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신문들이 인문학 위기 관련기사들로 도배돼 있다. 며칠전 고려대 문과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 선언'을 터뜨린 이후에 여론이 총동원된 듯한 인상이다(기자들로서도 '일거리'가 생긴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또 내주는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인문학 주간'이라고 한다. '벼랑끝'에서 탈출하기 위해 플라멩코춤에 사이코 드라마까지 선보인다고 하니까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준다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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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위기'에 대한 진단과 반응은 언제나 두 가지이다. 한 신문의 타이틀이 뽑은 대로, 인문학자/전공자들이 변화에 소통에 무신경함으로써 위기를 자초했다는 자성과 학문의 전당마저 신자유주의 시장판으로 만들어야 하느냐는 분노이다. 이러한 정황은 소설가 김훈이 한 대담에서 든 예를 비틀어서 옮겨오자면, 마치 청나라의 대군을 성밖에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가 서로간에 설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처럼도 보인다(내가 '담론들'을 신뢰할 수 없는 이유이다. 인문학이 살아있다는 자기증명은 말이나 선언이 아니라 '실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신문 세 곳의 특집기사들을 아래에 옮겨놓는다. 인문학 주간 행사 일정은 맨마지막에 붙여놓았다(시간이 나면 몇 마디 코멘트를 덧붙여놓도록 하겠다).
한국일보(06. 09. 20) 벼랑끝 인문학 자성과 분노
인문학이 죽어 간다. 대학사회에서 ‘인문학의 위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인식이 퍼져 있고 위기의식마저 마비된 상태다.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공자가 해마다 줄고, 각 대학의 인문ㆍ문과대는 구조조정 과정에서 통폐합 또는 폐지 대상 1순위가 됐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인문학계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은 올해를 ‘인문학 부흥의 해’로 정하고 ‘새로운 국가 발전 전략으로서의 인문학’을 위한 갖가지 실천 방안을 내놓고 있다. 15일 고려대 문과대 교수 선언에 이어 각 대학 인문대 교수들의 연대 서명도 예정돼 있다. 그러나 아직 반향은 크지 않다. 인문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들을 통해 위기의 원인을 짚어보았다.
■ 변화에 둔감한 눈높이
서울 모 대학의 철학과 조교 황모씨는 얼마 전 지도교수의 신문 기고문을 약간 손질했다 심하게 혼이 났다. 기고문에 실린 한문투의 표현을 쉬운 우리 말로 바꿔 썼다가 “왜 글의 웅혼함이 떨어지게 만들었느냐”는 질책을 받았다. 황씨는 “다른 분야에서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학문적 시도가 많지만, 순수 인문학 분야는 아직도 중세적 사고에 갇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안대회 명지대 교수(한문학)도 “학문적 깊이만 있으면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대중과의 소통이 학자에게도 필수인 시대”라며 “학문적 업적을 대중과 공유하려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원식 인천문화재단 이사장(인하대 국문학)은 변화에 무딘 인문학 교수 사회에서 위기의 원인을 찾았다. 그는 “이공계는 산업현장의 수요에 따라 커리큘럼을 짜는 등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했지만 인문학계는 교수의 협소한 전공지식이 수십 년 째 반복ㆍ전수되고 있다”며 “취업뿐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교양교육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인문학이 외면받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 시장 만능주의 극복이 과제
구체적 ‘성과’보다는 추상적 ‘계획’에 연구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에도 비난이 쏟아졌다. 올 초 학술진흥재단이 주최한 ‘인문학위기 포럼’에 참석한 이진경(본명 박태호) 서울산업대 교수(철학)는 “인문학 위기는 김대중 정부 초기 ‘연구결과’가 아닌 ‘연구계획’으로 지원여부를 결정하면서부터 더욱 불거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연구자들이 ‘프로젝트’를 따내기 위한 연구계획서를 쓰느라 사회와의 소통을 통한 연구라는 본업에 오히려 소홀해진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미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장(사학)도 “정부의 인문학 연구지원비는 해마다 줄어들고 있는데 논문 발표수 등 인문학 연구방법과 어울리지 않는 계량법으로 학문성과를 평가하려는 시도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며 “정부의 잘못된 정책방향이 인문학의 깊이 있는 성찰을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공자들이 한결같이 위기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것은 역시 ‘시장 만능주의’라는 현실이다. 경제적 부가가치 생산에 이익이 되는 것만 대접받는 현실이 이미 대학을 완전히 접수해 버렸다는 지적이다. 이승환 고려대 교수(철학)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학문의 전당까지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다”며 “심지어 국제화라는 미명아래 한국학 관련 학문까지 영어로 강의하도록 강요하는 게 바로 한국 인문학계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유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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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06. 09. 20) “취업과 너무 먼 文·史·哲” 폐과 잇따라"
최근 대학 구조조정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더욱 위기에 몰린 분야가 바로 인문·사회학이다. 대학에 시장논리가 팽배해져 문학 사학 철학 등 이른바 문사철(文史哲) 학과들은 취업률이 낮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적다는 등의 이유로 폐과 대상 1순위가 된 것이다. 지난해 전국 대학 졸업자의 취업률을 보면 공학계열 71.7%, 자연계열 69.2%, 사회계열 55.8%, 인문계열 53.4% 등 계열별로 큰 차이가 난다.
