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털이 자랍니다 :
빨간 피터의 고백
내 로망은 노숙자 패션'이다. 멋대로 뿌리를 내린 머리카락과 더께의 두께가 더께더께 쌓인 헝클어진 수염을 볼 때마다 아...... 감탄하게 된다. 저 모습에서 식초보다 강렬한, 혹은 겨자보다 톡 쏘는 악취만 제거한다면 만사형통이리라.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다운증후군을 앓는 이의 얼굴이 하나이듯이, 세계 어느 곳을 가나 노숙자 또한 모두 대동소이하다는 점도 노숙자 패션의 위대함'이다. 멋부리되 멋대로 걸친 옷은 자연스러워서 보기에 좋다. 물론 히피스러움을 회피하려는 모던 보이-들에게는 질색할 패션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내 취향의 색깔이 이쪽인걸. 그런데 문제는 수염이었다. 옷이야 일부러 구기거나 헤진 옷을 입으면 되지만 대머리독수리처럼 듬성듬성 자라는 수염은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였다. 신사의 완성이 명품 시계라면 거지의 완성은 수염이니까. 숱이 없는 수염만큼 꼴보기 싫은 수염도 없다. 내 경우가 그렇다.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국민 밉상이 된 이완영 의원의 수염을 떠올려보라. 나는 고민 끝에 미크로겐이라는 수염 체모제'를 구입해서 날마다 입과 턱 주변에 발랐다.

한달이 지났어도 별다른 효과는 없었지만 속는 셈치고 계속 바른 결과, 수염이 풍성해지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희망이 생겼다. 약의 도움으로 다윈의 수염에 도전해 보리라. 약의 효능이 입증되자 약을 바르는 얼굴 부위의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수염의 변화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사진으로 남겼다). 엑스맨의 울버린 수염을 상상하며 뺨에 바르기 시작했다. 얼굴 피부 내부로 깊숙이 파고든 미크로겐은 모근을 만들고 모공을 뚫고 털이 자라도록 만들었다. 울버린을 닮은 수염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미크로겐 연고 사용 전

미크로겐 사용 3주 후

미크로겐 사용 4주 후

미크로겐 사용 5주 후

미크로겐 사용 6주 후

하지만 여기서 멈췄어야 했다. 나는 내가 만든 괴물을 보고서야 박근혜의 성형 중독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이나 나나 욕심이 과했어. 긴 말 해서 무엇하랴.

시발.... 이게 뭐냐고 ! 사람들은 나를 " 빨간 피터1) " 라고 부른다. 카프카는 단편 << 어느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 >> 에서 인간이 되고 싶은 원숭이를 그려냈지만, 나는 원숭이가 되고 싶은 인간이 되었다. 후회는 없다 ■
1) 연극배우 고 추성웅의 모노드라마로 유명한 연극 << 빨간 피터의 고백 >> 은 카프카 단편 << 어느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 >> 가 원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