뛰어넘고 있는 것이다. 그 걸출한 묘사력, 창조력에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자는 없다. 셰익스피어처럼 쓴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는 것이다. 그는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의 문학적인 세련이 극에 달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적 자질로도 최고봉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의 재능은 좁은 뜻에서의 작가라는 틀을 훨씬 뛰어넘고 있는 것디.


또 인생에 대한 풍부한 지식뿐만 아니라 멋진 서정적 묘사력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의 모습이나 희로애락을 마치 '같은 지붕 밑에 사는 가족'과 같은 편안한 마음으로 쉽게 묘사해 낼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은 등장인물의 대사는 박진감이 있고 또 실로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설사 현실의 인간이라도 그가 묘사한 인물 정도로 생생한 인상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77∼78쪽)



'이토록 펜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을까'라고 무심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말 정도

 

셰익스피어는 강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작가는 아니고 위대한 것은 대범하게, 사소한 것은 세밀하게 제각기 최선을 다해 적확하게 가려서 묘사할 수가 있었다. 자신의 장기를 과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보편적인 현자였던 것이다.


이를테면 어느 대자연에 있어서는 수증기를 공중에 떠돌게 하는 것과 똑같은 자연 법칙을 이용해 평지를 들어 올려 산의 비탈면을 만들어 내는 것쯤은 아무런 어려움도 없는 것이다. 자연은 그 어느 일에나 차별 없이 고르게 똑같은 힘을 작용하게 한다.


셰익스피어도 또 그 자연의 조형력에 비할 만한 보편적이고 치우치지 않은 창조의 재능이 풍부했다. 그 때문에 희극, 비극, 이야기, 연가, 그런 모든 것에도 고르게 그 두드러진 재능이 발휘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나도 뛰어나므로 우리 독자는 '자기 이외의 독자의 눈에도 이토록 펜의 기적이 재현되고 있을까'라고 무심코 자기 눈을 의심하고 말 정도이다.(78∼79쪽)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그 자체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사물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아름다운 운율에 의해서 표현할 수 있는 대단한 재능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시인 중의 시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이상학의 한 분야를 개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능력 때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그 자체가 이 지구가 낳은 주요한 산물의 하나, 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큰 징조로서 이른바 박물학이나 미래학의 연구대상이 되고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이 된 것이다.


그때에는 투명한 거울로서 온갖 것을 그 모습 그대로 비추기 시작한다. 세밀한 것을 정교하고 치밀하게 묘사하고, 위대한 것의 위대함을 남김없이 묘사하고, 희극적인 것도 비극적인 것도 모두 빠뜨리지 않고, 또 치우치는 일 없이 마음껏 묘사해 낼 수가 있었다.


아무리 미세한 것이라도, 머리털 한 올, 눈썹 한 귀얄, 한 점의 보조개에 이르기까지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그 탁월한 묘사력을 다해 그려낸 것이다. 이 '창조주'의 손으로 된 작품은 마치 자연계의 창조물이 그렇듯이 아무리 고성능의 현미경에 의한 자세한 조사에도 견뎌낼 정도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만들어져 있다.(79쪽)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

 

셰익스피어 극의 명대사는 그 모두가 마음이 황홀해질 정도의 문장이고 누구나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그 주옥같은 명문을 맛보고 싶다는 유혹에 사로잡히는데 동시에 그 문장에는 논리학자까지도 감탄하게 하는 깊은 뜻이 담겨 있고 시종 훌륭한 논리로 일관되어 있다.


작품의 피날레도 훌륭한데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조리가 또 대단한 것이다. 언뜻 보기에 상호 양립이 안 될 것으로 보이는 모순된 요소를 절묘한 창의로 결부시키는 문장의 묘기 그 자체가 자연스럽게 한 편의 시가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말하자면 문학의 명마를 타고 어디까지라도 달리는 기수와도 같은 것이다. 어디로 가건 아름다운 문예의 꽃을 피울 수 있으므로 말에서 내려 수수한 산문의 대지를 걸을 필요는 전혀 없다.(80∼81쪽)



이제 경험이란 껍질은 깨끗이 벗어 버려 그 흔적을 남기는 일조차 없다.

 

보통의 시인이 쓴 시라면 가장 세련된 것처럼 보이는 시라도 최초의 계기는 일상의 경험에 있는 것이다. 그 시상은 경험으로 짜이고 서서히 변화를 거쳐 세련되어 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해서 교양 있는 시인은 운문의 수준을 상당히 높은 곳까지 높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보는 사람이 보면 그 세련된 시문을 통해서 그것을 쓴 사람의 개인적인 생활상이 어느 정도까지는 뻔히 보이는 것이다. 누구건 그 등장인물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아아, 이 인물은 앤드류다, 그 사람은 레이첼이 틀림없다'고 모두 맞힐 수가 있다.


결국 대부분의 시인이 쓴 시는 실제로는 아직 산문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충(毛蟲)에 날개가 자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완전히 나비가 되어 우화등선(羽化登仙) 하기까지에는 이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현실은 원형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변모해 있고 완전히 새로운 영역으로 승화되어 있다. 이제 경험이란 껍질은 깨끗이 벗어 버려 그 흔적을 남기는 일조차 없다.


따라서 셰익스피어는 보편적인 문학의 정신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고 개인적인 얽매임을 일찌감치 초월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이 시인은 시인의 왕에 걸맞은 자질을 몸에 갖추고 있다. 그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천성의 쾌활함이다. 왜냐하면 시의 목적이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는 미와 환희와 쾌활함을 전 우주를 향해 소리 높이 노래했다.

 

확실히 그는 덕을 사랑했는데 덕 그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아름다움이나 우아함 때문에 그것을 사랑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의 생업이나 남녀의 여러 가지 관계를 진정으로 기쁜 일로 묘사했는데 그것은 그와 같은 인간의 삶에서 넘쳐나는 생명의 빛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와 환희와 쾌활함을 전 우주를 향해 소리 높이 노래했다.


일찍이 에피쿠로스는 '시는 그것을 위해 연인이 사랑하는 상대를 잃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 정도의 마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시인이란 정말로 쾌활한 기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눈부시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누워 있고 초서는 희희낙락 가슴을 펴고 있다. 또 사디에 이르러서는 '세상 사람은 내가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후회 따위에는 이제까지 무관한 인간이다'라고 단언했다.


그와 같은 역대의 대시인들보다도 더욱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언제나 쾌활한 태토를 유지한 사람이야말로 우리의 셰익스피어인 것이다.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무언가 쾌활하게 가슴이 설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세익스피어가 맨 앞에 나서 진군나팔을 분다면 순식간에 군중은 줄지어 과감하고 용맹하게 진군을 개시할 것이다. 그의 기쁨에 넘친 펜으로 묘사되면 어떤 것이라도 싱싱한 생명력을 띠고 순긱간에 뛰쳐나갈 것이다.(81∼82쪽)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


셰익스피어도, 호메로스도, 단테도, 초서도, 눈에 보이는 세계 깊숙이 아득한 천상의 반짝임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런 눈으로 보면 수목조차도 단순히 사과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상의 존귀한 역할을 맡게 되고, 곡물도 단순한 식료 이상의 것이 되고, 이 지구라는 천구도 아득히 숭고한 존재가 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상의 온갖 것은 말하자면 더욱 섬세하고 묘한 '수확'을 우리 혼에 베풀어 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우리 마음에 깃드는 이념을 상징하는 것이 되고, 천지자연의 다양한 영위는 모두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는 '말없는 비밀문서'와 같은 것이 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와 같은 대자연에 있는 일체의 것을 자신의 회화를 채색하기 위한 그림물감으로서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다만 그는 그와 같은 현실세계의 현란한 고급의 두루마리에 넋을 잃은 나머지 그만한 대천재라면 당연히 가능했을 중요한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결국 안 되었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상징으로서 자연미 속에 잠재한 커다란 힘의 원천이 되어 있는 덕 그 자체의 의의를 그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근원적인 통찰이 결여되면 자연계가 말하는 실제의 이야기도 도대체 어느 정도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천지만물을 자기 뜻대로 다룰 수가 있었는데 결국 그것들은 최상의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것이 되지는 못했다. 약간 짓궂게 표현한다면 그는 '인류 최고 향연의 사회자'로 머물렀다는 것이다.(82∼83쪽)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 명확한 지침을 주었을까.

 

특별히 인간에게 허용된 천성과 재주란 점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셰익스피어에게 맞서 겨룰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은 이제까지 나타난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지한 인생론, 생사에 관한 중대사나 그것에 뒤따르는 여러 가지 관련 주제가 문제가 될 경우에 셰익스피어의 문학은 도대체 얼마나 우리를 이끌어 줄까.


셰익스피어는 인생의 의미에 관해서 명확한 지침을 주었을까. 인생이란 『12야』『한여름 밤의 꿈』『겨울 이야기』와 같은 한 때의 몽환극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현실의 인생은 그처럼 덧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그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설사 셰익스피어의 인생극이 하나 늘거나 줄었다고 해서 크게 떠들썩할 필요가 있을까.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언행일치의 생활을 보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

 

다른 뛰어난 대작가들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사상과 일치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셰익스피어에 관해서는 '언행일치의 생활을 보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만일 그가 '이제껏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최고봉'까지는 가지 않고 '일단 베이컨이나 밀턴, 타소, 세르반테스와 같은 쟁쟁한 대작가들 틈에 낄' 정도의 수준이었다면 나로서도 그다지 이와 같은 사실에 구애되지 않고 '인간의 운명에는 우리에게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둠이 있다'고 말해 지나쳐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 중의 인간', 우리의 정신, 마음의 영역에 일찍이 없는 드넓은 대지의 옥토를 개척하고 '카오스'라는 이름의 미개의 땅에 용감하게 발을 내딛고 인간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인물이 자신으로서는 조금은 부족한, 현명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삶을 산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세계 최고의 시인이 그 남아도는 천성을 사람들의 즐거움을 위해 바치면서 스스로는 남모르게 세속의 향락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은 세계의 역사에서도 드문 일로서 특기되어야 할지도 모른다.(83∼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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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2) 앞에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에서 베껴 놓은 '셰익스피어 관련 글'도 덧붙인다. 이 인용도 상당히 길다. 여길 건너뛰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펼친 부분 접기'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다른 의무는 있을 수 없다. 참고로, 『교양인의 책읽기』는 이미 절판된지 오래된 책이지만 '중고'로 구할 수는 있다.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


나는 내면적 삶의 기록이 알려진 모든 작가 가운데 체호프와 베케트가 가장 친절한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내면적 삶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의 희곡을 읽으면 셰익스피어가 체호프, 베케트와 더불어 세 번째 친절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폴스타프, 햄릿, 로잘린드(셰익스피어의 『좋으실 대로』에 등장하는 인물)라는 인물들을 창조한 셰익스피어는 더욱 본연의 나 자신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게 한다. 이것이 우리가 독서를 해야 하는 이유며, 왜 최고의 작품만을 읽어야 하는가를 말해 준다.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


나는 지난 4세기 동안 상상력으로 흘러넘친 문학계에서 세르반테스야말로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경쟁자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돈 키호테는 햄릿의 대적자요 산초 판자는 폴스타프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나는 그 이상의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같은 날 세상을 떠났는지는 모르지만, 셰익스피어는 분명히 『돈 키호테』를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반테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얘기를 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단테와 밀턴, 블레이크는 작품을 통해 숭고한 정신을 그려 내려는 야심을 가진 위대한 작가들이었다. 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나 세르반테스와는 관심의 영역이 달랐다. 즉 근본적인 인간의 모습만을 재현하고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우리 삶에 성서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더라도 그의 희곡은 문학적 힘에 있어서 성서에 필적할 만한 유일한 문헌이다.