▽비인기 학과 폐과 속출=경원대가 2003년에 철학과를 없애는 등 최근 3년간 철학과 12개가 폐과됐고 독문과와 불문과도 각각 4곳이 문을 닫았다. 경북대는 5월경 독문과와 불문과를 사범대에 통합하려다 교수들의 반발로 계획을 일단 접었다. 90년 전통의 대구가톨릭대는 인문대 철학과를 비롯해 외국어대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이탈리아어과 등 문과 분야 주요 학과에 대해 내년부터 학생 모집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현재 1학년이 졸업하는 4년 뒤에 이들 학과는 폐과된다.
1982년 개설된 철학과의 경우 모집정원을 50명에서 40명으로 줄였지만 입학생은 갈수록 줄어 현재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독문과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산지역 대학들이 최근 2학기수시 학생을 모집한 결과 인문학 분야의 지원자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외대의 경우 영어학과는 1.2 대 1, 중국어학과는 미달됐으며 동의대는 인문학부 중 2 대 1을 넘는 학과가 드물었다.
경남대는 지난해부터 국제언어문화학부 4개 학과 가운데 중국어를 제외한 독일어 러시아어 프랑스어과 등 3개 학과의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이들 학과 소속 교수들은 일단 유사 전공으로 전보시키는 고육책을 내놓았다. 취업이 어려운 인문계열 및 야간학과의 통폐합 과정에서 실직을 우려한 교수들의 반발도 있었으나 고용 안정을 약속하고 협조를 유도했다. 이 대학은 과거 시간강사가 담당하던 상당수 강의를 정규 교수에게 맡기면서 시간강사가 일자리를 잃었다.
▽전공보다 취업이 우선=인문학의 위기는 전국적이지만 위기의 정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서울 소재 대학들이 이제 인문학의 위기를 체감하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면 지방대는 이미 무너지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대로라면 지방대의 현주소는 서울 소재 대학의 가까운 미래를 보여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학입시 면접 때 수험생들에게 “왜 인문학 관련 학과에 지원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의 학생은 “교직에 진출하기 위해” 또는 “공무원으로 취직하기 위해”라고 대답한다.
전남대 사학과의 경우 4학년생 36명 가운데 대학원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은 5명,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려는 경우는 4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학생들은 취직 시험에 인생을 걸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가하게 철학을 논하고 역사를 고민하는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사그라질 수밖에 없다. 대학과 교수들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학생 없는 대학원=학부의 빈곤은 대학원으로 가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대학원생이 아예 없는 학교도 적지 않아 교수들은 학문의 맥이 끊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지난 1학기 강원대는 독문과와 불문과 대학원생이 전무했다. 정교수 6명에 대학원생이 1명뿐인 모 대학의 불문과 교수는 “가르칠 학생이 없는데 어떻게 학문을 이어 가겠느냐”며 “학부생들을 붙잡고 대학원에 오라고 사정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취업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다”고 말했다.
조선대의 한 교수는 “대부분의 학생과 학부모들이 고교 때부터 취업을 지상 목표로 정하고 대학에 들어온 마당에 순수학문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인지 자문해 보게 된다”고 털어놨다. 모든 학생이 학자가 되려는 것도 아닌데 거의 모든 대학의 커리큘럼이 학자 양성 코스로 되어 있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대부분의 대기업에서 원어민과의 자유토론식 면접시험을 보는 마당에 정규 대학교육만으로는 그 틀에 맞추기 어렵다는 것.
