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쓸쓸한 청춘
1. 내가 돈 주고 산 첫 번째 책'은 썬데이-서울'이었다. 이때 내 페니스는 파이(π)를 넘지 못했다. 핑크 빛 누드가 넘실거렸다. 아랫도리가 간지러웠다.
2.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을 초등학교 6 학년 때 읽었다. 그 시절, 내 페니스는 파이(π)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였지만 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 작품에서 중요 갈등 요소로 작용하는 것이 목에 새겨진 키스마크'인데 소설은 그 성애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 아하, 이런 과정이구나. "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책에서 묘사한 키스마크가 누나 목덜미에 새겨져 있길래 나는 큰소리로 누나를 가리키며 키. 스. 마. 크 라고 외쳤다. 누나가 다가와서 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누나는 그날 한여름에 스카프'를 하고 학교에 갔다. 한여름에 스카프라니 !
3. 중 3 수학 시간'에 카프카가 쓴 변신'이라는 소설을 읽다가 수학 선생에게 걸렸다. 선생이 무슨 책이냐고 물어봐서 변신'이라고 말하자, 병신 같은 놈_ 이라며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럴 시간에 수학 공식 하나를 더 외우라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수학 시간에 열심히 삼중당 문고를 읽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수업 시간에 수학 공식 따위나 열심히 풀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는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카프카'가 당신과 나'를 연결시켜준 것이다. 이게 바로 문학의 힘'이다.
4. 옛날에는 알랭 로브그리예 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고무지우개' 라는 책을 읽기 위해서 도서관은 이 잡듯이 다 뒤진 것 같다. 이 책'은 딱 두 군데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정독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삼중당 문고에서 나온 책이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조심조심 넘겼다. 오래되어서 종이가 부서질 것 같았다. 사실, 그 소설이 좋았다는 점보다는 발견했다는 점'이 더 좋았다. 좋은 책이란 숨어 있는 책'이고, 좋은 독자란 숨어 있는 책'을 발견하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책들은 꽁꽁 숨어 있을 것이다.
5. 스무 살 무렵, 나는 어느 유부녀를 사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여자'는 그냥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였던 것 같다. 그 여자'가 내게 책을 한 권 선물했다. 신이현의 숨어있기 좋은 방'이었다. 여자는 속지에 이렇게 적었다.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소설 속 주인공 또한 행실이 좋지 않았다. 자기 변명을 교묘하게 문학적으로 포장한 최초의 여자였다.
6.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서 죽다'라는 소설을 읽었다. 리마 북동쪽으로 10km를 달리면 그곳에 새들이 비처럼 쏟아져 죽는 그런 작은 해안이 있다고 했다. 책을 덮었다.
7. 헌책방에서 카네티가 쓴 군중과권력'이라는 책을 산 적이 있다. 맨 앞장 속지 여백을 보니 책 주인이 쓴 메모'가 있었다. " 이 쓸쓸한 청춘 ㅡ " 으로 시작하는, 늘 그렇고 그런 고민이 묻어나는 문장이었다. 헌책은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재미가 있다. 피식 웃었다. 나는 앞으로 이런 촌스러운 문장은 쓰지 말아야지 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책에 메모를 하지 않는다.
8. 어느 날이었다. 민음사에서 출간된 가타리와 들뢰즈의 앙티오이디푸스'를 꺼내 읽었다. 건성건성 책장을 넘겼다. 넘기다 보니 아주 오래 전 영화표 2 장을 발견했다. 영화 제목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그 옛날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지도 못해 끙끙대던 시절에 우여곡절 끝에 함께 본 영화였다. 그때 일을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여 책을 덮었다. 술을 마셨다. 아마, 영화를 보러가던 그날 이 책'을 가방 속에 넣어두었었나 보다.
