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알게 된 것이지만 '레디앙'의 토요연재-책읽기에 월간 북매거진 <텍스트>의 필진들이 가세를 했다. 지난 11월부터의 일이다. 게스트 필자로 참여했던 잡지를 부분적으로 온라인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이게 '중복' 게재되는 기사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꼭지를 읽다가 어제 인디고와 관련해서 올린 페이퍼와도 연관되는 '인문학 위기'에 관한 기사 세 편을 연달아 옮겨놓는다(글이 뱀 꼬리를 물듯이 이어진 탓이지 나의 계산 탓은 아니다). 필자는 <텍스트>의 권희철 기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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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07. 01. 20) 인문학의 위기? 인문학자의 위기?
지난해 ‘페렐만’이라는 러시아 수학자 이름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수학사의 난제 ‘푸앵카레의 추측’을 푼 뒤 인터넷에 이를 올렸다(*페렐만에 대해서는 나도 페이퍼를 올린 적이 있다). 학계는 응분의 보상을 하려 했으나 모두 거부했다. 최근에는 연구소 일도 그만두고 노모와 함께 은둔해 살고 있다. 이처럼 몇 안 되는 제한된 정보들이 페렐만에 대한 모든 것인데, 그럼에도 페렐만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가 유별난 삶을 살아서일까. 그런 기인의 풍모가 느껴질 만한 존재들을 학계에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런 개인을, 그런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제도와 사회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학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해’라며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비 정신을 촉구해야 하기 때문일까. 황우석은 이런데, 페렐만은 저렇지 않느냐면서.
페렐만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점잖으신 학자분들께선 ‘인문학 위기 이대로 둘 수 없다’며 일갈하고 나섰다. 실상 양치기 소년의 호소에 가깝게 들리기도 했다. 글자깨나 쓴다는 분들이라면 저마다 위기의 징후를 담지하고 분석한 지도 너무 오래된 일이니, ‘죽었다’ ‘위기다’ 소리는 지겹기도 하고 뒷북처럼 느껴져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강정구 교수 강의를 수강한 학생에 대한 재계의 공갈 협박에는 모르쇠로 일관하던 분들, 이건희 철학박사 학위 수여가 무산되자 매체를 빌려 읍소하거나 보직 사퇴를 결행하던 분들, 학생들이 좀 버릇없게 굴었다고 교문 밖으로 영구히 쫓아내신 분들과 이에 침묵으로 눈감아 주던 분들. 그런 분들이 계시기에 ‘인문학 위기’는 ‘인문학자들만의 위기’라는 조롱을 받을 만도 하다.
다시 페렐만으로 돌아오자. 페렐만의 아래와 같은 발언은, 그가 단지 돈 키호테나 세상을 등지고 은둔해 사는 계룡산 도사가 아님을 보여준다. “다수의 수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정직하다고 해도, 정직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횡포’를 그냥 수용하는 순응주의자에 불과하다.”(박노자, 「페렐만이 괴짜라고?」에서 재인용)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학문의 위기, 좁게는 인문학의 위기를 말할 때면,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사리가 밝아 고전을 탐독하는 등의 행위를 수지타산 맞지 않는 것으로 몰아가는 사회를 탓하게 된다. 인문학 위기의 발언은 곧 문명 비판이 된다(싸잡아 다 욕할 수 있는). 좁게는 교육을 비롯한 관련 제도의 허점을 지적할 때도 있다. 넓게는 ‘삶의 무늬를 새기는’ 게 인문학의 본령이라며 그것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기양양한 낙관론과 인문학의 위기는 곧 ‘삶의 위기’라며 비분강개의 목소리를 높이는 비관론이 묘하게 공존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나 어느 하나로도 사태를 충분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페렐만에 대한 상상은 질문 하나를 덧붙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학문의 위기인가, 아니면 학문 권력의 위기인가. 몇 개의 글을 사례로 삼아 인문학 위기의 논의를 따라가 보려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추적은 국지적일 수밖에 없고, 한편으로는 문제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다시 흩뜨려놓는 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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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복간된 『비평』 13호의 한 꼭지(‘인문학과 인간적인 것’)에는 한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김우창과 이어령의 글이 실렸다. 먼저 김우창의 글을 본다. 그는 페렐만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 간다.