전남대 최정기(사회학) 교수는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소위 순수학문이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강의실에서는 시험문제 풀이식 강의가 될 수밖에 없고, 논문의 소재 또한 현실과 접목되는 분야의 정책 대안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수년 전 하버드대 총장이 신년사를 통해 ‘기술의 진보가 빨라질수록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며 “결국 인문학이 새로운 변화를 수용할 그릇이 된다는 생각을 사회적으로 공유하지 않는다면 대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인문학 지원 절실=학문은 기초순수학문과 응용학문이 균형을 이뤄 발전해야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고사 위기에 놓인 인문학에 대한 인식 전환과 정부의 과감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학계는 촉구한다. 그러나 정부의 연구개발(R&D)비 중 인문학 연구지원비를 보면 △2003년 6조5000억 원 중 480억 원(0.74%) △2004년 6조9000억 원 중 590억 원(0.86%) △2005년 7조7000억 원 중 556억 원(0.72%) 등으로 열악한 수준이다. 교수들은 인기 분야는 사립대에 넘기고 국립대는 사립대가 꺼리는 기초·순수학문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등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공립인문대학장협의회 윤평현(전남대 교수) 회장은 “학부제와 신자유주의 등으로 인문학 위기가 가속화됐다”면서 “학부제를 없애 학생들이 원하는 전공에 깊이 빠져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대 김영기 인문대학장은 “프랑스처럼 인문학을 집중 육성하는 정책연구소를 만들거나 국공립대만이라도 인문학 육성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자들이 스스로 부르고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남대 최재목(철학) 교수는 “자연과학과 첨단기술 분야와 인문학을 연계시켜 현실 문제에 접근하는 노력을 보여 주는 게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박사 학위는 해외서” 세계화 물결로 우수인재 눈뜨고 뺏겨▼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는 학문의 식민지화다. 1980년대 한국 지식사회는 학문의 토종화를 주창하고 나섰지만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 인문·사회학계가 내세울 만한 보편적 이론의 등장은 여전히 요원하다. 여기에 학문 영역에도 세계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강의가 아니면 우수한 국내 인재를 해외 교수들에게 모두 뺏기는 형편이다. 이에 따라 국내 대학은 학사만 양산한 채 석박사 과정은 아예 해외 대학에 위탁하다시피 하면서 학문적 종속성이 더욱 심화됐다. 이는 주요 대학 인문·사회과학 전공 교수의 국내 박사 비율이 1980년 이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학술진흥재단을 통해 1980년부터 2005년까지 5년 단위로 전국 대학 전임강사 이상 교원들의 국내외 박사학위 비율을 추적한 결과 해외 박사 비율은 25.0%에서 35.5%로 10.5%포인트가 늘었다. 기초 학문이라 할 인문학 전공자의 경우 해외 박사 비율은 1980년 이전 25.1%에서 2001∼2005년 48.0%로 22.9%포인트나 증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명문대 대학원들도 본교 출신의 일급 인재들을 해외로 뺏긴 채 하위권 대학에서 충원하거나 중국과 동남아에서 돈을 주고 연구원들을 데려오는 형편이다.
이는 일본 도쿄(東京)대 교수들 중 90%가량이 국내 박사인 점과 대조를 이룬다. 도쿄대 출신인 양일모(동양철학) 한림대 교수는 “일본에서는 박사과정 2년차 정도에 해외로 나가 언어 연수와 학위 과정을 거치도록 하지만 논문은 국내에서 발표하는 것만 인정하는 학풍이 정착돼 있다”며 “이는 일본 학계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자부심의 발로”라고 설명했다.
한국 인문학계가 자생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결과를 생산하고, 이를 교육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의 복구가 가장 중요하다. 또 석박사 과정을 포함해 학문에 뜻을 둔 학생들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백종현(서양철학) 서울대 교수는 “한국에서는 대학원생들이 신경 쓸 일이 너무 많아서 학문에 전념할 분위기가 만들어지지 않지만 외국에 나가면 5∼6년간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에 내공의 차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권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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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06. 09. 20) 인문학은 학문의 ‘생명수’"
인문학의 위기에 관한 문제가 광범하게 제기되고 있다. 최근 고려대 문과대 교수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결의를 담은 ‘인문학 선언’을 발표했다. 인문학자로서의 반성과 각오가 포함되어 있는 이 선언은 인문학의 중요성을 새롭게 부각시켜 주었다.
