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되는 대담기사를 옮겨놓는다. '2009년 문화계 결산' 대담 중 '출판계' 꼭지이다. 대담자로 섭외를 받아 지난주 목요일에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과 한 시간 반 가량 대담을 나누었고 기사는 그 내용을 간추리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2201725305&code=960100). 

경향신문(09. 12. 21) [2009 문화계 결산](7)대담 - 출판계 출판평론가 한기호와 블로거 이현우  

블로거들의 활약, 뛰어난 학술서의 부재, 추모와 소통 열풍, 자기계발서의 추락, 대안적 삶에 대한 희구. 2009년 출판계를 요약하는 말들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51)과 ‘로쟈’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서평을 올려 100만여명의 고정 접속자를 갖고 있는 이현우 박사(42·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가 지난 17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만나 올 한해 한국 출판계 등을 돌아봤다.  

# 블로거들의 활약 

한기호 = 먼저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한국출판문화상 등을 받은 것을 축하합니다.

이현우 = KBS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는데, 출판문화상까지 받아 가족들과 출판사가 좋아합니다.   

한기호 = <로쟈의…>는 우리 사회에서 정보가 생산·유통·소비되는 과정 속에 글쓰기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가장 앞서서 보여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종의 ‘블룩’(blog+book)인데, 지금까지 여행·사진 같은 실용서 위주이던 블룩이 이젠 인문학에서도 등장한 겁니다. 블룩의 인문학 방식은 지식의 원천 생산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지식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자기 혼자서는 인문학적 지식을 만들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 것을 보려고 하죠. 그럴 때 인문학 블로그에 접속하는 겁니다. 대중은 이제 지식 생산의 주종을 이룬 이른바 ‘황혼의 글쓰기’를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어떻게 볼 것인지 궁금해하는데, 그럴 때 이 선생 블로그 같은 곳을 찾는 것이죠.

이현우 =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저 같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술잡담 비슷하게 정보도 공유하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책 지식도 올려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 같은 사람이 희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하니까 조금 튀는 것 아닐까 합니다. 저는 문학 쪽을 주로 다루니까, 다른 분야에 정통한 10~20명 정도가 더 하신다면 인터넷 공간의 담론이 다양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분들은 블로그 글쓰기를 낮춰봅니다. 뭔가 진지하고 수준 높은 것은 인터넷에서 기대할 수 없다거나, 멀쩡한 것도 인터넷에 올리면 질이 떨어져 보인다는 부정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합니다.

# 좋은 학술서가 나올 수 없는 ‘학진 체제’

이현우 = 올해도 그렇지만 좋은 학술서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는 대학의 학문, 학술 담론 생산구조의 위기와 관계있습니다. 특히 학술진흥재단(학진·현 한국연구재단) 체제로 가면서 능력있는 연구자들은 다들 프로젝트에만 매달립니다.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 형식의 지식이 대량 생산되는 거죠. 그것은 좁은 학계 내부와 관리감독 기관만 보는 것이지 일반 대중들과는 괴리돼 있습니다. 출판계는 필자 찾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학진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공동연구를 하면 1년에 논문 1편을 써 3000만원 받지만, 저처럼 책을 써서 1만권이 나가도 1500만원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학진 지원에 익숙해질 경우 대중을 상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박사 실업자들이 대학, 지원기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구한 콘텐츠로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교양서를 꾸준히 낸다면 자신도 살고, 한국사회의 지적 수준도 높아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학문지원 제도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역효과를 출판계 독자들이 보고 있는 셈입니다.

한기호 =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박사급 ‘풍찬노숙자’들이 열의를 갖고 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책세상의 ‘우리시대 문고’였죠. 그런데 2006년 ‘인문학 위기’ 논란 이후 지원금이 쏟아지니 그분들이 교양서를 써 자기 역량을 발휘하기보다, 대학 내에서 눈치보고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출판의 관점에서 보면 논문형 글쓰기는 지식인들의 글쓰기가 완전히 붕괴됨을 뜻합니다. 물론 출판유통 체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온라인서점 매출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올해는 단행본의 집중도가 50%를 넘었습니다. 이는 팔리는 책 위주로 서점이 재편된다는 의미입니다. 학자들이 책을 써봐야 1000부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심화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번역서 비중이 높아집니다. 블로그를 통한 지식 생산이 이 문제의 돌파구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추모 열기와 소통의 추구

이현우 = 올해는 추모 관련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인문사회 쪽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책들 중 두 전직 대통령과 장영희 선생, 김수환 추기경 등을 추모하는 책들이 많았죠. 추모 열풍은 항시적인 건 아니어서 그런 것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기호 = 노무현 전 대통령 책이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노무현의 진실’ 같은 걸 추구하지 않았나 합니다. 생전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죽은 후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사회가 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돌아보는 것이죠. 진실과의 싸움은 달리 말하면 소통입니다. 출판계 전반으로 확장해보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것은 가족 사이의 소통이고, 심리학 책이 인기를 얻는 것은 자신과의 소통이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현우 = 소통 욕구는 항시적일 텐데, 여기에는 정치적 맥락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통 정국’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소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 자기계발서의 추락과 대안적 삶의 희구

한기호 = 자기계발서의 추락도 주목할 만합니다. 한국인들은 1997년 말 외환위기,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치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벤처열풍, 주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났죠. 하지만 카드 대란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같은 책이 그 즈음 나왔는데, 인생의 후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죠. 열심히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말년에 대해 적극 고민하자는 뜻에서 10억원 모으기 열풍 같은 것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다 좌절로 끝났습니다.  