히브리어 성경이나 신약, 코란 등에서 표현된 인간의 본석와 운명에 대해 셰익스피어만큼 미묘하고 멋진 대안과 비전을 제시한 작가는 없었다. 야훼와 예수, 알라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 어떤 면에서 햄릿이나 이아고, 리어 왕, 클레오파트라의 말도 같은 권위를 지닌다. 설득에서는 오히려 셰익스피어의 풍부함이 더욱 커 보인다. 그의 수사적이고 창조적인 재능들이 야훼와 예수, 알라의 그것을 능가한다고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신성 모독이 될 수 있으리라.(367쪽)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


햄릿은 호레이쇼를 찬양하는 데 있어 철저하리만큼 진지하다. 호레이쇼는 엘지노어의 법정에서 클라우디우스(햄릿의 숙부로 형을 죽이고 왕위를 차지한 인물)가 조종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다. 햄릿은 호레이쇼에 대해 "진정 허다한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마음의 동요가 조금도 없어"라고 말했는데, 이는 호레이쇼가 관객과 대체되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관객으로서 작가가 주는 모든 고통을 받아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기 때문에 아무런 동요 없이 받아들인가. 한 인간으로서의 호레이쇼에 대해 셰익스피어가 "격정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 데에는 관객 역시 보다 금욕적이고 현명해지길 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370쪽)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나는 셰익스피어가 "인간을 발명했다"고 말한 후로 다른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왔다. 존슨 박사는 "시의 본질은 발명"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셰익스피어의 극시가 그렇듯 실용적으로 인간을 개조하고 재발견했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초연함은 『소네트』와 『햄릿』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원형적 양식이라 할 수 있다.(370쪽)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일곱 번에 걸친 햄릿의 독백이 나온다. 관객은 우리와 햄릿, 두 부류다. 따라서 우리는 엿듣고 그를 흉내낸다. 햄릿이든 누구든 우리는 말하는 사람의 인식과는 반대로, 의도와 어긋나게 그의 말을 엿듣는다. 야훼나 예수, 알라에 대해서 엿듣는 일은 불가능하진 않지만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햄릿이 되어야만 햄릿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품에 드러나는 기법이다.(371쪽)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


일반적으로 우리는 '천재성'을 뛰어난 지적 능력으로 정의한다. 때론 거기에 '창조적인 능력'이라는 은유를 덧붙이기도 한다. 햄릿은 작품에 등장하는 허구적 인물 가운데 단연 천재성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지적인 힘에 대해 많은 증거들을 제시했다. 반면 창조의 힘은 대부분 모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극중 극에 등장하는 왕의 연설이나 무덤에서 햄릿이 부르는 광적인 노래의 경우는 예외로 볼 수 있다.


희곡 『햄릿』은 주인공의 좌절된 창의성, 즉 햄릿 왕자의 시인으로서의 성취되지 못한 명성에 관한 연구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코 새로운 생각은 아니다. …… 다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사실은 햄릿은 실패한 시인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371∼372쪽)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 가운데 가장 개방적인 셰익스피어는 또한 가장 생략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작품에 지나치게 무언가 첨가했다가 그것들을 다시 삭제함으로써 교묘하게 우리를 가르친다. 『햄릿』은 대작이지만 거대한 토르소의 팔다리처럼 많은 내용이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372쪽)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


『햄릿』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4막과 5막 사이의 전환에서 하나의 정점을 건드리는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왜『햄릿』을 읽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이 작품이 우리에게는 거부할 수 없는 하나의 전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란 지극히 포괄적인 개념을 말한다.


햄릿은 지식인 중의 지식인이다. 그는 서구 의식의 고귀성과 파멸을 동시에 내포한 존재다. 또한 동서양, 남녀, 흑인과 백인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대변하는 대표성을 지녔다. 셰익스피어는 진정한 최초의 다문화적 작가였던 것이다.(372쪽)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햄릿』을 다른 문학 작품과 비교하는 일은 어렵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들이나 혹은 단테, 초서, 세르반테스, 몰리에르, 괴테, 톨스토이, 체호프, 입센, 조이스, 프루스트 등이 쓴 뛰어난 작품과의 비교도 또한 어렵다. 『햄릿』은 그 자체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햄릿은 끝부분에 이르러서 실제로 자신이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고 말한다. 햄릿이 정통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몽테뉴가 아마 유일하게 유용한 비유가 될 것이다. 몽테뉴와 비교할 때 햄릿은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야만적이다.


위대한 수필 「경험에 대하여」를 쓴 몽테뉴가 5막에 나오는 햄릿보다 더 현명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햄릿보다 자신의 지혜에 더욱 관대하다. 5막에서 햄릿이 제 아무리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다 해도 결국 '은총'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성서에서 은총이라는 말을 쓰는데, 내가 말하는 의미는 "무한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더 많은 삶"이다.(373∼374쪽)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햄릿 안에 있는 무언가는 그가 바다에 있을 동안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덴마크로 돌아오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5막 전체에 나타난 그의 시각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사후적이다. 이는 햄릿이 후손에게 전해질 자기 '오명'을 견디지 못하리라는 강박관념을 보여 준다. 『햄릿』의 독자나 관객은 햄릿이 자신의 추종자 호레이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을 말리고 그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서 오명을 회복하도록 하는 모습에서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우리가 햄릿의 모호한 광증의 일시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햄릿에게는 엄청난 긴장이 가해진다. 햄릿이 오필리아에게 가학적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에 결국 그녀는 미치고 자살에까지 이르게 된다. 햄릿은 자기가 누구를 죽이는가도 모르는 채 커튼 사이로 검을 찔러 넣어 폴로니어스를 살해했다. 이후에 그는 환희만을 표명한다. 로젠크란츠와 길텐스턴은 기회주의자들이기는 하지만 햄릿이 이유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햄릿은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해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374쪽)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


'경이로움에 의해 상처입은 청자들'은 세익스피어의 관객들을 가리키는 항구적인 구절이 되었다. 우리는 "자, 나다. 덴마크의 왕자 햄릿이다." 라는 햄릿의 자긍심에 가득 찬 적대감에 전율한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자제된 위험은 전적으로 아이러니칼하진 않지만 우리들에게 다음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만든다. 즉 햄릿은 호레이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밝히면서 냉정하게 말한다.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은 영국으로 향하고 있네."


햄릿은 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 모습을 본 호레이쇼는 충격을 받고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길덴스턴과 로젠크란츠가 그곳으로 가고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햄릿이 그들이 죽음에 대해 "그건 그들이 좋아서 한 짓이니까" 라고 말하며 냉담한 태도를 보일 때, 그들이 햄릿의 예일 대학 동창생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햄릿이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377∼378쪽)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아고처럼 햄릿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삶에 대해 글을 쓴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리는 이아고에게서는 이런 능력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왜 힘릿에게는 매료되는가? 모든 허구적 인물 중에서 가장 지적으로 복잡한 이 인물의 여러 가지 신비 중 하나는 그가 우리에 대해 카리스마적 지배력을 행사한다는 점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념가나 청교도적 도덕주의자가 아니라면 지난 200여 년 이상 동안 보편적 병폐였던 햄릿과 사랑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햄릿은 마지막까지 당신을 사랑하거나 필요로 하지 않는다.(378쪽)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


햄릿이 자신의 '오명'을 남기는 고통을 묘사했을 때 무대 위는 그의 어머니, 클라우디우스, 레어티즈 등의 시체들이 널려 있고, 햄릿 역시 죽어 가고 있었다. 그는 폴로니어스를 살해했고, 오필리아를 미치게 해 자살로 몰아갔으며, 불쌍한 로젠크란츠와 길덴스턴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의 이름에 흠집이 날 만했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죽음을 포함한 여덟 명의 죽음에 대해서 별로 슬퍼하지 않는다. '덴마크의 햄릿'은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경이로움에 빠지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성취는 과연 무엇일까? 그의 놀라운 재능에 비례해 어떤 허구적 인물도 햄릿만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는 데 능숙한 인물은 없었다.(378∼379쪽)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


셰익스피어는 『햄릿』이후에는 복수극을 쓰지 않았는데, 이는 그 장르를 작가가 좋아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햄릿』은 복수극이 아니라 극장성Theartricalty에 대한 극이다. 햄릿 이전의 그 어떤 서구의 희곡에서도 그토록 '극장성'에 사로잡힌 작품은 없었다. 한마디로 글로브 극장 관객들은 한 번에 네 편의 연극을 보았던 셈이다.


1막에서 2막 1장은 일종의 복수극이다. 그리고 극 중 극의 배우들이 도착하는 2막 2장에서부터 클라우디우스가 '거짓 불에 놀라서' 「쥐덫The Mouse Trap」에서 도망치는 3막 2장까지는 극장성에 관한 막간극으로 이어진다. 4막까지 계속되는 세 번째 극은 모든 이들에게 각자 의미 있는 만화경 같은 것으로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마지막 5막은 불과 몇 주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도 햄릿이 10년이나 나이 들어 보이고, 부왕의 유령은 기억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으며, 부왕도 단지 오랜 기억만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햄릿』은 복수의 비극으로 시작해 어느 순간 연극과 배우들에 대한 거친 사색으로 이어지고,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정신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초월적 비극 안으로 빠져든다. 이 순간 새로 탄생한 인간은 죽음이란 스스로를 조롱하고 또한 조롱당하는 것이라는 절대적 자기 인식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연극 『햄릿』이 가장 강력하면서도 또한 당혹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우리들 가운데 누구도 그러한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379∼380쪽)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햄릿』을 파괴시키지는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연극 전체'라는 표현은 옳지 않은 듯하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햄릿』은 여전히 가장 실험적인 극으로 남아 있다. 베케트, 루이기 피란델로, 그리고 모든 부조리 작가들의 시대에서조차도 말이다. 『오델로』,『리어 왕』,『맥베스』가 모두 비극이었던 것처럼 『햄릿』또한 반드시 비극이라고 보아야 하는가는 생각해 볼 문제다. 비극적 결함 혹은 비극적 덕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덴마크의 햄릿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뿐만 아니라 그 이상까지도 지닌 듯하다.


에머슨은 자유를 '야성의 것Wilderness'이라고 정의했는데, 그렇다면 『햄릿』이야말로 모든 연극 가운데서도 가장 야성적이며 자유로운 연극이다. 심지어『12야』의 부제인 '뜻대로 하세요'를 붙여서 '햄릿, 혹은 뜻대로 하세요'라고 불러도 좋을 법하다.


『햄릿』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사실 이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질문이다. 주인공 햄릿을 포함해 여덟 명이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시각에 따라서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긴 하다. 유령의 입장에서 보면 끝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살아 있는 자에 대한 복수의 갈망은 여전히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381쪽)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독자로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햄릿』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느껴져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듯하다.(382쪽)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


『햄릿』이라는 극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주인공 자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도 변화무쌍하다. 모호한 전사-연인-아버지 없는 존재, 햄릿 왕을 제외하고 무대 위에서 다른 관심의 중심은 없다.(383쪽)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


셰익스피어는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아이러니를 구사한 작가로, 미묘하고 변덕스러우며 극도로 지성적인 햄릿만이 존재하는 극을 남겼다. 만일 우리가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 희곡을 읽는다면 틀림없이 스스로 햄릿이 되고, 그래서 간혹 당혹감도 느끼게 될 것이다. 『햄릿』에서 중요한 건 햄릿이 처한 곤경이 아니라 그의 재능이다. 그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확대시켜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햄릿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햄릿은 우리를 그의 의식의 심연 속으로 이끌 것이다. 그곳에는 이아고나 『리어 왕』의 에드문드 혹은 『겨울 이야기』의 레온테스를 초월하는 허무주의가 존재한다.


