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읽기

 


"그들은 말한다, 오디세우스, 놀라움에 지친 그가

사랑 때문에 곧장 다시 울었다고. 그의 이타카가

소박하고 푸르른 걸 보고서, 예술이란 마치 이타카,

단순한 놀라움이 아닌, 영원한 푸르름의 이타카 같은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학』(1958)에서

 

 * * *


책을 읽다가 반가운 작가와 작품을 만나면 옛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다. 작품 속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꾸며낸 놀라운 주인공들은 사실 작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다채롭다. 누가 돈키호테와 산초의 이름을 듣고도 여전히 따분하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로빈슨 크루소의 얘기를 듣고도 그저 무덤덤할 수 있겠는가.

 

문학이 창조한 숱한 인물들 가운데 내가 다른 책에서 마주칠 때 가장 반가운 인물은 단연 오뒷세우스다. 그 사람보다 더 다채로운 인물이 누가 있을까를 나는 항상 궁금해 한다. 그의 진면목을 아는 데는 그 사람을 다룬 작품을 읽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어떤 사람의 조언에도 아랑곳없이 곧장 그 인물을 만나러 곧바로 '작품 속으로' 뛰어드는 게 가장 좋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견해가 독자들의 순수한(?) 만남을 살짝 방해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늘 생각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를 만나기 위해 들춰야 할 책들은 쉽게 깨지지 않는 단단한 호두껍질을 외피로 두른 듯 읽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가끔씩은 올려다 볼수록 까마득한 바위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느낌을 주는 책 가운데는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가 대표적이다. 나도 맨 처음 그 책을 펼쳤을 땐 '이게 과연 책인가' 싶은 느낌부터 들었다. 알프스의 융프라우를 오를 때 잠시 기차 밖으로 내다봤던 그 유명한 '아이거 북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한마디로 아찔했다.

(내가 읽은 책들 가운데 '오뒷세우스'가 핵심 인물로 등장하는 책들만 모아봤다. 단테의 『신곡』, 『테니슨 시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등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라고 누군가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 책들은 '오뒷세우스'를 빼고는 결코 얘기할 수 없는 명백한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 내용들을 이 글에 담았기에 저 책들을 사진에 포함시켰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현대판 속편'으로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아직까지도 '작품 해설' 정도만 읽어 본 채 도로 덮어 두고 있다. 어느날 문득 오뒷세우스가 몹시 그리울 때 카잔차키스의 저 책을 펼칠 날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데 오뒷세우스는 마냥 외면하기에는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다. 한 번 그와 사귀고 나면 계속해서 그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를 통해서였다. 그 뒤로는 한동안 그를 만날 일이 좀처럼 없었다. 왜냐하면 호메로스의 작품은 너무나도 훌륭한 고전이라고 다들 한결같이 말했기 때문에 어떤 의무감으로 읽은 책이지 정말 그 책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디지 못해 찾아 읽은 책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한 청년기때 너무나도 얄팍한 독서 경험만 지닌 채로 그 책을 읽었기 때문에 오뒷세우스에 대한 온갖 매력을 충분히 느끼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 책으로부터 흘러나온 강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온 대지를 적시고 산봉우리들을 휘감아 돌면서 멋진 풍광들을 만들어 내는 동안, 나는 오뒷세우스를 다룬 걸작들을 애써 찾아 읽을 생각을 거의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오래 전에 헤어졌던 옛 친구도 우연히 다시 만나는 법이다. 책과의 인연도 그와 닮은 듯하다. 어쩌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나도 '오뒷세우스'를 옛 친구 만나듯이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옛날 어떤 의무감과 호기심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인 상태에서 엉덩이를 슬쩍 뒤로 빼고 읽었던 그 책에 담겼던 그 오뒷세우스를 말이다.