20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성공에 대한 큰 담론은 실질적으로 포기하기 시작했죠. 이제는 관심이 행복으로 이동했습니다. 세상이 뭐라든 나만은 나름대로 즐기고 행복하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도 잘 안되면서 고독을 느끼는 상황이 됐습니다. 2007년부터 ‘자기치유’를 강조하는 책이 나왔지만 한계가 드러났고, 결국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안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꿈꿨던 게 뭔가 자성하면서 대안적 삶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책이 잠깐 사이 주목받았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같은 책에 대한 관심도 어느 정도 대안을 생각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정치·사회적 대안 외에도 궁극적으로 인간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굿바이 스바루>처럼 저널리스트가 도시 삶을 벗어나 농촌에 들어간다든지, 김용택·도법 스님의 <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는 농촌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얘기했죠. 내년에는 자기계발서와 자기치유서를 넘어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독서시장은 물론 우리 사회의 핵심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현우 = 저는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독자들을 위로하거나 만족을 주는 책보다 성찰하게 하고, 지적인 자극을 주는 책이 좀 더 필요합니다. 자기계발서 대신 심리학 책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책이 자기에게 뭔가 해주길 원하면서 읽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나에게 돈을 더 갖다주는 책이나 나를 위로해주는 책, 혹은 나를 좀 더 과시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나 결국은 비슷합니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이기적인 독서에 빠져 있지 않나 합니다.   

올해 나온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처럼 뭔가 대의에 파묻힐 수 있는 책이 더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기계발, 자기치유도 좋지만 <잃어버린…>처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책도 많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읽지는 않아도 꽂아둬야 한다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보다 <거대한 전환>이 더 많이 팔리는 사회가 앞으로 전망 있는 사회, ‘싹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대중의 독서취향이 빨리 변하지는 않겠지만, 저 같은 중간지식인들이 현상추수적으로 글을 쓰기보다 지향점을 갖고 중간에서 독자들을 자극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판평론가 한기호
광주민주화운동 참여로 학교에서 제적된 후 창비 출판사에 입사했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워 출판 현장의 다양한 문제를 짚으면서 출판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구속과 책 압수를 감수한 출판인들이 없었으면 민주화가 불가능했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학생들의 독서에 있다고 보고, 내년 3월 낼 ‘학교도서관저널’ 창간호에 힘쓰고 있다.

‘로쟈’ 블로거 이현우
독서 애호가들 사이에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에 마련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에 인문서를 중심으로 한 폭넓은 서평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블로그 글 중 문학·영화·예술·철학에 관한 것만 모아 펴낸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KBS 올해의 책 ‘눈부신 역작’부문, 한국일보의 한국출판문화상 교양저술부문 상을 받았다.(김재중·손제민기자) 

09. 12. 20. 

P.S. 대담 소개에서 '100만여명의 고정 접속자'는 접속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는 얘기가 와전된 것인 듯하다(짐작엔 이 서재의 '고정 접속자'는 수천 명 정도이다). 그리고 학술서 부진에 대한 얘기는 한기호 소장의 진단에 나대로 한 가지 원인을 덧붙인 것으로, 여기서의 '학술서'란 대중을 위한 '학술교양서'를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학진 체제' 하에서 학술논문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펠릭스 2009-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지성'에 속한 '중간지식인'의 역활과 대중 독자취향의 변화에 대한 조언이 참고가 됩니다.

로쟈 2009-12-20 21:32   좋아요 0 | URL
네, 제 역할에 대한 자리매김을 그렇게 하게 됩니다...

펠릭스 2009-12-21 15:00   좋아요 0 | URL
경향신문 23면 이군요...신문으로 보는 느낌(거물급?)이 다른데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체육학교에서 열린 유도훈련 사진도 있더군요...

Arch 2009-12-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출판문화상 받으신거 축하드려요. 경향신문에서 보고 반가웠는데^^ 올해는 로쟈님께 정말 좋은 일만 생기는 듯.

로쟈 2009-12-20 22:30   좋아요 0 | URL
국가적으론 흉사가 많은 한해로 기억되겠지만, 개인적으론 첫 책을 내고 좋은 반응을 얻은 해이기도 해서 기분이 좀 엇갈립니다...

2009-12-20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09-12-21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네요. 모쪼록 로쟈님과 같은 생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계 풍토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교수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대학풍토가 형성되어야 할텐데 말이죠...

로쟈 2009-12-21 08:35   좋아요 0 | URL
기대할 수 있는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이상적으론 그렇죠. '연구교수'란 직함이 따로 있는 게 징후적인 듯해요...