정의를 내리자면, 셰익스피어는 햄릿보다 포괄적이며 다양하다. 하지만 단일한 인물로서 셰익스피어 안에 있는 허무주의적 시심을 의인화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햄릿이다. 이아고는 다른 등장 인물이나 그들의 삶으로 '글을 쓰지만', 햄릿은 배우들을 위해 새로운 글을 쓰고 불가사의한 짧은 노래들을 즉흥적으로 지어 내기 때문이다. 햄릿은 '주제'와 '자세'라는 이중적 면에서 허무주의 시인이다. 독백의 언어에서, 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극들에서, 언어와 자아를 포함해 햄릿은 그 어느 것도 믿지 않는다.383∼384쪽)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모든 비극이 끝난 뒤 셰익스피어는 햄릿을 멋지게, 그러나 슬프게 시인이 아닌 배우로 만들었다. 독자들도 햄릿의 시에 매료되면서 그의 연기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햄릿』을 읽을 때 우리는 햄릿 내부에 있는 배우와 시인의 기질 모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85쪽)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


200여 년 이상이나 "사느냐 죽느냐"로 시작되는 그의 독백은 끊임없이 인용되어 왔고, 때문에 오히려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다. 나는 낭만주의 시대의 비평가 찰스 램을 대단히 존경하는데,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읽는 일은 제대로 만들지 못한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낫다고 주창한 선구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나는 햄릿의 멋진 독백과 다시금 마주친다면, 절망적인 찰스 램의 다음과 같은 말에 독자들이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유명한 구절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그 구절은 사내아이나 남자들에 의해 연설 투로 너무 거칠게 함부로 다루어지고, 그 살아 있는 장소와 극의 계속성이란 원리에서 그렇듯 비인간적으로 괴리되어 있어서 내게는 완전히 죽은 대사가 되고 말았다.


일곱 개 중 세 번째인 '사느냐 죽느냐' 독백은 지식과 행위 사이의 부정적 관계에 대해 다루었다. 이 부분은 햄릿이 극에서 왕 역할을 하는 배우를 위해 쓴 대사의 절정을 이루며, 또한 다음 위대한 시의 원천이 되기도 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야기의 매듭을 지으려 하오.

인간의 의지와 운명은 서로 어긋나는 것이므로

계획은 언제나 무너지게 마련이지.

생각은 우리 자신이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오.    ㅡ 3막 2장 (386쪽)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


셰익스피어가 소네트에서 흔히 그러했듯이 햄릿은 의지에 대해서 숙고한다. 우리는 행동할 의지가 있는가? 마지못해 움직이는 것인가? 의지의 한계는 무엇인가? 햄릿의 광대한 의식은 사고의 끝이 무언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종말을 의도한 모든 관련된 불확실성에 대해 어떻게 충분히 인식하는가?


니체가 인식하듯이 햄릿에 대한 불쾌함은 그가 너무 많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너무 잘 생각한다는 점이다. 햄릿은 예술을 향하지 않으면 진실에 의해 죽을 것이다. 햄릿은 귀족 중에서도 왕족이므로 지성적인 행위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혀 있다.


양심이 우리를 겁쟁이로 만드는구나.

결단의 선명한 색채가

망설임으로 창백해지고 침울해짐으로 녹슬고 만다.

지극히 중요한 거대한 과업도

이 때문에 그 흐름이 틀어지고

실천의 힘을 잃고 마는구나.                                         ㅡ 3막 1장 (387∼388쪽)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햄릿은 극의 결말 부분에서 살육이 있기 전에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길 승산이 있어. 그러나 자네는 내 마음에 얼마나 악이 들끓고 있는지 모를 거야." 이는 자신의 훼손된 이름을 남기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암시한다. 그래서 햄릿은 마지막에 우리의 의견을 묻는다.


지금 와 버리면 장차 오지 않고, 장차 오지 않으려면 지금 올 것일세.

만일 지금 와 있지 않다면, 결국엔 올 것이라니까. 모든 것은 각오일세.       (389쪽)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


햄릿의 영혼은 의지에 차 있으며 육신도 약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음악에 맞춰 특이하게 죽음을 맞는다. "그냥 내버려 둬." 세속적인 문학에서도 이것만큼 독자를 사로잡지는 못할 것이다. 왜? 햄릿이 마지막으로 "이젠 침묵이야"라고 한 말은 정신적으로 매우 모호하지만 나는 그 말은 부활이 아닌 몰락을 예견했다고 생각한다. 그 안에는 "왜『햄릿』을 읽는가?"에 대한 최상의 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햄릿은 우리를 위한 대리적 속죄양으로 죽는 게 아니라 훼손된 이름을 남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닌 채 죽는다. 몰락과 부활, 어느 쪽을 기대하든 간에 우리는 각자의 이름이나 명예에 대해 걱정하는 것으로 독서를 끝낼 가능성이 높다. 모든 허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카리스마 넘치고 지적인 햄릿은 누구나 겪게 될 종국에 대한 용기와 희망을 보여 주었다.(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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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05-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 사랑, 빈부의 차, 인생의 목적과 그에 이르는 길, 인간의 성격, 또는 운명을 좌우하는 유형무형의 영향, 또 우리 인생에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가져오는 것과 같은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 따위는 모든 사람의 혼을 뒤흔들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의 근본문제이다. 그런 것에 관해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을 많이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시집》을 펼쳐서 직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비밀스런 시의 양식이고 우정이나 사랑에 관한 비결이나 다감한 정념과 냉정한 이성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심리의 기미를 살며시 속삭여 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또 여러 가지 희곡 가운데에는 셰익스피어 자신이 간직한 마음의 흔적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다.(75쪽)

→ 저는 oren 님의 윗글을 읽으면서, 특히 위와 같은 인용문들을 만나게 되면, 우리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은 결코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은 단순히 정신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인간의 사유와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궁극적으로 비물질적인 것일지도 모를 어떤 심적(mental) 요소가 우주의 근본적 구성 요소로서 반드시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즉 단순히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은 뇌신경세포들의 작용, 물리화학적인 신경전달물질의 분비, 뇌내 전자기 장의 움직임 등등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고 본다는 것이죠. 또한 요즘 인공지능이 최대의 화두입니다만, 인공지능으로도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을 완전히 설명하거나 구현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전하고 거의 모든 인간의 일과 직업을 대체해간다고 해도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만은 대체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고 봅니다. 위에 인용한 것과 같이 위대한 셰익스피어(쉐익스피어) 문학에서 우리 인간이 느끼는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을 미래의 인공지능/로봇이 느끼고 향유할 수 있을까요? 즉 저런 신비로운 영의 작용 같은 것을 디지털 신호(부호, 기호, code 따위)인 0과 1의 무수한 나열로 환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신경세포와 그들의 방대한 연결망인 스냅스들의 작용으로 인간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의 정체가 밝혀질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이런 물리주의 혹은 자연주의, 인공지능의 배경인 기계 기능주의적 주장에 직간접 동의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요즘 인간 고유의 의식에 대한 실체적 주장을 하면 강력한 반대에 부닥치곤 하죠. 그러나 저는 oren 님의 유장한 윗글을 읽으면서 거듭거듭 확신하게 됩니다. 결코 인공지능만으로는 인간 의식을 설명할 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요. 요컨대 문학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어떠한 문학적 감동도 완전히 사라진다고 봅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야말로 확실한 증언》이 되리라는 것이 oren 님의 장려한 윗글을 읽은 제 소감의 하나입니다. ^^

oren 2017-05-14 15:04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몹시도 심오한 댓글을 달아주셔서 답글을 달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인용한 에머슨의 글을 콕 찝어 재인용 하신 후에 qualia 님의 견해를 밝혀놓으신 게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에머슨은 셰익스피어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했던 사람이었죠. 그 자신이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던 토머스 칼라일, 셰익스피어에 정통했던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과도 아주 깊은 교제를 쌓은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에머슨이야말로 초령(超靈,Over-Soul)을 주창했던 초월주의자였으니, 어쩌면 Qualia 님의 견해와도 일맥상통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Qualia 님 덕분에 제가 다시 찾아 읽어본 에머슨의 에세이 가운데 <초령(超靈)>의 일부분을 덧붙여 봅니다.

* * *

세상의 많은 지혜는 지혜가 아니다. 가장 많은 광명을 받은 부류의 사람들은 물론 문학적 명성을 초월하여 있다. 그들은 작가가 아니다. 많은 학자와 작가들에게서 우리는 신성한 존재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영감보다는 요령과 잔재주만을 감지한다. 그들은 광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르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칭한다. 그들의 재주란 어떤 한 능력의 과장이어서, 마치 불균형하게 발달한 손발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재주의 힘이란 일종의 병이다. 이런 경우에 지적 재능은 미적의 감명을 주는 일이 없고, 거의 악덕의 느낌을 준다. 재주가 진리에 이르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는 종교적이다. 그것은 인간의 공통적인 심성을 보통 이상으로 많이 흡수한다. 그것은 결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과 유사한 점이 많고, 다른 점이 적다. 모든 위대한 시인들에게는 그들이 발휘하는 어떤 재주보다도 우월한 인간성의 지혜가 있다. 작가, 재사, 당인, 세련된 신사가 인간 그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성은 호머, 초서, 스펜서, 셰익스피어, 밀턴에게서 빛난다. 그들은 진리에 만족한다. 그들은 인간성을 적절히 이용한다. 저급한 대중적인 작가의 광적인 열정과 격렬한 색채에 맛들인 사람들에게 그들은 경직되고 냉랭하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활기를 불어넣은 심령에게 자유로운 길을 허용함으로써 시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심령은 그들의 눈을 통하여 보고 그 자신이 창조한 사물을 축복한다. 심령은 그 지식보다 우월한 것이고 그것이 만든 어떤 결과물보다도 현명하다. 위대한 시인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풍성함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별로 의식하지 않게 만든다. 우리의 정신에 시인이 전하는 최상의 가르침은 그가 이룩해놓은 모든 것을 무시하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우리를 최고조의 지적 활동으로 이끌어 그 자신의 것을 아주 초라한 것으로 만드는 부를 암시한다. 우리는 그가 창조한 찬연한 작품들, 우리가 지금까지 일종의 독보적인 시가로 찬양해온 작품들이 이제 우리의 참된 본성을 강하게 사로잡지 못하고, 단지 바위 위에 어른거리는 지나가는 여행객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햄릿이나 리어 왕 속에서 표출되는 영감은 사물들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것으로 영원히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진대, 왜 나는 햄릿과 리어 왕만을 중히 여기고 말이 혀끝에서 떨어져나오듯이 그들이 떨어져나온 그 원천인 심령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인가?