어떨 땐 그 인물이 시(詩) 속에서도 발견되었다. 어떨 땐 그리스 비극 속의 조연으로도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소포클레스의 비극 『필록테테스』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트로이아 여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 인물이 내 앞에 거대한 존재로 다시 부각된 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를 읽을 때였다. 그 엄청난 소설은 호메로스-단테-셰익스피어-테니슨 등등으로 면면히 이어진 '오뒷세우스의 문학 여정'이 없었더라면 결코 탄생할 수 없는 작품이었고,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러 마침내 거대한 봉우리 하나가 불쑥 솟아 오른 것도 기나긴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호메로스의 샘'이 있었기 때문이고, 까마득한 옛날 트로이 전쟁 때 거대한 목마 속에 무장병사들을 숨겨 '적의 힘으로 적진 속으로 잠입하는 작전'을 머리에 떠올린 꾀많은 오뒷세우스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가 귀향길에서 온갖 풍랑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고향으로 살아 돌아왔기 때문이고, 이타케 섬으로 돌아와 아귀같은 연적이자 정적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왕위를 되찾았으면서도 기어코 자신의 모험을 거기서 끝내지 않고 미지로의 새로운 모험을 계속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그 '포기할 줄 모르는 불굴의 용기와 모험심을 지닌 오뒷세우스'가 정말 좋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인물을 나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결코 만날 수 없었다.


오뒷세우스를 다룬 작품에 곧바로 뛰어들지 못해 아직까지도 그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 독자들이라면 '독서 대가들'의 '진솔한 체험담'으로부터 많은 힌트를 얻을 수도 있다. 그의 매력적인 면모를 만끽하기 위해 어느 성급한 독자가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를 펼칠 수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는 오뒷세우스를 닮은 인물조차도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아내)와 텔레마코스(아들)에 해당하는 인물인 블룸(남자 주인공)과 몰리(블룸의 아내이자 여주인공)와 스티븐(블룸의 아들 격인 또다른 주인공)이 그 소설의 주인공이긴 하다. 그러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가능하다면 다른 책들을 충분히 읽고 난 뒤에 펼쳐도 결코 늦지 않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독서 체험'이 많은 사람들일수록 그 책을 읽는 기쁨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기묘한 장치들'이 수없이 많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책은 쉽게 말하자면 수십 개, 혹은 수백 개의 문이 달린 책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떤 문은 아무리 열려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꾸준히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틀림없이 수십 개의 문들을 쉽게 밀치고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문을 통해서 또다른 통로로 이어진 수많은 문들을 끊임없이 계속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클리프턴 패디먼의 지적은 백 번 옳다. '『오뒷세이아』와는 다르게, 이 책은 읽으면 알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 4중주곡들이 오래 듣고 연구할수록 그 풍부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듯이, 오로지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만 그 비밀스러운 뜻을 드러내는' 그런 책이다.


어쩌다가 내 얘기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쪽으로 너무 치우친 듯하다. 그 책을 읽고 나서 후끈 달아올라 '멋진 서평'을 쓰겠다고 잔뜩 벼르다가도 그만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너무 성급하게 다른 책을 붙잡는 바람에 서평 쓰는 최적의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는데, 그 아쉬움을 내가 이 글을 통해 뒤늦게나마 잔뜩 풀어놓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당시 서평을 쓰기 위해 내가 다시금 펼쳤던 책 가운데는 알베르토 망겔의『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이펙트』와 단테의 『신곡』도 있었다. 그 부분을 이번 기회에 밑줄긋기로나마 옮겨 본다. 느닷없이 이런 글을 쓰게 된 직접적 동기는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때문이었다. 그 책 속에서 앨프리드 테니슨의「율리시스」를 다시 만났기 때문이다. 그의 시를 책에서 만난 건 이번이 네 번째인 듯한데, 그 시를 읽을 때마다 내 가슴도 여전히 울렁거리는 걸 느낀다. 그 옛날 한 때는 격하게 울렁거릴 때도 있었다. 아마도 테니슨의 시를 내 글에 맨 처음으로 인용할 때가 특히 더 그랬던 듯하다. 벌써 희미한 옛 추억으로 변한 듯하지만 말이다.


 * * *

(밑줄긋기)

 

젊은 시절,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인내심이 있었던 교수 시절에 나는 예일 대학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시를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테니슨의 뛰어난 극적 독백 「율리시즈Ulysses」를 외우자고 제안했다. 그 시는 외울 만한 가치가 있고 외우고 있으면 그 사실만으로도 비판적 통찰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 시는 '율리시즈'가 등장하는 다른 시들을 떠오르게 한다. 호머의 『오디세이Odyssey』, 단테의 『신곡La Divina Commedia』중 「지옥Inferno」,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Troilus and Cressida』, 그리고 밀턴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사탄으로 변형된 율리시즈 등.

