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자 경향신문에 게재되는 대담기사를 옮겨놓는다. '2009년 문화계 결산' 대담 중 '출판계' 꼭지이다. 대담자로 섭외를 받아 지난주 목요일에 한기호 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과 한 시간 반 가량 대담을 나누었고 기사는 그 내용을 간추리고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2201725305&code=960100). 

경향신문(09. 12. 21) [2009 문화계 결산](7)대담 - 출판계 출판평론가 한기호와 블로거 이현우  

블로거들의 활약, 뛰어난 학술서의 부재, 추모와 소통 열풍, 자기계발서의 추락, 대안적 삶에 대한 희구. 2009년 출판계를 요약하는 말들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51)과 ‘로쟈’라는 필명으로 자신의 블로그에 서평을 올려 100만여명의 고정 접속자를 갖고 있는 이현우 박사(42·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가 지난 17일 경향신문 회의실에서 만나 올 한해 한국 출판계 등을 돌아봤다.  

# 블로거들의 활약 

한기호 = 먼저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한국출판문화상 등을 받은 것을 축하합니다.

이현우 = KBS의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는데, 출판문화상까지 받아 가족들과 출판사가 좋아합니다.   

한기호 = <로쟈의…>는 우리 사회에서 정보가 생산·유통·소비되는 과정 속에 글쓰기의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을 가장 앞서서 보여줬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종의 ‘블룩’(blog+book)인데, 지금까지 여행·사진 같은 실용서 위주이던 블룩이 이젠 인문학에서도 등장한 겁니다. 블룩의 인문학 방식은 지식의 원천 생산이 아니라 이미 생산된 지식에 대해 논평하는 가운데 자신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이 자기 혼자서는 인문학적 지식을 만들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들 것을 보려고 하죠. 그럴 때 인문학 블로그에 접속하는 겁니다. 대중은 이제 지식 생산의 주종을 이룬 이른바 ‘황혼의 글쓰기’를 기다릴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어떻게 볼 것인지 궁금해하는데, 그럴 때 이 선생 블로그 같은 곳을 찾는 것이죠.

이현우 =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들 저 같은 일을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학술잡담 비슷하게 정보도 공유하고, 책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책 지식도 올려놓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저 같은 사람이 희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하니까 조금 튀는 것 아닐까 합니다. 저는 문학 쪽을 주로 다루니까, 다른 분야에 정통한 10~20명 정도가 더 하신다면 인터넷 공간의 담론이 다양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분들은 블로그 글쓰기를 낮춰봅니다. 뭔가 진지하고 수준 높은 것은 인터넷에서 기대할 수 없다거나, 멀쩡한 것도 인터넷에 올리면 질이 떨어져 보인다는 부정적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합니다.

# 좋은 학술서가 나올 수 없는 ‘학진 체제’

이현우 = 올해도 그렇지만 좋은 학술서가 나오지 않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이는 대학의 학문, 학술 담론 생산구조의 위기와 관계있습니다. 특히 학술진흥재단(학진·현 한국연구재단) 체제로 가면서 능력있는 연구자들은 다들 프로젝트에만 매달립니다. 그래서 아무도 읽지 않는 보고서 형식의 지식이 대량 생산되는 거죠. 그것은 좁은 학계 내부와 관리감독 기관만 보는 것이지 일반 대중들과는 괴리돼 있습니다. 출판계는 필자 찾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데 학진에서 프로젝트를 받아 공동연구를 하면 1년에 논문 1편을 써 3000만원 받지만, 저처럼 책을 써서 1만권이 나가도 1500만원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학진 지원에 익숙해질 경우 대중을 상대로 글쓰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박사 실업자들이 대학, 지원기관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연구한 콘텐츠로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교양서를 꾸준히 낸다면 자신도 살고, 한국사회의 지적 수준도 높아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학문지원 제도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역효과를 출판계 독자들이 보고 있는 셈입니다.