이 에너지가 개개의 생명 속으로 내리는 것은 반드시 그 전체를 소유하는 조건에서이다. 그것은 비천하고 단순한 자에게 온다.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과 거만한 것을 벗어던지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온다. 그것은 통찰력이 되어 오고 정온함과 장엄함으로도 온다. 그것이 깃들여 있는 온사람을 보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위대함을 알게 된다. 그러한 영감을 받고서 사람은 바뀐 목소리로 돌아온다. 그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가 그들을 시험한다. 그것은 우리가 소박하고 진실할 것을 요구한다. 허영심에 들뜬 여행자는 왕, 왕후, 귀족 부인이 자신에게 한 말과 자신에게 해준 일을 떠벌림으로써 그들의 인생을 장식하려고 한다. 야심찬 속물은 그들의 수저와 브로치와 반지를 자랑하고, 그들이 보낸 명함과 찬사를 잘 간직해둔다. 좀더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그들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면서 듣기 좋은 시적 정황을 골라낸다 ㅡ 로마의 방문담, 그들이 만난 천재, 그들이 알게 된 총명한 친구, 더 나아가서 그들이 즐겼던 화려한 풍경, 산악의 빛, 산에서 얻은 생각 등을 언급한다 ㅡ 그렇게 그들의 생활을 낭만적 색채로 덧칠하려고 한다. 그러나 위대한 신을 경배하고자 높이 오르는 정령은 평명하고 진실하고, 장밋빛으로 치장하지 않고, 멋진 친구도, 기사도 정신도, 모험적 사건도 없으며, 남의 찬탄을 원하지 않고, 평범한 날을 진지하게 체험하며 현재의 시간에 안주한다 ㅡ 이 현재의 순간과 아주 사소한 일들이 사상에 스며들고 광명의 바다를 흡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장엄할 정도로 마음이 소박한 정신과 대화를 나누어보라. 문학은 말놀음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가장 간소한 말이 글로 씌어질 가장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값싼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모든 대지와 모든 대기가 우리의 것일 때, 이런 심령의 무한한 풍요 속에서, 땅에서 단지 몇 개의 조약돌을 줍고 소량의 공기를 병에 담는 것이나 다름없다. 허황된 장식을 벗어던지고, 적나라한 진실, 솔직한 고백과 전지적인 긍정 속에서 사람과 사람을 대하지 않고서는 거기에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고 그대들은 그 풍요의 원환(圓環)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

- 에머슨, 신문수 옮김, 『자연』, <초령(超靈)> 중에서

qualia 2017-05-14 21:53   좋아요 0 | URL
oren 님의 답글과 인용글에 위안을 느낍니다. 물론 oren 님의 마음 · 의식 · 정신 · 영혼에 대한 견해는 아직 잘 모릅니다. oren 님 영혼관은 제 영혼관과 많이 다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인용해주신 에머슨의 글에서 든든한 격려의 말씀을 듣는 듯합니다. 지금 인공지능에 관한 책과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유발 노아 하라리를 비롯한 세계적인 학자, 저술가들이 앞다투어 인공지능 대세론으로 독자들의 정신 세계를 점령해가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과연 에머슨과 소로우가 지금 21세기에 환생한다면 이런 인공지능의 질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러나 저는 반대로 21세기 뇌신경과학과 인지과학적 시각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과) 에머슨과 소로우의 생각과 글들을 재조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오히려 과학이나 인공지능으로써 그들의 일종의 영적 세계관, 혹은 초령(Over-Soul) 등등을 물리적인 것이나 디지털적 단위, 혹은 뇌의 착각이나 환영으로 환원하지 않고 독자적인 인간의 고유 속성이나 실체적 요소로 규명해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소리는 인공지능 대세론자 혹은 명확한 증거와 증명을 원하는 과학(주의)자들 시각에서 보면 헛소리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누가 뭐래도 oren 님의 셰익스피어 관련 윗글과 인용해주신 에머슨의 글, 해럴드 블룸의 글들은 명백히 《과학의 힘을 초월한 신비적인 영의 작용》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언》의 사례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이런 사유는 시작점에 섰다고 할 수 있죠. 앞으로 갈 길이 멀고도 먼데요. 든든한 연료 혹은 에너지를 충전받은 듯한 느낌입니다. oren 님께서 정성스럽게 인용해주신 영감 넘치는 에머슨의 윗글로 말이죠~^^

qualia 2017-05-14 22:10   좋아요 0 | URL
제 첫 댓글 가운데 끝 부분에 《결코 인공지능만으로는 인간 의식을 설명할 수도 구현할 수 없을 것이라고요.》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구현할 수” 부분에 보조사 “-도”를 빠뜨려 문장이 약간 이상하게 읽힙니다. “구현할 수도”로 고칩니다.

oren 2017-05-15 00:03   좋아요 0 | URL
‘인간의 마음‘을 역설계할 수 있다는 건 아직까지는 ‘인간의 망상‘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그런 쪽으로 맹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비물질적인 영역‘ 또는 ‘과학으로는 결코 해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역‘이 있다고 저도 생각하거든요. 그런 판단은 고대 철학자들의 생각 속에서도 가끔씩 발견할 수 있고, 심지어 ‘생명의 진화와 종의 기원‘까지 밝혀냈던 찰스 다윈이나 『창조적 진화』등을 쓴 베르그송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듯합니다. 특히 철학자 가운데 (제 생각으로는) ‘우주의 비밀‘을 가장 많이 엿본 듯한 쇼펜하우어에 의해서도 ‘과학의 한계‘가 상당히 예리하게 지적되었던 듯하고요.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자주 시(詩)로 노래했던 ‘사랑‘ 하나만 하더라도 ‘과학‘이 언젠가 ‘역설계‘할 수 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쇼펜하우어도 지적했듯이, 천재적인 시인들이 쓴 놀라운 시(詩)들이 ‘무사(뮤즈) 여신‘의 아무런 개입 없이 인간의 노력으로만 쓰였다고도 믿기 힘들고요.

페크pek0501 2017-05-18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래전 오래된 책 전집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그 뒤에 책 하나 갖고 싶어서 4대 비극이 함께 묶여져 있는 책을 구입해 놨어요. 4대 비극 말고도 몇 작품 더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멋진 구절이 많았던 것도 기억합니다.

님의 노트를 보니 대단히 열공하시는 분이군요,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낍니다.
저도 그런 노트 몇 권이 있는데(그땐 필기하면서 책을 읽는 게 취미였기에.) 님처럼 글씨를 잘 쓰지 못해서 공개를 못합니다.
공개를 염두에 뒀다면 글씨를 잘 썼을 텐데, 하는 생각이... 스칩니다.ㅋ

oren 2017-05-19 00:52   좋아요 0 | URL
페크 님께서는 벌써 오래 전에 ‘오래된 책‘으로 셰익스피어를 읽으셨군요. 저는 이제서야 ‘새 책‘으로 셰익스피어를 읽고 있는데 말이지요. 아무튼 셰익스피어는 너무 놀라운 시인이자 극작가에요. 진작에 만나봤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었지요..

페크 님께서도 독서 노트를 열심히 써오셨다면 그걸 살짝 공개해 주실 순 없을까요? 남의 글씨를 엿본다는 게 실례인 줄은 알지만, 몹시 궁금한 것도 사실이거든요.^^
 
고전을 읽어라. 그전에 패디먼을 먼저 만나보라.

 

이 책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이다. 한번 당신의 내부에 자리 잡으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꾸준히 작용한다.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 이 리스트는 "단번에 슥 훑어보는" 그런 리스트가 아니다. 엄청나게 풍요로운 의미가 담겨 있기에 평생에 걸쳐서 캐내야 하는 광산 같은 것이다.

 - 클리프턴 패디먼, 『평생독서계획』, <저자 서문> 중에서


 * * *


책을 읽는 행위에도 '6하 원칙' 같은 게 필요할까? 언뜻 생각해 보면 여섯 가지 질문들 가운데 세 가지 물음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책을 읽었는지는 독서의 본질을 따지는 사람들에게는 사실 별로 궁금한 문제도 아니다. 우리에게 늘 필요한 물음은 무슨 책을, 어떻게, 왜 읽느냐에 집중된다. 그게 책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라딘에서는 이상하게도 누가, 언제, 어디서 책을 읽었는지를 무척 궁금해 한다. 2년 전 이맘때 책의 날을 맞아 기획됐던 '10문 10답'만 해도 그렇다. '누가, 언제, 어디서'를 매우 강조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책에 대한 문답인데도 침대, 화장실, 무인도 등등이 질문과 대답에서 쏟아졌었다. 왜일까? 쉽게 말하자면 그(알리딘)는 책을 팔아야 하는 장사꾼이기 때문이다.


나도 오늘은 알라디너라는 신분에 걸맞게 '책 장사'에 보탬이 되는 글을 좀 써볼까 싶다. 물론 이 말은 반쯤은 농담이다. 내 글이 '알라딘의 분위기'에 맞추는 글이 될 수밖에 없어서 미리 변명조로 늘어놓는 말이지, 정말로 책 장사에 도움을 주기 위한 글을 쓰겠다는 의도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책에 관한 본질적인 질문 세 가지(무슨 책을, 어떻게, 왜) 보다는 '누가' '언제'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게 이 글의 못난 점이자 한계임을 미리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는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내가 지금까지『평생 독서 계획』에 담긴 저자의 책을 읽은 건 얼마나 될까? 이런 질문이 이런 잡다한 글을 쓰게 만들었다. 눈치빠른 독자라면 벌써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질문이야말로 책에 대한 곁다리 질문들인 누가, 언제, 어디서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본질적인 질문 세 가지(무엇을, 어떻게, 왜)는 벌써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러니 '책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에만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 책 속으로 되돌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싶다.


앞선 내 질문에 대해 자문자답식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지금까지 『평생독서계획』에 담긴 133명의 저자 가운데 대략 3할 정도인 42명의 저자를 만나왔다.' 3할이면 좋은가? 나쁜가? 아무도 쉽게 대답할 수는 없다. 이 질문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1할이면 낮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5할이 넘으면 준수하다는 평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왜' 읽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룬 책들을 더러 읽다가 두세 번쯤 놀랐다. 처음엔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을 때였다. 정말 뜻밖에도 그 책 속에는 『평생 독서 계획』에 대한 '저자의 놀라운 경험담'이 담겨 있었다.


내가 열두세 살의 소년이었을 때 우연히 ㅡ 엄밀하게 말하면 절도에 가까운 행위에 의해 ㅡ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 독서 계획』이라는 문고판을 손에 넣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고전'에 대하여 별 흥미가 없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내가 좋아하는 것은 스토리, 신비와 모험의 이야기, 예전에 로맨스라고 불렀던 그런 이야깃거리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 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어 치웠는데, 이 패디먼이라는 사람의 위대한 책들이 그린랜턴 만화나 타잔 문고판처럼 재미있다고 설명해 놓은 것을 발견했다. 전혀 현학적인 냄새를 풍기지 않으면서도 패디먼은 『오디세이아』, 『신곡』, 『오만과 편견』등 100편의 고전에 대하여 독자 대 독자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이런저런 경로를 거치면서 패디먼의 '독서 계획'에 들어 있는 책을 거의 다 섭렵했다. …… 그 후 20여 년의 시간이 흘렀고 1997년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의 수정 4판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존 S. 메이저가 중동과 아시아의 고전 33편을 추가하여 133편으로 만들어 놓았다.


