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이 다 독자들만큼 따분한 것은 아니다. 어떤 책에는 어쩌면 우리의 현 상황에 딱 들어맞는 말들이 들어 있을 가능성도 크다. 만약 우리가 이 말들을 정말로 듣고 이해할 수만 있다면 아침이나 봄보다 우리의 삶에 더 큰 활력을 줄 것이며,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측면을 보여줄지 모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권의 책을 읽고 자기 인생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던가! 우리의 기적들을 설명해주고 새로운 기적들을 계시해줄 책이 어쩌면 우리를 위하여 존재할 가능성은 크다. 지금 내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어느 책에 표현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 * *
나는 밑줄긋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늘상 펜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게 어느새 버릇이 되었다. 때때로 펜을 손에 쥘 수 없는 환경에서 책을 읽을라치면 마음 한구석이 조금 불편할 정도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책을 읽는 시간의 대부분을 펜과 함께 보낼 수 있는 형편에 놓여 있다. 펜조차 붙잡을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좀체로 드물기 때문이다.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는 습관이 붙은 게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하기 어렵다. 되돌아 보면 나도 꽤 오랜 시간 동안 책을 무척이나 '아끼며' 읽었던 세월이 있었다. 책에다 밑줄을 긋는 일이 마치 책을 더럽히거나 학대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줄을 긋더라도 연필로 조심스레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었다.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밑줄을 긋더라도 극히 조심스럽게 책을 대했다. 그 증거가 바로 아래 사진이다.

(1978년에 초판으로 사서 읽었던『불확실성의 시대』라는 책이다. 고1때 산 책이 아직도 용케 내 수중에 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 뭔가 좀 더 능동적인 책읽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책을 그토록 아끼며 읽는다고 해서 내게 무슨 특별한 보답이 따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다 읽은 책을 남에게 팔 생각도 없는데, 굳이 내가 스스로 나서서 책을 읽은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애쓸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그 무엇보다도 인터넷 서재에서 글을 쓰게 되면서 자연스레 찾아왔다. 글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건축재료나 장식물로 쓰기 위해서라도 '밑줄'을 책 속에 뚜렷하게 새겨넣을 필요가 있었다.
책 속에 밑줄을 적극적으로 긋기 시작하자 차츰 거기에 더해 내 생각을 조금씩 덧붙여 써넣는 일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어떨 땐 아예 책의 말미에 '책을 읽고 난 직후의 생생한 느낌'을 직접 써놓을 때도 있었다. 어떤 책을 읽든지 그 책을 끝까지 다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이 가장 생생하기 마련인데, 그 느낌들을 따로 리뷰나 페이퍼로 쓸 때도 있었지만, 그런 작업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어느새 '생생한 느낌'이 차츰 퇴색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몰론 오래 전에는 이런 감상들을 기록하는 일들이 대부분 '독서 노트'를 통해서 이뤄졌었다. 책에서 발견한 인상적인 구절들도 마음껏 옮겨 적을 수 있고, 책을 읽는 동안에 수시로 떠오르는 온갖 느낌과 생각들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공간 가운데 '독서 노트'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2003년쯤부터 작정하고 쓴 독서노트들. 대학노트를 한꺼번에 마련한 덕분에 외관이 가지런한 편이다.)

(『몽테뉴 수상록』을 읽는 동안에 써내려간 독서노트. 단순히 옮겨 쓰는 일조차도 나는 즐겁다.)

(내 스스로 만들어 본 일종의 '색인 자료'다.『몽테뉴 수상록』에 담긴 내용을 인용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작년에 카프카의 『성』을 읽으며 끄적거렸던 내용이다. 언젠가는 꼭 '독후감'을 남기고 싶은 소설이다.)

- 나는 '독서 노트'뿐만 아니라 다종다양한 '수첩'들도 평소에 애용하는 편이다. '기록'은 늘 중요하니까...
저 수첩들도 나를 따라 많이도 돌아다녔다. '산행수첩'은 '백두산'은 물론 '히말라야'에 오르기도 했고,
'여행수첩'은 이집트의 사막과 실크로드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 '여행수첩' 속 내용이다. 이집트 여행때 기록했던 내용들이다. 이걸 펼치면 그때의 기억들이 확 되살아난다.)