“그가(페렐만이) 보여준 것은 간단히 말하여 사람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선택하여 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동시에 거꾸로 우리가 그러한 자유 선택의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하고 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p.94)
옳으신 말씀이다. 학문 차원까지 갈 것 없이, 뭣 하나 제 힘으로 제 의지대로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좁게는 가족의 요구에 등 떠밀려 살아야 하고, 넓게는 세상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조금 더 읽어보자.
“불편한 마음들이 이는 것은 학문 연구가 연구자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데 대한 사실적인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 작은 일들에서 표현되고 있는, 근본적인 상황을 조성하는 오늘의 정세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학문의 자유와 가치의 쇠퇴에 대한 당연한 불행의식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p.95)
김우창의 발언은 자유롭지 못한 개인 이전에 그것을 야기하는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즉,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고 있는가. 오늘의 사회 조건이 어떻기에 페렐만 같은 경우가 우리 사회에서는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흔히 신자유주의를 말한다. 많지는 않지만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한국 현대사 특유의 굴절된 경험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우창의 답은 다르다.
“인간의 자유와 자율적 존재를 위한 여유라는 관점에서 우리 사회는 극히 좁은 공간밖에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단순히 신자유주의 체제보다도 우리의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에 깊이 관계되어 있는 일일 것이다.”(p.98)
‘삶과 사고의 유일 체제적인 성향’이라면,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를 말하려는 것일까. 또는 그런 분위기 아래 도저하게 깔려 있는 거대한 ‘문화의 유산’을 언급하려는 것일까. 따라잡기 쉽지 않은 사색이다. 다만 김우창의 글을 읽으면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그의 근본적인 태도를 보게 된다. 인문학의 위기와 사회 위기는 따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모든 문제를 아우르는 것이 있지 않을까, 독자는 추측하게 되는 것이다. 억측해 보자면, 다양성을 수용할 수 없는 사회 또는 문화의 위기가 곧 인문학의 위기라는 것.
“오늘날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의 장을 펼치게 된 것은 수돗물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벽 뒤에 그리고 땅속에 묻혀 있는 수도관을 통해서 나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인문학의 위기를 외치는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는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에 나온 각종 이익집단의 목소리와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p.85)
이어령 또한 인문학 위기를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자고 권유한다. 물이 말랐는데 다들 모여 수도꼭지만 바라보거나 그것만 고치면 죄다 해결될 것처럼 구는 건 옳은 해법이 아닐 것이다. 이어령에게 인문학이란 깊은 수원(水原)을 탐색케 하는 것이다.
“인문학이란 문사철(文史哲)의 분야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밝히고 깨닫게 하는 학문입니다.”(p.86)
그렇다면 이어령에게 있어 인문학의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의 발언에서 단서를 찾아보자.
“단순하게 말해서 휴머니티라는 말 그대로 인문학의 힘은 시스템을 중시하는 다른 학문과 달리 수리(數理)나 기계가 할 수 없는 공감empathy의 능력을 길러주는 데 큰 역할을 해왔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공감’은 타자에 대한 ‘열림과 소통’의 기능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오늘날과 같이 글로벌화하는 세계 환경 속에서는 절대에 가까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p.88)
굳이 ‘절대’라는 단정적 화법을 쓰면서 ‘글로벌’까지 말해야 하는가 싶지만, 문장의 골자는 ‘공감’에 있음을 주지한다. 현 세태가 공감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므로 인문학의 처지가 땅바닥에 떨어졌다는 것인지, 인문학의 무능으로 개인과 사회의 공감 능력마저 상실되었다는 것인지, 인문학 내에서 서로 공감할 수 없는 언어와 논리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인지, 그 모두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여기서 인문학 위기를 대하는 또 하나의 접근법을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의 문제는 소통의 문제와 관련이 깊다는 것. 김우창이 유일 체제의 문화를 언급했다면 이어령은 인문학(자)가 지녀야 할 태도에 집중한다.
“우리는 그동안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어려운 말을 사용하다가 인문학의 고립과 위기를 자초했는지도 모릅니다.”(p.84)
상식선에 그치는 분석이지만, 그 상식이 무서울 때가 이런 경우일 것이다. 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인문학을 멀리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인문학 고유의 난해한 어법과 문체가 문제의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쉽게 쓰고 말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꽤 오래 전 일이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미 ‘쉬운’ 고전 읽기와 ‘쉬운’ 철학·역사 서적 등이 서가를 잠식했다.