돌이켜 보건대, 상당수 대학에서는 인문계 학과를 선택하는 학생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고 지원하는 학생들의 성적 등도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말도 있다. 여러 대학에서는 인문계열 학과 대학원 지망생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음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는 인문계 학과가 폐과되는 사태도 계속되고 있다. 대학 교양강의에서 인문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낮아지며, 실용적 학문이 교양의 주류인 양 주장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문학의 위기 상황에는 다 원인이 있다. 우선 인문학이 처해 왔던 외적인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광복 이후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와 압축성장의 길을 걸어 왔다. 이 과정에서 성장에 급급했던 우리 사회는 너무 실용과 효율만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서 인간 삶의 기본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중요성은 점차 망각되어 갔다.
인문학 위기의 본질이 인문학 자체에 있지 않고 인문학자들의 위기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진단도 가능하다. 분명 인문학과 인문학자는 구별되어야 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는 인문학의 가치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던 인문학자들 때문에 나타난 사태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그 위기의 더 큰 책임 소재를 찾는다면 역시 인문학에 대한 무관심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인문 정신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삶의 의미를 따진다. 인문학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인문학이 빈사상태에 빠지고 인문 정신의 중요성이 망각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눈앞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행동이 인문적 가치에 앞서게 된다면, 사회적 갈등과 충돌의 해소는 요원한 일이 되고 만다. 과학자에게 건강한 인문정신이 결여된다면, 과학이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기보다는 인간과 자연을 황폐화하는 도구로 전락되고 만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우리의 구체적 삶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하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창업자로 세계적 갑부인 빌 게이츠 씨는 어찌 보면 인문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문학이 없었더라면 나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모든 이에게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있다는 말이다.
인문학은 학문의 세계에서 지하수의 수맥과 같다. 사람들은 지하수에서 생명에 필수적인 물을 끌어올려 마신다. 지하수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의 보전과 개발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지하수가 오염되거나 고갈되어 버리면 지상의 생명체도 위협을 받고, 산업 활동마저도 마비되어 버릴 것이다. 인문학이 없이는 다른 학문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발전을 위한 사회의 인식과 국가의 배려가 요청된다. 인문학 분야에 관한 2005년도의 통계를 들여다보면 한숨이 절로 난다. 지난해 연구개발에 관한 정부의 총예산은 7조8000억 원이었다. 그러나 인문학 연구 지원비는 556억 원으로 0.71%에 불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많은 사람이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발 이런 말들이 구두선에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연구 성과가 다른 학문의 발전의 토대가 되고 나아가 국민 모두가 그 인문학의 열매를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조광 고려대 문과대학장·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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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06. 09. 20) "취업 안되는데…" 문학·역사·철학 폐강 속출
한국의 인문학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정부·사회의 무관심과 실용학문의 거센 파고 속에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이 고사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마다 수강생이 없어 폐강되는 강좌도 속출하고 있다. 급기야 교수들이 공동선언을 통해 우리 사회에 호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세계일보는 한국 인문학이 처한 실상과 더불어 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모색하고자 한다.
‘취업률은 바닥권, 취업 후 직무수행에 가장 도움이 안 되고….’ 우리나라 인문학계 출신자들의 현주소다. 인문학만으로 경쟁력이 없다 보니 인문학 관련 학과생이 다른 전공을 함께 이수하는 게 필수처럼 된 지 오래다. 인문계열 학과 졸업 후 취직이 안 되자 교대나 한의대, 법대 등에 진학하려는 ‘늦깎이 재수생’도 많다.
19일 오후 서울 H대학 인문대 도서관. 150여석의 좌석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에 인문학 전공서적을 펴놓고 있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부분 토익·토플책이나 공무원시험 문제집을 펴들고 있었고 전공서적을 보는 소수 학생도 경제학원론과 민법총칙 등과 같은 서적을 읽고 있었다. 이 대학에 따르면 이 대학의 인문대 학생들의 복수전공 비율은 30.6%로 교육대를 제외하고 단과대 중에 가장 높다. 인문대 학생들은 대체로 경영학과 사회과학 계열을 복수전공하기를 가장 선호한다.
서울 Y대의 경우 경영학과를 복수전공하는 학생 399명 중 181명이 인문계열 학생이다. 서울 J대 경영학부 복수전공자 225명 중 78명도 인문계열 전공자들이다. 모 대학 국문학과에 다니는 김용훈(24)씨는 “같은 과 친구들은 학점이 좋은 순서대로 교직 이수나 복수전공으로 눈을 돌리고 일부는 일찌감치 사범대나 경영대 쪽으로 전과한 친구도 많다”며 “경영대 수업은 항상 만원이라 수강신청 매크로(자동입력 기능)까지 등장했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은 아예 인문학 전공을 폐지했다. 2001년 호서대가 철학과를 폐지하고 문화기획과를 신설했고, 2003년 경원대도 역사철학부를 없앴다. 인문학도들의 수난은 졸업 후로도 이어진다. 한국교육개발원이 2005년도 4년제 대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취업실태를 조사한 결과 진학·입대 등을 제외한 순수취업률은 인문계열(어문학 포함)이 53.4%로 자연계열을 제외하고 가장 낮았다. 사학이나 철학 등 순수 인문학 전공자 취업률은 최하위권을 형성했다.