한기호 =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박사급 ‘풍찬노숙자’들이 열의를 갖고 책을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곤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책세상의 ‘우리시대 문고’였죠. 그런데 2006년 ‘인문학 위기’ 논란 이후 지원금이 쏟아지니 그분들이 교양서를 써 자기 역량을 발휘하기보다, 대학 내에서 눈치보고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출판의 관점에서 보면 논문형 글쓰기는 지식인들의 글쓰기가 완전히 붕괴됨을 뜻합니다. 물론 출판유통 체계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온라인서점 매출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올해는 단행본의 집중도가 50%를 넘었습니다. 이는 팔리는 책 위주로 서점이 재편된다는 의미입니다. 학자들이 책을 써봐야 1000부 나가기 어려운 구조가 심화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번역서 비중이 높아집니다. 블로그를 통한 지식 생산이 이 문제의 돌파구로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 추모 열기와 소통의 추구

이현우 = 올해는 추모 관련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인문사회 쪽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오른 책들 중 두 전직 대통령과 장영희 선생, 김수환 추기경 등을 추모하는 책들이 많았죠. 추모 열풍은 항시적인 건 아니어서 그런 것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한기호 = 노무현 전 대통령 책이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노무현의 진실’ 같은 걸 추구하지 않았나 합니다. 생전에는 논란이 있었지만 죽은 후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사회가 왜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 돌아보는 것이죠. 진실과의 싸움은 달리 말하면 소통입니다. 출판계 전반으로 확장해보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같은 것은 가족 사이의 소통이고, 심리학 책이 인기를 얻는 것은 자신과의 소통이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현우 = 소통 욕구는 항시적일 텐데, 여기에는 정치적 맥락도 있을 것 같습니다. ‘불통 정국’ 때문에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소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 자기계발서의 추락과 대안적 삶의 희구

한기호 = 자기계발서의 추락도 주목할 만합니다. 한국인들은 1997년 말 외환위기, 2003년 카드 대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를 거치며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사이 벤처열풍, 주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났죠. 하지만 카드 대란을 통해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같은 책이 그 즈음 나왔는데, 인생의 후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만들었죠. 열심히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말년에 대해 적극 고민하자는 뜻에서 10억원 모으기 열풍 같은 것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다 좌절로 끝났습니다.  

200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며 성공에 대한 큰 담론은 실질적으로 포기하기 시작했죠. 이제는 관심이 행복으로 이동했습니다. 세상이 뭐라든 나만은 나름대로 즐기고 행복하겠다는 것이죠. 하지만 그것도 잘 안되면서 고독을 느끼는 상황이 됐습니다. 2007년부터 ‘자기치유’를 강조하는 책이 나왔지만 한계가 드러났고, 결국 사람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안을 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동안 꿈꿨던 게 뭔가 자성하면서 대안적 삶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자본주의의 대안이 없을까 고민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책이 잠깐 사이 주목받았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같은 책에 대한 관심도 어느 정도 대안을 생각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정치·사회적 대안 외에도 궁극적으로 인간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굿바이 스바루>처럼 저널리스트가 도시 삶을 벗어나 농촌에 들어간다든지, 김용택·도법 스님의 <시인과 스님, 삶을 말하다>는 농촌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얘기했죠. 내년에는 자기계발서와 자기치유서를 넘어서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것이 독서시장은 물론 우리 사회의 핵심어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현우 = 저는 그렇게 희망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독자들을 위로하거나 만족을 주는 책보다 성찰하게 하고, 지적인 자극을 주는 책이 좀 더 필요합니다. 자기계발서 대신 심리학 책을 찾는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책이 자기에게 뭔가 해주길 원하면서 읽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나에게 돈을 더 갖다주는 책이나 나를 위로해주는 책, 혹은 나를 좀 더 과시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나 결국은 비슷합니다. 나르시시즘적이고 이기적인 독서에 빠져 있지 않나 합니다.   