9. 카뮈와 사르트르에 열광한 적이 있다. 전적으로 이 열광은 김치수와 김화영 교수의 몫이 컸다. 김화영은 카뮈를 더 높이 평가했고, 김치수는 사르트르를 더 높이 평가했다. 카뮈와 사르트르는 라이벌이면서 동반자였다. 누가 나보고 당신은 뫼르소(이방인)'를 더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로깡탱(구토)을 더 좋아하십니까_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한참을 망설일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마치 찰리 채플린이 더 좋으냐, 버스터 키튼이 더 좋으냐'는 질문처럼 들리니까. 그래도 한 명을 뽑으라면 뫼르소'를 뽑겠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뮈가 좀더 근사했으니까. 레인코트 깃을 세우며 담배를 피우던 그 사진, 멋있었다
10. 어느 날, 생각없이 책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코멕 메카시 소설 모두 다 예쁜 말들이 생각났다. 이유는 모른다. 아비정전을 생각하다가, 장국영을 생각하다가, 장만옥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모두 다 예쁜 말들이 떠오른 것이다. 다시 읽기 위해 찾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냥......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 책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코멕 메카시가 쓴 소설을 모두 골라냈다. 핏빛 자오선, 국경을 넘어서, 평원의 도시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로드...... 하지만 여전히 모두 다 예쁜 말들은 보이지 않았다. 분실한 모양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동안 내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갑자기 생각났다. 나는 천장이 낮은 옥탑에서 산 적이 있다. 그곳에서 한 여자를 오랫동안 사랑했다. 그 여자와는 헤어졌다. 그 책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책인 즐거운 지식이 내 책장에 있는 것처럼. 기억이란 늘 이렇게 의뭉스러운 점이 있지. 생각해 보니 아비정전'도 그녀와 함께 본 영화였다.
11. 톨스토이는 싫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좋다. (이제는)사르트르는 싫고 카뮈는 좋다. 정성일은 싫고 하스미 시게히코는 좋다. 마르크스는 쉽게 썼으나 알뛰쎄르는 어렵게 썼고, 프로이드는 추리소설을 썼으나 라캉은 SF소설을 썼다. 그래도 둘 다 재미있다. 라캉보다는 푸코가 더 좋고, 데리다보다는 롤랑바르트'가 더 좋고, 공자보다는 묵자가 더 좋고, 칸트보다는 스피노자가 더 좋다.
12.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는 세계 문학 전집 맨 뒷장에 기재되어 있느 출간 목록'에서 읽은 책 제목에 노란 색연필로 밑줄을 긋는 것이다.
13. 동네 헌책방에서 새 책이나 다름없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구입했던 적이 있다. 속지에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to. ** 나에게 사랑에 대한 다른 시각을 심어준 책. 용기를 준 책. 이 책이 지금 너에게 큰 힘과 용기를 줄거라 믿는다. 항상 밝은 모습. 긍정적 사고 잃지 말자. 사랑해. p.s 늘 항상 똑같이 !! 2010.4. ** 이가. 살해당한 시체와 읽은 책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둘 다 어떤 식으로든 증거를 남긴다는 점. 밑줄을 긋거나, 페이지를 접거나, 갈피 사이에 눌린 서표의 흔적이 있거나, 혹은 잘 말린 네 잎 클로버가 있거나 하는 식이다. 읽은 책은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이 책은 읽은 흔적이 전혀 없었다. 특이하게도 출판사는 책과 함께 (소설에서 소개한 음악으로 구성된) 시디'를 책날개 안쪽에 붙여서 사은품으로 제공했는데 시디를 감싼 비닐 커버가 봉인된 상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니깐..... 여자는 남자가 선물한 책을 읽어 볼 생각도 없었고 음악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알고 있었을까 ?
14. 내가 마지막으로 읽을, 마지막 읽을거리'는 뭘까 ? 카프카? 도스토예프스키 ? 아니다, 아닐 것이다. 내가 죽기 바로 전에 읽을 것'은 내가 쓴 ( 미리 작성한 ) 유서일 것이다. 이 쓸쓸한 청춘으로 시작하는 , 늘 그렇고 그런 문장으로 끝나는, 그런 촌스러운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