 

테니슨은 가장 친한 친구였던 아서 헨리 할람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지만 「율리시즈」를 통해 의도적으로 삶을 계속해야 하는 필요성을 표현했다. 테니슨이 쓴 멋진 시들 중에는 「인 메모리엄In Memoriam」이나 「아서의 죽음Morte d' Arthur」처럼 아서에 대한 비가로 구성된 작품들이 많다.

 

(중략)

 

나이 든 많은 남자들은 수세기에 걸쳐 남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이런 영웅적인 태도로 자기 삶을 반추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율리시즈는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한 웅변가여서 그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쉽게 그 생각을 바꾸고 만다.


 

나는 여행을 그만두고 쉴 수가 없어:

인생의 술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야 해, 언제나 나는

큰 기쁨과 고통을 맛보았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또는 혼자서, 육지에 있을 때나 거친 물살을 뚫고 비를 실은 하이데스 성좌가

희미하게 보이는 바다를 분노케 할 때에도: 나는 이름을 얻었지

언제나 굶주린 가슴을 안고 방랑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알게 되었어:도시들과

색다른 풍물과 기후, 지방과 중앙의 평의회들

그리고 그 중에서 무시당하지 않고 영예를 누린 나 자신도:

그리고 내 적수들과 겪은 전투의 기쁨도 맛보았지,

저 멀리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바람 거센 트로이의 전쟁터에서,

나는 내가 겪은 모든 일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지.

그러나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치, 그것을 통해

아직 여행해 보지 못한 저 미지의 세계가 빛난다, 그 세계의 지평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영원히 사라진다.

얼마나 지리한 삶인가, 여행을 중지하고 끝장낸다는 건!

닦지 않고 녹슬게 내버려 두고, 써서 빛내지 않는다는 건!

마치 숨쉬는 것이 인생인 양! 삶 위에 삶을 쌓는다는 건

너무나 보람없는 일일 거야. 그리고 이제 내게 그러한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시간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줄 수 있다면

저 영원한 침묵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3년이란 세월을 이곳에서 썩는다면 죄악일 거야.

이 백발의 정신이 열망하는 것은

진리를 따라 유성처럼

인간 사고의 극한 그 너머로 가는 것일진대.


 

독자는 이 시에서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자신이 영웅과 동일시됨을 느낀다. 이 부분의 에토스Ethos(예술 작품의 윤리성)는 헤밍웨이적 코드, 즉 삶은 마지막까지 지속되어야 함을 예언하고 있다. 물론 헤밍웨이적 투우사나 사냥꾼을 율리시즈라는 영웅 중의 영웅과 비교할 수는 없다.

 

(중략)

 

테니슨이 원전으로 삼았던 것은 『오디세이』중의 영적인 극적 독백과는 다른 단테의 「지옥」칸토26이다. 여기에서 율리시즈는 계율을 위반한 모험가로 묘사되었다. 단테의 율리시즈는 남자를 돼지로 만든 마녀 키르케를 떠나지만 페넬로페와 이타카로 돌아가지 않고 알려진 세상의 끝 너머 지중해를 뚫고 마침내 대서양의 혼돈 속으로 들어간다.


저기 항구가 보인다. 돛이 바람에 부푼다.

저 망망대해에 어둠이 깔린다. 나의 선원들…

나와 고락을 같이하고, 함께 일하고, 함께 생각을 나눈 영혼들,

그대들은 언제나 장난스럽게 반가이 맞이했지 ㅡ

저 천둥과 햇볕을, 그리고 거침없는 가슴과 이마들을

서로 맺대었지 ㅡ 이제 그대들과 나는 늙었어.

허나 노년에도 그에 따르는 위엄이 있고 해야 할 과업이 있지.

죽음이 모든 것을 끝낸다. 그러나 그것이 오기 전에

무엇인가 고귀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신들과 겨루었던 대장부에 손색이 없도록.

저 해안 절벽에서 등대 불이 반짝이기 시작하는군.

긴 하루가 저물어 가는구나: 큰 달덩이가 천천히 떠오른다.

깊은 바다는 수많은 소리를 내며 신음한다. 벗들이여, 떠나세.

신천지를 찾아가는 일이 아직 너무 늦지는 않았으니,

배를 바다로 밀어 내세. 모두 정위치에 자리를 잡고

노로 물결을 세게 쳐서 바다에 이랑을 만드세.

내 목표는 저 해지는 곳. 저녁 별들이 미역감는 곳 너머로 노 저어

가는 것이야 ㅡ 죽는 날까지

해류가 우리를 저 수평선 밑으로 휩쓸어 버릴지도 모르지.