 - 마이클 더다, 『고전 읽기의 즐거움』중에서


아하, 그랬구나. 문학 평론 부문에서 퓰리처상까지 받은 마이클 더다도 『평생 독서 계획』에서 크나큰 도움을 받았구나 싶었다. 마이클 더다의 『고전 읽기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두 번째로 놀란 건 거기에 소개된 88명의 작가 가운데 내가 만났던 작가는 고작 8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그들은 다음과 같다. 키케로, 플루타르코스, 야콥 부르크하르트, 대니얼 디포, 쥘 베른, 안톤 체호프, 오비디우스, 에드워드 기번) 더욱 놀라운 건 나머지 80명의 작가들과 작품들 가운데 내게는 이름마저 생소한 경우도 부지기수였다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로 놀란 건 헤럴드 블룸의『교양인의 책읽기』(원제는 『How to Read and Why?』, 절판된 후『헤럴드 블룸의 독서 기술』로 재출간)를 읽을 때였다. 그 책엔 44명의 작가(단편소설_9명, 시인_17명, 장편소설_15명, 희곡_3명)와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내가 제대로 만나본 작품과 작가는 고작 5명에 불과했다! 나름대로 고전을 좋아하고 또 열심히 읽어 왔다고 여겼는데 두 '문학평론가'의 책을 읽고 난 후엔 그런 생각이 싹 가셨다. 고전은 무슨 개뿔~ 이런 생각부터 엄습했다!


그런 충격에서 벗어날 길이 무엇일까를 곰곰 생각해 보다가 문득 떠올린 책이 『평생 독서 계획』이었다. 그 책 속의 목록을 뒤져보면 그래도 '타율'이 훨씬 더 올라갈 여지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나는 '3할'이라는 숫자를 간신히 얻고 나서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


이쯤 되니 '내 마음 속 감정의 기복들'이 문득 『평생 독서 계획』에서 발견했던 키케로와 셰익스피어의 말과 묘하게 겹친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Piget me stultitia mea(나의 우둔함은 나를 짜증나게 해)."


그리고 한참 있다가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고 하다.


"Ego mihi placui(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대견스러워)."


키케로의 이 말에는 세익스피어의 비극『오셀로』4막 1장에 나오는 다음 대사가 곧바로 뒤따라야 정말 제맛이다.


"Alas, poor caitiff!(이 한심한 화상아!)"



『평생 독서 계획』이라는 책까지 잔뜩 거슬러 올라 가니, 문득 그 책보다 훨씬 더 오랜 연원을 가진 '옛날 책' 한 권도 새삼 떠오른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할 때 만난 아주 자그마한 책인데, 내겐 이 책 속에 담긴 '독서 지침'이 알게 모르게 그동안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왔다. 이 조그마한 책 속에 '책을 읽는 즐거움'이나 '양서와 악서' 혹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나' 등등에 대한 여러 훌륭한 지침이 알차게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읽어야 할 책들의 목록'도 아주 요긴하게 제시되어 있어서 그걸 무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학 신입생때 만난 책. 159쪽에 정가 1,800원짜리 얇은 책이지만 내용은 아주 단단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율리씨즈'로 소개되어 있다. 여주인공 마리언 블룸에게 몰래 편지를 보낸 애인 '보이란'은 요즘엔 '보일런'으로 번역된다. 요즘엔 보기 드문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책도 소개되어 있다.)



(80년대 초반에 나온 책이니만큼 책 제목들은 한자 사용이 기본이었다. '몽테뉴'는 '몽테에뉴'로, '니체'는 '니이체'로 표기되어 있는 것도 흥미롭다.)



(이 책을 만났을 때 내가 읽은 고전이라고는 몽테뉴 『수상록』과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뿐이었나 보다. 밑줄이 두 권에만 그어져 있는 게 그걸 증명하는 듯하다. 36년 전에 그은 밑줄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이쯤에서 나는 이제까지 내가 읽은 『평생 독서 계획』속의 책들을 한꺼번에 모아 놓고 '단체 기념사진'이라도 찍을 수는 없을까를 생각해 봤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읽은 책들은 대부분 내 방 안에 얌전히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누가 몰래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을 엿보았더라면 그게 좀 우스울 뿐이었다. 어쨌든 이런 작업이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이런 사진이라도 남겨 놓아야 혹시라도 먼 훗날에 내가 문득 과거로 눈길을 돌렸을 때  '오늘 남긴 기록'을 보고 새삼 놀라운 감회에 젖을 기회라고 가질 수 있을 게 아닌가.



사진 1_호메로스,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이들의 작품은 '고전 중의 고전'이므로 '다른 고전'으로 넘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할 우주정거장과 같은 구실을 하는 책들이다. 숱한 문학작품의 '발원지'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이 책들'에 닿는 경우가 많다.



사진 2_헤시오도스, 오비디우스, 아폴로도로스, 이윤기

서양 문학과 예술의 또다른 '발원지'는 바로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이다. 『평생 독서 계획』에는 빠진 책들이지만, '서양 고전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결국 '신화'를 찾아 읽을 수밖에 없다.



사진 3_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서양 고대 역사뿐 아니라 서양 세계의 '온갖 다양한 뿌리들'이 책 속 곳곳에 박혀 있다. 훗날 서양의 역사를 기록한 중요한 책들에서 끊임없이 인용하는 책들이기도 하다.



사진 4_플라톤, 아리스토파네스

플라톤은 설명이 필요없는 철학자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은 비극보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고대인의 웃음' 뿐 아니라 '현대인의 웃음'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묘하고도 재미있는 책이다. 아리스토파네스와 플라톤의 책을 함께 붙여 놓으니 문득 '니체의 말'이 떠오른다. "플라톤 또한 삶을 ㅡ 그가 부정했던 그리스적인 삶을 ㅡ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ㅡ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말이다! ㅡ " 『선악의 저편』중에서

 



사진 5_아리스토텔레스, 베르길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미건조하고 따분한 철학자이지만 학문의 깊이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다.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최대의 시인이자, 라틴 시문학의 시조이며, 단테의 스승이니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인물이다.



사진 6_아우렐리우스, 단테, 마키아벨리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탁월한 황제이자 후기 스토아학파 철학자였다. 단테는 타락한 민중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신곡』을 썼다기 보다는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그려냈다. 마키아벨리는 플라톤 이후 '국가의 가능성과 한계'를 전혀 새롭게 바라본 인물이다.



사진 7_라블레, 몽테뉴

라블레는 '하느님과 술 취한 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작가였다. 몽테뉴와 라블레를 함께 놓고 말하자면 두 사람만큼 진지하고 쾌활하면서도 인생을 사랑한 작가는 당대 프랑스 사람들 가운데 찾기 어려웠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사진 8_세르반테스, 대니얼 디포, 조너선 스위프트

이들 세 작가는 누구라도 한번 만나면 다시는 잊지 못할 독특한 '인간 유형'을 창조한 위대한 인물들이다. 돈키호테, 산초,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를 모르는 어른들은 아마도 거의 없으리라. 심지어 아이들한테 물어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 읽는 작품은 아이였을 때 읽었던 작품과는 확실히 다르다.



사진 9_볼테르, 에머슨

볼테르와 에머슨은 당대와 후세 사람들에게 끼친 막대한 영향에 비해 오늘날 그리 폭넓게 읽히지 않는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 독자들이 느끼는 이런 격차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겠다.


사진 10_찰스 다윈

다윈만큼 겸손한 과학자도 드물다. 그의 주장이 엄청났던 만큼 후세 사람들의 반발과 왜곡도 그만큼 심했다. 다윈 이후 쏟아져 나온 보다 진보한 이론들이 다윈의 업적을 깍아내리는 건 아니다. 훌륭한 과학자로서의 다윈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끼고 싶은 독자들은 다소 힘겹더라도 다윈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필요가 있다.



사진 11_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는 언제나 진실에 호소한다. 소로우의 영향력이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확대되고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사진 12_톨스토이, 마크 트웨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만큼 '위대한 장편'은 아마 다시 창조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가 규모 면에서 그에 필적할 만하다 싶지만 '웅대함'에서는 톨스토이가 앞선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권고대로 『전쟁과 평화』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읽기에는 더없이 훌륭한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은 '미국을 이해하는 방법'이 소설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게 타당하다는 점을 증명해 보인다.



사진 13_니체

니체는 언제나 강인하고 격렬하면서도 과격하다. 그러나 니체를 만나면 분야를 막론하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왜곡'인지 배울 수 있다. 그는 철학, 종교, 도덕, 역사, 음악, 문학 등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사진 14_제임스 조이스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너무 일찍 다가갈 필요가 없다.『율리시스』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럴 만나기 위해 너무 늦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클리프턴 패디먼의『평생 독서 계획』속에 담긴 책을 대략 3할 정도 읽고 나서 『율리시스』를 만나는 건 꽤나 좋은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 http://blog.aladin.co.kr/oren/8597281



사진 15_프란츠 카프카, 알베르 카뮈, 사무엘 베케트

어쩌다 보니 이들 유별난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카프카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색이 없을 만큼 전례가 없는 소설들을 써냈다. 아무리 다가가려 애써도 결코 닿을 수 없는 성, 느닷없이 소송에 휘말린 죄없는 요제프 K. 마침내 벌레로 변신해야만 했던 그레고르 잠자의 '비인간화' 등은 카프카가 아니었으면 결코 창조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 카뮈의 소설이나 베케트의 희곡과 같은 부조리 문학 또한 내게는 카프카의 자식들처럼 여겨진다.



사진 16_두 줄로 쌓아 올린 『평생 독서 계획』에 담긴 42명의 작가들의 책

내가 글을 쓰기 전부터 구상했던 '책 탑'이 완공됐다. 대체로 오래된 책들부터 쌓아 올렸다. 옆에서 보면 불안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지만,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은 의젓하기만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내가 만난 42명의 작가의 책들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 결코 참석할 수 없게 된 '옛날 책들'은 불가피하게 빠졌다는 점이다. 결석생들은 토머스 홉스, 괴테, 스탕달, 너새니얼 호손, 허먼 멜빌,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안톤 체호프, D.H.로렌스, 헤밍웨이, 가브리엘 마르케스 등의 책들이다. 그들의 '불참' 덕분에 '책탑'이 그나마 자세를 튼튼하게 유지했는지도 모르겠다.



'독서 계획'이라는 게 어디 마음만 먹는다고 다 뜻대로 이루어질 리는 없다. 더군다나 '평생 독서 계획'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도 '평생 독서 계획'은 다른 숱한 장기 계획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실현가능성이 높을 지도 모르겠다. '내집 마련 계획' 하나만 보더라도 이치는 간단하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값도 끝없이 움직이고, 집을 마련하려는 당사자의 직장이나 소득 혹은 지출도 계속 변할 테니까 말이다. 그에 비한다면 '평생 독서 계획'은 얼마나 안정적인가. 그 책 속에 담긴 책들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게 틀림없다. 책을 읽는 독자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독서력'이 점차 향상되는 쪽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다른 장기 계획들에 비하면 얼마나 고무적인가.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월든』의 <독서>라는 장에서 다음과 같은 인상적인 글을 남겼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중에서

'어느날 갑자기 우리 마을에 이사 온 멋진 신사' 가운데는 플라톤 보다 훨씬 미남이고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빙리 씨도 있었다. 그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등장하는 진정한 주인공인 다아시 씨도 그 마을에 끌어 들인다. 그 유명한 소설의 시작 부분을 여기서 다시 떠올려 보자.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웃이 되면 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거의 모른다고 해도, 이 진리가 동네 사람들의 마음속에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그를 자기네 딸들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중에서

우리가 플라톤이나 다아시 같은 인물들을 이웃으로 두고도 서둘러 '만나야 할 인물'로 여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사람들의 첫 인상이 너무 오만하거나 혹은 남을 우습게 무시하는 듯한 느낌 때문에 우리가 미리 '어울릴 사이'가 아니라고 지레 포기한 때문은 아닌가, 혹은 그들이 지닌 고귀한 명성과 높은 학식과 신분 때문에 우리가 미리 주눅부터 든 때문은 아닌가, 혹은 그들의 고고한 태도와 까다로운 예의범절이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 때문은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도 해 봤다.