GoNgo 2009-12-2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기사 읽으면서 '백만' 고정 접속자라는 말에 좀 까우뚱 했는데, 로쟈님께서 설명을 적어주셨네요. 기사처럼 로쟈님의 블로그에 '백만'의 고정 접속자가 있다면 우리 나라가 이 꼴은 아닐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죠. ^^

로쟈 2009-12-21 20:03   좋아요 0 | URL
그 정도면 '전업 블로거'를 해도 되겠죠.^^

알로하 2009-12-2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읽어보고 싶던 책인데 생각보다 너무 두꺼워서 들었다 놨다만 하고 있어요.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페테르부르크 텍스트

이덕형 교수의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2009)에 대한 리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둔다. 두 주 전 기사인데,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내친 김에 오래전에 쓴 글도 찾아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한겨레21(09. 12. 04) 환각의 도시를 떠돈 도스토예프스키의 영혼 

‘성 베드로의 도시.’ 1703년 표트르대제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정신적 삶의 위업’이라 한다. 아무것도 없는 발트해 어귀의 황량한 늪지에 건설된 이곳은 ‘정교적 러시아의 영혼과 유럽의 모더니티가 착종된 이종접합’의 인공도시다. ‘나의 것’과 ‘남의 것’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낸 ‘이종교배’의 문화가 그 도시의 고갱이다. 이덕형 성균관대 교수(러시아문학)가 <도스토예프스키, 판타스마고리아, 상트페테르부르크>(산책자 펴냄)에서 그 ‘환영의 도시’에서 살다 간 위대한 작가의 삶과 문학을 생생하게 되살려냈다.

몽환의 공간 ‘판타스마고리아’   
“도스토예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던 모순과 역설, 이율배반과 정신착란, 환각과 환영의 판타스마고리아를 누구보다도 먼저 민감하게 느꼈던 사람이었다.”

유럽 열강으로 도약하려던 표트르 대제의 욕망은, 종교개혁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가톨릭 교회의 위상을 곧추세우기 위해 시작된 서구의 웅장한 바로크 문화로 이어졌다. 이를 단기간에 모방·이식하려는 시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낳았다. 지은이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와 유럽, 가톨릭의 바로크와 정교의 슬라브주의 사이에서 태어난 몽환의 공간, 곧 판타스마고리아”라고 지적한다. ‘환영’(幻影)이란 뜻의 ‘판타스마’에서 유래한 ‘판타스마고리아’는 18세기 말 프랑스에서 발명된 환등기의 투사 이미지를 일컫는다.  



“이 도시에 기하학이 등장했다!” 도시 건설 초기 러시아 정부의 회계 감사관이 도로를 측량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유클리드 기하학은 합리적 이성의 은유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등장한 것은 결국 서구 라틴 가톨릭 문화권의 핵심 코드인 ‘합리성’과 ‘이성’이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과 알렉산드리아로 대표되는 비잔티움 정교 문화권에선 합리성과 이성보다 이를 초월하는 ‘침묵’과 ‘관조’를 인식의 기초로 삼아왔다. 이런 이질적인 두 문화의 충돌이야말로 도시를 휘감은 모순과 부조리의 뿌리였다. 지은이는 이렇게 썼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합리적 이성이 도입되자 러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이 도시가 기이하게 보였을 것이고, 타락한 로마 가톨릭 문화에서 건너온 유클리드 기하학은 적그리스도의 학문으로 비쳤을 것이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유클리드 기하학에 대해 거의 적대적이라고 할 만큼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삶은, 세계는, 신은, 인간은 ‘2X2=4’라는 합리성의 도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2X2=4’라는 상징은 합리적 이성이자 자유가 박탈된 서구 가톨릭 세계의 그리스도교였다.”

그 판타스마고리아의 도시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스무 번 이상 이사를 다녔다. 도박과 현시적 소비의 굴레를 벗어내지 못했던 그는 평생 한 번도 그 도시에서 정주처를 갖지 못했다. 지은이는 “마치 환영이나 그림자처럼 그는 ‘집’의 실체를 모르는 부초였고 그 자신이 이 도시의 판타스마고리아 자체였다”며 “도박에 몰입하다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섬망 상태에서 소설을 쓰다가 어슴 새벽의 여명에 겨우 잠드는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더니티의 한 현상이었다”고 표현했다.

스무 번 넘게 이사하며 정주 못 해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 대한 평론이자 전기이기도 한 이 책은 또한 현란한 지적 기행문이기도 하다. “산책자의 눈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살던 구석방과 모퉁이 집들을 바라보고, 냄새 맡고, 만져보고 싶었다”는 지은이는 실제 상트페테르부르크란 ‘판타스마고리아’를 일평생 배회한 거장의 흔적을 발품 팔아 더듬었다. 1837년 5월 공병학교 입학을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도스토예프스키가 첫 밤을 보낸 ‘모스코프스키 대로 22번지 네아폴 호텔’에서 출발해, 최후의 걸작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집필을 마친 뒤 탈진해 1881년 2월 숨을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까지 땀으로 그 도시를 주유했다. 이만한 헌사도 드물 게다.(정인환 기자) 

09. 12. 20. 

P.S. 아래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숨은 거둔 '쿠즈네치니 골목 5번지'이다(클릭하면 사진을 더 크게 보실 수 있다). 현재는 도스토예프스키 박물관이다. 5년 전 가을에 가본 기억이 새롭다...


댓글(16)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이드 2009-12-2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자흐스탄에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읽은게 자랑이에요. ^^ 이 책 보관함에 담아 두었어요. 표지도, 저자도, 컨텐츠도 맘에 쏙 드네요.