아니면 극락에 기항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거기서 옛날 우리가 알았던 저 위대한 아킬레스를 만나게 되겠지

지금 우리에게 많은 게 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게 남아 있어.

이제 우린 옛날 천하를 호령하던 그 힘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역시 우린 우리야.

그건 한결 같은 영웅의 기개,

시간과 운명 때문에 약회되긴 했지만, 강한 의지를 가지고

노력하고 탐색하고 발견하면서 결코 굴복하지 않는 정신이야.

 

 

이 위대한 시를 어떻게 읽을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야기한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시를 계속해서 읽어야 할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위대한 시가 주는 즐거움은 실로 다양하다.


테니슨의 시 「율리시즈」는 내게 끝없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가 타인과 교류를 하는 데 있어서 시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처럼 기묘한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Idelism일 뿐이다.

 

고독은 흔히 우리가 처한 상황을 나타낸다. 우리는 어떻게 그 고독 속에서 살 것인가? 시는 우리 자신에게 보다 명료하고 완전하게 말하며 그 말을 잘 엿들을 수 있도록 도와 준다. 셰익스피어는 그런 엿듣기의 대가였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테니슨의 율리시즈와 마찬가지로 그런 엿듣기에 있어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타자, 혹은 우리 안의 가장 훌륭하고 오래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우리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시를 읽는다. 그럼으로써 보다 충분히, 그리고 미묘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106∼113쪽)

 

 - 헤럴드 블룸, 『교양인의 책읽기』, <2. 시> 중에서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책 속에서 만나는 건 테니슨의 시집을 포함하면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시를 만날 때마다 언제나 반갑다.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옮겨 본다.


 * * *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

 

조이스는 버젠에게 자신이 『오디세이아』에 기반을 둔 책을 하나 쓰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인물'의 일생 중 열여덟 시간을 다룰 것이라고 말했다. 조이스는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묘사된 적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리스도, 햄릿, 파우스트 모두 삶의 완전한 경험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여성과 함께 살아보지 못한 독신자로, 햄릿을 아들이었을 뿐 남편이나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한 총각으로, 파우스트는 젊지도 늙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가족도 없이 '언제나 그를 자기 옆구리나 발꿈치에 매달고 다니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저지당하는 한심한 자로 내몰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목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라에르테스에게는 아들이고, 텔레마코스에게는 아버지이며, 페넬로페에게는 남편이고, 칼립소에게는 연인이며, 트로이아를 포위한 그리스 전사들에게는 전우이고, 이타카의 백성들에게는 왕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하지만, 지혜와 용기로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더 나아가 조이스는 버젠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오디세우스가 전쟁터에서는 용감한 전사이며 끝까지 전투를 지켜보기로 결심했지만, 전쟁에 참여하기 전에는 나귀와 황소를 함께 멍에로 묶어놓고 밭을 갈면서 미친 척하며 병역을 기피하려고 노력했던 협잡꾼이라는 사실 말이다.(하지만 징병 담당자가 그의 쟁기 앞에 어린아이였던 텔레마코스를 놓자 그의 사기 행각은 탄로났다.) 이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가 아들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여자들 사이에 숨겼을 때, 그 여장(女裝)을 한 영웅이 오디세우스가 가져온 여러 선물들 중에서 방태와 창을 고르는 것을 보고 탄로났더라는 이야기와 짝을 이룬다.(276∼277쪽)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가 자신이 창조한 '불멸의 예술작품'의 주인공으로 '오디세우스'를 고른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의 작품『율리시스』에 딸린 주석에 따르면, 그는 일찍이 벨비디어 중학 시절에 오디세우스 장군에 관해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는 제목으로 수필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오디세우스는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가장 복잡한 인물들 중 하나이다. 『일리아스』에서 그는 신중하고 합리적인 전사이다. 또한 유능한 외교관이었기에 아가멤논의 화해 요청을 아킬레우스에게 전할 수 있었으며, 수사(修辭)의 달인이라 청중을 더욱 놀라게 하려면 언제 침묵해야 하는지도 아는 사람이었다. 프리아모스의 오랜 조언자였던 안테노르는 오디세우스가 다중 앞에서 말할 때, 처음에는 뻣뻣이 선 채 눈을 땅에 고정시킨 뒤 연설을 터뜨린다고 서술한다.