그러나 책은 결코 우리에게 까다롭게 굴지 않는다. 미리 정해진 날짜에 맞춰 복장을 차려입고 만날 필요도 없다. 정찬에 정식으로 초대되어야만 그들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격식을 차린 대화도 필요없다. 우리가 내킬 때 아무 때나 덥석 그들을 붙잡고 얘기를 나누면 그만이다. 그들은 우리가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가기만 하면 언제든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는 '오만과 편견'을 모두 극복하고 나서야 마침내 펨벌리의 멋진 풍광을 온통 차지할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마저 들어보자.


엘리자베스는 금방 기가 살아 다시 발랄해졌다. 그녀는 다아시 씨가 어떻게 자기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길 원했다. "어떻게 시작할 수 있었죠?" 하고 그녀는 말했다. "일단 시작을 하고 나서는, 멋지게 계속하신 것 알아요. 그렇지만 처음에 어떻게 시동이 걸렸죠?"


"시동을 건 시각이라든가, 장소라든가, 표정이라든가, 말이라든가 하는 것을 꼭 집을 수는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내가 시작했구나 알았을 때는 벌써 한참 지났더군요."


그들이 소설의 말미에서 나누는 저토록 행복한 대화는 '평생 독서 계획'을 세우고 또 끈질기게 밀고 나가려는 독자들과 책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앞으로도『평생 독서 계획』속에 담긴 책들을 계속 읽어나갈 작정이다. 앞으로 매년 6명의 작가를 만난다면 10년 후에는 지금보다 60명을 더 만날 수 있다. 그러면 133명의 작가 가운데 이미 만난 42명을 더해 102명의 작가를 만날 수 있다. 혹은 더 욕심을 낼 수도 있다. 매년 6명씩 15년을 계속 만난다면 90명을 더 만날 수도 있다. 그러면 마이클 더다처럼 '『평생 독서 계획』에 담긴 저자들을 거의 다 섭렵했다'는 말을 당당히 입에 올릴 수도 있으리라. 한 마디만 덧붙이자. 펨벌리처럼 광대한 영토와 멋진 풍광을 지닌 장원을 독서를 통해서나마 차지할 수 있다면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는 많을 수록 좋으리라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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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5-03 0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oren님께서 이미 읽으신 책들 중 많은 책을 저는 앞으로 읽어야 할 것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 저자와의 만남이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다른 저자를 만나기 위해 인사만 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 요즘입니다...

oren 2017-05-03 14:14   좋아요 2 | URL
『평생 독서 계획』에서 권유하는 제안 가운데 아마도 제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는 대목이 ˝우리가 친구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면 서두르는 법이 없듯이, 이 책들도 서둘러 읽어서는 안 된다.˝는 부분일 겁니다. 그래서 저도 이들 가운데 한 작가를 만나면 가급적 서두르는 법이 없이 오래도록 함께 대화를 나눈다는 심정으로 그들을 대했던 적도 많았던 듯합니다. 물론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여태껏 만나지 못한‘ 다른 작가들을 만날 때도 최대한 서두르지 않고 만나보겠다고 의도적으로 지연시킨 경우도 있었고요. 만남을 미룰수록 더욱 만나고 싶어질 때, 바로 그럴 때 만나야 그 만남이 훨씬 더 반가운 것도 사실이니까요. 가끔씩은 수많은 친구들이 여기저기서 온통 한꺼번에 만나자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무슨 겨를이 없을 떄도 있겠지요. 겨울호랑이 님처럼요.

cyrus 2017-05-03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독서 취향이 저와 조금 비슷합니다. 저는 피터 박스홀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책(번역본)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이 작업도 어떻게 보면 ‘평생 독서 계획‘입니다.

고전을 좋아하는 oren님께 권해드리고 싶은 책이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의 《황금 당나귀》입니다. 《1001》에 소개된 작품입니다. 《황금 당나귀》에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가 수록된 오래된 작품입니다. 이 책이 품절인데 가끔 중고매장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

oren 2017-05-03 14:32   좋아요 1 | URL
피터 박스홀의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에 소개된 책의 목록들을 살펴보니 어마어마하네요. 영화화된 작품들도 꽤 많은 것 같고요. 단지 ‘소설‘로만 분야가 한정되어 있다는 게 좀 아쉽긴 하고요. cyrus 님께서 추천해 주신《황금 당나귀》도 기억해 놓겠습니다. 사실, 저는 독서의 범위를 계속 넓히기 보다는 적당한 범위로 한정시키고 싶은 생각이 더 크답니다. 분야 또한 문학뿐만 아니라 철학이나 역사, 과학 등과 병행하고 싶고요. ‘문학‘을 전공한 덕분에 엄청나게 많은 문학작품을 읽은 ‘문학평론가‘들의 책을 읽어보면 때때로 철학,역사,과학 등이 아예 배제된 책들도 있던데,『평생 독서 계획』은 그런 면에서 여러 분야별로 골고루 균형이 잘 잡혀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특별히 제가 더 호감을 느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해피북 2017-05-03 08: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oren님의 글을 읽으며 마음이 따끔했습니다 ㅎ 무엇보다 오뒷세이, 일리아스는 ‘반드시 거처야 할 우주정거장‘ 이란 말씀처럼 그런 마음으로 구입했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와 돈키호테, 몽테뉴수상록도 구입해 두고선 읽지 못하고 있었거든요. 제 서재를 점검해보는 글이었습니다 ㅎ ‘평생독서계획‘이란 멋진 표현도 배웠고요. 책탑과 멋진 서재도 구경 잘 했습니다 ㅎ 그리고 읽었던 책도 몇 권 보여서 남몰래 반가워 했답니다 ㅋㅋ

oren 2017-05-03 14:47   좋아요 1 | URL
해피북 님 반갑습니다^^ 제가 호메로스의 책에 대해 너무 거창한 표현을 동원한 듯해서 괜히 쑥쓰럽군요. 저 표현은 어디서 듣고 모방한 게 아니라 저도 모르게 불쑥 내놓은 저의 솔직한 내심을 담은 표현이라고만 받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실 어떤 책들은 보르헤스의 표현대로 ‘우주의 비밀을 다 담은 듯한‘ 책도 있거든요. 그에 비한다면 ‘우주 정거장‘은 매우 협소한 비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광막한 우주와도 같은 인간의 정신 세계를 탐험한다고 할 때, 우주정거장과 같이 아늑하고도 물자가 풍부한 장소를 몇 군데쯤 알고 지낸다면 한결 마음이 푸근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숱한 고전들이 ‘쉬운 교제를 방해하는 오만한 모습‘을 지닌 것도 부인할 수 없겠지요. 졸탁동시(卒啄同時)라는 말도 있듯이 언젠가 ‘멋진 계기‘가 찾아오면 ‘편견‘도 없어지고, 고전이 지닌 특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날도 찾아오리라 믿습니다.^^

그랜드슬램 2017-05-28 1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천병희 선생님 책이 가장 눈에 들어오네요^^

oren 2017-05-28 23:31   좋아요 1 | URL
천병희 선생님이 아니었더라면 고대 희랍 고전들을 도대체 ‘어떤 책으로‘ 읽을 수 있었을까 싶어요.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정말 너무나 고마운 분이시지요.

그랜드슬램 2017-05-28 1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왜 그 가치를 몰랐는지,아니 지금이라도 알게되어 감사할 따름이지요! 덕분에 읽지 못한 책들 한권씩 구입하여 읽어보겠습니다! 항상 묵은지처럼 맛갈나는 글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oren 2017-05-28 23:36   좋아요 1 | URL
괜히 심심할 때 ‘이런 저런 책들‘을 쳐다보면 뭔가 끄적거리고 싶을 때가 생기더라구요. 그냥 ‘심심풀이로 읽는 독서 체험담‘쯤 되는 글인데, 혹여라도 이런 글들이 ‘잠재적인 독자분들‘께 조금이라도 ‘책을 접하는 통로‘를 밝혀줄 희미한 빛이라도 보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쓰게 된답니다. 저 또한 다른 분들이 쓰신 ‘이런 류의 글들‘을 통해 도움을 받을 때가 있거든요. 아무쪼록 그랜드슬램 님께서도 좋은 책들을 더 자주 가까이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읽기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책을 읽다가 반가운 작가와 작품을 만나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작품 속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꾸며낸 놀라운 주인공들은 사실 작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다채롭다. 누가 돈키호테와 산초의 이름을 듣고도 여전히 따분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로빈슨 크루소의 얘기를 듣고도 그저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문학이 창조한 숱한 인물들 가운데 내가 다른 책에서 마주칠 때 가장 반가운 인물은 단연 오뒷세우스다. 그 사람보다 더 다채로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를 나는 항상 궁금해 한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데는 그 사람을 다룬 작품을 읽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의 조언에도 아랑곳없이 곧장 그 인물을 만나러 곧바로 '작품 속으로' 뛰어드는 게 가장 좋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견해가 독자들의 순수한(?) 만남을 살짝 방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를 만나기 위해 들춰야 할 책들은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호두껍질을 외피로 두른 듯 읽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은 올려다 볼수록 까마득한 바위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주는 책 가운데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가 대표적이다. 나도 맨 처음 그 책을 펼쳤을 땐 '이게 과연 책인가' 싶은 느낌부터 들었다. 알프스의 융프라우를 오를 때 잠시 기차 밖으로 내다봤던 그 유명한 '아이거 북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한마디로 아찔했다.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 '오뒷세우스'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책들만 모아봤다. 단테의 『신곡』, 『테니슨 시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등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고 누군가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책들은 '오뒷세우스'를 빼고는 결코 얘기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내용들을 이 글에 담았기에 저 책들을 사진에 포함시켰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현대판 속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아직까지도 '작품 해설' 정도만 읽어 본 채 도로 덮어 두고 있다. 어느날 문득 오뒷세우스가 몹시 그리울 때 카잔차키스의 저 책을 펼칠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는 마냥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한 번 그와 사귀고 나면 계속해서 그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를 통해서였다. 그 뒤로는 한동안 그를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작품은 너무나도 훌륭한 고전이라고 다들 한결같이 말했기 때문에 어떤 의무감으로 읽은 책이지 정말 그 책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해 찾아 읽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년기때 너무나도 얄팍한 독서 경험만 지닌 채로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오뒷세우스에 대한 온갖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책으로부터 흘러나온 강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온 대지를 적시고 산봉우리들을 휘감아 돌면서 멋진 풍광들을 만들어 내는 동안, 나는 오뒷세우스를 다룬 걸작들을 애써 찾아 읽을 생각을 거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오래 전에 헤어졌던 옛 친구도 우연히 다시 만나는 법이다. 책과의 인연도 그와 닮은 듯하다. 어쩌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나도 '오뒷세우스'를 옛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옛날 어떤 의무감과 호기심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인 상태에서 엉덩이를 슬쩍 뒤로 빼고 읽었던 그 책에 담겼던 그 오뒷세우스를 말이다.