로쟈 2009-12-20 21:28   좋아요 0 | URL
테헤란에서 롤리타 읽기만큼 특이한 경우시네요.^^

펠릭스 2009-12-2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의적인 아쉬움이라 할까요 '판타스마고리아'적 도시공간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만 우리에게도 5천년의 역사라고 자랑하는데,,있을 법합니다. 미래의 과학 또는 행정 계획도시 조성에 열띤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지금 앞으로 위대한 과학소설가 나타나 이 계획도시을 '판타스마고리 세종시'로 만들면 좋겠는데요.(꿈?)

로쟈 2009-12-20 21:30   좋아요 0 | URL
판타스마고리아적 공간은 역사적인 공간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공간입니다. 요즘의 광화문 광장처럼 갑자기 돌변한 공간이라면 현실인지 환상인지 감이 잘 안 오게 되지요...

비연 2009-12-20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고 싶어지는 책이네요. 언제 한번 꼭 저 곳에 가봐야 할텐데..

로쟈 2009-12-20 22:31   좋아요 0 | URL
비성수기에 패키지로 끊으시면 저렴하게 다녀오실 수 있을 거예요.^^

sophie 2009-12-21 06:42   좋아요 0 | URL
혹시 비성수기란 겨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콜록!

로쟈 2009-12-21 08:36   좋아요 0 | URL
겨울엔 페테르부르크에 직항이 안 다닌 텐데요. 방학을 뺀 하절기가 비수기로 압니다...

sophie 2009-12-23 08:00   좋아요 0 | URL
아 그럼 6월이 되겠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2009-12-21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헛헛헛헛 2009-12-21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학을 뺀 하절기라... ^^
좋은 정보네요. ㅎ

저도 도스토예프스키 책 한권 껴들고
저 앞을 왔다갔다 해봐야겠어요. '-'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몇년전엔 50만원대 상품도 있었습니다.^^

필로우북 2009-12-21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맨 아래 사진을 올려 주신 걸 보고 참 인상적이다 생각했는데, 로쟈 님께도 각별한 사진인가 봅니다.지하로 난 저 문으로 꼭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진입니다.

로쟈 2009-12-21 19:59   좋아요 0 | URL
그게 구글에 뜨는 사진이 저거밖에 없어서요.^^;
 
제3의 여성을 위하여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종로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가 손에 든 책 중의 하나는 질 리포베츠키의 ㅣ<행복의 역설>(알마, 2009)이다. 저자는 <패션의 제국>(문예출판사, 1999), <사치의 문화>(문예출판사, 2004), <제3의 여성>(아고라, 2007) 등이 소개된 바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저작들로 보자면 사회학자에 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다. 좀 비싼 책이지만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에 대한 강의준비에 도움이 될까 하여 출혈을 감수했다. 책의 키워드가 '과소비사회'이기에 '소비사회'와 짝을 이룰 수 있겠다는 나름의 계산(계산이 맞아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찾아보니 그래도 이 책에 주목한 리뷰기사가 없지 않아 챙겨놓는다. 아래 스틸사진(영화 <쇼퍼홀릭>)은 한국경제에서 가져왔다(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9121768261).  



서울신문(09. 12. 19) 그리스 神 이미지로 현대사회 5가지 모델 제시

최근 간행된 ‘행복의 역설’(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알마 펴냄)에 따르면 인류의 소비 문명은 3단계를 거치며 변화했다. 1880년대 소수의 부르주아 계층만 소비의 주체가 된 1단계, 1950년대 이후 놀라운 경제성장으로 거의 모든 계층이 30년에 걸쳐 풍요를 누린 2단계, 그리고 1970년대 말 이후 과잉물질주의가 이끈 ‘과소비 사회’가 3단계다. 저자가 본 ‘과소비 사회 이후’는 결코 밝지 않다. “과소비사회를 대체할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발달할 것이라는 게 가장 그럴 듯한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통해 “현대사회의 삶은 행복과 기쁨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처럼 보인다.”며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다섯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 일부 모델에는 그에 상응하는 그리스 신들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첫째는 페니아(빈곤의 여신). 물질 과잉은 소비자를 끊임없이 결핍의 상태로 몰아가고 주기적으로 불만족스럽게 만들어 평온함과 기쁨을 앗아간다. 기쁨을 맛볼 기회가 많을수록 소비자는 더욱 만족의 상태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바로 풍요 속의 빈곤, 페니아의 강박증이다.  

둘째는 디오니소스(술의 신). 전통문화에서 인간은 디오니소스를 숭배함으로써 개인주의에서 해방될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과소비사회는 공동체의 쾌락 대신 개인적인 기쁨으로 대체됐다.  

셋째는 슈퍼맨. 현대사회에서는 경쟁력과 유능함, 적극성 등이 최고의 가치로 대접받는다. 개인마다 잠재력을 최대한 격발시켜 자기 초월을 시도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늘 ‘슈퍼맨’ 현판이 붙어 있다.  

넷째는 네메시스(율법의 여신). 행복을 중시하는 문화가 사람들에게 증오심과 질투심, 경쟁심리를 부추겼다. 네메시스는 인간들이 지나치게 많은 부와 행복을 누리는 것을 벌한다.  