 

그대는 말했을 것이오. 무뚝뚝하고 틀림없이 생각 없는 자일 거라고.

그러나 그가 우렁찬 목소리를 가슴속에서부터 토해내면서

겨울철에 휘날리는 눈보라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하자,

그다음에는 오디세우스에게 논쟁을 걸지 못했지요, 그 누구도!


 - 『일리아스』, 제3권 220∼223행


(나의 생각)


오디세우스야말로『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 '모두' 등장하는 진정한 영웅이다. 아킬레우스도 『오뒷세이아』에 등장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고작 '저승'에서 아주 잠깐 얼굴을 내밀 뿐이다. 오디세우스의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상은 유명 화가의 그림으로도 살필 수 있다 ☞ http://blog.aladin.co.kr/oren/6972956


 

 

 

단테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

 

일단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로마에 이르렀을 때, 영웅의 본성이 변했다. 물론 다른 모습으로 변한 오디세우스의 그리스적인 전례도 있었다. 이는 기원전 415년에 에우리피데스가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에서 그를 폭력적이며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군인으로 그렸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작품에서의 오디세우스는 사악하고 자만심이 강한 자로 묘사되며, 로마인들의 마음속에서 동지중해 지역의 영악한 그리스 사람들과 겹쳐졌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해 로마인들은 뿌리 깊은 반감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길리우스는 오디세우스를 무정한 약탈자이자 '범죄의 달인', 말하자면 그리스의 모리아티로 묘사했다. 오디세우스는 이 세 번째 인격성을 입고서 유럽 문학에 들어왔다. 단테는 오디세우스를 그의 동료인 디오메데스와 싸잡아 비난한 뒤 지옥의 여덟 번째 계로 보내버렸다. 이곳에는 사기 행위의 조언자들과, 다른 자들에게 도적질하라고 부추기는 영적인 도적들이 영원히 타오르는 화염 속에 봉인된 채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내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워버렸던 탐욕스러운 열정이 이제는 외부에서부터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이 혀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을 탐욕에 불타오르게 했다면, 이제는 불꽃의 혀들이 그들을 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단테가 직관적으로 오디세우스로 하여금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완수하도록 만드는 곳이다. …… 테이레시아스는 오디세우스에게 말한다. 만약 그가 특정한 조건들을 만족시킨다면 이타카에 도착하는 것은 물론,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집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은 그의 운명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인다. 또한 오디세우스는 "한 번 더 멀리 나가려는" 충동을 느낄 것이며, 마지막이자 치명적인 여행을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단테가 묘사한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은 단테가 그때까지 썼던 모든 시구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워서, 영어로 번역할 수 없을 정도이다.

 

* 알베르토 망겔의 책에는 실리지 않은 단테의 『신곡』「지옥편」에 등장하는 '오디세우스의 마지막 모험'을 덧붙인다. 그 책의 '주석'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항해 이야기는 문학적, 역사적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단테의 창작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직 한 척의 배에 의지해

늘 나와 함께했던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깊고 넓은 바다로 나왔소.

 

멀리 에스파냐와 모로코까지 이쪽 해안과

저쪽 해안을 보았고, 이 바다에 몸을 적시는

사르데냐와 다른 섬들도 보았소.

 

나와 동료들은 늙어 갔고 몸도 둔해졌다오.

그 무렵 우리는 그 누구도 넘어가지 못하도록

헤라클레스가 표지를 꽂아 둔

 

비좁은 어귀에 도착했소.

오른쪽으로는 세비야를 떠난 뒤였고

반대쪽으로는 세타를 떠난 뒤였소.

 

나는 이렇게 말했다오. '오, 형제들이여!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드디어 우린 세상의 서쪽 끝에

다다랐다. 우리에게 생명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태양의 뒤를 좇아 사람이 살지 않는

세상을 찾아가려는 마음을 버리지 마라!

 

그대들의 혈통을 생각하라! 그대들은

짐승처럼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덕과 지혜를 따르기 위해 태어났다.'

 

그 짧은 연설에 동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욕망에 불타

나중에는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을 정도였다오.

 

선미를 아침에 두고 우리는

미친 듯 파닥거리는 날개처럼 노를 저어서

계속 왼쪽으로 왼쪽으로 항해했소.

 

밤에는 다른 극의 모든 별들이

보였소. 우리 극의 별들은 낮게 내려와

바다의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소.