(2009년 5월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 동부와 캐나다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에 기록했던 내용들이다.)
이렇게 옛날 일들을 돌이켜 보니 문득 내가 밑줄긋기에서 필사로 한걸음 더 내디딘 때가 생각난다. 그건 바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언젠가는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뤄두었던 『월든』을 그때 마침 읽기 시작했는데, 그만 그 책이 온통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나는 그 책을 읽는 동안 어느 한 페이지도 도무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온통 밑줄긋기와 '내 생각 써 넣기'로 가득 채우고야 말았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킨 책이 언제 또 있었나 싶었다. 이 책은 결코 한 번 읽고 말 책도 아니고, 그저 밑줄긋기로만 그칠 책도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책을 다 읽은 직후에 곧장 그 책을 다시금 펼쳤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내 마음에 드는 대목을 중심으로 필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 증거가 바로 다음의 글이다.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무슨 일에든 첫 발을 내딛기가 힘든 법이다. 한 번 책을 베끼는 데 재미를 들이기 시작하자 도무지 겁날 게 없었다. 그 이후로는 어떤 종류의 책이든 내 마음에 쏙 드는 책만 만나면 '밑줄긋기' 뿐만 아니라 '필사'까지도 기어이 끝내야 직성이 풀렸다. 그런 책들을 읽을 땐 이미 '독서노트'에도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을 옮겨 적는 일도 허다했는데 말이다. 필사를 하지 않으면 늘 뭔가가 허전했다. 그 책 속에 담긴 인상적인 대목들이 생각날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다시 찾아 읽기 위해서, 그리고 가끔씩 필요할 때마다 내가 원하는 대목들을 재빨리 '인용'하기 위해서는 '디지털화된 필사'가 최고였다. 그렇게 밑줄긋기와 함께 '필사까지 마친' 책들은 다음과 같다.

(『몽테뉴 수상록』은 1,33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필사'를 통해 큰 보람을 느낀 책이기도 하다.)

(『증권분석』은 초판본(832쪽)과 제3판(943쪽) 두 권 모두 필사했다. 저자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고 싶었다. )
이들 말고도 내가 끊임없이 '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책들도 있다. 그 책들을 필사하고 싶은 욕망과 새로운 책을 읽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할 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책들이 앞서 이미 필사를 마친 책들과 비교해서 어디 하나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그 책들이 나에게 감명을 덜 줬다고 말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 책들을 베껴쓰는 일을 중도에 포기하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는 얘기다. 단지 그런 책들은 내 감정의 변화에 따라 늘상 오르내리기 마련인 필사의 열망에 때맞춰 부응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내 스스로 합리화할 때도 있다.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어느 이름 모를 필사자는 8세기 어느 때인가 필사를 끝내면서 "얼마나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손가락 3개는 열심히 옮겨 적고, 두 눈은 끊임없이 보고, 혓바닥은 말을 하고, 온몸은 산고(産苦)를 치른다"고 적고 있다. 필사자들은 일을 할 때 자신이 옮겨 적는 단어를 하나하나 발음함으로써 혓바닥으로 말을 했던 것이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
그런 책들 가운데 특히『돈키호테』는 내가 소설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필사의 열망을 잠시나마 품었던 작품이다. 그만큼 감명 깊게 읽었고 기억해 둘 만한 놀라운 대목들도 정말 많이 만났었다. 하지만 필사하기엔 그 소설이 너무나 두꺼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아직도 소설 보다는 다른 분야의 책들을 더 많이 필사하고 싶은 희망도 있었다. 내가 장차 소설을 쓸 일도 없는데, 소설 작품을 읽으면서 아무리 밑줄을 많이 그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한 페이지씩 넘겨 가며서 고된 필사를 할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

어쨌든 이제까지 필사를 마쳤거나 어느 정도로까지 필사를 진척시켰던 책들을 이번 기회에 한꺼번에 불러내 봤더니 그 책들의 분량이 결코 적지 않았다. 많은 시간들을 아낌없이 투자하며 필사를 하는 현장은 내 방 컴퓨터 책상 앞이다. 바로 그 위에 내가 필사한 책들을 쌓아 올리고 보니, 모니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책의 두께가 불어났다.