다섯째는 호모 펠릭스(행복한 인간). 20세기 인류는 위대한 진보를 거듭했지만 지구는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한다고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현대의 ‘행복한 인간’ 숭배가 더 큰 재앙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저자는 이처럼 다섯 가지 모델을 들어 과소비사회의 종말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했다. 저자는 “온전한 만족감 대신 상품의 욕구만을 따른다면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없다.”고 단언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이런 생각도 든다. 아직도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11억명에 이른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올해 통계에 따르면 기아로 고통받는 인구가 10억 2000만명이다. 전쟁보다 기아로 죽는 사람이 훨씬 많다.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행복의 역설’은 이런 곳에서도 유효할까. 저자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은 프랑스다.(손원천기자)  

09. 12. 19. 

 

P.S. <행복의 역설>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은 <소비의 사회> 외에 물론 리포베츠키 자신의 전작들이다. <사치의 문화>와 <패션의 제국>을 자연스레 손에 꼽을 수 있겠다.   

같은 프랑스 저작으로 떠올릴 수 있는 책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영원한 황홀>(동문선, 2001)과 장 클로드 기유보의 <쾌락의 횡포>(동문선, 2001)이다. 혹시나 싶어 '찾아보기'를 찾아보니 '브뤼크너'의 <영원한 황홀>은 312, 239, 382쪽 등에서 언급된다. 그리고 기유보의 <쾌락의 횡포>는 <쾌락의 폭군>이란 제목으로 330, 332쪽에서 언급되는 걸로 돼 있다(하지만 332쪽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나 가장 많이 참조된 책은 <소비의 사회>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ti 2009-12-24 00:56   좋아요 0 | URL
과소비 질주를 대체할 시스템은 코맥 매카시의 <로드>적 카오스가 아닐까 싶어요. 카오스도 시스템이라 부를 수 있다면...
 
고골의 웃음과 공포

이번주 주간한국의 '지식인의 서고' 꼭지에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짧은 분량의 글이어서 고골의 대표작 <외투>에 대해 간단히 적었다(고교 독서평설에서 한번 다룬 적이 있다는 걸 지금 깨달았다!).   

주간한국(09. 12. 17)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하기 때문에 매학기 고정적으로 읽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러시아 명작’들입니다. 보통은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슈킨부터 시작하여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거쳐서 불가코프나 솔제니친까지 ‘투어’를 합니다. 이 거장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고골(1809-1852)입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더더구나 그렇지요.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단편으로만 치자면 고골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외투>입니다. 페테르부르크의 한 하급관리가 어렵게 마련한 외투를 강탈당하고 죽은 후에 유령이 되어 다시 나타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매년 다시 읽으면서 매번 경탄하게 되는 걸작입니다. 흔히 “우리는 모두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한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지요. 그만큼 러시아문학사에서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 작품입니다.   

한데, <외투>는 한편으로 자주 오해받는 작품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인도적 박애주의와 관련지어 이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시각에서는 이 작품의 주제가 주인공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같은 ‘작은 인간’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고 말합니다. “나도 당신들의 형제요.”라는 아카키의 말을 인용하면서요.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는 쪽에선 주인공이 자신의 일에서 발견하고 있는 지극한 즐거움을 간과하는 듯합니다.  

하급관리로서 아카키의 일이란 문서를 깨끗하게 정리해서 쓰는 정서(淨書)입니다. 그런데 이 정서가 단순한 직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자 자족적인 즐거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는 정서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글씨들만을 떠올리고, 근무가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음식에 파리가 붙었거나 말거나 요기만 하고는 다시 정서에 매달렸습니다. 정서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글자들이 나오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불행이 닥치게 됩니다. 겨울이 되어 페테르부르크에 사나운 북풍이 휘몰아치자 그의 낡은 옷은 더 이상 바람막이가 돼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없이 새 외투를 장만하게 됩니다. 이게 문제였습니다.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을 갖게 되면서 아카키는 ‘욕망의 주체’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가령, 아카키는 외투 값을 마련하기 위해 그가 향유하던 모든 즐거움을 유보하고 포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충만한 만족의 세계에서 영속적인 결여의 세계로 옮겨가게 됩니다. 욕망은 언제나 채울 수 없는 결여를 전제로 하는 것이니까요.  

아카키가 새 외투를 마련하고 얼마 안 있어 강도들에게 강탈당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 필연적으로 보입니다. <외투>는 저에게 욕망이 몰고가는 파국을 보여주는 섬뜩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고골은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욕망 없이 살 수 없다면, 우리의 파멸 또한 필연적이라구요. 무섭지요?  

09. 12. 19.  

P.S.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무성영화 <외투>(1926)가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http://www.youtube.com/watch?v=ki-zGGXIbH4&feature=PlayList&p=EC0B7D5C62078945&index=0). 나도 못 봤던 것인데, 감독은 그리고리 코진체프와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이며, 시나리오는 러시아 형식주의의 저명한 문학이론가 유리 트이냐노프가 맡았다(원작과는 좀 다르다). 오늘의 서프라이즈다!.. 


댓글(17) 먼댓글(1)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펠릭스 2009-12-19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투>의 마지막 장면은 "마술적 사실주의"<빌러비드/토니모리슨/들녁>라 할 수 있겠는데요.사람마다 하급관리(아카키)의 정서(淨書)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이 관료적 권력앞에 왜곡되고 맙니다. 권력은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보다는 감시하고 의심합니다. 개인 또한 입장이 바뀌면 굴림하기도 합니다. 종국에 개인은 조직(관료)에 대항 뿐입니다.고골의 사랑(정서)을 지켜주던 '외투'를 잃어버리고 자존 능력을 상실하고 맙니다. 저마다 하나의 끈을 붙잡고 사는 것처럼요.