 

우리가 그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뒤

달 아래의 빛이 다섯 번이나

켜졌다가 다시 꺼졌을 무렵,

 

산 하나가 멀리 희미하게 나타났는데,

어찌나 높이 솟았던지

그런 산을 본 적이 없었소.

 

우리는 기뻤소. 그러나 기쁨은 금방 통곡으로

바뀌었다오. 그 낯선 땅에서 풍랑이 일어나

뱃머리를 들이받았기 때문이오.

 

풍랑은 우리 배를 바닷물과 함께 세 바퀴 돌게 했다오.

네 바퀴째에 선미가 높이 솟아오르더니 뱃머리에서 떨어져,

마침내 바다가 우리 위로 덮쳐 왔소.

 

하느님께서 원하셨던 대로였다오.


 -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지옥편> 제 26곡 100∼142행


(나의 생각)

 

단테의 『신곡』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도 수없이 자주 인용된다. 내 기억으로는, 성서와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자주 인용되는 작가가 단테였던 것 같다. 호메로스와 단테와 제임스 조이스는 서로 무척이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6세기가 더 지난 뒤, 앨프리드 테니슨 경은 활기차고 감동적인 개작본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테가 이룬 성취에 충실하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작품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노년은 아직 그 영광과 노고를 간직하고 있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닫는다. 그러나 끝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다.

고귀한 어떤 일이 여전히 완수될 수 있으니,

신과 투쟁했던 사람들은 흉한 것이 아니다.

빛은 반석들로부터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긴 하루가 저물어간다. 느린 달이 솟아오른다. 깊은

신음이 수많은 목소리와 함께 맴돌고. 오라, 내 친구들이여,

더 새로운 세상을 찾기에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니다.

밀어버려라, 그리고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고 앉아서 쳐라

울려 퍼지는 밭고랑들을. 일몰 너머로 그리고

서쪽 모든 별들이 몸을 담그는 저 욕조들 너머로

돛을 펼치려는 나의 계획은 내가 죽을 때까지 유보되어 있으니.

해협들이 우리를 휩쓸어 침몰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행복한 작은 섬에 닿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위대한 아킬레우스를 볼 수도 있다.

비록 많은 것들을 거두어갔지만, 많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지금은 그 옛날 땅과 하늘을 움직였던

그 힘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지금 있는 그대로이다.

영웅적인 심장들의 한가지로 똑같은 기질,

시간과 운명에 의해 약해졌지만, 투쟁하고, 탐색하고,

찾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의지 안에서만은 강하다.


(나의 생각)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는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도리어 '시적 운율과 감흥'을 떨어뜨리는 듯하다. 시인의 번역이 아니니 그럴 만하다 싶지만 번역된 시를 읽을 때마다 매번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


케임브리지 대학교 시절에 고전에 빠져 있던 테니슨은 단테에게 비난받은 왕을 자신의 호메로스적 원천으로 되돌려 보낸다. 오디세우스는 '여행에서 벗어나 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량함에 비해 너무 영악한 부랑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다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담당해야만 한다. 자신의 길었던 여행을 요약하는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아무도 안'이라고 소개했던 귀향 병사에서, 집으로 와서도 다시 한 번 더 항해를 떠나려고 열망하는 왕으로 돌아온 과정을 요약하면서 "나는 하나의 이름이 되어 버렸다."라고 말한다. 페루의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요사는 이렇게 썼다. "오디세우스가 상징(또는 대표)해왔던 수많은 것들 중에 변함없는 것 하나가 서양의 문학 안에 있다. 한계를 제거하며 '가능한 것'에 종속되는 대신, 모든 논리에 반하여 불가능한 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인간들이 가지는 매력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길고 시적인 번안에서, 오디세우스는 테니슨의 번안에 나오는 해당 주인공보다 더 삭막한 모습으로 변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찾아다니는 방랑자이자 카멜레온과 같은 인물로서 ㅡ 테니슨의 시행에 나오는 대로 ㅡ "내가 만났던 모든 것의 한 부분"이다. 그는 왕이자 군인이고 연인이며, 아프리카에 유토비파적인 공동체 사회를 건설한 불행한 인물이다. 그러나 이 오디세우스에게는 실패가 경험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저 타자(他者), 즉 빙하로 뒤덮인 북극의 황무지에서 삶을 마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우스는 남극의 황무지에서 씻겨나간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은 『신곡』에 있는 단테의 말을 메아리로 울려댄다.