아카데미 안에서는 파리 날리고 하품만 나와도, 바깥에서 열리는 각종 인문학 강좌들은 반응이 뜨겁다. 매체는 항상 인문학 위기와 위의 사례들을 대비하여 설명한다. 그것이 맞다면 인문학 위기는 그저 학계의 위기, 제도의 위기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적어도 출판계와 강단 바깥의 인문학이 건재하다면 인문학 위기의 목소리는 점차 줄어들어야 할 텐데 사태는 그렇지가 않다. 단지 강단만의 위기라고 단정 짓기엔 사태를 호도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인문학의 소통 능력은 해당 인문학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와 같은 것이 아닐까. 소통 문제를 위기의 본질로 삼기보다는 위기의 상태를 점검할 수 있는 유력한 시험이라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 이 논의를 보충할 만한 책 한 권이 있다.('희망의 인문학'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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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07. 01. 20) 모두와의 소통 또는 낮은 곳을 향한 소통
“모든 사람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다양성과 보편성 그리고 옛것과 새것이 항상 공존하는 둥지의 알들이야말로 인문학의 희망입니다.”(p.91)
이어령의 ‘둥지의 알’로 충분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지만, 적어도 소통의 측면에서는 얼 쇼리스가 쓴 『희망의 인문학』이 꽤 적절한 사례가 될 듯싶다. 물론 이어령은 모두와의 소통을 말하지만, 얼 쇼리스는 누구와 소통할 것인지 묻는 데서 차이가 제법 크기는 하다. 얼 쇼리스의 소통은 싸잡아 모두가 아니라 낮은 곳과의 소통이다.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2004년 8월의 일이다. KBS의 <가난한 자의 철학자 얼 쇼리스의 희망수업>이라는 다큐멘터리가 그것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클레멘트 코스 이야기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상당했던 모양이다(‘클레멘트’라 붙여졌지만, 이 말은 야구선수이자 선행의 대명사 ‘로베르토 클레멘테’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 안팎을 살피려 취재한 도중 만난 번역자와 어느 사회복지사 얘기에서도 그 충격적 경험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사례들이다. 책이나 예술 근처에 가지도 못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놀라울 만한 변화.
“1996년 12월, 헨리 존스는 바드대학 흑인학생회의 회장으로 추대됐다. …… 데이비드 이사코프는 자신의 생물학 수업에서 과일파리를 이종 교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여동생 수산나는 그때까지도 화학자의 꿈을 놓지 않고 있었지만, 아주 뛰어난 어느 교수의 수업을 듣고 난 다음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p.265~66)
더 나아가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 가난한 학생들의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책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가난에 대한 통상적인 생각들이 있다. ‘그 사람은 게으를 거야’, ‘타고난 성품이 그렇게 만들었을 거야’ 등 가난의 이데올로기라 불릴 만한 생각부터 적절한 동기 부여와 직업 교육과 알선이 뒤따른다면 빈곤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도 있다. 얼 쇼리스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가난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기존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이해하는 기존 관점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가난에 대한 기존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치더라도, 그런 관점이 대물림되는 가난 속에서 사람들을 구해내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p.24)
가난이 선천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며 일반인과 빈자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직업 교육이나 훈련이 소득의 크기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얼 쇼리스가 생각하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는 비니스라는 재소자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한 것 같냐고 묻는다. 비니스의 대답.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 선생님. 그 애들을 연극이나 박물관, 음악회, 강연회 등에 데리고 다녀주세요. 그러면 그 애들은 그런 곳에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배우게 될 겁니다. …… 그렇게 하면 그 애들은 결코 가난하지 않을 거예요.”(p.168)
이 대화는, 얼 쇼리스가 미국에서 클레멘트 코스를 기획하고 곧장 행동에 옮기게 만든 주요 동기가 되었다고 한다. 얼 쇼리스는 비니스의 언급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읽는다.