어떨 땐 그 인물이 시(詩) 속에서도 발견되었다. 어떨 땐 그리스 비극 속의 조연으로도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아 여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 인물이 내 앞에 거대한 존재로 다시 부각된 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다. 그 엄청난 소설은 호메로스-단테-셰익스피어-테니슨 등등으로 면면히 이어진 '오뒷세우스의 문학 여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었고,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러 마침내 거대한 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 오른 것도 기나긴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샘'이 있었기 때문이고, 까마득한 옛날 트로이 전쟁 때 거대한 목마 속에 무장병사들을 숨겨 '적의 힘으로 적진 속으로 잠입하는 작전'을 머리에 떠올린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귀향길에서 온갖 풍랑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고, 이타케 섬으로 돌아와 아귀같은 연적이자 정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왕위를 되찾았으면서도 기어코 자신의 모험을 거기서 끝내지 않고 미지로의 새로운 모험을 계속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그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와 모험심을 지닌 오뒷세우스'가 정말 좋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인물을 나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오뒷세우스를 다룬 작품에 곧바로 뛰어들지 못해 아직까지도 그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독서 대가들'의 '진솔한 체험담'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그의 매력적인 면모를 만끽하기 위해 어느 성급한 독자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를 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는 오뒷세우스를 닮은 인물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아내)와 텔레마코스(아들)에 해당하는 인물인 블룸(남자 주인공)과 몰리(블룸의 아내이자 여주인공)와 스티븐(블룸의 아들 격인 또다른 주인공)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긴 하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가능하다면 다른 책들을 충분히 읽고 난 뒤에 펼쳐도 결코 늦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독서 체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그 책을 읽는 기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묘한 장치들'이 수없이 많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쉽게 말하자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문이 달린 책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떤 문은 아무리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준히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틀림없이 수십 개의 문들을 쉽게 밀치고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문을 통해서 또다른 통로로 이어진 수많은 문들을 끊임없이 계속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은 백 번 옳다.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내는' 그런 책이다.


어쩌다가 내 얘기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쪽으로 너무 치우친 듯하다. 그 책을 읽고 나서 후끈 달아올라 '멋진 서평'을 쓰겠다고 잔뜩 벼르다가도 그만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너무 성급하게 다른 책을 붙잡는 바람에 서평 쓰는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는데, 그 아쉬움을 내가 이 글을 통해 뒤늦게나마 잔뜩 풀어놓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당시 서평을 쓰기 위해 내가 다시금 펼쳤던 책 가운데는 알베르토 망겔의『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와 단테의 『신곡』도 있었다. 그 부분을 이번 기회에 밑줄긋기로나마 옮겨 본다. 느닷없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때문이었다. 그 책 속에서 앨프리드 테니슨의「율리시스」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책에서 만난 건 이번이 네 번째인 듯한데,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내 가슴도 여전히 울렁거리는 걸 느낀다. 그 옛날 한 때는 격하게 울렁거릴 때도 있었다. 아마도 테니슨의 시를 내 글에 맨 처음으로 인용할 때가 특히 더 그랬던 듯하다. 벌써 희미한 옛 추억으로 변한 듯하지만 말이다.


 * * *

(밑줄긋기)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던 교수 시절에 나는 예일 대학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시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테니슨의 뛰어난 극적 독백 「율리시즈Ulysses」를 외우자고 제안했다. 그 시는 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외우고 있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비판적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 시는 '율리시즈'가 등장하는 다른 시들을 떠오르게 한다. 호머의 『오디세이Odyssey』,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중 「지옥Inferno」,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으로 변형된 율리시즈 등.

 

테니슨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서 헨리 할람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율리시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삶을 계속해야 하는 필요성을 표현했다. 테니슨이 쓴 멋진 시들 중에는 「인 메모리엄In Memoriam」이나 「아서의 죽음Morte d' Arthur」처럼 아서에 대한 비가로 구성된 작품들이 많다.

 

(중략)

 

나이 든 많은 남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남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이런 영웅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반추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율리시즈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웅변가여서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쉽게 그 생각을 바꾸고 만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어:

인생의 술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야 해, 언제나 나는

큰 기쁨과 고통을 맛보았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육지에 있을 때나 거친 물살을 뚫고 비를 실은 하이데스 성좌가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를 분노케 할 때에도: 나는 이름을 얻었지

언제나 굶주린 가슴을 안고 방랑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도시들과

색다른 풍물과 기후, 지방과 중앙의 평의회들

그리고 그 중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영예를 누린 나 자신도:

그리고 내 적수들과 겪은 전투의 기쁨도 맛보았지,

저 멀리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 거센 트로이의 전쟁터에서,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일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

그러나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치, 그것을 통해

아직 여행해 보지 못한 저 미지의 세계가 빛난다, 그 세계의 지평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원히 사라진다.

얼마나 지리한 삶인가, 여행을 중지하고 끝장낸다는 건!

닦지 않고 녹슬게 내버려 두고, 써서 빛내지 않는다는 건!

마치 숨쉬는 것이 인생인 양! 삶 위에 삶을 쌓는다는 건

너무나 보람없는 일일 거야. 그리고 이제 내게 그러한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줄 수 있다면

저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3년이란 세월을 이곳에서 썩는다면 죄악일 거야.

이 백발의 정신이 열망하는 것은

진리를 따라 유성처럼

인간 사고의 극한 그 너머로 가는 것일진대.


 

독자는 이 시에서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자신이 영웅과 동일시됨을 느낀다. 이 부분의 에토스Ethos(예술 작품의 윤리성)는 헤밍웨이적 코드, 즉 삶은 마지막까지 지속되어야 함을 예언하고 있다. 물론 헤밍웨이적 투우사나 사냥꾼을 율리시즈라는 영웅 중의 영웅과 비교할 수는 없다.

 

(중략)

 

테니슨이 원전으로 삼았던 것은 『오디세이』중의 영적인 극적 독백과는 다른 단테의 「지옥」칸토26이다. 여기에서 율리시즈는 계율을 위반한 모험가로 묘사되었다. 단테의 율리시즈는 남자를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를 떠나지만 페넬로페와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고 알려진 세상의 끝 너머 지중해를 뚫고 마침내 대서양의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저기 항구가 보인다. 돛이 바람에 부푼다.

저 망망대해에 어둠이 깔린다. 나의 선원들…

나와 고락을 같이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을 나눈 영혼들,

그대들은 언제나 장난스럽게 반가이 맞이했지 ㅡ

저 천둥과 햇볕을, 그리고 거침없는 가슴과 이마들을

서로 맺대었지 ㅡ 이제 그대들과 나는 늙었어.

허나 노년에도 그에 따르는 위엄이 있고 해야 할 과업이 있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 그러나 그것이 오기 전에

무엇인가 고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신들과 겨루었던 대장부에 손색이 없도록.

저 해안 절벽에서 등대 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군.

긴 하루가 저물어 가는구나: 큰 달덩이가 천천히 떠오른다.

깊은 바다는 수많은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벗들이여, 떠나세.

신천지를 찾아가는 일이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

배를 바다로 밀어 내세. 모두 정위치에 자리를 잡고

노로 물결을 세게 쳐서 바다에 이랑을 만드세.

내 목표는 저 해지는 곳. 저녁 별들이 미역감는 곳 너머로 노 저어

가는 것이야 ㅡ 죽는 날까지

해류가 우리를 저 수평선 밑으로 휩쓸어 버릴지도 모르지.

아니면 극락에 기항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거기서 옛날 우리가 알았던 저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나게 되겠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게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게 남아 있어.

이제 우린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그 힘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역시 우린 우리야.

그건 한결 같은 영웅의 기개,

시간과 운명 때문에 약회되긴 했지만,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탐색하고 발견하면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야.

 

 

이 위대한 시를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위대한 시가 주는 즐거움은 실로 다양하다.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는 내게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타인과 교류를 하는 데 있어서 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묘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Idelism일 뿐이다.

 

고독은 흔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 우리는 어떻게 그 고독 속에서 살 것인가? 시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명료하고 완전하게 말하며 그 말을 잘 엿들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엿듣기의 대가였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테니슨의 율리시즈와 마찬가지로 그런 엿듣기에 있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혹은 우리 안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럼으로써 보다 충분히, 그리고 미묘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106∼11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2. 시> 중에서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책 속에서 만나는 건 테니슨의 시집을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시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반갑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옮겨 본다.


 * * *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

 

조이스는 버젠에게 자신이 『오디세이아』에 기반을 둔 책을 하나 쓰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 햄릿, 파우스트 모두 삶의 완전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여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독신자로, 햄릿을 아들이었을 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총각으로, 파우스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가족도 없이 '언제나 그를 자기 옆구리나 발꿈치에 매달고 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지당하는 한심한 자로 내몰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목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라에르테스에게는 아들이고,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이며, 페넬로페에게는 남편이고, 칼립소에게는 연인이며, 트로이아를 포위한 그리스 전사들에게는 전우이고, 이타카의 백성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지혜와 용기로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더 나아가 조이스는 버젠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귀와 황소를 함께 멍에로 묶어놓고 밭을 갈면서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고 노력했던 협잡꾼이라는 사실 말이다.(하지만 징병 담당자가 그의 쟁기 앞에 어린아이였던 텔레마코스를 놓자 그의 사기 행각은 탄로났다.) 이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가 아들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여자들 사이에 숨겼을 때, 그 여장(女裝)을 한 영웅이 오디세우스가 가져온 여러 선물들 중에서 방태와 창을 고르는 것을 보고 탄로났더라는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276∼277쪽)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이 창조한 '불멸의 예술작품'의 주인공으로 '오디세우스'를 고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품『율리시스』에 딸린 주석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벨비디어 중학 시절에 오디세우스 장군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일리아스』에서 그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사이다. 또한 유능한 외교관이었기에 아가멤논의 화해 요청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수사(修辭)의 달인이라 청중을 더욱 놀라게 하려면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오랜 조언자였던 안테노르는 오디세우스가 다중 앞에서 말할 때, 처음에는 뻣뻣이 선 채 눈을 땅에 고정시킨 뒤 연설을 터뜨린다고 서술한다.

 

그대는 말했을 것이오. 무뚝뚝하고 틀림없이 생각 없는 자일 거라고.

그러나 그가 우렁찬 목소리를 가슴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겨울철에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다음에는 오디세우스에게 논쟁을 걸지 못했지요, 그 누구도!


 - 『일리아스』, 제3권 220∼223행


(나의 생각)


오디세우스야말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모두' 등장하는 진정한 영웅이다. 아킬레우스도 『오뒷세이아』에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고작 '저승'에서 아주 잠깐 얼굴을 내밀 뿐이다. 오디세우스의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상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도 살필 수 있다 ☞ http://blog.aladin.co.kr/oren/6972956


 

 

 

단테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

 

일단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로마에 이르렀을 때, 영웅의 본성이 변했다. 물론 다른 모습으로 변한 오디세우스의 그리스적인 전례도 있었다. 이는 기원전 415년에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에서 그를 폭력적이며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군인으로 그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에서의 오디세우스는 사악하고 자만심이 강한 자로 묘사되며, 로마인들의 마음속에서 동지중해 지역의 영악한 그리스 사람들과 겹쳐졌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 로마인들은 뿌리 깊은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무정한 약탈자이자 '범죄의 달인', 말하자면 그리스의 모리아티로 묘사했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 번째 인격성을 입고서 유럽 문학에 들어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그의 동료인 디오메데스와 싸잡아 비난한 뒤 지옥의 여덟 번째 계로 보내버렸다. 이곳에는 사기 행위의 조언자들과, 다른 자들에게 도적질하라고 부추기는 영적인 도적들이 영원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 봉인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워버렸던 탐욕스러운 열정이 이제는 외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탐욕에 불타오르게 했다면, 이제는 불꽃의 혀들이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단테가 직관적으로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완수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한 번 더 멀리 나가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여행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묘사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은 단테가 그때까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알베르토 망겔의 책에는 실리지 않은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을 덧붙인다. 그 책의 '주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항해 이야기는 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단테의 창작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직 한 척의 배에 의지해

늘 나와 함께했던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깊고 넓은 바다로 나왔소.

