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출간된 지젝의 <시차적 관점>(마티, 2009)에 대한 리뷰기사들이 이번주에 올라올 듯한데, 가장 먼저 눈에 띈 고명섭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안 그래도 낮에 도서관에서 책을 좀 읽다가 온 터이다. '시차'(혹은 '시차적 관점')와 함께 핵심적인 키워드는 '변증법적 유물론'이지만, 기사의 타이틀은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고 붙여졌다. 표지에 거꾸로 박힌 레닌 동상과의 조응을 고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겨레(09. 04. 04) 지젝의 주장 “러시아 혁명을 복권하라”
<시차적 관점>은 지은이 슬라보예 지젝이 스스로 ‘대작’이라고 부른 책이다. 한국어판으로 840쪽에 이르는 이 최신작(2006)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까다로운 주체> <부정적인 것인 것과 함께 머물기>에 이은 네 번째 주저의 자리에 놓일 만하다. 그는 이 책에서 앞에 쓴 모든 저작의 문제의식을 종합해 변혁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 보려고 한다. 출판사에서 붙인 한국어판 부제는 ‘현대 철학이 처한 교착 상태를 돌파하려는 지젝의 도전’인데,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그가 찾는 것은 철학적 돌파구라는 형식을 빌린 정치적 돌파구다.
이 책은 지젝의 다른 어떤 책보다 까다로운 책이다. 이 책에 대한 추천글에서 테리 이글턴은 그 까다로움과 관련해 “지젝의 글이 가끔 이해가 안 된다면, 이는 그의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이지 결코 잘난 척해서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다로움은 일차로 이 책의 비체계적 서술에 있다. 지젝은 형식상 3부로 나누어 철학적·과학적·정치적 분석을 하고 있지만, 내용은 서로 겹치고 섞인다. 지젝은 철학·종교·문학·영화·예술, 그리고 온갖 일화와 사례를 동원해 자신의 생각을 풀어 나간다. 그리하여 이 책은 수많은 이야기의 접합으로 이루어진 철학적 콜라주가 된다. 그는 모든 통념·관습·도그마를 분쇄하고자 하고, 더 나아가 도그마에 도전하는 생각들 자체의 맹점을 지적하고 깨뜨리고자 한다. 지젝의 발본적이고 급진적인 사유는 책의 전편에 지뢰처럼 매복해 있다.
이 책의 출발점은 가라타니 고진의 2001년 저작 <트랜스크리틱-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다. 지젝은 가라타니의 책에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주제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시차적 관점>의 서문에서 지젝은 이렇게 쓴다. “가라타니 고진은 <트랜스크리틱>에서 ‘시차적 관점’의 중요한 잠재력에 대해 주장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기여는 여기서 그친다. 지젝은 가라타니가 제시한 ‘시차적 관점’이라는 근본 발상만 수용할 뿐 그의 나머지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가라타니는 그의 책에서 헤겔을 거부하고 칸트를 사유의 거점으로 삼는데, 지젝은 가라타니와는 반대로 칸트를 기각하고 헤겔을 승인한다. 헤겔주의자답게 그는 헤겔의 사유를 갱신하고 진척시킴으로써 오늘날의 정치적 난국에 대한 해결책을 찾으려 한다.
그런 노력의 한 양상이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재사유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패퇴해 철학사의 한 장으로 축소돼 버린 것이야말로 전망 부재의 오늘 현실을 보여 주는 철학적 사례로 이해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패배는 마르크스주의 혁명, 더 구체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궁극적 실패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이 실패로 끝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도 함께 매장된 것이다.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이 퇴출당하고 난 뒤 좌파적 사유에 남은 것이 ‘부정 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이 ‘부정 변증법’은 진정한 혁명을 사고할 수 없다는 치명적 한계를 안고 있다. “부정 변증법은 폭발적인 부정성 및 ‘저항’과 ‘전복’에 관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들과 사랑에 빠졌으나, 정작 그 자신이 기존의 (현실) 질서에 기생하게 되는 일만은 극복할 수 없다.” 부정 변증법만으로는 현실의 극복과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젝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복권을 주장하는데, 그것은 다시 러시아 혁명의 긍정적 핵심을 복권시키는 일과 연결된다.
그렇다고 해서 지젝이 과거로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발상은 러시아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그 근본적 이유를 따져 보고 거기서부터 다시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있다. 그런 사유를 요약한 말이 ‘시차적 관점’이다. 여기서 ‘시차’(視差, parallax)란 천문학에서 쓰이는 용어를 빌려온 것인바, 관찰자의 위치가 바뀜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을 가리킨다. 동일한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주체가 어떤 위치에서 보는냐에 따라 그 대상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 바로 시차이며, 이런 근본적인 차이를 낳는 관점이 ‘시차적 관점’이다.
지젝이 사례로 제시하는 것이 러시아 10월혁명 때 함께했던 혁명가 레닌과 모더니즘 예술가들의 경우다. 화가 말레비치나 시인 마야콥스키 같은 전위예술가들은 혁명 초기에 열광적으로 레닌의 혁명을 찬양했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1920년대 이후, 특히 스탈린 시대에 모두 제거되거나 좌절하고 말았다. 이것은 스탈린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스탈린에 앞서 레닌과 전위예술가들 사이에 있었던 근본적인 ‘시차적 관점’의 결과라는 게 지젝의 주장이다. 레닌이 좋아한 것은 고전 예술이었다. 그는 결코 전위예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전위예술가들은 낭만적인 혁명 열정은 좋아했지만, 그 뒤의 고통스러운 시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일한 사태에 대한 이 다른 시차를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혁명을 다시 사유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라고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그런 생각에 대한 아주 긴 설명이다.(고명섭 기자)
09. 04. 03.