“비니스는 고대 고리스에서 정치가 탄생했던 과정과 똑같은 길을 걸어 왔다. 그녀는 성찰적으로 사고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계속된 대화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었는데, 그녀가 말한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은 바로 인문학을 의미했던 것이다. 인문학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서 줄곧 세상 사람들의 성찰적 사고를 가능하도록 해준 근본적인 원천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p.173)
인용문에서 보듯, 얼 쇼리스 생각의 기본 모델은 고대 그리스의 교양과 덕성을 갖춘 시민에 있다. 그런 시민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단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다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고 그가 든 사례들은 이러한 생각을 경험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얼 쇼리스의 실험은 한국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성프란시스대학이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책이 번역되자 언론의 반응도 뜨거웠다. 그런데 “가난 벗어나는 열쇠, 인문학”, “빈자에게 적선 대신 인문학을”과 같은 기사 제목을 보게 되면 책의 내용을 과장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얼 쇼리스 말마따나 인문학 교육이 자기를 성찰하게 하고 삶의 동기를 만든다고 하는 것이야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부富로 직결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이 여전히 배고픈 학문이라는 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이니까. 마음의 부를 말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또 다른 우려 또한 든다. 요컨대 이런 논의는 한편으로는 (그 의도와 달리) 빈곤의 실제와 원인을 은폐하는 효과를 지닌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논지에서 벗어난 것이니 넘어가자. 언론의 과장된 홍보보다 더 심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한국에서 지금 펼쳐지고 있는 클레멘트 교육이 그것이다. 이런 비유를 들자. 빵과 장미가 있다. 세상은 지금까지 가난한 자들에게 줄 빵이 필요하다고 말해 왔다. 그런데 빵이 아니라 장미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장미가 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까지 말한다. 게다가 그것은 ‘경험적으로’ 옳(았)다. 사실상 논리적으로 반박하기 곤란하다. 논리적 판단을 떠나 유의미한 사회적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며 어설픈 논리로 가늠할 수 없는, 책의 표현을 빌자면 ‘클레멘트의 기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의 질문은 가능할 것이다. ‘장미를 주는 것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런 장미가 있기나 한 것인가. 혹여 그 장미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을 성토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와 죽음을 말하는데 한쪽에서는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인문학이라……. 의문에 대한 접근은 두 가지로 나뉜다. 그런 장미는 없다는 것이 하나라면, 또 하나는 ‘낮은 데로 임할 수 없는’ 한국 인문학 자체의 문제이다. '노숙인 다시서기 지원센터'가 주관한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 설립을 위한 실제’ 워크숍 자료집을 보며 우려는 거의 불신이 되었다. ‘성프란시스대학 인문학 과정’에 참가한 저명한 교수들의 강의 요약문은 이랬다(*이 자료는 처음 보는데, '저명한 교수들'답다).
“자기 의식은 자기 확신은 물론 타자로부터의 인정도 필요하다. …… 전자는 자립적 의식으로서의 주인Herr, 후자는 비자립적 의식으로서의 노예Knecht.” “페이디다스는 동시대 사람들로부터 ‘신 그것을 나타냈다’고 할 정도로 칭찬되었는데, 조각의 형태를 통해 그 배후의 정신을 표현하려고 했다.”
이런 논의가, 이런 교육이 어떻게 자기 성찰을 이끌어내고 삶의 의지를 북돋우며 정치적 삶까지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인지 과문한 기자로서는 판단키 어렵다. 다만 적어도 위에서 이어령이 언급했던 ‘공감’의 문제를 상기해 본다면 이런 이야기는 거의 소통 불가능에 가까운 게 아닐까. 장미가 있느냐 없느냐는 논외로 하더라도, 장미를 전달하는 태도가 고압적이다. 게다가 이 장미 전달식 주최 측의 마인드를 알 수 있는 대목에서는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인문학 강의를 위한 강사의 조건은 사회적 지명도, 강의 실력, 노숙인에 대한 애정 등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회적 지명도는 참여자들의 자긍심을 세우기 위해서 중요하다.” 인문학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현실의 인문학은 어떠한지, 인문학이 죽음에 이르렀을 만큼 한심한 작태라면 그 대안적 인문학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도 없는 언사이다. 혹여 이들에게 인문학이란 ‘뽀대 나고’ ‘그럴싸한’ 게 아니던가. 물론 문제는 간단치 않다. 다음과 같은 노숙인 수강생들의 반응을 보자니 ‘환상의’ 허울 좋은 장미도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전달된 셈이니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고, 생활하는 것이 점점 불편해지고, 나 혼자서 생각하는 공간이 없어서 불편하다. 내가 편안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 공간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내가 인문학 과정을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원하는 이상이 높아져서 내가 처한 현실과 맞지 않는다면 그 차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철학 책이 말하는 자기 성찰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그들만의 ‘성찰’.
이 책은 양면적인 문제작이다. 빈곤의 사회적 문제를 환기하고 그 해결책을 달리 상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적어도 한국에서의 인문학 교육을 염두하고 읽노라면 황당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육 예술’이라는 문화예술 관계자 워크숍에서 몇몇 논자들의 지적도 기자의 이런 시선과 맥을 같이 한다.