 

멀리 에스파냐와 모로코까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을 보았고, 이 바다에 몸을 적시는

사르데냐와 다른 섬들도 보았소.

 

나와 동료들은 늙어 갔고 몸도 둔해졌다오.

그 무렵 우리는 그 누구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표지를 꽂아 둔

 

비좁은 어귀에 도착했소.

오른쪽으로는 세비야를 떠난 뒤였고

반대쪽으로는 세타를 떠난 뒤였소.

 

나는 이렇게 말했다오. '오, 형제들이여!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드디어 우린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랐다. 우리에게 생명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의 뒤를 좇아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을 찾아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마라!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그 짧은 연설에 동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

나중에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오.

 

선미를 아침에 두고 우리는

미친 듯 파닥거리는 날개처럼 노를 저어서

계속 왼쪽으로 왼쪽으로 항해했소.

 

밤에는 다른 극의 모든 별들이

보였소. 우리 극의 별들은 낮게 내려와

바다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소.

 

우리가 그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뒤

달 아래의 빛이 다섯 번이나

켜졌다가 다시 꺼졌을 무렵,

 

산 하나가 멀리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어찌나 높이 솟았던지

그런 산을 본 적이 없었소.

 

우리는 기뻤소. 그러나 기쁨은 금방 통곡으로

바뀌었다오. 그 낯선 땅에서 풍랑이 일어나

뱃머리를 들이받았기 때문이오.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 바퀴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 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 26곡 100∼142행


(나의 생각)

 

단테의 『신곡』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수없이 자주 인용된다. 내 기억으로는, 성서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자주 인용되는 작가가 단테였던 것 같다. 호메로스와 단테와 제임스 조이스는 서로 무척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6세기가 더 지난 뒤, 앨프리드 테니슨 경은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테가 이룬 성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작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노년은 아직 그 영광과 노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고귀한 어떤 일이 여전히 완수될 수 있으니,

신과 투쟁했던 사람들은 흉한 것이 아니다.

빛은 반석들로부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린 달이 솟아오른다. 깊은

신음이 수많은 목소리와 함께 맴돌고. 오라, 내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어버려라,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쳐라

울려 퍼지는 밭고랑들을. 일몰 너머로 그리고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저 욕조들 너머로

돛을 펼치려는 나의 계획은 내가 죽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니.

해협들이 우리를 휩쓸어 침몰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행복한 작은 섬에 닿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을 거두어갔지만,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

영웅적인 심장들의 한가지로 똑같은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투쟁하고, 탐색하고,

찾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안에서만은 강하다.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도리어 '시적 운율과 감흥'을 떨어뜨리는 듯하다. 시인의 번역이 아니니 그럴 만하다 싶지만 번역된 시를 읽을 때마다 매번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 고전에 빠져 있던 테니슨은 단테에게 비난받은 왕을 자신의 호메로스적 원천으로 되돌려 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량함에 비해 너무 영악한 부랑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당해야만 한다. 자신의 길었던 여행을 요약하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했던 귀향 병사에서, 집으로 와서도 다시 한 번 더 항해를 떠나려고 열망하는 왕으로 돌아온 과정을 요약하면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이렇게 썼다. "오디세우스가 상징(또는 대표)해왔던 수많은 것들 중에 변함없는 것 하나가 서양의 문학 안에 있다. 한계를 제거하며 '가능한 것'에 종속되는 대신,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길고 시적인 번안에서, 오디세우스는 테니슨의 번안에 나오는 해당 주인공보다 더 삭막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찾아다니는 방랑자이자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로서 ㅡ 테니슨의 시행에 나오는 대로 ㅡ "내가 만났던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그는 왕이자 군인이고 연인이며, 아프리카에 유토비파적인 공동체 사회를 건설한 불행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오디세우스에게는 실패가 경험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저 타자(他者), 즉 빙하로 뒤덮인 북극의 황무지에서 삶을 마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우스는 남극의 황무지에서 씻겨나간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신곡』에 있는 단테의 말을 메아리로 울려댄다.

 

그때 살점은 녹고, 시선은 굳어버렸으며, 심장박동은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위대한 마음은 그것의 거룩한 자유의 정상으로 뛰어올랐고,

텅 빈 날개로 퍼덕거렸으며, 그리고 난 다음 똑바로 위를 향해 대기를 뚫고

높이 치솟았고, 그 마지막 새장, 그것의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했다.

모든 것이 연약한 안개처럼 흩어졌다, 오직 하나의 용감한 외침만이

짧은 시간 동안 고요하고 무지몽매한 물속에 걸릴 때까지.

"전진하라, 내 용사들아. 돛을 올려라, 죽음의 산들바람이 순풍으로 불어온다."


(나의 생각)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가 쓴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그리 많은 독자를 확보한 책은 아닌 듯하다. 나도 여태 안 읽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고 싶다.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며, 다시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새뮤얼 존슨 박사는 1765년에 쓴 저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체계의 완벽함은 곧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인간 지성의 공통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덧붙여 말한다면,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술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존경은, 지나간 시대의 우월한 지혜에 대한 경솔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우울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았으며, 또 의심할 수 없는 입장들의 결론이다. 즉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이라는 말이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 외에 다른 것도 했다.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남자들이 수행했던 근본적인 모험 이야기를 다시 상상했다. 그가 짝지어놓은 것은 오디세우스와 블룸 사이였지, 호메로스와 조이스 자신 사이였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창작자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기보다는 창작물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는 말이다. 다른 작가들은 번역과 치환, 투사를 통해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조이스는 '다시 시작함으로써'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한 알베르토 망겔의 깊이 있으면서도 풍부하고 예리한 해석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새뮤얼 존슨 박사의 탁월한 견해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헤럴드 블룸이 존슨 박사를 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라 부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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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되살펴 보니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인용했던 글이 이미 세 편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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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4-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일리아스>를 읽었는데 전집의 한 권으로 읽었고 지금 갖고 있지 않아요.(제 기억이 확실한가 싶어서 제 독서목록노트로 확인했음.)
두꺼운 책의 사진을 보니 탐나기는 하지만(책이 잘 생겨서) 이젠 두꺼운 책을 읽어 낼 자신이 없어서 300쪽 내외의 책만 산답니다. 300쪽 이내의 책을 더 좋아하고요.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두꺼운 고전에 대해 글을 쓰시는 오렌 님의 서재에 오면 책이 더 좋아지니, 책을 막 사고 싶으니 이건 무슨 일일까요?

oren 2017-04-22 23:21   좋아요 0 | URL
페크 님께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일리아스』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1980년 겨울에 제가 처음으로 읽었던 『일리아스』는 아직도 제 눈 앞에 선하기만 한데 그 모습은 온데 간데가 없네요. 그 당시 읽었던 책은 판형이 지금보다 조금 작으면서도 몹시 똥똥한 모양이었더랬죠. 읽던 페이지를 펼쳐 놓고 양쪽으로 힘주어 움켜잡지 않으면 자꾸만 책이 덮이려고 용을 쓰는 압력도 만만치 않았던 기억도 나고, 또 무엇보다도 세로 판형이었고요. 그 책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인명이나 지명이 지금과는 꽤나 다르고 낯설게 번역되어 있는 걸 보고, 세월의 간극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책 사진들을 이렇게 찍어둔 것도 먼 훗날에는 다시금 우리들 눈에 생경하게 비치는 걸까, 그게 문득 궁금해집니다.

qualia 2017-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윗글만으로도 오뒷세우스의 모험의 여정이 장대하고도 웅혼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용해주신 여러 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 혹은 감동의 격랑을 느꼈습니다. 글 혹은 시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인용을 거쳐 부분적으로만 읽을 뿐인데 이토록 꿈틀거리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열정이라니~!


oren 2017-04-23 00:37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격하게 호응해 주시니 싯구절들을 부지런히 옮긴 보람을 느낍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가 무척이나 자주 인용되는데요. 조이스가 그 기나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오뒷세이아』를 인용한 부분만 봐도 그 소설이 벌써 심상치 않습니다. ‘바다‘에 대한 두 번째 인용인 ‘탈라타! 탈라타!‘에서는 단번에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활짝 열어젖힐 정도입니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바다! 바다!‘ 하고 외치는 크세노폰 군대의 외침이 얼마나 격렬하면서도 벅찬 외침이었는지를 결코 모를 수 없기 때문이지요.

* * *

ㅡ 맹세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바다는 앨지가 부르듯, 그대로가 아닌가: 위대하고 감미로운 어머니 말이야? 코딱지초록빛 바다. 불알을 단단하게 하는 바다. ‘에피 오이노파 폰톤‘(Epi oinopa ponton. 그리스어.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바다를 묘사한 말, ‘포도주빛 바다‘라는 뜻). 아 데덜러스, 그리스 사람들 말이야! 내가 자네한테 가르쳐 줘야겠다. 자네는 그걸 원문으로 읽어야 하네. ‘탈라타! 탈라타!‘(Thalatta! Thalatta! 그리스어,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서, 그가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의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의 항쟁을 마치고 흑해에 당도하여 바다를 보고 부르짖었다는 함성) 바다는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야. 와서 보게나.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1장 탑(텔레마코스)>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7-04-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작품에 대한 이해없이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네요..oren님 리뷰를 통해 그 전에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

oren 2017-04-23 00:5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예전에 이미『율리시스』를 읽으셨군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저는 클리프턴 패디먼의 친절한 안내와 부단한 격려의 말을 좀체로 잊을 수 없답니다. 그 양반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붙들고 읽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니까 말이지요.

* * *

주석서를 읽고 나서도 『율리시스』는 읽기가 쉽지 않다. 모든 문장, 생략된 문장, 미세한 의미, 암유, 혹은 앞에 나온 내용들에 대한 간접적 언급 등을 모두 이해하려고 들지 마라.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라. 그런 다음 책을 내려놓았다가 1년 뒤에 다시 시작하라.

조이스는 이 기념비적 작품을 위하여 새로운 문학적 테크닉을 많이 개발했다. 가령 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패러디, 꿈과 악몽의 시리즈, 말장난, 신조어, 비관습적인 구두점 등. 평범한 작가는 등장인물의 생각을 선별하거나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이스는 시냇물 같고, 꿈같고, 형체 없는 흐름을 가진 생각들 그 자체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또 독자에게 큰 소득을 안겨줄 것이다.

겨울호랑이 2017-04-23 01:11   좋아요 0 | URL
^^: oren님 덕분에 다시 「율리시스」를 들고 싶다는 용기가 나네요^^: 「율리시스」공략을 위해 메꿔야할 해자도 알게 되었으니 조급한 마음 대신 돌아가는 여유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격려와 좋은 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

oren 2017-04-23 11:2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더 읽고 난 뒤에, 꼭 다시 잊지 않고 이 소설을 다시 찾아 읽으리라‘는 다짐을 거듭 하게 되더군요. 독자들이 ‘재독, 삼독을 위해 그런 마음속 다짐을 품게 만드는‘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