(왼쪽 두 줄이 필사를 마친 책들이고 오른쪽 한 줄은 필사를 끝내지 못한 책들이다.)
저 책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필사를 하는 동안에 느꼈던 힘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를 때도 없지 않지만, 도대체 저 책들이 언제 나한테 붙들려 와서 저런 고생을 하고 있나 싶은 측은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저 책들이 내가 필요로 할 때면 아무 때나 끌려 나와, 나의 손가락의 움직임과 키보드의 동작과 모니터의 감시를 거쳐 통신선을 타고 저 멀리 어느 깊숙한 저장고 속으로 들어가 곤히 잠자고 있다가, 내가 어디서라도 부르기만 하면 순식간에 달려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갑자기 알베르토 망겔이 말했던 '전자 미로' 생각이 떠오른다. 망겔이 쓴 글이 언젠가 내 손가락의 힘에 의해 전자 미로에 붙잡혔다가 이렇게 여기서 다시 느닷없이 불려나와 민낯을 다 드러내 놓고 있는지를 저자는 아마도 새까맣게 모르고 있으리라.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
내 경우를 말하면, 책을 읽다가 남기게 되는 해설이나 메모는 타인의 기억력을 대신해 주는 워드 프로세서에 보관한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떠돌며 인용구나 이름을 끌어낼 수 있었던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처럼, 나도 화면 뒤편에서 끼르륵 끼르륵 낮은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전자 미로로 들어간다. 워드 프로세서의 기억력의 도움으로 나는 저 유명한 나의 선조들보다 더 정확하게(정확성이 중요하다면) 그리고 더 많은 양을(양이 가치있는 것이라면) 기억할 수 있지만, 수많은 해설 가운데서 중요도를 판단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으로 남아 있다.
- 알베르토 망겔, 『독서의 역사』중에서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 '단체 사진'을 찍기 위해 잠시 불려나온 책들은 이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거짓말이다, 그들은 벌써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떤 책들은 예전에 TV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거긴 그저 아무런 벽도 없는 들판 같은 곳이어서 저 책들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거의 노숙인 신세나 마찬가지다. 최근에 사들인 책일수록 그 책들은 내게 푸대접을 받는 셈이다. 저 책들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그들에게 미안하다.

오래 전부터 내게 사랑받았던 책들은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한 채 물러날 줄 모른다. 나 또한 저런 책들을 달리 낯선 곳으로 옮길 생각이 별로 없다. 저들은 내 방에서도 터줏대감 노릇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저 책들 가운데 내가 이 방에 들어앉은 15년 전 바로 그때 나와 함께 '동시 입주'를 했던 책들은 사실 별로 없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거주지를 옮길 때마다 나와 함께 동행하면서 몇 차례씩이나 나와 '동시 입주'의 영광을 누렸던 '오래된 책들'은 이미 대부분 자리를 떠나고 없다. 그런 책들 가운데는 심지어 '대학교재'들도 있었다! 다시 들춰보지도 않을 책들을 내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질질 끌고 다녔는지 아직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몸소 펜으로 꾹꾹 눌러 쓴 '노트'들은 아직까지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차지하는 면적이라도 좁으니 아직은 넉넉히 봐줄 만하다. 그 옆자리가 바로 앞서 불려 나왔던 독서노트들이 늘상 머무는 곳이다.