로쟈 2009-12-19 23:01   좋아요 0 | URL
저는 아카키에게서 정서와 외투는 다른 성격의 대상으로 봤어요. 먼댓글로 링크해놓은 글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펠릭스 2009-12-20 07:38   좋아요 0 | URL
재봉사 '페트로비치'에 의해 새 '외투'를 갖게된 '아카키'는 박봉을 절약하며 본연의 업무인 '정서(淨書)'에 충실히 근무합니다. 문제는 '페테르부르크 광장'에서 새 외투를 강탈당하면서 외투를 찾기 위해 경찰서장 등을 찾아 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못된 관리의 권위(권력)에 의해 묵살당하고 맙니다. 결국 그는 스트레스로 죽어서까지 유령으로 나타나 외투를 뺐습니다. 우리의 '전설의 고향'의 귀신처럼요.

과연, 외투를 찾으려고 했던 '아카키'가 '욕망의 화신' 일까요? 여리고 단순한 영혼의 당연한 권한이 아니였을까요? 저자 '고골'이 '인간 욕망의 허구성' 목적으로 이 단편을 썼다면 그런 왜곡된 의도성이 독자에게 외면당하여 그의 마지막 작품이 실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사회구조권력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개인의 존재가 무참히 사라지는 형국에서 '아카키'의 행위는 욕망보다는 정당한 것이었으며 약자의 최후 저항이라 생각했습니다. 즉 '아카키'의 새 외투에 대한 욕망은 과(소비)욕이 아니라 헤저 더 이상 수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당연한 소비(구입)의식과 평범한 구매였으며 강탈당한 약자의 억울함이라 생각했습니다.

Sati 2009-12-20 20:20   좋아요 0 | URL
요즘같은 날씨에 겉옷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아카키의 외투가 욕망의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측은지심을 유발하는 대목이 있지 않나요, <외투>에는? 자발적 88만원 세대의 한 인물이 있다고 할 때, 그가 어머니의 수술비 500만 원을 마련하기 위해 끼니를 굶어가며 돈을 마련했는데 그 돈을 어이없이 강도에게 빼앗겨서, 어머니는 치료도 못받고 돌아가시고 본인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서 귀신이 된다면 그건 펠렉스님 말대로 억울함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만약 내 가족 건사를 위해 88만원 자족생활을 버리고 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가, 부도라도 나서 홧병으로 죽는다면 그건 욕망의 희생양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지만.

로쟈 2009-12-21 22:04   좋아요 0 | URL
그게 작품에선 아카키가 전혀 다른 인물로 변화한 것으로 나옵니다. 예전처럼 정서에만 빠져 지내는 게 아니라 길거리를 거닐며 여자의 다리가 그려진 간판에 눈길을 주고, 지나가던 여자를 괜히 쫓아가보기도 하는 식으로요. 외투도 분에 넘치게 고급스러운 것으로 맞추게 되죠. '바람막이' 수준을 넘는 것으로요. 그러니까 저는 외투를 마련하기 이전과 이후의 아카키가 전혀 다른 존재 양식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죠. 욕망을 가진(갖게 된) 주인공의 파멸은 고골의 작품에서 자주 나옵니다. <광인일기>의 포프리쉰이나 <넵스키거리>의 피스카료프도 모두 자기 욕망(판타지)의 희생자가 됩니다...

Sati 2009-12-20 21:29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서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분인걸요^^

펠릭스 2009-12-21 21: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아인스 2009-12-19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줌파 라이히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원제 The Namesake)의 주인공이 '고골리'라는 이상한(?) 이름을 갖게 된 경위가 주인공의 아버지가 좋아하는 바로 이 작가의 이 작품 때문이었습니다. 고골의 <외투> 속에서 잉태된 아이라는 뜻을 갖고 있지요. 마침 궁금했었는데 이 글을 보니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구해놓았는데,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안 보이네요.^^;

Sati 2009-12-19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따가 <뉴문> 보러갈까 했는데, <외투>라니, 정말 서프라이즈네요. 오늘은 기쁜 일이 연발로... /^0^/

로쟈 2009-12-19 23:02   좋아요 0 | URL
보고 싶었던 영화인데, 너무도 가까이에 있더군요.^^;

sophie 2009-12-19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재밌어요. 로쟈님한테 듣는 러시아문학 이야기 또 기다려지네요. 그나저나 모자달린 외투를 사야하나 말아야하나... 에궁..

로쟈 2009-12-19 23:03   좋아요 0 | URL
너무 큰돈은 들이지 마시길.^^

페크pek0501 2009-12-2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외투>를 격찬했지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이란 작품이 그 영향을 받은 작품이지요. 전 <외투>라는 작품을 이렇게 읽었어요. 민중의 힘없는 비참한 현실의 이야기이며 그런 가엾은 사람을 도와 주지 못하는 무력한 권력 이야기라고. 멋지게 장만한 외투라기보다는 억울하게 빼앗긴 외투로 봅니다. 외투를 빼앗기고 도움을 요청하지만 아무도 도와 주지 않습니다. 순경도, 경찰서장도, 유력한 인사도... 그러니까 '이것이 현실이다. 세상이 이래서야 되겠는가'라고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학(또는 예술)의 매력은 해석의 다양성에 있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는 게 옳은가, 하며 따지는 것보다 그저 많은 해석이 나오는 작품이라면 흥미로운 작품이다, 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요. 우리의 사고영역을 확장시켜 주니까요. 다른 해석이 많이 나오길 기대하며...