 

그때 살점은 녹고, 시선은 굳어버렸으며, 심장박동은 멈춰버렸다.

그리고 그 위대한 마음은 그것의 거룩한 자유의 정상으로 뛰어올랐고,

텅 빈 날개로 퍼덕거렸으며, 그리고 난 다음 똑바로 위를 향해 대기를 뚫고

높이 치솟았고, 그 마지막 새장, 그것의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했다.

모든 것이 연약한 안개처럼 흩어졌다, 오직 하나의 용감한 외침만이

짧은 시간 동안 고요하고 무지몽매한 물속에 걸릴 때까지.

"전진하라, 내 용사들아. 돛을 올려라, 죽음의 산들바람이 순풍으로 불어온다."


(나의 생각)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오디세이아』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가 쓴 다른 많은 작품들에 비해 그리 많은 독자를 확보한 책은 아닌 듯하다. 나도 여태 안 읽었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번 읽고 싶다.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호메로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아니며, 다시 만든 이야기도 아니고, 모방한 작품이라고 할 수도 없다. 새뮤얼 존슨 박사는 1765년에 쓴 저작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학 체계의 완벽함은 곧 드러났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인간 지성의 공통된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덧붙여 말한다면, 국가와 민족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 지성은 호메로스가 이야기한 사건들의 순서를 바꾸고, 그가 만든 등장인물들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며, 그의 감성을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저술들에 대해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존경은, 지나간 시대의 우월한 지혜에 대한 경솔한 신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에 대한 우울한 확신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정받았으며, 또 의심할 수 없는 입장들의 결론이다. 즉 오랫동안 알려져온 것은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이고, 가장 많이 고려된 것은 가장 잘 이해된 것이라는 말이다."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입장을 인정하는 일 외에 다른 것도 했다. 그는 모든 시대의 모든 남자들이 수행했던 근본적인 모험 이야기를 다시 상상했다. 그가 짝지어놓은 것은 오디세우스와 블룸 사이였지, 호메로스와 조이스 자신 사이였다고 볼 수는 없다. 즉 창작자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기보다는 창작물들 사이에 짝을 지어놓았다는 말이다. 다른 작가들은 번역과 치환, 투사를 통해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지만, 조이스는 '다시 시작함으로써' 호메로스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나의 생각)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대한 알베르토 망겔의 깊이 있으면서도 풍부하고 예리한 해석이 참으로 마음에 든다. 새뮤얼 존슨 박사의 탁월한 견해에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헤럴드 블룸이 존슨 박사를 두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스승'이라 부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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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면서 되살펴 보니 앨프리드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인용했던 글이 이미 세 편이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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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7-04-2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일리아스>를 읽었는데 전집의 한 권으로 읽었고 지금 갖고 있지 않아요.(제 기억이 확실한가 싶어서 제 독서목록노트로 확인했음.)
두꺼운 책의 사진을 보니 탐나기는 하지만(책이 잘 생겨서) 이젠 두꺼운 책을 읽어 낼 자신이 없어서 300쪽 내외의 책만 산답니다. 300쪽 이내의 책을 더 좋아하고요. 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두꺼운 고전에 대해 글을 쓰시는 오렌 님의 서재에 오면 책이 더 좋아지니, 책을 막 사고 싶으니 이건 무슨 일일까요?

oren 2017-04-22 23:21   좋아요 0 | URL
페크 님께서 오래 전에 읽었던 『일리아스』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몹시 궁금합니다. 1980년 겨울에 제가 처음으로 읽었던 『일리아스』는 아직도 제 눈 앞에 선하기만 한데 그 모습은 온데 간데가 없네요. 그 당시 읽었던 책은 판형이 지금보다 조금 작으면서도 몹시 똥똥한 모양이었더랬죠. 읽던 페이지를 펼쳐 놓고 양쪽으로 힘주어 움켜잡지 않으면 자꾸만 책이 덮이려고 용을 쓰는 압력도 만만치 않았던 기억도 나고, 또 무엇보다도 세로 판형이었고요. 그 책이 아직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인명이나 지명이 지금과는 꽤나 다르고 낯설게 번역되어 있는 걸 보고, 세월의 간극을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을 텐데 말이지요. 책 사진들을 이렇게 찍어둔 것도 먼 훗날에는 다시금 우리들 눈에 생경하게 비치는 걸까, 그게 문득 궁금해집니다.