3년 전 명문 사립대 국문과를 졸업한 조모(26·여)씨는 현재 교대에 다시 입학하기 위해 재수 아닌 재수를 하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국문과 졸업생의 경우 원서조차 받아주지 않아 취직이 잘되는 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조씨는 “아동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국문과에 입학했는데 먹고살 길이 막막하다”며 “나 같은 재수생 중에 인문계열 출신이 예상보다 훨씬 많다”고 귀띔했다.(백소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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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06. 09. 20)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해야”
서울대 인문대학장 이태진 교수(국사학과·사진)는 19일 인문학의 위기는 바뀐 교육환경에 맞춰 학자들 스스로 변하는 모습을 보일 때 극복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가의 무관심도 문제지만 ‘그들만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문학계 내부의 잘못도 크다는 것이다.
이 학장은 “우리가 먼저 변해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을 들게 하면 국가도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서울대도 변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대 인문대는 당장 내달부터 공대, 경영대 등 단과대학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한 포럼을 정기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며 일본의 도쿄대, 중국 베이징대와 함께하는 학술회의도 추진하고 있다.
그는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학문인 만큼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면서 “예전엔 다른 단과대에서 인문대 교수들을 불러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앞으로는 우리가 불러들일 것”이라고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인문학에 대한 국가적 무관심에 대해선 “나무에 물을 주는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지원해줘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학장은 “공부를 열심히 해도 나와서 갈 데가 없다면 누가 의욕을 갖겠느냐”면서 “선진국처럼 학교와 국가가 나서 석·박사 과정생에 대한 학비와 생활비 지원, 일자리 모색에 도움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대가 기여한 부분이 크지만 그것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인문계에 대한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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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6. 09. 20) 내주 人文주간… 7개 단체 온·오프서 다채 행사
인문학이 대중 속으로 뛰어든다. ‘열림과 소통의 인문학’이란 기치도 내걸었다. 한국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가 손잡고 25일부터 6일간 온ㆍ오프라인 공간을 넘나들며 펼치는 ‘인문 주간’행사는‘인문학의 위기’를 대중과의 접촉을 통해 정면 돌파하려는 절박한 몸짓이다. 행사를 위해 각 대학 인문대학은 물론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 정부 출연 연구기관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등 대학 부설 연구기관, 그리고 그 동안 일반인 대상 학술 강좌 등으로 인문학 대중화에 힘써 온 재야 연구단체까지 모두 7개 단체가 손을 잡았다.
‘인문학은 고리타분하고 어렵고 딱딱하다’는 편견을 벗어 던지기 위해 세미나 강연 전시 시연 체험ㆍ참여 등 61개의 다양한 행사를 마련했다. 인문학계 전체가 ‘상아탑 안의 인문학’이 아니라 ‘생활 속의 인문학’만이 활로라는 데 뜻을 모은 것이다. 학술진흥재단 관계자는 “인문학의 위기는 연구자 스스로 대중과 소통하기를 꺼려서 생겼다는 자체 반성에서 출발했다”며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장을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규장각은 고문서를 통해 주택을 사고 파는 과정, 고발ㆍ고소 같은 송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등 조선시대 서민들의 일상 생활을 살펴 보는 ‘고문서를 통해 본 생활사’ 강연을 연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과정도 풀어낼 예정이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는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내걸었다. ‘서울 100년,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전시회와 함께 ‘영화 속에 나타난 서울의 이미지’와 같은 이색 강연이 기다린다.
철학아카데미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했다. 플라멩코 춤 마임 행위예술 사이코 드라마를 선보이고 요가 최면술 무속 선(禪) 수행 등 참가자들이 직접 참여하는 기회도 제공한다. 인문학 연구 모임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ㆍ몸ㆍ 언어의 하루’ 등을 주제로 한 영상제와 세미나를 함께 연다. 학술진흥재단과 인문학계는 앞으로 매년 한글날(10월9일)을 전후한 1주일을 공식 ‘인문 주간’으로 정해 인문학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계속 이끌어 갈 계획이다.(박상준기자)
06. 0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