로쟈 2009-12-23 23:48   좋아요 0 | URL
네, 작품의 뒷부분만 보면 그런 해석도 가능합니다. 한데, 고골 자신이 아카키에 대해 조롱하는 듯한 표현도 서슴지 않아서 해석이 복잡해집니다...

페크pek0501 2009-12-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신 : 이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아카키는 자신의 세계 안에 갇혀 서류를 정서하는 것을 좋아하며 살 땐 행복했는데, 그가 외투를 마련하여 세상에 나오자 불행이 시작된거죠. 그러니까 인간은 개인의 영역에서의 삶에선 아무 문제 없이 살 수 있지만 한 걸음만 내딛어 밖으로 나와 세상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면 고단한 삶을 살게 된다는 거죠. 혼자 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세상과 부딪히며 살기 시작하면 힘든 삶이 시작된다는 것. 저도 현재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만약 누군가가 제게 소송을 걸어 법(세상)과 싸우게 되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되어버리는 식이죠. 힘없는 사람이 살아가기엔 이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 - (지금 생각난 것을 적어 봤을 뿐이며, 이런 제 생각이 옳은지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로쟈 2009-12-23 23:49   좋아요 0 | URL
'개인의 영역 VS 세상'은 좀 모호하구요, 저는 '충동 VS 욕망'의 구도라고 생각해봤습니다...
 
자기계발의 의지와 민주화의 역설

사회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문학사회학자라고 해야 하나?) 김홍중 교수의 <마음의 사회학>(문학동네, 2009)이 출간됐다. 엊그제 산 책인데, 어제 한 송년모임에서 우연히 저자와 몇 마디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서문만 읽은 상태라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진 못했는데, 그런 기회가 있을 줄 알았다면 몇 개 장 정도는 미리 읽어볼 걸 그랬다. 오늘자 한겨레에 책에 대한 리뷰가 실렸기에 옮겨놓는다. 주로 첫 장인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 듯싶다.  

한겨레(09. 12. 19) '진정성’ 대신 ‘무사유’가 판치게 된 까닭 

타인을 누르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것을 수치이자 슬픔으로 여겼던 감수성,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 못한 시대적 죄책감과 부채의식으로 괴로워했던 마음을 광범위하게 공유했던 이른바 ‘진정성의 시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본격화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와 함께 그 시대는 급속히 종말을 고했다.

“이제 진정성의 에토스를 전경으로 하는 삶은 낡고, 효율적이지 않으며, 안쓰럽고, 심지어 역겨운 것으로 비춰진다. 남아 있는 유일한 진정성은 386세대적인 냉소와 멜랑콜리의 가면 뒤로 숨었다. 그리고 도래한 세계는 속물과 동물들의 세계, 몰렴(沒廉) 또는 무치(無恥)의 에토스에 의해서 지배되는 세계다. 무치는 단순한 무례나 실례가 아니라 부끄러움의 실질적인 마비에 기초한다. 그것은 포스트-87년체제의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뻔뻔한 당당함이다.”

웰빙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거리지 않는 삶의 피상성과 천박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몰염치와 과시적 파렴치가 판치는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 정글사회. 사회학자 김홍중 대구대 교수는 그의 첫 저서 <마음의 사회학>에서 이런 우리사회를 스노브(속물)들이 지배하는 가짜 민주주의 사회, 스노보크라시(snobocracy)의 사회라 부른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 ‘부자 되세요’가 덕담이 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 세계로의 이런 급작스런 집합적 심리 전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진정성 에토스 자체와 그 한계를 파악해야 한다. 김 교수는 라이어넬 트릴링의 ‘신실성과 진정성’ 개념을 끌어온다.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이 실제로 욕망하는 것 사이에 어떤 단절이나 간극도 느끼지 못하는 태도다. 이에 비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가 요구하는 역할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에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이다. 뉴레프트적 지식인들은 진정성과 반란을 동일시했다. ‘진정한 나’의 추구는 ‘진정한 사회’를 추구하는 현실정치가 결합해야 비로소 가능하며 한국 사회에서 그 접합은 민주화와 386세대에서 최고도로 구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진정성은 두 가지로 나뉜다. 윤리적 진정성과 도덕적 진정성이 그것이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기초한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적 진정성과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참여적이고 공적인 도덕적 진정성 사이에는 화해하기 어려운 간극이 있다. ‘내면의 참된 목소리’를 듣기 전엔 움직이지 않는 윤리적 진정성은 망설임이며 주저이며 때로는 실천적 무능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공동체가 외적으로 부과하는 삶의 형식들을 통해 구현되는 도덕적 진정성은 사회가 인정하고 규정한 행위패턴이나 감정의 방식을 추종하고 모방하면서 집합체의 지배적 가치와 이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있다. 1997년 이후 체제가 도래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 둘은 전반적 시대정신의 결속력 아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했다. 그 정점에 분신으로 표출된 요절과 열사들의 탄생이 존재한다. 살아남은 것이 추악한 것으로 인지된 것은 그때다.