qualia 2017-04-2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oren 님의 윗글만으로도 오뒷세우스의 모험의 여정이 장대하고도 웅혼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인용해주신 여러 편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 혹은 감동의 격랑을 느꼈습니다. 글 혹은 시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oren 님의 인용을 거쳐 부분적으로만 읽을 뿐인데 이토록 꿈틀거리는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열정이라니~!


oren 2017-04-23 00:37   좋아요 0 | URL
qualia 님께서 격하게 호응해 주시니 싯구절들을 부지런히 옮긴 보람을 느낍니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서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오뒷세이아』가 무척이나 자주 인용되는데요. 조이스가 그 기나긴 소설에서 가장 처음으로『오뒷세이아』를 인용한 부분만 봐도 그 소설이 벌써 심상치 않습니다. ‘바다‘에 대한 두 번째 인용인 ‘탈라타! 탈라타!‘에서는 단번에 독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활짝 열어젖힐 정도입니다!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를 읽은 독자들이라면 ‘바다! 바다!‘ 하고 외치는 크세노폰 군대의 외침이 얼마나 격렬하면서도 벅찬 외침이었는지를 결코 모를 수 없기 때문이지요.

* * *

ㅡ 맹세코! 그는 조용히 말했다. 바다는 앨지가 부르듯, 그대로가 아닌가: 위대하고 감미로운 어머니 말이야? 코딱지초록빛 바다. 불알을 단단하게 하는 바다. ‘에피 오이노파 폰톤‘(Epi oinopa ponton. 그리스어. 호메로스가 『오뒷세이아』에서 바다를 묘사한 말, ‘포도주빛 바다‘라는 뜻). 아 데덜러스, 그리스 사람들 말이야! 내가 자네한테 가르쳐 줘야겠다. 자네는 그걸 원문으로 읽어야 하네. ‘탈라타! 탈라타!‘(Thalatta! Thalatta! 그리스어,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저서 『아나바시스』에서, 그가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의 지도자로서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와의 항쟁을 마치고 흑해에 당도하여 바다를 보고 부르짖었다는 함성) 바다는 우리들의 위대한 어머니야. 와서 보게나.
-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제1장 탑(텔레마코스)> 중에서

겨울호랑이 2017-04-23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작품에 대한 이해없이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어려워했던 기억이 나네요..oren님 리뷰를 통해 그 전에 넘어야할 산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

oren 2017-04-23 00:50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 님께서는 예전에 이미『율리시스』를 읽으셨군요. 그것만으로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이 책을 볼 때마다 저는 클리프턴 패디먼의 친절한 안내와 부단한 격려의 말을 좀체로 잊을 수 없답니다. 그 양반 덕분에 이 책을 끝까지 붙들고 읽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니까 말이지요.

* * *

주석서를 읽고 나서도 『율리시스』는 읽기가 쉽지 않다. 모든 문장, 생략된 문장, 미세한 의미, 암유, 혹은 앞에 나온 내용들에 대한 간접적 언급 등을 모두 이해하려고 들지 마라. 읽을 수 있는 데까지 읽어라. 그런 다음 책을 내려놓았다가 1년 뒤에 다시 시작하라.

조이스는 이 기념비적 작품을 위하여 새로운 문학적 테크닉을 많이 개발했다. 가령 내적 독백, 의식의 흐름, 패러디, 꿈과 악몽의 시리즈, 말장난, 신조어, 비관습적인 구두점 등. 평범한 작가는 등장인물의 생각을 선별하거나 요약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이스는 시냇물 같고, 꿈같고, 형체 없는 흐름을 가진 생각들 그 자체를 독자에게 전달한다.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이다. 또 독자에게 큰 소득을 안겨줄 것이다.

겨울호랑이 2017-04-23 01:11   좋아요 0 | URL
^^: oren님 덕분에 다시 「율리시스」를 들고 싶다는 용기가 나네요^^: 「율리시스」공략을 위해 메꿔야할 해자도 알게 되었으니 조급한 마음 대신 돌아가는 여유를 가져보려고 합니다^^: 격려와 좋은 길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oren님^^!

oren 2017-04-23 11:26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 나중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을 더 읽고 난 뒤에, 꼭 다시 잊지 않고 이 소설을 다시 찾아 읽으리라‘는 다짐을 거듭 하게 되더군요. 독자들이 ‘재독, 삼독을 위해 그런 마음속 다짐을 품게 만드는‘ 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