“클레멘트 과정에 비록 비판적 글쓰기가 있지만, 대부분 과거의 원천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은 확인되어야 합니다. 현재 하부구조 자체를 파고드는 직접성을 피하고 있습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목적은 언젠가는 그 직접성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하고 싶습니다”라는 김지섭의 말이나 “텍스트 중심주의에 있는 아카데미 인문학은 정전 해석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세계와의 대화, 삶과의 대화, 현장과의 대화를 외면하는 인문학자 또는 예술가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인문학적 풍토에서 ‘대화’는 사교에만 필요할 뿐입니다”라는 이광준의 지적이 그렇다.
요컨대 문제는 클레멘트 코스의 한국적 적용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다. 이미 노출된 인문학의 여러 문제들이 한참이나 선행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무엇이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고 진정 무엇이 문제냐는 질문에는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 어렵다. 그저 여러 양상들을 보면서 문제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간단치 않다는 것만 확인하게 된다. 다만 인문학 위기 이전에 인문학에 대한 편견과 이데올로기가 만만치 않게 자리 잡고 있음을 본다.
어쩌면 그러한 편견들이 인문학의 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그것은 한국의 인문학이 만든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장정일의 공부』 서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대답으로 읽힌다.('장정일의 공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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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디앙(07. 01. 20) 중용, 사유도 고민도 없는 허위거나 기만
장정일은 평소 존경받던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의 엉뚱한 말들에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늙으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떤 동기에 의해 사상적 전향이 이루어지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장정일은 그 원인을 잘못된 중용의 태도에서 찾는다. 기계적 중립을 취하려 애쓰다 보면 현실과는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언을 할 수밖에 없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p.5)
그리고 이어 자신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중용이 미덕인 우리 사회의 요구와 압력을 나 역시 오랫동안 내면화해 왔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 모난 사람, 기설을 주장하는 사람, 극단으로 기피받는 인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언제나 ‘중용의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 내가 ‘중용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우리 사회의 가치를 내면화하고자 했기 때문도 맞지만,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렇다. 어떤 사안에서든 그저 중립이나 중용만 취하고 있으면 무지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p.4~5)
솔직하면서도 읽는 이를 뜨끔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심지어 중용의 태도와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조차 장정일의 고백을 듣노라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중용에 젖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장정일의 고백이 날카로운 것은, 중용 비판으로 사회와 문명의 허위를 까발리는, 하나마나한 그럴싸한 이야기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용을 취하려는 태도를 앎(무지)의 문제와 연결한다. 이는 인문학 위기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한국에서 인문학이 잘 안 되는 건 다 이유가 있는데, 뼛속 깊이 스며든 우리의 ‘둥글게 둥글게’ 의식/무의식들 때문이다. 장정일을 응용하자면, ‘중용을 취하고 있으면 인문학의 허세가 드러나지 않을 뿐더러, 원만한 교양의 소유자로까지 떠받들어진다. 인문학의 중용은 인문학의 결여였다.’ 책의 세부 내용은 물론 서문의 주장들과는 거리가 있다. 그저 꼼꼼한 텍스트 읽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다만 장정일은 스스로에게 공부가 필요했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은 그런 공부의 과정 자체란다.
공부하겠다 마음먹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고백은, 인문학에서 커다란 범위를 점하고 있는 문학 입장에선 다소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무게를 지닌다. 허세와 허위에 빠진 철학도 문제라지만, 상서롭기 그지없고 세상에 태평하며 나오는 것마다 문제작 범주에 드는 문학 판의 문제를 생각한다면 말이다.
“내 무지의 근거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상급학교 진학을 하지 않았다는 결점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한때 내가 시인이었다는 사실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시인은 단지 언어를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최상급의 지식인으로 분류되어 턱없는 존경을 받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저 시가 좋아 시를 쓰는 사람일 뿐으로, 열정적인 우표 수집가나 난이 좋아 난을 치는 사람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들의 열정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이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우표 수집가나 난을 치는 사람을 지식인으로 존경할 수 없다. 시인의 참고서지는 오직 시집밖에 없으니, 시인이란 시 말고는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청춘을 그렇게 보냈다.”(p.5~6)
07. 01. 22.
P.S. 개인적으론 기사를 며칠 전에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