“진정성의 세계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진정성의 실천이 죄와 고독 혹은 파멸을 야기하는 항상적인 급진성을 동반하게 되며,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에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진정성의 고원한 이상을 쉽게 따를 수 없을 때 주체는 비진정성의 극단적 추구를 통해 진정성의 불가능성을 보상받고자 한다.”

1997년 이후 무한경쟁시장에서 살아남는 경제적 생존투쟁은 치부와 강박적 노동으로 이어지고 성공지상주의, 입신출세주의, 노골적인 속물주의를 낳았으며, 상품화를 통해 인간의 삶을 육체적 조건으로 환원시키는 무차별적 건강주의로 귀결됐다.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은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무너지면서 급속하게 타락하거나 전도됐다.

김 교수에 따르면, 스노브(속물)의 최대 특성은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의 결여, 아렌트가 말한 ‘순전한 무사유’다. 김 교수는 스노비즘 최대의 스펙터클을 나치 전범 아이히만의 ‘상투적인 죽음’에서 찾는다. 아이히만은 처형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고 회오, 회심은 끝내 없었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을 통제한 성찰성을 지니고 있던 아이히만은 바보가 아니라 영악했다. 하지만 그 성찰은 특정 지점에서 정지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받은 명령의 원천, 그 의미를 문제삼지 않는 도구적 성찰에 머물렀다. 성찰 그 자체를 성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를 횡행하는 스노보크라시하의 자기계발 담론들이 명령하는 도구화된 성찰성, 그 영악함도 아이히만의 그것을 닮았다. 김 교수는 의심하고 회의하고 주저하는 윤리적 비판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만 비판의 주체 스스로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스노비즘 비판 자체가 또다른 스노비즘으로 전락하는 역스노비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빼놓지 않는다.(한승동 선임기자) 

09. 12. 19.  

P.S. 저자가 정의하는 '진정성(眞正性, aunthenticity)'은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19쪽) 이번에 알게 된 건 "서구의 경우 진정성의 문화, 진정성의 정치, 진정성의 윤리가 시회적으로 확산되고 공유되어 인정받게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본격화된 청년 대학생들의 '신좌파' 운동을 계기로 해서"라는 사실. 생각보다는 상당히 '젊은' 개념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진정성'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게 된 것이 그다지 오래 되지 않는다(처음엔 낯설고 좀 어색한 단어였다). 기억에는 마샬 버먼의 <현대성의 경험>에 대한 황종연 교수의 논의에서 '진정성'이란 말을 처음 접한 듯하다. 버먼의 책 가운데 <진정성의 정치>란 것이 있어서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십수 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이 말의 용례에 대한 개념사적 추적도 해볼 만하겠다).  

김홍중 교수에 따르면, 한국 사회에서 진정성의 에토스, 혹은 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체제)은 198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형성되었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와 함께 급격하게 퇴조하였다. 즉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진정성의 모델이 현실적으로 융성할 수 있는 환경과 사회적 토대를 상실하게 된다. 승자독식, 무한경쟁, 적자생존의 유사-자연적 정글로 변화한 사회에서 가장 절박한 관심은 '진정한 삶'이 아니라 '목숨 그 자체' 즉 '생존'의 문제로 집약되기 때문이다."  

아감벤의 문제의식도 상기시켜주는, 이런 과정을 거쳐서 현재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post-authenticity regime)'로 진입한 것 같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 진정성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건 '부자 되세요'라는 덕담과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책의 짝이 될 만한 것은 얼마전에 나온 서동진 교수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일 듯싶다. '자기계발의 의지'야말로 포스트-진정성 체제의 키워드라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말에 마땅한 독서거리를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주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2-19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9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2-19 12:35   좋아요 0 | URL
<마음의 사회학/김홍중/문학동네> 프롤로그에서 '이병헌' 주연 영화<달콤한 인생>에서 인용했던 문구도 나오더군요. 저서에 대한 느낌이 '슬라보예지젝'을 생각케 했습니다. 어제 전 총리가 출두하기전 한 스님의 자해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자해 사실성은 다른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되더군요. 그 다른 마음도 저자가 말하는 <집단표상>에 속할지도 궁금했구요.

로쟈 2009-12-19 23:06   좋아요 0 | URL
'참된 자아'는 사실 지젝의 '주체'와는 거의 반대되는 개념이어서 대조해볼 수 있을 듯해요...

사량 2009-12-19 16:21   좋아요 0 | URL
유용한 포스팅 고맙습니다. 그런데 최근 '진정성'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언급되던 인물이 전, 현 대통령이라는 점은 아이러닉하네요. 한 사람은 FTA로, 다른 한 사람은 4대강 살리기로 말이지요. 그들도 "격렬한 순수에의 열망"으로, 확신을 갖고 밀어붙였다고들 하잖아요.-_-; (핫, 현 대통령과 '진정성'을 쳐서 검색해 보니 정말 화려하네요;;)

로쟈 2009-12-19 23:08   좋아요 0 | URL
네, 그래서 '진정성의 정치'란 것도 사실 의혹의 대상입니다.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참된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개인적으로 궁금한데, 책을 마저 읽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