올해 나온 슬라보예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처럼 뭔가 대의에 파묻힐 수 있는 책이 더 읽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기계발, 자기치유도 좋지만 <잃어버린…>처럼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책도 많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장 읽지는 않아도 꽂아둬야 한다는 이런 분위기가 만들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보다 <거대한 전환>이 더 많이 팔리는 사회가 앞으로 전망 있는 사회, ‘싹수 있는’ 사회가 아닐까 합니다. 대중의 독서취향이 빨리 변하지는 않겠지만, 저 같은 중간지식인들이 현상추수적으로 글을 쓰기보다 지향점을 갖고 중간에서 독자들을 자극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출판평론가 한기호
광주민주화운동 참여로 학교에서 제적된 후 창비 출판사에 입사했다. 1998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세워 출판 현장의 다양한 문제를 짚으면서 출판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구속과 책 압수를 감수한 출판인들이 없었으면 민주화가 불가능했다고 믿는다. 한국 사회의 미래가 학생들의 독서에 있다고 보고, 내년 3월 낼 ‘학교도서관저널’ 창간호에 힘쓰고 있다.

‘로쟈’ 블로거 이현우
독서 애호가들 사이에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온라인서점 알라딘에 마련된 ‘로쟈의 저공비행’이라는 블로그에 인문서를 중심으로 한 폭넓은 서평을 꾸준히 올리고 있다. 블로그 글 중 문학·영화·예술·철학에 관한 것만 모아 펴낸 <로쟈의 인문학 서재>로 KBS 올해의 책 ‘눈부신 역작’부문, 한국일보의 한국출판문화상 교양저술부문 상을 받았다.(김재중·손제민기자) 

09. 12. 20. 

P.S. 대담 소개에서 '100만여명의 고정 접속자'는 접속자가 '100만명'을 넘어섰다는 얘기가 와전된 것인 듯하다(짐작엔 이 서재의 '고정 접속자'는 수천 명 정도이다). 그리고 학술서 부진에 대한 얘기는 한기호 소장의 진단에 나대로 한 가지 원인을 덧붙인 것으로, 여기서의 '학술서'란 대중을 위한 '학술교양서'를 말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학진 체제' 하에서 학술논문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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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 2009-12-20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지성'에 속한 '중간지식인'의 역활과 대중 독자취향의 변화에 대한 조언이 참고가 됩니다.

로쟈 2009-12-20 21:32   좋아요 0 | URL
네, 제 역할에 대한 자리매김을 그렇게 하게 됩니다...

외투 2009-12-21 15:00   좋아요 0 | URL
경향신문 23면 이군요...신문으로 보는 느낌(거물급?)이 다른데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1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체육학교에서 열린 유도훈련 사진도 있더군요...

Arch 2009-12-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출판문화상 받으신거 축하드려요. 경향신문에서 보고 반가웠는데^^ 올해는 로쟈님께 정말 좋은 일만 생기는 듯.

로쟈 2009-12-20 22:30   좋아요 0 | URL
국가적으론 흉사가 많은 한해로 기억되겠지만, 개인적으론 첫 책을 내고 좋은 반응을 얻은 해이기도 해서 기분이 좀 엇갈립니다...

2009-12-20 2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0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0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21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ophie 2009-12-21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네요. 모쪼록 로쟈님과 같은 생각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학계 풍토가 형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교수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대학풍토가 형성되어야 할텐데 말이죠...

로쟈 2009-12-21 08:35   좋아요 0 | URL
기대할 수 있는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이상적으론 그렇죠. '연구교수'란 직함이 따로 있는 게 징후적인 듯해요...

GoNgo 2009-12-21 16: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기사 읽으면서 '백만' 고정 접속자라는 말에 좀 까우뚱 했는데, 로쟈님께서 설명을 적어주셨네요. 기사처럼 로쟈님의 블로그에 '백만'의 고정 접속자가 있다면 우리 나라가 이 꼴은 아닐거라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죠. ^^

로쟈 2009-12-21 20:03   좋아요 0 | URL
그 정도면 '전업 블로거'를 해도 되겠죠.^^

알로하 2009-12-2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읽어보고 싶던 책인데 생각보다 너무 두꺼워서 들었다 놨다만 하고 있어요. 한번 읽어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