방금 보았듯이, 나는 이런저런 책들을 읽는 동안 나름대로는 밑줄긋기를 꽤나 열심히 해왔다. 그와 동시에 독서노트도 열심히 쓰고, 마음에 쏙 드는 책들은 필사까지 해봤다. 그와 더불어 나는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쓰면서 '여러 작가의 글'을 내 글 속에 직접 여러번 옮겨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씩은 그 내용들을 한꺼번에 올려 놓느라 '밑줄긋기'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적도 많다. 이런 일들은 어쩌면 내가 지금보다 조금이나마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애쓰는 하나의 방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서 나는 500쪽이나 혹은 1,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마저도 통째로 필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그토록 두터운 분량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다 베낀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가 판단하기로도 너무나 좋은 글들이고, 남들한테도 언젠가 한번쯤은 꼭 보여주고 싶은 욕심마저 드는, 그런 문장들만 고르고 골라서 베낀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애써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글들은 언제나 저런 위대한 작품들 속에 담긴 글을 조금도 닮지 못한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류가 낳은 비범한 천재들이고 나는 기껏해야 수많은 둔재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점을 나는 항상 인식한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앞으로도 '필사의 욕망'을 좀체로 버리지 못할 듯하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쓰는 동안에, 비록 먼 발치에서나마, 저 위대한 천재들이 쓴 글의 향기나마 희미하게 맡으면서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로선 너무나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좋은 글을 많이 읽고, 또 그들의 글을 많이 베껴쓰는 일이 '글쓰기'에 얼마쯤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함부로 부인하기는 어렵지 싶다. 그런데 좋은 글을 열심히 읽고 또 열심히 베껴 쓴다고 해서 내 몸에 벤 고약한 버릇까지 쉽게 고칠 수는 없다는 사실도 나는 차츰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퇴고도 없이 그냥 단번에 쭉 써내려간 글을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무수히 얼굴을 붉히며' 다시 고쳐 쓴다. 수없이 반복된 동어반복은 그나마 고치기라도 쉽다. 만연체로 길게 늘어쓴 글들은 '주어'와 '술어'조차 서로 뒤영켜 있어서, 그들을 서로 온전히 분리해 내기가 몹시 힘들 때도 많다.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어휘들도 수두룩하다. 니체의 말대로 '언어 오류, 혼란스러운 비유, 불명료한 생략, 상스러운 언행, 부자연스러운 문체' 등이 가득하다. 물론 이런 표현들 조차도 내 글의 결함 가운데 아주 조금만을 말했을 뿐이다.
다시 읽을 때에는
내 작품은 내게 기쁨을 주기에는 너무나 모자라서 다시 음미해 볼수록 더욱 화만 치민다.
나는 다시 읽을 때에는 얼굴을 붉힌다.
왜냐하면 많은 문장이 작가인 내가 판단하기에도
마땅히 삭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비디우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중에서
내가 이렇게 '밑줄긋기'와 '필사'에 대해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분명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책을 너무 아끼지만 말고' 과감하게 책 속에 밑줄을 긋고, 자신의 생각도 좀 적어보는 시도를 해보라는 권고를 하기 위해서다. 나는 책에다 밑줄을 긋고 내 생각들을 직접 책 속에 적어 넣는 일을 나이 사십이 넘도록 한 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게 무슨 큰 허물이 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이왕이면 책을 좀 더 적극적이면서도 능동적으로 읽자는 얘기다. 물론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만의 훌륭한 방식으로 책을 읽는 분들껜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겠지만...
끝으로, 내가 이 글 속에 많은 사진들을 포함시킨 건 물론 그 속에 담긴 책들에 대해 내가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내 책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베껴쓴 책들 이야기'를 하느라고 이 글을 이토록 길게 늘려간 일조차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라고 말한다면, 그에 대해 딱히 달리 변명할 말은 없다. 다만, 이 글 속에서 혹시라도 나를 지나치게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모습들이 은연중에 숨어들었다면, 제발 그 부분만이라도 제대로 숨어서 제대로 드러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어리석게도 나는 내 책 이야기를 하느라고 내 책을 늘겨 간 것인가! 어리석고말고,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다른 자들을 두고 나도 똑같은 말을 한다. "그들이 자기 작품에 그렇게도 자주 곁눈질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작품을 위한 애정으로 떨리고 있는 증거이고, 자기 작품을 경멸하며 박대하는 것까지도 모정다운 뽐내는 애교에 지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자기를 평가하거나 경멸하는 일은 흔히 똑같은 오만한 태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할 이유만으로도 그렇다.
-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 밑줄긋기와 필사를 함께 했던 책들.
예전에 찍어둔 사진도 있고 이 글을 쓰느라 새로 찍은 사진들도 있다.
사진을 찍은 후에 내다버린 사진들은 조금이다. 많은 사진들을 이 글에 그대로 실었다.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560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676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712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900쪽)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 124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60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65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722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776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오는 대목이다.)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810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838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918쪽)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956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696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768쪽)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862쪽)

(스티븐 핑커, 『빈 서판』, 466쪽)

(스티븐 핑커, 『빈 서판』, 732쪽)

(찰스 다윈, 『종의 기원』, 462쪽)

(아담 스미스, 『국부론』, 322쪽)

(아담 스미스, 『국부론』1186쪽)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238쪽)

(케인즈,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37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39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392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546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590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614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초판, 724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제3판, 586쪽)

(벤저민 그레이엄, 『증권분석』제3판, 804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도 나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238쪽)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272쪽)

(찰스 P. 킨들버거,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 400쪽)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258쪽, 다른 책들에서 무수히 언급되었던 유명한 대목이다.)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460쪽)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528쪽)

(니체, 『비극의 탄생 · 반시대적 고찰』,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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